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1:23-26] 몸을 준 스승과 몸을 받은 제자 – 1994년 9월 5일, 김상근 목사

9월 14, 2026

몸을 준 스승과 몸을 받은 제자

고린도전서 11장 23~26절 / 강진 지역 선교신학대학원


[회상 노트]

나는 1994-1995년, 2년 동안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인권위원회 위원장이었다. 인권위 창립 20주년이 되는 해여서 나는 그 기념행사 등을 맡았다. 그러나 20주년을 맞은 우리 인권위원회는 그 전에 한 번도 당하지 않았던 치욕을 당했다. 철도와 국철인 지하철 기관사 등 노동자들이 우리 사무실에 들어와 농성을 하고 있었다. 파업하던 그들이 몸을 피하여 우리에게 왔던 것이다. 그런데 주일날, 경찰이 난입하여 전원을 연행해 갔다. 장로가 대통령이고, 이름하여 ‘문민 정부’라 했던 정권의 만행이었다.

나는 크게 분노했다. 용서할 수 없었다. 지난 20년, 그 엄혹한 시기, 그 독재자들도 NCC 사무처에 난입하지 않았다. 그런데 장로 대통령 정권에게 짓밟혔던 것이다. 20주년의 해에, 내가 위원장일 때. 

더 안타까운 것은 교회의 반응이 거의 무반응이었던 것이다. 김영삼 정권에 대한 친밀감, 우군 의식이 만연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앙이 이런 분파 의식, 동류 의식을 앞서지 못한다. 우리의 신앙이란 도대체 무엇이냐?

때마침 나는 이은성의 소설 『동의보감』을 감동으로 읽었다. 소설 『동의 보감』을 읽으면서 나는 예수와 제자, 예수와 우리와의 관계를 읽고 있었다. 일종의 유추(類推)였다. 그러나 너무 벅찼다. 눈물을 흘리게 되었다. 줄을 쳐가며 읽었다. 어떤 때는 무릎을 꿇었다.

위대한 스승 유의태는 인간을 구해야 한다는 사명을 온 존재를 다 던져 감당해 갔다. 그러나 한계가 있었다. 사람의 몸 속을 들여다 볼 수 없는 것이 한계였다. 당시의 법과 문화가 이를 막고 있었다. 그런 조건 속에라도 그는 정진했다.

그러던 그가 더는 세상에 살 수 없는 병에 걸린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제자 중 한 사람 허준을 불러 자기 몸을 준다. 몸속을 들여다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병고에 시달리다 죽고 마는 사람들을 구하라는 것이다. 자기의 뜻을 허준에게 주었던 것이다.

허준은 스승의 높은 뜻을 차마 수용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스승의 뜻을 결국 따른다. 너무나 뜨겁게! 너무나 헌신적으로! 너무나 벅찬 감격으로! 스승의 뜻을 받든다.

교회가 무언가? 우리가 누군가? 우리는 허준만 못하다는 자책이 가슴을 짓눌렀다. 허준만은 해야 할 것 아닌가!


[슬라이드]















[설교 전문]

오늘은 도대체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 드리고자 한다. 물론 조직신학적인 설명을 시도하려는 것은 아니다. 통상적으로 교회의 뿌리를 구약성서 속에서 찾기도 하고, 신약성서의 베드로의 신앙고백이나 성령강림 사건 후 변화된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가 오늘 교회의 시원이라고 하기도 한다.

나에게는 다른 관찰이 있다. ‘예수의 성만찬’이 교회의 시원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다. 처음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모일 때마다 성만찬을 거행했다. 우리 개신교는 횟수도 줄이고 의식 자체도 간소화하여 버렸지만 처음 그리스도인들은 대단히 중요하게 그 일을 반복했다. 예수께서 과연 지금과 같은 교회를 세우려 하셨느냐 하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처음 교회가 이 성만찬을 통하여 형성되었던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예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저녁 식사를 하셨다. 그것을 우리는 ‘최후의 만찬’이라 부른다. 이때의 정경을 한번 상상해 보자. 제자들도 어떤 위기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을 때였다. 식사를 하다가 스승은 갑자기 먹기를 멈춘다. 빵을 들어 축사를 하시더니 떼어 나누어주시면서 “이것은 내 몸이니 받아 먹으라.” 하신다. 또 잔을 들어 감사하신 다음 돌려 마시게 하시며 “이것은내 피다” 하신다.

