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6:10]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 1978년 9월 3일, 김상근 목사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1978년 9월 3일 / 마태복음 6장 10절

김상근 목사


[회상 노트] 고난받는 공동체

지금 생각하면 그 때가 새벽의 움이 트기 바로 전쯤이었다. 그러나 그때, 그 캄캄한 밤이 새벽녘에 가까이 갔다는 것을 누구도 알지 못하였다. 길고 긴 밤이 계속되고 있을 뿐이었다. 밤을 새워 기도하고 투쟁하는 데 이제 지칠 대로 지쳐 버렸다. 투쟁력도 크게 떨어졌다. 탄압을 당하는 것도 만성이 되었다. 격분도 신선도가 떨어졌다.

종교의 일상성, 교회의 범상성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게 되었다. 교회를 돌보는 일이 나쁜 일일 수 없다. 교인을 심방하고 애경사를 찾고 각 개인들에 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나쁠 리 없다. 교인들의 요구도 그랬었다. 그러면 교회도 조금은 커질 수 있고 나도 덜 피곤할 것 같았다. 거의 20년이나 이 고된 길을 걷고 있으니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종교에 왜 피안성이 없단 말인가. 현실을 피해 가자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종교의 본질에 접근해 가자는 것이다. 개교회주의로 흐르는 것을 막고 교회성장주의로 치닫지 않는다면 그것이 왜 지탄받을 일일까.

그러나 그렇다!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그렇다! 이 기도를 우리는 수천 년을 이어 기도해오고 있는 것 아닌가. 20년 만에 이 기도를 피하려 하다니. 포기하려 하다니.

바로 가자. 우리는 어차피 고난받는 공동체다. 이것이 교회, 그리스도 공동체의 본질이렸다. 목회란 사실 목회자가 자신과 싸우는 것이다. 교인들의 요구가 어떻고 하는 것은 핑계다. 목회는 목회자 자신과의 싸움이다. 그러기에 많은 경우 설교란 사실 설교자 자신에게 하는 것이다. 자기 고백이다. 그러할 때 듣는 교인들에게 감동을 일으킨다.

별개의 두 설교를 하나로 묶었다. 편집자의 뜻이다. 교회연합주일 설교와 구속자 석방을 위해 특별기도를 드리는 주일예배 설교를 묶어냈다. 교회연합이란 갈라진 교파를 하나로 통합하자는 뜻이 아니다. 일치, 연합이란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함께 일하는 것이다. 무엇을 위해 일해야 하나? 그렇다. 지금은 구속자 석방이다. 구속자가 생기지 않게 되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 반대였다. 한국 교회의 불행이었다.


[말씀을 향한 물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우리를 만족하게 할 수 없다. 더구나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계는 아직도 요원하다. 그리스도인이란 이런 상황에서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하는가? 기독교의 한 신도로서 드려야 할 기도는 무엇일까?


[슬라이드]

시대의 어둠과 새벽의 빛: 주기도문의 급진적 재발견과 고난받는 공동체의 본질

끝없는 캄캄한 밤은 교회를 '고난의 연대'에서 '일상적 위안'으로 후퇴하도록 유혹합니다.

1세기 유대(예수의 시대)와 1978년 한국의 현실

기도는 주문이 아니라, 현실과의 부딪침이다

진단 : 우리가 가진 신앙의 진짜 얼굴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옵소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고난받는 공동체의 탄생

실천적 적용 : 연합이란 함께 싸우는 것이다

투쟁의 목표 : 구속자가 없는 사회의 건설

기도는 시대를 깨우는 새벽의 빛입니다. 참된 기도는 멈추지 않는 실천입니다.


[설교 전문]

우리는 아직도 이 주기도문을 심각하게 대하지 않는다. 아무때나 아무나 이것을 마치 무슨 주문처럼 외우고 있다. 예수가 이 기도를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었을 때 그저 멋있는 기도문을, 혹은 주문을 가르친 것일까? 아니다. 이 기도문은 짧지만 예수의 삶에서 응어리져 나와 그가 이 백성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기도했던 것이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주기도문은 현실과의 부딪침에서, 예수의 삶의 상황에서 비집고 나온 기도였다.

