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0:37-43] 야곱의 경험한 기적 - 2026년 8월 23일, 강동교회

야곱이 경험한 기적

(창세기 30:37~43)

- 이인배 목사


우리의 고정관념과 선입견은 성경이 직접 이야기하지 않았음에도 마치 사실인 것처럼 단정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찾아온 동방박사를 세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는 ‘박사들’이라고만 되어 있을 뿐 인원수는 명시하지 않았습니다. 예물이 세 가지였기에 자연스레 세 명이라 짐작했을 뿐입니다.

골리앗과 싸우러 나서는 다윗에게 사울이 갑옷을 입혀주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다윗이 어린 소년이라 갑옷이 너무 커서 벗었다고 알고 있지만, 성경은 명확히 ‘익숙하지 못하므로 거절했다’고 증언합니다. 사울은 백성들보다 어깨 위만큼 더 컸던 장신이었습니다. 만약 다윗이 아주 어린 꼬마였다면 사울이 애초에 자기 갑옷을 건네지도 않았을 것이며, 성경도 ‘갑옷이 컸다’고 기록했을 것입니다. 어린 시절 동화나 만화로 접한 이미지가 우리의 통념을 만든 것입니다.

오늘 살펴볼 야곱의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양떼를 치는 것을 상상해 봅니다. 첫 사랑 라헬을 만났을 때, 우물가의 큰 돌을 번쩍 들어 올리던 혈기왕성한 상남자를 떠올립니다. 라헬을 얻기 위해 7년을 며칠같이 여기며 일했던 청년의 열정을 떠올리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증언하는 숫자의 퍼즐을 하나씩 맞춰보면, 우리가 흔히 놓치기 쉬웠던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화면에 나타난 이미지를 보면서 설명하겠습니다.


야곱이 애굽의 바로 왕 앞에 섰을 때 나이가 130세였습니다. 여기서부터 시간을 역으로 추적해 보겠습니다. 창세기 41장에 따르면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가 30세였습니다. 이후 7년의 풍년과 2년의 흉년이 지난 뒤 야곱과 요셉이 극적으로 상봉합니다. 이때 요셉의 나이는 39세입니다. 요셉이 39세 때 야곱이 130세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요셉을 낳았을 때의 나이는 91세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요셉은 야곱이 라헬과 레아를 아내로 얻기 위해 약속했던 14년을 일한 끝에 태어났습니다. 즉, 야곱이 고향을 떠나 하란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의 나이는 91세에서 14년을 뺀 77세였습니다.

야곱은 앞길이 창창한 젊은 청년이 아니었습니다. 무려 77세가 되도록 부모의 품 안에서 인간적인 잔머리와 꾀를 굴리며 살던 완고한 노총각이었습니다. 형의 분노를 피해 도망쳐 84세에야 가정을 꾸렸고, 77세부터 14년간 정당한 보수도 받지 못한 채 일했던 고단하고 늙은 노동자였습니다.

이러한 혹독한 고난은 억울한 의인의 수난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이 누구였습니까? 배고픈 형의 약점을 파고들어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권을 빼앗고, 눈먼 아버지를 속여 축복을 가로챈 원조 사기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이 세상의 잔꾀와 편법으로 언약의 복을 누리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그 잔머리의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자신이 최고인 줄 알았던 야곱이 마주한 외삼촌 라반은 그야말로 잔머리의 대마왕이었습니다. 라반은 야곱을 14년간 무보수로 부려 먹으며 가스라이팅했고, 20년 동안 품삯을 무려 열 번이나 번복했습니다. 창세기 31장 40절과 41절에서 야곱은 탄식합니다.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와 밤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냈나이다 내가 외삼촌의 집에 있는 이 이십 년 동안 외삼촌의 두 딸을 위하여 십사 년, 외삼촌의 양 떼를 위하여 육 년을 외삼촌에게 봉사하였거니와 외삼촌께서 내 품삯을 열 번이나 바꾸셨으며”

한마디로 20년 동안 개고생을 했다는 말입니다. 자신이 뿌린 속임수의 열매를 20년 동안 뼈저리게 거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이 기간을 가리켜, 하나님께서 가혹한 환경을 통해 야곱의 자아를 깨뜨리시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참된 신앙인으로 빚어가시는 훈련의 과정이었다고 설명합니다.

14년의 세월이 끝나고 요셉이 태어났을 때, 야곱의 나이는 91세였습니다. 이제 야곱은 극심한 위기에 직면합니다.

