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나라는 어떤 포도원 주인과 같다
마태복음 20장 8-15절 / 이화여대 대학교회
[회상 노트]
선거에 의한, 민주적인 최초의 정권 교체를 이루어낸 기쁨은 잠시였다. 외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획기적인 조처들이 감행되었다. 부실화한 은행과 기업들을 퇴출시킨다. 모든 기업이 이른바 구조조정을 단행한다. 구조조정의 핵심은 다름 아닌 집단 퇴직이다. 실업자가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이게 뭔가?
민주적 정부, 우리가 만들고자 했던 정권은 민중의 아픔과 고통을 감싸 주고 그들에게 희망을 주는 정권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들을 더 깊은 고통으로 몰아넣고 있는 현실이 너무 안타까웠다. 지금 거리로 내몰린 이들은 ‘국민의 정부’를 탄생시킨 대통령 선거에서 정권 교체를 이루는 데 표를 보탰을 것이다.
세계를 지배하는 힘은 과연 무엇이었나? 지금은 또 어떤 힘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고 있는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힘은 너무 크고 절대적이었다. 하나님을 향한 반동의 힘이다. 어찌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에게 올 수 없다. 예수께서도 전혀 불가능한 현실 가운데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다. 우리가 그것을 포기하고 세계의 반동을 수용해서는 안 된다. 세계의 반동성과 우리 기독교인들의 사명을 다짐하고 싶었다.
교회는 현실 정치를 훈수해서는 안 된다. 정도(正道)를 설교할 뿐이다. 다른 가치를 선포할 뿐이다. 현실에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정치인은 교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실현해 내고자 노력해야 한다.
그렇다. 교회는 현실을 모르는 소리, 그러나 바른 예언을 해야 한다. 그래야 교회다. 나는 그때 이런 보수주의자였다.
[슬라이드]
[설교 전문]
우리는 바야흐로 20세기의 종착점에 이르러 있다. 그리고 계절로 보면 예수 오심의 의미를 다시 새기고 우리를 고쳐 세우는 대강절에 들어와 있다.
우리는 참으로 엄청난 변화의 소용돌이 가운데 있다. 지난 몇 년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그야말로 격동의 복판에 있다. 이 변화, 이 격동의 진실이 무엇인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변화의 목표점, 혹은 끝점은 과연 하나님의 나라일까?
도대체 20세기란 인류에게 무엇이었나? 인류에게 무엇이었던가라고 표현했지만 이런 식의 자문은 진실을 추상화시킬 위험이 있다. ‘나에게, 우리 민족에게, 가진 자인 나에게, 못 가진 자인 나에게 무엇이었느냐’고 자문해야 정확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 전체를 놓고 보면 정의를 향해 발전한 한세기였다. 그러나 20세기 내내 강대국의 반동이 있었다. 전반기에는 무력으로, 후반기에는 이데올로기로 다른 나라를 지배하고 다스렸다. 각각 명분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피지배국의 자리에서 보면 그것은 부정의요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우리는 20세기 전반기를 식민지로, 후반기를 민족 분단으로 고통을 강요당했고 지금도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물론 파쇼주의의 퇴치나 반공이라는 명분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거기서 죽임을 당한 개인이 얼마며, 그들에게 그것을 최고선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차라리 강대국들의 세계 지배의 수단이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을 향한 반동이었다. 여기서 인권의 문제가 대두되게 되었던 것이다.
무력의 지배도, 이데올로기의 지배도 반세기를 넘기지 못했다. 무력화되고 말았다. 이것은 역사의 발전이다. 하나님께서 지배자들의 무장을 해제시키신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의 행사요 하나님의 구원사다. 인간의 반동을 하나님께서 막으신 것이다.
