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31:1-3, 30:9-11] 하나님과 군마, 희망은 무엇인가? - 1994년 6월 12일, 김상근 목사

9월 14, 2026

하나님과 군마, 희망은 무엇인가?

이사야 31장 1-3절, 30장 9-11절 / 향린교회


[회상 노트]

기장이 ‘새 역사’를 시작한 날을 기념하는 총회 선교주일에 다시 향린교회 예배 설교를 맡았다.

김영삼 대통령이 이끄는 ‘문민정부’는 처음 대북 포용정책을 썼다. 비전향 출소 장기수인 이인모 옹을 북으로 송환했다. 나는 민간이 만든 송환추진위원장이었다. 내가 6ㆍ25 피해 가족이라는 것이 위원장을 맡기는 이유였던 것 같다. 나는 김국홍, 함세환 노인 송환운동도 했다. 그들을 북으로 보내자는 것은 인도주의다.

이리 가던 남북 관계가 갑자기 곤두박질을 친다. “불바다” 운운하는 북에, “초전박살”, “북진통일” 등의 구호로 맞받아친다. 미국은 속도 빠르게 전쟁 시나리오를 내지른다.

기장이 이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감당해야 할 몫이 있다고 확신했다


[슬라이드]
















[설교 전문]

오늘은 우리 총회가 총회 선교주일로 지키는 주일이다. 한국 교회, 특히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가 무엇이어야 하며 기장이 가야 할 길이 무엇인가를 함께 생각하는 주일이다. 그리고 우리의 교단인 기장을 위해서 함께 기도하고 이 시대의 바른 교회이기 위하여 함께 결단하는 주일이다.

우리 기장도, 모든 시대 모든 교회가 갖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과제를 함께 갖는다. 그러나 우리에게 맡겨진 시대적인 사명이 따로 있다. 물론 그것이 꼭 우리에게만 맡겨진 것이라 한다면 그것은 독선이다. 그렇게 깨닫고 거기에 서는 모든 교회의 사명이다. 그런 교회가 있다면 교파를 따질 것이 없다.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수없이 많은 특수한 사명이 있다. 하지만 이 시대에 교회가 함께 가지는 사명은 ‘민주화’요 ‘통일’이라는 민족적인 과제라고 생각한다. 불행하게도, 우리가 이 성스런 과제에 매진하려는 이때, 우리의 현실은 반민주, 반평화통일로 급하게 떨어지고 있다. 전쟁 도발의 위험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이러한 때에 우리 기장 교회가 어떤 고백을 가지고, 어떤 길을 가야 할 것인가?

오늘 본문의 배경은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의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던 기원전 700년경이다. 강대한 나라 앗시리아가 침공해 오자 이스라엘은 얼른 이집트에게 원병을 청한다. 그 길밖에 이 전쟁의 위기를 모면할 길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런 일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옳은 판단이라 할 수 있다. 힘을 힘으로만 막을 수 있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러나 예언자는 이것을 비판한다. 비판의 내용은, 이스라엘이 군사력만을 믿고 있을 뿐 하나님을 바라보지도 않고 하나님께 구원을 구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예언은 성서 여기저기에 있다. 예언자 호세아도 이렇게 예언한다.

“너희는 밭을 갈아서 죄악의 씨를 뿌리고 반역을 거두어서 거짓의 열매를 먹었으니 이는 네가 병거와 많은 수의 군인을 믿고 마음을 놓은 탓이다”(호 10:13).

예언자는 한발 더 나아가 바로 그 결과 이스라엘이 재앙으로 떨어진다고 한다. 그것을 ‘악’이라고 규탄한다.

