[사무엘상 8:10-18] 우리는 왜 통일을 기도하는가 – 1981년 6월 28일, 김상근 목사

우리는 왜 통일을 기도하는가

1981년 6월 28일 / 사무엘상 8장 10-18절

김상근 목사


[말씀을 향한 물음]

우리는 세계의 비극적인 나라가 되어 있다. 제 민족끼리 아직도 금을 그어 놓고 서로 욕하고 죽이는 비극의 나라가 한반도에 있다. 이 비극을 극복하기 위해서인지 교회마다 교인마다 통일을 기원한다. 통일은 우리의 기도 제목이 될 수 있는가? 기도의 내용은 어떠해야 하겠는가?


[슬라이드]











[설교 전문]

지난 주간에 우리는 6ㆍ25동란 31주년을 보냈다. 대통령은 남북한의 최고 통치자가 만날 장소, 시간, 의제까지 북쪽에서 결정해도 좋으니 만나서 통일을 진전시키자는 소위 6ㆍ5 제의를 했다. 그것을 전후하여 전국적으로 궐기대회를 했고 이곳 저곳 기도원들은 6ㆍ25 상기 대부홍회들을 개최하였다. 발표대로 한다면 서울의 궐기대회에 200만이 모였고 각 지역에서도 수십 만이 모였으며 부흥회에 운집한 인원도 상당했다는 것이다.

한국교회, 우리는 왜 통일을 기도하는 것인가를 냉철히 분석해 보아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궐기대회에 나가는 사람들은 왜 나갔으며, 나가서 목소리를 합하는 것의 결과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 교회에서는 통일에 대한 기도가 없는 편이다. 기도를 하지 않는 것은 또 왜이며 좋은 일인가는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31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서로 욕이나 하는 이 못난 꼴을 벗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래야 한다. 형제들이 31년이 지나도록 서로 속이고 죽이려 한다면 그 집안은 이미 망한 집안이기 때문이다. 38선은 강대국들이 그어 놓았다. 그리고 우리는 강대국들의 만행을 섭섭해 한다. 이것을 내놓고 비난조차 못하는 우리의 현실이 슬프기도 하지만 그러나 다른 놈들이 갈라 놓았다고 제 형제끼리 31년을 등지고 사는 지지리도 못난 우리 자신을 이제는 극복해야 하겠다. 지금 서두에서 다른 논리적 이유를 댈 여유가 없다.

그 동안 수많은 남북통일 기도회가 있었으나 천편일률적으로 김일성을 회개시켜 주십사 하는 기도이거나 남침야욕을 버리게 해달라는 기도일 뿐이었다. 지난 24일에 있었던 여의도 광장 궐기대회에서 궐기사를 했던 어떤 목사님도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신문에 보도된 대로 하면 “북괴는 이제라도 민족적 양심으로 되돌아와 무모한 남침활동을 일체 중단하고 평화적 통일을 향한 민족의 염원에 따라 전 대통령이 제의한 6ㆍ5 평화제의를 수락해 이 땅에서 무력이 아닌 평화적 방법으로 동족끼리 함께 겨레의 재결합과 평화통일을 의논하는 대화의 광장에 성의껏 나오라”는 것이었다. 전 대통령의 대변인 노릇 이상이 아니라는 점에서 기독교 목사의 궐기사 같지 않다. 체제의 허락과 결재를 이미 받은 말은 목사가 아니라도 정치인이나 기업인이나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다.

그 동안 기도회도 많았고 심지어 궐기대회에 나가 김일성 규탄궐기사까지 낭독하지만 그 교회에 민족의 비극을 극복해야 하겠다는 의지와 논리가 없었고 따라서 교회는 민족분단 극복에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던 것이 분명하다. 왜 그랬을까?

첫째로, 통일의 문제는 정치문제지 종교문제가 아니라는 굳어진 사상 때문이다. 국제관계라든지 남북 대결에서 얻고, 잃는 여러 요인들은 교회와 같은 비전문기관이 알 수 있을 리가 없으므로 전문가들에게 맡겨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런 태도가 우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한다는 사람들에게도 있다. 정말 통일의 문제는 정치문제로만 취급되어야 하는 것인가?

둘째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에 북한선교회라는 단체가 있다. 교회는 어차피 정치를 모르니 통일된 후에 전도나 하자는 식으로 물러 앉고 말았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말이 북한 선교이지 통일이 되리라는 기대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헛수작들임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그것을 빙자하여 북한 선교헌금을 걷고 그 돈으로 자동차를 타고 다니고 차에 북한선교회라 써 붙이고 다니지만 정부가 통일을 한 후에나 활동을 개시하겠다는 것이고 보면 자동차까지 타고 바삐 돌아다닐 일이 없다고 생각된다.

