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아 돌로로자를 걷는 예수
1980년 3월 9일 / 이사야 53장 1-10절
김상근 목사
[회상 노트] 비아 돌로로자를 걷는 예수
분하고 기가 막혔다. 10ㆍ26으로 유신의 악령이 쓰러지리라 믿었다. 이른바 12ㆍ12 사태가 터졌다. 박정희 살해 사건을 지휘하던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계엄사령관을 체포한 사건이었다. 멀쩡한 낮에 총격전을 벌이고 온 시민들을 공포에 몰아 넣었다. 결국 전두환 일당이 완전하게 정권을 쥐게 되었다.
YWCA 위장결혼식 사건으로 체포되어 당한 일련의 경험은 우리가 아직도 유신체제 아래에 있다는 것을 확인케 했다. 그 짐승 같은 폭력에 담긴 메시지는 “유신은 안 죽었어”라는 것이었다. “유신에 저항하는 놈은 다 죽여!” 그들이 내뱉은 독설이었다.
더 가슴이 터질 것 같았던 것은 대중의 판단이었다. 때는 분명히 역사의 전환점이었다. 변화와 변혁으로 가야 했다. 그러나 오히려 박정희 예찬론이 대중 속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유신시대에 무엇이 그리도 불편했더냐고 반문한다. 이만큼 먹고 살게 된 것은 박 대통령의 덕이 아니냐는 것이다.
아, 저 수난자들이여, 당신들은 무엇인가? 지금에 이르면 정당한 평가를 받게 되어야 할텐데. 그로 인하여 새 세상을 열어 제쳐야 할텐데. 당신들은 지금, 이 민주지향의 시점에서도 수난자란 말인가. 독재의 먹구름은 어느새 온 하늘을 덮고 있다. 불의가 다시 역사의 중심에 선다.
하나님, 당신은 도대체 어디 계신 것입니까? 무엇을 하고 계신 것입니까? 우리의 이 고통을 왜 보시지 못하는 것입니까? 우리에게 당신은 과연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지금 비아 돌로로자를, 그래 우리 수난자와 함께 걷고 계신 것이구나! 때마침 예수님의 수난을 기억하고 그를 배우는 사순절이었다. 시대마다 집단의 죄를 짊어지는 수난자가 있어 그 시대가 비로소 연명한다. 인류는 그럼으로써 그 감당할 수 없는 죄악에도 불구하고 내일을 얻게 되는 것이리라.
그 수난의 길, 속죄의 길 - 비아 돌로로자를 힘들게 지나가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결정적 속죄의 삶은 그의 고난의 깊이 만큼 결정적이다!
힘들겠지만 비아 돌로로자를 다시 걷자고 했다. 뚜벅뚜벅 걸어가면 거기에 하나님께서 일치의 기적을 이루어내신다.
[말씀을 향한 물음]
사순절이 시작되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 고난당하셨다는 것이 생소하게 느껴지지는 않는가? 만약 그렇다면 왜 그럴까? 예수의 고난을 나를 위한 고난으로 억지로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라면 올해의 사순절을 어떻게 보내려 하는가?
[슬라이드]
[설교 전문]
알려 드리는 말씀 시간에 광고 드린 것처럼 우리는 오늘부터 사순절, 혹은 수난절에 들어가게 된다. 원래 교회에서 쓰는 교회력에 의하면, 부활주일 40일 전날인 수요일을 성회일(聖灰日)이라 하고, 그날을 머리에 재를 뿌리고 자신의 모든 죄를 회개하는 날로 삼았다. 성회일부터 부활절까지 40일 동안을 사순절(Lent)이라 부르고 광야의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또 마지막 고난을 받으시던 주님을 생각하며 회개하고 금식을 해왔다. 이러한 교회의 풍습이 해를 거듭할수록 그야말로 ‘풍습’이 되어버리면서 점점 그 자취를 감추어 가고 있다. 그러나 온전히 40일은 아니지만 부활주일인 4월 6일까지 4주간 동안 우리는 광야의 주님, 고난받으시던 주님을 기억하면서 경건하게 회개하는 생활을 해주시기를 바란다.
