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1:4-5]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서 - 1984년 9월 2일, 김상근 목사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서

예레미야 1장 4-5절 / 1984년 9월 2일 / 수도교회


[회상 노트]

수도교회는 9월 첫 주일예배 때마다 성찬예식을 가졌다. 여름 휴가철을 보내고 일상의 진지함으로 복귀하자는 뜻이었다.

수도교회는 비교적 자유스런 교회였다. 강제가 없고 구애가 없었다. 교인들의 지성에 모든 것을 맡기는 자율적인 신앙을 지항했다. 하나님조차 의식하지 말라 했다. 이른바 “하나님 없이”다. 그러다 보니 깊이와 경건이 없게 되기 일쑤였다.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삶을 살 수 있어야 진정한 기독교인일 것이다. 내밀한 그 무엇! 저 깊이에 꽉 찬 경건! 강조하고 싶었다.

휴가철이라 하여 편히 쉬고 있을 때 전두환 대통령의 일본 방문 계획이 발표되었다. 박 대통령의 굴욕적 국교 재개에 이은 군부 세력의 매판적 행보일 것이 뻔했다. 쉴 때가 아니라 생각했다. 쉴 수 있는 조건이 아니라 생각했다. 경건을 찾아야 할 때였다. 아, 너무 멀었었다!


[말씀을 향한 물음]

무더운 7, 8월을 보내고 이제 9월에 들어섰다. 늦장마인지 때 아닌 폭우인지 비가 퍼부어서 새 달, 새 철을 맞는 분위기가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9월 첫 주는 해이해진 우리의 삶을 다시 바로 세우자고 서로 권면하고 격려하는 주일이다. 우리의 삶은 살아 있는가? 정신이 차 있고 얼이 꽉 차 있는가?


[슬라이드]












[설교 전문]

지금 폭우로 수많은 인명 피해와 이재민이 발생한 날, 주일 예배이기 때문에 그들을 의식하지 않은 채 한가로이 예배를 드리는 것 같아서 조금 어색하고 머뭇거려진다. 저들에게 사랑의 손길이 폭우처럼 쏟아져 실의와 곤경을 하루 속히 딛고 일어서게 되기를 기도하면서 증언을 시작하고자 한다.

지난 증언에서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라 하는가?’, ‘그리스도인이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물었다.

9월 첫 주일에 우리는 관례적으로 성찬 예식을 갖는다. 7-8월은 너무 더워서 생활이 해이해지고, 피서다 휴가다 하여 교회 생활도 퍽 느슨해지기 때문에 심기일전해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취지에서 9월 첫 주일에 성찬을 하게 되었다. 사실 여름이건 겨울이건 계절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사람에게는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의 실정은 그렇다.

독일의 저항 신학자요 신(新)정통주의 신학자였던 본회퍼 목사는 ‘성숙한 사회’, ‘성숙한 사람’을 말하였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해야 한다. 자유하다는 것은 모든 것, 심지어 신앙이라는 이유로 가해지는 규범이나 전통 따위에서조차 자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주일 11시에 예배를 드린다는 것도 그것을 하나의 규범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자유한 것이 아니다. 예배를 꼭 교회에 모여, 시간을 맞추어 드리는 것만이 예배가 아니다. 전 생활이 예배이어야 하며 11시라는 규범에 끌려 예배드리는 것은 벌써 자율이 아니다. 이런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어 완전한 자율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렇게 사는 사람이 곧 ‘성숙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11시 예배에 가도 규범에 의해서가 아닌 전적인 자율에서여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숙한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조차 자유하게 된다고 한다. “하나님 없이” 도무지 하나님을 의식하지 말고 어른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식을 키우는 부모는 어린 자식을 구석구석 돌봐 주기 마련이다. 그러나 얼마큼 크면 그냥 스스로 생활하게 둔다. 자식의 입장에서는 부모가 하라시는 대로 하다가 점점 부모로부터 독립하고 급기야는 전적으로 자신의 인격으로 살아가게 된다. 성숙해지는 것이다. “부모 없이”다.

그러나 본회퍼 목사는 “하나님 없이”라는 말로써 자신의 주장을 끝내고 있지 않다.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서”라고 했다. 자유하고 성숙하게 사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임을 말한다. 자유하나 그러나 완전한 삶을 사는 것이고 자유하나 그러나 자율이 극대화되어 하나님 앞에 선 사람의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극대화된 자유와 무서운 자율이다.

