主日學校[주일학교] 敎師[교사]에 對[대]한 몇가지 進言[진언]
[출처]
- 『낙수』 1940년, 147-152
- 『장공김재준저작전집(전5권)』 한국신학대학출판부, 1971년, 제1권, 76~78.
- 『김재준전집(전18권)』 한신대학출판부, 1992년, 제1권, 65~69.
☞ 『낙수』에는 특정 날자가 표기되어 있지 않지만, 『김재준 저작전집』과 『김재준 전집』에는 “1935년 10월 27일”이 표기되어 있다.
안내의 글 : 기독교 교육의 본질을 묻는 1930년대의 예언자적 목소리
이 글은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기였던 1935년 10월 27일에 작성되었다.
당시 한국 교회는 서양 선교사들이 주도하여 기틀을 다진 ‘제1세대 교회’를 지나, 주일학교에서 복음을 듣고 자라난 교인들이 교회의 주축을 이루기 시작하는 ‘제2세대 자생적 교회’로 넘어가는 역사적 변곡점에 서 있었다. 이 시기에 저자는 다음 세대를 길러내는 ‘주일학교’의 운명이 곧 한국 교회 전체의 미래 운명과 직결됨을 꿰뚫어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중대한 사명에도 불구하고, 당시 교회의 내부는 주일학교 교사직을 ‘시간 남는 청년들이 옛날이야기나 해주는 가벼운 봉사직’으로 치부하는 안일한 통념에 빠져 있었다. 이 글은 바로 이러한 시대적 무지와 타성을 깨우기 위해 쓰였다. 참된 영적 교육을 위해서는 교사 자신의 치열한 지적 탐구, 아동에 대한 철저한 이해, 그리고 세밀하게 다듬어진 교수 기술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함을 선언하는 이 진언은, 오늘날의 교육자들에게도 묵직한 영적 도전을 던진다.
1. 서론(문제 제기) : 주일학교 교사직의 중대성 재천명
글의 서두에서는 주일학교 교사를 ‘누구나 할 수 있는 가벼운 봉사직’이나 ‘옛날이야기나 해주는 자리’로 여기는 교회의 안일한 통념을 정면으로 비판한다. 선교사 주도의 1세대 교회를 지나 다음 세대가 주축이 되는 2세대 교회로 넘어가는 시대적 전환점에서, 유년 주일학교 교사야말로 미래 기독교회의 존폐를 좌우하는 가장 막중하고 핵심적인 직분임을 선언하며 독자의 주의를 강하게 환기한다.
“이 글에 있어서 主日學校[주일학교]라는 것은 幼年主日學校[유년주일학교]를 말하는 것이요 主日學校[주일학교] 先生[선생]이라면 幼年主日學校[유년주일학교] 先生[선생]을 말하는 것으로 알아두기를 바란다.”
- ‘유년(幼年)’은 어린 나이의 아동을 뜻한다. 당시 주일학교는 다양한 연령층을 포괄할 수 있었으나, 이 글에서는 대상을 ‘어린이’로 한정 짓고 있다.
- ‘~라는 것은 ~를 말하는 것이요’라는 정의(definition)의 형식을 사용하여 글의 전제 조건을 명확히 설정하고 있다. ‘~바란다’를 통해 독자에게 명확한 인지를 요구한다.
- 이 글에서 다루는 ‘주일학교’와 ‘선생’의 범위를 ‘유년 주일학교’와 ‘유년 주일학교 교사’로 명확히 한정하여 독자의 혼선을 방지하는 문장이다.
- 신앙 교육의 기초가 되는 유년기 교육의 특수성에 집중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기독교 신앙의 형성기에 있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역이 다른 어떤 사역과도 구별되는 독립적이고 중요한 영역임을 암시한다.
“大體[대체] 幼年主日學校[유년주일학교]라 하면 敎會[교회] 안에서 老熟[노숙]한 이들보다도 젊은이들만이 하는 일인 줄로 알며 따라서 幼年主日學校[유년주일학교] 先生[선생]이라면 좀 엔간한 靑年[청년]이면 의례 할 수 있는 줄 안다.”
- ‘대체(大體)’는 일반적인 경향을 뜻한다. ‘노숙(老熟)한’은 경험이 많고 성숙한 상태를, ‘엔간한’은 ‘어지간한(보통 수준의)’을 뜻하며, ‘의례(으레)’는 당연하게 여겨지는 모양을 의미한다.
- ‘~라 하면 ~인 줄로 알며’, ‘~면 의례 할 수 있는 줄 안다’라는 통념을 나타내는 표현을 사용하여, 당시 사람들의 보편적이지만 잘못된 인식을 서술하고 있다.
- 교회 내에서 주일학교 교사직이 신앙적 경륜이 깊은 어른들보다는, 적당한 수준의 청년이라면 누구나 쉽게 맡을 수 있는 가벼운 자리로 치부되는 현실을 지적한다.
- 교회가 다음 세대의 신앙 교육을 신학적, 영적으로 성숙한 자의 사명으로 보지 않고, 교회 내 젊은이들의 가벼운 봉사 활동 정도로 격하하는 세태를 비판한다. 이는 기독교 교육의 본질이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옛말 마디나 해줄 수 있으면 더 없는 資格者[자격자]인 듯이 생각하는 데가 적지 않은 것이다.”
- ‘옛말’은 옛날이야기나 흥미 위주의 이야기를 뜻하며, ‘자격자(資格者)’는 그 일에 알맞은 요건을 갖춘 사람을 뜻한다. ‘적지 않은’은 꽤 많다는 의미의 이중 부정적 강조 표현이다.
- ‘~할 수 있으면 ~인 듯이 생각하는’의 가정과 추측의 연결을 통해, 교사의 자격 요건이 지나치게 낮게 설정되어 있는 현상을 꼬집는다.
- 성경의 진리를 깊이 있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아이들의 흥미를 끌기 위해 옛날이야기 몇 마디 해줄 수 있는 말솜씨만 있으면 최고의 교사인 것처럼 착각하는 교회의 무지한 현실을 개탄하는 문장이다.
- 주일학교 교육을 세속적인 ‘탁아’나 ‘단순 흥미 위주의 이야기 전달’로 전락시키는 것을 비판한다. 기독교 교육은 복음의 진리를 전수하는 영적 사역이지, 단순한 오락이나 시간 때우기가 아님을 역설하기 위한 배경이 깔려 있다.
“그러나 第二世[제2세] 以後[이후]의 敎會[교회]란 것은 (宣敎師時代[선교사시대]의 敎會[교회]를 第一世[제1세] 敎會[교회]라고 한다면) 主日學校[주일학교]로부터 자라난 敎人[교인]이 그 會員[회원]의 거의 全部[전부]를 占領[점령]하고 있는 現狀[현상]으로 보아서도 主日學校[주일학교] 先生[선생]은 基督敎會[기독교회]의 未來運命[미래운동]을 左右[좌우]하는 가장 重要[중요]한 職分[직분]이라 안할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그 職[직]에 있는 者[자]는 모름지기 自重[자중]하여 그 要職[요직]에 萬遺漏[만유루]없기를 期[기]해야 할 것도 事實[사실]이다.”
- ‘선교사 시대’는 외부에서 복음이 이식된 시기를 뜻한다. ‘점령(占領)’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강한 표현이다. ‘미래 운명(未來運命)’은 교회의 존립 자체를 가리키며, ‘자중(自重)’은 스스로 행동을 조심하고 무겁게 여김을 뜻한다. ‘요직(要職)’은 중요한 직책을, ‘만유루(萬遺漏)없기’는 만에 하나라도 빠뜨리거나 실수함이 없기를 뜻한다.
- ‘그러나’라는 역접 접속사를 통해 앞선 사람들의 가벼운 인식과 대비되는 중대한 진실을 제시한다. ‘~로 보아서도 ~이라 안 할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해야 할 것도 사실이다’라는 논리적이고 단호한 인과구조를 통해 교사의 책임감을 강하게 압박하며 결론을 맺는다.
- 초기 선교사들이 세운 1세대 교회를 지나, 이제는 주일학교에서 자라난 교인들이 교회의 주축이 되는 2세대 교회가 되었으므로, 주일학교 교사야말로 교회의 미래 존망을 쥐고 있는 가장 중요한 직분임을 강조한다. 따라서 이 직분을 맡은 자는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한 치의 소홀함도 없이 임해야 한다는 강한 권면이다.
- 구속사적 관점과 선교 역사적 관점이 융합되어 있다. 타문화권 선교사들에 의해 잉태된 한국 교회가 자생적이고 지속 가능한 교회(Indigenous Church)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음 세대로의 신앙 전수’가 절대적이다. 주일학교 교사를 단순한 봉사자가 아니라 교회의 존폐를 결정짓는 ‘예언자적 사명자’이자 ‘신앙의 계승자’로 격상시키는 깊은 신학적 통찰이 담겨 있다.
