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슬픔과 고통의 선교자
로마서 9장 1-5절 / 1985년 10월 6일 / 돌샘교회
[회상 노트]
수사 당국이 피의자에게 고문을 한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것과 맞서 싸울 수 없어 고문은 자연스레 은폐되었다. 김근태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이 자신이 받은 고문을 폭로했다. 인간 존엄성에 대한 놀라운 신념이었다.
폭력은 공공연하게 자행되는 세태였다. NCC는 ‘고문ㆍ폭력대책위원회’를 조직했다. 내가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제법 유명세가 붙은 사람들도 고문과 폭력에 여지없이 노출되어 있었던 그때, 민중들의 인권은 어떠했겠는가?
이대수 목사가 돌샘교회를 개척한다. 돌샘교회는 민중교회였다. 민중들 사이에 함께 있고자 하는 목사들이 있었다. 기득권자들은 이것을 공산주의적이고 계급혁명적 시도라고 매도했다. 나는 걱정했다. 만의 하나. 계급혁명은 아니더라도 계급적 접근의 유혹에 떨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민중이 일어나 바로 서고, 그것이 이른바 기득권자에게도 축복이 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어야 복음이라고 생각했다. 그럴 때 인간의 존엄성이 세워질 수 있게 된다고 생각했다.
민중교회를 왜 하자는 것이며, 민중교회의 구원사적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 모두, 특히 민중교회 목사의 가슴에 ‘바울의 폭’을 채우자고, ‘큰 슬픔과 고통의 선교자’였던 바울을 배우자고 당부하고 싶었다.
[슬라이드]
[설교 전문]
우리는 지금 돌샘교회를 시작하는 예식을 갖고 있다. 교회는 건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교인 공동체를 말한다. 교인이 몇 명이나 있는지 모르겠으나 오늘 여기에서 교회로서의 가장 작은 단위 공동체가 모이기 시작한 것을 선언하는 것이다. 이것은 위대한 사업이요 하늘의 사건이다. 물론 정식 교회가 되려면 교회로서의 요건을 갖추고 노회 주관 하에 설립 예배를 드려야 한다.
교회 공동체를 모으려 할 때 그 출발 지점을 부촌에 두는 사람도 있고 인구 밀집 지역에 두는 사람도 있다. 물론 어차피 한 공동체로서의 조직을 지향한다면 사람들을 모을 수 있는 가능성을 보지 않을 수 없고 또 그 조직을 운영할 경비 염출을 마음에 두지 않을 수 없다. 개척 교회를 한다 할 때 이 같은 점을 너무 지나치게 강조하면 세상의 비난을 받게 된다.
소수의 교역자들이긴 하지만 최근 가난한 사람들, 노동자, 도시 빈민들이 모여 사는 지역을 택하는 사람들이 점차로 늘고 있다. 그들 속에 복음을 전하여야 한다는 신앙고백이다. 이것은 일반적인 판단과 계산에는 맞지 않는 일이다. 나는 이런 움직임을 ‘민중 목회운동’이라 부르고 있다.
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가?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민중들에 대한 특별한 사랑 때문일 수 있다. 그러나 기성 교회의 타락된 성향에 대한 반작용이며 기성 교회가 갖고 있는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데 민중 목회 바람의 더 큰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교회가 서면서도 기성 교회와의 긴장이 생기고 있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이 바람이 상당히 일어나게 되면 정부 차원에서도 문제를 제기할 것 같은 예견을 나는 갖는다. 대학생들의 노동 취업을 위장 취업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우리 헌법상에 보장되어 있는 직업과 취업의 자유를 짓밟는 것이다. 그러나 잠자는 민중이 깨어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공산주의 운동, 혹은 계급투쟁으로 금방 몰아세우게 된다. 이 같은 논리가 민중목회에 적용되지 않겠는가?
내가 이런 말을 끄집어내는 것은 저들을 공격하고자 하는 의도에서가 아니다. 차라리 오늘은 민중 목회에 헌신하고자 하는 우리, 그것을 지원하고 옳은 길을 가는 것이라고 박수를 보내는 우리의 자리를, 이 같은 상황 속에서 밝혀 보려는 것이다. 또 마침 오늘은 이 교회 교인이 많지 않고 끼리끼리 모였으니 우리의 걸음을 스스로 점검해 보자는 의도다. 오늘 구태여 이 자리에서 민중과의 연대니 일치니 하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이미 몸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오늘 성서 본문을 상고해 보자. 로마서는 우리가 아는 대로 바울이 이방 세계인 로마 지역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신앙을 증거한 편지다.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이방인을 위한 사도라 했고, 하나님이 자신을 이방인을 위하여 선택해 주셨다고 믿었다. 이방인이란 당시 유대인(이스라엘인)이 아닌 사람들을 가리키는 광범한 용어다. 로마서의 논지에서 본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을 야훼 하나님의 선민이라 믿고, 따라서 자신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으며, 야훼 하나님의 온갖 사건이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 일어났다고 믿고 있었다.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이방인들은 구원받을 수 없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독점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펴려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심지어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여 버렸으면서도 자신들의 하나님을 위하여 옳은 일을 했고 또 하고 있다는 환각 속에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을 핍박하고 박해했다. 요샛말로 용공이니 좌경이니 하는 선을 훨씬 넘어서 하나님을 모욕하는 자를 정죄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선교에 온 열을 다 쏟는다. 그는 이스라엘 출신이요 유대인이었다. 그럼에도 이방인을 위하여 일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날 민중 목회자들의 유비적 모델을 보게 된다. 민중 목회에 뛰어든 사람들은 대부분 민중은 아니다. 바울이 이방인이 아니었던 것과 같다. 따라서 비민중 편에서 보면 배반자요 적이다. 민중 속에서 일어난 지도자보다 더 위험하게 여긴다. 유대인들이 바울에 대해서도 그랬다. 바울을 배반자라 했고 민족 반역자라 했으며 가장 가혹한 매도인 ‘하나님 모독자’라고 몰아붙였다.
