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안에서 자랑하라 [텍스트 버전]
[예레미야 9:23-24. 고린도전서 1:29-2:5]
이기영 목사
로마 가톨릭의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근자에 전격 사임함으로, 근 600년 만의 사건이라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그의 선임자였던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가 선종하면서 남긴 말이 대중매체를 통해 전해졌습니다. 그것은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십시오”라는 짤막한 내용이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한 삶을 원합니다. 그러나 정작 행복이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정답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국어사전에는 행복을 복된 좋은 운수, 심신의 욕구가 충족되어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상태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와 동양에서는 전통적으로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 등의 5복을 누리면 행복한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새해 인사도 “복 많이 받으십시오”라고 합니다. 정월 보름날도 복 받는 날의 연장선에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도 한국교회의 신앙 형태는 복 받는 데 최종 관심을 두는 ‘기복신앙’이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서 떠나, 이 세상에서 복 많이 받고 행복한 삶을 누리는 데만 고정되어 있다면 이것은 우리 모두가 깊이 반성하고 시정해야 할 문제입니다.
예수의 산상수훈 중 8복의 말씀은 세상적인 복을 우위에 두고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가난한 자, 애통한 자, 의를 위해 핍박 받는 자’들이 행복할 수 있을까요? 여기에 성경이 말하는 복과 행복의 진정한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면 ‘복 받는다’든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말할 때에 그 우선순위가 매우 중요하며 결정적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먼저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구하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말씀은 ‘주 안에서 자랑합시다’라는 메시지를 전하겠습니다. 사람들이 자랑해서는 안 될 것이 있고, 자랑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의 근본을 먼저 알고 우선순위에 따라서 사는 것이 지혜롭고 복된 삶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솝 우화에 “늑대와 그림자”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저녁 늑대 한 마리가 길을 걷다가 갑자기 놀랐습니다. 길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가 대단히 컸기 때문입니다. 해가 서쪽으로 지기 시작하자 늑대의 그림자는 점점 더 길어지고 커졌습니다. 늑대는 “내가 몹시 컸구나” 하고 대단히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혼자서 으스댔습니다. “나는 이렇게 크고 훌륭해, 나는 이제 사자나 호랑이도 무섭지 않아. 사자야 나오너라!” 그때 나무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자가 불쑥 늑대 앞에 나타났습니다. 사자가 앞발로 놀란 늑대를 치니 늑대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습니다. 이 이솝 우화의 교훈은 이렇습니다. “누구든지 길에 비친 그림자를 진짜 자기 모습으로 생각하면 큰일입니다.”
1. 자랑하지 말라는 것이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구약 본문에서 자랑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9:23에서 세 가지로 자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첫째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머리 좋은 것, IQ(지능지수) 높은 것, 여러 가지 재주와 능력이 있는 것을 자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과학자들 중에는 성공의 80%가 지능과는 무관하게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IQ가 상대적으로 좀 낮아도, 꾸준히 노력하는 분들이 훌륭한 연구를 하여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인생도 지혜보다도 성실히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21세기는 IQ에서 EQ(감성지수)로 패러다임 전환이 이루어지는 시기입니다. 오늘 같이 복잡하고 다양한 현대사회에서 지능지수보다는 감성지수가 더 중요합니다.
둘째,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힘 있는 사람, 권력 있는 사람은 그 힘과 권력을 자랑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동양에도 ‘십 년 가는 권력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건강한사람도 하루 아침에 쓰러지는 것이 인생입니다. 건강하다고 자랑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야 할 것은 감정의 인식, 감정(특히 불안, 분노, 슬픔 등)의 조절과 통제, 낙관적 인식과 자신감, 타인과의 감정이입(상대에게 집중하여 경청하려는 자세), 사회적 관계의 형성함을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셋째,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성서는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딤전 6:10)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심으로, 재물의 유혹이 얼마나 현실적으로 막강한 것인지를 경계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부와 재물은 자랑할 것이 아니라 청지기적인 관리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섬기는 일에 잘 써야 하는 것입니다.
