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5:33-37] 버림받은 자 예수 – 1979년 4월 1일, 김상근 목사

버림받은 자 예수

1979년 4월 1일 / 마가복음 15장 33-37절

김상근 목사


[회상 노트] 십자가의 길

내가 살고 있던 목사관 마당에 타블로이드판 인쇄물이 그 날도 던져져 있었다. 서울의 어느 대형 교회 목사의 설교 전문이 실려 있는 설교전도지였다. 매주 같은 요일이 되면 어김없이 던져져 있지만 한 번도 읽어 보지 않았다. 내용이 뻔할 것이고 동의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안하지만 그대로 쓰레기로 버리곤 했다.

그런데 그날은 도대체 어떤 설교를 하는지 읽어보고 싶어졌다. 굉장히 긴 설교였다. 족히 1시간 가까이 걸렸을 것이다. 말올 빨리 해도 40분은 필요한 양이었다. 읽어 가면서 나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복음적일 것이라고 추측은 했지만 이처럼 철저하게 세속적이고 유물적이고 기복적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예수가 지신 십자가가 무언데! 예수께서 십자가를 왜 지셨는데! 예수의 그 처절한 진실을 이 따위로 똥칠을 한단 말인가! 그러나 교인의 요구였다. 교인들은 비복음을 원한다. 비기독교를 기독교라는 보자기로 싸 주기를 바라고 강요한다. 자기의 가치관이 정당하다는 것을 입증해 달라고 한다.

이러한 가치관은 불의한 세상의 권력, 사회의 구조를 정당화한다. 나아가 그것이 지속될 수 있게 하는 대중적 힘이 된다.

십자가에서 그렇게 고통스럽게 죽으신 예수!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비명을 지르신 예수, 그 처절한 십자가의 예수를 어떻게 기성체제의 수호신으로 끌어내린단 말인가. 그 비명의 현장을 보고, 거기서 하나님을 발견한 저 장교의 진실이 우리에게는 왜 없는 것인가?

사순절을 보내면서 나는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 바로 그와 하나가 되신 하나님을 만나고자 했다. 다른 데에 하나님은 아니 계신다. 차마 한 눈으로 볼 수 없는 고통자에게 하나님은 일치하여 계시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메시아주의를 나는 정면으로 거부하고자 했다. 거기에 결코, 결코 구원이 있지 않음을 선포하고자 했다. 교회가 하나님과 하나되고자 한다면 가난한 자와, 옥에 갇힌 자와, 슬피 우는 자와, 도망다니는 자와 …… 그들과 하나되어야 함을 설교하고자 했다. 거기서만 하나님과 하나된다. 내가 하나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오셔서 하나되신다. 거기 외에 다른 데 계시지 않는다. 그때, 나의 신앙고백이었다.


[말씀을 향한 물음]

우리는 예수의 죽음의 모습이 의연치 못하다는 복음서의 보도에 당혹한다. 하나님의 아들답게는 아니라 하더라도 좀 성현답게 죽임을 당할수는 없었을까? 예수는 왜 그렇게 처참하게 죽어갔던가?

아니 그랬었는데도 어느 로마 장교는 그 죽음의 광경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했다. 그 고백에 가보자. 우리는 예수의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는가? 우리의 신앙고백 —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이라는 고백이 우리 영의 심연에서부터 우러나온 것인가? 아니면 습관인가?


[슬라이드]

버림받은 자, 예수

세속적 욕망의 포장지 vs 십자가의 처절한 진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죽음을 앞에 둔 사람들

역사적 십자가의 진실 : 비극과 공포에 찬 절망적 죽음

철저한 부재의 공포

부재(不在)가 아닌, 완전한 일치(一致)

엔도 슈사쿠의 [침묵]

우리가 만들어낸 우상 vs 십자가에 계시된 하나님

우리에게 고통과 슬픔이 있는 한, 하나님은 결코 당당히 죽으실 수 없다.

