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위당한 양심
1979년 11월 11일 / 골로새서 3장 5-6절, 왕상 21장 16-21절
김상근 목사
[회상 노트] 진노의 도화선
지난 8월에 이른바 YH사건이 있었다. 노동자들이 마포의 신민당 당사로 가서 농성을 했다. 급기야 경찰이 야당 당사로 난입하여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로 끌어냈다. 김경숙이 희생당하는 불상사가 있었다. 공권력의 횡폭이었다. 즉시 YH사건 대책위원회를 조직하여 활동했다. 나는 조사단의 일원이 되었다. 사회의 각계 인사를 망라한 YH문제 대책위원회도 조직되었다. 독재자와의 투쟁이 가파르게 올라 갔다.
국회는 야당 총재인 김영삼 의원을 제명했다. NCC의 교회와 사회위원회를 중심으로 독재를 무섭게 몰아세웠다. 당황한 정권은 박형규, 이재정, 한완상, 그리고 나를 구속했다. 10월 10일에 내가 제일 먼저 연행되었다. 남산 깊은 곳에 위치한 시경 분실에서 조사를 받았다. 조사관들이 정권으로부터의 심정적 이탈을 드러내 보였다. 10월 18일 부산 일원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부마 민주항쟁이 일어난 것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10월 26일 박정희 살해사건이 발생했다. 1961년 쿠데타로 집권하여 만 18년간 철권통치를 했다. 그의 정치적 야심과 그의 이른바 국민을 위한 독재를 위해 그가 감옥에 가둔 자가 얼마며 얼마나 많은 목숨을 빼앗았던가!
그의 죽음, 심복이요 죽마고우에게 처형을 당한 그의 죽음은 왜 그렇게 온 것인가를 성서에 물었다. 탐욕과 음행과 비진리가 원인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이 나라의 기회였다. 민주, 민족, 민중의 시대를 열 수 있는 기회였다. 최규하 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고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는 이 위기와 기회의 시기에 아무런 기능을 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암살당했으나 박정희의 통치는 계속되었다. 때를 전환점으로 삼아낼 기미가 전혀 없었다. 해직교수협의회, NCC 등이 성명을 내고 나라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했다. 그러나 민주화를 역행하는 조치만을 당국은 발표했다.
11월 24일 이른바 ‘YWCA 위장결혼식’ 사건이 터졌다. 그것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간접선출하는 것을 반대하는 집회였다. “통대선출저지 국민대회”였다. 재야 세력의 무서운 저항이었고 일대 결전이었다. 군부는 체포로 대응해 왔다. 나는 그 대회의 실행위원이었다. 당연히 체포당했다. 박 정권 18년 동안에도 당해보지 않았던 모진 고문을 서빙고 보안사에서 당해야 했다. 무차별적이고 모욕적이었다. 성직자로서의 위신과 권위를 짓밟아버리는 고문을 나는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그렇다. 예수님도 침 뱉음을 당하셨지 않은가.
[말씀을 향한 물음]
우리는 지금 역사가 급격히 변화해 가는 와중에 있다. 새 질서를 찾아야 하는 과제 앞에 있다. 새 질서는 언제나 우리 자신에게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우리는 오늘 위기에 서게 된 이유를 자신들에게서 찾아보자.
[슬라이드]
[설교 전문]
인간의 모든 일을 인간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 상식이다. 예를 들어 외적의 침입을 받았을 때 그것은 국방이 허술했다거나 작전이 잘못되어 그랬다는 식이 상식이라면, 그것을 하나님의 눈에서 해석한 것을 적은 것이 성서의 역사 기록이다. 인간사에는 기쁜 일도 있고 참혹한 일도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중에는 명백하게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로구나’,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구나’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있다. 특히 국가의 위기를 언제나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 성서의 특징이다.
오늘 우리의 현실이 위기요 비상시라고 모든 사람이 입을 모으고 있다. 무엇이 위기냐, 무엇 때문에 비상시냐고 묻거나 대답할 어떤 논리가 반드시 있어서가 아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느끼고 있다. 또 논리를 찾아 보아도 위기라 하는 분명한 근거는 없다. 대통령이 저격 살해되었기 때문인가? 그것이라면 이미 권한 대행이 있고 또 신속히 새 대통령을 뽑으면 그만이다. 언제나처럼 북의 남침 위기 때문인가? 그것은 세계가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원치않고 있기 때문에 적어도 ‘지금은’ 위기가 아니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면 경제의 혼란 때문인가? 나는 위기라고 말할 만큼의 경제 혼란이 역시 ‘지금은’ 없다고 본다. 그 흔한 사재기 선풍도 일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위기를 느끼고 있다면 그것은 오늘 우리는 어떤 심판 아래 있다는 막연한 직관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 국민 모두가 지금 심판 아래 있다. 다만 우리는 역사적으로 지난 20여 년을 정리, 평가해야 하고 그래서 새 역사를 시작해야 한다는 명령 앞에 너나를 막론하고 서 있다. 이제 우리는 지난 20여 년을 한 시대로 접어 보내고 새 시대를 창조해 가야 한다. 그런데 이것을 잘못했다가는 우리는 정말 위기로 떨어지고 말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 아닐까. 지금이 바로 어떤 심판대 위에 선 때라는 공통되는 직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요 이제까지 우리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라고 믿는다. 말하자면 지금 자칫 잘못하면 하나님의 진노의 채찍을 맞게 된다는 위기의식이다.
