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 21:1-9] 한을 낳은 왕 사울 – 1980년 5월 25일, 김상근 목사

한을 낳은 왕 사울

1980년 5월 25일 / 사무엘하 21장 1-9절

김상근 목사


[회상 노트] 한과 하나님의 정의

사태가 심상치 않았다. 강원도의 사북 탄광에서 폭동이나 다름없는 사태가 일어났다. 며칠 전에는 서울 시내에 대규모 학생시위가 있었다. 나는 물론 시위의 여기저기를 살피고 다녔다. 5월 17일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주일인 18일, 군의 이른바 진압작전이 광주에서 발생하였다. 광주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무서운 것이었다. 이미 170여 명이 총격을 받고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지금 정권은 경상도 정권이다. 왜 하필 광주에 군을 진입시켜 양민을 죽이는 것인가! 내 가슴은 분노로 찼다. 아니, 나의 분노는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죽임을 당한 사람, 그 가족, 그리고 광주, 그리고 호남인의 한의 깊이가 나를 압도했다.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다른 설교를 할 수가 없었다. 수도교회는 마침 새 교회당을 신축하고 4주 전에 입당을 했다. 새 교회당에 입당하는 것은 그 교회에 있어 결코 자주 오지 않는 기회인 것이다. 그로써 교회가 단합도 하고, 새 전망도 가지게 된다. 온 교회를 쇄신하여 크게 전진한다. 이에 적절한 설교를 몇 주일째 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설교를 더 이상 이을 수 없었다. 성서는 이런 때 우리에게 과연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가? 질서? 사랑? 화해? 용서? 아니다. 정의다! 인간의 정의가 아니다. 하나님의 정의다! 하나님의 정의다!

5월 25일 설교는 하나님의 정의를 외친 것이다. 아침에 교회에서 나를 본 장로님들이 화들짝 놀라신다. 왜 왔느냐는 것이다. 여기 나타나면 잡혀 갈테니 도망치라는 것이다. 목사가 예배를 한두 시간 남겨 두고 어떻게 도망을 가란 말이냐고 했다. 나는 무서운 설교를 했다. 듣기에도 무서웠을 게다. 예배 후 나는 교회당 정문으로 나가지 못했다. 기관원들이 골목을 이미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장로님들은 나를 교회 뒷켠 쪽으로 도망치게 했다.

사태가 더욱 악화되어가던 일주일을 기관원을 피해 이 집 저 집으로 전전했다. 성직자가 못할 노릇이었다. 언젠가는 체포당하게 될 것이다. 체포되지 않으려면 목회를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 또 나를 숨겨주는 사람들도 고통스러울 것이다.

나는 6월 1일 주일 아침, 내 교회당으로 잠입을 감행했다. 그리고 또 설교했다. 그래, 한을 품은 광주에, 우리에게 희망은 있는 것일까? 희망이 없다면 하나님이 아니 계신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될 것 아닌가! 숨 쉴 이유를 찾았던 것이다. 나는 그 설교가 당분간의 고별 설교가 될 것이리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지금 원고를 다시 보니 “광주의 시민이여, 자유와 정의를 열망하는 한국민이여, 평화와 사랑을 기리는 여러분이여, 주의 사랑을 믿으시라. 여러분, 건져 주실 줄 믿고 기뻐하시라” 이렇게 설교했었다.

예배 후 체포당했고 다음 주일 설교를 할 수 없었다. 잠시 풀려났었으나 7월 한 달은 나라가 주는 밥을 매일 세 끼씩 꼬박꼬박 얻어 먹었다. 교인들의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


[말씀을 향한 물음]

우리는 너나할것없이 아프고 괴로운 두 주간을 보내고 있다. 수많은 인명 피해를 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사태를 풀어나가자고 제 감정대로 생각하고 판단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그것을 원리로 오늘을 극복하고 해결해 나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무엇인가?


