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용기 제2권] (54) 교권에 민감한 서울의 중견 목사들과 한국신학대학 - 3년만의 이사회

2월 28, 2026
[범용기 제2권] (54) 교권에 민감한 서울의 중견 목사들과 한국신학대학 - 3년만의 이사회

3년만의 이사회

신학교 경상비는 없은 지 오래다. 선생과 직원의 하루 세끼 식사비도 제공하지 못한다. 그래도 어느 한분도 언짢게 생각하는 이가 없다. 자기가 맡은 하느님 일이라고만 믿고 고생을 보람으로 느끼며 산다. 각처에 흩어졌던 서울 목사들이 부산에 모여왔다. “우리에게도 신학교 천막을 사택으로 쓰게 해주시오!” 한다. “우리도 ‘이사’인데 왜 김종대에게만 특혜냐?” 하며 걸고드는 분도 있었다. 뻔뻔스럽다고 느꼈다.

나는 설명했다.

“내가 알기로는 이사회란 학교의 경영책임자다. 예산을 세우고 교수와 직원의 생활비를 담당하고 교사를 짓고, 그것을 보관하며 수리하는 책임을 진다.

우리가 그래도 설립자 김대현 장로님 유지를 받들어 이 난리와 피난 속에서도 학교 문을 닫지 않으려고 피어린 정성을 부어 3년을 하루같이 고생했는데 여러분이 한번 들려, ‘수고한단’ 말 한마디 한 일이 있는가?

미국서 신학박사 학위까지 받고 여기에 온 전경연[1] 교수 같은 이는, 넉넉히 살던 미국에서 극한 선상에 있는 빈궁 속에 기쁜 마음으로 몸을 던졌다. 임신 중의 부인은 영양실조로 유산했다. 전 박사는 ‘하루에 계란 하나씩만 먹게 해 주시면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하고 내게 말한 일이 있었다. 김종대 이사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우리와 고생을 같이 했다. 직원과 교수들을 무시로[2] 돕기 위해 직원들 사택이라는 천막 하나 속에 산 것 뿐이다…….”

그리고 나는, 전에 이사회에서 정해 준 교수와 직원봉급 액수대로 3년치를 계산하여 지불해 줄 것을 문서로 요구했다. 무던히 큰 액수였다. “지금이라도 이사회에서 이 액수대로 추불(追払)해 주시오!” 한참 말이 없었다. 김춘배[3]가 발언한다.

“그래 이걸 당장 내란 말이오?”

“이미 지나간 일이고, 어쨌든 이렇게 살아남았으니 더 요구하지 않겠오. 그러나 이사회에서는 그런 줄이나 알고 처사해야 하겠길래 하는 말이오.”

면괴[4]했었는지 다시는 말이 없었다.

그들은 박용희 부학장 안이 여의치 못하게 되자 함태영에게 신학교 재산관리와 운영을 맡기자는 데 역점을 집중시키는 것 같았다. 90노인이 어떻게 그런 실무를 감당하느냐는 여론을 막기 위해서 함태영 직속 젊은 실무자를 선임한다는데 합의했다고 들었다.

위에 전경연 박사 얘기가 언급되었으니 말이지만, 전 박사가 미국에서 돌아오자, 연세대에서 데려가려고 했다. 나는 ‘한신’에서 같이 고생하자고 한다.

그는 선택에 고민한다. 하루는 나를 찾아 왔다.

“김 박사님, 한신 학장이라는 선입개념을 떠나서, 담담한 한 친구로서, 친구의 처지를 생각하고 충고해 주십시오.”

나는 말했다.

“연대에 가더라도 연대 신학부 교수로 갈 것인데, 연대 신학부에는 교회 배경이 없습니다. 봉급이며 대우는 났겠지요. 그러나 ‘교회의 신학’으로서는 그 수확이 빈약할 것입니다.”

“한신에 오신다면 대우는 넉넉지 못할 것이고 한참 고생하실 겁니다. 그러나 학생들이 모두 교회로 나가기 때문에 한국 교회의 개혁과 세계적인 발전에는 크게 이바지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나는 ‘한신’을 택하는 것이 먼 장래를 위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그는 그렇게 결단했다. 전 박사는 한번 결단하면 끝까지 지켜가는 성격이다.

