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1-12] 새해를 만드는 삶 – 1993년 1월 6일, 김상근 목사

8월 31, 2026

새해를 만드는 삶

마태복음 2장 1-12절 / 1993년 1월 6일 / 한국유리주식회사 시무예배


[회상 노트]

최태섭 한국유리주식회사의 설립자, 회장은 내가 목회하던 수도교회의 장로이셨다. 그는 새해 첫 출근 날, 회사 안의 기독교인 사원들과 함께 신년예배를 드렸다. 매년 그리했다. 모이는 이들의 신앙 성향이 각각일 수밖에 없다. 간혹 중요 간부 중에는 다른 종교를 신앙하는 이도 있었으나 그도 그 예배에 참석했다. 최 회장께서는 언제나 나를 설교자로 초청했다. 설교하기가 쉽지 않았다.

최 장로님은 기독교계는 물론이고 사회에서도 존경을 한 몸 가득 받는 분이셨다. 나는 1968년, 수도교회 전도사로 목회를 시작했다. 장로님을 만나게 되었다. 우리 둘 사이에 일화가 많다. 당시 기장 교회에는 흔치 않은 재벌 중의 한 사람인 최태섭과 극렬한 반체제 인사로 찍혀있던 김상근이 한 교회에서 목사와 장로로 공존하는 것을 사람들은 불가사의한 일이라 했다. 독재 권력이 그 어른을 얼마나 괴롭혔을까 하는 것은 그 시대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나는 기장 총회 총무로 선임되어 자리를 옮길 때까지 수도교회를 목회했다. 장로님과 부인인 김성윤 권사님은 나를 ‘아들’이라 하셨다. 우리 둘 사이에 일화가 많다. 누구에게나 자랑하고 싶은 일화들이다.

수도교회를 사임한 지 10년이 지났지만 최태섭 장로님은 이 해 직원 신년예배에 또 나를 청하여 설교를 들었다.


[슬라이드]














[설교 전문]


새해를 다시 맞았다. 1993년 한 해 동안 여러분의 회사와 가정과 여러분 각자 위에 하나님의 은총이 넘치기를 바란다.

‘시간’이라는 것은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다. ‘새해’라는 개념도 인간에게만 주신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이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일력을 만들게 하시고 1년이라는 개념을 창조하게 하셨다. 한 해의 끝날이 있게 하셨고 또 한 해의 첫날이 있게 하셨다. 이것은 물론 시간의 길이를 가늠하기 위한 것이다. 사실 어제와 오늘이 다를 것이 없고 또 오늘과 내일에 차이가 있을 리 없다. 그렇더라도 한 해의 첫날, 혹은 끝날은 우리에게 특별한 뜻을 준다.

‘새해’라는 것이 무엇인가? ‘새해’라는 개념은 단순하지 않다. 구태여 ‘새해’를 생각하는 것은 지난 시간과 앞으로의 시간 사이에 차이와 구별을 두라는 섭리가 거기에 있다. 그 차이와 구별은 당연히 변화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새해’란 무엇인가? 변화다. 새해에 갖는 기대란 무엇인가? 변화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지난 시간과는 다른 시간, 지난 시간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시간을 갖게 되라고 주신 것이 ‘새해’라는 낱말이 담고 있는 뜻이리라. 그래서 만들어낸 것이 ‘새해’ 개념이리라.

여기서의 차이와 구별, 변화란 무엇인가? 작게는 개인의 삶에 개선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거짓된 생활을 하던 사람이 새해를 맞이하면서 참된 생활을 한다든지, 자기만 알던 사람이 새해에는 남을 위해 산다든지, 병약한 사람이 건강을, 가난한 사람이 일용할 양식을 얻게 되는 것 등이다. 좀더 큰 마음으로 보면 공동의 선에 더 접근하는 것이다. 개인적 삶의 개선이란 개인의 처지와 형편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것 역시 인류가 함께 지향해야 할 공동선과 궤를 같이한다. 정의, 평등, 자유, 평화 같은 것이 인류가 추구해야 할 공동의 선이다.

그러나 새해라는 개념을 갖고 있는 인간이라면 반드시 변화를 희구하여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인류의 역사는 변화하려는 힘과 변화를 막으려는 힘이 갈등하고 부딪치는 역사다. 개인의 경우도 그렇다. 나 개인에게 변화를 이루어내야 하겠다는 의지가 있는가 하면 그저 그런 대로 살자는 보수적인 의지도 있다. 이 두 의지가 나 개인의 삶에서도 갈등한다. 새해를 맞는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변화를 가져오고자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변화가 없는 삶에 새해는 없다. 새해라 하더라도 그것은 날수를 세는 정도의 새해일 뿐이다. 변화없는 새해는 어제의 연장일 뿐이다.

인류사에도 새해 아침이 있었다. 인류 새해의 기점을 우리는 예수의 탄생에 둔다. 그가 나신 때를 기원으로 삼고 있다. 인류의 새해, 인류의 새 시대가 시작된 지 올해가 1993년이 되었다는 것 아닌가?

우리는 방금 전에 성탄주일을 보냈고, 오늘은 성탄 후 둘째 주일을 보내고 있다. 오늘 나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씌어 있는 예수 탄생 기록을 봉독했다. 예수님은 온 인류를 위해 오셨다 하지만 예수님이 탄생하신 것을 안 사람도 있고 탄생하셨으나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던 사람도 있다. 또 그의 탄생을 기뻐하고 환호한 사람도 있었는가 하면 못마땅해 하고 거부한 사람도 있었다.

누가 알았고 누가 기뻐했으며 누가 환호하였던가? 인류의 새해가 왔는데 누가 그 새해를 맞았던가? 온 인류였던가? 그렇지 않다. 동방의 박사들과 들에서 양을 지키고 있던 목자들이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의 아버지와 어머니, 예수의 아버지와 어머니 마리아 정도였다.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변화에 대한 열망을 가진 사람들이다. 마리아가 수태고지를 받고 부른 노래가 있다. 그 노래는 변화에 대한 고대로 가득 차 있다. 한 대목만 보자.

“주님은 거룩한 분
주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눅 1:46-56).

이것은 변화라는 말로는 그 표현이 부족할 만큼 변화에 대한 열망을 담고 있다. 예수가 오심으로 누구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날 것인가를 밝힌 기록도 그렇다.

“어둠 속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겠고
죽음의 그늘진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리라”(마 4:12-17).

예수의 탄생을 기원으로 삼는 것은 인류사의 변화 때문이다. 인류의 새해는 변화였다.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면 그의 탄생을 기원으로 삼지 않았을 것이다. 마리아의 이 찬가가 과격하다고 배격할 것인가? 마태의 해석이 빨갱이 같다고 비판할 것인가? 새해를 맞을 수 있는 사람은 그것을 배격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적어도 우리가 사는 사회가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동의하는 사람들에게 인류의 새해는 온다. Anno Domini에 살 수 있고 실제로 인류의 새해에 사는 사람은 변화를 받아들이고 동의하고 변화에 참여하는 사람이다.

예수의 탄생을 모르고 있었던 사람은 누구였나? 위에 거명한 사람들 외에는 누구도 예수의 탄생을 몰랐다. 나아가 누가 거부했나? 당시 왕이었던 헤롯과 예루살렘 사람들이었다.

“‘유다인의 왕으로 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에게 경배하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듣고 헤롯 왕이 당황한 것은 물론, 예루살렘이 온통 술렁거렸다”(마 2:2-3).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당시의 시대 상황으로 본다면 누구나 새 왕이 나타나기를 바랐을 것 같은데, 헤롯 왕은 물론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 모두가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왜 그랬나? 그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변화를 거부하는 것이다. 변화를 원치 않는 것이다.

그들이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기에 그랬는가? 예수께서는 공생애를 예루살렘에서 보내시지 않았다. 갈릴리에서 보내셨다. 갈릴리는 가난한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사회 신분도 낮고 가진 것도 없고 병들고 찌든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우리가 흔히 갈릴리에 대한 노래를 부른다. 낭만적으로. 그러나 갈릴리는 당시의 사회에서 천대받고 소외당하던 지역이었다. 반면에 예루살렘은 권력을 가진 사람, 신분 높고, 돈 많고, 배운, 건강한, 그런 사람이 아니면 예루살렘에서 살지 못하였다.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은 그 상태가 좋았다. 그냥 그 상태가 유지되기를 바랐다. 당연하다.

그러나 눈을 들어 그 사회 전체, 이웃과 더불어 모든 사람을 보아야 한다. 예수는 바로 그러자고 한 것이다. “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도 하셨지만 삭개오의 경우는 또 달랐다. 토색한 것은 4배, 재산의 절반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겠다고 했다.

