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발에 채여서
1980년 3월 30일 / 마가복음 15장 20-22절
김상근 목사
[회상 노트] 비아 돌로로자를 걷는 예수
분하고 기가 막혔다. 10ㆍ26으로 유신의 악령이 쓰러지리라 믿었다. 이른바 12ㆍ12 사태가 터졌다. 박정희 살해 사건을 지휘하던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계엄사령관을 체포한 사건이었다. 멀쩡한 낮에 총격전을 벌이고 온 시민들을 공포에 몰아 넣었다. 결국 전두환 일당이 완전하게 정권을 쥐게 되었다.
YWCA 위장결혼식 사건으로 체포되어 당한 일련의 경험은 우리가 아직도 유신체제 아래에 있다는 것을 확인케 했다. 그 짐승 같은 폭력에 담긴 메시지는 “유신은 안 죽었어”라는 것이었다. “유신에 저항하는 놈은 다 죽여!” 그들이 내뱉은 독설이었다.
더 가슴이 터질 것 같았던 것은 대중의 판단이었다. 때는 분명히 역사의 전환점이었다. 변화와 변혁으로 가야 했다. 그러나 오히려 박정희 예찬론이 대중 속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유신시대에 무엇이 그리도 불편했더냐고 반문한다. 이만큼 먹고 살게 된 것은 박 대통령의 덕이 아니냐는 것이다.
아, 저 수난자들이여, 당신들은 무엇인가? 지금에 이르면 정당한 평가를 받게 되어야 할텐데. 그로 인하여 새 세상을 열어 제쳐야 할텐데. 당신들은 지금, 이 민주지향의 시점에서도 수난자란 말인가. 독재의 먹구름은 어느새 온 하늘을 덮고 있다. 불의가 다시 역사의 중심에 선다.
하나님, 당신은 도대체 어디 계신 것입니까? 무엇을 하고 계신 것입니까? 우리의 이 고통을 왜 보시지 못하는 것입니까? 우리에게 당신은 과연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지금 비아 돌로로자를, 그래 우리 수난자와 함께 걷고 계신 것이구나! 때마침 예수님의 수난을 기억하고 그를 배우는 사순절이었다. 시대마다 집단의 죄를 짊어지는 수난자가 있어 그 시대가 비로소 연명한다. 인류는 그럼으로써 그 감당할 수 없는 죄악에도 불구하고 내일을 얻게 되는 것이리라.
그 수난의 길, 속죄의 길 - 비아 돌로로자를 힘들게 지나가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결정적 속죄의 삶은 그의 고난의 깊이 만큼 결정적이다!
힘들겠지만 비아 돌로로자를 다시 걷자고 했다. 뚜벅뚜벅 걸어가면 거기에 하나님께서 일치의 기적을 이루어내신다.
[말씀을 향한 물음]
우리는 될수록 편하게 살고 싶어한다. 나만 좋으면 되는 것 같다. 그것이 본성 같기도 하다. 그러나 또 나만 편하게 사는 것이 편하지만은 않고, 나 좋은 것만 좋다 하는 것이 죄스럽게 느껴지는 본성이 우리에게 있음을 경험한다. 이 고난절에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여러분의 눈에 보이는 십자가는 어떤 십자가인가? 왜 그 십자가는 우리의 소망이고 우리의 희망인가?
[슬라이드]
[설교 전문]
사순절의 마지막 한 주간을 특별히 고난주간이라 하여 이 기간 동안 주님의 고난을 집중적으로 명상하고 신앙의 깊이를 더하곤 한다. 교회당이 아직 완공되지 않았기 때문에 올해의 고난절과 부활절은 분위기에 있어서 퍽 적적하게 보낼 수밖에 없게 되었다. 크리스마스도 모여야 할 때 모이지 못했고 해서 부활절에는 꼭 새 성전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어야 하겠다고 노력했으나 뜻대로 되지 못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별스런 노력도 없이 지내는 것은 옳지 못하다. 우리가 서로 모여서 기도하고 배우고 또 신앙의 결의를 새롭게 할 기회를 갖지 못한다 하더라도 스스로 더 많은 노력을 해야만 한다. 오늘 나누어 드린 ‘고난주간 명상자료’도 충분치는 못하나 이런 점에서 꼭 이용하여 주시기를 바란다.
올해의 사순절에는 비아 돌로로자를 걸으시는 주님에게 우리의 눈을 던지자고 일관하여 증언해 왔다. 빌라도의 재판정에 서신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골고다 언덕에 이르기까지의 예수의 걸음을 더듬어 보자는 것이었다. 그 거리는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더라도 그 발걸음 한걸음 한걸음에는 참으로 굉장한 의미와 충격이 있는 것이다. 오늘은 사형선고를 받으신 후 자기가 매어 달리게 될 사형틀을 짊어지고 골고다로 가시는 주님을 생각하고, 그 때 그 죄수의 형틀을 대신 짊어져다 준 한 시골뜨기 시몬의 행위에 대하여 증언코자 한다.
