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통치
1981년 7월 4일 / 사무엘상 10장 17-19, 25-27절(마 3:20-30)
김상근 목사
[말씀을 향한 물음]
교회는 정치단체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통일문제는 중요한 신앙적 투쟁의 문제다. 오늘 우리 역사 속에 살면서 교회, 교인이 민족 통일의 문제를 제쳐 놓을 수는 결코 없다. 우리의 신앙은 왜 민족 통일 문제와 관련을 가져야 하는가? 우리의 신앙은 내가 구원받게 되는 것으로 족한 것일까?
[슬라이드]
[설교 전문]
지난 주일 나는 퍽 난해하고 복잡한 신학적 증언을 했다.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하는 히브리 민족을 통일하기 위한 노력들을 살펴보았다. 마치 우리 민족이 한민족(韓民族)이면서 이곳 한반도 여기 저기에 흩어져 살고 있었던 때의 형편과 같았다. 그들은 처음 부족들끼리 동맹을 맺고 살았고 부족동맹 형태로 출애굽하여 가나안에서 서로 공존하며 살았다. 이것을 출애굽 전통이라 한다.
그들은 소위 출애굽 전통에 입각하여 자기 민족을 통일하고 있었다. 출애굽 전통을 이어 통일을 하려 했다는 말은 하나님이 직접 히브리 민족을 통치하는 상태를 말하고, 그것은 민족을 위한 모든 결정권이 백성에게 있게 되는 것을 뜻한다. 무엇이나 백성 스스로가 결정하고 추진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을 주권과 권력이 백성에게 있다는 주권재민(主權在民)이라 말할 수 있고 그와 같은 상태가 곧 하나님이 통치하실 수 있는 구조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해방되는 그 굉장한 사건도 왕이 있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가나안에 도착한 그들이 부족동맹 형식으로 공존하고 있을 때 민족의 위기가 밀려오면 판관, 즉 사사가 나타나 구하곤 했다. 이것이 곧 민족 통일의 구체적 현실이었다.
그러나 가나안에 들어온 후 히브리 민족의 장로들은 왕권을 세워 군사력을 길러서 민족을 통일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끝내 왕국을 건설한다. 그런데 왕국이라는 것이 세워지고 그것이 하나의 권력구조를 이루면 사실 백성은 왕의 피지배자가 되고, 주권과 권력은 백성에게 있게 되지 않고 왕에게 있게 된다는 것을 그때 벌써 사무엘은 경고하였다.
왕을 세워달라는 집요한 요구에 사무엘은 미스바라는 광장에 백성들을 모아 놓고 다시 한번 출애굽 전통에 서줄 것을 간청한다. ‘이집트에서 너희를 끌어내신 분이 누구며, 너희를 못살게 구는 모든 나라의 손아귀에서 구하여 주신 분이 누구냐?’ ‘왕권이 있어서 그랬었느냐?’ ‘너희 스스로, 백성 스스로가 좌절하기도 하고 일어서기도 하면서 여기까지 온 것 아니냐?’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하신 이는 야훼 하나님이 아니냐?’ ‘그런데도 오늘에 와서 어려움이나 괴로움을 당할 때마다 하나님을 저버리고 안 되겠다, 왕을 세워달라 하니 이게 될 말이냐?’ 이런 것이 사무엘의 간청이었다.
그러나 사울이 왕으로 세움을 받는다. 그에게 기대를 두고 따르는 자도 있었고 “이 친구가 어떻게 우리를 구할 수 있을까?”고 조소하던 사람도 있었다고 오늘 본문에 기록하고 있다. 요컨대 어떤 권력이든지 그 권력은 결국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존재하게 되고 백성은 언제나 지배를 받게 되며 백성의 권리는 지배자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 이스라엘은 그랬었고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제사장, 바리새인, 율법학자 등 지배계층의 기업인과 돈 바꾸어 주는 곳, 비둘기 등 제물 판매업소를 가차없이 파괴하신 것도 왕권적 구조에 대한 도전으로 보아야 한다.
예수는 언제나 예루살렘을 싫어하셨다. 이유는 예루살렘은 왕권적 구조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또 예수를 정신병자, 마귀들린 사람으로 몰아친 율법학자들은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사람들로 적시되고 있다(막 3:20). 율법과 관련해서 시비를 걸어온 사람에 대하여도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 몇 사람이”라고 예루살렘을 예수와 대치시켜 놓고 있다(막 7:1).
