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혀
1979년 11월 25일 / 호세아 12장 1-7절, 골로새서 3장 5-10절
김상근 목사
[회상 노트] 진노의 도화선
지난 8월에 이른바 YH사건이 있었다. 노동자들이 마포의 신민당 당사로 가서 농성을 했다. 급기야 경찰이 야당 당사로 난입하여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로 끌어냈다. 김경숙이 희생당하는 불상사가 있었다. 공권력의 횡폭이었다. 즉시 YH사건 대책위원회를 조직하여 활동했다. 나는 조사단의 일원이 되었다. 사회의 각계 인사를 망라한 YH문제 대책위원회도 조직되었다. 독재자와의 투쟁이 가파르게 올라 갔다.
국회는 야당 총재인 김영삼 의원을 제명했다. NCC의 교회와 사회위원회를 중심으로 독재를 무섭게 몰아세웠다. 당황한 정권은 박형규, 이재정, 한완상, 그리고 나를 구속했다. 10월 10일에 내가 제일 먼저 연행되었다. 남산 깊은 곳에 위치한 시경 분실에서 조사를 받았다. 조사관들이 정권으로부터의 심정적 이탈을 드러내 보였다. 10월 18일 부산 일원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부마 민주항쟁이 일어난 것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10월 26일 박정희 살해사건이 발생했다. 1961년 쿠데타로 집권하여 만 18년간 철권통치를 했다. 그의 정치적 야심과 그의 이른바 국민을 위한 독재를 위해 그가 감옥에 가둔 자가 얼마며 얼마나 많은 목숨을 빼앗았던가!
그의 죽음, 심복이요 죽마고우에게 처형을 당한 그의 죽음은 왜 그렇게 온 것인가를 성서에 물었다. 탐욕과 음행과 비진리가 원인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이 나라의 기회였다. 민주, 민족, 민중의 시대를 열 수 있는 기회였다. 최규하 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고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는 이 위기와 기회의 시기에 아무런 기능을 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암살당했으나 박정희의 통치는 계속되었다. 때를 전환점으로 삼아낼 기미가 전혀 없었다. 해직교수협의회, NCC 등이 성명을 내고 나라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했다. 그러나 민주화를 역행하는 조치만을 당국은 발표했다.
11월 24일 이른바 ‘YWCA 위장결혼식’ 사건이 터졌다. 그것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간접선출하는 것을 반대하는 집회였다. “통대선출저지 국민대회”였다. 재야 세력의 무서운 저항이었고 일대 결전이었다. 군부는 체포로 대응해 왔다. 나는 그 대회의 실행위원이었다. 당연히 체포당했다. 박 정권 18년 동안에도 당해보지 않았던 모진 고문을 서빙고 보안사에서 당해야 했다. 무차별적이고 모욕적이었다. 성직자로서의 위신과 권위를 짓밟아버리는 고문을 나는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그렇다. 예수님도 침 뱉음을 당하셨지 않은가.
[말씀을 향한 물음]
우리는 새 시대의 전환점에 서 있다. 옛 시대를 보내고 새 시대를 창조해야 하는 시점에 있다. 새 시대를 창조하는 이는 누구일까?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진실을 보며 바른 길을 닦는 이는 누구일까?
[슬라이드]
[설교 전문]
우리는 지금 참으로 중대한 역사적 시점에 놓여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매우 큰 기회를 주시고 계시다. 그것은 ‘너희가 좋은 나라, 훌륭한 사회를 이루어 보아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좋은 기회이면서 또 하나님의 무서운 감시를 받고 있는 시점임을 알아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잘해 나가면 좋은 나라를 이루게 될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또 한번 혼란이 야기되고 세계의 골칫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이요 하나님의 진노다.
그런데 만약 그렇게 된다면 언제 하나님의 진노가 내려지게 되느냐 하는 말씀을 지난 두 주일에 걸쳐 증언했다. 양심이 폐위당했을 때, 수치심을 도둑맞아 버렸을 때 하나님의 진노가 내린다고 했다. 바울이 골로새서 3장에서 지적하고 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인간의 혀가 부서져 버렸을 때이다.
