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회상노트(3월 3일, 6월 20일, 7월 5일, 12월 10일)

9월 15, 2026

1995년 회상노트


  • 1995년 3월 3일 / 한국신학대학 – “확장과 변혁”
  • 1995년 6월 20일 / 여름성경학교 교사강습회 강사 교육 – “우주적 구원과 희년 신앙”
  • 1995년 7월 5일 / 기장 희년대회 – “통일 희년”
  • 1995년 12월 10일 / 대치교회 – “까치밥이 있는 사회”













1995년은 해방 50주년의 해요 동시에 분단 50년이 된 해였다. 한국 교회는 1988년에 1995년을 ‘희년’(禮年)으로 선포했었다. 드디어 그해에 섰다.

사실 남ㆍ북의 총리가 1991년 12월 13일에 “남ㆍ북 기본합의서”를 작성하고 서명함으로써 정치적 희년은 이미 선포된 것이었다. 그때 벌써 서로의 체제를 인정하자는 획기적 약속을 했었기 때문에 그리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도무지 희년을 실현하지 못하고 있다.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그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내게도 어려운 일임이 사실이다. 나는 6ㆍ25 한국전쟁 때 북에 의해 아버지를 잃었다. 그들이 총살로 나의 아버지를 앗아갔다. 그로 인한 가난과 피폐는 나에게 북에 대한 증오로 커 갔다. 한으로 쌓여 갔다. 보복의식이란 것이 왜 없었겠는가?

그러나 많은 것을 생각했다. 6ㆍ25 전쟁의 진실, 남북의 대결과 동족상잔의 어리석음, 세계의 탈냉전화와 우리의 여전한 이념 갈등의 폐해 등을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 엄청난 증오와 한을 극복해야 한다는 당위가 나를 압박했다. 이성적으로 많이 극복했다. 그러나 정서는 여간하여 극복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나! 극복할 수 있게 해주시라고 기도했다. 미래를 볼 수 있도록 도와주시라고 기도했다.

나는 이 시기 김국홍, 함세환 씨 등 출옥한 비전향 장기수들의 송환 운동에도 앞장서고 있었다. 김선명 씨는 세계 최장기수였다. 그의 석방 운동은 내 속의 갈등을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결국 석방되었으나, 그를 포함한 송환 운동 대상자 모두는 지금도 여기 남쪽에 머물고 있다. 그들 또한 자신의 사상에 철저한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이 경영하는 탕제원을 도왔다.

민족의 내일을 생각했다. 깊이! 생각했다. 나를 극복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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