십자가의 길을 가는 거룩한 걸음

[설교 전문]

성현들의 죽음에 대한 보도가 세상에는 퍽 많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독배가 자기에게 내려지자 쾌활하고 태연하게 그 독배를 마시고 죽어 갔다.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그는 죽음을 택함으로 더 높고 더 순수한 삶으로 도약해 갔음을 증명했다. 스토아 철학의 현자(賢者)들은 폭군에 의해 맹수에게 던짐을 당하게 되었을 때 내적인 자유와 우월성을 폭군에게 과시할 만큼 의연하게, 태평스럽게 사형장으로 걸어 갔다. 그렇게 함으로써 포악한 지배자와 군중들에게 죽음 가운데서도 태연자약할 수 있는 정신의 강함, 내적 자유와 우월성을 보여주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만 보아도 로마의 지배하에 있을 때 반란을 일으켰다가 잡혀 십자가에 죽게 된 열혈당원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거의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의를 의식하면서 의연하게 죽었다. 또한 기독교의 순교자들도 태연하고 경건하게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혀 죽으며 그래서 종국에는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게 될 확신을 가지고 죽을 수가 있었다.

우리가 잘 아는 본회퍼(Bonhoeffer) 목사는 독일 나찌당에 의해 반정부 인사로 사형선고를 받고 플로쎈부르크(Flossenbürg) 강제 수용소의 처형장소로 간다. 그 도중에 그는 친구 포로인 페인 베스트(Payne Best)와 작별을 하였는데, 그 인사는 “이제 끝이다. 그러나 나에 대해서는 삶의 시작을 뜻한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상의 모든 경우에 있어서 소크라테스나 스토아 현자나 젤롯당원이나 본회퍼, 모든 경우에 그들은 죽을 때 절망하지 않고 의연하게, 그럴 듯하게 죽었다.

예수의 죽으심에 대한 복음서의 보도는 서로 완전히 다른 두 가지 전승에 근거하고 있다. 하나는 예수께서 숨을 거두실 때 당당하게 죽으시지 못했다 하는 입장이요, 다른 하나는 아주 의연하게 소크라테스나 스토아 현자나 그 밖의 어떤 순교자보다 성인답게 죽으셨다는 입장이다. 전자에 해당하는 복음서가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이며 후자와 같은 입장은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다.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는 오늘 마가복음 본문처럼 예수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고 부르짖었고, 그 후에 큰 소리를 지른 후에 숨을 거두신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두 복음서보다 훨씬 뒤에 씌어진 누가복음에는 큰 소리로 외친 내용이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기옵니다”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정기적으로 드리는 기도 중 저녁에 드리는 기도문의 한 대목이다.

요한복음의 경우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고 숨을 거두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마가복음의 전승에서는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가 잡히자 도망쳐 버리는데, 누가복음에는 그런 기록이 없고, 요한복음의 경우는 오히려 십자가 밑에 서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마가복음의 경우와 그것보다 훨씬 후기 전승인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의 경우가 퍽 다른 것을 본다. 마가복음은 예수의 최후를 비참하게 그리고 너무나 절망적으로 기록했고,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은 의연한 자세, 의기양양한 자세, 죽음을 초월한 자세로 기록하고 있다. 처절하고 절망적인 마가복음의 기록에는 제자들이 도망쳤다는 것이지만 의연하고 성자다운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의 기록에는 제자들이 도망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그 기록의 흐름으로 보아서 두 경우 모두 자연스럽다.

나는 완전히 다른 이 두 전승의 흐름 중에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의 것은 예수의 부활, 승리라고 하는 신앙적인 각색에 의해 변조된 것이요 그것은 초기 기독교의 신앙고백의 기록이라고 판단되고, 마가복음의 것이 원래의 모습에 더 가까운 것이라고 판단한다. 예수의 죽음의 사실은 비극과 절망이었고 의연하지도 당당하지도 못한 공포에 찬 죽음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한 질문이 성립한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숨을 거두실 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외친 너무나 비극적이고 절망적인 예수의 죽음의 모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는가 하는 것이다. 왜 그는 성현이나 순교자처럼 당당하게 죽을 수가 없었던 것인가 하는 것이다.

