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집어 쓰고 난 염소
1980년 3월 16일 / 레위기 16장 21-24절
김상근 목사
[회상 노트] 비아 돌로로자를 걷는 예수
분하고 기가 막혔다. 10ㆍ26으로 유신의 악령이 쓰러지리라 믿었다. 이른바 12ㆍ12 사태가 터졌다. 박정희 살해 사건을 지휘하던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계엄사령관을 체포한 사건이었다. 멀쩡한 낮에 총격전을 벌이고 온 시민들을 공포에 몰아 넣었다. 결국 전두환 일당이 완전하게 정권을 쥐게 되었다.
YWCA 위장결혼식 사건으로 체포되어 당한 일련의 경험은 우리가 아직도 유신체제 아래에 있다는 것을 확인케 했다. 그 짐승 같은 폭력에 담긴 메시지는 “유신은 안 죽었어”라는 것이었다. “유신에 저항하는 놈은 다 죽여!” 그들이 내뱉은 독설이었다.
더 가슴이 터질 것 같았던 것은 대중의 판단이었다. 때는 분명히 역사의 전환점이었다. 변화와 변혁으로 가야 했다. 그러나 오히려 박정희 예찬론이 대중 속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유신시대에 무엇이 그리도 불편했더냐고 반문한다. 이만큼 먹고 살게 된 것은 박 대통령의 덕이 아니냐는 것이다.
아, 저 수난자들이여, 당신들은 무엇인가? 지금에 이르면 정당한 평가를 받게 되어야 할텐데. 그로 인하여 새 세상을 열어 제쳐야 할텐데. 당신들은 지금, 이 민주지향의 시점에서도 수난자란 말인가. 독재의 먹구름은 어느새 온 하늘을 덮고 있다. 불의가 다시 역사의 중심에 선다.
하나님, 당신은 도대체 어디 계신 것입니까? 무엇을 하고 계신 것입니까? 우리의 이 고통을 왜 보시지 못하는 것입니까? 우리에게 당신은 과연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지금 비아 돌로로자를, 그래 우리 수난자와 함께 걷고 계신 것이구나! 때마침 예수님의 수난을 기억하고 그를 배우는 사순절이었다. 시대마다 집단의 죄를 짊어지는 수난자가 있어 그 시대가 비로소 연명한다. 인류는 그럼으로써 그 감당할 수 없는 죄악에도 불구하고 내일을 얻게 되는 것이리라.
그 수난의 길, 속죄의 길 - 비아 돌로로자를 힘들게 지나가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결정적 속죄의 삶은 그의 고난의 깊이 만큼 결정적이다!
힘들겠지만 비아 돌로로자를 다시 걷자고 했다. 뚜벅뚜벅 걸어가면 거기에 하나님께서 일치의 기적을 이루어내신다.
[말씀을 향한 물음]
‘하나님도 고난을 받으시는가’ 라는 것은 초대교회 때의 논쟁거리요 또 생사를 건 신앙고백의 시금석이기도 했다. 여러분은 하나님도 고난을 받으신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은 영화와 영광을 누리며 계시다고 생각하는가? 인간은 분명히 고난 중에 있다. 하나님은 영광 중에 계실까, 아니면 고난 가운데 계실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실까?
[슬라이드]
[설교 전문]
시금은 사순절이다. 부활주일에서부터 40일을 거슬러 올라간 수요일이 일대 회개하는 날인 성회일이다. 이 성회일부터 부활주일까지를 사순절이라 한다. 이 기간 동안을 예수님의 광야 40일의 생활과 또 주님의 고난을 명상하며 경건하게 보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관습이다.
우리는 이 사순절에 있다. 이 기간 우리의 마음을 맑게 하여 평소 보지 못했던 것을 보아내고 평소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예사롭게 지나쳐 버렸던 일 속에서 비아 돌로로자를 걷고 계시는 예수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입에 붙은 회개가 아니라 진실로 주님의 고난을 깊이 있게, 종교적으로 생각하며 그것 때문에 회개하게 되어야 한다. 주님의 고난은 우리를 회개하게 하는 힘이 있다. 주님의 고난은 우리의 심정을 혼들어 놓을 것이다. 주님의 피홀리심이 신통력있게 우리의 죄를 씻어 주는 것이 아니다. 마치 내 의지와는 아무 관계없이 알코올을 발라 소독을 해내는 식이 아니다. 내가 지금도 주님을 죽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함으로 비로소 내가 가던 걸음을 멈추고 회개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죄씻음이다.
