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7:27-31 ; 이사야 50:4-9] ‘유대인의 왕 만세’라니 – 1980년 3월 23일, 김상근 목사

‘유대인의 왕 만세’라니

1980년 3월 23일 / 마태복음 27장 27-31절 ; 이사야 50장 4-9절

김상근 목사


[회상 노트] 비아 돌로로자를 걷는 예수

분하고 기가 막혔다. 10ㆍ26으로 유신의 악령이 쓰러지리라 믿었다. 이른바 12ㆍ12 사태가 터졌다. 박정희 살해 사건을 지휘하던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계엄사령관을 체포한 사건이었다. 멀쩡한 낮에 총격전을 벌이고 온 시민들을 공포에 몰아 넣었다. 결국 전두환 일당이 완전하게 정권을 쥐게 되었다.

YWCA 위장결혼식 사건으로 체포되어 당한 일련의 경험은 우리가 아직도 유신체제 아래에 있다는 것을 확인케 했다. 그 짐승 같은 폭력에 담긴 메시지는 “유신은 안 죽었어”라는 것이었다. “유신에 저항하는 놈은 다 죽여!” 그들이 내뱉은 독설이었다.

더 가슴이 터질 것 같았던 것은 대중의 판단이었다. 때는 분명히 역사의 전환점이었다. 변화와 변혁으로 가야 했다. 그러나 오히려 박정희 예찬론이 대중 속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유신시대에 무엇이 그리도 불편했더냐고 반문한다. 이만큼 먹고 살게 된 것은 박 대통령의 덕이 아니냐는 것이다.

아, 저 수난자들이여, 당신들은 무엇인가? 지금에 이르면 정당한 평가를 받게 되어야 할텐데. 그로 인하여 새 세상을 열어 제쳐야 할텐데. 당신들은 지금, 이 민주지향의 시점에서도 수난자란 말인가. 독재의 먹구름은 어느새 온 하늘을 덮고 있다. 불의가 다시 역사의 중심에 선다.

하나님, 당신은 도대체 어디 계신 것입니까? 무엇을 하고 계신 것입니까? 우리의 이 고통을 왜 보시지 못하는 것입니까? 우리에게 당신은 과연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지금 비아 돌로로자를, 그래 우리 수난자와 함께 걷고 계신 것이구나! 때마침 예수님의 수난을 기억하고 그를 배우는 사순절이었다. 시대마다 집단의 죄를 짊어지는 수난자가 있어 그 시대가 비로소 연명한다. 인류는 그럼으로써 그 감당할 수 없는 죄악에도 불구하고 내일을 얻게 되는 것이리라.

그 수난의 길, 속죄의 길 - 비아 돌로로자를 힘들게 지나가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결정적 속죄의 삶은 그의 고난의 깊이 만큼 결정적이다!

힘들겠지만 비아 돌로로자를 다시 걷자고 했다. 뚜벅뚜벅 걸어가면 거기에 하나님께서 일치의 기적을 이루어내신다.


[말씀을 향한 물음]

주님은 왜 고난을 당하셨는가? 고난의 길을 걸으시는 주님이 보이는가? 우리에게는 그 주님은 안 보이기 일쑤다. 영광의 주만이 보일 뿐이다. 그러나 오늘도 주님은 비아 돌로로자를 걷고 계신 것이다. 왜 그 길을 지금도 걸으시는 것일까?


[슬라이드]

유대인의 왕이라는 역설

폭력의 메시지

대중의 외면, 수난자의 고립

비아 돌로로자의 오버랩

시선의 이동 : 수치심에서 세계의 불의로

신관의 대비 : 재능의 재정의

개인의 덕(德)이 구조적 악 앞에서 실패하는 이유

악마는 어디에서 일하는가?

가장 치명적인 오해 : '유대인의 왕'이라는 역설

거짓 고발을 피하는 자의 비극

은혜의 교차점

현대 그리스도인의 소명


[설교 전문]

주님의 수난을 생각하며 우리의 잘못을 뉘우치는 이 사순절에 우리는 비아 돌로로자를 걷고 계시는 주님을 만나자고 두 주일간 증언했다. 비아 돌로로자는 예수를 재판한 빌라도의 법정에서 십자가의 수난의 언덕인 골고다까지 가는 예루살렘 거리 이름이다. 그 거리를 걸어 가시는 예수에 대하여 구약성서는 한 사형수와 죄를 뒤집어 쓰고 떠난 염소를 예시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말하자면 오늘에 있어서도 우리의 과오와 잘못으로 사형수처럼 고난을 당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서 우리는 주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첫날 증언했다. 그런데 우리의 죄를 뒤집어 씌워 누구를 대신 희생시키는 따위의 속죄 제물은 이제 용납되지 않는다. 그것은 주님을 또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둘째 날 증언했었다.

