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72:1-14] 공권력을 위한 기도 – 1991년 5월 1일, 김상근 목사

공권력을 위한 기도

시편 72편 1-14절 / 1991년 5월 1일 / 연세대 원주 캠퍼스

김상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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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이드]














[설교 전문]


원진레이온의 노동자가 직업병을 얻어 치료중 자살했다. 자살 전까지는 직업병 여부를 확실하게 판정해 주지 않아서 가족들은 생계까지 위협을 받았다. 학내 문제로 시위를 벌이던 명지대학교 강경대 군이 전투경찰, 소위 백골단의 쇠파이프 공격을 받고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온통 사회가 혼란으로 치닫는다.

노동절 행사를 정부가 불허한다. 위의 사건과 겹쳐 상당한 충돌이 예상되는 상황이다. 전남대 학생이 분신을 기도하여 사경을 헤매고 있다.

오늘 이 예배에 와 달라는 부탁을 큰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제목을 보낼 때만 해도 전도나 좀 해볼까 하는 가벼운 심정이었다. 이렇게 생각했다. 노정선 교수께서 모셔 오는 외래 강사들이기에 민주화, 군축, 통일 등 굵직한 설교들을 안 했을 리 없을 것이다. 그러니 그만큼도 못할 주제에 같은 말을 하느니 차라리 전도나 해보자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말을 하려고 했다. 나는 채플에 들어오는 여러분의 태도를 이렇게 생각했다. 채플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으니 가기는 하되 반은 부족한 잠 좀 보충하고 또 반은 밀린 복습이나 할 것 아닐까? ‘기독교에 대해서는 아무 흥미도 없소 들어와 앉았으니 학점이나 주슈.’ 이런 태도들일지 모르겠다고 짐작했다. 그런데 기독교란 언제나 잠 오게 하는 효과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여차여차한 것이고 쓸 만한 교회도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내 말을 듣고 만약 기독교를 선택해 준다면 그것은 분명히 ‘괜찮은 선택’이 될 것이라 강조하고자 했다.

그런데 설교 준비를 하려고 날짜를 보니 5월 1일은 ‘근로자의 날’이다. 더구나 강경대 군 공안 살인 규탄이 겹쳤다. 그러니 모처럼 전도 설교하려던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 시대를 살면서 공권력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바른 공권력을 세우기 위해 노력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여러분을 내일의 지도자라 하지만 내일의 지도자인 것은 물론 오늘도 역시 주인이요 지도자다. 마땅히 오늘 우리의 현실을 진지하게 생각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

앞서 봉독한 구약성서 시편의 말씀은 바른 정권, 바른 공권력이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이 시편의 저자는 당시의 정권을 위하여 이렇게 기도한다. 성서의 ‘왕’을 ‘정권’으로 바꾸어 읽는다.

“하느님, 이 정권에게 올바른 통치력을 주시고 정직한 마음을 주소서.”

공권력이란 올바른 통치력과 정직한 마음을 갖는 정권을 전제로 한다. 정직한 마음은 도덕성이다. 이것을 가진 정권이 집행하는 힘이 공권력이다.

저자는 자신의 정권이 올바른 통치력과 도덕성을 갖게 해 달라고 하는 데는 의도하는 목적이 있다. 바른 통치력과 도덕성을 갖게 되어야 그 정권이 약자의 권리를 세워 주고 빈민들을 구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소연하는 빈민을 건져 주고 도움받을 데 없는 약자를 구해 주며, 약하고 가난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가난에 시든 자들을 살려 주며, 억울한 자의 피를 소중히 여겨 억압과 폭력에서 그 목숨 건져 주리이다”(72:12-14).

도대체 공권력의 존재 이유는 약자의 권리를 세우고 빈민들을 구하기 위해서다. 약한 자들의 권리를 억압하고 빈민을 도탄에 빠지게 하는 세력이 있으면 그들을 쳐부수는 것이 공권력이다. 약자와 빈민에 반대하는 세력을 쳐부숨으로써 그들의 권익을 세우는 것이 공권력이다. 약자와 빈민을 향해 휘두르는 정권의 힘은 이미 공권력이 아니다. 약자와 빈민을 보호하고 그들의 권익을 높이기 위해 그들을 억압하는 세력을 쳐부수는 데 쓰는 정권의 힘이 공권력이다.

지금 이 시대에 이러한 공권력이 있으며 또 행사되고 있는가? 오늘은 노동절이다. 노동자들의 생일이다. 그러나 소위 공권력과 오늘 노동자들은 일전을 아니 할 수 없게 되었다. 도대체 정부가 정한 근로자의 날 이외의 날에 노동자들의 단결을 다짐하고 축제를 가지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라는 이유로 긴장을 고조시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월권이다.

지금 우리에게 하소연하는 빈민을 건져 주는 공권력은 없다. 도움받을 데 없는 약자를 구해 주는 공권력은 없다. 약하고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공권력은 없다. 가난에 찌든 자들을 살려주는 공권력은 없다. 억울한 자의 피를 소중히 여기는 공권력은 없다. 억압과 폭력에서 목숨을 건져 주는 공권력은 없다. 오히려 노동자, 농민, 도시 빈민들의 생존적 몸부림을 억압하는 공권력만이 있을 뿐이다.

오늘 공권력의 담지자인 현 정권을 가리켜 누가 올바른 통치력을 가졌다 할 것이며 도덕성을 지녔다 할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이 정권이 행사하는 공권력이 바른 공권력일 수 없는 것이다.

이 정권은 민주화 약속을 담보하여 출현한 정권이다. 박종철 군의 고문치사 사건과 같은 것은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 다짐했었다. 이한열 군을 숨지게 한 최루탄 남용도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다짐했었다. 그 다짐을 바탕으로 국민의 시위를 억압하는 공권력이 아니라 보호하는 공권력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민정당 당사를 두 겹 세 겹 둘러싸고 있던 전경들을 모두 철수시켰다. 그렇게 하면 믿어 달라 하니까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정권을 용납한 것이었다.