우리에게 십자가는 무엇인가? 그것은 아름다운 것, 좋은 것이요 승리의 표식이고 자랑이다. 왕관의 장식으로 사용될 만큼 영화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오늘날에는 십자가를 부끄러워 하는 사람이 없다. 좋은 장신구로 쓰이기까지 한다. 매끈하고 멋있게 만들어져 있다. 번쩍번쩍 빛이 난다. 그런데 원래의 십자가는 무엇이었는가?
원래 십자가는 사형의 틀로서 고대에 많이 이용되었다. T형이나 十형이 있는데 십자형인 경우 기둥에 걸터 앉을 수 있는 나무조각을 의자처럼 붙혀 놓는다. 죄목을 언제나 사형수의 머리 위에 써 붙였다. 사형수를 매질하여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서 형장까지 끌고 가는 것이 습관이었다. 사형수는 옷을 벗기운 채 기둥에 붙은 나무조각에 걸터 앉아 양손을 횡목에 못박히거나 양발을 기둥에 못박힌 채 숨이 넘어갈 때까지 내버려 두는 것이다. 기둥에 붙인 나무조각은 손이 찢어져서 몸이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장치였다. 때로는 며칠간이나 고통스러워하다가 죽는 수도 있었다고 한다.
유대에는 이 같은 형벌 방법이 없었고 이것은 로마의 형벌 방식이었다. 이것은 가장 수치스런 형벌이었다. 도망친 노예나, 로마 제국을 반대하는 반란자에 대한 벌로서 주는 십자가형은 형벌 중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방법에 속하였다고 한다. 로마의 팔라티온이라는 언덕에서 한 조각물이 발견되었다. 이 조각에서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나귀의 머리를 한 사람이었고 그 조각의 제목은 “알렉사메노스(Alexamenos)는 그의 하나님을 경배한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당시의 십자가는 배척과 죽음과 훼손과 조소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로마의 철인이었던 키케로는 십자가에 대하여 “십자가라는 말만 해도 그것은 로마 시민의 몸으로부터만이 아니라, 생각과 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라고 말하였다. 말하자면 십자가는 옆에도 가지 말고 생각하지도 말고 듣지도 말라는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는 무엇이었나? 당시의 십자가는 교회에 걸려 있는 승리의 표식도 아니요 왕관의 장식물도 아니었다. 영예와 영광의 상징이 아니었다. 그것을 만나면 역겨워지고 누구나 기분 나쁜 감정을 일으키게 되는 그런 것이었을 뿐이다. 좋은 것을 찾고 아름다운 것을 찾고 영광을 찾고 영화를 찾는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아무것도 제공해 줄 수 없는 것이었다. 이사야 5장의 말씀처럼 “마른 땅에 뿌리를 박고 가까스로 돋아난 햇순”처럼 아무런 기대도 걸 대상이 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십자가는 멸망의 상징이었다. 그 십자가를 지고 예수는 비아 돌로로자를 지나가셨다. 그 십자가를 지고 예수는 골고다까지 오셨다. 예수가 지신 십자가는 별난 십자가여서 아름답고 빛나고 매끈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고 영광스럽고 자랑스런 십자가를 지셨던 것도 아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또 무엇이었나? 십자가는 달갑지 않은 것이고 이성이 원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도 그것을 지고 싶어하지 않았고 누구라도 그것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벌거벗겨진 십자가는 어느 누구에게도 환영받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에게 외면을 당하는 것이었다. 다시 이사야 53장 3절을 인용하면 “얼굴을 가리우고 피해갈 만큼 멸시만 당하”는 그런 것이었다. 십자가는 배척의 표적이었다. 그 십자가를 지고 예수는 비아 돌로로자를 지나가셨다. 그 십자가를 지고 예수는 골고다까지 가셨던 것이다. 예수가 지신 십자가는 별난 것이어서 흠모의 대상이 되었거나 사랑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고난절을 맞아 십자가를 명상하자고 했다. 어떤 십자가를 명상할 것인가? 아름답고 좋은 승리의 표식으로서의 십자가를 명상할 것인가? 자랑스럽고 영광스럽게 왕관 위에 우뚝 세워진 십자가를 명상할 것인가?
