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랑을 딛고 선 교회
마태복음 14장 22-33절 / 1986년 6월 8일 / 수도교회
[말씀을 향한 물음]
오늘을 우리 교회가 창립된 것을 기념하는 날로 삼았다. 우리 교회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내 신앙은 건강한가? 몸살 감기를 앓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 앞에 다시 생경스럽게 서 보자.
[슬라이드]
[설교 전문]
오늘 본문으로 택한 마태복음 14장 22절 이하의 말씀은 마가복음 6장 45절 이하와 평행구다. 여러 가지 근거에서 마가복음 쪽이 원래의 전승에 더 가깝다고 판단한다. 마태복음 기자는 마가복음의 전승에 상당한 부분을 첨가하였다. 그 첨가된 부분을 빼면 마가복음이나 마태복음의 내용이 거의 동일하다.
제자들이 자기들끼리 배를 타고 가다가 역풍에 의한 풍랑을 만나게 되었다. 한참 시달리고 있던 때 물 위를 걸어오는 사람이 보였다. 그들은 놀라서 유령이 온다고 소리를 지른다. 그 유령 같은 사람은 자신이 예수임을 밝히고 배에 올라오신다. 그러자 바람이 그쳤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예수의 ‘신성’이다. 유령이나 바다 위를 걸을 수 있는 것 아니냐, 그런데 예수는 유령이 아니신데도 바다 위를 걸으실 수 있는 분이다. 그렇다면 그가 하나님 의 아들이 아니고 누구겠느냐 하는 의도의 기사다. 마태복음은 “사람들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고 말했습니다.”라는 말로, 마가복음은 “이것을 보고 제자들은 몹시 놀랐습니다.”라는 말로 끝맺고 있다.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의 결론은 같은 것이다. 요컨대 제자들도 사실은 놀랄 수밖에 없는 신성을 예수는 지니셨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하여 다시 한번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야 한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느냐?’ 하는 질문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참으로 믿느냐? 이것은 초보적인 질문이지만 가장 근본적인 물음이다. 복음서 당시의 사람들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백방으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설명하고, 또 증거를 제시하고, 먼저 믿은 자기들의 신앙고백을 실토하곤 했던 것이다.
그 무슨 소린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느냐는 유치한 질문을 왜 새삼스럽게 하는 것이냐? 그것은 세례 받을 때 이미 고백한 것이요 그 고백 없이 우리가 무엇 때문에 예배에 나왔겠느냐 하는 반론이 금방 나올 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다는 것은 평범한 말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가치관은 예수의 가치관과 같아야 하며, 나의 삶의 자세도 예수의 삶의 자세와 같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다. 귀한 것과 버려야 할 것을 가늠하는 기준도 예수의 기준과 똑같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나의 구주라 한다면 모든 것은 그분 안에서 그분의 방식대로 해결될 수 있다는 것-내 방식대로가 아니다-을 고백하는 것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나는 그를 믿는다고 할 때 비그리스도인과 나는 구별될 수밖에 없다. 슬퍼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위로와 기쁨으로 살고, 좌절할 수밖에 없는 형편에서도 오히려 희망을 갖게 된다. 세상은 그렇게 살면 손해난다는 데도 그 길을 당당하게 걸어간다. 이것은 ‘혁명’이다. 그러므로 지금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느냐는 질문은 유치한 질문이 아니다.
오늘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다시 고백해야 한다. 예수가 구주다. 예수만이 구세주다. 그만을 믿는다. 그만이 우리의 길이다. 그만이 생명이다. 그가 함께 하신다면 어떠한 풍랑도 감당할 수 있다. 이것이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첫째 메시지다.
그런데 마태복음은 마가복음과 달리 극적인 장면 한 가지를 추가하여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셨다는 것을 더욱 분명히 할 목적으로 예수가 걸어오라 하시니 보통 사람인 베드로도 물 위를 역시 걸어갈 수 있더라는 것이었다. 이것 역시 예수의 신성을 더욱 확증하는 전승으로 인용되었다. 베드로도 예수의 말씀에 의지하여 물 위를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었다는 기록을 추가한 것이다.
사람은 누구도 물 위를 걸을 수 없다는 상식 따위는 아랑곳없었다. 풍랑 같은 것은 볼 겨를도 없었다. 풍랑을 오히려 딛고 걸었다. 그런데 베드로가 자신의 시선을 예수에게서 돌려 풍랑을 본다. 그 순간 그에게 무서운 생각이 들었고 급기야 물에 빠져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처음 그리스도인들에게 커다란 교훈을 주었다. 그들이 살고 있는 삶의 정황은 풍랑의 바다와 같았다. 예수를 주로,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그런 삶의 자세로는 도저히 살아낼 수 없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풍랑의 바다를 걸었던 베드로처럼 예수만을 바라보고 나갈 때 넉넉히 헤치고 나갈 수 있었지 않았느냐는 것을 깨우쳐 주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처음 그리스도인들은 “아, 과연 그랬었지! 우리가 풍랑의 바다를 걷듯이 감히 이 세상에서 세상과는 다른 모습으로 살 수 있었지.” 이런 회상을 불러 일으켰다. 그 회상은 곧 지금 방황하는 자신들의 신앙을 다시 제자리로 갈 수 있게 해주었다.