여기서 우리는 논쟁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다. ‘외침의 위기에서 다른 외군의 도움을 구해서라도 힘으로 맞서는 것이 현실적인 것이지,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이 현실적인 것이냐?’ 하는 반론이 가능하다. ‘하나님께 간구하고 하나님께 구원을 구한다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비판이 가능하게 된다. ‘외군을 불러들인다는 것을 옳지 않다 할지 모르지만, 그냥 망해 버리는 것보다는 낫지 않느냐?’는 반론도 가능하다. 아니, ‘정치, 군사적인 문제를 신앙이라는 극히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방법으로 접근하는 것이 도대체 잘못된 것’이라 주장할 수 있다.

이것은, 반드시 국가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개인의 일도 그렇다고 성서는 쓰고 있다.

“주님은 거룩하신 분, 찬양을 받으실 분이십니다.
우리 조상이 주님을 믿었습니다. 그 믿음 보시고,
주께서는 그들을 구해 주셨습니다.
주께 부르짖었으므로 그들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주님을 믿었으므로 그들은 수치를 당하지 않았습니다”(시 22:3-5).

우리는 이것을 흔쾌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다. 우리의 지성에 맞지 않고 우리의 이성으로는 납득할 수 없다. 곤경을 당하면 그것을 헤쳐 나갈 방도를 찾아야지, 신앙적 차원으로 가는 것은 비약이요 그야말로 아편적인 효과를 가져올 뿐이라 생각하는 것이 차라리 정상일 수 있다.

사업을 하다가 실패하면 그 사업을 일으킬 방도를 찾아야지 무슨 40일 기도에 들어간다고 한다면 그것을 정상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학교 성적이 떨어졌으면 공부하는 것이지 10일 금식 기도한다면 정상적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도대체 극히 현실적인 삶의 사건을 이른바 신앙의 차원으로 넘겨 어물어물 현실과 직면하지 않으려는 소위 종교적 태도를 우리는 거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군사력을 의지하는 것이 왜 악인가?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사야 예언의 핵심은 이집트가 하나님일 수 없다는 것이다. 군마에는 영이 없다는 것이 핵심이다.

“이집트 사람은 사람일 뿐이요, 하나님이 아니며, 그들의 군마 또한 고깃덩이일 뿐이요, 영이 아니다.”

강대한 나라 이집트는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이 더 큰 무력을 가졌다는 뜻인가? 무력을 덜 가진 이집트를 믿느니 더 큰 힘을 가진 하나님을 믿자고 하는 것인가? 힘의 문제가 아니다. 영의 문제다. 거기에는 ‘영’이 없다는 것이다. ‘영’(mah)이란 ‘정신’, ‘얼’이다. 이집트에, 그 군마에 정신도, 영혼도, 영도, 혼도 없다. 그런데도 그것을 믿는 것은 불신앙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도, 이집트도 치시고 두 나라는 모두 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치, 군사적 문제이기에 앞서 신앙의 문제다.

그러면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에게 구원을 청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주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30장 941절은 이집트에게 구원을 청해도 이스라엘이 망하는 이유를 이렇게 선언한다.

“이 백성은 반역하는 백성이요, 거짓말하는 자손으로서,
주의 율법은 전혀 들으려 하지 않는 자손이다.
선견자들에게 이르기를 ‘환상을 보지 말아라.’ 하며,
예언자들에게 이르기를 ‘옳은 것을 보지 말아라. 부드러운 말을 하여라.
거짓된 것을 보여라. 정도를 버려라. 바른 길에서 벗어나거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의 이야기를 우리 앞에서 그쳐라.’”

이것이 하나님을 바라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을 바라는 것, 하나님에게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주의 율법을 준행하고, 선견자들에게 환상을 보게 하며 예언자들에게 정의를 말하게 하고 강한 원칙을 주장할 수 있게 하며 거짓을 거부하게 하고 정도를 가게 하며 바른 길을 걷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바라는 것이요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스라엘 민족에 ‘영’이 있게 함이요 정신, 혼, 얼이 있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에 서는 것이다.