셋째로, 통일에 대한 역대 정권의 태도가 너무나 굳어져 있다. 그때그때 정부가 말하는 것 이외의 것을 일체 논의치 못하게 하고 있다. 만약 다른 토론을 하면 반공법, 국가보안법으로 다스린다. 최근 통일꾼이니 평화통일자문위원회니 하는 전문기관을 만들고 있지만 그들 역시 정부가 만든 통일논리에 찬성을 표하기 위해서만 모인 것은 분명하다. 정부가 발표한 것 외의 통일 논의는 실제로 일체 허용이 되어 있지 않다. 교회의 기도회가 모인다면 정부의 통일론을 찬성하기 위해 모인다. 정부는 국론통일이라는 명목 아래 통일 논의를 정부가 독점하려 하고 그외의 단체, 심지어 교회까지도 그 논의를 하지 못하게 하는 상황이다. 대체로 이러한 이유로 교회는 통일에 완전히 뒷전 노릇이나 하게 된 것 아닌가 한다. 이래도 좋은 것인가? 정말 정치인들, 특히 집권자만이 논의하도록 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기독교에는 통일논리가 없는 것인가?

우리의 역사는 공교롭게도 이스라엘의 역사와 유사한 점이 많다. 성서의 줄거리를 나는 이 통일논리로 정리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스라엘은 왕국 건립 이전까지는 말하자면 부족동맹 형식의 나라였다. 왕도 없고 지배체제도 없이 야훼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던 시대였다. 말하자면 이때 한 나라로 뭉쳐 있지는 않았으나 히브리 민족으로서 신앙을 기반으로 통일성을 가졌고 서로를 지키고 안보하면서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 후 이스라엘 장로들은 왕을 세워서 히브리 민족을 통일해야 하겠다는 것이다. 예언자 사무엘에게 와서 다른 나라들처럼 왕을 세우자고 한다. 그래서 사무엘은 야훼께 기도드린다. 야훼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백성이 하는 말을 그대로 들어 주어라. 그들은 너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야훼) 왕으로모시기 싫어서 나를 배척하는 것이다”(삼상 8:7).

여기서 중요한 지적은 왕을 세워 히브리 민족을 통일하자, 통일된 왕국을 세우자 하는데 이스라엘은 왕이 없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왕이었다. 하나님의 통치가 있었다. 이미 통일되어 있었다. 사사시대는 바로 하나님이 왕이었던 하나님 통치의 현실이었다. 더 거슬러 간다면 이집트를 떠나 광야를 유랑하던 때로부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과 직접 계약을 맺고 또 법률을 제정하시고 모든 자연의 위협, 이민족의 침공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직접 보호하여 왔었다. 이민족의 침공 같은 사건이 생기면 위대한 민간 지도자가 나타나 그 위기를 타개했고 곧 다시 자기 부족으로 돌아가곤 하였다. 물론 상설적인 왕이나 지배자도 없었고 군대조직도 갖고 있지 않았다. 이 같은 전통은 하나님만이 이스라엘을 통치해야 한다는 신념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간의 이 같은 관계, 이 전통을 ‘출애굽 전통’이라 부르는데 이 전통이 참다운 관계라는 입장에서 출애굽 전통을 역사에 이으려고 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사무엘을 비롯하여 수많은 예언자, 예수는 이 전통으로 이스라엘을 통일하려던 사람들이었다.

당시의 장로들은 가나안 지방의 여러 나라처럼 왕권을 수립해야 통일을 기할 수 있다고 왕국 수립을 요청하고 나왔던 것이다.

“다른 모든 나라들처럼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해 주십시오”(삼상 8:5).

“그래야 우리도 다른 나라처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를 다스려 줄 왕,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를 이끌고 나가 싸워 줄 왕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8:20).

왕권을 중심으로 히브리 민족의 통일을 기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왕권의 전통’이다.

사무엘은 왕국을 세우게 되면 기필코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생기고 상설 군인을 만들어 백성들을 정권유지의 제물로 삼게 될 것이며 노동, 경제적 착취와 인권유린이 생기고 너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주권은 왕에게 빼앗기고 만다고 경고한다. 왕권적 통일 논리의 귀결은 주권, 제 운명을 제가 스스로 결정지어 나갈 수 있느냐 하는 주권, 이 주권이 왕에게 돌아가고 만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통치의 여유를 봉쇄해버리는 것이다. 그 때에야 급기야 반체제 운동을 펴도 때는 이미 늦게 된다는 것이 사무엘의 경고였다.

이 두 전통, 히브리 민족을 통일함에 있어서 하나님 야훼의 통치로 해야 한다는 ‘출애굽 전통’ 과 왕권을 중심으로 해야 한다는 ‘왕권적 전통’이 복음서의 전 기록 속에서 갈등하고 있다. 왕권의 중심은 예루살렘이요, 출애굽 전통의 중심지는 갈릴리, 사마리아다. 예수를 비웃던 예루살렘 사람들은 “갈릴리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라고 한다. 그러나 예수는 갈릴리에서 활동한다. 종래는 예루살렘을 무너뜨린다. 그곳의 왕권적인 지배자들의 지배체제에 도전한다. 이유는 그 왕권적인 체제가 백성들의 주권을 빼앗아 버렸기 때문이다.