골로새서 3장 5절에 보면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의 진노는 왜 내리게 되는 것이냐’ 하는 것을 밝히고 있다. 말하자면 위기는 왜 오는 것이냐를 밝히고 있다. 그것은 결코 거창한 논리가 아니다. 세 가지 것을 지적하고 있다. 탐욕, 음행, 비진실이 위기를 오게 하는 이유라고 말하고 있다. 이 세 가지 이유가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들이는 도화선이라는 것이다. 나는 새 역사를 열어 나가야 하는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이것이라고 믿는다. 이 말씀 속에서 이 위기를 헤치고 나가는 빛을 찾아야 한다.
우선 오늘은 ‘탐욕”에 대하여 상고해 보자. 골로새서 3장 5절에 “탐욕은 우상숭배”라고 했다. 탐욕이라는 것은 곧 신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탐욕을 가지고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이 성서의 가르침이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딤전 6:10),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는 것이다”(마 6:21). 성서의 기록자들은 자기 나라가 패망한 후 그 패망의 이유를 여러 가지로 연구하였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다시 이렇게 하면 바른 나라를 만들 수 없다는 경종으로 삼곤 하였다.
오늘 택한 구약의 본문은 바로 그 탐욕의 역사 기록이다. 이것은 ‘아합’이라는 왕에 대한 기록인데 그를 가리켜 열왕기상 16장 30절에 “아합은 이스라엘의 다른 어느 선왕들보다도 더 야훼의 눈에 거슬리는 일을 하였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가 이렇게 평가받은 이유와 또 이스라엘 패망의 원인을 여기서 찾고 있다면 그 진상은 어떤 것일까? 무슨 대단한 정책적 실정을 거론하고 있지 않다. ‘탐욕’이 그를 악하게 만들었고 그것 때문에 이스라엘이 망했다는 결론이다.
나봇이라는 사람이 왕궁 근처에 포도원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왕 아합은 그것을 매입하여 그 자리에 정원을 꾸미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합은 나봇에게 그 포도원을 자기에게 팔라고 청을 넣었으나 나봇은 절대로 팔 수 없다고 맞서게 되었다. 나봇이 팔 수 없다고 버틴 것은 본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토지란 사고 팔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땅이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소유이지 인간의 소유일 수가 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 포도원을 팔아 넘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당시의 제도며 종교였다(레 25:23).
아합 왕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나 마음속에 일어나고 있는 이 탐욕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식음을 전폐하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것은 땅은 결코 사고 팔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또 왕권으로 빼앗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그의 양심이 괴로워하고 있었다. 양심상 차마 그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인간과 인간 세계에 양심이라는 것이 건재하는 한 그 사회는 파괴되지 않는다. 하이데거라는 철학자는 양심을 ‘인간 내면의 깊이에서 발하는 소리’라고 했다. 이 인간 내면의 소리가 도덕의 원천인 것이다. “양심은 안으로 인간의 죄책을 추궁하는 내면의 법정이다”(칸트). 그러나 사람이 이 내면의 소리나, 내면의 법정이 내리는 죄책에도 무감각하게 되면 그럴 때 “너도 양심이 있느냐?”라는 파산 선고가 내리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양심은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왕 같은 요소다. 아직까지 아합에게 이 내면의 소리, 내면의 법정인 양심이 살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급기야 이 양심이 폐위를 당하게 된다.
이스라엘 여자가 아닌 그의 아내 이세벨은 아합에게 왕권을 휘둘러 자신의 탐욕을 충족시키도록 강권한다. “왕답게 처신하십시오”라고 강권하면서 스스로 나서서 이 일을 처리한다. 이세벨은 시의회를 소집하고 그곳에 나봇을 출두시켰다. 그리고 그녀는 무뢰배들을 시켜 나봇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왕을 비방했다는 이유로 그를 고소하게 하였다. 나봇은 결국 죄인으로 몰려 성 밖으로 끌려나가 돌로 맞아 죽었다. 왕후 이세벨은 아합 왕에게 말했다. “일어나셔서 이스라엘 사람 나봇이 팔지 않겠다고 한 그 포도원을 차지하십시오. 나봇은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이렇게 하여 아합의 탐욕은 일단 충족을 얻게 되었다.