1960년 이후의 신학은 어느 때보다 그 변천이 격심했다. 특히 “하나님이 누구냐?”하는 문제에 있어서 더욱 그랬다. 이 하나님 개념에 대해 커다란 혁명을 일으킨 분은 본회퍼 목사다. 그는 독일이 나치당 정권 하에 있을 때 고백교회라는 지하교회를 조직한 분으로 히틀러 암살 계획에 참여했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사형을 받았다. 그는 고난받고 있는 인간의 현실, 부당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현실, 그리고 그곳에 의의 칼을 휘두르지 않는 하나님 때문에 고심했다. 죄없는 유태인이 다만 정치적 흥정을 위해 수없이 죽어가고 있다! 어린 아이까지 공포와 두려움에 몸을 떨고 있다. 저 죄없는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그리고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온 세계를 살인의 현장으로 바꾸어 가고 있는데 도대체 하나님은 왜 가만히 계실까? 목사 본회퍼의 고민이었다. 그는 결연히 일어나 악의 세력에 도전키로 작정한다. 하나님이 자신의 의를 실현치 않는다면 나라도 할 것이다. 하나님은 이겨야 하고 하나님은 승리해야 하고 하나님은 히틀러보다 강해야 한다. 하나님은 높은 곳에서 히틀러보다 더 강력한 명령을 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옥중에서 비로소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성서의 하나님을 그는 옥에서야 만나게 된다. 그는 옥에 갇혀 있을 때 『옥중서간』이라는 책을 썼는데 거기에 이런 말을 쓰고 있다.
“하나님은 스스로 세계의 밖으로 십자가에로 밀려 나가는 것을 허락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약하고 무력하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가 우리와 같이 있을 수 있고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바로 그 길이고 또한 유일한 길이다. 마태복음 8장 17절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도와주는 것은 그의 전능에 의해서가 아니고 그의 약함과 고난에 의해서임을 분명하게 한다. 이것이 기독교와 다른 종교를 구별짓는 결정적인 구별이다. 인간의 종교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의 어려움에 처하여 세상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게 한다. 인간들은 하나님을 임기응변책(Deus ex Machina)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성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무력과 고난으로 향하게 한다. 다만 고난 받는 하나님만이 도울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왜 믿느냐 하면 그는 전능하시기 때문이라든지 그는 어느 신, 어느 무엇보다 강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본회퍼는 우리는 왜 하나님을 믿느냐? - 하나님은 약하고 무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급할 때 하나님을 부르면 척 오셔서 언제나 구해주고 살려주고 자기는 인간의 고난이나 괴로움 같은 것과는 관계없는 높은 자리에 앉아서 구제사업이나 벌이고 계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약할 때 우리의 약함에,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 우리의 고난에 함께 계심으로 우리를 도우시는 것이고 그렇기에 그 하나님은 약한 자, 고난을 받는 자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마태복음 8장 17절은 지난 주일 증언의 본문이었던 이사야 53장의 한 구절을 예수에게 적용시킨 대목이다.
“‘그는 몸소 우리의 괴로움을 맡으시고 우리의 병을 짊어지셨다’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신 것입니다”(새번역).
이와 같은 하나님 개념을 현대 신학자 몰트만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라고 이름 붙이고 있다. 우리말로도 번역이 된 이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라는 책을 읽어 가노라면 홍분과 도취가 아닌 착 가라앉으나 그러나 깊이, 예리하게 우리의 가슴을 후비고 들어와서 몽롱한 우리의 영혼이 깨우침을 받는다. 마치 죽은 세포가 하나하나 살아나듯 이기심과 탐욕, 그리고 자기 앞밖에 생각하지 못하던 우리의 영혼의 세포를 눈뜨게 한다. 몰트만은 포로수용소에서 가까스로 살아난 비젤(Wiesel)이 『밤』이라는 책에 썼던 한 대목을 자기 책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 인용하고 있다. 그 내용은 이런 것이다.
“한 젊은이를 목 매달아 죽였다. 그 젊은이는 반 시간 이상이나 죽음의 투쟁을 했다. ‘하나님은 어디 있는가?’ ‘그는 어디 있는가?’ 한 사람이 내 뒤에서 물었다. 오랜 시간 뒤에 젊은이는 여전히 줄에 매여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나는 또 한 사람이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하나님은 지금 어디 있는가?’ 그리고 나는 내 속에서 대답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어디에 있는가? 그는 여기에 있다. 그는 거기에, 교수대 틀에 달려 있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하나님은 높은 하늘에, 깨끗한 옷을 입고 옥좌에 앉아 계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다. 여기서 초연하게 눈을 지긋이 감고 계시는 하나님을 말한다면 그것도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다. 칼을 휘두르며 호령을 하고 모든 나치당원을 몰살시키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말한다고 해도 그것도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다.