당시 고대 근동의 법적 관습에 따르면, 빈손으로 들어온 종이 주인의 딸과 결혼해 낳은 자식과 재산은 모두 주인의 소유로 귀속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실제로 라반은 창세기 31장 43절에서 “딸들은 내 딸이요 자식들은 내 자식이요 양 떼는 내 양 떼요 네가 보는 것은 다 내 것”이라고 못 박아 말합니다. 겉으로는 조카라고 했지만 내심 종으로 부려먹은 것입니다.

여차하면 빈손으로 쫓겨날 판이었고, 가족을 데리고 나간다 해도 90이 넘은 노인이 처자식을 데리고 메마른 광야에서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절체절명의 공포였습니다.

바로 그 절망의 자리에서 야곱은 기묘한 품삯 조건을 제안합니다. 양 중에서는 ‘아롱진 것과 점 있는 것, 검은 것’을, 염소 중에서는 ‘얼룩무늬와 점 있는 것’만을 자기 몫으로 삼겠다는 제안이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양은 흰색이, 염소는 검은색이 절대다수였습니다. 얼룩무늬나 점이 있는 개체는 열성 유전자로 인해 매우 드물게 태어나는 돌연변이에 불과했습니다. 상식적으로 스스로를 사지로 몰아넣는 불리한 협상이었습니다.

라반은 쾌재를 부르며 즉각 응했습니다. 그리고 야곱의 일말의 가능성조차 없애기 위해 현재 자신의 양떼에 섞여 있던 모든 유색 가축을 골라내어 자기 아들들에게 맡기고, 야곱의 무리와 ‘사흘 길’이나 멀리 격리했습니다. 자연 교배를 통해 단 한 마리의 변종도 나오지 못하도록 철저히 차단한 것입니다. 라반은 자신이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행여나 조카에게 야박한 외삼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아마도 야곱이 제시한 조건을 공개적으로 홍보했을 것입니다.

인간의 계산, 통계적 확률, 생물학적 법칙, 권력의 힘까지 모든 문이 완전히 닫혔을 때, 야곱은 기이한 행동을 시작합니다.

버드나무, 살구나무, 신풍나무의 푸른 가지를 꺾어 흰 무늬를 내고, 가축들이 물을 마시며 교미하는 개천가 구유 앞에 세워두었습니다. 겉으로만 보면 과학적 근거가 전혀 없는 미신적 태교술이자 노인의 노망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사건의 실체는 창세기 31장 11절과 12절 야곱의 고백에 담겨 있습니다.

“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내게 말씀하시기를 야곱아 하기로 내가 대답하기를 여기 있나이다 하매 이르시되 네 눈을 들어 보라 양 떼를 탄 숫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이니라 라반이 네게 행한 모든 것을 내가 보았노라.”

야곱이 나뭇가지를 깎기 전, 하나님은 이미 꿈을 통해 초자연적으로 일하고 계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야곱이 깎은 나뭇가지는 어떤 마술적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절망의 벼랑 끝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신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영역에서 최선을 다해 내놓은 연약하지만 진실한 믿음의 몸부림이었습니다.

놀랍게도 흰 양과 검은 염소 사이에서 얼룩무늬와 점 있는 튼튼한 새끼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약한 것은 라반의 소유가 되고 튼튼한 것은 야곱의 소유가 되어, 야곱은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 기적이 나뭇가지 성분의 승리였습니까? 유전학적 기술의 결과였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나뭇가지는 보잘것없는 한 노인의 서투른 몸부림에 불과했습니다. 만약 기적이 나뭇가지에 있었다면 성경은 분명하게 언급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적을 완벽하게 설명하는 부분은 창세기 31장 9절부터 13절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은 두 가지를 언급하십니다. “라반이 네게 행한 모든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내게 서원하였으니”라는 부분입니다. 

