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하 2:11-15] 두루마기를 이어 입을 사람들 – 1990년 3월 27일, 김상근 목사

두루마기를 이어 입을 사람들

열왕기하 2장 11-15절 / 1990년 3월 27일 / 한신대 대학원


[회상 노트]

1년 전 부활주일날 아침이었다. 새벽예배를 다녀와서 잠시 눈을 부쳤다. 전화벨이 울렸다. ‘한국일보 OOO 기잔데 문익환 목사가 지금 평양에 간 것, 알고 있습니까?’ 나는 소스라쳐 일어났다. 아, 이 일을 또 어떻게 하나? 의미 따위를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그것이 몰고 올 보수의 가공할 공격이 얼른 떠올랐다. 그걸 또 어떻게 막아내란 말인가? 솔직히 짜증이 났었다.

처음에는 힘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긍정적 의미도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적극적인 전망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우리와 반대 입장을 가진 이들은 여전히 보수의 깃발을 높이 들고 있었지만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그 의미와 값을 매겼다. 그리고 우리가 그 일을 이어갈방도를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즈음에, 마침 한신대학교 대학원의 신학과에서 채플 설교 요청이 왔다. 문익환 목사님 등 기장 제1세대 지도력은 훌륭하다. 이들을 이어가야 한다. 간절한 호소를 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우리의 후배들이 바르게 자라고 바르게 이어가야 한다. 미래는 그들에게 달려 있는 것 아닌가?

후배! 중요하다. 우리는 좋은 선배들을 가진 행운아들이다. 우리 후배에게 역시 우리가 좋은 선배이어야 하고, 그들에 의해 우리가 애써 이어가고 있는 훌륭한 전통이 계승 발전되어야 한다. 이를 강조하는 것은 그 반대 현상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으리.


[슬라이드]














[설교 전문]

한신대 대학원 여러분을 모처럼 만났고 또 하고 싶은 말이 있기 때문에 주해적 설교를 할 수가 없다. 열왕기하 2장은 엘리야가 하늘로 들리어 올라가고, 엘리사가 그 뒤를 잇게 되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기사는 전설적이고 대단히 극적이다. 예언자의 대가 어떻게 이어져 왔으며 그들의 기반이 무엇이었던가 하는 것을 밝히는 중요한 대목이다.

엘리사는 스승 엘리야가 자기들 가운데 아직도 더 있어야 하며 결코 떠나서는 안 된다는 강한 판단을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은 아직도 큰 혼란 속에 있고, 사람들은 엘리야를 민족의 지도자로 존경하고 따르고 있다. 이런 때 엘리야가 만약 없어진다면 그것은 큰 혼란의 요인이 될 것이요 감당할 수 없는 사태를 맞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엘리사는 엘리야를 바짝 붙어 다니며 그의 지도력과 예언자로서의 활동을 지속시키고자 애쓴다. 그와 함께 하고 있는 예언직 수련생들도 같은 마음이다.

그런데 엘리야는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엘리사는 당황한다.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이스라엘을 지키던 병거여, 기병이여….” 이렇게 외마디 소리를 내지를 만큼 엘리사는 당황했다. 엘리야가 이제 자기들과 함께 하지 않는다는 엄연한 사실을 그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엘리야의 두루마기만이 엘리사 앞에 있을 뿐이었다. 그 두루마기는 엘리야의 권능의 상징이었다. 엘리야의 투쟁의 상징이었다. 영력의 표상이었다. 엘리사는 지금 그 두루마기를 손에 들었다. 멀리서 이를 지켜보고 있는 수련생들은 엘리야의 영력이 엘리사에게 전수되었다고 생각한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두루마기를 이어받음으로써 엘리야가 감당했던 예언자로서의 온갖 국면을 감당해 나간다.

우리에게도 우리가 이어 입어야 할 두루마기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 교회를 한 단위로 본다면 그것은 한국 교회의 소중한 전통인 민중민족사적 전통의 두루마기다.

한국 교회의 역사가 시작될 때 우리의 선교 상황은 어떠했던가? 수천 년 내려온 봉건적 사회 현실과 문화로 인하여 부패할 대로 부패한 세도 정치판으로 해서, 강대국들의 침략으로 나라의 운명이 그야말로 풍전등화와 같았다. 우리는 제1세계 패권주의 국가의 교회로부터 기독교를 받게 되었지만 다른 피선교국의 형 편과는 달리 한국의 교회는 반봉건, 반세도 정치, 반외세의 민중민족사적 과제에 충실하게 복무했었다. 이것은 하나님 의 특별한 은사요 우리의 자랑이며 긍지다.