2. 본론 1 (현실 직시) : 세속 교육과의 대조를 통한 영적 사명의 특수성 부각
1) 처우와 제도의 차이
자격 검증과 경제적 보상이 철저한 일반 교사와 달리, 주일학교 교사는 제도적 지원 없이 오직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열정과 자발적 헌신에만 의존해야 하는 척박한 현실을 짚어낸다.
“國民敎育[국가교육]의 敎師[교사]는 一定[일정]한 期間[기간]의 修鍊[수련]을 畢[필]한 者[자]로써 그 特殊[특수]한 職務[직무]에 關[관]한 試驗[시험]을 通過[통과]하여야 되며 合格[합격]한 그들에게는 一定[일정]한 生活費[생활비]가 提供[제공]되어 있다.”
- ‘수련(修鍊)을 필(畢)한’은 필요한 학업이나 훈련 과정을 완전히 마쳤다는 뜻이다. ‘특수(特殊)한 직무’는 전문성을 띠는 교사라는 직업을, ‘생활비(生活費)’는 교사로서 받는 정당한 급여를 의미한다.
- ‘~한 자로써’, ‘~하여야 되며’, ‘~제공되어 있다’라는 병렬적이고 객관적인 서술을 통해 일반 교사가 되기 위한 통상적인 요건(훈련, 검증, 보상)을 순차적으로 나열하고 있다.
- 세상의 일반 학교 교사들은 일정한 기간 동안 전문적인 교육을 받고, 국가나 기관이 요구하는 자격시험을 통과해야 하며, 그에 대한 대가로 안정적인 급여를 보장받는 제도적 틀 안에 있음을 설명한다.
- 앞으로 전개될 주일학교 교사의 열악한 현실을 부각하기 위해 세속적인 교육 제도의 합리성과 보상 체계를 ‘비교 기준점(Baseline)’으로 설정하고 있다. 세상의 일에도 이토록 철저한 준비와 대가가 따름을 보여준다.
“그러나 主日學校[주일학교] 敎師[교사] 採用[채용]에 있어서는 이 모든 條件[조건]을 하나도 適用[적용]할 수 없는이만치 純然[순연]히 敎師[교사] 自身[자신]의 하나님을 向[향]한 뜨거운 愛情[애정]에 呼訴[호소]할 뿐이며 그 職務[직무]를 爲[위]한 修鍊[수련]도 敎師各自[교사각자]의 自發的[자발적] 準備[준비]에 依存[의존]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 ‘순연(純然)히’는 다른 것이 전혀 섞이지 않고 순수하게라는 뜻이며, ‘호소(呼訴)’는 마음이나 감정에 간절히 호소함을 의미한다. ‘자발적(自發的) 준비’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하는 노력을, ‘의존(依存)’은 오직 거기에만 기댄다는 뜻이다.
- ‘그러나’라는 강력한 역접으로 문장을 시작하여 앞 문장과의 대비를 극대화한다. ‘~없는이만치(없기 때문에)’, ‘~할 뿐이며’,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라는 단정적이고 제한적인 표현들을 연달아 사용하여, 주일학교 교사가 처한 ‘제도적 결핍’과 ‘개인적 책임의 막중함’을 강조하고 있다.
- 주일학교 교사를 세울 때는 일반 교사처럼 훈련이나 시험, 급여와 같은 제도적 조건을 전혀 적용할 수 없는 현실을 지적한다. 따라서 교사직을 유지하는 동력은 오직 교사 개인이 하나님을 향해 품은 뜨거운 사랑과 헌신뿐이며,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한 실력 역시 교사 스스로의 피나는 노력에 기댈 수밖에 없음을 역설한다.
- 기독교적 ‘소명(Calling)’과 ‘헌신(Devotion)’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 교회의 영적 교육은 세상의 물질적 보상이나 강제적인 시스템으로 굴러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한 자들의 자발적인 사랑(Agape)과 자기희생을 기반으로 구축됨을 의미한다. 동시에, 아무런 보상이 없음에도 영혼을 살리는 일에 자발적으로 매달려야 하는 교사들의 외로운 싸움과 고귀한 영적 가치를 신학적으로 변호하고 있다.
2) 교육 본질의 차이
지식과 도덕을 주입하는 것으로 책임이 끝나는 세속 교육과 달리, 주일학교 교사는 억지로 주입할 수 없는 ‘신앙’을 전수하여 전인격적인 반응을 이끌어내야 하므로 훨씬 고도의 전문성이 필요함을 증명한다.
“國民敎育[국민교육]의 敎師[교사]들은 主[주]로 知識[지식]과 道德[도덕]을 傳授[전수]하면 그 責任[책임]을 다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 ‘전수(傳授)’는 기술이나 지식 등을 가르쳐 전하여 준다는 뜻이다. ‘국민교육’은 국가가 주도하는 일반적인 세속 공교육을 의미한다.
- ‘~하면 ~하는 것으로 되어있다’라는 조건과 결과의 구조를 사용하여 일반 학교 교사의 직무 범위와 한계를 명확하고 객관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 세상의 일반 학교에서 교사들이 맡은 바 임무는 학생들에게 학문적 지식과 사회적 규범(도덕)을 가르치는 것에 그치며, 그 행위만으로도 교사로서의 의무를 다한 것으로 인정받는다는 뜻이다.
- 세속 교육의 영역이 인간의 지적인 부분과 윤리적인 행동양식을 교정하는 데 머물러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눈에 보이고 객관적으로 측정 가능한 영역만을 다루는 세상 교육의 본질적 한계성을 내포한다.
“그러나 主日學校[주일학교] 敎師[교사]는 宗敎[종교]를 傳授[전수]하는 것이 그 責任[책임]이니만치 知性[지성]이나 良心[양심]에 强迫的[강박적]으로 傳授[전수]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오 靈性[영성]에 訴[소]하여 그 全人格的[전인격적] 反應[반응]을 기다릴 밖에 없는 것이며 따라서 그 事業[사업]은 더욱 어렵고 專門的[전문적] 努力[노력]을 要[요]하는 것이다.”
- ‘강박적(强迫的)’은 남의 뜻을 무리하게 억누르거나 강요하는 것을 뜻하며, ‘소(訴)하여’는 호소하여 마음을 움직이려 한다는 의미이다. ‘영성(靈性)’은 하나님과 소통하는 영적인 감각이나 성품을, ‘전인격적(全人格的)’은 지식, 감정, 의지를 모두 포함한 사람됨 전체를 뜻한다.
- ‘그러나’로 문장의 방향을 극적으로 뒤집은 뒤, ‘~니만치(이므로)’, ‘~것이 아니오 ~할 밖에 없는 것이며’, ‘따라서 ~요하는 것이다’로 이어지는 논리적 인과관계를 통해 기독교 교육이 더 어려울 수밖에 없는 당위성을 차근차근 전개하고 있다.
- 주일학교 교사의 책임은 신앙(종교)을 전수하는 것인데, 이는 일반 학문처럼 머리(지성)에 주입하거나 도덕처럼 양심에 강요할 수 없음을 밝힌다. 오직 아이의 영혼에 호소하여 아이 스스로의 내면이 변화해 반응하기를 끈기 있게 기다려야 하는 과정이므로, 주일학교 교사의 일은 일반 교사보다 훨씬 어렵고 고도의 전문적인 노력을 필요로 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 기독교 교육의 본질을 꿰뚫는 핵심적인 신학 통찰이 담겨 있다. 참된 신앙은 강압적인 훈련이나 지적인 동의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인간의 전인격이 영적으로 깨어나 능동적으로 반응해야 함을 강조한다. 이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함과 동시에, 신앙 교육의 열매가 궁극적으로 인간의 기술이 아닌 성령의 역사에 달려있기에 겸손하게 ‘기다려야 하는’ 영적 사역임을 명시하는 것이다.
3) 환경적 불비와 역설적 은혜
시간, 공간, 교재가 완벽히 구비된 세상의 학교에 비해 모든 것이 불비(不備)한 주일학교의 현실은 좌절의 이유가 아니라고 선을 긋는다. 오히려 이러한 절대적 결핍이야말로 교사 자신의 일대 분발과 성령의 끊임없는 도우심을 간절히 구해야만 하는 필연적 근거가 됨을 논리적으로 이끌어낸다.
