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3:5-10, 사무엘하 11장] 도적맞은 수치심 – 1979년 11월 18일, 김상근 목사

도적맞은 수치심

1979년 11월 18일 / 골로새서 3장 5-10절, 삼하 11장

김상근 목사


[회상 노트] 진노의 도화선

지난 8월에 이른바 YH사건이 있었다. 노동자들이 마포의 신민당 당사로 가서 농성을 했다. 급기야 경찰이 야당 당사로 난입하여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로 끌어냈다. 김경숙이 희생당하는 불상사가 있었다. 공권력의 횡폭이었다. 즉시 YH사건 대책위원회를 조직하여 활동했다. 나는 조사단의 일원이 되었다. 사회의 각계 인사를 망라한 YH문제 대책위원회도 조직되었다. 독재자와의 투쟁이 가파르게 올라 갔다.

국회는 야당 총재인 김영삼 의원을 제명했다. NCC의 교회와 사회위원회를 중심으로 독재를 무섭게 몰아세웠다. 당황한 정권은 박형규, 이재정, 한완상, 그리고 나를 구속했다. 10월 10일에 내가 제일 먼저 연행되었다. 남산 깊은 곳에 위치한 시경 분실에서 조사를 받았다. 조사관들이 정권으로부터의 심정적 이탈을 드러내 보였다. 10월 18일 부산 일원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부마 민주항쟁이 일어난 것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10월 26일 박정희 살해사건이 발생했다. 1961년 쿠데타로 집권하여 만 18년간 철권통치를 했다. 그의 정치적 야심과 그의 이른바 국민을 위한 독재를 위해 그가 감옥에 가둔 자가 얼마며 얼마나 많은 목숨을 빼앗았던가!

그의 죽음, 심복이요 죽마고우에게 처형을 당한 그의 죽음은 왜 그렇게 온 것인가를 성서에 물었다. 탐욕과 음행과 비진리가 원인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이 나라의 기회였다. 민주, 민족, 민중의 시대를 열 수 있는 기회였다. 최규하 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고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는 이 위기와 기회의 시기에 아무런 기능을 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암살당했으나 박정희의 통치는 계속되었다. 때를 전환점으로 삼아낼 기미가 전혀 없었다. 해직교수협의회, NCC 등이 성명을 내고 나라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했다. 그러나 민주화를 역행하는 조치만을 당국은 발표했다.

11월 24일 이른바 ‘YWCA 위장결혼식’ 사건이 터졌다. 그것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간접선출하는 것을 반대하는 집회였다. “통대선출저지 국민대회”였다. 재야 세력의 무서운 저항이었고 일대 결전이었다. 군부는 체포로 대응해 왔다. 나는 그 대회의 실행위원이었다. 당연히 체포당했다. 박 정권 18년 동안에도 당해보지 않았던 모진 고문을 서빙고 보안사에서 당해야 했다. 무차별적이고 모욕적이었다. 성직자로서의 위신과 권위를 짓밟아버리는 고문을 나는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그렇다. 예수님도 침 뱉음을 당하셨지 않은가.


[말씀을 향한 물음]

우리는 지금 새 역사를 창조해 나가는 가슴 부푼 시점에 놓여 있다. 새 역사를 창조하는 것과 각자인 ‘나’가 새로워진다는 것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 내가 새로워짐은 세상을 새롭게 하는 것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슬라이드]

도적맞은 수치심 : 1979년 11월, 독재의 끝에서 묻는 새 역사의 조건

1979년 진노의 도화선

고난 속에서 던진 하나의 질문 : 예수님도 침 뱉음을 당하셨지 않은가

환희와 충격의 교차로

정치적 실패가 아닌 도덕적 실패

다윗 왕의 은밀한 스캔들

역사의 반복 : 지도자의 타락과 국가의 몰락

사람은 수치심이 있어서 사람이다. 부끄러운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음행이 보편화된 사회는 수치심을 도적맞은 사회이다.

패망의 메커니즘

1979년 한국 사회의 병든 자화상

도덕적 갱신 없는 정치 변화의 허상

맑고 밝고 건전한 사회를 이루는 출발점은 제도 개혁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서 음행을 추방하고 수치심을 회복하는 일이다.

지도자는 적어도 남녀관계가 깨끗해야 한다. 부끄러운 일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자를 결코 지도자로 세워서는 안 된다.

새 시대를 향한 권면

우리는 지금, 수치심을 잃어버리지 않았는가?

[설교 전문]

우리는 지금 새 역사를 창조해 나가는 참으로 가슴 부푼 시점에 놓여 있다. 4ㆍ19 혁명 직후를 제외하고 민주주의라는 말을 이렇게 두려움 없이 써 보기도 처음이고 그 동안 산적했던 모든 문제들이 하나씩 하나씩 풀려 나가게 될 것이라는 것이 우리의 기대다. 이제 다시는 집권자가 국민을 옥에 가두고 극형을 선고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고, 이제 다시는 숨막힐 것 같은 역사 현실이 결코 반복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이 우리 국민의 소망이다.

