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11:1-9] 절망의 산에서 희망의 돌을 - 1984년 1월 1일, 김상근 목사

절망의 산에서 희망의 돌을

이사야 11장 1-9절 / 1984년 1월 1일 / 수도교회


[회상 노트]

총회 일이 분주해지고, 주일에는 수도교회 아닌 다른 지교회를 살펴야 했다. 더 이상 주제 설교를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설교를 도울 수 없게 되어야 수도교회가 새 담임 목사를 청빙하는 일에 열심을 낼 수 있게 될 것이라는 판단도 있었다. 그러나 매 달 첫 주일 설교를 맡아 달라는 요청조차 거절할 수 없어서 그리 약속했다. 그래도 그 약속도 올해까지만 할 생각이었다.

드문드문 하는 설교지만 주제는 있었다. 무엇이 진실한 기독교인의 삶인가 하는 것이다.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겠다고 하면서 기독교의 핵심에는 접근하지 않으려는 모순이 안타까웠다.

새해 1월 1일이 주일이었다. 설교자로서 고민이 있었다. 바로 한 주전 성탄절에도 무겁고 힘든 설교를 했었는데 새해 설교까지 또 그래야 하는가 하는 것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리하기로 했다. 민중의 현실이 여전히 처절했기 때문이었다. 사회 현실도 폭압적이기는 여전했다.

지난해에 KAL기가 동해상에서 러시아에 의해 격추를 당한 사건을 비롯하여 아픈 민족의 여러 현실이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이 교과서에 나타나 있는 통일문제를 분석한 것이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이 되었으니 그냥 편안하게 새해를 맞을 수가 없었다.

이런 현실 가운데서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새해의 전망도 어둡고 무거웠다. 절망이 우리 앞에 켜켜이 쌓여 있었다. 우리가 과연 이 모든 절망에도 불구하고, 그 절망 속에서 희망의 돌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이스라엘 민족이 그랬던 것처럼, 마틴 루터 킹 목사가 그랬던 것처럼 야훼 신앙의 힘으로 절대 절망에서라도 희망을 가지게 되기를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서의 증언이 그것이다. 그래야 신앙인이다.


[말씀을 향한 물음]

새해를 맞았다. 우리에게는 새해에 바라는 기대와 소망이 있는가? 그것은 무엇인가? 무엇이어야 하겠는가?


[슬라이드]













[설교 전문]

나는 지난 주일, 성탄절 예배 때 모처럼 설교의 자리에 나섰다. 그런데 지나치게 무거운 설교를 했기 때문에 그야말로 모처럼의 성탄 축하, 축제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고 말았다는 뒷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나도 그러한 증언을 준비하기까지는 퍽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축하의 날에 그런 설교를 해도 과연 좋은 것인가 하는 회의가 나에게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수가 오셨다는 것이 왜 기쁜 것이고, 왜 복음이고, 왜 축하하게 되는 것인가?’를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는 성령의 인도를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동방의 별이 되어야 한다는 우리의 소명의 자리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재촉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추위와 배고픔을 감수하면서 밤잠을 자지 못했던 목자들에게 성탄을 전한 천사가 되어야 한다는 부르심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1984년 새해를 시작하는 첫날이면서 첫 주일이다. 지난 주일만큼이나 특별한 의미와 기대를 갖게 되는 날이다.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시점에서 아쉬움과 희망, 소박한 소망을 갖는 것은 인간의 상정이다. 각자 올해의 소망을 가지고 그것을 기도하는 심정으로 여기 나왔으리라 짐작한다.

그 소망이 개인의 차원에서 절박한 내용일 수도 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경제적으로 조금이라도 나아지기를 소망할 것이다. 연탄 걱정, 올라가는 전세금 걱정, 아이들 학비 걱정, 이런 걱정이 싹 가시는 한 해를 소망할 것이다. 직장을 잃은 사람들, 생업을 잃은 사람들은 새해를 맞으며 무언가 생업이랄 수 있는 일을 찾고 거기서 보람도 느끼며 식구들을 먹여 살릴 수 있었으면 하는 소망을 갖게 될 것이다.

가정의 불화로 속을 태우는 가정은 그 불화가 꺼지고 미움과 증오가 변하여 그 옛날 그랬던 것처럼 서로 사랑하게 되기를 기도할 것이다. 도덕적인 갈등 가운데 있는 사람은 부디 새해에는 자신과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살 수 있기를 소망할 것이다. 자신의 몸이 건강치 못하거나 가정에 환자가 있는 사람은 지긋지긋한 고통을 말끔히 씻고 제발 건강하게 되기를 소망할 것이다. 우리 교회에도 그런 가정이 몇이 있다. 가정에 우환이 있는 것만큼 그 가정을 우울하게 하는 것도 없다. 학생들이면 학생들대로, 회사원이면 회사원대로 소망이 있을 것이다. 아버지는 자식에 대한 소망을 갖기 마련이고, 남편은 부인에게, 부인은 남편에게 다 각각 소망을 가지게 된다.