“國民敎育[국민교육]의 機關[기관]은 그 建物[건물]이나 그 目的[목적]을 達成[달성]하기에 거의 遺憾[유감]없도록 되어 있으며 敎授時間[교수시간]의 充分[충분], 敎材[교재]의 整頓[정돈] 等[등]도 거의 完全[완전]에 가깝도록 準備[준비]되어 있다.”
- ‘유감(遺憾)없도록’은 마음에 차지 않아 섭섭하거나 불만스러운 느낌이 없다는 뜻으로, 부족함이 없음을 의미한다. ‘정돈(整頓)’은 가지런히 잘 정리되어 있음을 뜻한다.
- ‘~되어 있으며’, ‘~준비되어 있다’는 상태의 지속과 완비됨을 나타내는 표현을 나열하여 일반 교육 기관의 훌륭한 인프라를 강조하는 병렬 구조를 띤다.
- 국가가 운영하는 일반 학교는 교육 목적을 달성하기에 건물이 훌륭하고, 가르치는 시간도 넉넉하며, 교재 역시 완벽에 가깝게 준비되어 있는 최적의 물리적 환경을 갖추고 있음을 서술한다.
- 세상의 교육은 눈에 보이는 물질적, 제도적 완비에 기초를 두고 진행됨을 보여준다. 이는 곧이어 나올 영적 교육 기관(주일학교)의 빈약한 물리적 환경을 극명하게 대비시키기 위한 설정이다.
“그러나 主日學校[주일학교]에 있어서는 敎會[교회] 建物[건물]이 敎室[교실]로서는 不適當[부적당]한 데가 거의 全部[전부]며 敎科書[교과서]도 準備[준비]되지 못한 工課[공과]요 가르치는 時間[시간]이라곤 一週日[일주일] 한번, 그것도 다만 二十分[20분] 內外[이내]의 것에 不過[불과]하다.”
- ‘공과(工課)’는 주일학교에서 사용하는 성경 교재나 학습 진도를 의미한다. ‘내외(內外)’는 안팎이라는 뜻으로 약 20분 정도의 짧은 시간을 가리키며, ‘불과(不過)하다’는 그 수량이나 상태를 넘지 못한다는 뜻으로 빈약함을 강조한다.
- ‘그러나’를 통해 앞 문장과 정반대의 상황을 제시하고, ‘~이며’, ‘~요’, ‘~것에 불과하다’는 부정적인 서술어를 점층적으로 나열하여 주일학교가 가진 환경적 한계와 결핍을 극대화하여 묘사하고 있다.
- 주일학교의 현실은 아이들을 가르치기에 적합한 교실(공간)도 마땅치 않고, 체계적인 교과서(공과)도 부실하며, 무엇보다 가르칠 시간이 일주일에 고작 20분 남짓으로 절대적으로 부족함을 통탄하는 문장이다.
- 초기 한국 교회 혹은 당시 주일학교가 마주했던 척박한 물리적 현실을 그대로 증언한다. 영혼을 구원하는 막중한 사명에 비해 교회 공동체가 다음 세대 교육에 투자하는 인프라가 얼마나 턱없이 부족한지를 뼈아프게 지적하고 있다.
“그러면 國民敎育[국민교육] 보다도 數倍[수배]나 더 어려운 事業[사업]을 國民敎育[국민교육] 機關[기관]보다 比較[비교]도 안될만치 不備[불비]한 現實[현실]에서 進行[진행]시키려는 主日學校[주일학교]가 能[능]히 그 本來[본래]의 目的[목적]을 達成[달성]할 수 있을까?”
- ‘불비(不備)’는 필요한 것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능(能)히’는 충분히 또는 거뜬하게라는 의미이다.
- ‘~할 수 있을까?’라는 수사의문문을 사용하여 독자(교사)에게 강한 의구심을 던짐으로써, 문제의 심각성을 스스로 깨닫고 진지하게 고민하도록 유도하는 수사법을 취하고 있다.
- 전인격적인 신앙을 전수해야 하는, 세속 교육보다 몇 배나 어렵고 본질적인 사역을 오히려 비교도 안 될 만큼 열악한 환경 속에서 진행해야 하는 주일학교가 과연 제 역할을 다할 수 있겠느냐는 회의 섞인 질문이다.
- 물리적인 조건만 놓고 보았을 때 주일학교의 목적 달성은 인간적인 계산으로는 불가능에 가깝다는 ‘인간적 절망’을 선언한다. 이는 인간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할 수밖에 없는 신앙적 당위성을 이끌어내기 위한 신학적 전초 작업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聖靈[성령]의 間斷[간단]없는 協助[협조]를 懇願[간원]함과 同時[동시]에 主日學校[주일학교] 敎師[교사] 各自[각자]의 일대 奮發[분발]을 促[촉]하는 所以然[소이연]을 發見[발견]하는 것이다.”
- ‘간단(間斷)없는’은 잠시도 쉬거나 끊임이 없다는 뜻이다. ‘간원(懇願)’은 간절히 바라고 원함을, ‘촉(促)하는’은 재촉하고 북돋움을 의미한다. ‘소이연(所以然)’은 ‘그렇게 된 까닭이나 이치’를 뜻하는 한자어이다.
- ‘~함과 동시에 ~을 발견하는 것이다’라는 구조를 통해, 앞선 절망적인 질문(수사의문문)에 대한 두 가지 차원(신적 차원과 인간적 차원)의 명확한 해결책을 제시하며 결론을 맺고 있다.
- 주일학교의 열악한 현실과 불가능해 보이는 교육 목적 달성이라는 난국 앞에서, 우리는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끊임없는 성령의 도우심을 간절히 기도해야 할 이유와, 교사 스스로가 엄청난 노력을 쏟아부어야만 하는 필연적인 까닭을 깨닫게 된다는 뜻이다.
- 기독교 사역의 두 기둥인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Divine Sovereignty)’와 ‘인간의 책임 있는 헌신(Human Responsibility)’의 철저한 연합을 명확히 보여준다. 환경의 불비함은 불평의 이유가 아니라 성령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할 이유가 되며, 동시에 교사는 자신의 모든 역량을 쏟아붓는 신앙적 결단(일대 분발)을 해야만 함을 강력히 권면하는 대목이다.
3. 본론 2 (구체적 해결책) : 난국을 타개할 교사의 4대 핵심 요건
1) 첫째, 입체적인 성경 지식(지성)
단편적인 성경 구절 암기를 넘어, 역사·문학·계시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생명을 깨달아야 한다. 이를 위해 성경 본문뿐만 아니라 역사, 지리, 문화 등 주변 학문을 치열하게 연구하고 주석을 탐독할 것을 권면한다.
“그러면 이 難局[난국]에 處[처]한 主日學校[주일학교] 先生[선생]들에게 무엇을 要求[요구]하는가?”
- ‘난국(難局)’은 처리하기 어려운 힘든 상황을 뜻한다.
- 의문문 형식을 사용하여 독자(교사)의 주의를 환기하고, 앞으로 전개될 내용(교사의 필수 자격 요건)에 대한 기대감을 조성한다.
- 앞서 언급한 열악하고 척박한 교육 환경 속에 놓인 주일학교 교사들에게 과연 어떤 자질과 노력이 필요한지 질문을 던지며 화제를 전환하는 서론적 문장이다.
- 교사가 마주한 현실이 단순한 고생이 아니라 영적 사명자가 이겨내야 할 전장임을 암시하며, 이를 돌파할 본질적인 무기를 점검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첫재로 主日學校[주일학교] 先生[선생]은 무엇보다도 聖經[성경]을 알아야 되겠다는 것이다.”
- ‘첫째로’, ‘무엇보다도’라는 부사어를 통해 최우선적인 가치를 강조한다.
- ‘~알아야 되겠다는 것이다’라는 단호한 평서문으로 교사의 가장 핵심적인 자격을 선언하고 있다.
- 주일학교 교사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조건은 절대적으로 성경을 아는 것임을 명시한다.
- 기독교 교육의 유일무이한 텍스트이자 뼈대가 성경임을 명확히 하는 ‘말씀 중심’의 신학적 기초를 보여준다.
“다만 工課[공과]에 나타난 斷片的[단편적] 聖經句節[성경구절]을 읽음으로 足[족]한 것이 아니다.”
- ‘단편적(斷片的)’은 전체의 흐름이나 맥락을 잃고 조각난 상태를 뜻한다.
- ‘~으로 족(足)한 것이 아니다’라는 부정형을 통해 피상적인 접근을 강력히 경계한다.
- 교재에 요약되어 제시된 짧고 부분적인 성경 구절 몇 개를 아이들과 읽는 수준으로는 교사의 성경 지식이 결코 충분하지 않음을 지적한다.