2. 무엇을 자랑할 것인가
예레미야 당시 유대사회는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은 어려움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들을 섬기며 음란하고 불순종하며 범죄하였습니다. 지도자들도 모두 부패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향하여 “네가 양떼를 흩으며 그것을 몰아내고 돌보지 아니하였도다”(렘 16:12, 23:2)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선지자와 제사장이 다 사악한지라 내가 내 집에서도 그들의 악을 발견하였노라”(렘 23:11)고 경책하셨습니다. 북쪽에서는 바벨론 제국의 군대가 쳐들어오는 데도 시대적 상황을 자각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범죄와 불순종을 일삼았고 그 지도자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본문에서 보는 대로 사람들은 자기의 지혜, 돈, 힘자랑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레미야는 자랑을 하고 싶으면, 진짜로 자랑할만한 것을 자랑하라고 말씀합니다. 구약 본문 9:24절에서 예레미야가 자랑하라고 권하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랑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아는 것의 내용을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자랑은 하나님 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과 우리도 하나님 안에서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을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둘째, 자랑할 것은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이라는 점입니다. ‘정의’(히브리어 미쉬파트)는 하나님의 주권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합니다. 아무리 사회가 혼란스럽고 역사에 질서가 없어 보이며 세계가 우왕좌왕하는 것 같아도, 심지어 교회 공동체까지도 인간들의 수단과 방법, 정치가 통하는 것 같아도, 하나님은 오늘도 살아 계셔서 인간의 모든 역사를 살피시고 심판하시며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자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시편 1편에 있는 말씀대로 “의인의 길은 야훼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멸망하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비록 악이 잠시 승리하는 것 같으나 최후 승리는 진리 편에 있다는 것을 자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정의를 행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자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셋째, 우리가 자랑할 것은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라는 점입니다. 여기서 ‘공의’라는 히브리어 ‘츠다카’는 ‘하나님의 구원행동’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죄악에서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특히 가난한 자, 약한 자, 억눌리고 소외된 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약하고 가난한 자, 병들고 소외된 자, 억눌리고 억울한 자들을 돌보아 주고 도와준다면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공의가 되고 주 안에서 우리의 자랑이 될 것입니다.
3. 바울의 고린도 선교와 교회의 상황
바울의 아덴 선교의 성패는 청중이 얼마나 많았는가에 달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몇 사람이 … 믿었고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행 17:34)는 말은 개종한 사람이 적지 않았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신약성경 어느 곳에도 아덴의 교회에 관한 언급이 없으며, 바울은 고린도에 갈 때에 “두려워하며 심한 떨림”(고전 2:3) 중에 그곳에 도착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약함” 중에 있었다는 말은 의기소침은 물론, 신체적인 병도 암시해 줍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청중에게 철학적인 논쟁으로 설득하려는 모든 노력을 맹세코 포기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고전 1:20-25, 2:1-6)을 내용으로 하는 복음적 메시지로 되돌아갔다는 것은 주목할 만합니다. 이 부분에서 바울은 그의 선교의 내용 전환점을 맞았던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개척하여 세운 고린도 교회는 특히 문제가 많기로 대표적인 교회였습니다. 몇 가지만 예를 들면, 교회 안에 여러 분파가 생겼습니다. 베드로파, 바울파, 아볼로파, 심지어 그리스도파로 나뉘어 다툼이 있었습니다. 또 교회 안에 부도덕한 일들이 있었는데 간음, 이혼, 별거 등의 문제로 시끄러웠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당시 다신교 문화권에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시장에서 음식, 특히 육류를 살 때 그리스도인들이 이교 신들에게 제사했던 음식을 사다 먹어도 되는가에 관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예배를 드릴 때도 무질서한 모습들이 나타났고, 성찬식에서도 먹고 마시는 것에 욕심을 내는 사람들 때문에 어려운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의 부활에 관해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들 때문에 신앙적인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겪은 문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계 어디에서든, 우리 한국교회에서도 예외 없이 일어나는 문제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문제는 곧 밖에, 사회와 세계에서 일어나는 통시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인은 교회와 사회의 제반 문제에 대응하는데 양심과 자유에 따라 “십자가의 도”로 증거할 것을 바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고 말씀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문제해결의 열쇠는 십자가의 지혜와 능력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때 가능합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서 또 불신의 사회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확신합니다.