오늘은 조롱받고 희롱당하신 주님에게서 그리스도인의 당위적인 삶의 모습을 찾고자 한다. 요컨대 오늘 구약성서 본문에서와 같이, 왜 예수는 그처럼 모욕과 수모를 당하기에 이르렀느냐, 그것이 정당하냐는 것을 알아 보자는 것이다.

예수님이 당하신 수모는 이렇다. 예수를 끌고 와서 많은 부대원들이 둘러싸고는 예수의 옷을 벗긴다. 그리고는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머리에 씌우고 나서 오른손에 갈대를 들게 한다. 그 앞에 무릎을 꿇고는 “유대인의 왕 만세!” 하고 외치면서 희롱을 한다. 그리고 어떤 군인은 예수에게 침을 뱉는다. 손에 들려 주었던 갈대를 빼앗아 그것으로 머리를 후려친다. 그리고는 자색 옷을 벗기고 원래 입고 계셨던 옷을 도로 입힌다. 급기야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밖으로 끌고 나간다. 여기까지 말해도 우리에게 큰 감동이 없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내 남편, 내 아내, 내 자녀만큼 또는 나의 애인이나 연인만큼은 사랑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내가 존경하는 생존의 어떤 분만큼도 사랑하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다. 만약 나의 남편이나 나의 아내, 내 자녀, 또는 내 애인, 나의 스승이 예수처럼 폭력으로 옷을 벗기우고 매를 맞았다는 이야기를 듣거나 편지를 받았다면 우리의 마음이 이렇게 잔잔할 수가 없을 것이다. 분노와 격정으로 몸을 가누지 못할 것이다.

10ㆍ26 사태 이후에 계엄사에 연행되어 갔을 때 나는 주님께서 당하셨던 그 상황을 실감했었다. 그때 유신체제에 반대하던 이들에게 보복 조치를 가하기 위해 무차별적인 폭력을 휘두른다는 소문이 퍼졌었다. 그때 제 모친은 맞았느냐고 묻지는 않았으나 또 물어도 맞았다고 말하지 않으리라 여기셨든지 캐물으시지는 않았으나 어머니 가슴속에 격정하고 있는 분노를 나는 얼마든지 읽을 수 있었다. 자식에 대한 사랑이 그만큼 생생한 것이다. 예수에 대한 이같은 심정의 회복이 먼저 있어야 한다. 이것이 맑은 마음이요 먼지 끼지 않은 마음이다.

폭력과 수모 속에 인간존엄이란 있을 수가 없다. 말이 있어도 말을 할 수 없는 상황, 대답이 있어도 대답을 할 수 없는 상황이 극단적인 폭력의 상황이다. “유신체제에 도전하는 놈은 누구든지 죽여!” “우리가 죽은 줄 알아?” 그리고는 그야말로 미친 개 패듯이 무차별로 두들겨 팬다. 성서에 목사가 정치를 하라 했느냐고 한다. 물론 이것은 형식이 질문일 뿐 윽박지르는 말이다. 좀더 심하게 맞은 분들은 일어설 수가 없었다. 불러서 나오라 하면 영창에서 벌벌 기어 나갔었다는 것이다. 늦게 나가면 늦게 나온다고 때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떤 사람은 너무 맞아서 얼굴이 찢어졌고 또 누구는 머리가 터졌었다. 터진 곳을 꿰매고 다시 때린다. 또 터졌다. 다시 꿰매고 또 때렸다. 한 신부에게 했다는 말이다: “이 가짜 신부 새끼야, 네가 무슨 신부냐? 너 같은 놈한테 설교 듣는 교인도 있으니 한심하다.” 머리채를 잡고 이리 제끼고 저리 제낀다. 갖은 욕설을 다한다. 그런데도 폭행을 당하는 쪽은 말을 할 수가 없다. 이미 그상황은 인간의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같은 상황에서 우선 수모감을 어쩔 수가 없었다. 옷을 벗기우고 누비한 죄수복을 입고 구두를 벗고 흰 고무신을 신고서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내가 너무 부끄러웠다. 그때 “내가 나가면 교인들에게 절대로 이 말은 안 하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내 앞에 빌라도의 법정에 서신 주님, 그리고 군인들에게 끌려 온 주님이 나타나셨다. “아, 주님께서도 이렇게 당하셨군요.” “그렇지요, 나는 지금 기껏해서 내 수모, 내 체면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요 좁고 못난 저를 용서해 주소서”라고 기도했었다. 내가 수모를 말하고 체면을 생각하고 목사 정도의 사회적 신분으로서도 견딜 수가 없었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이제까지 세상을 누비고 소위 진리를 말하며 선풍을 일으키던 주님의 경우는 오죽했겠는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의 수모나 체면이 문제가 아니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치는 이 세상, 자기를 유죄로 판결하는 지도자의 양심과 폭행을 저지르고 모욕을 해서 인간 사회를 짐승의 사회로 전락시켜가는 이 세계, 악마의 지배 아래에 있는 이 세상이 문제였다. 내 아들이 폭행을 당했느냐 당하지 않았느냐가 아니라 폭행이 난무하고 보복이 판을 치는 세상, 정의가 정의로 받아지지 않고 진실이 진실로 인정되지 않는 세상을 문제삼는 자세였다. 그래서 주님은, 누가복음에 의하면,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하옵니다”라고 기도했던 것이다.

