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 3:1-4 ; 누가복음 10:25-27] 어찌 외면하시지 않겠느냐? - 1986년 11월 2일, 김상근 목사

어찌 외면하시지 않겠느냐?

1986년 11월 2일 / 미가 3장 1-4절 ; 누가복음 10장 25-27절 / 강동교회


[회상노트]


“어찌 외면하시지 않겠느냐”는 강동교회에서 한 설교다. 그 교회의 담임 목사인 친구 장성룡 목사가 구류를 살게 되었다. 어쨌거나 이리되면 교회는 당황하기 마련이고 이해 못하는 교인이 있기 마련이다. 목회자의 딜레마다.

장 목사는 수사기관으로 연행당하면서 교회를 부탁한다는 전화를 나에게 했다. 한걸음에 그의 강동교회로 달려갔었다. 교인들을 달래고 또 장 목사가 옳은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강변했다.

교인들의 반응이 엉성했다. 목사의 사회활동에 동의하지 않는 것일까? 조금 의아했다.


[슬라이드]












[설교 전문]


장 목사님께서 즉결 재판소 판결 직후에 거기에서 전화하셨다. 교회와 설교 부탁이었다. 무엇보다 우선하는 걱정 이 교회였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함에 있어서 내 이야기로부터 시작하는 것을 용서해 주시길 바란다. 나는 사실 당국에 20여 회나 연행되었다. 현 정권 아래에서도 두 번 끌려갔다. 그런데도 아직 옥살이는 하지 못하고 있다. 나만큼 조사를 자주 받은 사람도 많지 않은데 감옥에 가지 않은 것을 보고 사람들은 감옥 가는 것도 하나님의 은사라고 한다. 사실 그렇다. 어느 때는 차라리 감옥으로 가는 편이 편하겠다 싶기도 하고, 또 모든 사정이 틀림없이 기소되어 실형을 살 것 같았는데 그냥 풀려난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목사가 왜 감옥을 드나들어야 하는가?

기독교의 시작은 출애굽 사건부터다. 출애굽 사건이란 무엇인가? 이집트 왕의 폭정 아래 고생하고 시달리던 노예 계층, 히브리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건이 출애굽 사건이다. 적어도 이스라엘 민족이 야훼를 만난 것은 이집트 왕의 압제에서 구원을 받게 될 때였다. 하나님은 어디에 나타나셨는가? 왕의 정치적 억압과 폭정이 있고, 백성의 울부짖음과 아우성이 있고, 불의와 부자유가 있는 거기에 야훼는 나타나신다. 그 하나님이 곧 기독교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체적으로 이집트 왕의 정치 아래 있었던 것이고, 하나님은 모세를 내세워 압정에 대결케 하셨던 것이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믿으며 모세를 하나님의 종이라 부르는 데 추호의 주저함이 없다. 그뿐 아니다.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은 하나같이 잘못된 정치에 대결하고, 성서는 그 사실을 야훼 하나님께서 시키신 일이라 기록하고 있다. 세상에는 좋은 정치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본질적으로 죄인이다. 아무리 선한 행위를 하더라도 그 속에는 죄가 숨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행위만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성서는 선언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왕들이나 정치 지도자들도 훌륭한 사람들보다는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할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정치 지도자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말씀한 곳을 들어보자. 미가 3장 1절 이하를 보자.

“무엇이 바른 일인지 알아야 할 너희가 도리어 선을 미워하고 악을 따르는구나! 내 겨레의 가죽을 벗기고 뼈에서 살을 발라내며, 내 겨레의 살을 뜯는구나. 가죽을 벗기고 뼈를 바수며 고기를 저미어 냄비에 끓이고, 살점은 가마솥에 삶아 먹는구나.”

성서는 이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 했지만 사실은 미가라는 예언자가 외쳐댄 말이었다. 미가가 말했지만 그것은 미가의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기독교의 신앙인 것이다. 미가가 없으면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을 하시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면 그 시대에 어떻게 희망이 있을 수 있으며 정의가 있을 수 있을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 정의의 말씀이 그 시대에 있게 해야 한다. 그것을 맡은 사람들이 종교 지도자이며, 오늘날의 목사요 성직자다. 성직자가 입을 다물면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돌들이 외치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그 나라는 망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종교 지도자는 이런 판국에서도 입을 다문다. 미가 3장 5절 아래에서 미가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다.