하지만 히브리 민족은 기어코 왕국을 건설한다. 다윗 시대에 이르러서는 막강한 군사력을 갖는다. 그 군사적 힘으로 이스라엘을 통일하고 나아가 주변 국가까지도 정복한다. 이것을 보면 역시 왕권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 민족을 통일하고 번영하는 지름길 같다. 또 막강한 군사력을 갖는 것이 통일의 기선을 잡는 것이요 그것 없이는 결코 아무것도 해낼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렇게 하여 통일한 왕국은 불과 79년을 유지했을 뿐 다시 분열되고 만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도 남북으로 분열되어 있는 처지에서, 히브리 민족은 왜 분열될 수밖에 없었던가 하는 것을 보아내야 한다. 그것도 정치이론으로가 아니라 성서 기자의 가치와 눈을 통하여 분열의 이유를 보아내야 한다. 성서는 결코 꿈 같은 이야기 책, 도덕론이나 금언집을 모아 놓은 책이 아니다. 그런 부분이 없지 않으나 주류는 역시 그 구체적 역사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밝히고 있는 것이 성서이다. 히브리 민족의 역사와 관련이 없는 성서는 생각할 수가 없다. 오늘 우리가, 역시 우리의 역사, 우리의 현실과 될 수 있으면 관련 없는 기독교를 찾고자 한다면 그것은 결국 기독교 아닌 다른 그 무엇에 이르고 말 것이다.
하여튼, 성서 기자가 보고 있는 히브리 민족의 분단 역사의 주된 이유는 왕들에게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열왕기상 12장 이하의 분단 역사는 왕권이 갖는 권력 야욕이 민족 분열의 중요한 이유임을 밝힌다. 권력 야욕이 결국 통일 국가를 유지하게 하지 않는다. 권력 야욕은 분단의 원인이요 통일의 적이다. 또 하나, 통일과 분열의 이유는 힘이면 된다는 무력 절대론이다. 다윗이 길러 놓은 무력, 그가 통일하면서 저질러 놓은 무력에 의한 무자비한 살생 - 그것은 잠시 히브리 민족을 통일했었으나, 역시 거죽의 통일이었고 종래는 분단의 이유가 되었다. 사울의 친척 하나가 다윗에게 대든 말 속에 무력에 의한 통일은 또 다른 분단의 시작이라는 사실이 드러나 있다.
“꺼져라! 이 살인자야, 꺼져라! 이 불한당 같은 놈아, 사울 일족을 죽이고 나라를 빼앗은 놈, 그 원수를 갚으시려고 ……. 이 살인자야, 네가 이제 죄없는 사람 죽인 죄를 받는 줄이나 알아라”(삼하 16:8).
뿐만 아니라 히브리 민족이 다시 분단되는 결정적인 역할은 역시 군대들이 한다. 성서가 정치 서적도 아닌데 이 같은 분단 역사를 쓰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왕에 의한 통일의 추진과 무자비한 군사력에 의한 통일은 결국 성공할 수 없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임을 밝히는 것이다. 왕권에 통일 국가 건설을 맡길 수 없고 더더구나 무력에 의한 정의의 실현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힘들고 어렵더라도 나라의 주도권이 백성에게 있게 해야 한다. 즉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될 수 있게 되어야 한다. 힘에 의하여 나라를 어거하기보다는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법도임을 성서는 보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우리 나라의 형편도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남북 분단상태로 36년을 지내 오면서 헤아릴 수 없는 아픔과 고통, 낭비와 어리석은 경쟁을 해오고 있다. 북에서는 북대로, 남에서는 남대로 서로를 의식하여 엄청난 사람들을 사상적인 이유로 죽이고 옥에 가두어야만 했고 지금도 그런 실정이다. 정치적 격변이 있을 때마다 그 명분으로 ‘북이 호시탐탐 남침을 꾀하고 있는 마당에’ 라고 운운하여 왔다. 북도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최근 김일성이 자기 아들 김정일을 후계자로 삼으려 한다 하여 떠들썩한데 아마 그들도 ‘남이 호시탐탐 북침을 꾀하고 있는 마당에’ 등을 운운할 것이다.