올해의 사순절에는 특히 무엇을 명상의 대상으로 삼고 또 회개의 기준으로 삼을까? 나는 이상한 발음의 명사 ‘비아 돌로로자’를 생각해 냈다. 비아 돌로로자(via Dolorosa)는 주님을 재판했던 로마의 총독 빌라도의 법정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던 골고다까지 이르는 예루살렘의 거리 이름이다. 그래서 그 길을 ‘고난의 길’이라 하고 지금도 많은 성지순례자나 관광객들이 그 길을 걸으며 주님을 생각하곤 한다. 올해의 사순절에는 비아 돌로로자를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우리의 명상 대상으로 삼고 또 그 예수를 기준하여 회개하는 기간으로 삼자는 것이다.
비아 돌로로자를 지나 걸어가는 예수의 모습은 무엇인가? 그러나 우리는 그를 볼 수 있는 기능을 잃었다. 세속의 갖가지 욕망이 우리의 눈을 흐리게 했다. 정욕과 교만, 미움과 불신들로 녹슨 쇠판처럼 부스럼이 나 있기 때문이다. 비쳐질 수 없는 거울, 맑은 하늘을 볼 수 없게 된 눈,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 없는 우리의 호흡기를 새롭게 해보자. 그래서 이 사순절에 비아 돌로로자를 지나가고 계신 한 사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쳐다 보자. 우리에게 반드시 심한 충격, 깊은 흔들림이 있게 될 것이다. 급기야 일어나 그를 따라 나서게 될 것이다.
구약성서 본문의 배경은 이렇다. 때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기 훨씬 전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빌론 제국에 포로로 잡혀가 있었으나 이제 바빌론의 운세가 기울어져 가고 있을 때였다. 신흥 강대국인 페르시아가 바빌론의 국운을 무너뜨리려 하고 있을 때였다. 이 때, 기원전 6세기는 그렇기 때문에 매우 뒤숭숭하고 불안스러웠다. 바빌론 당국은 넘어져 가는 나라를 잡아 보려고 갖은 강경책을 다 쓰고 있을 때였다. 모두가 불안해 했고 여기저기서 눈치를 보아가며 귓속말을 주고 받는 때였다. 그리고 제 일신, 제 가정의 안전을 위해 조심조심하고 있을 때였다.
그 때 포로로 와 있던 유대인 한 사람이 바빌론 당국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의 외모는 참으로 보잘 것이 없었다. 그는 바싹 메마른 땅에 뿌리를 박고 가까스로 돋아난 햇순이라고나 할 수 있을 만큼 보잘것없는 사나이였다. 늠름한 풍채도, 멋진 모습도 그에게는 없었다. 아무리 보아도 눈길을 끌 만한 볼품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반역자라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구 시대, 옛 시대, 하나님의 버림을 받는 바빌론의 반역자라는 것이다.
그는 무엇을 했길래 반역자가 되었는가? 그는 폭행을 저지른 일도 없다. 입에 거짓을 담은 적도 없다. 바빌론에 반역하여 특별한 일을 한 것도 없다. 다만 한 가지, 바빌론은 망하게 될 것이고 이스라엘 민족은 제 나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예견했을 뿐이다. 그러나 바빌론이 그를 반역자라 한 것이고 바빌론이 그를 경계한 것이고 바빌론이 그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잡혀서 문초를 받는다. 갖은 굴욕을 당한다. 욕을 먹고 매를 맞는다. 그들은 몽둥이로 그의 옆구리를 쿡쿡 찌른다. 채찍으로 때리고 수염을 뽑았다. 온몸에 상처가 났고 으스러졌다. 고문은 더 계속된다. 침을 뱉고 모욕을 준다. 말로 할 수 없는 치욕을 당한다.
“나는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기며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턱을 내민다. 나는 욕설과 침뱉음을 받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리우지도 않는다”(사 50:6).
그러나 그는 입을 열지 않는다. 고문하는 자에게 몸을 내맡긴다. 마치 털 깍이는 양처럼 그는 온갖 굴욕을 받으면서도 입 한 번 열지 않는다. 도살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처럼 결코 입을 열지 않는다. 그는 유죄판결까지 받는다. 억울한 재판을 받은 것이다. 억지로 죄를 그에게 뒤집어 씌운다. 그런데도 “그 신세를 걱정해 주는 이가 어디 있었느냐?” 그는 사회에서 끊기고 만다. 급기야 어느 날 죄인들과 함께 어디론가 끌려 갔다. 그리고는 산 자의 땅으로는 다시 못 돌아오는 불귀객이 되고 만 것이다.