우리 교회는 비교적 자유를 말하고 사실 자유하다. 구애가 없고 속박이 없다. 교회생활이나 교회의 책임 면에서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사회생활에서도 교인이기 때문에 받아야 하는 속박이나 구속에서는 자유한 편이다. ‘어떤 형식’으로 교인임을 구별하려 하지 않는다. 소위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감당해야 하는 어떤 형식이라는 것을 신경쓰기보다는 삶의 질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주일마다 예배에 꼭 나가는 것, 음식을 앞에 놓고 기도하는 것, 그런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입장이다. 그것보다는 그리스도인다운 판단, 생활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 교회로 말한다면 사회적 관심이 특별히 많은 교회고 또 그러려고 노력하는 교회다. 사회적 관심을 갖는 교회가 많지 못한 것이 문제다. 반드시, 우리는 지금까지 노력해 온 대로, 부족하지만 ‘역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여기서 우리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인지’ 하는 일에 더 큰 관심을 쏟아 부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 교회의 자랑이요 긍지다. 다른 많은 교회들이 이것을 부러워한다. 여기에 전혀 이의가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 “하나님 없이”는 강조되고 있으나 “하나님 앞에서”가 강조되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닌가? 예수쟁이 냄새가 풍풍 나는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니다. 냄새난다는 것이 왜 나쁘냐라고 반문하는 분이 있다. 그러나 냄새는 얕기 때문에 나는 것이다. 존재의 깊이에 있지 않고 표피에 있을 때 냄새가 나는 법이다. 진짜 그리스도인은 냄새가 없다. 요란하지 않다. 요란하고 냄새나는 것은 아직 푹 익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형식으로는 도무지 분간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좋다. 그러면 수도교회 교인은 냄새가 나지 않으니 푹 익은 것일까?

최근 내가 갖는 갈등 한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다. 나 역시 냄새나는 목사는 아니다. 여러분이 동의하겠는지 모르겠지만 총회로 간 후 분명히 내가 하는 모든 일은 교회를 위한 일이고 교회의 복판에 있는 것도 분명하다. 그런데 주일마다 설교를 안 하고 혹 설교나 강연을 맡아도 워낙 피곤하고 힘이 들기 때문에 대개 그동안의 것을 기반으로 반 재탕을 한다. 완전히 새 것을 만드는 경우가 반 재탕보다 드물다. 그러다 보니 내가 목사인지 뭔지 모를 지경에 이른 것 같은 회의가 생긴다. 목회자가 갖는 성서와의 씨름 등 내밀한 그 무엇의 비중이 훨씬 작아졌기 때문이다. 공허할 때도 있고 걱정되기도 한다.

우리에게 내밀한 그 무엇이 있어야 하고 존재의 바탕에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라는 무서운 삶의 태도가 있어야 한다. 이것 없이 “하나님 없이”만 말한다면 그것은 무신앙에 떨어질 위험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혹여 우리가 자유를 말하다가, 성숙을 말하다가, 무신앙에 떨어져 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무엇 때문에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는가를 쉽게 스스로에게 답할 수 없다면 그것은 성숙한 신앙이 아니라 무신앙이다. 자유한 신앙이 아니라 무신앙이다. 그것은 교회를 중심한 생활과 분리될 수 없다. ‘내가 교인인가조차 회의가 생긴다.’

“하나님 없이”, 그것 좋다. 우리 수도교회 교인들에게 강조되고 또 강조되어야 할 점이 있다면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를 이어 놓자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서”다.

구약성서 본문 예레미야 1장 4-5절은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특별하신 부르심을 받을 때의 기사다. 여기 성서의 형식은 예레미야가 야훼의 말씀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내가 받은 야훼의 말씀은 이러하였다. ‘내가 너를 점지해 주기 전에 나는 너를 뽑아 세웠다. 네가 세상에 떨어지기 전에 나는 너를 만방에 내 말을 전할 나의 예언자로 삼았다.’”

그러나 이것을 사회과학적으로 말한다면 예레미야의 자의식이다. 나는 누구냐? 내가 잉태되기 전에 하나님이 뽑아 주신 것이고,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예언자로 세우신 것이 아닌가? 이것은 자만이나 교만이 아니다. 그의 존재 바탕에 하나님과의 내밀한 관계를 깔아놓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잊을 수 없고 그를 의식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경건이 예레미야에게 있다. 그는 거기서부터 이스라엘의 문제, 사회적 비리와의 싸움, 고난받는 백성들의 위로를 시작했다.

사회적 책임과 참여는 바로 하나님과의 내밀한 그 무엇으로부터 출발되고 또 그것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서”, 이것을 우리 삶의 지표로 삼게 되기를 바란다.

오늘 우리가 왜 성찬 예식을 특별히 갖는 것인가? 우리의 존재 바탕에 신앙의 깊은 그 무엇을 깔아야 된다는 절대적 요청 때문이다. 우리의 신앙이 무신앙으로 전락하지 않고 예레미야와 같은 내밀한 고백이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 없이는 오직 “하나님 없이”일 뿐이다. 내밀한 그 무엇, 그리스도인이기에 갖는 존재 깊이에 있어야 할 그 무엇을 우리에게도 있게 할 때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서”의 존재가 될 것이다.

여러분의 생에, 냄새나지 않는 저 깊이에 경건이 꽉 차 있어야 한다. 그것을 위해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는 말을 하지 않겠다. 여러분의 지성이 얼마든지 판단하고 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냥 듣고만 말게 되지 않도록 성령께서 도와주십사고 기도 드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