또 한 가지의 의문은 그랬는데도 로마의 장교 한 사람은 당당하고 의연한 죽음이 아닌 이 처절한 죽음을 보고 “참으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라고 고백했다면 그는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경험했기 때문일까?

이러한 신학적인 노력을 하는 이유는 첫째,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를 너무나 영광에 찬, 금으로 입힌 화려한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저 로마 장교가 보았던 예수의 죽음을 보지 못하고 있고, 둘째,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고백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죽어버린 고백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예수의 죽음을 꼭 그때처럼 목격하고 그 로마의 장교처럼 “참으로 예수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분의 길을 가야 하겠다는 결단에 이르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이다.

이제 예수가 절망한 이유를 살펴 보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부르짖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사실은 그것을 누가 듣고 있다가 기록한 것도 아니요 또 그렇게 분명한 말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주변의 군인들이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두고 보자”고 말한 것으로 보아 그저 무어라고 비명 비슷하게 질렀던 것이 분명하다.

이에 대하여 마가복음 기자와 그 계승자들은 십자가 위의 예수는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절망했었다고 해석했으며 그래서 그 해석이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말했다는 식으로 전승되게 된 것이다. 십자가 위에서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구나’라고 판단될 때 그의 죽음이 의연할 수가 없다. 그의 공포, 그의 절망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공포요 절망이었다. 아니, 그렇기 때문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는 이 말은 하나님을 찾는 부르짖음이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이 때에 하나님은 어디에 가셨는가? 왜 이 현실을 그냥 두시는가?

그러면 도대체 예수가 이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을 찾았다는 것과 그리고 하나님이 이 예수를 버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평소 예수께서 언제나 대화하고 그리고 인격적인 관계를 가졌던 예수의 아버지가 지금 없어졌다는 의미이다. 언제나처럼 예수 앞에 있어서 예수에게 길을 가리키고 예수에게 용기를 주고 예수의 가슴속에 사랑이 넘치게 했던 타자로서의 하나님이 지금 이 십자가 위에 있는 예수에게는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하나님이 어디로 가셨다는 말인가?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예수가 짊어졌던 그 십자가야말로 아들과 아버지가, 예수와 하나님이 완전히 하나가 되는 자리였다는 말이다. 아버지 하나님이 아들 예수와 꼭 하나가 되어 지금 십자가에 달려 있기 때문에 예수는 언제나처럼 도와주고 끌어주던 하나님을 찾았으나 그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도와주고, 용기와 힘을 주어야 할 그 하나님 자신이 지금 십자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도 골고다 위에 서 있는 저 절망의 십자가,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은 십자가를 만나고 있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고뇌에 버려진 사람의 절망에서, 누구도 위로할 수 없는 절대적인 슬픔에 떨어진 사람의 저 비명에서, 가슴을 에이는 아픔에 버려진 저 몸부림에서 오늘의 십자가를 우리는 만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기대는 이러한 일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은 오셔서 저들을 구해 주셔야 한다. 적어도 예수 이전의 하나님 이해는 그랬다. 언제나 승리하고 언제나 당당해야만 하는 하나님 기대였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하나님을 지금 로마의 장교는 저 십자가 위에서 발견했던 것이다. 인간의 모든 고뇌와 고통, 좌절과 절망을 한 몸에 받아들여 같이 고뇌하고 고통하고 좌절하고 절망하는 하나님이 예수에게서 처음 계시되었던 것이다. 아니 그런 고뇌의 당사자가 되어, 고통과 절망과 좌절의 당사자가 되어 직접 고뇌하고 고통하고 절망하고 또 좌절하는 하나님을 로마의 장교는 보았던 것이다. 인간의 모든 아픔을 그의 내면에 온전히 수용하는, 그래서 승리의 하나님, 당당한 하나님으로부터는 버림을 받은 하나님이 여기 골고다의 언덕에서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일본 사람이 쓴 『침묵』이라는 소설이 있다. 그 책은 일본에 기독교가 전파될 때 선교사들이 당한 고난과 절망을 그린 소설이다. 어떤 선교사든 본토민에게 붙들리면 기어코 사형을 당하게 된다. 불에 타 죽기도 하고 매를 맞아 죽게 되기도 한다. 어떤 선교사가 자기를 시중들던 조력자와 함께 붙들린다. 본토민들은 선교사를 바닷가에 말뚝을 박고 붙들어 매놓는다. 그리고 시중드는 사람은 조금 더 위인 육지에 묶어 놓았다. 파도가 찰싹거리며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선교사는 거의 기진하게 되었고 물은 목을 넘고 있었다. 이제는 입에 닿았다가 말았다가 하다가 결국 코에까지 와서 콧속으로 물이 들어갔다 나왔다 한다. 선교사의 몸부림, 고통은 도저히 볼 수가 없었다. 시중드는 사람은 이 광경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하나님은 어디에 가신 것인가? 옳은 일 하자는 사람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저렇게 죽어가고 있는데 하나님, 왜 조수를 막지 못합니까? 왜 이변도 일어나지 않습니까? 왜 해가 그대로 빛을 발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렇게 외치고 있는 동안 안간힘을 쓴 보람도 없이 그 선교사는 물속에 묻혀 죽고 만다.

