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2:14-17] 믿음은 행동이다 – 1984년 10월 7일, 김상근 목사

믿음은 행동이다

야고보서 2장 14-17절 / 1984년 10월 7일 / 수도교회


[회상 노트]

서울제일교회와 그 교회 담임 목사며 인권-민주화운동의 선봉장인 박형규 목사님을 파괴하고, 그를 교회 사건에 묶어 놓고자 꾸민 사건이 벌써 1년을 끌어오고 있었다. 이른바 반체제 목사에 대한 당국의 또 다른 탄압 수법이 발동된 것이었다. 지난 9월에 우리 기장 목회자들이 당국에 항의하는 농성을 했었다. 신앙고백을 함께 할 수 있도록 교회를 온전히 지키는 것 또한 중요한 민주화운동이었다.

나는 수도교회를 지키고, 오래도록 수도교회는 나와 함께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관계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교회 창립기념주일에 드리는 헌금을 몽땅 지역사회를 위해 썼다. 헌금 명칭도 ‘지역 봉사 헌금’이었다. 그해 예산액이 200만원이었던가? 실제 헌금은 퍽 부족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수도교회의 정체성에 왜곡이 시작되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착잡했다. 나는 평소 헌금을 많이 하라는 설교를 해본 적이 없다. 헌금의 의미를 교육한 일이 있을 뿐이었다.

나는 우리 수도교회 교인들의 행동 없음 때문에 고통스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행동하는 신앙인이 약자를 돕자는 헌금을 인색하게 한다면 그 신앙은 거짓이다. 어디 헌금뿐이겠는가? 지금 어려움을 호소하고 도움을 청하는 이웃이 있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신앙은 위선적 신앙일 뿐이다.

내 일이 나를 지치게 했다. 그걸 핑계로 이웃의 고통의 현장을 멀리했다. 행동하기를 피하는 나를 질책했다. 역시 내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말씀을 향한 물음]

우리는 스스로 믿음 생활을 한다고 말한다. 예배 참예, 성서 연구, 연수회 참석, 이것들이 믿음 생활일까? 믿음 생활이란 어떤 것일까?


[슬라이드]













[설교 전문]

구교인 천주교와 우리 신교 사이에는 신학적으로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 부분이 있다. 구교는 ‘우리 인간의 구원은 각각 그의 행위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것이고, 신교는 ‘자기의 행위가 구원받을 만하여 구원받게 될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다.’는 신학적 입장을 갖는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될 수 있다고 한다. 구교가 행위를 강조한 것이 잘못이라 여겨지지는 않는데 ‘행위로’라고 하다 보니 결국에는 ‘최선을 다하여’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을 다하여’라는 진실된 자세를 떠나 위선과 교만으로 떨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구원을 이룰 만큼 선하고 완벽한 행위가 우리 사람에게는 있을 수 없다는 신교의 고백은 훨씬 근본적이며 옳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그의 공로에 의지하여 비로소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신학도 옳은 신학이다.

그러나 “오직 믿음으로만”이라는 이 신학은 결국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 해야 한다는 마땅한 행위를 소홀히 하게 되었다. ‘믿음으로’라는 것이 무엇이냐, 그것은 하나의 교리요 정신적 행위라고 해석하는 오류를 가져온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위한 교리 공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믿는 마음, 그것을 닦는 것을 신앙의 길이라 여기게 된다. 여기에 행위가 사람을 구원하게 하는 길일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믿음에 행위가 없을 수 없다는 너무나도 당연한 논리가 무너져 버리는 함정이 있다.

