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모독자 예수
1979년 3월 18일 / 마태복음 26장 57-68절
김상근 목사
[회상 노트] 십자가의 길
내가 살고 있던 목사관 마당에 타블로이드판 인쇄물이 그 날도 던져져 있었다. 서울의 어느 대형 교회 목사의 설교 전문이 실려 있는 설교전도지였다. 매주 같은 요일이 되면 어김없이 던져져 있지만 한 번도 읽어 보지 않았다. 내용이 뻔할 것이고 동의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안하지만 그대로 쓰레기로 버리곤 했다.
그런데 그날은 도대체 어떤 설교를 하는지 읽어보고 싶어졌다. 굉장히 긴 설교였다. 족히 1시간 가까이 걸렸을 것이다. 말올 빨리 해도 40분은 필요한 양이었다. 읽어 가면서 나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복음적일 것이라고 추측은 했지만 이처럼 철저하게 세속적이고 유물적이고 기복적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예수가 지신 십자가가 무언데! 예수께서 십자가를 왜 지셨는데! 예수의 그 처절한 진실을 이 따위로 똥칠을 한단 말인가! 그러나 교인의 요구였다. 교인들은 비복음을 원한다. 비기독교를 기독교라는 보자기로 싸 주기를 바라고 강요한다. 자기의 가치관이 정당하다는 것을 입증해 달라고 한다.
이러한 가치관은 불의한 세상의 권력, 사회의 구조를 정당화한다. 나아가 그것이 지속될 수 있게 하는 대중적 힘이 된다.
십자가에서 그렇게 고통스럽게 죽으신 예수!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비명을 지르신 예수, 그 처절한 십자가의 예수를 어떻게 기성체제의 수호신으로 끌어내린단 말인가. 그 비명의 현장을 보고, 거기서 하나님을 발견한 저 장교의 진실이 우리에게는 왜 없는 것인가?
사순절을 보내면서 나는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 바로 그와 하나가 되신 하나님을 만나고자 했다. 다른 데에 하나님은 아니 계신다. 차마 한 눈으로 볼 수 없는 고통자에게 하나님은 일치하여 계시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메시아주의를 나는 정면으로 거부하고자 했다. 거기에 결코, 결코 구원이 있지 않음을 선포하고자 했다. 교회가 하나님과 하나되고자 한다면 가난한 자와, 옥에 갇힌 자와, 슬피 우는 자와, 도망다니는 자와 …… 그들과 하나되어야 함을 설교하고자 했다. 거기서만 하나님과 하나된다. 내가 하나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오셔서 하나되신다. 거기 외에 다른 데 계시지 않는다. 그때, 나의 신앙고백이었다.
[말씀을 향한 물음]
우리는 예수의 고난절과 부활절을 기다리는 사순절을 보내고 있다. 예수는 왜 십자가를 지셨는가? 우리는 그분께서 십자가를 지신 뜻을 바로 알고 있는 것인가? 오늘 우리가 십자가의 길을 따른다 함은 무엇을 뜻 함일까? 왜 우리의 죄를 사하는 것이 되는가?
[슬라이드]
[설교 전문]
나는 올해의 고난절에 여러분과 함께 한 가지의 사실을 밝혀보고 싶다. 그리고 거기에서 우리가 서야 할 자리, 우리에게 주시는 성서의 부르심의 목소리를 듣고자 한다. 밝혀보고 싶다는 것은 “예수는 어째서 십자가를 지게 되었나?” 하는 문제다. 두 가지 이유에서 이것을 문제삼아야 한다고 본다. 첫째 이유는, 나는 예수의 죽으심에 대한 증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을 여러분과 함께 문제삼자는 것은 여러분도 예수의 죽으심에 대한 증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의 죽음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알아야 증인 노릇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제 고난절을 앞에 두고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증거할 것인가를 알아야 하겠다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그 의문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의미가 너무나 죽어버린 말이기 때문이다. 그 말의 의미를 살려야 한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의미란 무엇인가? 우리가 배운 교리대로 한다면 예수는 우리의 죄를 대신 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이다. 교리만 그러는 것이 아니고 바울을 통해 씌어진 성서의 여러 곳에 그러한 말씀이 있고 또 찬송가를 펴 보아도 그렇다.