그를 놓고 시비가 엇갈린다. 같은 포로들 사이에서 의견이 갈라진다. 하나는 이렇다. 그는 아무런 폭력을 쓴 일도 없고 거짓을 말한 적도 없다. 그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다. 다만 그는 ‘이제 새 시대가 온다, 새 세계가 열리게 될 것이다, 바빌론은 망하고 페르시아가 일어날 것이며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들도 바빌론의 멸망과 동시에 본국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 라는 희망을 예견했을 뿐이다. 아니면, 이 지긋지긋한 포로생활을 새장 속에 갇힌 새, 그 새의 아픔으로 감히 표현했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 중에 누군가가 그를 무고하게 바빌론 당국에 고발하여 그처럼 곤욕을 당하게 했고 기어코 인간 사회에서 끊어지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소수의 의견이었다.
또 하나의 의견은 대다수의 것이었다. 대부분의 포로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그 자는 벌을 받아 마땅한 죄인이다. 바빌론 당국이 우리를 포로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잘 살게 하는데도 불구하고 이 나라가 망한다고 민심을 소란시키고 유언비어를 퍼트리고 그 동안 이 체제 속에서도 애써 구축한 우리의 안전한 생활터전을 뒤흔든 악질분자다. 보아라. 그가 불귀객이 되지 않았느냐? 결국 그는 하나님께 천벌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여기 이 사형수를 눈여겨 쳐다본 한 시인이 있었다. 마음의 거울을 닦고 그를 비추어 본 시인, 눈을 맑게 하여 그를 쳐다본 시인, 그를 자세히 쳐다보고 있던 그는 그 이름 모를 죄인에게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놀라운 의미를 깨닫게 된다. 이 시인은 깊은 통찰을 통하여 놀라운 생의 진실을 발견한다. 그의 발견을 읊조린 대목은 공동번역 성서보다 개역성서 번역이 더 좋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그가 무죄하다느니 유죄라느니 하는 차원이 아니다. 그는 대속적 인물이라는 차원의 깨달음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깨달음인가? 욕심이 차 있는 마음에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깨달음이다. 어두운 마음에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깨우침이다. 편견과 증오로 메워진 마음에는 결코 생길 수 없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깨우침의 경지다. 한 발 더 나아가 이렇게까지 깨닫게 된다.
“우리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며 제 멋대로들 놀아났지만, 야훼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구나”(사 53:6).
참으로 기가 막힐 만큼 성숙한 깨달음이다. 이런 대목은 이사야서에 여러 군데 나온다(42:1-4, 49:1-6, 50:4-9, 52:13- 53:12 등). 이것을 ‘종의 노래’라 하는데 이 성서가 씌어질 때도 “그”가 누구인지 몰랐다. 그러나 전체적인 내용은 어느 한 사람이 우리 때문에, 우리가 앓을 병을 앓아 주었으며, 우리가 받을 고통을 대신 겪어 주었고, 대신 징벌을 받고, 대신 고난을 당하고, 대신 찔렸고, 대신 채찍에 맞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화를 면하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평화까지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 ‘종의 노래’는 지금으로부터 2,600여 년 전에 한국이 아닌 저 먼 곳 중동에서 읊어졌다. 시간과 공간에 엄청난 차이가 있으나 이 시를 읽노라면 그 내용이 그렇게 난해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놀라웁게도 우리의 가슴에 뭉클한 감회를 일으키기까지 한다. 뭔가 우리가 화를 당했어야만 했는데 그 화를 다른 이가 대신 당했다는 느낌이다.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지고 가는 속죄자를 만나게 된다.
이 시인을 배우자. 시인은 당시 무고하게 죽어가는 한 사형수를 예사롭게 넘겨 버리지 않았다. 세상에는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애통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병고에 몸부림치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 무고하게 죽어간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다. 이들은 ‘종의 노래’에 나오는 사형수의 여러 모습들이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예사로 지나쳐 버린다. 그러나 시인은 ‘한 사형수가 있다’는 이 현실을 예사롭게 지나쳐 버리지 않았다.