변화를 적극적으로 만들기도 해야 하지만 수용해도 좋다. 그러나 예루살렘 사람들은 술렁거렸다. 변화를 두려워하고 새 시대, 새해를 원치 않았다. 결국 예수는 갈릴리에서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다. 예루살렘에서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 사람들은 예루살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내일이 오늘에 이어지고 오늘이 내일에 이어지기를 바란다. 그들은 ‘새해’를 원치 않는다. 나아가 ‘새해’를 살해하려 한다. 헤롯 왕이 베들레헴에 있는 두살박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인 것은 새해, 신기원, 변화를 거부한 것이다.

새해는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오는 것도 아니다. 변화를 고대하는 사람만이 새해를 맞이한다. 변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만이 새해를 만든다. 새해를 만드는 사람이 되자.

1993년이 여러분 각자에게 새해가 되기를 바란다. 아울러 이 사회, 우리 민족, 인류 모두에게 새해가 되게 하자. 작년과 같은 또 하나의 해가 아닌 새해가 되게 하자.

[마태복음 12:1-8] 약자와의 연대 – 1992년 9월 10일, 김상근 목사

8월 30, 2026

약자와의 연대

마태복음 12장 1-8절 / 1992년 9월 10일 / 낙산교회


[회상 노트]

3년 전 부활주일이었다. 문익환 목사님이 돌연히 방북했다.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보수파는 공격의 호기를 잡은 것이다. 포문을 일제히 열었다. 무분별하고 사려 없는 짓이라고 공격했다. 우리가 빌미를 주었다 해도 부정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노태우 대통령은 때를 얻었다 싶었던 게다. 잔뜩 부리던 엄살을 거두어들이기 시작했다. 반동이 시작된 것이다. 공안정국을 만들었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니 교회는 제 길을 찾지 못한 채 반동의 역사에 오히려 편승한다. 교회의 사회적 책임 같은 구두선을 걷어차 버릴 절호의 기회를 맞은 것이다.

사실 한국 교회는 사회적 기득권자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최고의 이념은 ‘승리주의’다. 교인들이 이를 바란다. 교회의 지도력들이 이를 선호한다.

나 역시 기득권자다. 상대적 가진 자임을 부인할 수 없다. 반공 이데올로기 문화 속에서 분명히 치열한 반공주의자로 살아 왔다. 여기에 신앙적 힘, 미래를 열고 현실을 개혁해 갈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리 없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결단이 필요한 것인가? 어떤 구조를 창출해야 할까? 어떻게 가능한가? 물론 교회도, 교인들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 단색을 지향해서는 안 된다. 조화를 이루어내야 한다. 그러면서도 예수의 교회이기에 반드시 가야하고, 반드시 감당해야 하는 선교 과제가 있다.

나는, 우리가 신앙 안에서 지향해 온 이 고백을 기장 교단이라도 이루어 내야 한다는 강박감에 싸여 있었다.

교회는 예수의 정신에 따라 약자, 민중지향적 당파성을 드러내야 한다. 상당한 한국 교회가 그리하고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이런 사관은 교회에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 내 삶에도 적용해야 한다.

여기에 우리의 당혹함이 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민중지향적일 수 있을까? 간혹 그런 경우도 있다. 우리는 그를 ‘성자’라 부르기도 한다. 그것이 무얼까? 비켜 가는 수법이 아닐까? ‘성자’는 흔한 것이 아니다. 어쩌다 나온다. ‘성자’ 아닌 절대 다수에 나를 숨길 수 있다. 옳은가? 죽을 때까지 작으나마 노력을 해야 한다. 교회가 그 장(場)일까? 그래야 한다.

나의 갈등을 고백했다.


[슬라이드]
















[설교 전문]


민중에 대한 정의는 대단히 복잡하고 어려울 수밖에 없다. 갈릴리 예수의 운동을 우리는 민중 해방운동이었다고 이해한다. 예수의 운동의 중요한 핵심이 민중 해방에 있었다면 우리도 그 운동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가장 낮은 수준이라 하더라도 예수의 운동에 참여하는 것은 우리의 당위요 의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원 70년 전후에 팔레스틴에서 일어났던 유다 민중의 반로마제국, 반식민 투쟁에서 예수는 오히려 역기능을 한 것 아닌가 하는 근거가 성서 여러 곳에 있다. 특히 산상수훈이 그렇다. 중성적 분위기에서 산상수훈을 읽으면 그야말로 지당한 말씀이요 은혜의 말씀, 성현의 말씀이다. 그러나 팔레스틴 유다 민중의 반로마제국, 반식민, 반착취 운동의 민중 현실 속에서 산상수훈을 읽으면 우리는 크게 당혹하게 된다.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나님이 그들을 아들이라 부르실 것이다”(5:9).

“누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 뺨을 돌려대고, 누가 너를 걸어 고소하여 네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도 주라.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라”(5:39-41).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라”(5:44).

“너희는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6:25).

예수의 이런 어록이 하나의 책으로 편집되던 때는 당혹스럽게도 바로 유다 민중들의 반로마 투쟁이 일어나고 있던 때였다. 당시 팔레스틴에서 민중 해방, 독립 투쟁을 하던 사람들 입장에서 본다면 자기들 운동에 찬물을 끼얹는 말이라고 느낄 것이다. 가난한 민중에게 의식주를 걱정하지 말라고 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더 빼앗겨도 자족하고 지내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취해야 할 자세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민족 해방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그들에게 ‘원수 사랑’, ‘오른편 뺨을 맞으면 왼편도 돌려대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시각에서 예수의 행태를 본다면 의아한 부분이 더 발견된다. 예를 들어 당시 유다 민중들이 매국노로 매도했던 세리들이 예수 운동에 가담하고 있는 점이라든지, 아무 저지도 받지 않고 체제 수호의 본거지인 회당에 마음대로 드나들고 또 거기서 가르쳤다는 점 등이 그렇다.

그렇다면 예수는 소위 친로마 평화주의자이거나 그 아류였을까? 그는 단지 유대교를 혁신하려고 했을 뿐인데 그것이 민중봉기 획책으로 오인되어 정치범에 대한 처형인 십자가형에 처해져 죽음을 당한 것일까?

서구에서 일어나고 있는 평화운동이나 우리의 민족 화해운동은 앞에서 말한 산상수훈 등에 성서적 전거를 두고 있다. 그리고 최근의 평화신학, 평화목회도 그렇다. 만약 예수의 운동이 바로 철저한 평화운동 이외의 다른 운동일 수 없다면 광주 학살, 5공화국의 대국민 박해와 착취와 비리는 어떻게 해야 하며, 6ㆍ25 때 미국이 저질렀다고 북한이 주장하는 전쟁 이상의 만행이나 북한군이 저지른 남한에서의 학살 행위는 어떻게 처리해야할 것인가?

나는 반드시, 예수의 사회적 삶의 자리를 바탕으로 하여 예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수의 가장 뚜렷한 사회적 삶의 자리는 착취당하고 가난하고 굶주린 민중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의 가난한 자는 경제적, 정치적 약자들이었다.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이 먹지 못하여 배고팠다는 기록은 여기저기에 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도 “예수께서는 시장함을 느끼셨습니다.”(마 21:18-19) 여기 시장함이란, 점잖게 그리고 먹을 것이 있는데 아직 먹지 않아서 느끼는 배고픔으로 표현했지만 사실은 그냥 배고픔이다. “예수께서는 배고픔을 느끼셨습니다.” 라는 뜻이다.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먹은 이야기도 그렇다. 이것은 예수를 추종하던 사람들이 심심풀이로 간식을 먹은 것이 아니다. 왜 밀을 잘라 먹느냐고 시비를 걸어온 바리새인들에게, 다윗 왕이 배고팠을 때 제사장 밖에는 먹을 수 없는 제사빵을 먹었고 또 자기 동료들에게도 나누어 먹게하지 않았느냐고 응수하였다. 이것을 보면 간식으로 먹은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이것은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만의 상황이 아니다. 당시 로마 제국의 식민 지배 아래 있던 팔레스틴 민중의 사회적 현실이다.

예수는 이렇게 응수하고는 재빨리 안식일 논쟁에서 민중 현실로 저들의 시선을 돌려 놓으신다. 배고픈 민중의 현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 말씀의 대상자는 바리새파 사람들이다. 먹을 것이 있고 가진 것이 있는 사람들이다. 배가 고파 안식일인 줄 알면서도 밀을 훑어 먹지 않을 수 없었던 예수의 추종자들과는 다른 사람들이다. 그들은 율법 준수의 눈으로 민중을 보고 있지만, 예수는 오히려 저들과 함께 사는 삶의 길을 가르치려고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다음 말에 유념해야 한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희생제물을 원하지 않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더면…” 하는 말이 그것이다. 이것은 이 배고픈 사람들, 곧 민중의 배고픔이 자비로써 극복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자비를 줄 수 있는 자들이 빈민과 연대할 때 극복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빈민과의 연대가 희생제물, 곧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나 종교 행위보다 우선한다는 참으로 혁명적 선언이다. 하나님은 빈민들의 빈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안식일 준수나 예배 행위보다 더 중요하고 화급하게 여기신다. 갈릴리 민중의 빈곤 극복의 문제를 절실한 선교과제로 부각시킨 예수는 급기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고 잘라 말한다.