지금 세계는 무력의 시대가 아니다. 이데올로기 대립의 시대도 아니다. 지금 세계를 갑자기 지배하고 있는 철학은 ‘신자유주의’다. 그 수단은 세계화며 자유 시장경제며 국제 경쟁력이며 무한 경쟁이다. 이것들은 신자유주의의 규칙들이다
모든 조직은 경쟁력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자면 품질을 향상시켜야 한다. 품질 향상으로만은 부족하다. 원가를 절감해야 한다. 그래서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 이 과정에서 기능이 뒤지는 노동자는 물론이고 기능이 있다고 하더라도 생산성 제고를 위해서 퇴출을 강요받게 된
다. 이러한 강압에서 비켜설 수 있는 조직은 없다. 말하자면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가 이 파도에 휩쓸려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20세기의 전쟁 그리고 이데올로기 갈등 속으로 모두가 내몰렸던 것과 같다.
어떻게 하면 모든 조직이 다같이 승리할 수 있는 것인가? 모든 기업, 각각의 기업이 똑같이 인원을 감축하고, 생산성을 높이고 그래서 좋은 상품을 만들어 내면, 그 모든 기업이 다같이 승리하게 되느냐 하는 것이다 이른바 win-win이 될 수 있는가?
무한 경쟁은 win-win을 보장하지 않는다. 모두의 승리를 끌어내 주는 룰이 아니다. 모두의 이김이 아니라 모두의 패배가 예약되어 있다. 설령 지금 경쟁에서 이겼다 하더라도 이긴 순간, 다음의 경쟁을 위해서 다시 자신을 채찍질해야 한다. 다시 구조 조정에 들어가야 한다.
여기서 개인과 개인의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경쟁이 강요된다. 개인의 인격이나 가정의 보존이나 사회의 안정 따위는 고려되지 못한다. 퇴출당한 사람, 일자리를 얻지 못한 사람들의 삶의 질은 심각하게 훼손당한다. 실직자의 자리에서 그 고통을 생각해 보라. 그 가정을 생각해 보라. 노숙자의 처지는 또 어떠하겠는가? 그러나 20세기의 끝점, 21세기의 초입에 선 우리는 이 불행으로 빠져들고 있다. 그나마 명맥을 이어온 공동체가 파괴되고 있다. 다른 차원의 인권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20세기 전반, 전쟁의 명분은 반파쇼였다. 그로부터의 인류의 해방이었다. 20세기 후반, 이데올로기 갈등의 명분은 반공, 혹은 반제였다. 그로부터의 해방이었다. 지금의 세계화의 명분은 무엇인가? 신자유주의의 종착점은 무엇인가? 무슨 해방인가? 해방이라는 명분을 타고 강대국들이 세계 지배 구조를 만들어 낸 그 반동은 없는 것인가?
얼마 전만 해도 ‘20:80의 사회’라는 개념은 지구 자원의 80%를 20%의 사람들이 소유하고, 반대로 80%의 사람들은 지구 자원의 겨우 20%로 살아가고 있다는 부정의를 고발하는 개념이었다. 그러나 앞으로 오게 될 것이라는 ‘20:80의 사회’는 그런 개념이 아니다. 오직 20%의 사람들만이 일자리를 가지고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고, 나머지 80%의 사람들은 실업자로 전락하게 된다는 뜻이다. 앞으로의 사회는 20%의 자기 실현 그룹과 그들에게 종속되는 80%의 종속군으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세계는 이렇게 가고 있다. 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오늘의 철학은 과연 정당한가? 자본주의의 세계화, 자유 시장경제, 무한 경쟁이라는 가치관은 정당한가? 우리가 갈망하는 하늘 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는 것인가? 예수께 묻자. 하늘 나라는 무엇인가? 하늘 나라를 어떻게 이룰 수 있겠는가? 신자유주의, 무한 경쟁, 세계화 등이 하늘 나라의 수단이 될 수 있는가?
예수께서는 무어라고 대답하시는가?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고용하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어떤 포도원 주인과 같다고 하신다. 하늘 나라는 이러이러한 포도원 주인과 같다. 포도원 주인의 철학, 가치관과 실천이 있는 것이 하늘 나라와 같다는 말씀이다.
주인은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고용하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다. 하루에 한 데나리온으로 일꾼들과 합의하고 자기 포도원으로 보낸다. 9시에 다시 나가서 빈둥거리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자 그들에게도 자기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한다. 12시와 오후 3시에도 그렇게 한다. 오후 5시에 나가 본다. 역시 빈둥거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왜 이러고 있느냐고 묻는다.