4. 그리스도 안에 새 사람의 가치관
바울이 그의 모든 서신에서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는 중심사상은 그리스도의 인격에서 인류역사상 최초의 새 사람을 발견하였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사람의 인격적 변화를 믿었습니다. 그 변화된 새 사람들에 의해 새 역사가 만들어진다고 믿었습니다. 바울에게 새 사람이란 어떤 사람이며 새 사람이 되기 위해 반드시 버려야 했던 옛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바울에게 옛 사람은 예수를 만나기 전의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예수를 만나기 전의 바울-즉 사울-은 유대교의 대석학이고, 바리새파의 지적 리더였으며, 희랍어를 모국어 못지않게 구사하는 당대 최고의 엘리트였고, 신분상으로는 유대인의 명문 출신이고, 로마시민권을 소유한 특권층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유대민족의 종교적ㆍ문화적 전통을 가장 소중한 것으로 존중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세계를 지배하는 로마의 헬라 문화도 충분히 이해하고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바울이 예수를 만난 후의 새 사람-사울이 아닌 바울-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그토록 존중하고 자랑하던 자기 신분과 지식, 유대교의 전통과 헬라 문회를 분토와 같이 여겨 그것을 내버리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새 사람으로 변화한 바울의 눈에 비친 유대주의는 우주의 하나님, 세계만방의 하나님인 야훼를 유대민족의 좁은 울타리에 가둬 둔 화석처럼 굳어 버린 율법주의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헬라 문화는 현세주의적 물신숭배의 다신교적 우상숭배로 보였습니다. 새 사람으로 변화한 그의 눈은 자기 민족의 시대착오적 오류와 헬라문화의 허위를 정확히 간파하고 미래의 새 세계가 가야 할 새 길을 뚫어 보고 있었습니다. 그 새 길은 유대주의에도 헬라 문화에도 없었습니다.
그 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뿐이었습니다. 그 길만이 새 역사를 만들어 낼 새 사람들의 길이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즉 세계 모든 사람에게 새 사람이 되라고 확신을 갖고 목숨까지 바쳐 가며 그리스도를 전파하였습니다. 옛 가치관, 옛 세계관의 옛 사람들을 새 가치관 새 세계관의 새 사람들로 변화시키어서, 이 새 사람들이 새 역사의 주인공이 되어 새 역사와 새 문화를 창조하게 하는 것, 그것이 바울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자랑한 것이고, 그의 간절한 소망이었습니다.
5. 예수의 죽음을 짊어진 바울의 자화상
바울의 자화상에는 그의 숱한 옥살이 체험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죄수’는 그리스도에 의한, 그리스도를 위한, 그리스도 닮기라는 바울의 목표 달성에 대한 이미지를 보여줍니다. 바울은 구속된 몸이든, 고통받는 몸이든, 그 몸 안에 예수의 죽음을 지고 다님으로써 예수의 생명이 그 몸 안에 나타나기를 원했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0).
고대 로마제국에서 전투를 승리로 마친 뒤 군대의 수장이 전차를 탄 채 앞장서서 사로잡은 포로들을 이끌고 개선행진(triumphal procession)을 하는 광경을 연상시킵니다. 이 포로들은 결국 그 행진이 끝나는 자리에서 처형되게 되었습니다. 또한 바울은 약한 자의 이미지를 빌려 강함을 꿈꾸며, 바보를 자처하면서 참된 지혜의 본질을 설파합니다. 이러한 역설적 논리에 따라 그는 사악한 죄 없이도 그리스도의 죄수가 되고, 선한 싸움을 하고도 하나님의 개선행진 대열 속에 포로 노예로 등장하며, 죽을 순간만 조바심내며 기다리는 원형극장의 마지막 사형수가 되어 하늘과 땅의 관중을 위한 구경거리(spectacle)가 되었다는 것입니다(고후 4:9 참조). 이상의 바울의 자화상을 통해서 우리는 그가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충실한 종(노예)로서 특히 그의 십자가의 삶을 본보여 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에게 진실로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고전 1:24).