기적은 나뭇가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도둑맞고 착취당한 자의 몫을 회수하시는 ‘하늘의 공의로운 재판장’ 하나님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20년 전 하나님께서 먼저 야곱에게 항상 함께 하겠다고 말씀해 주셨고 그것에 대해 야곱에 서원한 내용에 근거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붙든 야곱의 작은 순종을 보셨고, 라반의 모든 불의한 착취를 감찰하셨기에 친히 역사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기나 제국의 압제 아래서 이 본문을 읽었을 때, 그들은 TV에서 보는 ‘인생극장’ 같이 단순히 한 노인의 목축 성공기를 읽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의 외삼촌 라반이 살던 ‘밧단아람’은 훗날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침략하고 수탈했던 북방 패권국 아람 제국의 뿌리였습니다. 따라서 야곱의 이야기를 읽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삶을 돌아보았을 것입니다. 야곱의 이야기는 먼 옛날 조상의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고단한 삶을 사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루 하루의 삶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제국의 거대한 착취 구조 아래서 평생 땀 흘려 일하지만 결국 빈손으로 버려질지 모른다는 절망감은 포로 된 이스라엘의 탄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선언합니다. 아무리 거대한 세상 권력이 판을 짜고 사흘 길을 떼어놓듯 연약한 자의 생존을 봉쇄할지라도,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모든 불의한 착취의 판은 단숨에 뒤집힌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영혼은 어느 자리에 서 있습니까?
혹시 ‘너무 늦어버린 늙은 야곱의 절망’ 앞에 주저앉아 계십니까?
“내 나이가 벌써 얼마인데 이제 와서 무엇을 하겠는가”
“젊은 날의 잘못된 선택 때문에 내 인생은 이미 실패했다”며 낙심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는 청년의 혈기에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꾀가 다 무너지고 77세에 도망쳐 90세가 넘어 빈손으로 떨고 있던 늙은 야곱의 무력함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표에는 늦은 때가 없습니다. 내 꾀가 끝난 그 자리가 하나님의 기적이 시작되는 자리입니다.

이 설교를 준비할 때 머리에 스쳐가는 시가 하나 있었습니다.
사무엘 울만의 ‘청춘’이라는 시입니다. 그 시의 일부를 이미지로 화면에 띄웁니다.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늙는 것이 아니라
이상을 잃어버릴 때 비로소 늙는 것이다.
세월은 피부에 주름을 보탤 뿐이지만,
열정을 잃어버리면 영혼에 주름이 진다.
근심, 두려움, 자신감의 상실이야말로
마음을 꺾고 영혼을 먼지 속으로 묻어버린다.
예순이든 열여섯이든 인간의 가슴속에는
경이로움에 대한 갈망,
어린아이처럼 끊이지 않는 지적 호기심,
인생이라는 게임을 향한 끝없는 즐거움이 숨 쉬고 있다.
그대와 나의 가슴속에는 하나의 무선 안테나가 세워져 있다.
사람들과 하나님으로부터 아름다움, 희망, 기쁨, 용기, 힘의 메시지를 수신하는 한,
그대는 언제까지나 청춘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이고, 내가 얼마나 진취적이고 건전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에 따라 내가 청춘의 삶인지를 결정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여러분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신앙생활을 하는지에 따라서 강동교회는 충분히 젊은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의 영혼이 ‘라반의 집과 같은 부조리한 착취의 현장’을 견디고 계십니까? 정직하게 성실을 다했음에도 불의한 구조와 교활한 사람들 앞에서 정당한 대가를 빼앗기고 계십니까?

하늘의 공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의 눈물과 세상의 불의를 다 보고 계십니다. 언젠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께서 억울하게 빼앗긴 여러분의 정당한 대가를 챙겨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낙심의 자리를 털고 일어나 여러분만의 ‘믿음의 막대기’를 깎으십시오.

세상이 쓰는 편법과 타협을 버리고, 여러분이 마주한 삶의 개천가 앞에 서십시오. 부당한 직장 상사 앞에서도 묵묵히 지켜내는 정직의 막대기, 막막한 경제적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드리는 예배와 기도의 막대기, 타협 없는 거룩한 성실의 나뭇가지를 깎아 세우십시오. 분명 이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나뭇가지를 들고 있는 야곱을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지금 광야에서 나이 아흔에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이런 자괴감이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는 일, 준비하는 일,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뭔가 대단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시작했는데 다람쥐 챗바퀴 도는 것도 같고, 결과가 잘 되지 않을 것 같은 무기력도 생길 것입니다.

세상은 여러분의 그 노력을 보며 무력하다고 비웃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믿음의 막대기를 세울 때, 하나님은 그 작은 노력을 통로 삼아 세상의 상식을 뒤엎는 거룩한 역전을 이루실 것입니다.

77세의 도망자를 열두 지파의 조상으로 세우신 하나님, 불합리한 착취를 감찰하시고, 억압자의 탐욕을 꺾으시는 공의의 하나님을 신뢰하며, 메마른 광야를 풍성한 열매로 채우실 주님 안에서 날마다 승리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