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0:16-23] 고난받는 공동체 – 1978년 10월 29일, 김상근 목사

고난받는 공동체

1978년 10월 29일 / 마태복음 10장 16-23절

김상근 목사


[회상 노트] 고난받는 공동체

지금 생각하면 그 때가 새벽의 움이 트기 바로 전쯤이었다. 그러나 그때, 그 캄캄한 밤이 새벽녘에 가까이 갔다는 것을 누구도 알지 못하였다. 길고 긴 밤이 계속되고 있을 뿐이었다. 밤을 새워 기도하고 투쟁하는 데 이제 지칠 대로 지쳐 버렸다. 투쟁력도 크게 떨어졌다. 탄압을 당하는 것도 만성이 되었다. 격분도 신선도가 떨어졌다.

종교의 일상성, 교회의 범상성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게 되었다. 교회를 돌보는 일이 나쁜 일일 수 없다. 교인을 심방하고 애경사를 찾고 각 개인들에 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나쁠 리 없다. 교인들의 요구도 그랬었다. 그러면 교회도 조금은 커질 수 있고 나도 덜 피곤할 것 같았다. 거의 20년이나 이 고된 길을 걷고 있으니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종교에 왜 피안성이 없단 말인가. 현실을 피해 가자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종교의 본질에 접근해 가자는 것이다. 개교회주의로 흐르는 것을 막고 교회성장주의로 치닫지 않는다면 그것이 왜 지탄받을 일일까.

그러나 그렇다!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그렇다! 이 기도를 우리는 수천 년을 이어 기도해오고 있는 것 아닌가. 20년 만에 이 기도를 피하려 하다니. 포기하려 하다니.

바로 가자. 우리는 어차피 고난받는 공동체다. 이것이 교회, 그리스도 공동체의 본질이렸다. 목회란 사실 목회자가 자신과 싸우는 것이다. 교인들의 요구가 어떻고 하는 것은 핑계다. 목회는 목회자 자신과의 싸움이다. 그러기에 많은 경우 설교란 사실 설교자 자신에게 하는 것이다. 자기 고백이다. 그러할 때 듣는 교인들에게 감동을 일으킨다.

별개의 두 설교를 하나로 묶었다. 편집자의 뜻이다. 교회연합주일 설교와 구속자 석방을 위해 특별기도를 드리는 주일예배 설교를 묶어냈다. 교회연합이란 갈라진 교파를 하나로 통합하자는 뜻이 아니다. 일치, 연합이란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함께 일하는 것이다. 무엇을 위해 일해야 하나? 그렇다. 지금은 구속자 석방이다. 구속자가 생기지 않게 되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 반대였다. 한국 교회의 불행이었다.


[말씀을 향한 물음]

구속자 석방을 위해 드리는 예배이다. 지난 달 9월 25-27일에 열린 우리 교단 총회는 우리 교단에 속한 구속자를 위해 같은 날, 같은 시간에, 같은 성경, 같은 설교 제목으로 예배드리고, 기도도 한 목소리로, 헌금은 영치금이나 법률구조를 위해 쓰도록 결의하였다. 오늘은 우리 교단 교회 어디를 가나 똑같은 내용의 예배를 드리게 된다. 우리는 오늘, 구속되어 있는 우리 교인들의 석방을 위해서 전국적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자는 것인데, 왜 우리는 이런 일을 당하는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슬라이드]

고난받는 공동체 : 1978년의 캄캄한 밤, 교회가 선택한 빛의 길

길고 긴 밤, 지쳐버린 투쟁력... 종교의 일상성으로의 도피

1978년 9월 교단 총회 결의 : 전 교단적 연합 예배

거울과 빛의 속성

기원후 64년(로마), 1978년(대한민국) : 두 시대 모두, 진실을 말하는 자들은 대중의 방관 속에서 권력의 희생양이 되었다.

수난을 대하는 신학의 진화(마가복음에서 마태복음으로)

박해와 증거의 순환 고리

1978년 재판정의 기울어진 저울

법정, 가장 강력한 강단이 되다

세계 교회가 한국 교회를 주목하는 이유

교회 연합과 성장의 참된 의미

고난받는 공동체의 4가지 사명 : 1) 고백, 2) 연대, 3) 감사, 4) 결단

"지금 생각하면 그 때가 새벽의 움이 트기 바로 전쯤이었다."


[설교 전문]

오늘 읽은 신약성서 마태복음 10장 16절은 우리에게 큰 충격을 주고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란 도대체 이 세상에서 고난받는 사람, 교회는 그러므로 고난받는 공동체로 단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원후 64년경에 로마에 원인을 알 수 없는 대화재가 일어났다. 이 화재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하루 아침에 이재민이 되었는데 그 범인은 황제 네로라는 사실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네로는 이 의심을 벗기 위하여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한 짓이라고 꾸며댔다. 그래서 급기야 대대적인 그리스도인 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애매하게 죽어갔다.

