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9:1-7] 각론적 신앙 공동체 – 1991년 2월 10일, 김상근 목사

각론적 신앙 공동체

요한복음 9장 1-7절 / 1991년 2월 10일 / 낙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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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문]


우리가 교회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가? 교회의 시대적 사명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가? 통일 문제며 민주화 문제며 민생 문제며 세계 교회의 동향이며 도대체 아직 미답의 주제가 있을 리 없다. 그런데 무엇을 안다는 것이 곧 삶인 것은 아니다. 참 아는 것은 곧 삶이어야 한다. 아는 것이 힘이라 한다. 그것은 앎이 곧 삶으로, 실천으로 이어진다는 것이고 그렇기에 힘이라는 말이다.

우리 낙산교회의 경우에도 아는 것이 힘인가? 우리는 많은 것을 안다. 그것이 삶으로 영글어지고 있느냐?

예수께서 안식일 날 길을 가시다가 나면서 맹인이 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제자들에게 궁금증이 일어났다. 인과응보적인 사고로는 나면서 눈먼 경우에 대한 대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예수에게 묻는다. 나면서 눈멀게 된 것은 자신의 죄 때문인가, 부모의 죄 때문인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그가 죄를 지었을 리 없고 따라서 자신의 죄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아니면 그 부모의 죄 때문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너무 억울한 일이 아닌가? 뭐 이런 식의 논의가 분분했을 것이다.

혹 주장하는 바가 달라서 두 패로 나뉘어졌다면 나름대로 타당한 논거를 들이대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어떤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다. 요컨대, 그것은 뱃속에서이지만 제가 지은 죄 때문이라든지, 그 부모가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어서 자손 삼사 대까지 그 벌을 받는 것이라든지, 이런 유의 결론에 도달하고, 그렇다고 합의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예수는 전혀 그런 논쟁에 끼여 들지 않는다. 누구 탓이냐가 문제가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그에게서 나타나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땅에 침을 뱉으신다. 흙을 개어서 소경의 눈에 발라 주신다. 논쟁을 갑자기 멈추게 하신 것이다. 소경에게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신다. 여기에 무슨 논쟁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예수의 행위는,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시고 계시기에 그 일을 하는 바로 그것이 우리가 할 일이라는 선언이다.

8절 아래를 보면 그렇게 하여 그는 눈을 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여전히 안식일에 그런 일을 해도 되느냐는 시비를 다시 일으킨다. 예수의 눈은 나면서 소경 된 그의 고통을 보고 있으며, 예수의 마음은 그의 고통을 나누고 있다. 그리고 안식일을 어긴다는 비판을 각오하고서라도 그의 눈을 뜨게 하는 일에 뛰어든다.

제자들은 아직 거기 이르지 못하였다. 바리새인들은 말할 것도 없다. 그의 고통 같은 것은 눈에 보이지 않고 마음에 와닿지 않는다. 소경에 대하여 말하고는 있지만 어디까지나 마음을 쏟아 붓는 것은 아니다. 아픔을 가지고 뛰어드는 것도 아니다. 현실에 관심은 있으나 글쎄 그것은 원론적 관심이다. 이러쿵 저러쿵 분분한 토의를 하고 열을 올리기도 하지만 그 현실을 타개하기 위하여 뛰어들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원론에 머물고 각론으로 들어가고자 하지 않는다.

낙산교회는 무엇 때문에 시작했는가? 수준 높은 분들끼리 교회를 해보자는 것인가? 사교의 장을 갖고자 하는 것인가? 언필칭 교인이라 하면서 예배를 안 드릴 수는 없으니 부담 없이 예배드릴 장을 만들자는 것인가? 그리고 설교라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니 수준 높은 학설이나 주석을 듣고 토론할 수 있는 교회를 만들자는 것인가? 이런 경향이 우리에게 있다면 잘못된 것이다.

예를 들어 말해 보자. 지금 우리가 ‘통일’을 말한다. 그러나 그 자리에 반통일 현실로 인하여 고통받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간과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리고 그들의 고통 같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가? 국가보안법, 반공법으로 20년, 혹은 30년을 감옥에서 보낸 후 출옥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오갈 데가 없다. 교회들이 나서서 그들에게 단칸 방 하나라도 얻어 주자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 인권위원회가 아무리 호소해도 어떤 교회도 반응해 오지 않는다. 오로지 한빛교회 하나가 작은 집을 마련하여 몇 사람을 돌보고 있을 뿐이다. 자기들끼리 셋방을 얻어 합숙하는 사람도 있다.