한 민족이면서 남보다 더 미워하게 되었다. 일본이 우리에게 저지른 죄악에 대하여는 너그러울 수 있는데 북한의 동포는 용납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소위 민족적인 동질성이 말살되려는 찰라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서로 군사 경쟁을 하다보니 경제에 타격을 크게 받지 않을 수 없다. 국방비, 쉽게 말하면 이북을 막고 그보다 군사력을 우위에 두기 위하여 국가 전예산의 1/3을 쓰고 있다. 이북은 더 쓸지도 모르겠다. 만약 우리가 이 돈만 절약할 수 있다면 …… . 외국에 주는 이자가 1979년에 14억 불이라 하여 놀라 자빠질 뻔하였다. 그런데 1년이 지나고 보니 배에 가까운 25억 불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후 1년이 지난 올해(1981년)는 얼마인가? 35억 불이다(2조 4천 5백억 원).
현재 우리는 305억 불(21조 3천 5백억 원)의 외국 빚을 지고 있다. 올해 갚아야 할 외채 원리금이 53억 불(3조 7천 1백억 원)이란다. 과연 이 경제 난국을 극복해 낼 수 있을까? 이북은 오죽하겠는가? 왜인가? 그 주 원인은 남북 분단이다.
우리가 기독교의 신앙에 의하여 살 수 있는 나라, 양심과 정의의 나라를 이루고 이 경제 난국을 극복하는 길은 분단을 이겨내고 통일을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 그 통일을 왕권에 맡겨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히브리 민족의 경우, 분단이 왕권의 권력욕 때문이었음을 앞에 지적했지만 우리의 경우도 그랬다. 설사 해방 당시 강대국들이 38도 선에 군사분계선을 그어 놓았다 하더라도 그것을 영구 분단의 국경처럼 기정 사실화한 것은 당시의 지도자이다. 북의 김일성, 남의 이승만이 단독 정부를 세우고 수괴가 되고자 하는 권력욕만 자제할 수 있었더라면 38선은 없앨 수 있었다. 그러나 남ㆍ북 모두 잘라진 몸뚱이지만 거기서 권력을 잡고자 했던 저 권력욕이 히브리 민족을 분단으로 몰아 넣었던 것처럼 우리 한민족을 36년의 분단 역사 속으로 몰아 넣은 것이다.
아니, 설령 정치 지도자들은 권력욕의 노예가 되었다 하더라도 국민이 깨어 그들의 장단에 춤을 추지 않고 쐐기를 박았더라면 민족 분단의 비극은 얼마든지 막아질 수 있었다. 국민 스스로 우리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기를 너무 일찍 포기하고 한 사람의 지도자에게 나라의 운명을 맡겨 버린 결과가 오늘의 비극의 원인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구약성서에서 지적하고 있는 왕권 중심적인 통일을 열망하고 하나님의 통치의 여지를 스스로 포기함으로 분단의 비극 속에 빠졌던 것이다. 그리고 또 단독 정부를 세운 후 어떻게 했나? 서로 무력 통일을 호언했다. 북은 6ㆍ25라는 무력 행사를 자행하여 우리 민족사상 최대의 비극을 자초했다. 무력에 의한 통일은 통일일 수 없다. 다윗의 무력 통일이 결국 민족 분단의 계기가 되었던 것처럼 무력으로 통일될 수는 없다.
여기에 나는 교회의 커다란 민족적 사명이 있다고 본다. 그것은 이제 이 민족이 통일되고 모든 민족적인 비극을 극복하게 되는 데 국민이 주도자가 되게 하는 일이다. 어느 누구도 감히 통일을 정부에 맡기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제까지 보아온 것처럼 그래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될 수 있도록 국민이 진정으로 토론하고 연구하여 주도자가 될 수 있게 되어야 하며, 이 일의 산파는 교회이어야 한다. 이 책임을 교회는 훗날 추궁받게 될 것이다. 여러분이 통일의 주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왕권적 통일은 또 다른 비극의 출발이다. 이제 우리가 통일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나라의 주인은 바로 우리라는 의식을 여기서 증대해 가야 한다.