- 성경의 앞뒤 맥락 없이 파편적으로 발췌하여 가르치는 주입식, 파편화된 신앙 교육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聖經[성경]은 歷史[역사]이기도 하며 文學[문학]이기도 하며 道德訓[도덕훈]이기도 하며 영적 지혜의 집성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것 보다도 성경은 靈感[영감]의 書[서]며 啓示[계시]의 記錄[기록]이다.”
- ‘도덕훈(道德訓)’은 도덕적인 가르침을, ‘집성(集成)’은 모아서 엮은 것을 뜻한다. ‘영감(靈感)’은 하나님의 영적 감동을, ‘계시(啓示)’는 하나님이 스스로를 드러내어 보여주심을 의미한다.
- ‘~이기도 하며’를 반복 나열하여 성경의 다각적 측면을 보여준 뒤, ‘이 모든 것 보다도’라는 표현으로 가장 핵심적인 본질로 시선을 모은다.
- 성경이 역사, 문학, 도덕, 지혜 등 다양한 인문학적 가치를 담고 있지만, 그 본질은 단연코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인 계시의 말씀임을 확고히 규정한다.
- 성경을 단순한 고대 문학이나 역사서로만 취급하는 자유주의적 성경관을 거부하고, 철저히 하나님의 특별계시로 바라보는 정통 복음주의 성경관을 고수하고 있다.
“그 뿌리와 줄기와 잎과 열매가 形形色色[형형색색]의 時代時代[시대시대]에 그 특색을 드러내었으나 그 中心[중심]을 通[통]하여 全體機構[전체기구]를 살린 것은 하나님의 生命[생명]이며 中心生命[중심생명]을 聖經[성경]에서 感得[감득]한 者[자]라야 비로소 聖經[성경]을 알기 시작한 자라 할 것이다.”
- ‘형형색색(形形色色)’은 모양과 빛깔이 다양함을 뜻한다. ‘전체기구(全體機構)’는 얽혀진 전체 구조를, ‘감득(感得)’은 마음 깊이 깨달아 얻음을 의미한다.
- 나무의 비유(뿌리, 줄기, 잎, 열매)를 사용하여 성경의 유기적 통일성을 시각적으로 은유한다. ‘~라야 비로소 ~라 할 것이다’라는 조건문을 통해 참된 성경 이해의 기준을 깐깐하게 제시한다.
- 성경 66권이 다양한 시대적 배경과 특색을 지니고 쓰였으나, 그 전체를 관통하여 살아 숨 쉬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구속사)’이며, 교사는 이 중심축을 깨달아야만 비로소 성경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 성경의 ‘유기적 영감설(Organic Inspiration)’과 ‘통일성(Unity)’을 훌륭하게 문학적으로 표현한 대목이다. 표면적인 텍스트의 다양성 속에서 단일한 구속사적 맥락을 파악하는 것이 성경 해석의 핵심임을 가르친다.
“이렇게 聖經[성경]을 全體的[전체적]으로 깊이 吟味[음미]하기 爲[위]해서는 聖經[성경] 그것만 읽는 것으로는 極[극]히 不足[부족]하다. 차라리 거의 不可能[불가능]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 ‘음미(吟味)’는 사물이나 글의 속내를 깊이 새겨보는 것을 뜻한다.
- ‘극(極)히 부족하다’, ‘불가능(不可能)하다’ 등 극단적인 부정어를 연달아 사용하여 기존의 안일한 성경 읽기 방식을 강하게 질타한다.
- 성경의 깊은 생명과 맥락을 전체적으로 깨닫기 위해서는 그저 성경 본문의 글자만 반복해서 읽는 방식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며, 사실상 제대로 된 이해가 불가능하다는 단언이다.
- 맹목적인 문자주의나 신비주의적 성경 읽기를 비판하며, 이성을 사용한 객관적이고 치열한 텍스트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거기에는 測光(측광, 싸이드 라인)이 必要[필요]한 것이다. 聖經[성경]에 나타나는 事件[사건]이나 思想[사상]을 理解[이해]하기 爲[위]한 그 當時[당시]의 地理[지리], 諸民族[제민족]의 歷史[역사], 文化[문화], 風俗[풍속], 習慣[습관], 聖經[성경] 構成[구성]의 來歷[내력] 等[등]이 絶代必要[절대필요]한 學習題目[학습제목]이 되는 것이다.”
- ‘측광(測光, 싸이드 라인)’은 옆에서 비추는 보조적인 빛으로, 본질을 더 입체적으로 보게 하는 주변 지식을 뜻한다. ‘제민족(諸民族)’은 여러 민족을, ‘내력(來歷)’은 겪어 온 자취나 배경을 의미한다.
- 비유법(측광)을 사용해 보조 학문의 필요성을 시각화하고, ‘절대필요(絶代必要)한’이라는 강한 수식어를 통해 교사의 지적 탐구를 강권한다.
- 성경의 사건과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본문만 쳐다볼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지리, 역사, 문화, 풍습 등 측면에서 빛을 비추어 줄 다양한 배경지식을 반드시 함께 공부해야 함을 지적한다.
- 성경이 쓰인 역사적, 문화적 정황(Sitz im Leben)을 연구하는 ‘역사적-문법적 해석학’의 가치를 매우 중시하고 있다. 교사의 맹목적 열정뿐만 아니라 이성적, 학문적 노력이 병행되어야 함을 요구한다.
“多幸[다행]히 이런 學習[학습]을 爲[위]하여 日獨書院[일독서원] 發行[발행]의 基督敎敎程叢書[기독교교정총서], 基督[기독]モノグラブ叢書[총서], ロゴラ書院[서원] 刊行[간행]의 基督敎思想叢書[기독교사상총서] 等[등]이 있어서 平信徒[평신도]의 聖經硏究[성경연구]에 크게 도움을 주고 있다. 이와 同時[동시]에 略註聖經[약주성경]을 읽고 그 趣味[취미]와 學習程度[학습정도]를 따라 더 仔細[자세]한 註釋[주석]을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 ‘총서(叢書)’는 같은 분야의 책을 모아 엮은 시리즈물이며, ‘평신도(平信徒)’는 목회자나 신학자가 아닌 일반 신자를 뜻한다. ‘약주성경(略註聖經)’은 간단한 해석(주석)이 달린 성경이다.
- 구체적인 출판사나 총서의 이름을 예시로 나열하여 실현 가능한 대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권면한다.
- 교사들이 성경 배경지식을 쉽게 공부할 수 있도록 당시에 출판된 신학 서적 및 총서들을 구체적으로 소개하며, 간단한 주석 성경부터 시작해 자신의 학업 수준에 맞는 깊이 있는 주석들을 주도적으로 찾아 읽을 것을 제안한다.
- 전문 신학자나 성직자의 전유물로만 여겨지던 ‘성경 연구’와 ‘주석 읽기’를 주일학교 교사(평신도)의 영역으로 적극 끌어내어 확장시킨다. 이는 지적으로 무장된 평신도를 길러내고자 하는 실천적 신학관이 반영된 대목이다.
2) 둘째, 아동 심리와 고유 세계 이해(대상 이해)
아이들을 ‘어른의 축소판’으로 여기던 무지를 질타하며, 아동만의 독특한 인식 체계를 이해해야 함을 강조한다. 영적 소경이 되지 않기 위해 교육학 및 심리학 서적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눈높이를 맞춰야 한다.
“둘째로, 主日學校[주일학교] 先生[선생]은 兒童[아동]에 對[대]하여 알아야 되겠다는 것이다.”
- ‘아동(兒童)’은 유년기 아이들을 가리킨다.
- ‘둘째로’라는 접속어를 통해 앞 단락의 성경 지식(첫째)에 이어지는 새로운 필수 자격을 제시한다. 단호한 평서문을 사용하여 교사의 의무를 규정한다.
- 주일학교 교사가 갖추어야 할 두 번째 핵심 조건은 가르치는 대상인 ‘아이들’ 자체를 깊이 이해하는 것임을 선언한다.
- 교사가 ‘무엇을(성경)’ 가르칠지 아는 것만큼이나, ‘누구에게(아동)’ 가르칠지 아는 대상에 대한 이해가 기독교 교육의 필수불가결한 요소임을 보여준다.
“以前[이전]에는 兒童[아동]과 成人[성인]과의 差異[차이]는 그것이 量[양]의 差異[차이]요 質[질]의 差異[차이]가 아닌줄 알았었다.”
- ‘양(量)의 차이’는 크기나 지식의 많고 적음을 뜻하며, ‘질(質)의 차이’는 본질적인 속성이나 특성 자체가 다름을 의미한다.
- ‘~아닌 줄 알았었다’라는 과거완료적 표현을 사용하여 과거의 인식이 명백한 오해였음을 지적한다.