기도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 기도문이 이미 밝혀 주고 있다. 기도란 어쩔 수 없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을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구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공허한 기도다. 예수의 기도에서 유추할 수 있는 세상, 곧 예수가 경험하고 있고 또 동시대의 사람들이 당한 상황이 무엇일까? 주기도를 역으로 풀면 그 상황이 나온다.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 모두가 주기도문을 예수께서 공생애 초기에 가르쳐 주신 것으로 암시하고 있다. 그는 30세가 지나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전에 그는 무엇을 했을까? 성서는 그런 전기적 기록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기에 추측할 수밖에 없다. 그는 한 사람의 유대 시민으로 생업에 종사하고 살았을 것이다. 자신의 생업을 통해 그는 자신을 포함한 인간들의 일반적인 생활을 다른 사람과 똑같이 경험하며 살았을 것이다. 병에 시달려 죽어가는 사람들, 서로 미워하고 보복하는 세상, 인간의 그 얄팍한 마음씀들, 양식 문제, 그 숱한 유혹에 그렇게도 곧잘 쓸려 들어가는 사람들 一 이러한 것의 현장에서 사람들은 고생하고 있고 자신도 그 덫에 걸려 고민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받들지 않고 제 이익, 제 기호를 따라 이웃을 마구 부려먹는 작태, 나쁜 짓을 공공연히 하면서도 하나님께 충성한다고 하나님을 빙자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뜻 따위는 생각도 하지 않는 사람들 一 이런 사람들과 그는 부딪치며 살아왔던 것이다.

오늘 본문인 10절에 초점을 맞추어 보자.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옵소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옵소서.”

이 기도는 단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지 않았다는 전제에서 드려진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전제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구원의 원천을 하나님에게 두지 않았고 다른 데 두고 있었다. 권력이라도 잡으면, 출세라도 하면, 돈이라도 벌면, 로마에 빌붙기라도 한다면……. 그래서 혈안이 되어 돌아갔다. 동족을 팔고 힘 없는 자를 착취까지 한다. 온 사회를 저를 위한 체제로 굳혀 버린다.

여기에 인간과 인간의 갈등, 원한이 있게 된다. 여기에 미움과 증오가 독버섯처럼 솟게 된다. 모두가 제 살 길만 찾아가다가 모두 파멸의 수렁으로 빠져 가고 있다. 여기에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배반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타락해져 가고 사회는 동물의 사회로 전락해 간다. 악해져서가 아니라 나의 구원, 이 세계의 구원을 하나님께서 이룩해 주신다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 구원을 보장받기 위해 별의별 짓을 다하고 돌아간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기도를 가르칠 것인가? 오늘 본문만을 말하자.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옵소서!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나?

첫째로, 이것은 인간의 구원은 어떤 것을 붙잡는 데서 보장받는 것이 아니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여야 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세상의 사람들은 무엇이라도 붙들면 그것이 자신을 구원해 주는 것이라고 믿고 산다. 출세를 하는 것, 치부를 하는 것, 권세를 잡는 것 一 그런 것이 자신의 구원을 보장해 주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니 하나님의 뜻 따위는 생각해 볼 여지가 없어지고 만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도 나를 위해줄 때만 용납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을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하나님의 뜻조차 심판하고 있다.

