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동자 예수
1979년 3월 25일 / 마가복음 15장 1-4절
김상근 목사
[회상 노트] 십자가의 길
내가 살고 있던 목사관 마당에 타블로이드판 인쇄물이 그 날도 던져져 있었다. 서울의 어느 대형 교회 목사의 설교 전문이 실려 있는 설교전도지였다. 매주 같은 요일이 되면 어김없이 던져져 있지만 한 번도 읽어 보지 않았다. 내용이 뻔할 것이고 동의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안하지만 그대로 쓰레기로 버리곤 했다.
그런데 그날은 도대체 어떤 설교를 하는지 읽어보고 싶어졌다. 굉장히 긴 설교였다. 족히 1시간 가까이 걸렸을 것이다. 말올 빨리 해도 40분은 필요한 양이었다. 읽어 가면서 나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복음적일 것이라고 추측은 했지만 이처럼 철저하게 세속적이고 유물적이고 기복적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예수가 지신 십자가가 무언데! 예수께서 십자가를 왜 지셨는데! 예수의 그 처절한 진실을 이 따위로 똥칠을 한단 말인가! 그러나 교인의 요구였다. 교인들은 비복음을 원한다. 비기독교를 기독교라는 보자기로 싸 주기를 바라고 강요한다. 자기의 가치관이 정당하다는 것을 입증해 달라고 한다.
이러한 가치관은 불의한 세상의 권력, 사회의 구조를 정당화한다. 나아가 그것이 지속될 수 있게 하는 대중적 힘이 된다.
십자가에서 그렇게 고통스럽게 죽으신 예수!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비명을 지르신 예수, 그 처절한 십자가의 예수를 어떻게 기성체제의 수호신으로 끌어내린단 말인가. 그 비명의 현장을 보고, 거기서 하나님을 발견한 저 장교의 진실이 우리에게는 왜 없는 것인가?
사순절을 보내면서 나는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 바로 그와 하나가 되신 하나님을 만나고자 했다. 다른 데에 하나님은 아니 계신다. 차마 한 눈으로 볼 수 없는 고통자에게 하나님은 일치하여 계시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메시아주의를 나는 정면으로 거부하고자 했다. 거기에 결코, 결코 구원이 있지 않음을 선포하고자 했다. 교회가 하나님과 하나되고자 한다면 가난한 자와, 옥에 갇힌 자와, 슬피 우는 자와, 도망다니는 자와 …… 그들과 하나되어야 함을 설교하고자 했다. 거기서만 하나님과 하나된다. 내가 하나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오셔서 하나되신다. 거기 외에 다른 데 계시지 않는다. 그때, 나의 신앙고백이었다.
[말씀을 향한 물음]
우리는 지금 주님의 고난과 부활의 날을 맞기 위해 준비하는 사순절을 보내고 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원래의 죽음에 해석과 신앙적인 채색을 가한 고백이다.
도대체 예수의 죽음의 진상은 무엇인가? 그 거룩하신 분, 하나님의 아들이 가장 추하고 부끄러운 십자가에 죽으시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슬라이드]
[설교 전문]
과연 우리가 주님이라고 부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예수의 죽음의 진상은 무엇이냐? 이것이 고난절을 앞에 둔 나의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다. 그런데 왜 이것을 여러분의 관심으로 삼으려 하느냐? 그것은 목사인 나의 관심이지 교인들의 관심은 아니지 않느냐라는 이론을 스스로 제기해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결론은 “예수의 죽음의 진상”을 분명하게 밝히는 문제는 결코 나의 신학적인 취미나 학구열에만 연관되어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의 출발점은 어디냐?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이 믿었던 것을 우리가 전수하여 ‘우리도 믿는다’는 입장이다. 그러면 도대체 그들이 믿었던 것은 예수라는 자연인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신 예수”를 믿었던 것이요, 또 십자가에 죽임을 당한 수천 명의 사람들 가운데 꼭 그 예수만을 믿었던 것이다. 사실 스파르타쿠스의 반란과 Via Appia라는 곳에서 노예들을 처형했을 때만 해도 7,000명이 한꺼번에 십자가에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많은 십자가의 죽음 중 그들은 예수의 십자가만을 믿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예수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죽음의 진상에서 하나님을 만났다면, 우리도 예수의 죽음의 진상을 발견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논리다.