성도들아 다 나아와 주님의 곁에 모여라.
주 예수 우리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다(109장 1절).
험한 십자가에 흘린 피의 흔적 내가 우러러 감격함은
내 죄 사하시고 나를 구하시려 주가 죽임을 당함이라(118장 3절).
그 흘린 보배 피로써 날 속량했으니(119장).
웬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벌레 같은 날 위하여
큰 해 받으셨나. 내 지은 죄 다 지시고 못박히셨으니(121장).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
세상 죄를 지시고 고초당하셨네.
예수여 예수여 나의 죄 위하여
보배 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126장).
이상의 두 가지 이유, 즉 우리는 예수의 죽으심의 증인이 되기 위해, 그리고 교리가 된 예수의 죽음의 의미를 우리의 현실 속에 살려 내기 위해 사순절 동안에 “예수는 어째서 십자가를 지게 되었나?”를 살피고자 한다.
이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당시의 현실 속에서 관찰하여야 한다. 그 현실 속에서 ‘예수가 어찌하여 십자가를 지셨는가’를 살피고 그것을 왜 후대인들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다’고 고백하기에 이르렀나를 보아야 한다. 만약 이러한 신앙에 도달하는 과정이 없이 예수는 나를 위해 죽으셨다고 배워서 말한다면 그것은 신앙도 아니요 이미 죽어버린 무생명의 말을 앵무새처럼 외우고 있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죽어 있는 그 말을 반복적으로 외움으로 신비스런 자기 최면에 걸려 무엇을 제법 믿는 양 스스로 속고 있다.
다시 처음 물음으로 가 보자. 예수는 어째서 십자가를 지게 되었나? 그는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의도적으로 십자가를 자청한 것은 결코 아니다. 당시의 현실 속에서 이 사건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선 마태복음에 나타나 있는 대로 살펴 보자.
예수를 죽여야 되겠다고 당시의 의회가 모여 모의를 한다. 그 결정적인 동기는 성전 정화 사건과 성전 파괴 예언에 있다. 예수가 성전에서 돈을 바꾸어 주는 사람의 상을 엎어버리고 또 제물이 될 비둘기와 양을 모조리 성전 밖으로 쫓아내고 그 장사들에게 철퇴를 가한 사건이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그리고 오늘의 마태복음 본문에서 고소자는 “이 사람이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다시 세울 수 있다”(61절)고 했다는 성전 파괴 예언을 고발의 내용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예수를 죽일 만한 이유가 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재판장인 가야바는 “그대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요?” 하고 묻는다. 이 질문은 그야말로 예수를 결정적으로 죽일 수 있는 비수와 같은 질문이었다. 그리고 이 질문은 우연하게 갑자기 묻게 된 것이 아니었다. 평소에 지도자들에게는 예수가 그리스도로 행세하는 이것이 예수를 가장 못마땅하게 판단한 이유였기 때문이다. 두말할 것 없이, 긴 소리 짧은 소리할 것 없이,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라고 묻고는 이것에 대답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는 바로 그 비수를 앞세운 질문에 “네 말대로다”라고 답변해 버린다.