그러나 이 같은 새 역사 창조의 새벽이 순리로 오게 된 것이 아니라 가장 불행한 일이 일어 나서야 비로소 새벽이 동트게 되었다. 이것이 기대와 희망 중에서 피할 수 없는 충격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왜 이 같은 비극적 충격이 불가피했는가를 반성하고 그 반성을 우리 삶의 바탕, 새 역사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하겠다. 그러나 자칫 이러한 모든 문제가 오직 ‘정치적’인 문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렇게 새 시대를 창조하는 것은 정치가들이 할 일이요 우리의 일은 아니고 또 우리는 오늘의 충격적 결과에 책임질 일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오늘 본문인 신약성서 구절은 지난 주일의 것과 같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가 내리게 되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하나님의 진노를 폭발하게 하는 도화선은 무엇이냐? 하나의 이유가 ‘탐욕’이라는 것이라고 이미 지난 주일에 말씀드렸다. 또 하나의 이유를 바울은 ‘음행’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오늘 구약성서의 본문은 그 사례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이스라엘은 선민이라 하면서도 나라 없는 망국민의 설움 속에서 수천 년을 보내야 했고 그 직접적인 이유는 남북으로 나라가 분열된 것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의 비극, 그것의 원초적 이유는 무엇이었나? 성서 기자는 그 이유를 다윗 왕 때문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사실 다윗은 이스라엘 왕들 중 가장 뛰어난 왕이요, 이스라엘을 국제적으로 막강한 나라가 되게 한 왕이었다. 능숙한 음악가요 능변의 연설가였으며 그의 공적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런데 성서 기자가 이스라엘이 망해버린 원초적 이유를 그에게서 찾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다윗이 어떻게 했길래 이 같은 비극이 이스라엘의 운명이 되고 말았는가? 이것도 역시 지난 주일 아합 왕의 경우처럼 무슨 정책의 실패라든가 여야의 싸움이라든가 국민이 단합치 않았기 때문이라고 성서 기자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면 무엇인가? 그의 음행 때문이었다. 사무엘하 11장 12절에 소위 바쎄바와의 음행 사건을 기록하고 있으며 그것이 곧 이스라엘의 분열과 패망의 이유가 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전쟁 중이었다. 어느 날 오후에 다윗은 낮잠을 잔 후에 옥상에 올라갔다가 다른 옥상에서 목욕하는 여인을 발견하는데 그녀는 외국인으로서 귀화한 우리야라는 사람의 아내였다. 우리야는 출전 중이어서 집에 없었고 다윗은 바쎄바를 왕궁으로 데려와 정을 통했다. 바쎄바가 임신하게 되자 다윗은 우리야를 불러들였고 부인과 동침하도록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우리야가 부인과 함께 하지 않자 전사하도록 흉계를 꾸며 우리야를 제거해 버린다. 바쎄바는 영광스런 전사자의 아내로서 과부가 되었고 다윗은 자연스레 바쎄바와 결혼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으로 마치 저속한 주간지의 어느 스캔들 기사와 같은 다윗의 음행 사건은 잘 마무리 된 것 같다. 그러나 성서 기자는 이렇게 쓰고 있다.

“곡하는 기간이 지난 다음, 다윗은 예를 갖추어 그 여인을 궁으로 맞아들여 아내로 삼았는데, 그의 몸에서 아들이 태어났다. 다윗이 한 이 일이 야훼의 눈에 거슬렸다”(11:27).

하나님은 예언자 나단을 보내 이렇게 진노하셨다.

“네가 이렇게 나를 얕보고 우리야의 아내를 네 아내로 삼았으니, 너의 집안에는 칼부림이 가실 날이 없으리라. 바로 네 당대에 재난을 일으킬 터이니 두고 보아라”(12:10-11).

참으로 놀라운 발견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왕의 음란한 행위가 곧 나라가 패망하는 이유가 되고 있다는 이 사실을 우리는 그냥 넘길 수 없다. 물론 이것은 단지 왕만의 음행이 아니라 그 당대에 널리 편만되어 있었던 음행을 대표적으로 기록한 것이 다윗의 일이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아도 그 예가 얼마든지 있다. 고구려, 백제로 갈라져 있던 한반도를 통일했던 막강한 통일신라가 망한 것은 왕의 음탕한 행각 때문이었다. 포석정이라는, 술이 흐르는 인공 수로를 만들고 날이면 날마다 놀아났었다는 것이다. 백제가 망할 때도 그랬다. 낙화암에서 3천 궁녀가 떨어져 죽었다니 그 궁중의 음탕함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왕이 그 모양일 때 백성은 온전했겠는가? 온 나라가 똑같이 음란의 나라가 되었었다.