6. 바울의 그리스도 자랑과 한반도 수난의 뜻 찾기
바울은 솔직한 양심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자기의 자랑이라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깊은 진리를 날마다 새롭게 이해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날”에 우리 모두의 자랑이라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그리스도의 지식이 날마다 새로워 그 영의 생명이 성장하고 그것이 우리의 품격이 되고 우리의 생활이 되어 “종말의 날”까지 끊임없이 자라 그리스도의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이 우리의 자랑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중에서도 특히 그의 “십자가”를 자랑하라 하였습니다. 바울은 “내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갈 6:14)고 고백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적극적 사고나 경쟁심과 열심, 또는 건전한 자존심 등을 성공의 비결이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열심과 열정은 그 정도를 넘어 ‘우리의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또 다른 자원’을 갖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즉 우리의 속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 실로 거기에선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무서운 힘이 생깁니다. 천둥이나 번갯불보다 더 무서운 힘이 폭발합니다. 이런 힘, 하나님의 사랑의 힘은 세상의 그 무엇이나. 죽음까지도 우리를 떼어 놓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거룩한 힘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바로 왕의 위협을 물리치고 출애굽을 하였고 바울이 로마제국이나 유대교의 세력을 극복하며 새 나라, 그리스도 주권의 토대를 놓았고, 루터가 교황청의 중세기 1천 년을 정복하며 새 교회상을 회복하였고, 웨슬레가 대영제국의 국교를 넘어 감리교를 시작했던 일 등 모든 힘이 다 이런 ‘신적 능력’이라할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들의 시대와 역사의 흐름을 역류하여 새 역사 새 사명을 위해 오직 한 일로 푯대를 향하는 삶을 본보여 준 본보기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분단 반세기를 넘는 민족적 비극에 대하여 또 다시 물으며 기도하게 됩니다. 우리는 전쟁 당사자인 독일인이나 일본인이 아니라, 그 피해와 억압의 장본인입니다. 해방을 받았는데 어찌하여 반세기가 넘는 오늘에까지 남북분단으로 통일의 희망이 아니 보이는 까닭을 어찌해야 합니까? 기독교 교세가 세계적이요 그 규모나 활동이 세계 제일을 자랑하면서도 분단 반세기를 넘고 있으니 잘못된 것이 너무나 많은 것 아닙니까?
함석헌 옹은 세계의 오물을 뒤집어 쓴 창녀 같은 한반도요, 세상의 온갖 죄악을 다 집결시킨 고난의 여왕 같은 존재라며, 이는 ‘시련의 세계를 구원할 능력을 키우려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라 보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극심한 민족의 고난 속에서 이사야 53장의 수난의 종, 메시아 탄생의 태동을 꿈꾸었듯이, 우리 한민족도 냉전체제에 마지막 남은 한반도의 쓰라림도 세계를 구원하는 대속의 수난으로 믿고 해석하며 인류의 희망을 여기에서 태동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올해는 정전협정 6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최소한의 의미에서, 한국전쟁을 매듭짓고 평화체제의 원년으로 삼기 위하여, 상생의 원리에서 남북 당사자 간의 합의, 다음에 주변국들의 찬동을 받아 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평회통일의 예지와 결단, 희생과 용기로 출발할 때입니다. 하나님, 우리를 도와주시옵소서.
장공 선생님은 한 때 “한반도는 지금 비참한 현실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면에서 가장 ‘소망’적입니다. 세계에서 보기드문 양심적인 기독자가 있어, 하나님의 의로운 사랑을 ‘수혈’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각기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향하어 행진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영광의 광채’라 하겠습니다. 그들의 자랑은 십자가요 우리의 역사는 십자가를 통하여 창조되는 행진입니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신 십자가 위에서의 예수의 마감 절규는 버림받아 ‘없음’으로의 경지입니다. 그러나 그때에 하나님의 ‘아멘’이 선포됩니다. 그 하나님의 ‘아멘’이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진실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자랑입니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고후 10:17-18).
주 안에 계신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주 안에서 자랑할 것이 있어야 합니다. 석양에 비친 늑대의 그림자 같은 헛된 것을 자랑하지 맙시다. 우리의 자랑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그것은 곧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따르는 것이라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이라고, 하나님을 믿는 거룩한 힘, 새 사람 된 생명력이라고 확신합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성북교회, 2013. 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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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설교의 핵심 메시지를 시각적 이미지와 함께 직관적으로 묵상하시려면 [이미지로 보는 설교] “주 안에서 자랑하라”(예레미야 9:23-24, 고린도전서 1:29-2:5) 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