그러자 재판장인 대제사장은 자기 옷을 찢으며 큰 소리로 “이 사람이 하나님을 모독했소. 이 이상 무슨 증거가 필요하겠소? 여러분 이 방금 이 모독하는 말을 들었소. 여러분의 의견은 어떠하오?” 하고 외쳐댄다. 가야바는 이것이 하나님을 모독한 것이라고 외쳐댔고 배석했던 재판관들은 “그는 사형에 해당하오”(66절) 라고 판결하고 말았다. 여기에서 보면 예수가 죽게 된 동기는 자기를 그리스도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대답한 것이 왜 하나님 모독이 된다고 판단했는지 우리에게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수천 년을 두고 그리스도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던 민족이었다. 더구나 당시와 같이 다른 민족에 의해 억압을 받을 때는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기다림이 더욱 간절했었다. 그런데 ‘내가 그리스도다’라고 해서 왜 하나님을 모독한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는 것일까? 수천 년을 기다리고 있다가 ‘내가 그 그리스도다’라고 하는 위인이 나타났다고 해서 그를 하나님 모독자라고 사형에 처하자는 것은 자가당착적인 잘못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기다리고 있었으면서도 정작 나타나니까 하나님 모독이라 했다면 왜 그랬을까? 그것은 두말할 것 없이 그리스도라 하는 그 자가 그리스도는 이래야 한다는 자기들의 기준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답다고 인정받을 만한 자가 만약 내가 그리스도라고 했더라면 하나님 모독이라 하지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예수의 어느 점이 당시의 유대 지도자들의 기준에 의해서 그리스도답지 않게 판단되었던가?
첫째, 그가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은 점이다. 음모와 고발의 동기와 연결해 보자. 성전을 정화한 사건이나 이 성전을 헐어라 했던 것이나 모두가 현재 있는 이 신성불가침적인 현실에 도전한 것이다. 그 현실이 잘못되었다고 고발하고 개혁하려는 입장이 예수의 입장이었다. 언제나 현실을 그대로 답습하려는 것은 정의이고 그것을 개혁하려는 것은 과격으로 판정되는 것이 인간 사회이다. 이것은 또 이 현실이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은 하나님의 현실이라는 교리를 전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당시의 지도자들이 만들어 놓은 성전체제, 유대교적 가치관을 거부했다. 지도자들은 이 예수가 미웠다. 그들의 생각에는 이것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 하다니. 이런 현실을 만들어 놓은 가야바는 예수가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소리치지 않을 수 없었다.
둘째, 유대 사람들의 기대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마지막 심판 때에 단지 죄인을 무섭게 심판하고 의로운 자를 상 주는 이로 출현하여야 했다. 죄인에게는 벌을, 의인에게는 상을 내리는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되려면 당시의 체제에서 출세하고 잘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요 하나님의 사랑이 거기 내렸다고 해야 한다. 세상에서 잘못되는 것은 하나님의 벌 때문이요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은 하나님을 잘 믿었기 때문이라고 주장되어야 한다. 그런데 예수는 도대체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다, 나는 너희가 ‘죄인이다’ 하는 그들의 친구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러 왔다고 했지 않은가?
예수는 이제까지 그 사회가 가지고 왔던 모든 가치를 뒤엎고 있었다. 율법으로, 합법적으로 죄인이라 단죄하였는데 예수는 감히 “나는 그들의 친구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아무런 희망도 가질 수 없는 저 죄인들을 앞에 놓고 회개하라는 말 한 마디 하지 않은 채 “가난한 너희는 복이 있다”, “슬퍼하는 너희는 복이 있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고 한다. 그러면 이 세상이 보존되지도 않으려니와 심판의 하나님을 우습게 만들어 버리는 결과를 가져 온다. 아니, 그러면 하나님이 심판을 잘못했다는 말인가? 이것이 예수가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소리치게 한 두 번째 이유였다.
이상의 두 이유에서 가야바는 제 옷을 찢으며 “이 놈이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이것은 종교재판이다. 종교가 이처럼 되어버리는 거기에 그 사회의 파멸이 숨쉬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제 주님의 고난절을 기다리는 이 사순절에 당시의 이 현실 속에서 오늘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오늘날도 예나 마찬가지로 우리의 현재의 현실을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현실로 받으려 하는 의지가 오늘의 기독교에 있다. 이 현실을 고수하는 것이 정의요 이 현실을 갱신하려는 것은 과격으로 취급하려는 뜻이 기독교에 있다. 잘못된 종교, 잘못된 가치관인 오늘의 성전은 무너지고 이 성전에서 붙어먹고 사는 저 장사치들을 내쫓아야 한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로 매도당하고 있다. 하나님이 축복하여 돈벌게 해준 것이고, 하나님이 심판하여 가난하게 된 것인데 가난한 자를 위하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을 모독하는 하나님 모독이라고 교회는 세뇌하고 있다. 그러나 아니다. 현실은 언제나 개혁되어야 한다. 바뀌어야 한다.