- 과거에는 어른과 아이의 다름이 단순히 덩치가 작거나 지식이 모자란 ‘양’의 문제일 뿐, 생각하고 느끼는 본질(질) 자체가 다르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 아동을 독립적인 영적 주체로 보지 않고 미성숙한 성인으로만 취급하던 전통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교회 교육의 한계를 비판한다.
“兒童[아동]이란 것은 成人[성인]보다 몸집이 적고 智力[지력]이 不足[부족]하고 思考力[사고력]이 未及[미급]한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 ‘지력(智力)’은 지적인 능력을, ‘사고력(思考力)’은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힘을 뜻하며, ‘미급(未及)’은 기준에 미치지 못함을 의미한다.
- ‘~적고’, ‘~부족하고’, ‘~미급한’이라는 부정적인 서술어를 나열하여, 아동을 ‘결핍된 성인’으로만 치부했던 과거의 편협한 시각을 묘사하고 있다.
- 아이들을 그저 어른에 비해 체격이 작고 머리가 덜 발달했으며 생각하는 힘이 모자란 존재, 즉 ‘덜 자란 어른’으로만 여겨왔음을 설명한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우리는 兒童[아동]에 對[대]하여 좀더 많은 知識[지식]을 가지고 있다. 兒童[아동]에게는 兒童[아동]의 獨特[독특]한 世界[세계]가 있음을 알았다.”
- ‘독특(獨特)한 세계’는 성인의 기준으로는 측량할 수 없는 아동만의 고유한 인식과 감각 체계를 뜻한다.
-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이라는 전환을 통해 현대 교육학적 관점이 도입되었음을 알리며 과거의 무지와 현재의 깨달음을 대조시킨다.
- 현대에 이르러 교육에 대한 지식이 쌓이면서, 아이들이 단순히 어른의 축소판이 아니라 아이들만의 고유하고 특별한 세상(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는 뜻이다.
- 기독교 교육이 단순히 성경 지식을 일방적으로 쏟아붓는 것이 아니라, 아동 발달에 대한 현대 학문의 성취(일반은총)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대상에 맞는 교육을 해야 함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兒童[아동]의 世界[세계]에서 어떻게 생각하며 어떻게 느끼며 어떠케 行動[행동]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 ‘생각하며(지-知)’, ‘느끼며(정-情)’, ‘행동하는(의-意)’은 인간의 지정의(知情意)를 모두 포괄하는 표현이다.
-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논리적 결론을 이끌어내며, ‘~알아야 한다’며 교사의 행동 지침을 명확히 제시한다.
- 아이들만의 고유한 세계가 존재하므로, 교사는 아이들이 그들만의 세계 속에서 사물을 어떻게 인지하고 감정을 느끼며 행동으로 옮기는지를 면밀히 파악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兒童[아동]의 世界[세계]에서 理解[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가르쳐야만 한다. 그렇지않으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은 성경(마태복음 15장 14절)에서 차용한 은유적 표현이다.
- ‘~가르쳐야만 한다’는 강한 의무를 나타내고, ‘그렇지 않으면 ~되고 말 것이다’라는 극단적인 비유를 통해 조건에 따른 치명적인 결과를 경고한다.
- 교사는 반드시 아이들의 눈높이와 언어로 복음을 가르쳐야 하며, 이를 무시하고 어른의 방식을 고집하면 아이를 제대로 이끌 수 없어 결국 둘 다 영적인 길을 잃게 되는 교육적 파산에 이른다는 것이다.
- 눈높이를 맞추는 ‘성육신적(Incarnational)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교사가 성경을 안다 해도 아동을 모르면 영적 소경이나 다름없다는 통렬한 성경적 비판이 담겨 있다.
“이 部門[부문]에 있어서도 兒童心理[아동심리]에 關[관]한 著書[저서]가 不少[불소]히 刊行[간행]되어 있음으로 硏究[연구]의 門[문]은 充分[충분]히 열려있는 줄로 생각한다.”
- ‘아동심리(兒童心理)’는 발달 단계에 따른 아이들의 마음 상태를, ‘불소(不少)히’는 적지 않게(많이)라는 뜻이다. ‘간행(刊行)’은 책을 인쇄하여 출판함을 뜻한다.
- ‘~있음으로 ~열려있는 줄로 생각한다’는 근거와 판단의 구조를 통해, 핑계 대지 말고 적극적으로 배우라는 권면을 부드럽게 전달한다.
- 다행히 아이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아동 심리학 서적들이 이미 시중에 많이 출판되어 있으므로, 교사가 마음만 먹으면 아이들의 심리를 연구하고 공부할 기회는 충분히 열려 있다는 뜻이다.
- 앞서 성경 이해를 위해 지리, 역사 등을 공부하라고 했던 것(첫째)과 같은 맥락으로, 신앙 교육을 위해 일반 학문인 심리학까지 폭넓게 수용하고 공부해야 하는 교사의 지적 책임을 재차 강조하고 있다.
3) 셋째, 장인과 같은 교수법 숙달(기술)
아무리 지식이 풍부해도 전달하는 기술이 없다면 무능한 교사가 된다. 교사는 단 20~30분의 수업을 위해 용어 선택, 순서, 시간 배분을 마치 조각사가 돌을 깎듯 치밀하게 기획하고 빈틈없이 실행하는 숙련공이 되어야 한다.
“셋째로, 가르치는 技術[기술]을 가져야 된다는 것이다.”
- ‘기술(技術)’은 이론을 실제로 적용하여 사물을 다루거나 일을 처리하는 능력(교수법)을 뜻한다.
- ‘셋째로’라는 표지어를 통해 새로운 요건을 제시하고, ‘~가져야 된다는 것이다’로 필수 당위성을 표현한다.
- 주일학교 교사가 지식, 아동 이해에 이어 갖추어야 할 세 번째 핵심 조건은 자신이 아는 것을 아이들에게 잘 전달할 수 있는 ‘실질적인 교수 기술’임을 명확히 밝힌다.
- 신앙 교육이 단지 교사 개인의 신앙적 열정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효과적인 전달 방법론(Methodology)이 수반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敎師[교사]도 다른 職場[직장]의 部門[부문]에서와 같이 한 技術者[기술자]다.”
- ‘직장(職場)의 부문(部門)’은 일반적인 세속 직업의 분야를, ‘기술자(技術者)’는 특정 분야에 전문적인 기술을 가진 사람을 뜻한다.
- ‘~도 ~와 같이 ~이다’라는 직유법을 통해 성직(聖職)과 일반 직업의 공통된 전문성을 강조한다.
- 주일학교 교사 역시 세상의 다른 전문 직업인들처럼 자신만의 고유하고 전문적인 기술을 구사해야 하는 기술자임을 선언한다.
- 성(聖)과 속(俗)의 이분법을 넘어, 교회의 직분(교사) 역시 세상의 직업처럼 철저한 전문성과 기술적 훈련이 필요한 영역임을 강조하는 ‘직업 소명론적 시각’이 엿보인다.
“많이 아는 것과 잘 가르치는 것과는 다른 問題[문제]다. 아주 豊富[풍부]한 學識[학식]을 가지고도 極[극]히 愚劣[우열]한 敎師[교사]밖에 못되는 이가 많은 것이니 이는 그에게 가르치는 技術[기술]이 缺如[결여]한 까닭이다.”
- ‘학식(學識)’은 배워서 얻은 지식을, ‘우열(愚劣)’은 어리석고 용렬하여 수준이 낮음을 뜻한다. ‘결여(缺如)’는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빠져 없음을 의미한다.
- 대조(아는 것 vs 가르치는 것)와 인과(우열한 교사가 되는 까닭은 기술이 결여되었기 때문)의 구조를 연달아 사용하여 논지를 강화한다.
- 머릿속에 든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을 아이들에게 이해시키는 기술이 없다면 최악의 교사가 될 수밖에 없음을 냉철하게 지적하는 문장이다.
- ‘지식의 축적’이 곧 ‘신앙의 전수’로 직결되지 않음을 꿰뚫고 있다. 진리가 아이들의 영혼에 가닿기 위해서는 언어와 방법론이라는 매개체가 필수적임을 역설한다.
“敎授時間[교수시간]은 敎師[교사]로서의 가질 수 있는 最大[최대]의 機會[기회]이다. 學生[학생]들 앞에 서는 그 時間[시간]은 敎師[교사]로서의 成敗[성패]를 決[결]하는 瞬間[순간]이다.”
- ‘교수시간(敎授時間)’은 가르치는 시간을, ‘성패(成敗)’는 성공과 실패를 뜻한다.