지금도 원로 교수로 ‘한신’에 충성을 다하고 있다.



[각주]
1. 전경연(全景淵, 1916~2004) - 일본 도쿄 신학대를 졸업하고 미국 보스턴대 대학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30여년간 한신대 신약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1964년부터 1990년까지 <복음주의 신학총서> 33권을 간행하여 세계 신학의 흐름을 한국에 소개하는 등 한국 신학의 연구 환경을 한층 높였다.
2. 무시로 – 일정한 때가 없이 아무 때나
3. 김춘배 목사는 1943년 장희진 목사의 뒤를 이어 신암교회를 1948년까지 이끌었으며 1948년부터 대한기독교서회 총무로 활동하였다. 1934년 “장로교총회에 올리는 말씀”(1934년 8월 22일자, 기독신보)으로 여권 문제를 언급하였다가 장로교 총회의 압박으로 1935년 총회 연구위원회에 석명서(釋明書)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4. 면괴하다 – 남을 마주 대하기가 부끄럽다

[범용기 제2권] (53) 교권에 민감한 서울의 중견 목사들과 한국신학대학 - 바다의 위험

2월 28, 2026
[범용기 제2권] (53) 교권에 민감한 서울의 중견 목사들과 한국신학대학 - 바다의 위험

바다의 위험

하루는 아주 더운 날씨어서 남부민동 언덕 너머에 해수욕하러 아이들은 모두 나갔다. 태풍이 밀고 온 장마비가 개인 며칠 후였다. 볕이 따갑고 모래가 희고 물이 맑다. 아이들은 집에 박혀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집에 있었는데 ‘은용’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관용이 물에 빠졌어요. 지금 병원에 있어요!” 한다.

나는 은용과 함께 달렸다.

응급치료 하는 의사 집에 갔다. 관용은 멀쩡하게 앉아 있었다. “5분만 지났더라면 손댈 여지가 없었을 겁니다” 하고 의사는 말한다.

사연이란 즉 이러했다. ‘중대’ 학생의 증언이다. 이 학생은 수영 선수였다. 집이 해수욕장에서 멀지 않았다.

날씨도 덥고 하니 헤엄쳐서 집에 간다고 한참 신나게 헤엄쳤다. 해변가에는 집채 만한 바위가 물속에 박혀 서 있었다.

그 밑에서 어떤 어린이가 물에 빠져 세 번 솟았다가 가라앉는 것을 봤다. 그는 그 고장에로 헤엄쳤다. 자맥질[1]했다.

자기가 짐작했던 고장에는 없었다. 벌써 밀려서 더 깊고 먼데로 간 것이었다.

저 켠에 거꾸로 서서 다리가 넘실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는 다리를 잡아 끌고 헤엄쳐 나왔다. 인공호흡을 시켰다. 의식은 없으나 아직 죽지는 않았다. 은용이 달려와서 거꾸로 업고 의사실로 뛰었다. 의사실에 내려놓자 의식이 돌아왔다는 것이다. 거꾸로 메고 뛰는 동안에, 배엣물이 다 나오고 호흡도 제대로 된 것이라는 것이었다.

관용의 말에 의하면, 자기는 헤엄칠 줄 모른다. 한참 가닥질[2]을 하다가 그 큰 바위 위에 올라앉고 싶어졌다. 다짜고짜 바위 밑까지 뛰었다.

태풍 때문에 바위 밑이 패여서 깊은 함정같이 된 줄은 몰랐다. 풍덩 빠졌다. 한번 솟았다. 하늘이 그렇게 반갑고 아름다웠다. 두 번 솟았다. 산이 보이니 살 것 같았다. 세 번째에는 눈이 캄캄해지더라.

‘중대 학생’ - 그는 나에게 은인이다. 없는 신세지만 푸짐하게 대접했다.

오랜 ‘후일담’이다. 그게 ‘장면 정권’ 때였을 것 같다. 충북 제천(?) 구역에서 국회의원 입후보했다고 느닷없이 수유리 집에 찾아와서 운동비를 보태 달라고 했다. 나는 얼마 되진 않지만, 있는 돈을 다 긁어 줬다. 그는 낙선했다고 들었다.