성서에 나타나는 예언자들은 하나같이 출애굽 전통을 계승하고 왕권에 도전하며 왕국을 비판했다. 그들 예언자들은 왕의 입장이나 왕권을 비호하려 하지 않고 피지배자인 백성, 노동경제의 피착취자, 인권을 유린당한 장본인들, 그들의 주권을 위하여 투쟁하였다. 나라의 근거는 백성에게 있어야 하며 나라의 운명은 백성 스스로가 결정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백성 스스로가 결정해 나간다는 말은 하나님 스스로가 주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지금까지 긴 말씀을 드렸지만 요컨대 히브리 민족의 통일 작업은, 하나님이 통일의 기반이 되느냐, 즉 국민이 통일의 주체가 되느냐 아니면 권력자의 향도에 따라 통일이 되어야 하느냐 하는 두 전통의 긴 싸움이었다는 말이다. 모세, 사무엘, 예언자들,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지는 이들은 하나님의 통치, 백성에게 주권이 있는 통일을 추구했었다는 말이다.

이제는 우리가 스스로 통일의 주체자가 되어, 기도하고 논의하고 추진하는 세력이 되어야 한다. 백성이 스스로 주체자가 되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이것을 기독교 영역 밖의 것이라 여겨버린다면 기독교 신앙을 역사의 바탕으로 깔아야 하겠다는 것은 한낱 감상적 구호가 되고 말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것을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라 한다면 하나님의 주권을 내가 가로막아 서는 일이 되고 만다. 하나님의 주권은 우리 백성을 통하여 행사되기 때문이다. 교회가 6ㆍ25를 아프고 수치스러운 일로 여기고 있다면 이제라도 기독교적 신앙의 바른 전통을 가지고 역사의 복판에 서야 한다. 기독교는 사후 약방문이나 내놓는 체제 추종단체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좇아 역사를 창조해 나가는 역사의 종교다. 민족을 구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의 행복의 바탕을 이루는 종교다.


[회상 노트] 6ㆍ25와 교회

민족의 통일을 정권유지의 수단으로 악용하는 것을 규탄했다. 아직까지 통일논의는 국민들 사이에서는 금기였다. 자칫 국가보안법에 저촉되는 감옥살이를 하게 될 때였다.

전두환 대통령은 민족통일을 주도할 도덕적 근거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광주의 대학살, 삼청교육대, 온갖 숙청으로 손 가득히 피를 담고 있었다. 그가 민족통일의 성업에 끼어드는 것은 순전히 정략이었다.

그런데 교회지도자들이 또 때를 만난 것이다. 궐기 대회를 하고 6ㆍ25 상기 대부흥회를 한다. 김일성은 회개하고 전두환 대통령의 정상회담 제의를 즉각 수락하라는 것이 메시지였다. 구역질이 났다. 물론 김일성에 대한 적개심이 있었을 수 있다. 그것은 나에게도 강하게 있다. 그러나 권력에의 아부가 그들의 본질이다. 정권이 반공하면 반공할 것이고 정권이 화해를 말하면 또 화해를 목소리 높여 주장할 것이다.

교회지도자들은 북한선교회라는 것을 만들었다. 몽매한 교인들의 속주머니를 털어 기금을 마련하고 활동비로 쓰고 자동차도 산다. 서울 시내를 누비고 다닌다. 교인들이 그것을 용납하니 거짓 지도자들이 활개를 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전두환의 내심을 폭로해야 했다. 분단극복의 의지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전두환과의 싸움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교인들이 역사의 주체로 서야 하겠기 때문이었다. 전두환의 통일 몸짓에 동의를 보내서도 안 된다. 정권적 차원에서 만의 하나 통일이 된다면 그것은 우리 겨레 모두에게 재앙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민이, 남과 북의 민이 주체가 되어서 통일을 당기게 되어야 하겠기 때문이었다.

우리 남쪽에 공산주의의 노선에 동조하게 될 취약점이 있어서는 안 된다. 빈부의 격차가 현저하고, 공동체의식이 무너진 곳에 공산주의의 평등과 정의 주장이 스며들게 되어 있다.

공산주의를 극복하는 길은 규탄대회와 적개심 고취에 있지 않다. 평등과 사회 정의를 세우는 데 있다. 교회가 가난한 자 편에 서기를 꺼리고 고난받는 자와 일치하기를 두려워하는 한 공산주의는 우리에게 위협이 아닐 수 없다.

전두환의 속임수에 놀아나는 것이 되기에 우리는 통일기도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해야 한다. 바른 기도를 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아끼고 사랑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내야 한다.

“성 밖으로 끌려 갔던 이들”은 원폭피해자들을 위한 기도회에서의 설교이다. 그들 피해자들에게 우리는 한없는 빚을 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