고난을 당하신 주님을 명상하자면 비아 돌로로자의 거리에서 지고 지나가셨던 예수의 십자가 - 바로 그 십자가를 명상해야 한다. 가장 수치스럽고 가장 치욕적이며 가장 달갑지 않은 십자가를 명상해야한다. 원색(原色)의 십자가를 명상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 십자가를 명상하면 우리는 예수의 자리로 자연히 이끌려져 간다.
예수의 자리는 어딘가? 예수의 십자가야말로 당시의 가난하고 소외되고 약한 자들을 사랑하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라고 가르치고 살았던 자에게 하나님을 함부로 취급하지 말라고, 하나님을 모독하지 말라고 철퇴를 가했던 십자가였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십자가는 가난한 자를 떠나 생각할 수 없고 소외된 자를 떠나 생각할 수 없고 약한 자를 떠나 생각할 수 없다. 또한 이 십자가야말로 당시의 역사적 상황, 경제적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 뜻을 좇으려던 자, 그 뜻이 비록 당시의 높은 사람들에게 불리하다 하더라도 그 뜻을 따르려던 자에게 내려졌던 철퇴였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십자가는 오늘의 역사적 상황, 경제적 상황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도 없다.
만약 우리가 비아 돌로로자를 2,000년 전에 지고 지나갔던 예수의 십자가, 바로 그것을 이 고난주간에 명상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오늘 가난하고 소외되고 약한 사람들을 위하여 어떤 십자가를 져야 할 것이냐 하는 질문 앞에 서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또 바로 예수의 그 십자가를 명상한다면 오늘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어떤 십자가를 져야 할 것이냐 하는 질문 앞에 서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이 고난절은 십자가에 대한 우리의 모든 편견과 선입견을 씻고 이 원색대로의 십자가를 만나는 기간이고 거기서 멀어져 있는 나를 회개하는 기간이다.
십자가에 대한 우리의 편견과 죄는 무엇인가? 우리는 그 십자가를 장미로 장식하기 시작했다. 괴테의 시에 이런 대목이 있다.
“십자가는 장미로 두텁게 둘러싸여 있다. 누가 십자가에 장미를 꽂았는가? 거친 십자가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서 사방으로 꽃들이 두껍게 되어간다.”
우리는 수많은 장미로 십자가를 둘러싼다. 그러나 예수가 지고 가신 십자가는 거칠고 모양 없는 십자가였지 장미로 둘러싸인 십자가는 아니었다. 니체와 칼 마르크스는 십자가를 이렇게 만든 기독교를 맹렬하게 비난했다. 니체는 “근본에 있어 오직 단 하나의 기독교인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십자가에 죽었다”고 했고, 마르크스는 “이 꽃들을 사정없이 비판하여 사정없이 꺾어 버려야 한다”고 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십자가에 죽은 그리스도를 따라서 사는 십자가의 삶이다. 그리스도인이 진리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수치를 당할 때,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을 받을 때, 버림받은 자와 결합될 때 그리스도는 교회를 통하여 비로소 사람의 눈에 보이게 된다. 그리스도가 땅 위에서 사는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는 그를 따르는 우리들의 삶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사회는 성공주의 사회다. 성취해야만 되는 사회다. 공적을 쌓아야 한다. 돈, 집, 자녀, 부부, 사회적 지위, 능력 등이 가치의 표준이 되고 있다. 머리는 될지언정 꼬리는 되지 말아야 한다. 모든 사고 방식은 실용주의적으로 된다. 실용가치와 유용성이 가치의 표준이다. 내게 보탬을 주고 내게 성공과 성취를 줄 수 있는 것만이 가치가 된다. 종교도 마찬가지고 신앙도 마찬가지고 십자가도 마찬가지다.
실용주의적, 성공주의적 종교가 무엇인가? 축복의 기독교다.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라는 요한 3서 1장 2절이 주제가가 되어버린다. 그리스도, 하나님, 신앙, 은혜, 예배, 기도, 헌금, 종교적 여러 행사는 모두 축복을 받고 무언가 바라는 것을 성취받을 수 있는 공적이 될 수 있다는 유혹이 있게 된다. 이것은 이미 종교개혁자들에 의하여 거부되었던 중세기 기독교의 타락된 모습의 재현이다. 율법주의, 공적주의, 속죄표의 현대적 형태의 재현이다. 마르크스로부터 신랄하게 비판을 받았던 장미로 장식된 십자가이다. 이 같은 성공주의적 사고, 축복의 가치관이 얼마나 많은 부조리와 얼마나 깊이 이웃을 해치고 있는가를 우리는 날마다 경험하고 있다. 이것이 예수의 그 십자가에 대한 우리의 편견이요 그렇게 생각하고 믿고 사는 우리 죄이다.