[각주]
1. 자맥질 – 물속에 들어가서 팔다리를 놀려 떴다 잠겼다 하는 일
2. 가닥질 - ‘가댁질’(아이들이 서로 잡으려고 쫓고 피하며 뛰노는 짓)의 방언

[범용기 제2권] (52) 교권에 민감한 서울의 중견 목사들과 한국신학대학 - 경용 입원

2월 28, 2026
[범용기 제2권] (52) 교권에 민감한 서울의 중견 목사들과 한국신학대학 - 경용 입원

경용 입원

경용은 피난 중의 대광소학교에 다녔다. 남부민동에서 가까왔기 때문이다.

못 먹고 지쳐서 병이 났다. 밥 못 먹고, 열이 나고, 배가 뚱뚱 부었다.

내가 아는, 피난 중의 의사들을 모셔다가 진단을 시켰으나 모두 딴소리다. 복막염[1]이라는 둥, 위확장[2]이라는 둥, 횡격막에 물이 고였다는 둥, 신장이 나쁠 거라는 둥 각양각색이다. 손톱과 발톱눈에 굵은 주사 바늘을 들이꽂아 피를 뽑는다. 의사마다 피 한방울씩은 뽑는다.

하루는 구포에서 개업하고 있는 강형룡[3] 의사를 불렀다. 남부민동까지 왔다.

‘간’이 부었다는 것이었다. 곧 입원시키란다.

남부민동 가까이에 8군에서 경영하는 이동 병원이 있다. 그리로 데려갔다. 고아들과 피난민 아이들 상대기 때문에 비용은 전적으로 면제다. 이화의대 여의사들이 거의 전부다. 그들은 간호원 겸 ‘인턴’ 의사다.

전문의들도 자주 들린다. 원장은 미국인으로서 8군 군의다.

오른 켠 ‘간’이 불어서 다른 기관들 위에 덮쳐버렸다는 것이다. 단백질 부족으로 오는 일도 있고, 디스토마 등 벌레나 균 때문인 경우도 있다고 한다.

우선 영양섭취부터 잘해야 한다면서 우유, 고기, 영양죽 등을 하루에 너댓 번씩 먹인다. 며칠 동안 살이 포송포송[4] 올랐다.

그 나이 소년으로서 밤낮 한 고장에 누워있으니 답답할 거다. 동화책을 사다 준다. 이튿날 들르면 벌써 다 읽었다. 또 사 온다. 두세 책 갖다 줘도 그날도 끝낸다. 한 주일쯤 지내니 서점의 동화책이 바닥났다. 안 읽은 책이 없었다.

병 원인은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 간세포를 검사해야 하겠단다. 끝이 갈구리[5]로 된 주사침을 간에 드리박고 빽돌려서 뺀다. 간의 살이 묻어나온다.

검사 결과는 소망적이었다. 디스토마나 결핵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하루는, 아침 일찍 들렀는데 여의사들이 긴장해 있었다. 내출혈 증상이 있어서 밤새도록 비타민K 주사를 계속했다는 것이었다. 손바닥에 동그란 반점이 보인다.

며칠 동안 비타민K 주사를 계속했다.

결국 반점이 사라지고 다시 생기지 않는다.

“무엇이 소원이냐?” 하고 나는 물었다.

“바깥 마루에 앉아 느닷없이 볕쪼임 했으면 좋겠어요” 한다.

퇴원해도 된대서 퇴원수속을 했다.

여의사들과 간호원들은 한군데 모였다. 경용과 작별하는 인사를 하기 위해서다.

담당 여의가 경용의 손을 잡고 그리로 데려간다. 나도 가서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들은 경용에게 작별 노래를 권한다.

경용은 찬송가 435장을 부른다.

1절 후렴 -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불쌍히 여겨 구원해 줄 이 은혜의 주님 오직 예수” - 중간에서 울음이 터져 마구 운다. 간호원들은 끌어안고, 눈물을 닦아주고 쓰다듬어 준다.

낮에는 그래도 틈만 나면 내가 들렀었지만 5시 이후에는 가족도 얼씬 못하게 한다. 긴긴 밤을 혼자서 새우려니 얼마나 외로웠을까? 지금 그것이 울음으로 터지는 것이라 생각했다.