“그러나 너희는 이렇게 기도해라 ……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옵소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옵소서.” 이것은 세상의 아무것도 우리의 구원을 보장해 주는 것이 못 된다는 선언을 하라는 것이다. 구원의 주인은 하나님이다. 인간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이다. 하나님만이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다. 그러기에 너희가 세상일을 위해 수고하고 애쓰는 것보다 훨씬 더 하나님의 나라의 임하심을 위하여 수고하고 애써야 한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아버지의 뜻이 통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를 보자. 우리에게 이 신앙이 있느냐? 하나님만이 우리의 구원이시라는 신앙이 있는가? 당시 예수가 경험한 유대에는 이 신앙이 없었다. 그래서 파멸로 내리닫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세계도 역시 돈을 모으고 권력을 쥐고 출세하는 거기에 궁극적인 구원이 있다고 믿는 사회다. 신앙을 위해 노력하고 애쓰는 것이 돈, 권력, 출세를 위해 애쓰고 안달하는 것의 몇 만분지 일도 안 된다. 돈, 권력, 출세를 위해 투자한 돈, 시간, 정력과 신앙을 위한 노력과 비교해 보자. 결국 그것은 결코 예수를 믿는 것으로 구원된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는 신앙, 기도도 출세하고 권력잡는 데 동원되는 수단에 불과해졌다.

그래서, 우리의 세계도 서로 누르고 빼앗고 죽이는 세계가 되었다. 이 세계를 누르고 있는 자, 빼앗은 자, 죽인 자가 더 잘 사는 세계가 되도록 갖은 장치를 다하고 있다. 유대의 그때처럼 우리 사이에도 서로간의 갈등, 원한이 있게 된다. 미움과 증오가 우리를 비참하게 하고 있다. 하나님을 배반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그러기에 지금 우리에게도 이 기도는 절박하다.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소서, 이루어지옵소서.”

둘째로, 그리고 이 기도의 의미는 하나님의 나라는 저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세워져야 할 나라라는 뜻이다. 유대인들은 벌써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고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고 고백하기에는 너무 지쳐버렸다. 자포자기다. 세상이야 어떻게 되건 말건 …… 원래 유대사람에게는 피안과 차안, 이 세계와 저 세계의 구별이 없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저 세상을 생각하게 되어 간다.

우리는 혹시 이 세상은 어차피 악한 세상이다, 세상이란 으레 그런 곳이고 또 그렇게 사는 곳 아니냐라고 넘어가 버린다. 그리고는 여기가 그러기에 하늘나라를 동경하자고 한다. 여기서 죽음 후의 저기로 도피해 버리려 한다. 이 세상은 악한 대로 놓아 두자고, 우리가 무엇을 한다고 해서 바뀌어질 것도 아니지 않느냐고, 그래서 차안에서 피안으로 도피한다. 이 세상 일은 세상 사람에게 맡겨 버리고 우리는 저 세상만 향하여 나아가면 족하다고, 도덕이 어떻게 되거나 정의가 부서져 버리거나 사회구조가 악마적인 것이 되어 버리거나 그것은 이 세상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옵소서”라고 기도하라 하신 것은 구원,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이 땅, 이 역사 안에 이루어져야 하는 현실이라는 의미다.

마지막으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는 것의 의미를 말해 보자. 기도한다는 것은 주문을 외우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계속해서 반복해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기도하라니까 하는 타율적 태도는 의미가 없다. 기도에는 기도하는 자의 얼이 담겨야 한다. 고백이 담겨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우리 자신을 바칠 수 있도록 하여 주십사는 기도이어야 한다.

오늘은 한국의 수많은 교회가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라고 함께 기도하는 날이다. 그것은 오늘 하루 한 번의 공동기도로 그쳐서는 의미가 없다. 당신의 나라가 임하도록 한국 교회가 일하고 투쟁하여야 한다. 한국의 모든 교회가 이 일을 위해 하나가 되어야 한다.

이 기도를 하는 우리 각자는 무엇을 할 것이냐? 우리는 모든 한국 교회가, 좁혀 본다면 우리 교회가 그렇게 기도하고 일하고 투쟁하는 교회가 되도록 해야 한다. 그저 제 자식과 가정만 위하는 것처럼 내 교회만을 위하는, 그러다가 하나님의 뜻을 잃어버리고 마는 개교회 중심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모든 교인들이 깨어 있어야만 한다. 한국 교회가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고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교회가 되도록 우리도 계속하여 기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