- ‘A는 B이다’ 형태의 단정적인 문장을 반복 배치하여, 학생들을 가르치는 바로 그 시간의 비중과 압박감을 극대화한다.
- 교사가 아이들을 마주하고 가르치는 그 짧은 시간이 교사의 존재 이유이자, 교육의 성공과 실패가 판가름 나는 가장 결정적인 단 한 번의 기회임을 강조한다.
- 공과 시간이 단순한 교회 순서의 하나가 아니라, 영혼을 살리거나 죽일 수 있는 영적 전투의 최전선임을 선포하는 대목이다.
“主日學校[주일학교] 先生[선생]의 온갓 準備[준비]와 祈禱[기도]와 敎養[교양]은 또한 이 學生[학생]들 앞에서는 二十分[20분]이나 三十分[30분]을 爲[위]하여 存在[존재]한 것이다.”
- ‘교양(敎養)’은 학문, 지식, 도덕을 바탕으로 길러진 품성을 뜻한다.
- 교사의 수많은 인고의 과정(준비, 기도, 교양)을 주어로 삼고, ‘단 20~30분’이라는 짧은 시간을 목적어로 두어 극적인 대비 효과를 낸다.
- 주일학교 교사가 평소에 쏟는 모든 노력과 기도, 지식 등은 결국 아이들 앞에 서서 가르치는 그 ‘20~30분’이라는 실전 시간을 가치 있게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것임을 상기시킨다.
- 영적 사역의 본질적 목적이 ‘현장’에 있음을 짚어준다. 개인적 영성 훈련이나 지식 축적이 자기만족에 그치지 않고, 타자(학생)를 향한 교육으로 발현되어야 함을 시사한다.
“이 時間[시간]에 學生[학생]들의 心靈[심령]에 거륵한 感激[감격]과 決意[결의]를 일으키느냐 그렇잖으면 그저 平凡[평범] 無爲[무위]하게 忘却[망각]의 世界[세계]에 밀려가 버리고 마느냐가 決定[결정]되는 것이다.”
- ‘심령(心靈)’은 영혼을, ‘거룩한 감격(感激)’은 영적인 벅찬 감동을, ‘결의(決意)’는 굳게 마음먹음을 뜻한다. ‘무위(無爲)’는 아무런 의미 있는 행동이나 성과가 없음을 뜻한다.
- ‘A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B하느냐가 결정된다’라는 극단적인 양자택일의 구조를 취해 교사의 책임감을 한계치까지 끌어올린다.
- 그 짧은 가르침의 시간에 아이들의 영혼에 깊은 감동과 신앙적 결단을 이끌어 낼 것인지, 아니면 아무런 의미 없이 시간만 낭비하여 기억에서 잊히고 말 것인지가 교사의 역량에 완전히 달렸다는 뜻이다.
- 기독교 교육의 궁극적 목표가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니라, 학생의 내면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영적 각성(감격)과 삶의 변화(결의)에 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내가 敎授[교수]의 熟練工[숙련공]으로서 내 敎材[교재]를 내 學生[학생]들에게 어떠케 하면 가장 有效適切[유효적절]하게 傳授[전수]할 수 있을까를 그 用語[용어], 順序[순서], 時間[시간], 重點[중점] 等[등]에 關[관]하여 마치 彫刻師[조각사]가 그 끌을 움직이듯이 遺漏[유루]없이 熟考熟練[숙고숙련]해야 할 것이다.”
- ‘숙련공(熟練工)’은 기술이 능숙한 장인을, ‘유효적절(有效適切)’은 효과가 있고 경우에 꼭 들어맞음을 뜻한다. ‘끌’은 조각 도구이며, ‘숙고숙련(熟考熟練)’은 깊이 생각하고 능숙하게 익히는 것을 말한다.
- 인물(숙련공, 조각사)과 행위(세부사항 조율)를 비유적으로 결합하여 교사의 세밀한 준비 과정을 시각적으로 강렬하게 묘사한다.
- 교사는 교육의 장인(숙련공)이 되어 아이들에게 가장 잘 먹혀들 용어 선택, 수업 순서, 시간 배분, 핵심 포인트 등을 빈틈없이 계산하고 준비해야 하며, 이는 마치 조각가가 돌을 깎을 때 신중하게 정을 치는 것과 같은 세밀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 영적 사역을 추상적인 차원에 머물게 하지 않고, 용어, 순서, 시간 등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기술의 영역’으로 가져와 치밀하게 다루도록 요구하는 철저한 실천적 신학의 태도를 띤다.
“이에 對[대]해서는 敎授法[교수법]에 關[관]한 書籍[서적]을 읽는 것도 必要[필요]하지만 各自[각자]의 識見[식견]과 經驗[경험]과 不斷[부단]의 努力[노력]에 依[의]한 熟達[숙달]이 더욱 必要[필요]한 것이다.”
- ‘교수법(敎授法)’은 가르치는 방법을, ‘식견(識見)’은 사물을 분별하는 지혜와 안목을 뜻한다. ‘부단(不斷)의’는 끊임없는 것을 의미한다.
- ‘A도 필요하지만 B가 더욱 필요하다’는 비교를 통해, 이론적 학습(서적)보다 실천적 체화(경험과 훈련)에 방점을 찍는다.
- 교사가 가르치는 기술을 익히기 위해서는 교육학 책을 읽는 이론적 공부도 좋지만, 무엇보다 교사 스스로 교육 현장에서 겪은 경험과 안목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훈련하여 몸에 익히는 것(숙달)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무엇보다도 「出鱈目[출설목]」 - 되는대로 時間[시간]이나 채워버리면 그만이란 생각을 버리고 一絲不亂[일사불란]의 計劃下[계획하]에서 進行[진행]하려는 努力[노력]이 가장 緊重[긴중]한 것이다.”
- ‘출설목(出鱈目)’은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행동하는 것을 뜻한다. ‘일사불란(一絲不亂)’은 한 가닥의 실도 엉키지 않았다는 뜻으로 질서 정연함을, ‘긴중(緊重)’은 매우 긴요하고 중요함을 뜻한다.
- ‘무엇보다도’로 결론을 이끌고, 잘못된 태도(출설목)를 부정하며 올바른 태도(일사불란한 계획)를 긍정하는 대조 기법을 사용해 단락을 강력하게 마무리한다.
- 교사가 절대 가져서는 안 될 태도는 ‘그저 대충 시간이나 때우자’는 무책임한 생각이며, 철저하고 빈틈없는 계획표에 따라 공과를 진행하려는 치열한 노력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함을 거듭 강조한다.
- 하나님 앞에서 맡겨진 영혼을 다루는 자의 마땅한 책임성과 경외심을 촉구한다. 아무렇게나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은 단순한 게으름을 넘어선 영적 직무 유기임을 질타하는 것이다.
4) 넷째, 학도의 자세와 심령적 수련(영성)
교만과 타성에 젖어 고인 물이 되는 것을 경계하며, 평생 배우기를 쉬지 않는 철저한 학도의 자세를 요구한다. 나아가 지식적 무장에 더해 아이들의 개성과 가정환경을 향한 사랑, 영혼을 위한 끊임없는 기도가 동반되어야 하며, 이것이 교사 자신의 신앙을 굳건히 지키는 필수적 영적 수련임을 역설한다.
“넷째로, 언제나 계속적으로 「不斷[부단]」히 努力[노력]하는 學徒[학도]가 되어야 하겠다는 것이다.”
- ‘부단(不斷)’은 끊임없음을, ‘학도(學徒)’는 학문에 힘쓰는 사람(배우는 학생)을 뜻한다.
- 겹낫표(「」)를 사용하여 ‘부단’을 시각적으로 돋보이게 하고, 단호한 평서문(~되어야 하겠다는 것이다)으로 당위성을 부여한다.
- 주일학교 교사의 네 번째 필수 조건은 가르치는 자의 위치에 안주하지 않고, 평생토록 쉬지 않고 배우고 노력하는 학생의 자세를 유지하는 것임을 선언한다.
- 교사가 진리의 말씀 안에서 스스로 먼저 성장하지 않으면 다른 영혼을 자라게 할 수 없다는 기독교 교육의 역동적 본질을 보여준다.
“내가 이미 아는 것만으로도 그까짓 아이들이야 못가르치랴! 하는 心理[심리]로 지내는 敎師[교사]는 停滯[정체] 無活力[무활력]한 敎師[교사]가 되어 아무 感化力[감화력]도 없는 것이다.”
- ‘정체(停滯)’는 제자리에 머물러 발달하지 못함을, ‘무활력(無活力)’은 생기나 힘이 없음을, ‘감화력(感化力)’은 좋은 영향을 주어 생각이나 감정을 변하게 하는 힘을 뜻한다.