아마 제자들은 크게 당황했을 것이다. 충격이 있었을 것이다. 물론 당시 스승과 제자 사이에 이 같은 예식이 흔히 있었던 것이라 하지만, 그러나 제자들은 크게 당황했을 것이다. 식사하던 다락방은 침통하면서도 진지한 분위기로 가득 차게 되었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날 밤에 있었던 사건에 대해서 쓰고 있다. 바울은 물론 거기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마치 자기가 거기 있었던 것처럼 확실하고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빵을 떼어 주시면서 이것은 내 몸이니 받아 먹으라. 잔을 돌리시면서 이것은 내 피니 받아 마셔라. 이것을 먹고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라.”

우리는 주님께서 자신을 주셨다는 것의 의미를 어떻게 받고 있는가? 내 죄를 씻어 주는 신비한 세척수 정도로 밋밋하게 생각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예정에 따라 피를 흘리셨고 그것이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낸다는 이해다. 그러나 그것은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사람들에게는 별 감동이 없다. 예수와 대면해 있던 제자들에게 부딪쳐 온 것도 그런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도식적인 의미로 받았을 리 없다.

몸과 피를 주는 것은 무슨 뜻인가? 자기 자신을 온전히 몽땅 주는 것이다. 물질인 몸과 피가 아니다. 그것은 예수 자신이다. 자기를 통째로 주는 것이다. 자기의 인격, 자기의 혼, 자기의 뜻, 자신의 모든 것을 그대로 주는 것이다. 다른 말로 바꾸어 보면 어떤 설명이 가능하겠나? ‘이제 내일이면 체포당할 것이고 사형을 면치 못할 것이다. 나는 이제 세상에 더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세상에 있어야 한다. 있어야 하나 있게 되지 못하는 현실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나를 제자들에게 그대로 주어 제자들을 통해서 세상 가운데 현재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셨던 것이다. 나를 받아 ‘너희가 곧 내가 되라’는 이런 뜻이라고 생각한다.

이은성의 『동의보감』에서 나는 주님과 우리, 주님과 교회의 올바른 모델을 본다. 유의태는 허준의 스승이다. 그가 못 고치는 병은 천하에 없다. 그러나 반위(위암)만은 정복할 수가 없었다. 사람의 배를 갈라 보면 어느 정도 치료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당시의 법과 조건으로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다. 반위로 죽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의 정을 그는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날 유의태는 자기 자신이 반위에 걸린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는 병을 치료하는 대신 그 발전 과정과 증상을 관찰한다. 그것을 통하여 반위로부터 제중(濟衆), 즉 모든 사람을 구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관찰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아무도 반위에 걸린 위를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정복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그는 자기 몸을 내놓기로 결단한다. 때는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삼복이었다. 그는 기어코, 복중에도 얼음이 꽁꽁 얼어 있는 계곡을 찾아낸다. 그리고 일을 결행키로 작심하고 스스로 해부 도구를 챙겨서 거기에 먼저 들어간다. 그리고 제자 허준을 부른다.

허준은 가까스로 지적된 계곡에 도착한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스승 유의태가 방금 동맥을 끊고 자결한 채 반듯이 누워 있는 것이 아닌가! 동맥이 끊긴 손목은 물이 담긴 대야에 떨구어져 있었다. 피가 많이 쏟아지지 않게 하겠다는 배려였으며, 허준이 올라오는 것을 확인하고는 얼른 자결한 것이었다. 숨을 거둔 지 오래된 주검은 큰 도움을 줄 수 없다고 여겼던 것이다. 살아 있는 위를 보게 해주고 싶었고 아직 굳지 않은 인간의 몸속을 들여다보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야 거기서 의술을 찾아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머리맡에 서찰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서찰의 한 부분을 읽겠다.