참으로 목사가 다른 목사의 설교를 비판한다는 것은 도의적으로도 있을 수 없는 일인 줄 안다. 그러나 이미 예수를 떠난 한국 교회, 그리고 소위 예수와 무관한 기독교인이 되지 않기 위해 한 설교를 말하고자 한다. 한국 교회 대부분의 설교 주제는 감사하고 찬양해야 복받는다는 것인데 이유는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례가 있다. 한 자매가 장사가 너무 안 되어 목사를 찾아와서 사정을 말하고 기도해 줄 것을 요청한다. 목사는 “장사가 안 되게 해주셔서 감사하라”고 한다. 잘되게 해달라 해야지 도대체 안 되니 감사하라? 그게 어디 될 법이나 한 기도인가? 팔이 부러져 다시 찾아왔다. “팔이 부러져 감사하라”고 한다. “아니 목사님, 팔이 부러져 감사하다니 그럴 수가……” “자매님 성경에 감사하라 했으니 찬양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너무 장사가 안 되어 가게를 팔아 버리고 십일조를 가지고 왔다. 그 믿음의 씨앗에 손을 얹고 또 감사와 찬양을 드린다. 얼마 후 그 자매가 정말 감사해야 축복받더라고 찾아 왔다. 가게를 판 직후에 도시계획이 발표되어 가게가 계획선 안에 들어 갔다는 것이다. 보상을 받아봤자 얼마나 되겠느냐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는 놀랍고 고맙고, 하나님의 역사는 신기하다고 하며 감사했더니 이렇게 되었다고 한다.
오늘의 하나님은 누군가? 오늘의 현실 속에서 오늘의 가치관에 맞게 출세하도록 해주는 분이다. 하나님이라는 거짓 신앙 속에 우리는 있다. 하나님은 높은 자의 하나님이요, 힘 있는 자의 하나님이요, 돈 있는 자의 하나님이다. 높지 못한 자, 힘이 없는 자, 돈이 없는 자는 하나님의 저주의 심판을 받은 자가 되고 있다. 사실 예수는 나의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하다가 죽으신 분인데, 오늘날 교회에서조차 이런 말은 이단적이요 귀에 거슬리는 소리로 듣고 있다니 참으로 개탄할 일이요, 그의 죽으심의 증인이라는 우리조차 그런다면 이 세계에 소망은 사라져버린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이 세계의 잘못된 현실을 보존키 위하여 존재하고 있다면, 이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는 잘못된 가치관을 보증해 주기 위하여 있다면, 그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저 예수를 죽음으로 몰고 간 대제사장, 장로들, 의회의원, 유대교의 잔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우리도 그리스도를 신앙한다는 것이 마치 이 현실에서 출세하고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이며 그것을 시중들어 달라고 하나님께 나오고 있다면 우리는 기독교인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십자가로 몰고 가는 죽음의 몰이꾼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하겠다.
이 현실 속에서 십자가를 지는 것은 무엇인가? 오늘의 물질주의적이고 권력주의적인 현실은 결코 하나님이 축복하신 것이 아님을 선언하는 일이다. 잘 사는 것은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이요 못 사는 것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저 악마적인 진리에, ‘아니오’를 선언하는 일이다. 하나님 모독자라는 비난과 정죄를 받는 한이 있더라도 오늘의 현실을 개혁하고 소외되고 눌린 자들에게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고 그들의 친구가 되는 교회, 교인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주님의 뜻을 살펴서 주님의 뒤를 좇는 무리다. 이것이 주님의 길을 용감히 걷는 참 신앙인들의 모습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