그러기에 이것은 신학적인 취미나 학문적 노력이 아니다. 건성으로 십자가를 외우지 않으려는 신앙인의 진지한 자세요, 십자가의 길을 구원의 길이라고 고백하며 살려고 내 몸을 용감히 던지는 성실한 기도이다. 그리고 오늘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려는 간절함이다. 우리에게 반드시 있어야만 할 일이다.
지난 주일에 가야바의 재판을 말씀드렸다. 나는 예수의 죽음의 진상을 ‘가야바는 왜 예수를 빌라도의 재판정에 넘겼는가’ 하는 의문에서부터 해결해 보려고 한다. 예수를 제거하려 했던 재판이 유대의 재판인 가야바의 재판이었다면 얼마든지 자기들의 법을 가지고도 예수를 처형할 수가 있었다.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스데반의 사형은 이 예수를 재판한 바로 그 유대 법정의 판결에 의한 것이었다. 그들은 자기들 법에 의해 그를 돌로 때려 죽였다. 바로 그런 권한이 있었던 그들의 재판은 예수를 하나님을 모독한 죄로 사형에 처할 것을 선고했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를 처형하지 않았다. 그리고 빌라도에게 넘겼다.
그 이유에 대하여 성서는 아무 설명도 하지 않고 있다. “새벽이 되자 곧 대제사장들은 장로들과 율법학자들과 온 의회를 불러 계획을 세운 끝에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나가 빌라도에게 넘겨 주었다”라고만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만으로 봐서는 예수를 로마 총독에게 넘겨 준 이유를 발견할 수 없다.
그런데 로마 총독의 법정에서 예수를 기소한 내용에서 그 사실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유대의 법정인 가야바의 법정에서 예수는 하나님 모독자로 기소가 되었는데 로마 총독의 법정에서 던져진 기소 내용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하는 것이었다. 예수는 이 공소사실을 인정하였다. 결국 예수가 빌라도의 법정에까지 서게 된 것은 그에게는 종교적인 문제뿐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까지도 추궁되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가야바는 예수를 빌라도의 법정에 넘겼다.
그러면 ‘유대인의 왕이냐’고 묻는 것은 곧 무엇을 뜻하는 것이며, ‘그렇다’ 고 시인하는 것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냐? 이것을 생각하기에 앞서 여기서 분명하게 규명할 것은 당시에 과연 종교니 정치니 하는 용어가 각각 존재했었느냐 하는 것이다. 당시의 시대 속에서는 정치와 종교를 갈라 생각할 수가 없었다. 모든 나라에 각각의 신이 있었고 그 신의 뜻에 따라 나라가 운영되는 형식을 갖고 있었다. 언제나 신이 있고 그 신이 법을 제정하고 그 신이 왕을 세우며 따라서 그 왕의 뜻을 좇는 것이 곧 신의 법을 좇는 것이요 신의 법을 좇는 것이 신을 섬기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니 종교니 하는 것이 별개의 개념으로 정리될 수가 없었다.
더구나 로마의 경우는 황제가 곧 신이었고 신이 곧 황제였다. 황제를 국가의 신으로 모신 로마는 세계를 정복하여 세계에 ‘Pax Romana’, 즉 ‘로마의 평화’를 정착시키려 했었다. 말하자면 이것은 로마의 종교였는데 이 세계의 영원한 구원이 언제 이루어지느냐 하면 그것은 로마가 세계를 지배할 때에 완성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정치요 종교다.
실제로 로마는 세계를 정복하여 나가면서 제각기 제 나라의 신을 섬기도록 허용하면서 동시에 로마의 황제를 숭배하고 신앙하게 했다. 유대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야훼를 예배하면서 동시에 로마의 황제도 숭배하였던 것이다. 로마의 황제를 숭배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세계의 구원은 황제에 의해, 로마의 통치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따른다는 것을 말한다. 그 당시의 세계에서 로마제국은 하나의 종교적-정치적 질서를 의미 했다.
