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민주화 운동의 연속선
나는 1969년 3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때부터 반독재 민주운동에 나섰다. “3선개헌”이란 말은 “독재선언”의 “속말”이다. 의복으로 말한다면 “3선개헌”은 “겉”이고 “독재”는 “안”이다.
물론 나도 반대다. 그러나 “성명”은 낸 일이 없으며 그럴 기회도 없었다.
나는 기독교인의 정치참여를 주장해 왔었으나 나 자신이 “정치”에 Involve[1]된 일은 없었다. 8ㆍ15 해방의 소식을 듣자마자 “한 크리스천의 건국이념”이란 팜프레트를 낸 일이 있었지만 그것은 정치인들에게 내 나름대로의 “나라 세우기” 이념을 참고재료로 제공하려는 의도였고 나 자신이 직접 그런 정치를 하겠다는 “시정연설”은 아니었다.
그런데 2term[2]이 거의 끝나려는 무렵에 박정희는 자기가 다시 대통령으로 입후보하기 위하여 헌법을 고친다고 선포했다. 대통령 3선을 헌법으로 합법화하려는 억지 공사였다.
하루는 장준하와 송원영[3]이 수유리 내 장막에 찾아왔다. 3선개헌 반대 운동에 나서 달라는 요청이었다. 나도 물론 3선개헌에는 반대였다. 그러나 공개운동을 일으킨 일은 없었다. 그들은 정치에 ‘숫처녀’ 같은 나에게 Propose[4]를 감행한 셈이었다. 그래서 “교제”가 시작됐다.
김상돈, 이철승 등이 계주했다. 결국 “3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가 조직되고 내가 “위원장”이란 직책을 떠메게[5] 됐다. 내가 무슨 정치나 사회 집단의 “감투”에 야망이 있었다면 몰라도 진정으로 싫다는데 그렇게 됐다는 데는 일종의 “신의”가 움직이는 것이 아닐까 싶어지기도 했다. 왜냐하면 불의에의 항거가 그대로 “정의”의 증언이기 때문이다. “아니오” 할 것을 “아니오” 할 용기가 없다거나 “아니오” 할 것을 “예”로 번복하는 것은 가장 비윤리적인 “외식”이고 비굴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 후부터 “한국민주화” 운동은 나의 본업같이 되었다. 때와 장소를 가릴 여가가 없었다. 아주 “생리화”했달까! 않하면 나 자신이 괴로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