[슬라이드]

한(恨)과 하나님의 정의

1980년 5월, 끓어오르는 압력솥

축제와 학살, 두 개의 현실

인간의 얄팍한 화해가 아닌, 뿌리 깊은 불의를 도려내는 엄위하신 하나님의 정의만이 해답이다.

대한민국이 직면한 이중의 단절

다윗 왕 시대와 1980년 대한민국 : 두 시대의 비극은 정확히 같은 뿌리를 공유하고 있다.

한(恨)을 잉태한 두 시대의 해부학

편애의 역설 : 이기적 사랑이 낳은 참극

등가교환의 오류 : 거짓 화해의 저울

진정한 화해의 대가 : 한의 근원 도려내기

하늘을 막는 거대한 장벽, 한(恨)

다시 강단으로 : 체포를 앞둔 희망의 선포

방관자를 향한 준엄한 경고

한을 풀지 않고는 화해나 화합은 결고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 한의 근원을 캐물어 회복시킬 때, 비로소 하늘의 비가 내릴 것입니다.


[설교 전문]

우리는 지난 보름 동안 상상할 수 없는 쓰라린 역사를 경험했다. 사람이 비극의 극에 달하면 울음도 나오지 않는다더니 요사이 내 심경이 그렇다. 여러분의 심경도 그럴 것이라 생각된다. 홍분도 되지 않고 격분해지지도 않고 마치 초탈자처럼 오히려 담담해진다. 그러나 그 담담함은 너무나 기가 막혀서 생긴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는 민족적으로 커다란 과제를 갖고 있다. 그것은 남북간 동포들 사이에 가로 막혀진 이 담을 어떻게 허무느냐 하는 문제다. 무력을 가지고 남북을 통일한다는 것은 한편 생각해 보면 쉬운 일이라 생각된다. 힘센 쪽이 이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는 통일은 단순히 국토가 하나가 된다, 대통령이 하나다, 서로 왕래할 수 있다는 정도의 통일이 아니다. 분단된지 35년, 그 동안에 생겨난 뿌리깊은 불신과 반감, 오해와 증오…… 이런 것을 어떻게 해소하고 그야말로 한 형제로 만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 문제다. 지금 당장 통일이 된다고 해보자. 과연 우리가 서로 기쁘게 만날 수 있겠는지? 더구나 힘으로 어느 한 쪽을 밀어붙여서 통일이 이루어졌다고 할 때, 심정과 심정이 통일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문화적으로 엄청난 차이와 배운 것이 피차 다르다. 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에게 진정한 통일의 날은 과연 올수 있을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회의가 생긴다. 과연 남과 북이 함께 살 수 있게 될까 하는 참으로 막중한 숙제가 우리와 우리 후손들에게 있다.

그런데 5ㆍ16 군사 쿠데타 이후 동서가 갈라지는 또 하나의 비극이 우리에게 몰아쳐 왔다. 정부가 경상도 정부라느니 호남 푸대접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기 시작했다. 급기야 정부는 5ㆍ17 조치 이후에 호남인들이 상상할 수 없는 사태를 야기시키고야 말았다. 4ㆍ19 혁명 때 100여 명이 죽었다. 이번에 죽은 사람이 공식발표로 170명이다.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다. 물론 영남과 호남이 싸운 것은 아니다. 현 정부에 반대했던 것이다. 거기에는 상당한 명분과 구호가 있었으나 그 바닥에는 경상도만 위하고 특혜하는 정부, 그래서 잘 살고 잘 살게 되니까 변화를 기피한다고 여겨지는 경상도에 대한 증오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남북이 갈리더니 또 동서로 나뉜다.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어쩌다가 우리가 여기까지 왔나? 이 백성 참으로 못나기도 했다. 백성 못났다는 말 하기 전에 이 나라에 지도자라 하고 나선 사람들, 참 한심하구나 하는 생각을 버릴 수 없다. 남북분열이 부족하여 동서분열까지 하다니 참으로 기가 막힌다.