세례 요한도 “속옷 두 벌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과 나누어 가지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라”(눅 3:11)고 가르쳤다. 딱히 부자가 아니더라도 상대적 소유자라면 상대적 빈곤자와 나누라는 것이다. 세례 요한의 선교의 대상은 대체로 기득권자들이었다. 요한도 빈곤자와의 연대를 요구했고, 그것이 회개요 구원이라고 한 것이다.

빈곤자, 팔레스틴 민중들은 누구인가? 힘없어 뺨맞고 고소당하고 속옷까지 빼앗기고 강제당하는 사람들이다. 박해를 당하고 그러나 먹을 것도 없는 불쌍한 사람들이다. 앞서 말한 예수의 산상수훈은 바로 그들에게 준 위로요 격려의 말씀이 아니겠는가! ‘당신들이 그렇게 당하고 사느냐? 그러나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복이 있는 것이다. 네 오른뺨을 치더냐? 왼뺨까지 대라. 박해하는 그 놈들을 위해 차라리 기도하라. 먹을 것 없지? 하늘 아버지께서 주실 것이다…’ 이것으로 우리는 예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민중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다. 그러므로 산상수훈은 보편적인 진리를 가르친 말씀이라고 말해 버리기에는 너무나 진한 예수의 눈물, 민중을 사랑하는 눈물이 거기 듬뿍 담겨 있다. 그렇지 않고야 그때 그 상황에서 예수께서 그런 김빼는 말씀을 하셨을 리 없다.

낙산교회 교우 여러분!

예수가 사랑하셨던 팔레스틴 민중들은 오늘도 우리 사이에 있다. 모양은 다르고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우리 앞에 그들이 있다. 어떻게 배고픈 민중과 떡을 나눌까? 두 벌 옷을 어떻게 절대 빈곤자와 나눌까? 이러한 질문이 우리의 과제가 되어야 하고 이것이 우리의 고뇌가 되어야 한다. 솔직히 혼자 할 수 없어서 연대 구조를 만들기 위하여 여기 신앙공동체를 이룬 것이 되어야 한다. 물론 이것만이 교회 공동체의 유일한 존재 이유는 아니다. 그러나 빼놓아서는 아니 되는 존재 이유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우리는 하나의 클럽으로 모인 것이 아니다. 좋은 말씀을 한 주일에 한 번쯤 부담 없이 듣기 위해 여기에 모인 것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 낙산 신앙 공동체가 이 연대를 어떻게 이루어 낼 것인가? 지금 낙산교회 안에서, 낙산교회와 다른 교회 간에, 사회 속에서 이 연대 구조를 창출해 내야 한다. 이것을 정직하게 고민하고 갈등하여 기어코 예수의 빈민 연대운동의 대오에 서게 되기를 바란다. 그것이 회개요 축복이요 구원이다. 주님은 희생제물을 기다리시지 않는다. 자비, 자비를 기다리신다. 주님이 기다리시는 것은 약자와의 연대다.

[에베소서 2:14-22] 평화의 집을 짓는 꿈 – 1992년 3월 2일, 김상근 목사

8월 29, 2026

평화의 집을 짓는 꿈

에베소서 2장 14-22절 / 1992년 3월 2일 / 기장 총회 교육원


[회상 노트]

기장 총회 교육원의 봄 학기 개강 설교다. 당시만 해도 꽤 많은 지도력들이 교육원을 찾았다. 나는 그들을 한 띠로 묶어내고자 했다. 기장의 지도자 상을 만들고, 그들이 한 목표와 한 신앙고백으로 함께 나아가게 되기를 소망했다.

교육원을 찾는 목회자들은 대부분 도시의 민중교회나 농촌 교회 담임자들이다. 밀리고 밀려서 거기서 목회하게 된 것이리라는 예단을 나는 거부했다. 그것 또한 그의 신앙고백이요 기장에서 배운 신학의 결과라고 우기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도 현실적인 결핍에 직면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현실이다. 혹 후회하게 된다. 그 목회 현장을 떠날 수 있게 되기를 염원하게 된다. 이들에게 신앙적 확신이 없다면 비참해질 수밖에 없다.

기장에서, 기장 교회를 목회하겠다고 결심한 순간 우리에게는 곤궁과 왜소와 결핍을 각오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을 능히 감내할 더 높은 가치가 있어야 한다. 그것을 찾아야 한다.

사실 기장이 총회 차원으로 운영하고 있는 ‘최저생활보장제’는 한 띠를 만들고 함께 사는 동역(同役)의 큰 구상이었다. 그리고 일종의 보완책을 생각한 것이었다. 공산(共産)하고 필요에 따라 소비할 수 있는 초대 교회의 모델을 흉내내 보고자 했던 것이다. 모든 교역자가 자기가 받은 사례비의 1/10 십일조 중 반을 총회에 낸다. 이것을 재원으로 하여, 총회가 정한 그 해의 교역자 최저 생활비에 미치지 못하는 사례비를 받는 교역자의 사례비 차액을 보전하는 제도였다. 보람있는 일을 이루었다고 생각한다.


[슬라이드]











[설교 전문]


지난 1년 동안 함께 기도하고 공부했던 동역자 여러분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여러분과 더불어 공부하던 선교신학대학원 과정 23명, 여자 전도사 과정 30명은 지난 달 24일에 졸업하였다. 그중 몇 분은 여교역자 계속교육 과정에 들어와 다시 우리와 공부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1992학년도는 선교신학대학원 과정에 33명, 여자 전도사 과정에 35명, 여교역자 계속교육 과정에 17명이 입학하였다. 모두를 진심으로 환영하며 여러분과 더불어 함께 살아갈 1년, 혹은 2년을 우리는 설렘과 기대로 맞이하고 있다. 올해 우리 교육원이 생긴 이후 가장 많은 식구를 갖게 되었다. 교육원 식구가 약 170명에 이르게 된 것이다. 교육에 응하게 될 교회 지도자들은 여러분뿐이 아니다.

올 1년, 우리 170여 명을 기본으로 교육원 교육에 참가하게 될 믿음의 식구들은 1천 명이 넘을 것이라 예상된다. 1천 명의 교회 지도자들이 이곳 교육원을 향하여 오고 있는 것을 당겨 상상해 보자. 오늘 이 예배의 첫 순서의 표현처럼 몰려오고 있는 것이 보인다. 가슴 뿌듯한 일이기도 하며 또 동시에 우리 교육원 직원 모두는 무거운 책임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여기 모인 우리는 어떻게 보면 그들 1천여 명을 대표하는 상징성을 가졌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그냥 여기 온 것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각각 오게 된 동기가 다르겠으나 사실 그 깊이에 있는 출발점은 하나다. 그것은 ‘소명’이다.

교회를 사랑하는 불타는 마음이다.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이 시대에, 바른 교회, 바른 목회자, 바른 선교 요원으로 서야 하겠다는 진실이다. 이런 것이 이곳을 향한 출발점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여러분은 그래서 여기 몰려온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가? 결국 우리가 어떤 결실을 거두어야 하겠다고 생각하는가? 1, 2년을 살면서 결국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하나님의 집을 짓게 되기를 바란다. 주님의 몸인 하나님의 집이다. 온 세계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집이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최후적인 비전이다. 구원의 완성이다.

방금 봉독한 에베소서는 물론 이방인들에게 쓴 편지다.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가 모퉁잇돌이 되고 사도와 예언자들이 기초가 되는 하나님의 집을 짓는 것이라고 이방인들을 격려하고 있다. 설혹 예전에 원수 사이였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희생과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원수 관계는 완전히 해소된 것이라고 설교한다. 이제는 하나의 민족이요 한몸이라고 선포해 버린다.

우리는 원수 되었던 사람들이 모여온 것도 아니요 이방인이거나 유대인도 아니다. 그러나 여기 우리가 진지하게 진실되게 받아야할 대목이 있다. 새삼스럽지만 또다시 거듭하여 새롭게 받아들여야 할 진리가있다. 그것은 우리를 여기에 오게 하신 목적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우리가 각각 맡고 있는 일이나 앞으로 감당할 과제들이 모두 다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각각이 아니다. 서로 통하고 연결되어 있다. 그 통함과 연결은 거대한 집, 잘 설계된 집을 연상하게 한다. 이 집의 머릿돌은 예수 그리스도다. 이 집의 기초는 사도와 예언자들이다. 이 집의 이름은 ‘하나님의 집’이요 또는 ‘평화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

어떻게 이 집을 지을 것인가? 잠시 후 우리는 주님께서 베푸시는 성찬에 초청을 받게 된다. 주님께서도 잡히시던 날 밤에 제자들을 모으시고 자신을 주신다고 선언하셨다. 그것을 적극적으로 나타내 보이시기 위해 몸을 상징하여 빵을, 피를 상징하여 포도주를 주셨던 것이다. 성찬을 받는 것은 곧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받는 것이다. 주님을 진실되게 받는다면 우리는 감히 하나님의 집을 짓는 재목이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받아먹고 마신다는 것을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이 있다. 어떻게 진실되게 주님을 받을 수 있을까? 우리가 하는 공부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공부요 그를 다시 받아먹고 마시는 공부다. 사도의 신앙이 무엇이며 예언자의 삶이 무엇인가? 그것이 곧 우리의 신앙이요 예언자의 삶이 되게 하는 공부다.