사람은 수치심이라는 것이 있어서 사람이다. 음행하는 사람은 수치심을 도적맞은 사람이다. 다윗은 수치심을 도적맞았다. 그러고도 뻔뻔했다. 호령도 하고 재판도 하고 정사도 보았다. 음행이 보편화된 사회는 수치심을 도적맞은 사회요, 수치심을 도적맞은 사회는 곧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된다는 것이 성서의 교훈이다. 수치심을 도적맞은 사람 一 그 사람의 혼이 맑을 리 없다. 흐려진 혼 속에서 바른 판단과 건전한 삶이 영위될 수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수치심을 도적 맞은 사회 — 그 사회의 시대정신이 밝을 리 없다. 흐려진 시대정신 속에 한 시대가 건전하게 발전될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오늘날 우리의 사회는 온통 수치심을 도적맞아 버렸다고 판단한다. 음행이 보편화되었다. 높은 사람 중에 여색 소문이 없는 사람을 찾기가 힘들다. 오죽 그랬으면 소위 “서정쇄신” 내용 중에 첩을 거느린 사람은 관직을 박탈한다는 내용을 집어 넣었겠는가? 기업인들도 그렇다. 어느 분 말씀이 돈 벌면 좋은 집 짓고 여자 찾아 방탕하는 것이 하나의 과정처럼 되었다는 것이다. 너무나 뻔뻔해져 버렸다. 시대의 정신이 흐려져 버렸다. 그러다 보니 모든 일에 수치심이 작동하지 않는다. 부끄러운 일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사회가 거의 병들어 버렸다. 부끄러움이 없어졌다. 남자도 여자도 음욕의 노예가 되어 버렸다. 국회의원 성○○의 여학생과의 추행이 그 한 예가 되고 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자칫 상식이 되어 버리려는 순간에 있다.

물론 종교도 변화하고 있고 도덕도 엄청나게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성에 대한 태도도 크게 바뀌고 있다. 더군다나 정조니 일부일처제니, 정절이니 하는 낡아 빠진 도덕에 관한 설교나 훈계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요 그야말로 목사 같은 소리라고 일축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나보고 명동이나 무교동의 밤거리를 다녀 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또 버트란트 럿셀이 “인간 사회 질서론”에서 한 말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는 인습적 이유를 내세워 도덕을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한다. 말하자면 “간통이 왜 나쁘냐? 제7계명에 금지했기 때문이다”라는 식으로 혹은 이제까지 나쁘다고 생각해 왔으니까 나쁘다라는 식의 인습적 이유를 버려야 한다는 주장도 안다.

그러나 나는 지금 도덕론을 설교하고 있는 것도, 인습적 이유를 내세우고 있는 것도 아니다. 어쨌든 정치인이 이 여자 저 여자에게 음욕을 갖는 것이 부끄럽지 않게 된 사회는 맑고 밝을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되는 것이다. 여색 즐기기를 주된 관심으로 삼는 기업인의 마음에 노동자와 일체감을 이루는 신뢰감이 숨쉴 리 없고 벌어들인 재산을 잘 관리할 수 있을 리 없다. 다른 남자나 찾아가고 또는 다른 여자나 찾아 다니는 가정에서 맑고 밝은 일이 이루어질 수가 없다. 학생의 마음속에 음란한 생각으로 차 있을 때 거기에 위대한 꿈과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을 리 없다.

수치심을 도적맞아 버린 사회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면치 못하게 된다는 말이다. 만약 도적맞은 수치심을 찾아오지 않은 채 정치적으로만 새 시대를 창조해 보았자 한국일보 만화처럼 국민은 또 누더기 옷을 입게 될 것이고, 또 다른 긴급조치, 또 다른 법적 탄압, 또 다른 제적이 밀려오게 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이다.

우리는 지금 새 역사, 새 사회를 건설해 가는 초입에 있다. 나는 여기서 무엇보다 먼저 음행을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그래서 도적맞은 수치심을 다시 찾아와야 한다. 맑고 밝고 건전한 사회를 이루는 기본은 우리 자신에게서 음행을 추방하는 일이다.

수치심 있는 정치인, 수치심 있는 기업인, 수치심 있는 학생, 수치심 있는 국민이 되어야 새 역사를 이룰 수 있다. 부끄러운 일은 부끄러워 해야 아름다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 이제 지도자는 적어도 남녀관계가 깨끗해야 한다. 그것이 깨끗치 못한 사람을 지도자로 세워서는 안 된다. 우리 젊은 교인들, 그 따위 일에 혼을 팔아서는 위대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라.

바울 사도가 자신의 제자인 디모데에게 권면한 말씀을 마지막으로 드린다.

“그대는 청춘의 욕정을 피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는 사람들과 함께 정의와 믿음과 사랑과 평화를 힘써 구하시오”(딤후 2장 22절).

“여러분은 옛 사람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시오”(골 3장 9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