- 느낌표(!)를 동반한 인용구를 통해 교만하고 안일한 교사의 속마음을 생생하게 드러내고, 그 필연적 결과(~없는 것이다)를 냉혹하게 진단한다.
- ‘내가 이미 이 정도 아는데 어린아이들쯤이야 못 가르치겠는가’라는 오만한 마음을 품는 순간, 그 교사는 영적으로 고여 생명력을 잃고 아이들에게 어떠한 선한 영향력도 끼칠 수 없게 됨을 지적한다.
- 영적 교만과 매너리즘이 신앙 교육에 미치는 치명적인 해악을 경고하며, 늘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혜와 지혜를 구해야 하는 교사의 영적 파산을 경계한다.
“工課[공과] 工課[공과]마다 참으로 「準備[준비]」해야 될 것이다.”
- ‘공과(工課)’는 매주 주일학교에서 가르치는 교과 내용이다.
- ‘공과 공과마다’라는 반복을 통해 단 한 번의 예외도 허용하지 않음을 강조하고, ‘참으로’라는 부사와 기호(「」)로 ‘준비’의 절실함을 부각한다.
- 매주 반복되는 공과 시간이라 할지라도, 타성에 젖지 않고 매번 진실하고 철저하게 새로운 마음으로 준비에 임해야 함을 촉구한다.
“저 有名[유명]한 敎育家[교육가] 「토마스ㆍ아놀드」 博士[박사]는 죽는 그날까지 꾸준한 學徒[학도]였었다.”
- 토마스 아놀드는 19세기 영국의 위대한 교육학자이자 교육 혁신가이다.
- 권위 있는 실존 인물을 예시로 끌어와 주장의 설득력을 높이는 예증법을 사용한다.
- 역사적으로 유명한 교육자인 토마스 아놀드 박사조차도 가르치는 자리에 군림하지 않고 평생토록 배움을 멈추지 않는 한 명의 학생으로 살았음을 소개한다.
“어느 때 누가 그에게 『一生[일생] 계속하여 每日[매일] 가르치는 工課[공과]인데 무얼 그렇게 每[매]번 準備[준비]하느냐』고 물을때 그는 그의 學生[학생]들이 『썩기쉬운 갇힌 물에서 마시지 않고 涓涓[연연]히 흐르는 샘줄기에서 마시게 하기 위함이라』고 대답했다 한다.”
- ‘연연(涓涓)히’는 물이 졸졸 끊임없이 맑게 흐르는 모양을 뜻한다.
- 대화체 인용(문답법)을 사용하여 생동감을 주며, ‘갇힌 물’과 ‘흐르는 샘줄기’라는 선명한 대조적 은유를 통해 주제를 시각화한다.
- 평생 반복해서 가르치는 내용을 왜 매번 피곤하게 새롭게 준비하느냐는 질문에, 아놀드 박사가 ‘학생들에게 고여서 썩어가는 물이 아니라 늘 신선하게 흐르는 생수를 마시게 해주고 싶기 때문’이라고 답한 감동적인 일화를 전한다.
- 복음 진리는 죽어 화석화된 텍스트가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생명수’로 전달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교사 자신이 성령의 신선한 공급하심(흐르는 샘)을 매일 새롭게 받아야 함을 깊이 있게 통찰한다.
“진실로 모든 敎師[교사]된 者[자]의 頂門[정문]에 一針[일침]이라 안할 수 없는 말이다.”
- ‘정문일침(頂門一針)’은 정수리에 침을 하나 꽂는다는 뜻으로, 따끔한 충고나 교훈을 이르는 사자성어다.
- ‘진실로’, ‘~안 할 수 없는 말이다’라는 이중 부정의 강한 긍정 표현을 통해 독자에게 뼈저린 반성을 촉구한다.
- 아놀드 박사의 이 대답이야말로, 매너리즘에 빠져 준비 없이 대충 아이들 앞에 서는 모든 주일학교 교사들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무서운 경고이자 위대한 귀감이 된다는 뜻이다.
“聖經[성경]과 聖經[성경]에 關[관]한 넓은 知識的[지식적] 背景[배경], 宗敎敎師[종교교사]로서의 不斷[부단]의 讀書[독서]와 思考[사고], 各工課[각공과]의 特別精密[특별정밀]한 準備[준비] 及[급] 그 傳授技術[전수기술]의 熟練[숙련] 等[등]은 主日學校[주일학교] 先生[선생]으로서 具備[구비]해야 할 必要[필요], 不可缺[불가결]의 要素[요소]임은 以上[이상]에 말한바이어니와”
- ‘급(及)’은 ‘~와/과’를 이어주는 한문 투의 접속사이다. ‘구비(具備)’는 빠짐없이 갖추는 것을, ‘불가결(不可缺)’은 절대 없어서는 안 됨을 뜻한다.
- 앞서 제시된 1~3번째 조건들을 병렬적으로 요약 정리하며, ‘~말한 바이어니와(말한 바와 같거니와)’로 문장을 매듭짓고 새로운 차원의 요건으로 넘어갈 준비를 한다.
- 지금까지 논의한 성경 지식, 끊임없는 독서와 생각, 세밀한 공과 준비, 교수법의 숙달 등은 교사가 지성적으로 갖추어야 할 필수 요소임을 다시 한번 요약하여 확인시킨다.
- 신앙 교육을 신비주의나 맹목적 감정에만 의존하지 않고, 냉철하고 객관적인 지적 토대 위에서 구축하려는 체계적인 신학의 틀을 보여준다.
“이런 知識的[지식적] 準備[준비]에 아울러 적어도 自己班[자기반] 兒童[아동]에 對[대]한 愛情[애정], 兒童[아동] 各自[각자]의 個性[개성]과 家庭環境[가정환경] 一切[일절]에 對[대]한 關心[관심], 그들 靈性[영성]의 生長[생장]을 爲[위]한 不斷[부단]의 祈禱[기도] 等[등]은 敎師[교사] 自身[자신]의 信仰生活[신앙생활]과 함께 또한 不可缺[불가결]의 心靈的[심령적] 修鍊[수련]이 되는 것이다.”
- ‘일절(一切)’은 모든 것을 뜻하며, ‘생장(生長)’은 영혼이 나서 자라남을 뜻한다. ‘심령적(心靈的) 수련’은 영혼과 마음을 깊이 갈고닦는 것을 의미한다.
- ‘지식적 준비에 아울러’라는 표현을 통해 지성(앞선 내용)과 심령(현재 내용)의 균형을 맞춘다. 주어가 길게 나열된 후 단정적인 평서문으로 전체 글의 마침표를 찍는다.
- 앞서 말한 지식적 무장과 기술적 훈련뿐만 아니라, 자기가 맡은 반 아이들을 향한 진정한 사랑, 각자의 성격과 가정 형편에 대한 깊은 관심, 아이들의 영혼을 살려달라는 쉬지 않는 기도가 반드시 병행되어야 함을 말한다. 나아가 이러한 희생적이고 인격적인 사랑의 과정 자체가 교사 자신의 신앙을 굳건하게 지켜주는 필수적인 영적 훈련(수련)이 된다는 깊은 결론이다.
- ‘지식(Logos)’으로 시작된 교사의 자질이 ‘이웃에 대한 사랑과 돌봄(Pathos)’을 거쳐 ‘하나님 앞에서의 기도와 영성(Ethos)’으로 완성됨을 아름답게 보여준다. 교육이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행위가 아니라,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가 사랑 안에서 함께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공동체적 영적 성화(Sanctification)’의 과정임을 웅변하고 있다.
4. 결론(비전 제시) : 사명의 위대함과 교사가 누릴 벅찬 영광
글의 대단원에서는 이러한 희생과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음을 웅변하며 벅찬 비전을 제시한다. 단 30분이라도 온 정성을 쏟아붓는 교사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영적 희열을 느끼며, 충성된 종을 향한 주님의 칭찬을 먼 미래가 아닌 교육 현장 즉석에서 체험하게 된다. 교사들의 눈물겨운 헌신은 아이들을 통해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을 것임을 확신하며, 천상천하에 빛날 교사의 찬란한 영광을 축복하고 한층 더 깊은 정진을 촉구하며 글을 맺는다.
“이러케 敎師[교사]로서 一週日[일주일]에 단 三十分[30분]이라도 自己[자기]의 最先[최선]을 다한 때 그는 다른 아무데에서도 얻을 수 없는 滿足[만족]과 喜悅[희열]을 느낄 것이다.”
- ‘최선(最先, 문맥상 최선의 오기로 보이나 원문 발음대로 해석)’은 온 정성과 힘을 다하는 것을, ‘희열(喜悅)’은 몹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감정을 뜻한다.