지금, 이스라엘의 위기는 무엇인가? 강한 군대가 없는 것인가? 아니다. 강대한 나라의 도움이 없는 것인가? 아니다. 그들에게 이집트가 있었다. 이집트의 군사력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이스라엘의 위기가 극복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화급하게 이루어 가야 할 것은 민족의 정신, 혼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위기는 거기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도자들은 군사력, 오직 군사력의 문제라 판단한 것이다. 군사력의 뒷받침이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런 이스라엘은 재앙을 맞는다. 이집트도 망한다. 이스라엘의 희망은 하나님인가, 군사력인가? 하나님인가, 이집트인가? 하나님인가, 국력인가?

오늘 우리 민족이 처한 형편을 생각해 보자. 늦었지만 분단 50년 만에 민족의 평화적 통일을 모든 민족이 염원하게 되었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통일을, 평화적인 통일을 주장하면 그는 감옥으로 가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평화적 통일이 우리 모두의 염원이 되었다. 나아가 곧 실제로 통일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되었다.

남의 정부는 결코 흡수 통일을 아니 하겠다 했고, 북의 정부는 일방이 이기고 타방이 지는 통일은 아니 하겠다 했다. 그러던 한반도가 갑자기 전쟁 주장에 휩싸이게 되었다. ‘불바다’ 발언이 튀어나오는가 하면 ‘북진 통일’, ‘초전 박살’이 다시 등장한다. 미국은 다른 민족을 상대로 50일 전쟁이니 90일 전쟁이니 평양 공격이니 하는 시나리오를 공개하고 있다.

남의 대통령은, 북의 전통적인 우방인 러시아로 날아가 전쟁이 나더라도 북을 돕지 말라 한다. 외무부 장관은 중국으로 달려간다. 전쟁이라도 해서 이번 기회에 통일을 해버리겠다는 심산이다. 전쟁을 하기만 하면 이기는 것은 명확하다고 호언한다. 이유는 경제력이 월등하고 무엇보다 미국이 있기 때문이다. 패트리어트 미사일은 물론이고 엄청난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북도 이에 지지 않는다. 끝까지 핵 사찰을 강제하고 제재를 한다면 남은 물론 미국에까지 불행이 몰아치게 될 것이라 위협한다.

갑자기 우리 민족은 6ㆍ25 이후 최대의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도대체 남과 북의 철학이 무엇인가? 그것은 ‘힘의 철학’이다. 정복의 철학이다. 고깃덩이에 불과한 무기를 믿는다. 하나님 아닌 강대국을 믿는 것이다. 그렇다. 미국은 우리를 도울 것이다. 6ㆍ25 때처럼 도울 것이다. 그러나 그때도 우리를 도운 것은 결과였을 뿐, 실은 미국 자기들을 여기 한반도에서 지켰던 것 아닌가? 미국은 남을 도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돕는 것이 아니다.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의 세계 지배 전략의 하나로 그렇게 할뿐이다.

지금은 이데올로기 냉전 시대가 아니다. 경제 전쟁 시대다. 이데올로기 냉전에서 경제 전쟁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다. 이 과도기에 우리를 돕는다는 명목으로 전쟁을 하게 되어 있다.

여기서 남과 북이 가야 할 길은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또다시 전쟁터가 되자는 것인가! 또다시 동족상잔의 비극의 길을 가자는 것인가! 또다시 우리의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보내고 40년 쌓아올린 남북을 초토화해 버리자는 것인가! 또다시 미국에 기대어 북을 이기고 민족은 미국에 종속시킬 것인가! 우리의 희망은 무엇인가? 하나님인가, 군사력인가? 하나님인가, 미국인가? 하나님인가, 국력인가?