야고보서에는 혀에 대하여 이런 말을 쓰고 있다. 혀는 인체에서 아주 작은 지체에 불과하지만 그 작은 혀로 허풍을 떨고 잘못 그 혀를 놀리다가는 결국 인생의 수레바퀴를 불에 태워 버리게 하고 만다는 것이다(약 3:5,6). 혀의 관리를 잘못하면 그 개인이나 사회나 국가가 파국에 직면케 된다는 말이다. 혀의 관리를 잘못한다는 것은 이 혀가 온전해서 진실을 말해야 할텐데 그렇지 못하는 것이다. 혀가 부서져 버려서 거짓을 말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한때 인간의 행동을 그것 자체만으로 심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윤리이론이 대두된 적이 있다. 소위 “상황윤리”라 이름 붙여진 이 논리는 매우 소박하지만 윤리적 상황에서부터 시작된다. 말하자면 이런 경우 어떻게 하는 것이 옳으냐 하는 것이다. 어떤 아름다운 여자가 정부로부터 나라를 위해 미인계의 주역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이 아름다운 여자의 윤리적 상황, 나라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자니 간음죄를 범해야 하고 간음을 하지 않자니 나라의 요청을 저버리는 것이 되는 난처한 윤리상황에서 과연 무엇이 선이냐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또 어떤 사람이 강도에게 쫓겨 들어온 사람을 숨겨 두고 그 강도에게 정직하게 내가 숨겨 놓았다고 말해야 할지 그렇지 않으면 이 약한 자를 위하여 거짓말을 해야 옳은 것인지 몰라서 고민하는 집 주인의 윤리적 상황에서부터 소위 ‘상황윤리’라는 신학을 출발시키고 있다. 이것은 선한 삶을 살자는 고민이다. 나라를 사랑하고 약한 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이웃 사랑의 신앙에서 비롯된 고민이다.
그러나 골로새서에서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마시오’ 라고 한 것은 이러한 유의 거짓말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는 거짓말, 사회를 병들게 하는 거짓말,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하는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의 혼이 깨끗할 수 없다. 거기에는 갖가지 음모와 흉계가 있고 탐욕과 불성실이 있는 것이다. 이런 마음으로부터 건전한 계획이 나올 수 없고 사랑이 나올 수 없다. 거짓말이 판을 치는 사회가 맑을 수 없다. 사랑이 있을 수 없다. 그런 사회는 음모가 있고 흉계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 사회는 하나님의 뜻, 진리, 바른 것을 헤아리지 못한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남북왕조로 분열되었을 때 북왕국에서 활동하던 선지자다. 본문에 “에브라임”이라 한 것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별명이다. 그는 에브라임이 망할 것을 예견하고 있다. 그것은 그에게 앞을 내다보는 신통력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거짓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망하는 법이고 거짓이 판치는 사회, 그런 나라는 망하기 마련이기 때문에 그렇게 예견되었던 것뿐이다.
에브라임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이렇게 해야 한다, 하나님을 위하여 저렇게 해야 한다고 했었다. 백성에게 의무를 지우곤 했다. 그러나 그것은 백성을 위한 것도, 하나님을 위한 것도 아니었다. 자신의 탐욕을 위한 것이고 자신들의 영달을 위한 것이요 자신의 안일을 위한 것일 뿐이었다. 하나님을 빙자한 것이요 거룩한 과제를 빙자한 거짓 행각이었다. 에브라임의 혀가 부서져 버렸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호세아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했다. “에브라임은 거짓말로 나를 에워 쌌고 이스라엘 가문은 속임수로 나를 둘러 쌌다.”