간호의사들은 “아이가 됐어! 벌서 ‘주체’가 딱 서 있단 말이야!”, “주사 놓을 때 징그리거나[6] 아픈 티를 낸 일이 한 번도 없었어요”, “간세포 떼낼 때에도 어른보다 더 태연했다니까 그래요!”

마침 8군 군의인 원장이 자리에 있었길래 나는 고맙다고 인사했다.

“이제는 생명에는 관계없을 거요. ‘반점’이란 건 Bad Sign이거든요! 부었던 간도 말랑말랑해졌고, 졸아들어서 제 자리에 있고, 제 기능을 발휘하고 있으니 염려 없겠소. 다행한 일이오. 나도 기쁘오…….”

병원 문에서 나오자마자, 입구 자그마한 데스크에 거머티티한 한국 사람이 앉아 있다. 나는 보는 체 만 체 앞을 지나려했다.

“나는 이 병원 원장이요, 입원비를 내고 나가시오!”

“피난민에게 무슨 돈이 있겠소! 무료로 치료해 줘서 감사합니다. 원장님!”

그는 입이 쓴지 별말 없었다.

경용은 대광소학교 졸업반인데 첫 학기를 온전히 빼먹었다. 나는 경용을 데리고 대광 교무주임 장윤철[7]을 찾아갔다.

“제 반에 복교할 수 없을까요?”

교무주임은 시험을 치러본다면서 중요 과목에서 숱한 문제를 내놓고 즉석에서 답안을 써 내라고 한다.

두어 시간 후에 장 선생이 나왔다.

“좋습니다. 답안에 별로 틀린 것 없었습니다. 교장 선생도 허락했습니다.”

그래서 또 하나의 시련이 극복됐다.



[각주]
1. 복막염 – 세균의 감염 따위로 복막에 생기는 염증
2. 위확장 – 위벽이 긴장을 잃고 위가 병적으로 확장된 상태
3. 강형룡 박사는 강원룡 목사의 동생으로 강원룡 목사의 권유로 의대를 진학했다고 한다. 경동교회 원로장로로 아내 이갑순 권사와 1남 6녀를 두었으며 장남 강대희(서울대 예방의학과 교수)와 사위 2명도 미국(이숭공)과 서울대병원(이명철)에서 의사의 길을 걷고 있다고 한다.
4. 포송포송 – 살이 조금 부은 모양
5. 갈구리 - ‘갈고리’의 방언
6. 징그리다 - ‘찡그리다’의 방언
7. 장윤철(張允哲, 1908~2003) - 평안북도 용천 출생. 만주 간도의 용정에 있는 은진중학교, 일본 동경 명치 중학교, 동경 중앙대학을 거쳐서 모교인 은진중학교에서 해방까지 봉지하였다. 1948~1965년 대광중고 교사, 교장으로 봉직하다가 미국 더뷰크 대학에서 신학사, 예일대학에서 기독교교육 석사를 받고, 건국대학교에서 학감을 하다가 신일고등학교 초대 교장으로 봉직하였다(1966~1975년). 영락교회 장로.

[범용기 제2권] (51) 교권에 민감한 서울의 중견 목사들과 한국신학대학 - 장로교 총회 속개

2월 28, 2026
[범용기 제2권] (51) 교권에 민감한 서울의 중견 목사들과 한국신학대학 - 장로교 총회 속개

장로교 총회 속개

6ㆍ25 때문에 휴회 중이던 장로교 총회가 부산서 속개[1]된다. 총대들의 성분을 따져보면 우리 켠이 훨씬 많다. 그들은 일본에 피신해 있는 미국 남ㆍ북 장로교 선교사들을 불러들였다. 미국 선교사들은 미군 군목 역할도 한다. 군복을 입고 찦차를 차고 위험한 작전기지와 민간인 여행금지 구역까지도 맘대로 출입한다.

그들은 자기 켠 대표들을 빠짐없이 실어왔다. 그러나 우리 켠에는 선교사가 없다. 작전구역이나 여행금지 구역에 사는 사람은 거의 못 나왔다. 선교사도 그들 인원수의 반(?)인가는 총회원이 된다.