만약 우리가 진실되게 주님을 받아들인다면, 예수를 받은 우리가 그를 떠나 존재할 수 없다. 예수에 게 바탕을 두지 않고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다. 그를 받아들인다면 그의 눈으로 보게 된다. 그의 행동으로 행동하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를 깎고 다듬자. 마치 집의 건축에 소용될 재목을 깎고 다듬듯이 서로 연결될 수 있게 깎고 다듬자. 생긴 대로, 제 교리와 아집과 독선대로 독존하여 갱신과 개혁을 거부하면 집 지을 재목이 될 수 없다. 깎고 다듬자. 그것이 교육이며 훈련이며 기도다.

우리는 그럼으로써 서로 연결되게 되는 것이다. 신앙과 고백이 연결되고 삶과 행동이 연결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목표가 그저 나 한 사람이 조금 더 배우게 되는 데 머물지 말자. 우리의 연결이 커져서 한국 교회를 더 새롭게 하는 운동으로 나아가게 해야 한다. 우리는 작은 재목이라 스스로 생각할지라도 서로 단단하게 연결되면 우리가 짓는 집이 더 커진다. 그 집은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다. 그 집의 이름은 ‘평화’다. 우리는 신앙의 동지요 개혁의 동지다. 다시 20-22절의 말씀을 듣자.

“여러분도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세운 터 위에 세워졌으며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그 머릿돌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건물 전체가 서로 연결되어 커져서 주 안에서 거룩한 성전을 이루어 가는 것이며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건물을 이루어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집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지금 한 부르심으로 여기 나아왔으니 우리가 서로 연결되는 꿈을 가지자. 우리의 연결이 더욱 단단해져서 점점 커지는 꿈을 가지자. 큰 집, 큰 건물을 이루는 꿈을 가지자. 그 건물이 하나님의 집이요 평화의 집이 되는 꿈을 가지자.

[에스라 3:10-13] 기뻐 울음 터뜨리는 날 – 1992년 1월 9일, 김상근 목사

8월 28, 2026

기뻐 울음 터뜨리는 날

에스라 3장 10-13절 / 1992년 1월 9일 /두야교회


[회상 노트]


두야교회는 충남 태안군에 있는 농촌 교회다. 예나 지금이나 농촌의 교회가 교회당을 건축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헌당예배 설교를 부탁받았다.

당시 그 교회 담임목사님은 김동설 목사였다. 농촌 교회 목사였지만 서울에서 열리는 인권ㆍ민주화 집회에 거의 참석했다. 무슨 큰 역할을 맡는 것도 아니었는데도 조용히 그러나 열성적으로 참가했다. 나는 항상 고마운 마음과 동지애를 가지고 있었다.

지난해에는 유난히도 학생들의 죽음과 죽임이 많았다. 분신한 김기설 군의 유서를 대필했다 하여 강기훈 군이 기소당했다. 그때 우리는 당국의 억지요 민주화운동을 하는 학생들의 부도덕성과 반인륜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음모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회는 끝모를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악의 세력이 오히려 힘을 더해 가는 실정이었다.

이런 일과는 아무 상관도 없어 하는 교회는 교회당을 높이높이 짓고 있었다. 교회당 건축을 아니 할 수 없는 사정이 있다면 당연히 신축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세상 복판에 교회당을 번듯하게 짓는 이유, 지어야 하는 이유를 스스로 가늠해야 하는 것 아닐까? 최소한의 노력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농촌 교회에서도 역사를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교인들의 신앙이 사회의식과 연계될 수 있을 것인가? 그럴 수 있어야 한다. 신앙은 어디서나 건강하고 바른 것이어야 한다.

나는 그러나 신앙의 사회성을 에둘러 말했다. 농촌 교회라 하더라도 교회가 거기 있게 된 역사성, 사회성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오히려 신앙의 감격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슬라이드]









[설교 전문]


날이 가면 갈수록 농촌의 살림은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 우리의 실정이다. 여러 가지 어려움 가운데서도 교회당을 지어 오늘 하나님께 헌당하시니 여러분의 정성과 수고를 참으로 크게 치하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오늘 여러분의 정성을 인정하셔서 이 성전을 기쁘게 받아주실 것을 기도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빌론에게 정복당해 나라를 잃고 예루살렘 성전은 폐허가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포로가 되어 바빌론으로 끌려갔고, 끌려가지 않은 사람들은 식민지 백성으로 살게 되었다. 50여 년이 지나서야 해방이 되었고, 포로로 끌려갔던 사람들은 자기 나라로 되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그 50여 년 동안 남의 나라에서 갖은 박해와 수모를 당했고, 그로 인해 그들의 신앙이 크게 흔들렸다. 그들 바빌론 나라는 마르둑이라는 신을 섬겼는데, 야훼 하나님을 믿는 자기들보다 마르둑을 섬기는 이방 나라 바빌론이 더 강하고 컸기 때문이었다. 50년이 지난 지금, 거의 야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없어져 버렸다. 어떻게 하면 우리도 크고 강하게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몰두하게 되었다.

야훼 하나님 신앙이 흔들리기는 본국에 남아 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크고 강한 나라의 지배를 받으면서 그들이 사는 것을 배우고 그들을 닮아 갔다. 그들을 닮는 것을 자랑으로 삼게 되었다. 우리도 일본의 식민지로 산 경험이 있다. 그때 우리의 꼴과 비슷했다. 일본말을 유창하게 하고 일본인들 사는 식으로 살고 그들을 닮으면 유지가 되고 떵떵거리지 않았던가. 일본인인지 조선인인지 구별하기 어렵게까지 되어 버리지 않았던가. 포로로 끌려가지 않고 남아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런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게 되어버린 상황에서 해방을 맞게 되었다.

포로에서 귀환한 사람들은 옛 자기 집을 되찾고 서둘러 수리했다. 좋게 가꾸어 자기들의 삶의 터전으로 만들었다. 당연한 일이다. 이때 두 부류의 예언자들이 나타나 외친다. 학개, 제3이사야, 스가랴, 말라기 등이 그들이다. 예언자 학개가 일어나 성전을 재건하라고 외친다.

“이 백성은 아직 주의 성전을 지을 때가 아니라고 말한다. … 너희는 어찌하여 성전이 무너졌는데도 아랑곳없이 벽을 널빤지로 꾸민 집에서 사느냐?”(학 1:24)

성전은 아니 짓고 제 집 수리하고 가꾸기에 여념이 없어 하는 것을 꾸짖는 것이다. 어서 성전부터 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제3이사야는 이렇게 예언한다.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다. 너희가 나에게 무슨 집을 지어 바치겠다는 말이냐? 내가 머물러 쉴 곳을 어디에다 마련하겠다는 말이냐? 모두 내가 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다 나의 것이 아니냐?”(사 60:1-2)

이것은 학개의 예언과 다르다. 너희가 무슨 성전을 지어 바친다는 것이냐, 고만 집어치우라는 말이다. 앞의 예언자는 왜 너희 집은 잘 수리하면서 무너진 성전은 아랑곳하지 않느냐는 것인데 다른 예언자는 너희들이 만든 성전에서 하나님이 쉬실 것 같으냐, 어림도 없다는 투다.

같은 시대, 같은 상황인데 왜 이렇게 서로 다른 가르침이 있게 된 것인가? 성전을 재건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성전을 재건하는 것은 하나님이 집이 없으셔서, 쉴 곳이 없으셔서 성전을 짓고 재건하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늘이 하나님의 보좌다, 땅이 하나님의 발판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집 같은 것은 사실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성전을 지으라 한 것인가? 자신들의 신앙을 바르게 하고 하나님의 일을 해야겠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성전을 세워 생활과 신앙의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제3이사야는 앞서의 ‘내가 쉴 집을 마련하기 위해 성전을 짓는다는 생각은 버리라.’는 말씀에 이어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내가 굽어보는 사람은 억눌려 그 마음이 찢어지고 나의 말을 송구스럽게 받는 사람이다”(사 66:2b).

