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만드는 삶
마태복음 2장 1-12절 / 1993년 1월 6일 / 한국유리주식회사 시무예배
[회상 노트]
최태섭 한국유리주식회사의 설립자, 회장은 내가 목회하던 수도교회의 장로이셨다. 그는 새해 첫 출근 날, 회사 안의 기독교인 사원들과 함께 신년예배를 드렸다. 매년 그리했다. 모이는 이들의 신앙 성향이 각각일 수밖에 없다. 간혹 중요 간부 중에는 다른 종교를 신앙하는 이도 있었으나 그도 그 예배에 참석했다. 최 회장께서는 언제나 나를 설교자로 초청했다. 설교하기가 쉽지 않았다.
최 장로님은 기독교계는 물론이고 사회에서도 존경을 한 몸 가득 받는 분이셨다. 나는 1968년, 수도교회 전도사로 목회를 시작했다. 장로님을 만나게 되었다. 우리 둘 사이에 일화가 많다. 당시 기장 교회에는 흔치 않은 재벌 중의 한 사람인 최태섭과 극렬한 반체제 인사로 찍혀있던 김상근이 한 교회에서 목사와 장로로 공존하는 것을 사람들은 불가사의한 일이라 했다. 독재 권력이 그 어른을 얼마나 괴롭혔을까 하는 것은 그 시대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나는 기장 총회 총무로 선임되어 자리를 옮길 때까지 수도교회를 목회했다. 장로님과 부인인 김성윤 권사님은 나를 ‘아들’이라 하셨다. 우리 둘 사이에 일화가 많다. 누구에게나 자랑하고 싶은 일화들이다.
수도교회를 사임한 지 10년이 지났지만 최태섭 장로님은 이 해 직원 신년예배에 또 나를 청하여 설교를 들었다.
[슬라이드]
[설교 전문]
새해를 다시 맞았다. 1993년 한 해 동안 여러분의 회사와 가정과 여러분 각자 위에 하나님의 은총이 넘치기를 바란다.
‘시간’이라는 것은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다. ‘새해’라는 개념도 인간에게만 주신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이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일력을 만들게 하시고 1년이라는 개념을 창조하게 하셨다. 한 해의 끝날이 있게 하셨고 또 한 해의 첫날이 있게 하셨다. 이것은 물론 시간의 길이를 가늠하기 위한 것이다. 사실 어제와 오늘이 다를 것이 없고 또 오늘과 내일에 차이가 있을 리 없다. 그렇더라도 한 해의 첫날, 혹은 끝날은 우리에게 특별한 뜻을 준다.
‘새해’라는 것이 무엇인가? ‘새해’라는 개념은 단순하지 않다. 구태여 ‘새해’를 생각하는 것은 지난 시간과 앞으로의 시간 사이에 차이와 구별을 두라는 섭리가 거기에 있다. 그 차이와 구별은 당연히 변화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새해’란 무엇인가? 변화다. 새해에 갖는 기대란 무엇인가? 변화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지난 시간과는 다른 시간, 지난 시간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시간을 갖게 되라고 주신 것이 ‘새해’라는 낱말이 담고 있는 뜻이리라. 그래서 만들어낸 것이 ‘새해’ 개념이리라.
여기서의 차이와 구별, 변화란 무엇인가? 작게는 개인의 삶에 개선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거짓된 생활을 하던 사람이 새해를 맞이하면서 참된 생활을 한다든지, 자기만 알던 사람이 새해에는 남을 위해 산다든지, 병약한 사람이 건강을, 가난한 사람이 일용할 양식을 얻게 되는 것 등이다. 좀더 큰 마음으로 보면 공동의 선에 더 접근하는 것이다. 개인적 삶의 개선이란 개인의 처지와 형편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것 역시 인류가 함께 지향해야 할 공동선과 궤를 같이한다. 정의, 평등, 자유, 평화 같은 것이 인류가 추구해야 할 공동의 선이다.
그러나 새해라는 개념을 갖고 있는 인간이라면 반드시 변화를 희구하여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인류의 역사는 변화하려는 힘과 변화를 막으려는 힘이 갈등하고 부딪치는 역사다. 개인의 경우도 그렇다. 나 개인에게 변화를 이루어내야 하겠다는 의지가 있는가 하면 그저 그런 대로 살자는 보수적인 의지도 있다. 이 두 의지가 나 개인의 삶에서도 갈등한다. 새해를 맞는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변화를 가져오고자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변화가 없는 삶에 새해는 없다. 새해라 하더라도 그것은 날수를 세는 정도의 새해일 뿐이다. 변화없는 새해는 어제의 연장일 뿐이다.
인류사에도 새해 아침이 있었다. 인류 새해의 기점을 우리는 예수의 탄생에 둔다. 그가 나신 때를 기원으로 삼고 있다. 인류의 새해, 인류의 새 시대가 시작된 지 올해가 1993년이 되었다는 것 아닌가?