그러나 우리의 교회는 1919년 3ㆍ1 독립 만세 운동 이후 ‘세상 것과 교회의 것’, ‘거룩한 영역과 속된 영역’,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을 구별하기 시작했다. 그 후 1960년대까지 40년 이상을 부끄러운 삶을 살아왔다. 그러다가 I960년대에 이르러 비로소 한국 교회 초기에 이미 만들어낸 민중민족사적인 교회의 전통을 이어내기 시작했다. 민중의 인권을 신장시키고 독재에 저항하여 나라의 민주화를 이루어내는 교회로 서게 된 것이다. 엘리야의 영력이 엘리사에게 이어진 것이요 상징적으로 말하면 ‘그 두루마기를 이어 입은 것’이다.

이 승계의 주역들이 누군가? 어렵게 시작하였지만 인권, 민주화, 반독재는 지금 한국 교회가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가 되었으며 부정할 수 없는 선교 과제가 되었다. 그렇게 이끌어낸 주역들이 누군가? 물론 성령께서 이끄신 것이다. 그 성령의 손에 붙잡힌 사람들은 우리들의 선배들이었다. 더 정확히 지적하면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의 1세대들이었다. 그들의 이름을 여기에 일일이 열거할 수 없다. 그것은 개인일 수도 있고 또는 그때마다의 집단 지도력일 수 있다.

‘기장’ 은 결코 큰 교단이 아니다. 전 그리스도인의 3%에 불과한 매우 작은 집단이다. 그러나 ‘기장’ 1세대들은 한국 교회의 위대한 전통을 이어내는 데 성공하였고 따라서 한국 교회에 지대한 영향력을 갖게 된 것이다. 가루 서 말 속에 들어 있는 누룩이요, 화살을 이끌어 가는 화살의 촉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자! 우리의 선배들이 일구어낸 저 위대한 전통을 오늘의 삶 속에서 누가 살아낼 것인가? 오늘의 민중민족사적인 과제를누가, 어떻게 감당해 갈 것인가? 이 작은 가슴에 답답함이 몰아쳐 오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엘리사가 엘리야를 붙들어 놓고자 했듯이 선배들의 옷자락을 붙들고 늘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까지나 우리와 함께 있을 수 없다. ‘아, 이제는 우리가 불가불 저들의 두루마기를 이어 입어야 하는 것이구나!’ 엘리야를 붙들고 늘어졌던 손에는 이미 엘리야가 없다. 빈 손일 뿐이다. 재빨리 저의 두루마기를 찾고 그리고 입어야 할 뿐이다.

나는 ‘기장’ 2세대다. 여러분은 역시 2세대 아니면 3세대다. 오늘 누가 ‘기장’ 1세대인 김 아무개의 두루마기를 이어 입을 것인가? 오늘 누가 박 아무개, 이 아무개의 두루마기를 이어 입을 것인가? 누가 엘리야의 두루마기를 이어 입을 것인가? 기장의 전체적 방향성이 바르게 정립되어 있으면서도 우리의 위대한 선배들, 저들의 삶과 고백, 헌신적이고 청신한 지도력, 이런 것을 이어 받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데 큰 안타까움이 있다. 적어도 먼저 가신 아무개 만한, 아니, 그를 능가하는 지도력이 나와야 할 것 아닌가! 동시에 그와 함께 집단 지도력이 생겨야 할 것 아닌가!

민중민족사적 전통의 두루마기를 이어 입을 사람은 누군가? 저 선배들이 우리에게 던져 주신 제2세대 두루마기를 이어 입을 사람은 누군가? 여러분은 누군가? 하늘로 들리는 엘리야를 멀리서 바라보고만 서 있는 베델의 예언자 수련생들인가? 그래서는 그 영력이 이어지지 않는다. 내 두루마기를 찢고 달려가 엘리야의 두루마기를 집어 들어야 한다. 그리고 감히 그것을 입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함께 배우며 함께 기도한다. 그냥 학문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내 두루마기를 찢는 것이다. 그리고 함께 엘리야의 두루마기, ‘기장’ 1세대의 두루마기를 이어 입기 위하여 배우고 기도한다는 말이다. 여러분은 기장 1세대가 던져 준 두루마기를 찾아라. 그리고 그것을 입어라. 그럼으로써 한국 교회로 하여금 또다시 민중민족사의 길을 가게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