오늘날도 민중에 대한 특별한 애정은 곧 기존 사회 체제로부터 강렬한 비판을 받는다. 심지어 이 땅에서 밀어내 버리는 철퇴인 용공, 좌경으로 몰리게 된다. 여기 이 교회의 설립을 축복하기 위하여 오신 분들중에서조차 마음 한쪽 구석에 이 전도사가 혹 용공 분자, 혹 좌경 사상을 가진 것 아닌가 의아해 하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하나님의 축복은 유대인들만이 받고 있고 따라서 자기들이 옳다고 여겼던 것처럼 기득권 속에 안주하고 있는 사람들 역시 축복은 자기들이 받은 것이고 축복받은 것을 보면 자기들이 옳다는 신앙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방인들을 저주했고 그래서 민중과의 일치와 연대를 지향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유대의 기존 체제로부터 배척을 받고 매를 맞고 갖은 비난을 받았던 바울의 태도는 어떠했던가? 바울의 심정 복판을 꿰뚫어 보자.
“내게는 내 동족을 위한 큰 슬픔이 있고 내 마음에 끊임없는 고통이 있습니다. 나는 내 동족인 형제를 위하여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오히려 나는 한이 없겠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깊은 심정이었다. 10장 1절에서도 이렇게 쓰고 있다.
“내 깊은 소원과 하나님께 대한 간절한 기원은 그들(이스라엘 사람)이 구원을 얻는 일입니다.”
그는 유대인으로부터 배척을 받고 있었고 또 이방인 가운데, 이방인을 위하여 일하면서 동시에 유대인에 대한 뜨겁고 뜨거운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 미움도 아니고 원망도 아닌 차라리 큰 슬픔이요 끊임 없는 고통으로 자신이 채워져 있었다.
우리가 민중 가운데서 일한다는 것은 장한 일이요 극찬하여야 할 일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민중을 사랑한다는 것이 결국 넓은 의미의 기득권 안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미움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민중을 위하여 기도하고 노력하면서 심정 속에 바울의 이 진실을 가져야한다. 이것이 없으면 증오심이 생긴다. 이것이 없으면 또 다른 독선이 생긴다. 이것이 없으면 교만과 아집의 노예가 된다. 계급의 투쟁까지도 불사하게 된다. 유대인에게 가졌던 바울의 저 큰 슬픔과 끊임없는 고통이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어떻게 가능한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이스라엘인데도 그들에 대한 바울의 인식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그들을 아들로 삼으셔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계약을 맺으시고 그들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들은 예배를 드리는 특권을 가졌고 약속들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유대인에 대한 바울의 인식이었다. 놀라운 일이다. 이런 인식이라면 바울의 이방 선교는 유대에 대한 배반도 아니요 투쟁일 수도 없다. 민족의 이탈도 아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한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다. 한 주께서 만인의 주, 즉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의 주가 되시고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풍성한 은혜를 내리신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다 구원을 얻을 것이다”(10:12-13).
다만 “나는 내 백성이 아닌 자들로 너희의 질투심을 일으키고 미련한 백성들로 너희의 분노를 자아낼 것이다”, “나를 찾지 않던 사람들을 내가 만나 주었고 나를 구하지 않던 사람들에게 내가 나타났다”는 말씀이 지금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10:19-20).
바울의 고백은 이스라엘이라 하여 하나님의 전적인 저주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방인을 그리스도 안에 받아들이는 것은 이스라엘도 구원하고자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11장 12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스라엘의 범죄가 세상에 풍족한 축복을 가져오고 이스라엘의 실패가 이방인들에게 풍족한 축복을 가져왔다면 이스라엘 전체가 완전하게 되는 때 그 결과가 얼마나 위대할 것입니까?”
바울은 이방인들의 축복은 물론 이스라엘 전체가 완전하게 되는 때가 올 것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이방 선교사의 폭이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 이것이 공산주의적인 계급투쟁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나는 민중 목회자에게도 이 같은 폭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그리스도교의 사랑이다. 또 이것이 믿음이다.
본문인 9장 1절-11장 36절을 한 단원으로 본다. 그렇다면 9장 1-5절은 서론이요 11장 33-36절은 결론이다. 서론의 마지막 줄은 “그는 만물 위에 계신 영원히 찬송을 받으실 하나님이십니다. 아멘.”이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역사의 주인은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며 하나님 그분이라는 신앙에서 나온 찬양이다. 유대인과 이방인들은 서로 갈등도 하고 증오도 하지만,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선교를 자신의 것이라 하지 않고 하나님의 장중에 있는 것이라고 고백하고 볼 때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실 구원의 위대한 결과를 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랬을 때 바울은 유대와 이방은 대립이 아니라 모두가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이며, 이방 선교로 말미암아 이스라엘도 구원을 얻게 되기를 기대하게 된다.
‘민중 목회 운동’은 내 동족을 위한 큰 슬픔과 끊임없는 고통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기득권 속에 있는 형제를 위하여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저들이 구원만 받는다면 오히려 나는 한이 없겠다는 진실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그리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경륜 속에 있는 것이며 구원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고 계심을 고백하는 큰 신앙, 큰 가슴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우리는 담담하게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할수 있어야 한다.
“오, 하나님의 부요와 지혜와 지식의 깊음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릴 수 없으며 그의 길을 알아낼 수 없도다.
누가 주의 생각을 알았으랴? 누가 주의 상담자가 되었느냐?
모든 것이 하나님께부터 나오고 그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그에게 돌아가는도다.
영광이 그에게 영원히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3-3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