사울과 다윗 왕 시대에 이런 일이 있었다. 다윗이 왕위에 오른 후 극심한 흉년이 들었다. 하늘이 노하여 비를 내리지 않았다. 극심한 흉년이 왔다. 백성들의 인심이 흔들렸다. 그래서 그 사유를 알아 보니 전왕 사울과 그 가문이 기브온 사람들을 죽여 살인죄를 지은 탓이었다. 기브온인이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이민족이었는데 그들은 강국 이스라엘에게 퍽 협조적이었고 또 피차에 평화조약을 맺고 있었다. 그런데도 사울 왕은 기브온 사람을 체포하고 살해했었다. 많은 사람들이 왕 사울에 의하여 살해되기도 했고 또 멀리 망명을 떠나기도 했었다. 말하자면 사울과 그의 조정이 땅에 한을 낳고 있었던 것이다. 한이 땅에 사무쳤다. 인심이 천심이라고 결국 그것은 사울이 죽은 후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한이 사무치면 이변이 일어나는 법이다. 흉년이 든다. 비가 안 온다. 기브온 사람의 한이 하늘의 비를 막고 있었던 것이다. 땅의 결실을 흩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시대가 평안할 리 없다. 그 후대가 잘될 리 없다.

사울 왕은 왜 사람들의 한을 사게 되었던가? 2절 마지막 부분에 “사울은 이스라엘과 유대 백성을 사랑한 나머지 그들을 전멸시키려고 했던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대단히 중요한 시사다. 이스라엘과 유대 백성을 사랑한 나머지 기브온 사람들을 모두 죽여버리려고 했다는 것이다. 동기는 제 백성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 편을 만들고 내 편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이 결국 기브온 사람을 처형하고 그들의 한을 사는 데까지 이르렀다. 부모는 자식에 대하여 편애를 해서는 안 된다. 사랑을 못 받는 자식에게 한이 생긴다. 결국 편애를 받는 자식까지도 잘못되고 만다. 사장이 사원을 차등해서도 안 된다. 회사에 한이 생긴다. 목사가 교인을 편애해서도 안 된다. 그렇게 되면 교회 속에도 한이 생긴다. 그렇게 하는 것은 정의도 아닐 뿐더러 집안이 안 되고 회사가 안 되고 교회가 안 된다. 나라의 지도자도 그렇다. 나라의 지도자가 어느 쪽에 치우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적어도 대의에 서고 인류애, 박애라는 높은 원리에서 정치를 해야 한다. 정의 아닌 길은 걷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이 사울 왕은 제 백성 사랑한답시고 남의 생명을 빼앗았던 것이다. 대의에 서지 못했고 인간애, 박애의 원리에 서지 않았었다. 한을 낳은 왕이었다.

우리의 나라 현실이 꼭 이 모양이다. 역대의 대통령치고 - 대통령이라 해야 이, 박 뿐이지만 - 모두가 독재자라는 불명예로 물러났다. 그런데 그들은 백성을 사랑하지 않았느냐? 언필칭 누구보다 가장 사랑한다고 했을 것이고 또 사랑했다는 사실을 구태여 부인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들은 한을 낳은 지도자였다. 남북을 갈랐고 동서를 갈랐다. 작금 광주지방의 사건은 한의 폭발이었다. 자식을 사랑한다고 편협한 사랑을 하는 부모가 많다. 병신으로 만든다. 교인을 사랑한다고 잘못 사랑하는 성직자도 많다. 사랑하는 것도 제대로 해야 한다. 이쪽을 사랑한다고 저쪽에 한을 낳아서는 안 된다. 이쪽을 사랑하자고 저쪽을 죽여서는 안 된다. 사람을 사랑하고 국민을 사랑하자면 사랑할 수 있는 넓은 도량, 대의, 인간애, 박애, 정의에 서야 한다. 편협하여 지역감정이나 갖는 주제라면 그는 결코 지도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커다란 상처를 갖게 되었다. 군정이 들어서고 유신이 연장되는 것보다 더 중한 상처를 받게 되었다. 이스라엘 땅에 흉년이 들고 비가 안 왔듯이 이 땅에 깔려 있는 한들이 이 땅을 저주 속으로 몰아 넣을 것이다. 170명의 죽음은 바로 그것이다. 아니 170명의 죽음보다 호남 사람들 가슴에 깊게 패인 저 상처, 너와 나 사이에 갈라져버린 이 부서짐을 어떻게 아물게 하고 치료할 것이냐? 이것이 한이 되어 하늘을 막아 흉년이 들게 한 일 아닌가? 남북간에 하나가 되자면 통일이 되고 수십 년 혹은 100년은 걸려야 할 것 같다. 영ㆍ호남이 아무 감정없이 만나게 되자면 수십 년이 걸리게 될 것이다. 어떻게 할까?