이 사순절에 ‘한 사형수가 누군가’를 찾자. 많은 포로들처럼 그를 향하여 빈정거리지 말고 이 시인처럼 맑은 마음으로 그를 쳐다보자. 내 속에 있는 모든 죄된 마음,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게 하는 모든 죄된 마음을 씻어 버리고 담담한 마음, 깨끗한 마음으로 오늘의 사형수를 찾고 그를 쳐다보자.
오늘의 사형수는 누굴까? 직장에서 쫓겨난 YH 여공? 동일방직의 124명 종업원? 병원에서 신음하며 생명의 맥박을 세고 있는 중환자들? 약하고 신분이 높지 않다고 도둑 혐의를 쓰고 잡혀가 매를 맞고 있는 사람? 펜을 빼앗기고 거리로 몰려난 채, 아직도 복직이 안된 채 고등실업자 신세를 못 면한 100여 명의 동아, 조선일보 기자들? 수사기관에 잡혀가 반역자라고 무수한 고문을 받고 있는 사람들일까? 아니면 지난 10여 년 동안 정당한 재판을 받지 못한 채 불귀객이 되어버린 사람들일까? 4ㆍ19의 희생자들일까? 성실하게 일하면서도 생활고를 이길 수 없어 자살해 버린 이름 모를 어떤 사람들일까? 호화스런 도시의 뒷골목에서 어두운 생활을 벗어나지 못하여 전전긍긍하는 깡패나 호스테스 …… 누굴까?
이 시인의 또 하나의 놀라운 통찰은 한 사형수가 당한 비극을 결코 사형수 자신의 문제라든지 아니면 시인 자신과만 관련시키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받을 고통을”, “우리가 앓을 병을”, “우리의 허물을”, “우리의 죄악을”, “우리가 평화를”에서 “우리”는 누구를 가리키는 말인가? 그것은 한 형제나 한 집안, 혹은 한 단체를 가리키는 복수명사가 아니다. 여기서의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이다. 이 시인은 한 사형수의 고난을 민족과 연관시키고 있다. ‘내가 받을 고통을 대신, 내가 앓을 병을 대신, 내 허물, 내 죄악, 내가 평화를’이라고 해석하고 싶을 것이다. 나의 속죄자로 여기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민족이 받을 고통, 민족이 앓을 병을 대신, 민족의 허물, 민족의 죄악, 민족의 평화’라고 해석하고 받는다. 민족의 속죄자로 받고 있다.
시인의 눈은 컸다. 시인의 시야는 넓었다. 아니, 그의 눈이 크고 시야가 넓었다기보다 그의 평소의 기도가 바로 이것, 민족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한 평범한 포로의 사형을 보고 그는 민족의 죄와 민족의 허물을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물론 논리의 비약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정신’이다. 이것이 ‘종교’다. 아니 이것이 ‘신앙’이다. 자신의 관심과 기도가 자신을 넘어서 민족에게로 승화하는 여기에 신앙의 성숙이 있다.
오늘 우리는 우리 민족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민족의 장래와 연결을 갖지 못하는 신앙은 큰 신앙이 못 된다. 한 사형수의 고통과 민족의 죄와 속죄를 연관시킬 수 없는 말라진 마음에는 이 같은 시인의 신앙이 생길 수 없다. 우리에게는 물론 자신의 문제가 있다. 이것을 버리라는 것도 아니요 이런 것 따위는 가치 없는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나의 죄, 나의 허물 따위는 얼마든지 좋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 모든 것이 민족 공동체, 민족 전체와의 연관을 떠나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지금이 특히 그럴 때다. 저 사형수가 했듯이, 바빌론이 망하게 될 것이고 페르시아가 득세케 되어 이스라엘은 본국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자기 민족에게 큰 관심을 두었던 바로 그와 같은 시점에 우리가 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을 통해 민족의 속죄를 발견한 저 시인의 경건한 신앙의 눈, 그 맑고 깨끗한 신앙의 안목이 우리에게 꼭 있어야 할 때이다.
나는 여러분께 제의한다. 이 사순절에 이 역사 속에 오고 간 한 사형수를 찾자고. 그리고 그의 고난의 의미를 발견하자고. 그때서야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고난당하시고 죽으셨다는 저 놀라운 신비의 깊이를 경험케 될 것이다. 그때서야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고난당하셨다는 것이 생소하지 않은 감동적 현실로 몰아쳐 오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