오늘날 가장 큰 문제는 사회정의가 무너지고 인간의 고통이 이처럼 극심한데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느냐 하는 문제다. 현재 우리 인간은 인간의 정치, 경제, 문화, 건강, 모든 면에서 부조리와 고난과 아픔 속에 있다. 정치의 과정을 보아도 반짝 빛났던 민주주의의 맑고 파란 하늘, 그것이 벌써 또다시 먹구름에 흔적을 숨기고 있다. 10ㆍ26 사태 때만 해도 국민의 눈치를 보느라 실눈을 뜨고 허리를 굽히던 유신의 하수인들이 이제는 당당히 유신체제가 정당했다고 한다. 누가 잘된 것까지 모조리 버리고 고치자고 한 적 없다. 그런데 구태여 잘된 것은 계승해야 하겠다는 말을 왜 하는 것일까? 어제까지 대통령에게 절대 대권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바로 6개월 전 국회에서 절대로 대통령의 대권을 약화시킬 때가 아니라고 국민에게 공헌하던 장본인이 이제와서는 대통령에게 대권을 주는 것은 옳지 않고 시대에 맞지 않는다고 말재주를 부리기 시작한다. 경제 문제에 대해서도 별별 말이 다 많다. 요컨대 국민 전체는 언제나 몇몇 사람에게 우롱을 당하고 가난한 서민은 제도와 체제에 의해 가만히 앉아서 돈을 빼앗기고 있다는 것이다. 개인 사이에, 단체 안에서 부당한 일이 너무나 뼈아프게 일어나고 있다. 병원에서는 생명을 위한 아프고 괴로운 투병이 침대 위에서 몸부림치고 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정의로우시며 사랑이시라면 이러한 세계적 역사적 불의와 악의 승리, 사회의 혼란, 개인의 고통을 왜 처리하실 수 없는 것인가 하는 것이 오늘날의 문제이다. 왜 역사의 흐름을 거역하는 무리를 그냥 놓아 두시며, 왜 빈익빈 부익부의 경제 현실을 그냥 놓아 두는 것이며, 왜 억울하고 부당하게 행하는 자는 떵떵거리고 살도록 방임하며, 왜 병 속에서 그 극심한 고생을 하는 자를 벌떡 살려내지 못하는가? 이러한 분들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들과 하나님은 어떻게 관계되어 있는가? 아무래도 대답을 찾을 수 없어서 우리는 불의하지만 정치적으로 힘만 있다면 거기에 끼여 보려 하게 되고 어쨌든 부익부하는 부에 내 주소를 두고자 하며 억누를망정 억눌림은 피하고 부당하게 할망정 부당하게 취급되지 않게 되도록 하며, 병이라면 무엇이나 금방금방 낫게 해주는 하나님을 찾아 나서게 된다.
그러나 다시 한번 본회퍼의 말을 인용한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 주시는 것은 전능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의 약함과 고난에 의해서이고 “다만 고난받는 하나님만이 우리를 도와줄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강함으로가 아니라 약함으로, 억누름에 의해서가 아니라 억눌림으로 우리를 도우신다.
사순절은 이 하나님, 우리와 함께 고난받음으로 우리를 돕고 계시는 하나님에게로 눈을 돌리는 계절이다. 우리는 오늘의 비아 돌로로자에 눈길을 던져 그 길 위를 더듬어 살펴 보자. 거기 고난받고 뒹구는 주님이 계시지나 않는지.
구약성서 본문은 이스라엘 전 국민이 자신들의 죄를 벗는 방법에 대하여 기록한 것이다. 백성들이 저지른 온갖 잘못과 일부러 거역한 온갖 죄악을 고백하고는 그 모든 죄를 그 염소 머리에 씌운다. 그리고 대기하고 있던 사람을 시켜 그 염소를 빈들로 내 보낸다. 그렇게 하면 그 염소는 그들의 죄를 모두 지고 황무지로 나가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한 후 이 일을 주관한 장본인은 옷을 벗고 목욕을 하고서야 다시 거룩한 곳으로 들어 간다는 것이다. 이 염소를 나는 “뒤집어 쓰고 떠난 염소”라 이름 붙여 본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저지른 죄를 스스로 걸머지고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잘못을 저지르고 그것이 쌓여 터질 만큼 되면 그 죄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그러나 죄에 대한 책임은 반드시 져야만 한다. 인간이 지은 죄는 결코 어물어물 없어지지 않는다. 아비의 죄가 삼 사대에 이른다는 말은 죄란 적당히 없어질 수 없다는 말이다. 인간은 자신의 죄악을 벗기 위해 누구에겐가 그 죄를 뒤집어 씌워 책임을 묻고 책임을 지운다. 거룩한 방법과 보기 좋은 예식을 갖춘다. 염소의 머리에 안수를 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부조리와 불의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고 있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자신이 지려 하지 않는다. 쌓이고 쌓여서 한계에 도달하여 마치 가득 채워진 풍선처럼 터지려 하면 온갖 거룩한 구실을 다 동원하여 염소를 찾고 그 염소에게 자신들의 죄를 뒤집어 씌운다. “뒤집어 쓴 염소”가 생기게 된다.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는 뒤집어 쓴 염소를 본 일은 없는가? 정치의 현실 속에서, 경제의 현실 속에서, 또 개인과 개인, 개인과 단체 속에서, 혹은 병원 침대 위에서 뒤집어 쓴 염소를 본 일은 없는가?