우리는 지금 옛 시대를 보내고 새 시대를 창조해야 한다. 옛 시대의 또 하나의 특징은 거짓, 거짓말이 상식이 되었다는 점이다. 혀가 부서져 버렸다. 사실을 말해야 할 혀가 부서지고 말았다. 우리 시대에 참말이 있는가? 누구의 말인들 믿게 되지 않는다. 거짓말을 할 때는 거룩한 명분을 내세운다. 우스운 이야기로, 정부가 물가를 절대로 안 올리겠다고 하면 백성들은 ‘아, 또 물가가 오르겠구나’ 라고 생각하게끔 되었다. 절대로 대통령에 출마 안 한다고 하면 의레 출마하겠다는 말로 들리게끔 되어버렸다. 어느 기업인은 자신이 법에 걸려 국민의 지탄을 받게 되자 전재산을 사회에 바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몇 년 후 또 똑같은 일이 일어나자 또 똑같이 기자회견을 하고 법석을 떨면서 전재산을 사회에 바치겠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재벌이다.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사람치고 ‘이 영광스러운 일을 해보고 싶다’고 하지 않고 ‘나는 이 민족을 위하여 십자가를 질 생각이오’라고 한다. 그것이 거짓말인 것은 자신도 알고 듣는 사람도 안다. 그런데 그런 거짓말이 귀에 거슬리거나 싫지 않게 되어버렸다. 그까짓 거짓말 정도야 어떠랴 하고 있다. 이런 풍토는 개인의 생활에서도 그렇다. 거짓말쯤이야 상식이 되어버렸다. 죄로 여기지 않는다. 거짓말을 술술 해도 괜찮다. 어떻게 그렇게 되는 것인지 혀가 고장나버린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 거짓말의 풍토는 기어이 하나님의 진노의 도화선에 불을 당겨 놓고 만다는 것이다. 더구나 거짓말쟁이들의 속성이란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힘만을 의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에브라임도 거짓말하는 것 때문에 망할 것은 생각하지 않고 어떤 나라와는 동맹을 맺고 또 어느 나라에는 뇌물을 먹였다. “앗시리아와 동맹을 맺고 이집트에 기름을 선사한다”(12:2). 그렇게만 하면 아무리 거짓말을 해도 망하지 않을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러던 에브라임은 호세아의 예언이 글로 정리될 때에는 이미 망해버렸던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거짓으로 서로 속이면서 돈만 벌어 놓으면 된다, 나를 잘 지키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며 철옹성을 쌓는다. 그러나 거짓은 그렇게 되지 않는다. 우리도 거짓이 오래 못 가는 것을 얼마든지 보아 오고 있다. 거짓을 말하는 사람은 하늘을 볼 수 없다. 그 거짓에 걸려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음성을 듣지 못한다. 그 거짓에 가려서 볼 수 없다. 그러면서 그 거짓의 바탕이 되는 탐심과 허욕 따위를 거룩한 하늘이라 믿고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 믿는다. 그러기에 무슨 십자가를 진다는 말을 감히 하는 것이다. 제 탐심이 하늘인지 착각한다. 아니,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방자하게 되어버린다. 조심조차 하지 않게 된다.
그렇지만 요한계시록 21장 8절 이하에 보면 그런 거짓말쟁이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그러나 비겁한 자와 신실하지 못한 자와 가증한 자와 살인한 자와 음란한 자와 마술쟁이와 우상숭배자와 모든 거짓말쟁이들이 차지할 곳은 불과 유황이 타오르는 못이다.” 그리고 27절에는 세상 마지막 날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지 못할 자를 이렇게 구분해 놓고 있다: “모든 속된 것과 가증한 것과 거짓을 행하는 자는 결코 들어가지 못하고…….” 새 역사의 주인은 거짓말을 안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거짓말쟁이는 새 역사의 무대에서 추방되어야 한다. 특히 지도자가 새 역사를 시작하는 기수가 되겠다고 하면서 거짓말을 하고 있으면 그런 사람을 국민은 새 역사의 무대에서 쫓아내버려야 한다. 그런 사람은 자신도 망하고 나라도, 우리도 망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자신으로부터 거짓말을 몰아내자. 부서진 혀를 회복시켜야 한다. 제멋대로 놀아나던 혀가 이제는 진실을 말하게 되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을 닦아야 한다. 맑은 거울처럼 우리의 눈을 씻어야 한다. 우리의 혀를 고쳐야 한다. 그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지시가 들리게 될 것이요 그때에야 비로소 진실이 보이게 될 것이요, 그때에야 비로소 바른 길을 가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나, 어떤 나라를 세워야 하나 하는 것도 그때에야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다.
신동엽 씨의 시,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를 함께 읽어보자.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쇠 항아리,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항아리.
아침 저녁
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
티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
볼수 있는 사람은
외경(畏敬)을
알리라.
아침 저녁
네 머리 위 쇠항아릴 찢고
티없이 맑은 구원(久遠)의 하늘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연민(憐憫)을
알리라.
차마 삼가서
발걸음도 조심
마음 모아리며
서럽게
아 엄숙한 세상을
서럽게
눈물 흘려
살아 가리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