제3이사야와 같은 부류의 예언자 가운데 스가랴가 있다. 그도 물론 성전 재건을 외친다. 그러나 그는 왜 성전을 재건해야 하는가를 상세히 가르친다. 성전은 너희 신앙을 바르게 세우는 교육장이요 너희들의 세계를 바르게 만들어 가는 원동력이 거기서부터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나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너희는 사실대로 공정한 재판을 하여라. 동족끼리 서로 신의를 지키며 열렬히 사랑하여라. 과부와 고아, 더부살이와 영세민을 억누르지 말고 동족끼리 해칠 마음을 품지 말아라:(슥 7:8-10).

하나님이 집이 없어 성전을 재건하라 하신 것이 아니다. 쉴 곳이 없으셔서 성전을 지어 달라 하신 것이 아니다. 성전에서 신앙을 키우고 성숙시켜서 하나님이 굽어보는 사람, 억눌린 사람, 마음이 찢긴 사람,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하게 받는 사람을 돌아보게 되기를 하나님은 바라신다는 것이다. 성전이 있어 공의가 있고 정의가 있게 되기를 하나님은 바라신다는 것이다. 성전을 통해 하나님 신앙이 돈독해지고 그럼으로써 신의와 사랑이 있게 되고 어려운 사람을 돌보게 되는 세상을 만들게 되기를 하나님은 바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전을 짓는 날, 그 날을 이스라엘이 새롭게 시작하는 날로 삼게 하려 하신 것이다. 민족의 중심을 잡는 날, 중심을 세우는 날로 삼게 하려 하신 것이다.

그러기에 오늘 봉독한 에스라서를 보면 성전 기초를 놓던 날, 온 백성은 환성을 올리며 하나님을 찬양했다. 너무 좋아서 목을 놓아 울음을 터뜨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소리를 지르며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고 썼다. 아, 이제 우리가 신앙의 중심을 세우게 되는구나! 이제 민족의 중심을 세우게 되는구나! 50년이나 피폐되고 황폐되었던 우리 민족, 우리들의 가슴에 신앙을 바로 세우게 되는구나! 그래서 그들은 울음을 터트렸다. 기쁨의 울음을 터트렸다.

오늘 우리는 성전을 지어 하나님께 헌당을 하게 된다. 왜 지었는가? 하나님이 집이 없으실 것 같아서 하나님께 지어 드리려 한 것인가? 하나님이 쉴 곳이 없으실 것 같아서 돈들을 내어 이 집을 지었는가? 하늘이 하나님의 보좌다. 땅이 하나님의 발판이다. 집도, 쉴 곳도 따로 필요하지 않으신 신이시다.

그러나 그 하나님이 필요로 하시는 것이 있다. 그것은 이 서산 지역에 있는 어려운 이웃들을 돌보는 교회를 필요로 하신다. 신의가 있는 세상을 만드는 교회를 필요로 하신다. 내 이웃들과 더불어 사는 교회, 공의를 세우고 정의를 있게 하는 교회를 필요로 하신다.

우리는 성전을 왜 지었나? 우리가 하나님이 필요로 하시는 바로 그런 교회가 되기 위해 이 성전을 지은 것이다. 이 성전을 하나님께 봉헌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나님, 주님의 이름으로 우리가 이 성전에 모여 서로 사랑하고 아끼는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겠다는 뜻이다. 저희가 이 성전에 모여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억눌린 사람, 마음이 찢긴 사람, 과부와 고아와 영세민을 돌보겠다는 뜻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두야교회도 비록 편안하게 지내려고 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그러나 여기서 기도하고 결단하여 이 사회, 이 나라에 공의와 정의를 세우는 교회가 되겠다는 뜻이 이 봉헌에 담겨 있는 뜻이다. 우리는 지금 이 지역의 중심을 세운 것, 이 민족의 중심을 세운 것이다. 자손만대에 주고 또 줄 거룩한 신앙의 유산을 이룩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성전을 짓고 봉헌하는 이것은 우리들만의 기쁨으로 그치게 되어서는 안 된다. 이곳 서산 온 동리가 기뻐하는 사건이 되어야 한다. 머지않은 장래에 서산의 모든 사람, 사랑에 서고 의에 서려는 모든 사람, 아픈 가슴을 안고 있는 모든 사람의 기쁨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게 해야 한다.

성전을 봉헌하는 이 날, 우리 교회가 새롭게 시작하는 날이 되기를 바란다. 이런 교회가 될 것이라는 소망 때문에 에스라서에 기록된 것처럼 오늘 우리는 환성을 질러 하나님을 찬양하자.

너무 감격하여 목을 놓아 울음을 터트릴 사람은 감격의 눈물을 흘려라.

좋아라 소리를 질러라. 멀리 있는 사람들이 도대체 저 교회가 우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갈피를 못 잡아도 좋다.

이 날은 우리 교회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날이다. 성전 봉헌은 바로 그것을 선포하고 있다.

[창세기 30:37-43] 야곱이 경험한 기적 - 2026년 8월 23일, 강동교회

8월 28, 2026

야곱이 경험한 기적

(창세기 30:37~43)

- 이인배 목사


우리의 고정관념과 선입견은 성경이 직접 이야기하지 않았음에도 마치 사실인 것처럼 단정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찾아온 동방박사를 세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는 ‘박사들’이라고만 되어 있을 뿐 인원수는 명시하지 않았습니다. 예물이 세 가지였기에 자연스레 세 명이라 짐작했을 뿐입니다.

골리앗과 싸우러 나서는 다윗에게 사울이 갑옷을 입혀주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다윗이 어린 소년이라 갑옷이 너무 커서 벗었다고 알고 있지만, 성경은 명확히 ‘익숙하지 못하므로 거절했다’고 증언합니다. 사울은 백성들보다 어깨 위만큼 더 컸던 장신이었습니다. 만약 다윗이 아주 어린 꼬마였다면 사울이 애초에 자기 갑옷을 건네지도 않았을 것이며, 성경도 ‘갑옷이 컸다’고 기록했을 것입니다. 어린 시절 동화나 만화로 접한 이미지가 우리의 통념을 만든 것입니다.

오늘 살펴볼 야곱의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양떼를 치는 것을 상상해 봅니다. 첫 사랑 라헬을 만났을 때, 우물가의 큰 돌을 번쩍 들어 올리던 혈기왕성한 상남자를 떠올립니다. 라헬을 얻기 위해 7년을 며칠같이 여기며 일했던 청년의 열정을 떠올리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증언하는 숫자의 퍼즐을 하나씩 맞춰보면, 우리가 흔히 놓치기 쉬웠던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화면에 나타난 이미지를 보면서 설명하겠습니다.


야곱이 애굽의 바로 왕 앞에 섰을 때 나이가 130세였습니다. 여기서부터 시간을 역으로 추적해 보겠습니다. 창세기 41장에 따르면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가 30세였습니다. 이후 7년의 풍년과 2년의 흉년이 지난 뒤 야곱과 요셉이 극적으로 상봉합니다. 이때 요셉의 나이는 39세입니다. 요셉이 39세 때 야곱이 130세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요셉을 낳았을 때의 나이는 91세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요셉은 야곱이 라헬과 레아를 아내로 얻기 위해 약속했던 14년을 일한 끝에 태어났습니다. 즉, 야곱이 고향을 떠나 하란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의 나이는 91세에서 14년을 뺀 77세였습니다.

야곱은 앞길이 창창한 젊은 청년이 아니었습니다. 무려 77세가 되도록 부모의 품 안에서 인간적인 잔머리와 꾀를 굴리며 살던 완고한 노총각이었습니다. 형의 분노를 피해 도망쳐 84세에야 가정을 꾸렸고, 77세부터 14년간 정당한 보수도 받지 못한 채 일했던 고단하고 늙은 노동자였습니다.

이러한 혹독한 고난은 억울한 의인의 수난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이 누구였습니까? 배고픈 형의 약점을 파고들어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권을 빼앗고, 눈먼 아버지를 속여 축복을 가로챈 원조 사기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이 세상의 잔꾀와 편법으로 언약의 복을 누리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그 잔머리의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자신이 최고인 줄 알았던 야곱이 마주한 외삼촌 라반은 그야말로 잔머리의 대마왕이었습니다. 라반은 야곱을 14년간 무보수로 부려 먹으며 가스라이팅했고, 20년 동안 품삯을 무려 열 번이나 번복했습니다. 창세기 31장 40절과 41절에서 야곱은 탄식합니다.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와 밤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냈나이다 내가 외삼촌의 집에 있는 이 이십 년 동안 외삼촌의 두 딸을 위하여 십사 년, 외삼촌의 양 떼를 위하여 육 년을 외삼촌에게 봉사하였거니와 외삼촌께서 내 품삯을 열 번이나 바꾸셨으며”

한마디로 20년 동안 개고생을 했다는 말입니다. 자신이 뿌린 속임수의 열매를 20년 동안 뼈저리게 거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이 기간을 가리켜, 하나님께서 가혹한 환경을 통해 야곱의 자아를 깨뜨리시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참된 신앙인으로 빚어가시는 훈련의 과정이었다고 설명합니다.