어느 날 어떤 목사가 달려 들어왔다. 날씨가 이렇게 추운데 그들이 살고 있는 집에 난방 기구 하나가 없으니 난로 하나만 사 달라는 것이었다. 교회가 이렇게 많은데, 누구의 죄인가를 논하는 교회는 수없이 많지만 침을 뱉고 흙을 개어 발라 주는 교회는 없다. 분단의 원인을 말하고 통일의 당위를 주장하는 교회는 이제 수없이 많다. 그러나 그것을 이루어 내기 위한 삶, 행동은 아직 없다.

얼마 전 40년 감옥살이를 하고 출소한 사람이 결국 자살하고 말았다는 신문 보도가 있었다. 충격이었다. 그에게는 차라리 감옥이 더 좋았다는 말이 된다. 다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으니 뭐 소외랄 것도 없다. 밥 걱정, 잠 걱정 할 것도 없다. 자유가 그리울 뿐이었다. 나오고 보니 평등 없는 자유는 아무 쓸데없는 것임을 절감한다. 그것은 차라리 감옥보다 못하다는 것이었다. 교회가 이렇게 많은데 감옥보다 못한 세상이 아니 되게 하려고 침을 뱉고 흙을 개어 발라 주는 교회가 없었다는 말이다.

어느 날 어떤 대입 수험생 아버지가 찾아왔다. 대입 시험이라는 강박감과 학생을 점수로만 취급하는 현실을 비관하여 자기 아들이 끝내 자살을 했다는 것이다. 학생의 집안은 독실한 그리스도인 가정이다. 그 학생은 그 교회 중고등부 학생회장이다. 그런데 그 아이가 죽음으로 내몰릴 때까지 그 교회나 목사나 신앙이 그의 고통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고 따라서 그를 자살로부터 보호해 내지도 못했다.

그 아이는 상당히 많은 글을 썼다. 자신의 고통을 쓴 일종의 수기였다. 그 아이의 마지막 부탁은 그것을 출판해 달라는 것이었다. 출판사에 보내 보았더니 요사이는 죽는 아이도 하도 많고 그런 글도 하도 많아서 희소가치도 없으며 충격도 없기 때문에 출판할 수가 없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놀라운 일이다.

오늘날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는 모든 아이들이 사는 것을 중단당하고 오로지 입시 지옥에서 아등바등 몸부림을 치고 있다. 우리 모두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런 비극적 사태와 교회는 아무 관계가 없다. 혹 입시 직전에 모아 놓고 기도해 주는 정도다. 지옥 속에서의 채찍질이다. 어떤 목사의 부인은 백일 철야기도를 했는데 아들이 불합격했다. 하나님도 이럴 수 있느냐고 원망하더라는 것이다. 이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교회도 침을 뱉어 흙을 개지 않는다. 덤벼들어 눈에 바르는 교회가 없다.

우리 삶의 현실에 나면서 소경 된 사람은 얼마든지 많다. 우리는 개인의 힘으로 이 현실을 감당할 만큼 비범한 신앙인은 못 된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우리를 모아 주신 것이다. 혼자는 할 수도 없고 하지도 않으니 둘과 둘이 모여 서로를 북돋우고 서로를 끌어내어 각론을 행하라는 것이 우리를 모으신 하나님의 뜻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처음부터 원론에 머무는 교회로 있고자 한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매 주일 모여 원론을 논하고 그에 동의를 보내는 것으로 하나님과의 대화를 마감하고자 한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우리는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낮에 해야 한다.” 주님은 “나는”이라 하시지 않고 “우리는”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무언가 주님이 하시는 일, 그 과녁의 중심을 향하여 움직이는 교회가 되기 바란다. 힘이 되는 앎이 참 앎이다. 자신을 던져 일하는 그것을 통하여 사교 정도를 훨씬 넘어선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진다.

우리는 공론하는 제자도 아니어야 한다. 율법을 논하는 바리새인은 더더욱 아니어야 한다.

침을 뱉고 흙을 개어 소경의 눈에 바르는 예수의 현존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