그러면 이제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묻는 빌라도의 질문의 의미를 살펴 보자. 예수를 단지 예루살렘 내의 안보와 질서를 유지하고 보존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인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다 아는 대로 십자가의 형벌은 국가 모반에 대한 처형 방법이었다. 당시의 십자가 형벌은 로마제국의 사회적, 정치적 질서를 교란하는 선동에 대한 형벌이었다. 그는 로마가 세계에 선포한 ‘팍스 로마나’를 거짓이라고 선동한 선동자요 그렇기 때문에 그는 로마의 신인 황제의 이름으로 처형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하여 “예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묻는 빌라도의 질문은 “너는 로마가 세계의 구원을 이룩한다는 이 신앙을 거부한다는 것이냐”라는 것이요 “너는 로마의 황제가 구원의 메시아임을 인정치 않는다는 것이냐”라는 것을 규명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것은 정치질서에 대한 질문이요 정치적 구원에 관한 물음이었다.
다음으로 “네 말대로다”라고 대답한 예수의 대답의 의미를 살펴보자. 이 대답은 “그렇다. 나는 로마가 절대화되고 황제가 우상이 되는 거기에 이 세계의 구원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 다른 나라가 세워져야 한다. 나는 로마 아닌 다른 나라의 왕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것이 “네 말대로다”라는 예수의 대답의 의미다. 다시 말해 이것은 로마가 주장하고 신앙하는 ‘팍스 로마나’ 정신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행동이었다. 이 세상의 질서는 우상화될 수 없다, 이 세상의 것이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수 없다는 신앙이다. 신격화되어 가는 세상적인 것, 구원의 주체로 군림하는 세상적인 것, 그것의 허구성을 예수는 신랄하게 파헤쳤다. 팍스 로마나, ‘로마의 평화’라는 절대화된 말 속에 있는 인간들의 죄악을 들춰냈다. 평화를 위해 세계를 정복해야한다는 저 힘의 우상을 부수었다. 그 구원의 주체인 로마도, 신으로 추앙된 황제도 거짓된 것임을 폭로했다. 이것은 분명히 이 세상의 우상화된 종교-정치 질서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런데 이 사건을 놓고 예수는 결코 정치행위를 했던 것이 아니었으나 정치범으로 오해되어 죽었다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해석은 결국 ‘예수는 세상의 질서, 특히 정치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따라서 교회는 세상의 질서 따위에 관심해서는 안 된다’는 신학적 입장을 가져 온다. 빌라도는 세기적인 오판을 했던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오판이 아니었다. 그들은 로마의 통치이념에 전적으로 반대하는 선동자를 정확하게 판정하여 죽였던 것이다. 결국 이 한 사나이로 말미암아 로마까지 흔들리고 있었다. 세상이 술렁거렸었다. 로마의 거짓에 세뇌되고 현혹되었던 사람들이 지배자들에게 두었던 기대를 버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예수의 주변에 모였다. 그러니 로마 당국자에게 저가 선동자로 보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예수는 죽으면서까지 세상의 것에 미친 사람들의 눈을 하나님께로 돌리게 했던 것이다.
나는 말을 여기에서 끊고 예수 직후의 추종자들, 그리고 오늘의 상황 속으로 들어가 보고자 한다. 초대 기독교는 로마로부터 혹독한 박해를 받았다. 그것은 세상질서를 절대화하고 완전한 것으로 여기지 않은 예수 때문이었다. 그들은 로마에게 적이었고 로마 밑에서 부화뇌동하던 대제사장, 장로, 율법학자 등 지배계층에게는 목의 가시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해가 바뀌면서 이 예수의 기독교는 변질되어 가기 시작했다. 팍스 로마나와 팍스 크리스티, ‘로마의 평화’ 와 ‘그리스도의 평화’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서로 결합되었다고 궤변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기독교는 로마라고 하는 통일 국가의 국가 종교의 자리에까지 가게 되었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결과인가? 기독교가 자기 종교의 창시자를 죽인 그 나라의 모든 것을 정당화해 주는 종교로 전락하다니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도 분수를 넘는다.
이리하여 박해받던 기독교가 지배자가 되었다. 그리고 정치적 우상, 제도의 우상의 앞잡이 노릇을 하게 되었다. 오늘날도 안일과 명예 그리고 권세욕을 좇아서 정치적 우상, 제도의 우상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기독교를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우상을 선전하는 기독교란 예수의 십자가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세상의 제도나 인물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 온다는 저 로마적인 신앙에 처형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절대로 그럴 수가 없다.