14년의 세월이 끝나고 요셉이 태어났을 때, 야곱의 나이는 91세였습니다. 이제 야곱은 극심한 위기에 직면합니다.

당시 고대 근동의 법적 관습에 따르면, 빈손으로 들어온 종이 주인의 딸과 결혼해 낳은 자식과 재산은 모두 주인의 소유로 귀속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실제로 라반은 창세기 31장 43절에서 “딸들은 내 딸이요 자식들은 내 자식이요 양 떼는 내 양 떼요 네가 보는 것은 다 내 것”이라고 못 박아 말합니다. 겉으로는 조카라고 했지만 내심 종으로 부려먹은 것입니다.

여차하면 빈손으로 쫓겨날 판이었고, 가족을 데리고 나간다 해도 90이 넘은 노인이 처자식을 데리고 메마른 광야에서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절체절명의 공포였습니다.

바로 그 절망의 자리에서 야곱은 기묘한 품삯 조건을 제안합니다. 양 중에서는 ‘아롱진 것과 점 있는 것, 검은 것’을, 염소 중에서는 ‘얼룩무늬와 점 있는 것’만을 자기 몫으로 삼겠다는 제안이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양은 흰색이, 염소는 검은색이 절대다수였습니다. 얼룩무늬나 점이 있는 개체는 열성 유전자로 인해 매우 드물게 태어나는 돌연변이에 불과했습니다. 상식적으로 스스로를 사지로 몰아넣는 불리한 협상이었습니다.

라반은 쾌재를 부르며 즉각 응했습니다. 그리고 야곱의 일말의 가능성조차 없애기 위해 현재 자신의 양떼에 섞여 있던 모든 유색 가축을 골라내어 자기 아들들에게 맡기고, 야곱의 무리와 ‘사흘 길’이나 멀리 격리했습니다. 자연 교배를 통해 단 한 마리의 변종도 나오지 못하도록 철저히 차단한 것입니다. 라반은 자신이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행여나 조카에게 야박한 외삼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아마도 야곱이 제시한 조건을 공개적으로 홍보했을 것입니다.

인간의 계산, 통계적 확률, 생물학적 법칙, 권력의 힘까지 모든 문이 완전히 닫혔을 때, 야곱은 기이한 행동을 시작합니다.

버드나무, 살구나무, 신풍나무의 푸른 가지를 꺾어 흰 무늬를 내고, 가축들이 물을 마시며 교미하는 개천가 구유 앞에 세워두었습니다. 겉으로만 보면 과학적 근거가 전혀 없는 미신적 태교술이자 노인의 노망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사건의 실체는 창세기 31장 11절과 12절 야곱의 고백에 담겨 있습니다.

“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내게 말씀하시기를 야곱아 하기로 내가 대답하기를 여기 있나이다 하매 이르시되 네 눈을 들어 보라 양 떼를 탄 숫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이니라 라반이 네게 행한 모든 것을 내가 보았노라.”

야곱이 나뭇가지를 깎기 전, 하나님은 이미 꿈을 통해 초자연적으로 일하고 계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야곱이 깎은 나뭇가지는 어떤 마술적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절망의 벼랑 끝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신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영역에서 최선을 다해 내놓은 연약하지만 진실한 믿음의 몸부림이었습니다.

놀랍게도 흰 양과 검은 염소 사이에서 얼룩무늬와 점 있는 튼튼한 새끼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약한 것은 라반의 소유가 되고 튼튼한 것은 야곱의 소유가 되어, 야곱은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 기적이 나뭇가지 성분의 승리였습니까? 유전학적 기술의 결과였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나뭇가지는 보잘것없는 한 노인의 서투른 몸부림에 불과했습니다. 만약 기적이 나뭇가지에 있었다면 성경은 분명하게 언급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적을 완벽하게 설명하는 부분은 창세기 31장 9절부터 13절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은 두 가지를 언급하십니다. “라반이 네게 행한 모든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내게 서원하였으니”라는 부분입니다. 

기적은 나뭇가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도둑맞고 착취당한 자의 몫을 회수하시는 ‘하늘의 공의로운 재판장’ 하나님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20년 전 하나님께서 먼저 야곱에게 항상 함께 하겠다고 말씀해 주셨고 그것에 대해 야곱에 서원한 내용에 근거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붙든 야곱의 작은 순종을 보셨고, 라반의 모든 불의한 착취를 감찰하셨기에 친히 역사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기나 제국의 압제 아래서 이 본문을 읽었을 때, 그들은 TV에서 보는 ‘인생극장’ 같이 단순히 한 노인의 목축 성공기를 읽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의 외삼촌 라반이 살던 ‘밧단아람’은 훗날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침략하고 수탈했던 북방 패권국 아람 제국의 뿌리였습니다. 따라서 야곱의 이야기를 읽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삶을 돌아보았을 것입니다. 야곱의 이야기는 먼 옛날 조상의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고단한 삶을 사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루 하루의 삶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제국의 거대한 착취 구조 아래서 평생 땀 흘려 일하지만 결국 빈손으로 버려질지 모른다는 절망감은 포로 된 이스라엘의 탄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선언합니다. 아무리 거대한 세상 권력이 판을 짜고 사흘 길을 떼어놓듯 연약한 자의 생존을 봉쇄할지라도,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모든 불의한 착취의 판은 단숨에 뒤집힌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영혼은 어느 자리에 서 있습니까?
혹시 ‘너무 늦어버린 늙은 야곱의 절망’ 앞에 주저앉아 계십니까?
“내 나이가 벌써 얼마인데 이제 와서 무엇을 하겠는가”
“젊은 날의 잘못된 선택 때문에 내 인생은 이미 실패했다”며 낙심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는 청년의 혈기에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꾀가 다 무너지고 77세에 도망쳐 90세가 넘어 빈손으로 떨고 있던 늙은 야곱의 무력함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표에는 늦은 때가 없습니다. 내 꾀가 끝난 그 자리가 하나님의 기적이 시작되는 자리입니다.

이 설교를 준비할 때 머리에 스쳐가는 시가 하나 있었습니다.
사무엘 울만의 ‘청춘’이라는 시입니다. 그 시의 일부를 이미지로 화면에 띄웁니다.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늙는 것이 아니라
이상을 잃어버릴 때 비로소 늙는 것이다.
세월은 피부에 주름을 보탤 뿐이지만,
열정을 잃어버리면 영혼에 주름이 진다.
근심, 두려움, 자신감의 상실이야말로
마음을 꺾고 영혼을 먼지 속으로 묻어버린다.
예순이든 열여섯이든 인간의 가슴속에는
경이로움에 대한 갈망,
어린아이처럼 끊이지 않는 지적 호기심,
인생이라는 게임을 향한 끝없는 즐거움이 숨 쉬고 있다.
그대와 나의 가슴속에는 하나의 무선 안테나가 세워져 있다.
사람들과 하나님으로부터 아름다움, 희망, 기쁨, 용기, 힘의 메시지를 수신하는 한,
그대는 언제까지나 청춘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이고, 내가 얼마나 진취적이고 건전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에 따라 내가 청춘의 삶인지를 결정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여러분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신앙생활을 하는지에 따라서 강동교회는 충분히 젊은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의 영혼이 ‘라반의 집과 같은 부조리한 착취의 현장’을 견디고 계십니까? 정직하게 성실을 다했음에도 불의한 구조와 교활한 사람들 앞에서 정당한 대가를 빼앗기고 계십니까?

하늘의 공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의 눈물과 세상의 불의를 다 보고 계십니다. 언젠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께서 억울하게 빼앗긴 여러분의 정당한 대가를 챙겨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낙심의 자리를 털고 일어나 여러분만의 ‘믿음의 막대기’를 깎으십시오.

세상이 쓰는 편법과 타협을 버리고, 여러분이 마주한 삶의 개천가 앞에 서십시오. 부당한 직장 상사 앞에서도 묵묵히 지켜내는 정직의 막대기, 막막한 경제적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드리는 예배와 기도의 막대기, 타협 없는 거룩한 성실의 나뭇가지를 깎아 세우십시오. 분명 이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나뭇가지를 들고 있는 야곱을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지금 광야에서 나이 아흔에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이런 자괴감이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는 일, 준비하는 일,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뭔가 대단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시작했는데 다람쥐 챗바퀴 도는 것도 같고, 결과가 잘 되지 않을 것 같은 무기력도 생길 것입니다.

세상은 여러분의 그 노력을 보며 무력하다고 비웃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믿음의 막대기를 세울 때, 하나님은 그 작은 노력을 통로 삼아 세상의 상식을 뒤엎는 거룩한 역전을 이루실 것입니다.