이 고난절에 우리는 거친 십자가가 보이지 않을 만큼 장식해 놓은 장미꽃들을 하나씩 하나씩 꺾어 내야 한다. 꺾어서 멀리 팽개쳐 버려야 한다. 그래서 드러난 십자가가 혹 내 취향에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 취향에 따라 십자가를 깎아 맞추지 말고 나를 십자가에 굴복시켜야 한다. 그 처절한 십자가를 경건되게 정직하게 직시하는 신앙의 경건이 있어야 한다. 80년대에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이냐? 이 십자가에 반드시 부활의 기적이 일어날 수 있도록 한국 기독교가 꼭 해야 할 일은 무엇이냐? 바로 이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마지막으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 보자. 그 십자가는 또 빌라도의 법정이나 성문 안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성문 안에서 성문 밖인 골고다로 나갔다. 사실 십자가는 교회 안에 걸어 두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것은 상징으로 여기 걸려 있을 뿐이다. 걸려 있어야 할 본 자리는 아니다. 교회 안에 있는 십자가라고 해서 제단 위에 있는 두 촛대 사이에서 교회에 온 교인들을 위하여 예수가 죽으셨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비록 여기 걸려 있지만 성문 밖 버림받은 자들의 해골바가지들이 뒹구는 곳에서 처형된 두 도둑 사이에서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가 교회 안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게 한다. 내 신앙이 내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없게 한다. 이 십자가는 교회를 해골더미로 내보내는 명령이다. 해골더미, 내어 쫓긴 사람들, 그들을 생각하지 않는 고난절 명상은 의미가 없다. 예수에게서 나타나신 하나님은 성 밖으로 나가서 해골들과 결합했다. 두 도둑과 결합했다.
우리는 언제까지 교회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인가? 문을 닫아 놓고, 성문을 잠그어 놓고 밖을 보지 않으려는 신앙은 예수의 신앙에 이를 수가 없다. 문을 열고 성문 밖으로 나가야 한다. 골고다까지, “해골의 곳”까지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교회 문을 열고 해골들이 뒹구는 곳으로 나간다는 뜻이다. 안전하고 이익스럽고 편안한 것이 아니다. 작은 일이라도 나가는 일을 해야한다. 해골들을 생각하는 일이라도 해야 한다.
여기까지 말하면 우리는 십자가에 대한 친근감을 버리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십자가를 피하여 도망가게 될 것이다. 그렇다. 예수의 제자들도 내내 그를 따르다가 막상 십자가를 지게 되자 도망쳐 버렸었다. 기적을 행할 때, 위대한 말씀을 주실 때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었지만 그러나 십자가를 지고 비아 돌로로자를 걷고 있는 예수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 제 취향에 맞지 않고 자기들의 기대에 맞지 않기 때문이었다.
십자가는 그 때도 외면을 받았다. 모두가 보지 않으려 하고 경멸했다. 그런데 어떤 얼뜬 촌뜨기가 지나가다가 이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된다. 자진해서가 아니다. 억지로 지게 되었다. 구레네에서 올라온 시몬이 그였다. 우리는 누구냐? 구레네 촌에서 올라온 촌뜨기들이다. 모두가 좋아하지 않는 십자가, 장미로 장식되거나 금빛으로 도금된 것이 아닌 원색의 십자가를 져야 하는 자리에 있는 시몬들이다. 이 시몬은 우연히 걸려 들었을까? 우연이 아니다.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서 거기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여러분이 왜 하필 십자가의 종교를 택하게 되었는가? 하나님의 발에 채여서다. 여러분이 왜 축복의 종교, 성공주의적 신앙으로 인도되지 않았는가? 여러분이 원해서인가? 하나님의 발에 채여서다. 여러분은 이미 하나님의 발에 채였다. 우리 스스로 이 길을 택한 사람은 없다. 장미로 장식된 십자가라면 또 모르겠다. 금으로 장식된 십자가라면 또 모르겠다. 저 비아 돌로로자에서 보았던 십자가, 예수의 어깨에서 보았던 그 십자가를 스스로 택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서야 억지로, 강제로 지게 될 뿐이다.
그러나 이 세상은 그 십자가를 진 사람에 의해서 비로소 변화되고 개혁될 수 있다. 미움과 싸움도, 슬픔과 애통도, 가난과 헐벗음도 그 십자가를 진 사람들에 의해서 비로소 변화되고 개혁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 여기 오신 여러분, 이 세상을 따라가지 말고 이 세대를 변화시키고 새롭게 만들자. 오늘 우리는 성공주의적 사고 방식에 둘러싸여 있다. 그러나 여기에 쉽게 적응하지 말고 이 원색의 십자가를 감수할 용기를 가져 보자.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고난에 참여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