그런데 그 염소는 입이 없는 염소다. 아니, 입은 있으나 말은 할 수 없다.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얼마나 기가 막히겠는가? 그러나 말을 할 수가 없다. 그 염소는 ‘그래, 너희의 모든 잘못이 내 머리에 있구나’ 한탄하며 황무지로 떠난다. 죄를 지고 황무지로 떠나는 염소는 처량하기보다 거룩하다. 그러나 그에게 펼쳐지는 곳은 황무지다. 살 수 없는 망망함, 몸을 감추거나 곡식을 얻어 낼 수 없는 곳이다. “뒤집어 쓴 염소”는 이제 “뒤집어 쓰고 떠난 염소”다. 삶의 터에서, 인간 세상에서 살 수 없는 황무지로 떠나게 된다.
오늘의 정치 현실에서 누가 뒤집어 쓰고 떠난 염소일까? 오늘의 경제적 부조리 속에서 뒤집어 쓰고 떠난 염소는 누구일까? 그들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들은 정치, 경제, 우리의 관계, 모든 고통과 고난을 한 몸에 지니고 떠남으로 인간의 죄악을 씻는 속죄 염소다. 그 속죄 염소가 있게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 속죄 염소가 있음으로 해서 오늘 우리가 건재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사회 정의가 무너지고 인간의 고통이 극심한데 하나님은 어디 계시냐? 하나님은 뒤집어 쓰고 떠나 보냄을 받고 계시다. 바로 억울함을 당하는 그와 함께, 바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그와 함께. 우리는 과거에는 몰랐다. 그 뒤집어 쓰고 떠난, 지지리도 못난 염소가 하나님 자신인지를 몰랐다. 하나님은 오히려 씌워 보내는 사람 편인줄 알았다. 뒤집어 쓰고 떠나면서도 말 한 마디 하지 못한 그 머저리 병신이 하나님 자신인지를 몰랐다. 황무지에 버려진 그 불쌍한 염소가 하나님이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그러나 성서는 그 염소를 연역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냈다. 그 염소가 누구냐?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인간의 모든 죄를 지고 죽으심으로 분명해졌다. 염소가 그랬듯이 예수 그리스도가 뒤집어 쓰고 떠났다는 것이다. 그 염소는 그렇기에 염소가 아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요 예수 그리스도의 작은 상이다.
우리가 만약 뒤집어 씌워 떠나 보내는 장본인이라면, 오늘도 우리가 그 따위 수작을 작게든 크게든 하고 있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것과 똑같은 행위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고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이 사순절에 만에 하나라도 그런 사실이 있다면 소스라치게 놀라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못박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놀라지 않는다면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통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로 소스라치게 놀라게 함으로 회개하게 하는 힘이 있는 십자가다. 그냥 관념적으로 죄를 씻어 주는 십자가는 아니다.
내가 뒤집어 씌워 떠나 보낸 장본인은 아닌가를 깊이 생각해 보자. 그리고 만약 그런 일이 나에게 있다면, 이 사회가 그런 일을 지금도 자행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제 깊이 회개해야 한다. 주님께서 우리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고난받으셨다고 고백한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또 다른 십자가를 만드는 것은 주님을 믿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 비아 돌로로자를 걷고 있는 예수를 찾자. 그가 왜 거기를 걷고 있는가? 그리고 만약 우리 중에 뒤집어 씌움을 받고 황무지로 쫓겨난, 부조리와 고통의 장본인이 있다면 당장 와서 구해낼 하나님을 찾지 말자. 성서의 하나님은 당장 오시지 않는다. 당신과 함께 그 고난과 고통을 당하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고난을 당함으로 고난을 이기는 것이 기독교의 신비다. 십자가를 짐으로 부활하는 기독교의 신비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요 작은 상이다.
당신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다. 홀로 고난을 받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이다. 이 고난의 길을 걸어감으로 민족의 죄를 속하고 역사의 죄를 속하고 가정의 죄를 속하고 너의 죄를 속하는 것이다.
이 길을 뚜벅뚜벅 걷는 위대함이여, 그것은 당신의 걸음이 아니다. 하나님의 걸음이다. 그것은 당신의 발이 아니다. 하나님의 발이다. 비아 돌로로자를 걷고 있는 예수의 발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