“아무도 우리에게 일을 시켜 주지 않아서 이러고 있습니다.”
그들의 대답이다. 주인은 “당신들도 포도원에 가서 일하시오.”라고 포도원으로 보낸다. 저녁이 되었다. 주인은 관리인에게 임금 지불을 지시한다. 맨 나중에 온 사람부터 시작하여 맨 처음에 온 사람들에게까지 품삯을 치르라 한다. 오후 다섯 시에 온 사람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는다. 맨 처음에 온 사람들은 자기들은 좀더 받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역시 한 데나리온을 받게 된다.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지금 예수의 이 가르침의 주제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주제는 ‘하늘 나라’다. 하늘 나라는 무엇이며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다. ‘하늘 나라는 위의 포도원 주인과 같다.’는 것이 예수의 설명이다. 다른 표현으로 바꾸면 하늘 나라는 위에 말씀하신 사회와 같다는 것이다.
포도원 주인이 이루어 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전원 고용이다. 전원 고용이 이루어지는 것이 하늘 나라와 같다는 것이다. 근사치적 하늘 나라다. 능력 있는 사람만 일하게 되는 사회가 아니다. 일은 자기 실현의 기회다. 이 기회가 누구에게는 주어지고 누구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다. 누구도 제외되지 않는다. 전원 고용이다.
포도원 주인의 특징적 행위는 공평한 생활급의 실현이다. 이것이 근사치적 하늘 나라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른 아침에 온 사람과 오후 5시부터 일한 사람 사이에 임금의 차이가 있어야 한다. 자본주의에 익숙한, 경쟁에 익숙한 우리는 이런 상식에 이의를 가질 수가 없다. 그러나 포도원 주인은 하루의 생활비만큼 똑같이 나누어 준다.
포도원 주인의 의도가 더 중요하다. 그것은 모든 사람의 삶의 질의 보장이다. 모두가 함께 일하고 그것을 함께 기뻐하게 되는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의 포도원이다.
모두가 일할 기회를 가지며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모두가 함께 일하는 세상, 사회가 근사치적 하늘 나라다. 포도원 주인의 목적은 고용을 창출하는 데만 있지 않다. 생활급을 보장해 주고자 하는 데만 있지 않다. 좋은 포도원을 만드는 것도 동시적인 목적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좋은 세상, 좋은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하늘 나라를 이루어 가는 데 장애가 되는 사람이 있다. 5시에 합류한 일꾼을 환영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나눔을 축복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다. 나눔의 기쁨이 없는 사람이다. 맨 먼저 오게 된 사람들은 주인에게 투덜거린다. ‘여러 악조건과 싸워 온 우리를 나중에 합류한 사람과 똑같이 대우한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온종일 빈둥거릴 수밖에 없는 사람의 고통과 그들이 일을 얻게 되었을 때의 감격을 알지 못한다. 그것을 공유할 여유가 없다.
그들의 신은 경쟁이다. 그들의 목표는 자신의 승리다. 남보다 잘됨이다. 더불어 함께 사는 사회가 아니다. 모두의 공동 승리가 아니다. win-win이 아니다. 더불어 함께 사는 사회를 받아들일 준비와 여유가 없다. 이런 가치 의식을 불식하라고 포도원 주인은 그에게 요구한다.
오늘의 세계, 오늘의 사회는 예수의 가르침에 역행하고 있다. 20:80의 사회는 하늘 나라에 역행하는 것이다. 퇴출과 해고의 불안이 차 있는 사회는 하늘 나라에 역행하는 사회다. 삶의 질을 보장하지 못하는 사회는 하늘 나라에 역행하는 사회다. 그러나 이것이 오늘의 대세다.
하늘 나라는 무엇인가? 저 포도원 주인과 같은 이상을 우리 모두가 공유하여야 하겠다. 이 가치를 설교하자. 이 이상을 가르치자. 포도원 주인과 같은 사회 정신을 이루어 내자. 이것은 또다시 하나님의 주권의 실현이다. 20% 인간의 반동에 대한 하나님의 해방의 역사다. 이를 받아들이기 바란다. 작고 큰 실현이 있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