- ‘~다한 때 ~느낄 것이다’라는 조건과 확신의 구조를 사용하여, 교사의 온전한 헌신 뒤에 반드시 따르는 감정적, 영적 결과를 강한 어조로 선언한다.
- 교사가 일주일에 단 20~30분밖에 안 되는 짧은 공과 시간이라 할지라도 타성 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 가르쳤을 때, 세상의 다른 어떤 일에서도 맛볼 수 없는 깊은 만족감과 영적인 큰 기쁨을 맛보게 된다는 뜻이다.
- 영적 사역의 참된 보상은 물질적 급여나 세상의 인정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내면의 벅찬 기쁨과 평안(샬롬)에 있음을 시사한다. 자기 비움을 통해 역설적으로 가장 큰 영적 채워짐을 경험하는 십자가의 원리와 맞닿아 있다.
“『착하고 信實[신실]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信實[신실]하였으니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나와 함께 즐거움을 누릴지어다』 하는 主[주]님의 칭찬은 먼 未來[미래]에서만 期待[기대]할 것이 아니라 그 即席[즉석]에서 어느 程度[정도]까지 體驗[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 ‘신실(信實)한’은 믿음직하고 참되며 성실한 모습을, ‘즉석(即席)’은 일이 일어난 바로 그 자리(현장)를 뜻한다. ‘체험(體驗)’은 몸소 겪어 아는 것을 의미한다.
- 마태복음 25장 21절의 말씀을 직접 인용(『 』)하여 권위를 부여하고, ‘A에서만 기대할 것이 아니라 B에서도 체험할 수 있다’는 구문을 통해 미래의 약속을 현재의 실재로 끌어당긴다.
- 충성된 종을 향한 주님의 영광스러운 칭찬과 상급은 훗날 천국에 가서야 받을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교사가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가르치는 바로 그 현장에서 영적으로 깊이 체감할 수 있는 현실적인 축복이라는 뜻이다.
- ‘현존하는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의 관점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상급은 단지 먼 미래의 시간표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여기서 충성스럽게 헌신하는 자의 삶(현장) 속으로 뚫고 들어와 현재적으로 누려진다는 깊은 영적 통찰을 제공한다.
“主日學校[주일학교] 先生[선생]! 그들의 손에서 未來[미래] 敎會[교회]의 興廢[흥폐]가 左右[좌우]되는 것임을 다시금 말하여 둔다.”
- ‘흥폐(興廢)’는 흥하고 망함(일어서고 무너짐)을, ‘좌우(左右)되는’은 어떤 일의 결정이나 방향이 달린 것을 뜻한다.
- ‘선생!’이라는 강렬한 돈호법(부름)으로 시작하여 주의를 최고조로 끌어올린 뒤, ‘~임을 다시금 말하여 둔다’며 서론에서 제기했던 핵심 주제를 가장 단호하고 무거운 어조로 수미상관(首尾相關)처럼 반복한다.
- 주일학교 교사들의 가르침과 헌신 여부에 따라 다음 세대 한국 교회가 살아남느냐 소멸하느냐의 명운이 완전히 결정된다는 무서운 진실을 마지막으로 뇌리에 각인시키는 문장이다.
- 기독교 교육이 단순히 교회의 여러 부속 사역 중 하나가 아니라, 교회의 존립(생명 유지)과 직결된 심장과도 같은 사역임을 보여주는 확고한 교회론적 시각이 담겨 있다.
“그러고 그들의 硏究[연구]와 努力[노력]과 祈禱[기도]와 獻身[헌신]은 그들에게 맡겨진 兒童[아동]들을 通[통]하여 或[혹]은 六十倍[60배], 或[혹]은 百倍[100배]의 收穫[수확]이 있을 것을 確信[확신]하는 바이며 따라서 그들의 榮譽[영예]가 天上天下[천상천하]에 빛날 것도 豫期[예기]하는 바이다.”
- ‘헌신(獻身)’은 몸과 마음을 바쳐 있는 힘을 다하는 것을 뜻한다. ‘수확(收穫)’은 농사에서 거두어들이는 결실을, ‘영예(榮譽)’는 영광스러운 명예를, ‘천상천하(天上天下)’는 온 세상을 뜻한다. ‘예기(豫期)’는 앞으로 그렇게 될 것을 미리 기대함을 의미한다.
- 교사가 바친 과정(연구, 노력, 기도, 헌신)이 주어가 되고, 그 결과(수확, 영예)를 확신(~확신하는 바이며, ~예기하는 바이다)하는 장엄한 복문 구조를 통해 벅찬 비전을 제시한다.
- 교사들이 눈물로 쏟은 모든 지적(연구), 의지적(노력), 영적(기도), 실천적(헌신)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고, 자라나는 아이들의 삶을 통해 60배, 100배의 거대한 열매로 맺힐 것을 굳게 믿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영혼을 살린 교사들의 영광이 하늘과 땅 모든 곳에서 찬란하게 빛날 것을 기대하며 축복한다.
- 마태복음 13장의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차용하여 기독교 교육의 거대한 파급력을 역설한다. 비록 당장 눈앞의 현실은 불비하고 아이들은 어려 보일지라도, 복음의 생명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결실(60배, 100배)을 맺는다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성과 종말론적 소망(영예)을 굳게 부여잡고 있다.
“一層[일층]의 「精進[정진]」을 바란다.”
- ‘일층(一層)’은 이전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감(한층 더)을, ‘정진(精進)’은 마음을 다듬어 한 가지 일에 쉼 없이 힘쓰는 것을 뜻한다.
- 군더더기 없는 짧고 강력한 명령(권면)형 평서문으로, 독자(교사)의 결단과 실천을 촉구하며 긴 글의 마침표를 찍는다.
- 지금껏 말한 막중한 사명과 영광스러운 보상을 기억하며, 주일학교 교사로서 이전보다 훨씬 더 치열하게 영적으로 무장하고 쉼 없이 교육에 매진해 주기를 간곡히 당부한다는 뜻이다.
- 성화(Sanctification)의 과정에는 결코 ‘완성된 안주’가 없으며, 푯대를 향해 끝까지 달려가야 하는(빌 3:14) 순례자이자 사명자로서의 쉼 없는 헌신을 요청하고 있다.
1930년대의 진언이 오늘날 던지는 의미와 의의
1) 시대를 초월한 교육적 적실성(현대적 적용)
1935년에 작성된 이 글은 놀랍게도 거의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의 교육 현장에도 섬뜩할 만큼 날카로운 통찰을 던진다. 현대의 교회 역시 화려한 건물과 첨단 매체를 갖추고 있음에도, 정작 교육의 주체인 교사를 전문적인 훈련 없이 ‘인력 채우기’ 식으로 소모하거나 신앙 교육을 단순한 돌봄 수준으로 전락시키는 우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동만의 독특한 세계를 이해하고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 교육을 기획해야 한다는 본문의 외침은, 오늘날 교육 현장에서 유아의 행동과 발달 단계를 면밀히 관찰하여 놀이 지원을 세밀하게 기록하거나, 학습자의 수준에 맞춘 맞춤형 교재를 연구하고 기획하는 등 현대의 치밀한 교육적 헌신과 그 본질이 정확히 맞닿아 있다. 20분 남짓한 가르침의 시간을 위해 조각사처럼 용어와 순서를 치밀하게 다듬으라는 요구는, 오늘날 교육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진리를 전해야 하는 교육자들이 지녀야 할 최우선의 태도이다.
2) 글의 최종적 의미와 역사적 의의
이 글의 가장 위대한 의의는 ‘주일학교 교사의 직분을 기능적인 봉사자에서 영적인 장인(Artisan)으로 격상시켰다는 점’에 있다. 신앙 교육이 맹목적인 뜨거움(열정)이나 단순한 감정적 호소로 이루어지지 않음을 명확히 했다.
교사는 ‘말씀에 대한 깊은 지적 토대(Logos)’, ‘아동을 이해하고 다가가는 교수법과 사랑(Pathos)’, ‘평생을 배우는 학도로서 엎드리는 영성(Ethos)’을 완벽하게 통합해야 하는 존재임을 선포했다. 척박한 현실과 부족한 환경을 절망의 핑계로 삼지 않고,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교사 개인의 뼈를 깎는 헌신과 성령을 향한 전적인 의존이 필요하다는 역설적 은혜를 도출해냈다. 결국 이 글은 단순한 교사 지침서를 넘어, 시대를 불문하고 다음 세대의 영혼을 책임지는 모든 가르치는 자들이 마음에 새겨야 할 ‘기독교 교육의 영원한 헌장’으로서 깊은 의의를 지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