그러나 현 정권은 곧바로 기어코 자신의 힘을 비민주적인 데서 얻어오려는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정권의 특성은 민주화가 아니다. 공안(公安)이다. 소위 공권력을 과감하게 구사하여 질서를 바로 잡겠다는 것이 이 정권의 철학이다. 공안 폭력이 길거리에, 노동 현장에, 심지어 국회에까지 몰아불었다. 시위는 언제나 원천 봉쇄다. 민주적 시위 문화를 만들지 못하고 초전박살주의로만 치달았다. 최루탄도 필요 이상으로 쏘아댄다. 과거에도 직격탄을 맞는 경우가 가끔 있었다. 여론이 들끓었다. 그러나 지금은 매일같이 직격탄 맞은 사고가 생기고 있다. 위독, 실명, 뇌수술 등이 보도된다. 다반사, 일상사처럼 흔하게 되었다.

전경들이 지나가는 것을 눈여겨보자면 소대 맨 뒤쪽에 쇠파이프를 직직 끌고가는 우리의 젊은이들을 발견하게 된다. 공안을 위하여 이제 쇠파이프까지 들고 나왔구나! 인책 사임한 내무부 장관, 치안본부장과 얼마 전 자리를 함께 한 일이 있었다. 결판을 낼 일이 있어서 만났다. 본사안 토의를 마치고 내가 전경의 쇠파이프를 거둬들이라고 했던 적이 있다. 장관은 본부장에게 “우리 아이들이 쇠파이프를 가지고 있느냐?”고 묻는다. 본부장은 펄쩍 뛴다. 내 눈에는 보이는데 여러분 눈에는 안보인다니 알아보고 거둬들이라고 한 적이 있다.

끝내 그 쇠파이프로 강경대 군을 개 패듯 두들겨 죽였다. 민주화를 내걸고 정권을 얻어낸 이 정권이 이한열 군의 경우처럼 우발사가 아닌 고의적인 공안 살인을 하기에 이르렀다. 앞서 봉독한 성서 중에 “바른 정권은 억울한 자의 피를 소중히 여긴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이 정권은 억울한 자의 피를 땅에 쏟는다. 곳곳에 아우성이 있다. 피의 호소가 있다. 현 정권은 민주화를 수행해 낼 올바른 통치력도 도덕성도 갖지 못했다.

시편 저자는 정권이, 백성을 억압하는 자들을 쳐부수고 그래서 약한 자들의 권리를 세워 주며 빈민들을 구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만약 정권이 이에 반대로 나간다면 약한 자들의 권리를 세우기 위해, 빈민들을 구하기 위해 백성을 억압하는 이 정권을 쳐부수어야 한다는 논리가 여기에 담겨 있다. 약자를 억압하고 빈민을 박해하며 억울한 자들의 피를 흘리게 하는 정권은 쳐부수어야 한다.

무엇으로 쳐부수나? 혁명을 또 다시 하자는 것은 아니다. 혁명이 좋은 결과를 가져온 예가 흔치 않다. 민주화는 민주적 방법으로 해야 한다. 가장 좋은 길은 현 정권 스스로 퇴진하는 것이다. 쇠파이프를 들고 나와 국민을 향해 휘두르지 않고는 정권을 유지할 수 없다면 퇴진해야 마땅하다. 퇴진해야 한다는 국민 공감대를 우리가 만들어 나가야 한다. 이것은 혁명이 아니다. 그러나 꿈 같은 이야기일 뿐일 것이다. 그럴 만한 도덕성이 현 정권에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탄핵을 발의해야 한다. 우리 헌법에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 절차가 있는지 모르겠다. 있다면 마땅히 발의되어야 한다. 법 절차에 따라 정권을 취하기도 버리기도 할 수 있는 권리를 국민은 가지고 있다. 국민의 공감대를 넓혀 가야 한다. 그래서 국회가 이 일을 아니 할 수 없게 만들어야 한다. 이것은 혁명이 아니다.

이것도 안 될 수 있다. 사실 가장 좋은 방법은 선거를 실시하여 투표로 쳐부수는 것이다. 너무나 미온적이라 할지 모르겠다. 나는 강경대 군의 시신을 지키는 학생들의 손에 쇠파이프가 들려 있는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쇠파이프로는 쳐부술 수가 없다. 잘못주어진 정권을 회수하는 가장 민주적인 방법은 역시 선거요 투표다.

선거는 올바른 통치력도 도덕성도 상실한 정권을 갈아 치우는 가장 민주적 수단이다. 선거를 외면하는 국민은 독재 정권의 지배 아래 있게 마련이다. 최악을 거부하는 용기가 없는 국민은 결국 최악을 선택한다. 투표하는 날 놀러 가는 국민은 결국 최악을 선택하는 것이다.

나는 올바른 통치력도 도덕성도 없는 정권을 물리치는 것이 시편 기자의 신앙이요 그것은 선거로 가능하다고 확신한다. 여러분의 양식과 민주 의식으로 판단하라. 그리고 행동은 구체적으로 하라. 빈민을 건져 주는 정권, 약자를 구해 주는 정권, 억울한 자의 피를 소중히 여기는 정권, 백성을 억압과 폭력에서 건져 주는 정권을 우리가 만들어 가야 한다.

방관은 금물이다. 냉소도 금물이다. 최소한의 행동이라도 하라. 누구나 합류할 수 있는 행동이 최소한의 행동이다. 동시대에 사는 우리가 한 가슴으로 민족을 끌어안고 고뇌하고 결단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