그리스도인이란 당시 황제에게는 누구보다도 미운 상대였다. 이유는 마치 흉측한 얼굴을 가진 사람 앞에 선 거울과 같은 존재, 어둠을 드러내는 빛과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치 노랑색 주변에 검정을 둘렀을 때 그 노랑색의 정체가 분명히 드러나는 것처럼 네로 황제나 로마 집정자의 악을 드러내기 위해 있는 사람들 같았고, 도무지 그들에게 걸려 무슨 일을 꾸며나가기가 힘들었던 때문이었다. 그리고 황제의 저 간계를 로마인들이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은 터지는 분통을 어디엔가 터트려야 할텐데 마침 그리스도인이 걸려 들기도 했지만 그들 시민들에게조차도 그리스도인들은 못마땅한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래도 사는 것이고 저래도 사는 것인데 그리스도인들 이 세상을 자꾸만 시끄럽게 하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옳건 그르건 세상이 소용돌이치는 것을 무조건 싫어했다. 소시민의 생리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적당히 살아가려는 모든 사람에게 걸림이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란 황제 네로에게나 시민들에게까지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되었다. 여하튼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의 대화재 사건의 주모자가 되어 큰 박해를 받게 되었고, 마침 그때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한 책이 있었는데 그것이 마가복음이었다. 이 마가복음을 손에 든 사람들은 자기들이 왜 박해를 받는 것인가를 알게 되었고 또 그 고난을 이기고 나갈 신앙의 용기를 얻게 되었다.

마가복음은 네로 황제의 박해 이전에 씌어졌다. 그런데도 마가복음의 이 부분에 의하면 1) 그리스도인들은 법정에서 재판을 받게 되고, 2) 유죄선고를 받게 될 것이며, 3) 예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고 총독들과 왕들 앞에 끌려 나가게 되어 심문을 받게 될 것인데, 4) 그것을 통해 예수를 증거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당하는 고난과 박해는 당연한 것이다. 다만 5) 끝까지 참고 견디자. 이 길을 기피하지도 말자. 그러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 한다. 여기서 우선 예수와 세상 사람들, 예수와 총독들과 왕들은 서로 적대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음을 드러내고 있다. 세상 사람들, 총독들, 왕들이라 함은 소위 예수의 정신과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는 힘 가진 사람들을 뜻한다. 그들은 예수를 믿고 예수의 정신을 좇아 사는 사람들을 미워하고 법원에 기소하고 그리고 유죄판결을 내린다. 이것이 권력을 가진 자, 어둠 속에서 사는 자들의 속성이다. 빛을 싫어한다. 자신들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을 싫어한다.

왜 잡아가겠는가? 괜히 잡아가는 것이 아니다. 괜히 채찍으로 치는 것이 아니다. 범법 행위를 했기 때문이다. 무슨 범법이냐? 예수가 범한 바로 그같은 범법이다. 예수가 그랬듯이 그리스도인들도 권력자의 악을 드러내기 때문에 잡아가는 것이다. 예수가 그랬듯이 그리스도인들도 권력자의 횡포에 눌려 숨을 못 쉬는 약한 자를 위해 일하기 때문에 유죄판결을 내리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도 수난받았고 그리스도인도 수난받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할수록 예수의 이름이 사라지고 죽어버리느냐9?그렇지 않다. 언제나 그 결과는 예수가 증거되는 것이다. 예수의 본뜻이 더욱 분명해진다. 예수가 세상에 왜 오셨던가, 예수가 왜 죽으셨던가가 더욱 확실해질 뿐이다. 이것이 마가복음의 원래 내용이었고 이 마가복음을 자료로 해서 쓴 마태복음은 마가복음의 이 증언을 그대로 채용하고 있다.

마태복음은 마가복음이 씌어진 지 약 30년 후에 씌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30년이라는 세월을 보내며 그들은 마가복음의 이 입장이 과연 옳으냐 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도 당연히 그리스도인의 처지가 그렇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30년쯤 지나보고도 기독교란 그런 것이 아니더라, 세상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면 샀지 고난을 받게 되지는 않더라고 이렇게 본래의 입장을 수정하려 하지 않았다. 역시 30년을 지나면서 보아도 기독교는 고난의 종교임에 틀림이 없다는 입장이 마태복음 기자의 입장이다.