통일의 길은 어디에 있는가? 작은 하나의 길이 있다면 공산주의가 내세우는 주의, 주장을 회피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그것을 우리가 우리 안에서 충족시켜 버리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공산주의는 가난한 자의 천국이라고 하지만 가난한 자를 위한다면 기독교 이상의 교리를 가진 주의나 사상이 없다. 인민 해방운동이라 하지만 해방의 전문가는 예수고 해방을 업으로 삼는 곳이 교회다.
교회가 본래 제 할 일을 해야 한다. 우리의 자세가 통일에 연관된다는 이 사실을 깨닫자. 이제 우리의 통일을 무력에 의존시켜서는 안 된다. 가난한 자를 사랑하는 구조, 약자와 함께 사는 사회, 모든 억압받는 자를 위한 해방운동을 하지 못한 죄를 뉘우쳐야 한다. 교회가 해방운동을 일으켜야 한다. 이것이 교회의 의무요 책임이다. 그러면 우리가 공산주의를 이길 수 있다. 백성을 얻을 수 있다.
이 때가 바로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되는 때이다. 교회의 이 노력이 없다면 왕권은 통일문제를 전유물처럼 누릴 것이고 남북간의 무력 경쟁은 기어코 이 나라를 돌이킬 수 없는 위기로 몰아 넣고 말 것이다.
우리가 눈을 뜨자. 우리의 신앙의 폭을 크게 하자. 하나님의 주권이 이 땅을 지배하게 하자. 강대국들도 우리의 자주성 앞에 물러서고 말 것이다.
[회상 노트] 6ㆍ25와 교회
민족의 통일을 정권유지의 수단으로 악용하는 것을 규탄했다. 아직까지 통일논의는 국민들 사이에서는 금기였다. 자칫 국가보안법에 저촉되는 감옥살이를 하게 될 때였다.
전두환 대통령은 민족통일을 주도할 도덕적 근거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광주의 대학살, 삼청교육대, 온갖 숙청으로 손 가득히 피를 담고 있었다. 그가 민족통일의 성업에 끼어드는 것은 순전히 정략이었다.
그런데 교회지도자들이 또 때를 만난 것이다. 궐기 대회를 하고 6ㆍ25 상기 대부흥회를 한다. 김일성은 회개하고 전두환 대통령의 정상회담 제의를 즉각 수락하라는 것이 메시지였다. 구역질이 났다. 물론 김일성에 대한 적개심이 있었을 수 있다. 그것은 나에게도 강하게 있다. 그러나 권력에의 아부가 그들의 본질이다. 정권이 반공하면 반공할 것이고 정권이 화해를 말하면 또 화해를 목소리 높여 주장할 것이다.
교회지도자들은 북한선교회라는 것을 만들었다. 몽매한 교인들의 속주머니를 털어 기금을 마련하고 활동비로 쓰고 자동차도 산다. 서울 시내를 누비고 다닌다. 교인들이 그것을 용납하니 거짓 지도자들이 활개를 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전두환의 내심을 폭로해야 했다. 분단극복의 의지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전두환과의 싸움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교인들이 역사의 주체로 서야 하겠기 때문이었다. 전두환의 통일 몸짓에 동의를 보내서도 안 된다. 정권적 차원에서 만의 하나 통일이 된다면 그것은 우리 겨레 모두에게 재앙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민이, 남과 북의 민이 주체가 되어서 통일을 당기게 되어야 하겠기 때문이었다.
우리 남쪽에 공산주의의 노선에 동조하게 될 취약점이 있어서는 안 된다. 빈부의 격차가 현저하고, 공동체의식이 무너진 곳에 공산주의의 평등과 정의 주장이 스며들게 되어 있다.
공산주의를 극복하는 길은 규탄대회와 적개심 고취에 있지 않다. 평등과 사회 정의를 세우는 데 있다. 교회가 가난한 자 편에 서기를 꺼리고 고난받는 자와 일치하기를 두려워하는 한 공산주의는 우리에게 위협이 아닐 수 없다.
전두환의 속임수에 놀아나는 것이 되기에 우리는 통일기도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해야 한다. 바른 기도를 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아끼고 사랑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내야 한다.
“성 밖으로 끌려 갔던 이들”은 원폭피해자들을 위한 기도회에서의 설교이다. 그들 피해자들에게 우리는 한없는 빚을 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