다윗이 기브온 사람에게 물었다. 그대들의 억울함을 풀어줄 테니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기브온 사람들의 대답은 이렇다.

“사울 가문과 우리 사이의 문제는 금이나 은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스라엘 사람 하나라도 죽이게 넘겨달라고 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삼하 21:4).

금은으로 달래지는 것이 아니다. 기브온 사람은 금은으로 우리가 달래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보복의 차원에서, 보복을 할 수야 없지 않느냐, 그러니 풀어질 수 없는 사안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여기서 어물어물 넘어가지 않는다. 그래도 당신들의 억울함, 한은 풀어져야만 한다고 주장하여 결국 사울의 후손 중 7인을 나무에 매달아 죽게 한다. 그런데 성서에는, 그랬더니 그제서야 빗방울이 떨어지고 흉년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쓰고 있다.

지금 우리는 광주 사태를 놓고 구호품을 보내고 돈을 모은다. 안 하는 것보다는 좋다. 그러나 기브온 사람들 말처럼 금은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화해니 대화니 국민 화합이니 하는 설교를 한다. 그러나 그런 말로 빗방울을 떨어지게 할 수 없다. 우리가 화해해야지 어떻게 이스라엘 사람 하나라도 죽이게 넘겨달라고 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는 동안 빗방울은 안 떨어졌다. 한을 풀지 않고는 화해나 화합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인 모양이다. 한은 갚아져야 한다. 그 한의 근원을 캐물어서 그 근원을 회복시켜야 한다.

오늘날 이 나라의 한은 어디서부터 생겨났는가?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 다같이 노력해야 한다. 민주주의가 안 되어서 생겨난 것이라면 민주주의를 이룩하는 일에, 지역을 차별하는 정치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면, 그런 정치가 종식되도록 하는 일에 우리의 전 역량을 기울여야 한다. 이북과 이남 사이에는 이제는 문화의 차이, 사상의 차이가 크다. 그러나 영남이나 호남 사이에는 문화의 차이도, 사상의 차이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한이 불평등에서 오는 것이라면 평등을 위해 7명을 나무에 매어 달았듯이 커다란 자기 희생을 강행해야 한다. 이스라엘이 자기의 이익을 내놓은 것처럼 내놓아야 비가 온다.

한은 풀어져야 한다. 한은 무서운 것이다. 한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우리는 이번에 경험했다. 이런 일이 있을 때 우리는 우리들 사이에 혹시나 한이 없는가를 반성해 보아야 한다. 이번 광주사건을 광주의 사건으로 강 건너 불 보듯 구경만 해서는 안 된다. 이 나라 방방곡곡에서 너와 나 사이에 낳아 놓은 한을 찾아 그것을 푸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개인적으로도 광주사건과 같은 무서운 한풀이가 일어나게 된다. 한의 울부짖음을 우리의 하나님은 그대로 지나쳐 버리시지 않는다. 비를 오지 않게 하신다. 우리 하나님은 흉년이 들게 하신다. 우리는 지금 바로 그 하나님 앞에 나아와 그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슴을 열고 있는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