“예언자라는 것들, 입에 먹을 것만 물려 주면 만사 잘 되어 간다고 떠든다.”

“예언자라는 것들은 돈을 보고야 점을 친다. 그러면서도 야훼께 의지하여 ‘야훼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데 재앙은 무슨 재앙이냐’ 하는구나! 시온이 갈아 엎은 밭이 되고, 예루살렘이 돌무더기가 되며, 성전 언덕이 잡초로 뒤덮이게 되거든, 그것이 바로 너희 탓인 줄 알아라.”(11-12절)

예언자가 없는 시대는 멸망한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지 않는 기독교는 파멸하고 만다. 교회가 존속되는 것은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하나님의 종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시대는 무엇인가? 그것이 누가 만들어 놓았거나 남북으로 갈라져 서로 죽인다. ‘북’은 김일성 1인 독재가 근세사에 유일하게 40년을 지배하고 있다. 거기 자유가 없다. 거기 진리가 없다. 인권이 없다. ‘남’은 무엇인가? 아직도 민주주의조차 정착시키지 못하고 있다. 철거민, 농민, 학생들은 계속하여 몸을 던져 불태운다. 최루탄 냄새가 서울을 뒤덮고 있다. 학생들을 좌경이라 몰아세우지만 그들의 줄기찬 주장은 군사 독재 타도다. 그것은 I960년 이후 어느새 25년이나 계속된 외침 아닌가?

현 정권은, 특히 미가를 통하여 하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한다면, “선을 미워하고 악을 따르”고 있다. 자신이 정권을 얻기 위하여 겨레의 가죽을 벗기고 뼈에서 살을 발라내며 겨레의 살을 뜯는다. 우리는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저지른 저들의 죄를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정권 유지를 위하여 같은 민족, 더구나 내 고귀한 자식들의 가죽을 벗기고 뼈를 바수고 있다. 고기를 저미어 냄비에 끓이고 살점은 가마솥에 삶아 먹는 행위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 처절한 행위는 결국 국가보안법의 남발로 이어지고 있다. 1985년에 229명, 1986년에 461명의 국보법 위반자를 양산시켰다. 건국대 사건 때도 34%의 학생들을 국가보안법으로 기소하고야 말았다. 이 나라에서는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인 국보법 위반자를 조작하기 위하여 고문을 일상화한 것 아닌가? 고문은 국민의 살점을 가마솥에 삶아 먹자는 짓이다. 성고문은 뼈를 바수는 짓이다.

이만큼에서 이 정권은 스스로 물러났어야 했다. 하늘 아래 억지가 통하는 법이 없는 것 아닌가? 성고문 사건이 터진 것은 처음 있던 일이 고발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폭로하신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역사와 하나님 앞에 도덕성을 잃은 자신이 어떻게 나라를 끌어갈 수 있을 것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했어야 한다. 그러나 정권 야욕에서 벗어

나지 못하여 일호(一毫)의 뉘우침 없이 계속적으로 고문하고 주리를 틀어 오다가 ‘박종철 사건’이 터지고야 만 것 아닌가? 나는 여기서 “박종철 사건이 터지고야 말았다.”는 표현을 쓴다. 그것도 그 동안도 정권 야욕을 위하여 더 많은 사람을 고문하고 살인했을 것이라는 심증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것도 하나님이 터트리신 것이다.

우리는 강희남 목사님 등 성직자를 구속했다고 해서가 아니라, 철저하게 도덕성을 상실한 정권이 스스로 물러나지 않는다면 과연 이 정권을 인정해야 할 것이냐를 심각하게 생각할 단계에 왔다. 정치를 잘하고 못하고보다 도덕성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정권은 하나님이 용서하시지 않는다는 것이 성서의 가르침이다.