시각을 조금 달리 해보자. 얼마 전, 비교적 많은 구속 인사를 석방하고 제적 학생들을 석방시 킨다는 발표가 나왔다. 모두가 반가워했다. 새해에는 잡아가고 잡혀가지 않고, 제적시키고 쫓겨나지 않는 사회를 모두 소망하는 것이다. 문교부의 정책인 졸업정원제를 폐지하라고 했다고 해서 1년 6개월씩 징역을 살게 하고, 정부의 시책을 비판했다고 하여 국가 보안 사범으로 다루어지는 비리가 온통 사라지기를 소망하게 된다.

요사이 노동부 주변이 퍽 시끄럽다. 이유는 노동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명단, 소위 블랙 리스트를 만들어 규제하고 있다는 것이며, 그래서 직장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그것을 없애라고 주장했다고 하여 구속해 버린 사건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블랙 리스트에 이름이 올라간 사람이 취업하면 내쫓고 또 취업하면 또 내쫓고 몇 번이든 추적하여 기어이 내쫓는 불법 사회가 아닌 법치의 사회를 소망하게 된다.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목숨 같은 논밭을 기어이 팔아먹고 손바닥만한 땅만 쥐었거나 그것마저 다 날려 버린 농민 아닌 농민들의 한숨 또한 하늘에 닿고 있다. 아마 저들이 다시 농민이 되는 소망을 가질지 모르겠다. 다시 밭뙈기라도 사들여 땀 흘려 농사해서 일년 양식 장만하고 자식들 혼수 챙기는 소망을 봄날 아지랑이 보듯 소망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들, 우리 경제를 걱정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새해에는 어쨌든 우리 경제가 안정되고 자신의 기업도 도산과 불황의 늪에 빠져들지 않기를 소망할 것이다.

며칠 전부터 8명의 초ㆍ중ㆍ고 교사와 2명의 교수 그리고 1명의 목사가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연행되어 갔다.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에서 “국정교과서에 나타난 통일 교육 내용 연구”라는 과제를 맡아서 교과서를 분석하는 연구팀이다. 23일부터 연행이 시작되었는데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원장은 어제 오후에 잡혀갔다. 금방 숨넘어가거나 1시간이라도 지체하면 큰일날 일도 아닌데 섣달 그믐날 체포해 갔다.

하여간 현행법에 저촉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통일 문제를 정부 외에서, 혹은 정부의 입장을 비판할지도 모른다는 개연성을 가진 기관이나 인사가 통일에 관심하는 것은 안 된다는 정부의 뜻이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가 최근 수없이 경험하고 있는 일이다. 통일 문제도 우리의 문제지 정부의 문제만은 결코 아닌 것이다. 우리는 정부 전제 시대가 가고 진정으로 국민이 주인이 되는 새해를 소망하여야 할 것이다.

나는 1970년대의 쟁점이 안보, 정치적 정의 등 인권 문제였다면, 1980년대는 노동자와 통일 문제가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민생과 통일 문제를 어떻게 보느냐, 어떤 주장을 하느냐에 따라 구속되기도 하고 훈장을 타게도 될 것이다. 그만큼 우리 역사의 현실은 문제의 근본, 뿌리에 접근해 갔다. 민생과 통일 문제를 중심으로 한 긴장은 벌써 대단히 팽팽하다. 이러한 전망 앞에서 우리는 정치적 자유를 소망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한 해, 우리 민족은 슬픈 한 해를 보냈다. 약소 민족이라고 비전투기인 여객기인데도 마음대로 폭사를 시켰는가 하면, 미얀마의 폭발 사건은 또다시 우리 민족의 수치와 잔인함을 세계에 스스로 폭로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살인과 폭력은 우리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이란과 이라크 전투,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의 끝없는 살상, 미국의 그라나다 침공,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살신 폭탄 돌격대, 백악관에 콘크리트 벽을 만들어야 할 만큼 폭력과 살인이 우리를 공포로 몰아넣고 있다. 우리는 당연히 이 땅에서 폭력과 살인이 사라져 버리기를 소망하여야 할 것이다. 그래서 평화가 온 세계에 정착되기를 소망하게 된다.

이미 이 지구를 여러 번 파괴하고도 남을 만큼의 핵폭탄이 우리의 지구에 장전되어 있다. 날이 갈수록 위력도 커지고 숫자도 늘어난다. 폐기되는 것 없이 쌓이기만 한다. 우리가 만약 이 일을 실감한다면 우리는 핵무기가 이 지구에서 완전히 폐기되기를 소망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새해에 우리의 소망이 이런 것 아닐까하는 말씀을 매우 거칠게 드렸다. 이런 소망은 그야말로 언뜻 생각나게 하는 것들이다. 여러분의 가슴마다, 그리고 4천만 우리 동포 각각의 가슴마다에 한스럽게 남아있는 소망을 다 말씀드릴 수가 없다. 소망은 꿈이다. 꿈이란 어떤 점에서 역경과 고난 가운데 있는 이들을 일으켜 세우는 한 줄기 빛이다. 아이들이 엉뚱한 소망을 말하면 ‘꿈 깨!’ 하는 말을 한다. 그것은 어림도 없는 꿈이란 뜻이요, 당치도 않는 소망이라는 냉소적 표현이다.