오늘 성서 본문은 대단히 설명조의 본문이다.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행동으로 나타내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문제를 제기한다. 이어서 더 구체적인 설명을 부연한다.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떨어졌는데 …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녹이고 배부르게 먹어라’고 말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믿음은 곧 행동’이라는 말이다. 그 행동은 교리도 아니요 마음의 문제도 아니며 구체적인 것임을 말해 주고 있다. 믿음이 있다면 필요한 것을 주어야 그 믿음이 믿음으로서의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행동만 하면 그것이 곧 믿음이다는 말과는 다르다. 믿음이 있다면 거기 행동이 있지 않을 수 없다. 믿음은 행동이다. 17절에서는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라고 잘라 말한다. 죽은 믿음이란 이미 믿음이 아니다.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것은 이미 믿음이 아니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도 사실 행동하라는 것이다. 대부분이 구체적 가르치심이다. 교훈을 써 놓은 마태복음 5장을 보자.

“나를 따라 오라.”
“형제를 향하여 성내는 사람은….”
“형제더러 미련한 놈이라고 말하면….”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 할 때나 형제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은 것이 생각나거든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두고 나가서 먼저 형제와 화해하라. 그리고 와서 제물을 드리라.”
“네 오른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버리라. … 네 오른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버리라.”
“너희는 다만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만 하라.”
“누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 뺨을 돌려대고….”

누가복음의 ‘삭개오’ 기사에서도 삭개오가 믿음을 고백하는데 그것은 구체적 행동이었다.

“주님 보십시오. 제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제가 누구에게서 무엇을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를 갚겠습니다.”

구약성서는 어떤가? 예언자들의 외침도 행동하라는 것이었다. 지금 행하고 있는 악을 중지하고 선한 삶을 살라는 ‘선한 삶 - 행동’을 외친 것이다. 예언서는 매우 자명하므로 예시를 생략한다. 소위 율법서도 그렇다.

“너희가 히브리 사람을 종으로 삼았을 경우에는 6년 동안만 종으로 부리고 7년이 되면 보상 없이 자유를 주어 내보내라.”
“너희는 근거 없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죄 있는 편에 합세하여 권세부리는 자들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지 말아라.”
“너희는 너희에게 몸 붙여 사는 사람을 구박하거나 학대하지 말아라. 과부와 고아를 괴롭히 지 말아라.”

예수의 가르침, 예언자들의 외침, 율법서 모두가 교리나 정신적인 상념의 일이 아니다. 행동을 지시하는 것이었다.

나는 여기서 나 자신과 여러분에게 야고보의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내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행동으로 나타내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는 믿음 때문에 어떤 구체적 행동을 했으며 또 하고 있는가? 우리가 믿음 가운데 있다는 증표는 무엇인가?

최근 내가 갖게 된 깨달음과 충격 두 가지만을 들어 말씀드리고자 한다. 나는 주일마다 교회를 순방하고 있다. 깨달음을 먼저 말씀드린다. 나는 평소 교회를 위해서만 열심히 일하는 것은 아직도 낮은 신앙이요 언젠가는 그 단계를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교회를 위해서만 일하는 것은 문제지만 교회를 위하여 일하지 않는 진실한 믿음은 없는 것 아닌가 하는 깨달음을 갖게 되었다.

해마다 5월 마지막 주일인 교회 창립 기념 주일에 우리는 지역 봉사 헌금을 해 왔는데 올해에는 예산액 200만원도 헌금되지 못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이 내 마음을 퍽 괴롭게 했다. 우리 교인들이 그렇게도 인색한가 하는 것과 교회가 해야 하는 일에 그렇게도 무관심한가 하는 것 때문이었다. 사실 200만원이라는 액수는 우리가 모두 덤벼들면 대단히 적은 액수다. 지난 주일에 갔던 교회는 교인이 약 150명쯤 되는데, 승용차를 타고 온 사람은 나 혼자였다. 그런데 그 전 주일 헌금은 100만원이 약간 넘었다. 감사 헌금과 십일조 헌금이 70만원이나 되었다. 그 목사님이 유난히 헌금을 강조하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교회를 위한 열정, 하나의 행동이 있는 것이다. 아니 자기 자신을 향한 믿음의 행동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헌금하는 것이 꼭 믿음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믿음은 있는데 헌금은 하지 않는다는 양태는 없다는 말이다. 우리 교인들의 큰 문제다.