예수의 관심은 자신의 체면이나 분함에 있지 않았다. 그를 때리고 죽이고 있는 비인간화한 세계가 문제였다. 인간의 세계는 세계인데 인간이 살 수 없는 세계가 문제였다. 인간들 스스로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아버리는 인간의 세계가 문제였다. 예수는 이 세계에 뛰어드신 것이다. 그래서 친히 문제를 짊어지신 하나님이시다.

여기에서도 기독교의 하나님과 다른 신은 엄격히 구분된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고난받으시는 하나님이다. 고난을 받을 수 없고 우리의 고난에 참여할 수 없는 신은 우리를 도와줄 수 없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런 신에게는 눈물이 없다. 눈물을 가지고 있지 않는 신은 사랑이 없는 신이다. 약함과 무력함을 경험할 수 없는 신을 “전능한 신”이라 한다. 그런 전능의 신은 아무러한 처지와 형편 속에서도 소위 신답게, 초연하게, 의젓하게 처신한다. 언젠가도 말씀드린 기억이 있는데 나는 이런 점에서 부처님의 모습을 좋아하지 않는다. 부처님의 형상은 웃는 것도 아니고 분노하는 것도 아니다. 짜증어린 것도 아니다. 마음에 아무 동요도 감정의 변화도 없는 “무감각”의 표정이다. 그야말로 초연한 것이고 해탈을 해버린 것이다.

이런 신은 인간을 사랑할 수 없다. 인간이 찢기는 곳에서 똑같이 찢기는 하나님만이 인간을 사랑할 수 있다. 인간이 통곡하는 거기에서 함께 통곡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실 수 있다. 부당한 것을 보면 분노하고 애틋한 것을 만날 때에는 왈칵 껴안는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개인개인을 사랑하고 관심하신다. 그런데 사실 개인은 개인으로만 존재할 수 없다. 언제나 그의 사회 속에서 존재하게 된다.

동양에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길은 덕이라 하고 서양에서는 착한 행실이라 한다. 이와 같은 덕론(德論)에 따르면 “인간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는 것이고 거듭해서 정의를 행함으로 정의의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하는 것은 언제나 인간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서 이와 같은 사상은 더욱 일반화되어가고 있다. 포이에르 바하가 “인간은 인간의 하나님이다”라고 한 것이나 현대의 위대한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가 인간이란 아직 완성되지 않고 또 완전히 드러나지 않은 “감추어져 있는 인간”(homo absconditus)이라고 한 것은 인간의 덕론에 근거하고 있는 사상들이다. 인간은 하기 나름이다. 하기에 따라 천사도 될 수 있고 악마도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관심을 인간 하나하나에게 집중하면 된다. 인간 하나하나가 선해지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스스로의 결정에 의하여 스스로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이냐고 물으면 우리는 그렇지 못한 수많은 경험들을 연상하게 될 것이다.

요새 교육문제가 한참 사회문제화되어 있다. 과외를 없애야 한다, 지나친 입시경쟁을 없애야 한다고 누구나 입을 모은다. 그것을 개인의 문제로 간주한다면 한 사람 한 사람이 과외를 안 하면 된다. 이것은 덕론이요 착한 행실에 그 해결을 기대하는 태도다. 이론상 잘못된 것이 없다. 그러나 그렇게 결코 되어지지 않는다. 또 모두가 배금주의에 빠져서 큰일이라고 개탄한다. 이렇게 하면 결국 모두가 망한다고 한다. 이것을 개인의 문제로 간주한다면 각자가 배금주의를 배척하면 된다. 나는 그 따위 황금, 지위 같은 것을 분토로 여긴다 하고 선언하면 된다. 내가 많이 가졌다 싶으면 모두 나누어 주면 된다. 이것도 덕론이요 착한 행실에 그 해결을 기대하는 태도다. 이론상 잘못된 것이 없다. 그러나 결코 그렇게 되지 않는다. 개인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다. 거기에는 근본적으로 죄의 깊이의 문제가 있는 것이다. 악마의 힘이 있는 것이다. 이 죄의 깊이와 악마의 힘은 사회의 여러 차원에 얽혀서 존재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죄 속에서 살게 하는 어떤 힘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 속에서 작용한다.