우리를 보자. 특히 ‘수도교회상’을 제정하고 그렇게 살고 그런 교회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던 14년 전의 우리 모습을 돌이켜보자. 내세에 가서 복 받자, 이 땅에서도 그리스도 신앙을 가지면 물질의 축복, 자녀의 축복, 출세의 축복 등 온갖 축복을 받는다는 위복주의 신앙이 풍랑처럼 일고 있던 때였다. 그런데 오히 려 풍랑을 딛고 걸어 가겠다 하지 않았는가? 물 위로 성큼 내려서지 않았던가?
기독교 신앙이란 사실 위복주의가 아니다. 아니, 사실 위복주의다. 그러나 진정한 축복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우리의 삶 자체가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다. 세상의 가치와는 다른 가치를 가지고 기쁘게 사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삶을 살자, 그 삶을 거짓 축복을 위하여 싸우고 서로 죽이는 이 세상에 보이자고 했었다. 풍랑을 딛고 선 그리스도인이었고 풍랑 위를 걷는 교회의 모습이다.
우리는 우리 교회 안에서 소위 신분의 높고 낮음을 극복했다. 많이 배우고 혹은 배우지 못한 것으로 차별하는 풍토를 극복했다. 능력에 따라 대우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 서로 존경하자고 했다. 이것이 풍랑 위를 걷는 교회의 모습이다.
교회가 모두 자신을 위하여 힘을 기울이고 또 기울인다. 아무리 자신을 위해 쓰고 쌓아도 부족하다. 그런데 우리 예산이 불과 1천만 원을 겨우 넘어설 때인데 우리는 주간학교를 시작했다. 도서실을 개설했다. 우리는 우리가 살던 그 가난한 지역 주민을 위하여 선뜻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자선이라는 이름의 선행조차 자신에게 유익이 돌아오지 않으면 하지 않는 것이 한국 교회 역사였다. 철저하게 이기적인 한국 교회에 소위 ‘타자를 위한 교회’라는 새로운 교회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였던 것이다. 역시 여기서도 풍랑 위를 걷는 베드로를 연상케 한다.
우리가 욕심과 불의에 얽매이는 것은 세상의 가치와 구조가 온통 병들어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막 깨달음을 갖게 되었을 때 세상도 더욱 악의 구조로 곤두박질을 하고 있었다. 그때가 소위 대통령 3선 개헌, 유신 선언, 언론 탄압 등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때다. 그것은 풍랑이었다. 먼저 문동환 목사가 그 저지를 위하여 뛰어들었고 나 역시 그 일에 심부름을 하게 되었다. 그때는 초기라 여간 큰 위험 부담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 싸움은 지금까지도 계속 되고 있다. 목사들이 이 길을 갈 때 여러분은 우리를 결코 반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도하고 성원했다. 공개된 예배 시간에도 그랬다. 그때마다 나는 가슴 복판에 사랑의 불덩어리가 퍽퍽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소위 말하여 반정부 집회를 겁 없이 우리 교회당에서 개최하곤 했다. 장로님들이나 교인들이 당국으로부터 압력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목사가 하는 일이다, 교인이 목사를 가르치거나, 하는 일을 한다 못한다 할 수가 없다 등등의 말로,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가 있으니 저 정도지 우리마저 그 옆에서 떠나면 더할 것이라는 구실로 그 위기를 모면했다. 동아일보가 탄압을 받을 때 수도교회 여신도회, 요나회, 자보회 등등의 이름으로 광고를 내어 신문사에 헌금을 하기로 했다. 이것이 풍랑 위를 걷는 교회가 아니고 무엇인가? 걷기 쉬워 걸어간 것이 아니다. 옳은 길이니 고통을 서로 나누어지고 가자던 것이었다. 나는 특별히 이 점에서 여러분에게 사랑의 큰 빚을 지고 있다.
집사를 하라 하면 천리만리 도망갔다. 집사 한 분 임명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모른다.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감당해야할 많은 것이 부담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풍랑 위를 걷는 교회에서의 직책을 감당키 어려워서였을 것이다. 옳은 자세다.
그런데 오늘 우리 자신을 돌아보자. 우리가 아직도 하나님의 참 축복을 추구하고 있는가? 아니면 위복주의 신앙을 지향하자고 요청하고 있는가? 새롭게 창조 받은 삶을 지금 간절히 구하고 있는가? 아니면 세상의 온갖 사람들과 똑같은 기준에서 기뻐하고 슬퍼하며 즐거워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것인가? 우리 교회 안에서 서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존경하고 아끼고 사랑하고 있는가? 아니면, 편견과 어떤 구별을 가지고 대하게 되었는가? 진실과 성실, 신앙의 진지함보다는 능력에 따라 그 사람의 값을 매기게 된 것은 아닌가?