하나님은 어디 갔을까? 하나님은 그 선교사와 함께 말뚝에 붙매여 있었기 때문에, 아니 그 순간 하나님도 그 선교사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도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조수는 막아질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왜 오늘날 십자가의 예수를 만나지 못하고 있는가? 대답은 자명해졌다. 우리는 소크라테스, 스토아 현자들, 본회퍼처럼 당당한 그런 하나님, 승리하시는 하나님, 의인을 상주고 악인을 벌하는 심판의 하나님만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프면 금방 일으켜 주시고 억울하면 금방 원수를 갚아 주시고, 악행을 하는 자는 그 자리에서 벌을 주시는 하나님만을 기대하고 또 그렇게 되는 데서만 하나님의 사랑을 인식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에서 화려한 황금색 도금을 벗겨 내자! 우리의 죄를 씻는 신통력 있는, 특효약 정도로 생각하는 이 교리를 벗어 던지자! 우리가 이제 하나님을 만나기 원하느냐? 그러면 내 고통, 내 슬픔, 내 아픔, 내 억울함에 깊이 눈을 박아 보자. 그러면 거기서 바로 ‘나’가 되어 고통하시며 슬퍼하시며 아파하시고 억울해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예수는 왜 십자가에 죽으셨는가? 그것은 곧 인간의 고통 때문에, 고난 때문에 그 고난과 고통을 친히 당하시느라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다. 도대체 하나님은 당당하게 죽으실 수가 없다. 의기양양하게 죽으실 수가 없다. 우리에게 고통이 있는 한, 우리에게 슬픔과 절망이 있는 한, 여러분에게 억울함과 아픔이 있는 한 하나님은 결코 당당히, 의기양양하게 죽으실 수가 없다. 그 고통을 하나님이 짊어지시고 고통을 당하시느라고 의인 같이만 행세할 수가 없다. 여기에 십자가의 위로와 격려가 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에게 고통도, 슬픔도, 절망도, 억울함도 없다면 고통하는 자에게로 가서 바로 그가 되시라. 슬퍼하는 민중에게로 가서 바로 그 민중이 되시라. 절망하는 민족에게로 가서 절망의 주체가 되시라. 그러면 바로 거기에서 하나님을 만날 것이고 그것이 예수의 십자가로 구원받은 상태요 십자가의 길을 가는 거룩한 걸음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