우리는 방금 전에 성탄주일을 보냈고, 오늘은 성탄 후 둘째 주일을 보내고 있다. 오늘 나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씌어 있는 예수 탄생 기록을 봉독했다. 예수님은 온 인류를 위해 오셨다 하지만 예수님이 탄생하신 것을 안 사람도 있고 탄생하셨으나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던 사람도 있다. 또 그의 탄생을 기뻐하고 환호한 사람도 있었는가 하면 못마땅해 하고 거부한 사람도 있었다.
누가 알았고 누가 기뻐했으며 누가 환호하였던가? 인류의 새해가 왔는데 누가 그 새해를 맞았던가? 온 인류였던가? 그렇지 않다. 동방의 박사들과 들에서 양을 지키고 있던 목자들이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의 아버지와 어머니, 예수의 아버지와 어머니 마리아 정도였다.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변화에 대한 열망을 가진 사람들이다. 마리아가 수태고지를 받고 부른 노래가 있다. 그 노래는 변화에 대한 고대로 가득 차 있다. 한 대목만 보자.
“주님은 거룩한 분
주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눅 1:46-56).
이것은 변화라는 말로는 그 표현이 부족할 만큼 변화에 대한 열망을 담고 있다. 예수가 오심으로 누구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날 것인가를 밝힌 기록도 그렇다.
“어둠 속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겠고
죽음의 그늘진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리라”(마 4:12-17).
예수의 탄생을 기원으로 삼는 것은 인류사의 변화 때문이다. 인류의 새해는 변화였다.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면 그의 탄생을 기원으로 삼지 않았을 것이다. 마리아의 이 찬가가 과격하다고 배격할 것인가? 마태의 해석이 빨갱이 같다고 비판할 것인가? 새해를 맞을 수 있는 사람은 그것을 배격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적어도 우리가 사는 사회가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동의하는 사람들에게 인류의 새해는 온다. Anno Domini에 살 수 있고 실제로 인류의 새해에 사는 사람은 변화를 받아들이고 동의하고 변화에 참여하는 사람이다.
예수의 탄생을 모르고 있었던 사람은 누구였나? 위에 거명한 사람들 외에는 누구도 예수의 탄생을 몰랐다. 나아가 누가 거부했나? 당시 왕이었던 헤롯과 예루살렘 사람들이었다.
“‘유다인의 왕으로 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에게 경배하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듣고 헤롯 왕이 당황한 것은 물론, 예루살렘이 온통 술렁거렸다”(마 2:2-3).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당시의 시대 상황으로 본다면 누구나 새 왕이 나타나기를 바랐을 것 같은데, 헤롯 왕은 물론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 모두가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왜 그랬나? 그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변화를 거부하는 것이다. 변화를 원치 않는 것이다.
그들이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기에 그랬는가? 예수께서는 공생애를 예루살렘에서 보내시지 않았다. 갈릴리에서 보내셨다. 갈릴리는 가난한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사회 신분도 낮고 가진 것도 없고 병들고 찌든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우리가 흔히 갈릴리에 대한 노래를 부른다. 낭만적으로. 그러나 갈릴리는 당시의 사회에서 천대받고 소외당하던 지역이었다. 반면에 예루살렘은 권력을 가진 사람, 신분 높고, 돈 많고, 배운, 건강한, 그런 사람이 아니면 예루살렘에서 살지 못하였다.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은 그 상태가 좋았다. 그냥 그 상태가 유지되기를 바랐다. 당연하다.
그러나 눈을 들어 그 사회 전체, 이웃과 더불어 모든 사람을 보아야 한다. 예수는 바로 그러자고 한 것이다. “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도 하셨지만 삭개오의 경우는 또 달랐다. 토색한 것은 4배, 재산의 절반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겠다고 했다.
변화를 적극적으로 만들기도 해야 하지만 수용해도 좋다. 그러나 예루살렘 사람들은 술렁거렸다. 변화를 두려워하고 새 시대, 새해를 원치 않았다. 결국 예수는 갈릴리에서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다. 예루살렘에서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 사람들은 예루살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내일이 오늘에 이어지고 오늘이 내일에 이어지기를 바란다. 그들은 ‘새해’를 원치 않는다. 나아가 ‘새해’를 살해하려 한다. 헤롯 왕이 베들레헴에 있는 두살박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인 것은 새해, 신기원, 변화를 거부한 것이다.
새해는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오는 것도 아니다. 변화를 고대하는 사람만이 새해를 맞이한다. 변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만이 새해를 만든다. 새해를 만드는 사람이 되자.
1993년이 여러분 각자에게 새해가 되기를 바란다. 아울러 이 사회, 우리 민족, 인류 모두에게 새해가 되게 하자. 작년과 같은 또 하나의 해가 아닌 새해가 되게 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