이것은 마태복음이 마가복음의 입장보다 한발 더 나아간다. 그는 자료를 보충했다. ‘그렇게 수난을 받고 박해를 당하는 것은 다른 누군가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그렇게 한 것이다. 예수가 너희를 수난의 현장으로 보내는 것이다’ 라는 것을 첨가하고 있다. 이 수난의 길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길이나 의도가 아니다. 가고 싶어 걷는 길이 아니다. 예수가 보내기에 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다. 그러나 수난의 길을 가는 자는 홀로 가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가 보낸 길이기에 그와 함께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예수가 이미 갔던 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그야말로 박해를 받고 재판을 받는 것을 본다. 그리고는 엄청난 유죄판결을 받는 것을 보고 있다. 불량식빵을 만들어 국민학교 학생들에게 배급해서 떼돈을 벌려다가 수천 명의 어린이들을 한꺼번에 식중독에 걸리게 했던 사람도 겨우 금고 1년을 받는다. 그런데 10년 이상의 징역을 받고 지금 복역 중에 있는 우리 교단 목사나 교인만 해도 현재 3명이다. 세상을 온통 분노 속에 몰아넣었던 공화당 국회의원 성OO씨는 징역 3년을 1심에서 선고받았는데, 우리 교회 노영민 군은 7년을, 이대수 군은 5년을 선고받았다. 성OO보다 배나 더 국민의 지탄을 받은 것인가? 그리고 그들은 하나같이 나는 기독교 신앙 때문에 데모도 했고 기독교 신앙 때문에 설교도 했다고 법정에서 말한다. 함석헌 옹이 재판을 받을 때 ‘나는 지금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 여기 와 있다’고 간증하였다. 요컨대 그들은 예수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이요 예수 때문에 거기 끌려와 서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재판에서 드러나는 것은 ‘예수는 이런 분이다’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다’ 하는 것이 드러난다. 그들을 잡아가면 잡아갈수록 이 땅에서 예수의 말은 더욱 분명해진다.

세계 교회는 지금 한국 교회를 주목하고 있다. 그것은 한국에 교회가 많아서도 아니요 교인이 많아서도 아니다. 그것은 재판을 받더라도 감옥에 가더라도 주님의 말씀, 주님의 뜻을 따르려는 한국 교회 교인들 때문이다. 3개의 눈을 예로 들어 보자. 미국의 대표적 개신교인 미국 연합장로교와 남장로교의 총회 연합예배 때 설교를 한 목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교회에는 참으로 불가사의한 소생의 힘이 있다. 교회는 교회 스스로이 힘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 힘은 사람들의 마음이 쇠진해지고 어둠의 권세가 지배하고 있는 것같이 생각되는 때 나타나곤 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에 노예가 되었을 때 나타났었고,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 갔을 때 나타났었고, 독일의 나치정권 때 나타났었다. 그리고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시대에 남한의 교회에서 나타나고 있다.”

가깝게 있는 일본 교회는 한국 교회를 이렇게 보고 있다.

“한국 교회는 민중 속에서, 민중의 편에 서서, 그 해방을 위해서, 침묵해 버린 국민의 기대를 받으면서 싸우고 있다.”

그리고 유럽 교회의 눈에 비친 한국 교회는 어떤가? “사람을 해방시키는 하나님의 전투 전선은 한국 교회의 전투”라고 지적하고 있다. 가난한 자, 눌린 자, 멸시받는 자를 해방하고 설욕하시는 ‘앞서 가시는 신’, ‘십자가의 예수’가 이 전투를 지휘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이것을 제63회 총회 선언서 제5항에 이렇게 밝히고 있다.

“예수가 지금 한국 교회의 수난을 통하여 온 세상에 증거되고 있다.”

이 같은 증언은 오늘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우리는 사실 이 수난의 핵심에 설 수 없다. 물론 이것도 하나님을 모독하는 단언이다. 하나님이 보내면 우리도 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일단 우리와는 거리가 먼 것 같다. 아니, 거리가 먼 것만 아니라 이런 말은 될 수 있는 대로 안 했으면 하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 아닐까? 그러나 우리도 그리스도인이다. 우리는 각각의 생업에 종사하고 집안살림을 하느라 바쁘지만 그러나 우리도 각각의 삶의 자리에서 고난의 대열에 서도록 보냄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께 제의한다. 또 구속된 우리 교인들을 위한 예배를 오늘 전 교단적으로 드리는 이유가 여기 있을 것이다.

1) 저들은 이 시대에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다. 흉악범이나 무슨 철없는 범법자가 아니다. 이런 고백을 갖자는 것이다.

2) 그리고 저들과 우리는 똑같이 ‘고난받는 공동체’의 한 형제라는 이 사실을 잊지도 외면하지도 말자. 저들은 내 목사요 내 식구요 내 형이요 내 동생이라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저들이 석방되기를 위해 기도하자.

3) 이 일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자. 왜냐하면 하나님은 오늘도 수난당하는 한국의 교회를 통하여 우리 가운데 계시기 때문이다. 만약이 교회가 없다면 우리는 기어코 불행하여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들이 있어서 우리에게는 회망이 있게 되는 것이다. 백보를 물러서더라도 이런 사람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4) 그리고 이것을 송구스러운 자세로 받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 사명을 감당해 나가도록 기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