여기에 이집트에 나타나셨던 야훼 하나님께서 왜 나타나시지 않겠는가? 처음부터 한국 교회는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는 귀한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무식하고 보잘것없는 아낙네나 소위 아랫것들일지라도 그리스도인이 된 후 그들은 새벽기도회에 나가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게 되었다. 배운 것도 없지만 나라의 지도자가 바른 정치를 하도록 기도했던 것이다. 일제하에서는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기도했다. 그러나 일제하 박해에 견디다 못하여 그 기도를 멈추고 말았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나? 예루살렘이 돌무더기가 되었고 성전 언덕이 잡초로 뒤덮이게 되지 않았던가? 6 • 25 전쟁으로 북의 교회는 물론이고 남의 모든 교회당이 사실상 돌무더기가 되었고 교회당 언덕은 잡초로 뒤덮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치 않는 교회의 비참한 모습을 우리는 보았다. 그러나 1960년 이후 교회에 옛 기도가 되살아났다. 정의를 말하고 인권을 주장하게 되었다. 공의를 외치고 약자를 위하게 되었다. 저 처음 교인들처럼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자유와 정의를 위해 기도하게 되었다. 이것은 이집트에 모세를 세우셨던 하나님의 은혜요 이스라엘에 미가와 모든 예언자를 불러일으키셨던 하나님의 은총이다. 그 시대에 모세로 서고 미가 역을 하는 것은 목사의 당연한 의무요 교회의 책임이다.

방금 봉독한 신약성서 누가복음 10장 25-37절의 말씀은 우리가 아주 잘 아는 말씀이다. 강도 만난 사람은 누군가? 앞서 미가가 말한 백성들이다. 찢기고 빼앗기고 매 맞아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다. 그것은 이집트에서의 이스라엘의 모습이며 미가 시대 백성의 모습이다.

오늘날 이 나라 우리의 모습은 ‘강도 만난 사람’과 같다. 자유를 빼앗겼다. 진실이 찢겨 졌고 매 맞아 고문당하고 마치 천한 짐승처럼 길가에 버려져 있는 우리의 모습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 자신과 그들을 일치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집트에서 저 노예들과 함께 고통을 당하신 하나님이 오늘날 장 목사님과 함께 감옥에 가 계신다. 권 양과 함께 성고문을 당하시고 계신다. 박종철과 함께 고문으로 맞아 죽임을 당하고 계신다.

여기에 우리의 구원의 문제가 제기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예수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네가 가서 그렇게 하여라.”이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구했던 것처럼, 미가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던 것처럼, 사마리아인이 저 피투성이가 된 사람을 구했던 것처럼 “너도 가서 그렇게 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다. 여기에 구원의 길이 있다.

마태복음 25장,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처럼 병든 주님, 옥에 갇힌 주님, 나그네 된 주님, 헐벗은 주님, 강도 만난 주님을 싸매고 약을 바르게 되는 때 거기에 구원이 있게 된다. 그러나 그 길은 쉽지 않다. 자선 차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모세가 나타났다. 하나님께서 미가를 세우셨다. 하나님의 교회가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고 있다. 장 목사님과 같은 고난의 길을 걷는 하나님의 종들은 바로 오늘의 모세요 미가며 선한 사마리아인이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희망이 있다는 증거가 무엇인가? 바로 이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하나님의 종이 있고, 그와 함께 가는 교회가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다.

그러나 모세도 미가도 편하지 못했다. 예레미야의 경우를 보자. 예레미야 18장 18절 이하를 보자.

“이 자를 그가 한 말로 때려 잡자. 이 자의 말마디마다 조심하여 듣자고 합니다. 야훼여 제 말을 잘 들어 주십시오. 원수들이 고발하는 저 소리를 잘 들어 보십시오. 이 목숨을 끊으려고 함정을 팝니다.”

이것이 예레미야의 고통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를 졌듯이 하나님의 사람들도 고난과 고통 가운데 있었다. 미가의 말처럼 “입에 먹을 것만 물려 주면 만사 잘되어 간다고 떠드는” 자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다. 고난과 고통을 감내하면서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가 하나님의 사람이다. 우리는 “너희도 가서 그렇게 하라.”는 예수의 분부에 충실하려고 몸부림하는 귀한 목사님을 가졌다.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 되기를 바란다. 그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바란다. 우리 교회가 혹 고난을 당한다 하더라도 주님의 남은 고난을 채우고 있다는 믿음으로 오히려 기뻐하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하셨다. 하나님은 지금 장 목사님과 고난 받는 모든 이들, 우리 교회를 통하여 이 나라를 구하고 계신다. 미가를 통하여 자신의 말씀을 대언케 하셨던 하나님께서 지금 장 목사님과 고난 받는 모든 이들, 우리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대언케 하고 계신다.

목사님이 계시지 않는 불행한 주일이지만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자. 그리고 목사님이 나오시는 날 기쁨으로 만나고 다시 이 길을 가자고 격려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