자신의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어떻게 이런 일을 감히 할 수 있겠는가? 이런 일이 비록 왕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국민 서로 간에 이 같은 일이 성행했었다. 이 사람이 저 사람의 소유를 뺏고 또 저 사람은 이 사람의 소유를 뺏는 세태가 되고 말았다. 양심이 폐위된 시대가 되고 만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악행이었지만 결국 한 사람의 권리를 힘으로 짓밟은 것이고 그것은 결국 하나님에게 도전한 일이다. 이 얼마나 엄청난 폭력인가? 양심이 폐위당한 시대, 남의 것을 빼앗는 세대, 탐욕의 구조는 곧 하나님에게 도전하는 시대요 하나님과 싸우겠다는 구조 이상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아합은 나봇의 비극, 나봇의 비통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봇과의 관계는 완전히 단절되어 버렸다. 힘있는 자와 없는 자의 단절, 이런 시대에 하나님은 언제나 진노하신다. 그 시대에 종지부를 찍으신다. 그리고 새 시대를 열게 하신다.
성서 기록자는 그 이후를 이렇게 쓰고 있다.
“이때 야훼의 말씀이 …… 엘리야에게 내렸다. ‘일어나서 …… 왕 아합에게 내려 가거라. 그는 지금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려고 그곳에 내려가 있다. 가서 그에게 야훼의 말이라 하고 이렇게 전해라. 네가 사람을 죽이고 그의 땅마저 빼앗는구나 …… 나봇의 피를 핥던 개들이 같은 자리에서 네 피도 핥으리라.’”
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고 있는가? 성서 기자는 이스라엘이 패망하여 불쌍한 민족이 된 이유를 바로 여기, 탐욕으로 양심을 폐위시킨 여기에서 찾고 있다.
나는 지난 8월부터 급하게 위기의식을 갖게 되었다. 이러다가는 무언가 우리에게 위기가 올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때 바로 “역사의 해방이 일어나는 때”, “역사의 벼랑이다. 옷을 찢어라”는 등의 제목으로 설교하면서 위정자나 우리 국민이나 모두 회개하고 특히 탐욕을 버리고 서로 일체감을 갖자고 했었다.
아합 왕과 나봇의 단절, 힘 가진 자와 힘이 없는 자의 철저한 괴리현상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아합 왕과 하나님의 단절이요 아합이 하나님께 도전하는 현상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시대가 어느새 탐욕으로 가득 차 가고 자신의 탐욕을 위해서 양심까지 폐위시켜 버리는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너와 내가 단절되고 위정자와 국민이 갈라지는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오직 탐욕의 충족을 위해 폭력만이 난무한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인간 사회가 이렇게 되는 때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했었다. 인간이 서로 단절될 때 그 사회는 파괴되고 마는 법이다. 지렁이란 놈은 자기의 몸이 두 동강으로 잘려지면, 곧 두 개의 독립된 생명체가 되어버리는 편리한 생물이다. 그러나 인간이란 그렇게 편리하지 못한 생물이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반드시 일체감이 있게 마련인 것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다. 그러나 그것을 파괴하는 것이 우리에게 있는 탐욕이다. 이 놈이 우리의 양심을 폐위시켜 버린 것이다. 탐욕으로 눈이 어두워져 버렸다. 제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못할 일이 없게 되어 버렸다. 이것이 상식이 되었다. 위기의 근본 이유는 무엇인가? 탐욕의 팽배다. 모든 사람의 가슴에 탐욕이 차게 되는 것이 위기의 근본 이유다.
이제 우리는 오늘을 위기라 한다면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지극히 도덕적인 말 같으나, 우리 속에서 이 탐욕을 몰아내야 한다. 이 위기를 극복해 낸다면서 또 탐욕의 구조를 만들어내서는 안 되며 판단과 계획이 탐욕으로 시작되어서도 안 된다. 정치인의 가슴에서, 기업인의 가슴에서, 노동자의 가슴에서, 온 국민의 가슴에서 탐욕을 몰아내야 한다. 그리고 폐위당한 양심을 복위시켜야 한다. 위정자의 가슴에도 국민의 가슴에도 폐위당한 양심, 특히 이 세상의 빛으로 서야 할 우리 그리스도인의 가슴에서 이 탐욕을 몰아내야 한다. 그리고 폐위당한 양심을 복위시켜야 한다. 위기에 휘말려 있는 이 사회의 한 구석에서 양심을 복위시키는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골로새서 3장 9절의 말씀대로 “여러분은 옛 사람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시오.” 새 시대를 시작하기 위해 우리 각자가 새 사람을 입읍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