야훼 신앙의 특성은 소망을 잃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장 처절한 역경과 위기 가운데서 꿈을 꾸어 내는 사람만큼 위대한 사람은 없다. 야훼를 신앙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 생활이라는 수치와 모멸의 한복판에서, 인간적인 판단으로는 전혀 소생이 불가능하다고 주저앉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그들은 꿈을 꾸고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사야를 통하여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피상적인 재판이 아닌 진실한 재판을 해줄 사람, 가난한 자들의 재판을 정당하게 해줄 사람, 말은 망치가 되어 잔인한 자를 치고 입김은 무도한 자를 죽여 버리는 사람, 정의로 허리를 동이고 성실로 띠를 띤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그를 예수 그리스도라고 믿는다. 그를 따르는 교회는 진실과 정의, 가난한 자와 천민의 의지가 되어야 함이 여기도 드러나 있다. 잔인한 자, 무도한 자에게는 가장 무서운 존재가 되어야 하고, 정의로 허리를 동이고 성실로 띠를 띠어야 함이 여기 분명한 과제로 제기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보복이나 살생의 악순환, 역정복의 꿈이 아니었다. 늑대가 새끼 양과 어울리고, 표범이 숫염소와 함께 뒹굴며, 새끼 양과 송아지가 함께 풀을 뜯고, 암소와 어린 곰이 친구가 되어 그 새끼들이 함께 뒹굴고,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는 꿈이었다. 젖먹이가 살무사의 굴에서 장난하고, 독사의 굴에 겁 없이 손을 넣는 꿈이었다. 어디를 가나 서로 해치거나 죽이는 일이 다시 없고 땅에는 야훼를 아는 지식이 차고 넘칠 것을 꿈꾸는 꿈이었다. 포로 생활이라는 치욕의 자리에서 꾼 이 꿈은 낭만적이고 환상적인 꿈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금니를 악물고 눈물을 흘리며 꾸는 꿈이었다.

20세기에 와서 흑인의 극심한 고난, 좌절, 자포자기의 늪에서 또 다시 꿈을 꾼 위대한 지도자가 있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다. 그는 이렇게 꿈을 절규했다.

“나는 꿈꾸노라. 언제인가 나의 네 아이들이 피부 색깔이 아닌 그 인격의 내용에 따라 평가되는 나라에서 사는 날이 올 것을 오늘 나는 꿈꾸노라. 나는 꿈꾸노라. 언제인가 흑인의 소년 소녀가 백인의 소년 소녀를 손잡고 형제와 자매로서 같이 지내는 날이 올 것을 나는 꿈꾸노라. 나는 꿈꾸노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야훼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사람이 같이 그것을 우러러보는 날이 올 것을. 이것이 우리들의 희망이다.”

이 신앙으로써 우리는, 절망의 산에서 희망의 돌을 캐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이 신앙으로써 우리는, 이 나라에 가득 찬 요란스러운 불협화음을 사랑의 아름다운 교향악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의 꿈 이야기는 절규였다. 낭만적인 것도, 환상적인 것도 아니었다. 차라리 선언이었고 결단이었고 자기를 던지는 헌신의 기도였다. 이것 없는 꿈이라면 그것은 냉소의 대상이 되고 말 것이다.

앞에서 나는 우리의 소망, 우리의 꿈을 말했다. 여러분이 마음에 담고 나온 특별한 꿈들이 또 따로 있을지 모르겠다. 꿈을 꾸지 않는 사람, 꿈을 버린 교회, 꿈을 갖지 않는 백성은 절망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다. 그 늪에서 숨을 거두고 말 수밖에 없다. 꿈을 가져야 산다.

우리의 상황은 꿈을 꾸지 않으면 안 될 절박한 상황이다. 숨이 막힐 것 같은 형편이다. 절망이라는 늪은 우리의 목에까지 차 온다. 그렇기에 우리는 꿈을 가진 백성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 꿈이란 그저 꾸어 보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꿈이란 산고를 겪어야 태어나는 아기와 같다. 우리는 이 아침 그냥 꿈을 꾸지 않는다. 절망의 산이라 할지라도 거기서 기어코 희망의 돌을 캐어 내고야 말겠다는 각오와 결단으로 꿈의 자리에 서야 한다.

우리의 꿈은 산고를 깨고 한 아기를 탄생시킬 것이다. 산고를 깨고 평화와 자유와 인간다움을 낳아 놓고야 말 것이다. 이것은 신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