지금 우리 민족의 문제는 군사력의 문제가 아니다. ‘영’의 문제다. 민족에게 영이 있게 하는 것이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하게 될 것인가? 길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을 바라는 데 있다. 그에게 구하는 데 있다. 우리 민족의 위기는 무기가 없는 데 있지 않다. 남북의 무력을 합한다면 놀랍게도 세계의 군사 강대국 대열에 넉넉하게 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민족의 위기는 달려갈 이집트가 없다는 데 있지 않다. 미국이 있다. 중국이 있다. 러시아가 있다. 유엔이 있다. IAEA가 있다. 이집트는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것이 민족이 살 길이 아니라 한다.

길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을 바라는 데 있다 한다. 하나님을 바란다는 것은 무엇인가? 선견자들이 환상을 보는 것이다. 찬란한 민족의 내일의 환상, 원수 되었던 남과 북이 서로 얼싸안고 콧물, 눈물 흘리며 뉘우치고 춤을 추는 환상을 보는 것이다. 문익환 목사님의 환상처럼 멍석말이로 숨을 거둔 민족이 꿈틀 살아나 덩실덩실 춤을 추는 환상을 보는 것이다.

예언자들이 옳은 말을 하는 것이다. 지금 이 어려운 때 민족의 자리에서 민족이 살 수 있는 옳은 길을 밝히는 것이다. 기득권자, 권력자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을 골라 하지 않는 것이다. 저들이 평화라 하면 평화라 하고, 저들이 전쟁이라 하면 전쟁이라 하고, 저들이 북진 통일이라 하면 북진 통일이라 하는 것이 부끄러운 말이다. 예언자들이 이렇게 하지 않는 것이다. 거짓된 것을 보이지 않고 정도를 취하며 바른 길을 가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바라는 것이요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바라지 않고 러시아로 뛰고 중국으로 달려가며 미국의 고깃덩어리를 기댄다면 그것이야말로 민족의 파멸이다. 아니, 이집트가 망한 것처럼 미국도 망한다.

오늘 기장이 왜 따로 존재해야 하는가? 교파주의는 타기할 반기독교적인 것이다. 교파로만 존재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이 시대 우리가 따로 있음으로 감당하는 몫이, 긍정적인 몫이 분명하게 있어야 한다. 반드시 이렇게 말해야 하는 제약은 없다. 교파를 따질 것 없이 우리가 가야 하는 길을 함께 가는 모든 교회의 몫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선견자의 몫이다. 환상을 보는 것이다. 아무리 열악한 환경, 형편이라 하더라도 그 복판에서 차라리 환상을 보는 것이다. 민족이 파멸하는 악몽이 아니라 살아나는, 꿈틀꿈틀 하나가 되는 환상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 환상이 한국 교회의 환상, 나아가 민족 전체의 환상이 되어야 한다.

기장의 몫이 무엇인가? 예언자의 몫이다. 옳은 것을 보아내야 한다. 원칙을 제시하는 것이다. 거짓을 배척하는 것이다. 민족이 마땅히 가야할 정도를 취하고 바른 길을 가는 것이다. 이 예언자의 자리에 우리가 섬으로 한국 교회가 급기야 거기 서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기장의 몫이다. 이것이 재앙을 막는 것이다. 민족을 살리는 것이다. 미국까지, 일본까지, 세계를 살리는 길이다. 하나님의 재앙이 지구 땅에 쏟아지지 아니하게 하는 길이 여기에 있다.

기장 교회 교인이 된 여러분, 나는 교파 의식을 갖자고 요청하지 않는다. 바른 기장 교회로 우리의 교회를 세우자고 권면한다. 민족을 생각하고 기도하고 행동하는 교회를 아끼고 사랑하자고 동의를 구하고자 한다. 향린교회를 사랑하라. 아끼라. 소중하게 여기라. 보수 교회 교인들이 자기들의 교회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하고 아끼라. 그리고 기장을 사랑하라. 아끼라.

“너희들의 의로운 행실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로운 행실보다 낫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 5:8-9).

민족이 나아가야 할 길을 가슴에 담으라. 작은 일이라도 그 길을 따라 가는 일을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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