어쨌든 총회를 열고 보니 저쪽 대표가 선교사까지 합하여 다섯 사람이 우리 켠보다 많았다. 임원 선거에서 다섯 표차로 저쪽 켠 분이 회장으로 당선됐다.

보통 편법[2]으로는 차점자가 자동적으로 부회장이 되는 것이 지금까지의 통례였는데, 이번에는 하나하나 투표로 결정한다. 그래서 언제나 5표차로 부회장, 서기, 부서기, 회계, 부회계, 회록서기 등등이 저쪽 사람일색으로 메꿔졌다. 김세열, 이남규[3], 김종대 등 당당한 논객[4]들이 반박 논진을 폈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5표 차로 다수당이 된 그들은 다소 불안했던지, 한국신학대학의 총회인허 취소, 김재준 파면, 한신 졸업생의 교회 위임 거부, 이미 위임된 한신출신 목사들에 대한 노회로서의 재심사 등등을 제안했단다. 우리 켠 총대들은 일장연설을 남기고 퇴장했다. 격론이 벌어진데다가, 총회기간도 지났기에 그들은 임원회에 ‘한신’ 문제를 맡기고 산회[5]했다.

한신 이사장은 김종대였고 학장은 함태영이었고, 이남규, 김세열[6] 등은 실행 이사였다.

선후책을 세우기 위해 이사회 실행부가 모였다. 그때 벌써 총회 결의 사항이 한신 이사회에 공한으로 전달돼 있었다. 총회 ‘임원회’해야, 그들 일색이었기 때문에 넘기나마나 였던 것이다.

이사장은 학장과 의논하고 그 공한[7]을 돌려보냈다. 접수 자체를 거부한 것이다.

‘한신’은 종전대로 계속한다. 총회 배경도, 선교사 배경도 없었지만, 사기는 드높았다.

함태영은 혼잣말 같이 뇌였다.

“나는 화평을 원했는데 또 싸워야 하겠구나!” - ‘탄식’이었다.

신문기자가 와서 소감을 말하라 한다.

강수학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8]

“내게는 뜬 구름 같소.” 하고 나는 대답했다. 공자의 自敍에 나오는 말 - ‘義 아닌 출세는 내게 뜬구름 같다’(不義而 富且貴 於我 如浮雲)는 구절이 연상되었기 때문이다.[9] “내게 불의가 없으면 남이 뭐라 해도, 남이 어떻게 해도 내게는 상관없다. 내 맘에는 하늘에 뜬 구름 보듯 여유가 있다” - 이런 뜻을 말하려는 것이었다. 신문에도 그대로 났었다.