다음으로 지난 목요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가 주관하는 “고난받은 이들과 함께 드리는 예배”에 참석했을 때 받은 충격적인 이야기다. 이 예배는 NCC 주관으로 매주 목요일마다 드려진다. 나는 과거에는 그 예배에 거의 빠지는 일이 없이 꼭 참석했다. 그런데 최근에는 일정이 어려워서 자주 참석을 못하고 있었다. 하도 오래 참석을 못하여 지난 목요일에는 시간을 만들어 참석했다. 약 3시간이나 걸리는 예배였는데 처음에는 너무 길게 한다는 짜증스런 마음이 생겼다가 끝내 회개하는 심정으로 끝까지 앉아 있게 되었다.

그날따라 여러 고난 가운데 있는 이들이 나와서 그들이 당하고 있는 처지를 호소하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순서가 있었다. 전남 함평 농민들의 호소, 생산비에도 못 미치는 추곡 수매가 결정과 생산된 농산물을 팔 수 있도록 해주기보다 정부가 오히려 농민과 소비자 사이에서 장사를 하여 이익을 남기고 있다는 것, 충북 청주에서 자신들의 집이 학교 부지 혹은 공장 부지로 행정 처분되어 헐값에 갑자기 쫓겨나게 되자 자기들을 도와달라는 호소, 청계 피복노조가 정부로부터 강제 해산을 당하였으나 자기들은 합법이니 자기들을 도와달라는 불과 18, 9세의 어린 소녀의 호소, 그리고 노동부가 만들었다는 문제의 노동자 명단, 소위 블랙 리스트 때문에 취직하게 되었다가는 쫓겨나고 또 취직했다가는 쫓겨나게 되어 급기야 나갈 수 없다고 버티다가 뭇매를 맞고 혼수상태가 되었다는 급한 소식 등등이 있었다.

이런 소식을 내가 모르고 있었던 것도 아니요 처음 듣는 새로운 호소도 아니었다. 나의 충격은 ‘그들의 고통과 내가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구나’ 하는 사실을 발견한 충격이었다. 나는 지금 내가 어디에 살고 있느냐, 내 생은 어디에 있느냐 하는 심각한 자문을 하고 있다. 물론 나의 일은 거의가 교회를 위한 일이다. 하지만 그 교회의 일이라는 것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 얼마 동안 고난의 현장 소식이나 그들을 만나지 못한 사이에 나는 그저 자기 일에 깊이 빠지게 되었고, 세상에 어떤 아픔이 있는가조차 느끼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좋은 호텔이며, 잘 꾸며진 회의실이며, 그렇게 나쁘지 않은 제 사무실에서만 생활하는 사이에 그렇게 되고 만 것이다.

내일의 일을 위해서 나에게 휴식이 필요하다고 하여 집에 들어와서 음악을 듣고 심신을 쉬곤 하는 동안에 나는 믿음의 행동이라는 점에서 심한 안일에 빠져들고 만 것이다. 구체적인 행동을 할 힘을 잃고 행동없는 교리적 믿음만을 붙들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말은 믿음을 잃고 스스로의 안일 속에 빠져 있는 것이라고 고쳐 말할 수 있다.

우리 교인들은 대부분 비교적 안일한 생활을 하고 있다. 물론 그렇지 못한 분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우리가 나의 안일한 환경, 조건 속에서만 맴도는 때, 거기에 행동은 있을 수가 없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의 좋은 조건, 편안한 환경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고백하는 믿음을 나는 비난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 믿음에 행동이 없으면 그것은 오히려 나를 죽이는 사약이 되는 것이며, 급기야 죽은 믿음, 아무 소용도 없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된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믿음은 행동이다. 행동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다. 행동이 구원의 근거나 바탕일 수는 없으나 구원받는 자에게 행동이 없을 수 없다. 그 행동은 막연하거나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구체적이다. 내 시간을 내는 것이고, 내 재물을 나누는 것이고, 내 마음을 쪼개어 주는 것이고, 옳은 것을 위하여 작은 일이라도 하는 것이다.

믿음은 행동이다. 행동은 구체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