다시 곱은 손이 되어 우리 교회를 살찌우고 우리 교회를, 오직 우리 교회를 위하여야 한다는 논리가 강해진 것은 아닌가? 교회 재정을 밖으로 내보내면 헌금을 또 해야 하지 않느냐는 계산이 앞서서 그 일이 옳은 것이냐, 하나님의 선한 사업이냐, 하나님께서 요청하시는 일이냐 하는 것을 생각조차 해 보지 못하게 된 것은 아닌가?
제직이 많은 것은 좋다. 그러나 제직이 너무 값이 싸지면 안 된다. 이 교회가 풍랑을 딛고 걸어가기 위하여 모두가 혼신의 노력을 함께 쏟는 제직이어야 한다. 우리 제직이 과연 그런가? 그럴 것이다. 그럴 줄 안다. 만약 불행하게도 이 모든 자문에 부정적이라면, 아니 부정적일 것까지는 없지만 그쪽으로 기울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풍랑을 딛고 걷다가 풍랑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서워졌기 때문이다. 용기를 잃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만을 바라보았기에 그 일들이 가능했다. 그런데 우리가 풍랑을 보기 시작한 것 아닌가? 무서워하는 마음이 생긴 것 아닌가? 새롭게 창조 받은 생을 일구어 내려는 그 순진한 열정이 식은 것인가? 우리의 관심이 이제 다른 곳으로 옮겨진 것인가? 발언권들을 확대시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런데 어린아이 같은 봉사의 행위, 위하는 마음이 그 발언권과 함께 가지 않으면 문제가 있다.
교인의 예배 출석이 나빠졌다, 헌금이 준다, 이런 것은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하여간 불행한 현상이다. 제직은 굉장히 많아졌는데 제직회 결석자가 흔하게 되어 간다는 것이다. 만나면 반갑고 서로 보고 싶은 신앙 동지의 정이 식어 가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판단을 갖는다. 아끼고 위하는 마음이 점점 차가워 가는 것인가? 왜인가? 예수를 바라보던 우리가 지금 풍랑을 보고 있는 것이다. 무서워졌다. 물에 빠져 들어가고 있다. 또 다른 우리의 모습을 보자.
나는 KBS TV 시청료 거부 스티커 배부조차 보라는 듯이 하지 못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서글펐다. 아직껏 개헌 서명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스티커는 200만 매가 주로 교회에 배부되었다. 보수적이고 진보적이고 할 것 없이 더 달라는 교회가 있을 뿐이다. 기장의 모든 노회가 개헌 서명을 결의했고 모든 목사, 노회 총대가 서명했다. 교회에서 서명한 교회만도 수십 교회가 된다. 우리가 지나치게 조심한다.
이제는 서명보다 어떤 내용의 개헌이 되느냐 하는 것이 관심이 되는 단계에 왔다. 여기까지 오는 데는 국민의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국민의 힘에 나나 수도교회가 일조를 하지 못했다면 부끄러운 일이다. 옳은 일이었기에, 마땅한 일이었기에 역사가 여기 온 것 아닌가? “어떠한 난관이 온다 하더라도 우리는 임기 내 개헌을 꼭 이룩하자.”고 말한다. 이것은 야당이나 나 같은 사람의 말이 아니다. 집권당의 사무총장의 말이다. 이런 것인데 우리가 지나치게 근심했다면 그것은 오히려 부끄러운 일이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는 것은 말을 바꾼다면 예수를 가장 두려워한다는 말이다. 예수보다 풍랑을 두려워하여서는 안 된다. 예수를 바라보아야지 풍랑을 보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지금 예수를 보고 있는가, 풍랑을 보고 있는가? 풍랑을 무서워하고 있다면 예수를 보는 것이 아니다. 풍랑을 보는 것이다.
베드로는 자신을 발견한 그때 소리쳤다. “주님, 살려주십시오.” 자신의 약함, 자신의 허물을 변명하지 않는다. 그럴 수밖에 없었지 않느냐고 변호하려 하지 않는다. 도대체 물 위를 걷는 것 자체가 처음부터 무리였다고 자신을 정당화하려 하지 않는다. “주님, 살려주십시오.” 이것은 회개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다시 선언하는 신앙고백 행위다. 이 신앙고백으로 돌아가려는 결단이다.
수도교회가 창립된 것을 기념하는 오늘, 우리는 예수를 다시 바라보자.
그래서 풍랑 위에 서자. 끝끝내 바람과 파도를 잔잔케 하는 현실을 일구어 내자.
풍랑 위를 걷는 신앙, 풍랑 위를 걷는 교회로 다시 돌아가는 계기가 이날 마련되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