예수 시대에는 특히 장로, 율법학자, 바리새인, 로마 총독으로 이어지는 당시의 지배자와 죄인, 병자, 가난한 사람 사이에 악마의 힘이 활동하고 있었다. 여기에 뛰어든 하나님, 그가 예수다. 죄인과 병자와 가난한 사람, 오늘날 민중이라 부르는 그들을 위해, 또 나아가서는 압제하는 자리에 있는 지배자들의 구원을 위해 그들 사이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사회문제 속에서 개인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사회를 구함으로 개인도 살려 내려는 것이다. 사회 속에서 맹렬히 활동하는 악마를 어거함으로 개인을 죄에서 구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의 이 결단, 이 행위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엉뚱한 어거지 판결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개인, 개인의 정신, 선행, 덕이나 다스릴 일이지 왜 정치를 하려는 것이냐? 이 사이비 하나님의 아들아!’ 이렇게 몰아친다. 유대인의 왕이라니 어림도 없는 판결이다. 예수의 충심을 너무나도 헤아리지 못한 죄목이었다. 그래서 그는 수모를 당하게 된다. 매를 맞게 되었다. 침뱉음을 당하고 희롱을 당했었다. 유대인의 왕 만세라는 실로 참을 수 없는 희롱을 당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란 모든 것에 초연하거나 매도 수모도 희롱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으로서 매를 맞기도 하고 침뱉음을 참기도 하고 갖은 희롱도 겪어낼 수 있는 전능, 그것이 우리의 하나님의 전능이다. “유대인의 왕”이란 정치권력에 욕심이 있는 사람이라는 비난이다. 이 비난을 감수하는 하나님이 계셔서야 우리에게 구원이 있게 된 것이다.

우리는 추호도 이러한 오해를 받지 않으려고 몸을 도사린다. 사회에 뛰어들어야 하겠는데 “유대인의 왕”이라는 오해를 받을까 두려워, 그런 오해를 받으면 큰일나는 줄 알고 기겁을 한다. 절대로 나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 결과, 악마에게 이 사회를 내맡긴다. 그 결과 나는 이 사회가 끌고 가는대로, 다시 말하여 악마가 끌고 가는 대로 끌려 다니도록 악마를 허용한다. 여기에 내 구원도 사회의 구원도 없다.

복음서 기자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단죄를 받고 사이비 종교가라고 정죄를 받고 갖은 수모를 당하고 있는 한 청년, 그리고 비틀거리며 비아 돌로로자를 걸어 지나가는 한 청년을 눈여겨 보고있었다. 그리고 그는 오늘 구약성서 본문을 생각했다.

“나는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기며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턱을 내민다
나는 욕설과 침뱉음을 받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리우지도 않는다 ……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줄 알고 있다
하나님께서 나의 죄없음을 알아 주시고 옆에 계시는데
누가 나를 걸어 송사하랴?”(사 50:6-8).

복음서 기자는 저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수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구나라고 믿었던 것이다.

우리의 처지를 생각해 보자. 악마는 어디에서 일하나? 이제는 많이 없어졌지만 문화적으로는 시어머니와 며느리, 시누이와 올케 사이에 악마가 활동한다. 현재에는 사회적으로 기업주와 근로자 사이에서, 지배자와 국민 사이에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에서 악마는 활동하고 있다. 여기 우리의 현실 속에서 그의 충정을 무시하고 “유대인의 왕”이라는 단죄를 받고 매를 맞고 조롱과 수치를 당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거기에 주님의 구원의 손이 일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의 왕”이라니 말도 안 되는 오해다. 그러나 오해를 받더라도 그 길을 가야 십자가가 있지, 오해라고 물러서면 십자가는 없다. “유대인의 왕”이라니 터무니 없는 소리다, 절대로 그런 단죄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면 예수도 십자가를 지지 않았을 것이고 비아 돌로로자를 기우뚱기우뚱 걷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국의 교회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오해를 받으며 비아 돌로로자를 걸었다. 다행히 우리 교회도 그랬다. 이 길은 반드시 걸어야만 할 길이다. 이 오해가 무서워 뒤로 물러서려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그것은 악마에게 이 사회를 맡기는 것이고 그것은 또 나를 악마의 손에 허용하는 것이다. 여기에 내 구원도 있을 수 없고 사회의 구원도 있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본회퍼의 말 한마디를 인용하고자 한다.

“종교적인 행동이 그리스도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생활에서 하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그것이 그리스도인을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