예수의 십자가는 무엇이냐? 세상적인 것을 우상화하는 그 무엇이라도 거부해 온 표적이다. 인간을 우상화하고 제도를 우상화하는 이 세상의 경향성에 ‘아니오’를 외친 ‘소리’가 예수의 ‘십자가’다. 거짓 구원의 논리와 충돌한 현장이 십자가다. 이러한 점에서 예수의 십자가는 다른 모든 십자가와 다르다.
그리고 그 훨씬 후 특히 최근에 와서는 예수는 정치질서 따위에 관심이 없었는데 빌라도의 오해로 죽었다는 것을 정통화시켜 ‘우리는 세상질서에는 관심이 없다. 영혼의 구원을 받고자 하는 것이다’라는 비겁자의 논리를 편다. 그리고 이런 사순절의 절기가 오면 예수의 그 피의 공로로 내 죄가 씻겨져서 천당 갈 일이나 챙기는 파렴치한 치한이 된다. 그 죽음의 진상이 무엇이냐, 예수는 당시의 상황 속에서 왜 가장 처참한 죽임을 당했느냐 하는 것 따위는 관심도 없다. 그저 십자가는 무당의 무슨 부적처럼 되어 버렸다. 믿으면 되었지 그 이유를 파보자 하면 졸음이 온다. 골치 아파한다. 그러나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진상을 모르고 그의 죽음을 믿는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오늘날 그러면 교회가 서야 할 자리가 무엇이냐? 그리고 교회가 져야 할 십자가가 무엇이냐? 말하자면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우상화하는 현대판 팍스 로마나를 거부하는 것이 무엇이냐?
첫째는, 그것은 모든 전제주의나 독재주의를 배격하고 민주주의를 세우는 것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란 정치적 우상, 어느 한 개인이나 집단에 구원의 기대를 거는 정치적 우상을 타파하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하나를 우상화할 수 없다는 철학이 민주주의 철학이다. 그래서 전제 공산주의를 배격하고 독재주의를 배격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져야 할 십자가는 민주주의 실현의 선봉이 되는 것이다.
둘째로, 나는 경제의 무한대한 발전이 현대의 메시아라고 하는 현대판 팍스 로마나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인류의 좌절이 경제가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경제의 발전이 이 세계를 구원해 주고 물질의 향유가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준다는 이 거짓 약속이 지금 우리를 미치게 하고 있고 온 세계를 전쟁과 공포로 몰아 넣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세계에 정의와 평등, 자유와 사랑, 양심과 진리의 신인 야훼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도록 해야 한다. 오늘날 교회가 져야 할 십자가는 바로 야훼 하나님의 통치의 실현을 위한 십자가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살려 하는 사람들은 어느 시대나 박해를 받는다. 그러나 예수는 그것 때문에 죽으셨지 않은가? 우리는 그 예수를 우리 구주요, 그 예수를 따라 평생 살겠다는 무리가 아닌가? 도대체 기독교는 지배자의 종교가 될 수 없다. 만약 지배자의 종교가 된다면 그것은 교회가 스스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로부터 유래한 것임을 부정하는 것이요 그렇기 때문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아닌 것이다. 그러나 시대마다 그랬었지만 오늘날 교회는 또다시 지배자의 종교가 되고자 안달한다. 세상의 구원의 외침을 따라 다니며 보증해 주기에 바빠지고 있다.
우리는 힘들지만 예수의 십자가의 자리에 있어야 한다. 예수의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 한다. 인간을 우상화하고 제도를 신격화하는 경우가 있다면, 그리고 구원의 거짓길을 선포하는 경우가 있다면, 세상을 깨우쳐 결연히 선동자가 되어야 한다. 교회의 자리는 바로 거기다. 선동자 예수 — 그 후예, 즉 선동자 교회이어야 한다!
이 수난절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내 죄를 사했다’ 함은 무엇인가? 우리가 대담하게 세상의 우상을 깨뜨리고 하나님만이 이 세상의 구원자이심을 선포하지 않기에 예수께서 우리의 비겁과 불신앙까지 책임지시고 죽으신 것임을 믿는 것이다. 비겁하던 사람이 용감한 양심의 사람이 되고, 비굴하던 사람이 진리와 정의를 위해 과감하게 되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