“60평생을 살다 가는 나 같은 자에게야 더 이상 무슨 여한이 있을까마는 강보에 싸인 어린아이로부터 이 세상에 유용한 젊은이, 평생 타인을 위해 덕을 쌓은 귀한 인물, 평생 호강을 모르고 고생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측은한 인생까지 마구 죽음에 이르게 하는 만병의 정체를 캐고 밝혀서, 남을 해치고 악업을 일삼는 자가 아니거든 그들로 하여금 천수가 다 하는 날까지 무병하게 오래오래 생명을 지켜줄 방법은 없을까 하고, 이는 의원이 된 자의 본분이요 열 번 고쳐 태어나도 다시 의원이 되고자 하는 자에게는 너무도 간절한 소망이 아닐 수 없다.

그러하나, 나 또한 내 몸속에 불치의 병을 지니게 되었으니 병과 죽음의 정체를 캐낼 여력이 이미 없다. 이에 내 생전의 소망을 너에게 의탁하여 나의 문도 허준이가 세상의 어떤 병고도 마침내 구원할 만병통치의 의원이 되기를 빌며, 병든 몸이나마 너 허준에게 주노라. 이에 너 허준은 명심하라. 염천 속에서 내 몸이 썩기 전에 지금 곧 내 몸을 가르고 살을 찢어 사람의 오장과 육부의 생김새와 그 기능을 똑똑히 보고 확인하고 … 살피어 그로써 너 정진의 계기로삼기를 바라노라.”

여기 유의태에게서 나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계시받게 된다. 유의태가 자기의 몸을 준 것은 자기의 뜻과 의지와 기와 혼, 온전한 자신을 제자 허준에게 준 것이다. 자기는 더 이상 세상에 있을 수 없으나 허준을 통하여 세상 속에 현재하고자 한 것이다. 예수는 유의태보다 더 큰 자기를 우리에게 주신 것이고, 그것이 잡히시기 전날 밤 그가 행한 의식이었다.

허준은 집도하여 스승을 산산이 해부한다. 거기서 허준은 비로소 인간을 보고 인간을 만난다. 허준은 이로써 감히 유의태가 된 것이다. 해부를 마친 후 그는 이렇게 맹세한다.

“천지신명과 스승님은 제 맹세를 들어주소서. 만일 이 허준이 베풀어 주신 스승님의 은혜를 잠시라도 배반하거든 저를 벌하소서. 또 이 허준이 의원이 되는 길을 괴로워하거나 병든 이들을 구하는 데 게을리하거나 약과 침을 빙자하여 돈이나 명예를 탐하거든 저를 벌하소서. 이 고마움, 맹세코 영원히 잊지 않으오리다.”

나는 허준에게서 교회의 자리, 우리 성직자의 자리를 계시받는다. 우리도 주님의 몸을 받았다. 그러므로 그분의 뜻이 무엇인가를 허준처럼 옹골지게 알아야한다 우리 성직자의 길도 허준의 의술의 길만큼 진지해야한다. 허준의 성실함에 미쳐야한다.

교회는 무엇인가? 예수의 현재(現在)다. 예수는 자기를 그대로 여기 있게 하고자 했다. 그 흐 제자들이 이어받게 하고자 했다. 제자들, 초대 교인들은 성만찬을 나누면서 ‘우리가 누군가’를 다시 또다시 생각했다. ‘예수로 현재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거듭거듭 생각했다. 그래서 성만찬을 반복하고 또 반복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이 예를 함부로 행하는 경향이 생겼던 것 같다. 그 뜻을 바로 알지 못하고 받아먹고 마시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바울은, “올바른 마음가짐 없이 그 빵을 먹거나 주님의 잔을 마시는 사람은 주님의 몸과 피를 모독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깨우친다. 주님께서 왜 몸과 피를 우리에게 주셨던가를 깊이, 바르게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제 허준의 신앙고백을 우리의 신앙고백으로 받자.

“하나님, 우리의 맹세를 들어주소서. 만일 우리 교회가 베풀어 주신 주님의 은혜를 잠시라도 배반하거든 우리를 벌하소서. 또 우리가 교회가 되는 길을 괴로워하거나 정의를 세우고 사랑을 실천하는 데 게을리하거나 기도와 봉사를 빙자하여 돈이나 명예를 탐하거든 우리를 벌하소서. 이 고마움, 맹세코 영원히 잊지 않으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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