77세의 도망자를 열두 지파의 조상으로 세우신 하나님, 불합리한 착취를 감찰하시고, 억압자의 탐욕을 꺾으시는 공의의 하나님을 신뢰하며, 메마른 광야를 풍성한 열매로 채우실 주님 안에서 날마다 승리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레위기 25:8-10] 일곱 안식년 후의 희년 – 1991년 8월 18일, 김상근 목사

8월 27, 2026

일곱 안식년 후의 희년

레위기 25장 8-10절 / 1991년 8월 18일


[회상 노트]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난 군부의 폭력으로 인해 우리 군의 지휘권을 가지고 있는 미국에 대해 깊은 토론을 아니 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에게 있어 미국은 무엇이며, 누구냐? 분단은 왜 우리에게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냐?

이미 세계는 탈냉전 시대로 성큼 나아가고 있다. 사회주의권의 종주국 소련 연방이 해체되었다. 그런데 우리 남과 북은 냉전을 계속하고 있는 것은 왜이냐?

교회는 이런 자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1984년 일본 도잔소에서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 그리고 교회의 책임과 역할을 협의했고, 1986년 스위스 글리온의 협의회에서 남과 북 교회 대표가 처음으로 만났다.

그리고 1988년 다시 만나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회는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의 선언”(‘88선언’이라고 함)을 채택했으며, 이 선언은 1995년 분단 50년이 되는 해를 ‘희년’(禧年)으로 만들자고 선포했다.

1990년 역시 같은 장소에서 남ㆍ북의 교회 대표가 만났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는 것이 있다. 희년은 남과 북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남 안에 얼마나 많은 한(恨)이 쌓여 있는가! 이걸 진심으로 쓸어내는 노력이 있을 때 남북 화해의 진정성이 담보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희년 선포는 한을 극복하자는 것이었으리라. 정신적, 형이상학적으로는 부족했던 것이다. 실천! 현실 변혁! 이것이 함께 가야 했던 것이다.

구약성서의 희년은 구체적이다. 우리에게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슬라이드]
















[설교 전문]


1995년은 우리에게 ‘평화와 통일의 희년’이다. 1988년 2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 총회가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을 채택 발표하였다. 그 선언 속에서 분단당한 지 50년이 되는 1995년을 ‘평화와 통일의 희년’으로 선포한 것이다.

선언을 발표한 1988년 11월 25일에 스위스 글리온에서 남북 교회 지도자들이 “한반도 평화통일협의회”를 열었는데 그때 NCC 선언대로 1995년을 ‘평화와 통일의 희년’으로 삼자는 데 북쪽 교회도 합의했다. 그리고 세계교회협의회, 아세아교회협의회, 세계개혁교회 연맹 등 세계 교회도 1995년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의 희년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하고 협력할 것을 결의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정작 한반도의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하자는 것인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냉담한 것 같다.

그리고 1990년 12월 4일에 글리온에서 다시 모임을 갖고 남북 교회가 1995년 평화와 통일의 희년을 이루기 위해 9가지 함께 할 일을 합의하였다. 1995년 희년, 도대체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우리는 선언을 채택한 1988년과 평화와 통일의 희년 1995년의 꼭 중간 시점에 와 있다. 이 시점에서 지난 8월 12일부터 14일까지 국내외 약 400명의 교회 지도자들이 서울에 모여 협의회를 가졌다. “1995 희년을 향한 기독교평화통일협의회”가 그것이다. 1995년 희년을 향하여 가고 있는 우리 자신을 중간 점검해 보고, 이후 우리 교회가 나가야 할 방향, 어떻게 희년을 만들어 갈 것인가를 협의했다.

희년이란 무엇인가? 희년은 레위기에 있는 법이다. 안식년이 일곱 번 되풀이되는 49년이 끝나고 50년째 되는 해가 희년이다.

“너희는 또 일곱 해를 일곱 번 해서, 안식년을 일곱 번 세어라. 이렇게 안식년을 일곱 번 맞아 사십 구 년이 지나서 일곱째 달이 되거든 그 달 십일에 나팔 소리를 크게 울려라.”

희년은 ‘죄’를 벗는 날이다. 보통 사람들은 죄라고 생각하지 않겠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기에 그것을 죄로 깨닫는다. 레위기에 씌어진 대로 하면 원래 남의 땅이었는데 그것을 내 소유로 만듦으로써 어떤 사람은 땅을 많이 갖고 또 어떤 사람은 땅이 없는 사람이 되게 된 것, 저가 급하다고 해서 준 빚이지만 많은 채권을 가진 사람과 많은 빚돈을 짊어지고 허덕이는 사람이 있게 된 것, 이런 것을 죄의 상태라 한 것이다. 말하자면 이런 현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어떤 사람은 주인이 되었지만, 종이 된 사람이 있는 현실, 온갖 권리를 향유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억압을 받고 소외를 당하는 사람이 있는 현실, 이런 것이 죄 된 사회라는 것이다. 그런 사회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또 무엇인가? 소출을 더 많이 내기 위해 더 풍요하게 살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자연을 파괴하고 혹사하는 것을 죄로 깨닫는 것이다. 이런 깨달음들이 희년을 여는 출발이다.

그러므로 희년은 모든 죄의 상태를 원상으로 돌리는 것을 말한다. 사람 사는 사회이기 때문에 시간이 감과 동시에 온갖 관계가 얽히고 설키기 마련이다. 사회적으로 누구는 상당한 권리를 더 갖게 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소외되기도 한다. 경제적으로 더 부유하게 소유하는 사람이 있게 되는가 하면 가졌던 것마저 다른 사람에게 내주게 되기도 한다. 땅을 팔아넘기는 사람, 그 땅을 사는 사람, 남의 돈을 빚내어 쓴 사람, 빚 돈을 준 사람 등이 있게 마련이다. 소출을 많이 내기 위해서 땅을 혹사시키기도 한다. 이것이 인간 사회의 갈등 상태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당연한 현실이라 여긴다. 그러나 이런 갈등 관계를 극복하고 정의로우며 평등하며 자유한 세상을 만들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6년마다 오는 안식년이란 무엇인가? 바로 이런 갈등 상태를 다시 원래의 관계로 돌려보내는 해다. 출애굽기의 안식년 법을 보자.

“너희가 히브리 사람을 종으로 삼았을 경우에는 육 년 동안만 종으로 부리고 칠 년이 되면 보상 없이 자유를 주어 내보내라”(출 21:2).

안식년이란 그냥 노는 날이 아니다. 그냥 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6년이 지나는 동안 누구는 종이 되고 누구는 주인이 되기 마련인데 안식년에 종에게 자유를 주어 서로 자유인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얽히고 설킨 관계, 정상이 아닌 관계를 정상화시키는 것이 안식년이다.

이런 안식년을 일곱 번 지나고 50년이 되는 해가 희년이다. 희년은 억압적이고 절대적인 권력에 의해서 이루어진 모든 사회적, 경제적 갈등을 극복하여 노예 된 자를 해방하고, 빚진 자의 빚을 탕감하며, 팔린 땅을 본래의 경작자에게 되돌려 주고, 빼앗긴 집을 본래 살던 자에게 돌려주는 해다. 모든 사람이 자유와 평등을 공유하게 되는 해다. 얼마나 훌륭한가! 얼마나 이상적인가! 이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면 우리의 희년은 무엇인가? 우선 우리의 갈등 현상은 무엇이고 얽히고 설킨 관계는 무엇인가를 깨닫는 것이다. 우리의 평화와 통일의 희년은 무엇인가?

우리는 본래 하나의 민족, 하나의 나라였다. 그런데 2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서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면서도 두 개의 나라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1945년 이전에 이미 두 개의 나라가 안 될 수 없을 만큼 우리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로 갈려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혹시 지식인들 중에는 공산주의니 자본주의니 하는 것을 알고 있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그야말로 극소수에 불과했다. 모든 국민들은 해방이 되면 으레 한 나라로 독립할 줄 알았을 뿐 그 누구도 두 나라로 분단될 것을 상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분단되었고 거의 반세기를 싸워 오고 있다. 분단 초기 북은 북대로, 남은 남대로 상대의 사상을 용납하지 않았고 박멸주의로 나갔다. 서로를 죽였을 뿐 아니라 아무 관계없는 사람들까지 학살해 버렸던 것이다.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1947년 ‘제주도 4ㆍ3 폭동 사건’이라는 것도 그렇다. 1964년 경향신문이 수기 당선작으로 뽑은 임두홍 씨의 “내가 겪은 4ㆍ3 항쟁 - 대나오름의 기억”의 한 대목을 소개해 보겠다.

“그들의 총구는 닭과 개를 향하여 불을 뿜었고 아무 집에나 마구 들어가서 밥을 시켜 먹었고 … 젊은 여인들을 붙들어다가 욕을 보였다. … 그들은 젊은 사람만 보면 폭도라거나 혹은 빨갱이라고 하여 잡아갔다. … 걸핏하면 넓은 공지에 사람들을 집합시킨다. 그리고는 적색분자를 색출해내는 것이었다. 사소한 감정 다툼이라도 있으면 그 사람은 빨갱이로 고발되기 마련이다. 그렇게 되면 그 집은 몰살을 당하는 판이었다. 아! 얼마나 소름끼치는 세상인가? … 제 이름자 하나 쓸 줄 모르는 그들 젊은이들이 공산주의의 어떤 이데올로기나 데모크라시의 이론을 과연 몇 번이나 생각해 보았을까! … 팔십 호의 집을 가진 용강에는 이날 제사 받는 사람이 구십 명이나 된다. 봉개리만도 명절 못지않은 제사를 드린다.”

물론 사건은 공산당이 일으킨 것이지만 그것을 확대하여 많은 양민을 죽였고 반공주의를 만들었다. 이런 짓은 북에도 있었다.

6ㆍ25는 우리가 하나의 민족 두 나라가 아니라, 두 민족 두 나라가 되게 해 버렸다. 남의 72만, 북의 360만이 죽임을 당했으니 더 이상 동족일 수가 없었다. 고아가 된 아이들, 과부가 된 아낙네들, 완전한 폐허 위에 던짐을 받은 사람들은 남을 혹은 북을 동족이라 생각할 수가 없었다. 철저히 원수가 되어 버린 것이다. 두 민족이 되어 버렸다. 이 현실을 깨닫는 것이 우리의 희년의 출발이다.

우리에게 희년이란 우선 두 민족이 하나의 민족이 되는 것이다. 꼭 그렇게까지 안 했어도 되었는데 그렇게 해 버리고만 것을 서로 뉘우쳐야 한다. 서로 죽이는 데까지 가지 않을 수 있었는데 그런 비극에까지 간 것을 서로 뉘우쳐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6ㆍ25를 경험한 사람들 그리고 그들로부터 반공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북도 마찬가지다. 해방 초 북한에서 온갖 박해를 받고 월남해 온 사람들에게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월북해 간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수 이전으로, 갈라지기 이전으로, 두 민족 이전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희년이다.

두 민족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신뢰를 쌓아 가야 한다.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을 무력으로든 경제력으로든 흡수 통합을 하려 한다면 대결 국면은 결코 해소될 수 없다. 지금 세계는 냉전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엄밀하게 말하여 미소 양극 체제에서 미의 일극 체제로 바뀌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미국은 미소가 대결하던 세계 정치 질서를 깨고 급기야 미국이 온 세계를 지배하는 시대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이런 추세를 보면 한반도도 곧 통일이 될 것 같은 희망이 생긴다.

그러나 대단히 역설적으로 한반도는 세계 유일의 탈냉전 시대의 냉전 지역이다. 미국은 120일 작전이니, 북이 핵 계획을 포기하지 않으면 미는 핵공격을 할 수도 있다느니 하는 위협적 발언을 서슴지 않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는 북방 정책을 과감하게 시행하면서도, 북에 대해서는 파격적인 제안을 하면서도 군사비는 증액시켜야 한다고 하니 도무지 평화 지향적이 아니다.

1991년 북의 군사비가 약 53억 불, 남이 약 100억 불, 모두 150억 불이다. 우리 돈으로 10조 5천억 원에 해당한다. 이 돈이면 20평짜리 국민주택 35만 호를 지을 수 있다. 대학생 100만 명을 4년 동안 완전 무료로 가르치고도 1년분이 남는다. 20억 원짜리 학교 건물 5,250동을 짓는다. 경부고속전철 경비 10조 원 조달이 막연한데 1년 분 군사비로 충당되고 남는다. 올해 우리 총회 주제가 “칼을 쳐서 쟁기를 만들자”이다. 그래야 한다. 총을 들이대고 어떻게 한 민족이 될 수 있는가? 신뢰를, 믿음을 쌓자면 군비축소가 무엇보다 시급하다. 이렇게 해야 평화와 통일의 희년으로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희년은 실현된 적이 없는 이상이었다. 왜 하필 안식년을 일곱번 지난 50년째 되는 해를 희년으로 삼자 한 것일까? 성서에 희년이 분명히 있지만 그것이 실현된 적이 있다는 기록은 한 건도 없다. 왜일까? 내 가진 권리를 쉽게 양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내가 모은 땅, 재산을 순순히 되돌려 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노예를 잘 부려먹고 그런 생활에 익숙해졌는데 안식년, 희년이 되었다고 해방을 시킬 수가 없었던 것이다. 빚을 탕감해 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 그러니 6년이 지나고 안식년이 올 때마다 그렇게 해보려고 노력해라. 다음 안식년에도 좀더 노력해라. 그 다음 안식년에도 더더욱 노력해라. 안식년을 일곱 번 지난 50년째 되는 해를 희년으로 하라는 취지는 일곱 번쯤은 온 힘을 다 쏟아 노력해야 그 결과로 희년이 실현될 수 있다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작은 노력을 쌓고서야 그 토대 위에 희년이 실현될 수 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작은 노력을 안 한 것이다. 6년마다 오는 안식년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첫발을 내딛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50년 희년이 왔다 해서 그것이 자동적으로 실현될 수 없었던 것이다.

왜 안식년을 지키지 못했을까? 왜 첫발을 내딛지 못했을까? 그것은 죄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 속에 있는 이기심이고 탐욕이며, 하나님의 경륜보다 자신의 이익에 급급하는 죄를 이겨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죄 때문에 안식년도 희년도 실현해 내지 못한 것이다. 희년의 실현은 그러므로 철저히 ‘신앙의 문제’다. 바른 신앙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어떤가? 두 민족이 되어 버린 우리가 1995년까지 노력해서 우선 단일 민족 의식부터 만들어 내자는 것이다. 이것이 희년의 첫 발걸음이다. 그러자면 용서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포용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평화를 만들려는 의지를 키워 내야 한다. 총을 조금씩 부숴 평화의 쟁기를 만드는 조심스런 실현이 필요하다. 내 것을 주는 습성도 만들어야 한다. 더 풍요하게 살려는 내 욕망을 억제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덜 풍요하더라도 함께 살고, 더불어 사는 데서 기쁨을 누리는 경험을 가져야 한다. 훈련을 쌓고 경험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 노력, 훈련, 실천, 경험을 희년, 바로 그날 한꺼번에 이루는 것이 아니다. 어느날 갑자기 상대를 용서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다. 어느날 갑자기 전쟁이 포기되고 서로 얼싸안게 되는 것이 아니다. 어느날 갑자기 통일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또 그래서도 안 된다. 지금부터 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1995년 희년을 향하여 우리는 과연 가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하나의 구호일 뿐인가? 우리가 지금처럼 살면 1995년이 된다 하더라도 희년이 성취될 수 없을 것만 같다. 우리에게 노력, 훈련, 실천,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왜 없었을까? 그것은 역시 우리의 죄 때문이다. 용서하지 않는 죄, 포용하지 않는 죄, 평화를 만들려 하지 않는 죄, 내 것을 주지 않는 이기심, 돈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우상숭배, 이런 죄가 만들어 놓은 사회 구조, 이런 죄와 악 때문이다.

1995년 희년이 불과 3년밖에 남지 않았다. 어느새 우리는 분단의 삶을 46년이나 살아 버렸다. 자, 이제라도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온갖 죄를 떨쳐 버리자. 결코 용서하지 않는 죄를 떨쳐 버리자. 결코 포용하지 않는 죄를 떨쳐 버리자. 평화를 절대로 만들지 않으려는 죄를 떨쳐 버리자. 내 것은 결코 내놓지 않으려는 죄를 떨쳐 버리자. 돈을 우상으로 섬기는 죄를 떨쳐 버리자. 그리고 용서하는 훈련을 쌓자. 포용하는 능력을 키우자. 조금씩이라도 총을 부수는 일에 찬성하자. 평화를 만드는 연습을 하자. 내 것을 포기할 수도 있고 내 것을 줄 수도 있는 능력을 키우자. 더불어 사는 기쁨을 맛보자.

그럼으로써 희년을 향한 가능성을 쌓아 가는 것이다. 경험을 축적해 가는 것이다. 그래야 훌쩍 자란 모습으로 평화와 통일의 희년 1995년을 맞이할 수 있다. 우리가 그럼으로써 사랑하는 우리 후손들에게 갈리고 찢긴, 증오하고 살해하는 두 민족이 아니라, 사랑하고 더불어 사는 하나인 민족을 이어 주자

한국기독교연합회 제12회 총회 총대제위께 고함

한국기독교연합회 제12회 총회 총대제위께 고함 이 문서는 한국기독교연합회(N.C.C) 제12회 총회 당시 기독교장로회(기장) 대표들이 총대들에게 전하는 공식적인 입장을 담고 있다. 기장 측은 예수교장로회(예장)와의 분열 이후 회원권 행사 과정에서 겪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