[각주]
1. 속개(續開) - 멈추었던 모임을 다시 이어서 엶
2. 편법(便法) - 간편하고 쉬운 방법
3. 이남규(李南圭, 1901~1976) - 해방 이후 한국기독교연합회 회장을 역임한 목사. 정치인. 전남 무안 출신으로 1936년에 평양신학교를 입학하여 이듬해 졸업하였다. 광복후 남조선과도정부 입법위원 민선의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제헌의회 선거 때에는 독립촉성국민회 소속으로 목포에서 당선되었으나, 곧 이어 10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전라남도 도지사로 일하였다. 1958년 한국기독교장로회 제43회 총회장이 되었으며, 1959년에는 한국기독교연합회의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60년 민주당 추천으로 초대 참의원 선거(전라남도)에 당선되었다. 1962년부터 목포 영흥중고등학교 교장으로 취임, 후진을 양성하였다.
4. 논객(論客) - 사물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데 능숙한 사람
5. 산회(散會) - 모임을 마치고 사람들이 흩어짐
6. 김세열 목사는 전남 곡성 출신으로, 평양 신학을 마치고 우수영에서 교역생활을 시작하여, 전주서문 외 전주태평교회 등에서 시무하였다. 그는 목회자로서 보다도 교회법에 정통한 교회 정치의 지도자로서 더 유명할 것이다. 일제의 탄압이 극도에 달했던 1938년에 전북노회 제32회 노회장이 되었고, 장로교 총회가 해체된 후 일본 기독교 전북교구장(노회장 격)을 역임하였다. 제38회 호헌총회(1953.6) 총회장이 되어 오늘의 한국기독교장로회의 기초를 형성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한국기독교장로회 헌법을 비롯하여 제반 규칙ㆍ규정을 제정, 개정하는 데 법통으로서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큰 공을 세웠다. 전북노회 제53회(1959년), 제54회(통합노회), 제56회(1962년) 노회장을 거듭 역임하면서 노회 내의 어려운 과제들을 해결하는데도 크게 기여하였다.특히 1962년 9월에는 이리제일교회 임시당회장이 되어, 당시 이상귀 목사를 둘러싼 분쟁으로 교회가 큰 위기에 봉착했을 때, 그의 특유의 정치력을 발휘하여, 7개월여에 걸친 진력으로 사태를 잘 수습하였다. 화려한 그의 경력과 명성에 비해 그의 노경(老境)은 쓸쓸하였다. 교단 탈퇴 문제 등 복잡하게 얽힌 가운데 외롭게 생을 마쳤다. [한국기독교장로회 군산노회사(1907~2005), 142-143]
7. 공한(公翰) - 공적인 편지
8. 1950년대 한국기독교를 대표하는 주간지는 오늘날 예장 통합교단의 기관지가 된 <기독공보>가 있었는데, 한국전쟁 시기에 강수학이라는 사람이 발행한 <한국기독시보>가 있었다. 당시로서는 <기독공보>보다 더 친정권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9. 子曰 飯疏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자왈 반소사음수 곡굉이침지 낙역재기중의) 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불의이부차귀 어아여부운) - “거친 밥을 먹고 물을 마시고, 팔을 굽혀 베개 삼고 있어도 즐거움이 그 가운데 있다. 의롭지 않으면서 부귀해지는 것은 나에게는 뜬구름과 같다.” [논어 술이편(論語 述而 篇)]

[범용기 제2권] (50) 교권에 민감한 서울의 중견 목사들과 한국신학대학 - 서울의 중견 목사들 작전

2월 28, 2026
[범용기 제2권] (50) 교권에 민감한 서울의 중견 목사들과 한국신학대학 - 서울의 중견 목사들 작전

서울의 중견 목사들 작전

전필순, 유재한[1] 등 서울의 교권주의자들은 이 기회에 ‘한신’을 손에 넣어야 한다고 책략을 꾸몄다. 우선 함태영을 ‘명예 학장’에서 ‘실권 학장’으로 취임시키고 재산과 경리를 맡을 살림살이 ‘주부’는 최거덕[2] 목사에게 맡기기로 했다. 말하자면 ‘박한진’ 대신에 ‘최거덕’을 앉히자는 것이다.

그러나 김재준이 도사리고 앉아 있는 한, 일은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김재준을 파면하고 함태영을 앉힌다는 꾀였다.

그래서 이사회가 소집됐다. 당시의 이사장은 김종대[3]였다.

김종대는 피난 중에 줄곧 우리와 고락을 같이했다. 그래서 직원 사택 중의 한 천막집에 살고 있었다.

이사회를 열었다. 주로 내 얘기래서 나는 자리에서 나왔다. 이사회는 둘로 갈라졌다. 거의 반반이어서 3분지 2는 암만해도 만들어 낼 수 없었다.

이사회에서는 교수들 의견을 들어보자고 했다. 정대위가 교수회 대표로 나와 보고한다. “아직 시국도 안정되지 않았고 장로교 총회관계도 극히 유동적이어서 예측할 수 없으니 당분간 현상을 유지하는 것이 바른 처사라고 만장일치로 합의했습니다” 한다.

후에 들은 얘기지만 “신학교는 양로원이 아니다!” 하고 극언하는 교수도 있었다 한다.

서울 책사들은 다시 모여 ‘박용희’[4]를 ‘부학장’으로 밀었다.

박용희 목사는 경기 출신의 항일투사로서 상해 임정에도 깊은 관계를 가졌던 분이다. 일제시대에는 몇 해 동안 자택감금을 당했었고 장대한 체구의 ‘잘난’ 인물이었다. 젊어서는 장사(壯士)라는 타이틀이 붙은 힘세고 날쌘 분이었다 한다. 평양신학도 나오지 않았고, 자습과 이력으로 목사직을 얻은 분이다. 그러므로 ‘신학’의 줄거리는 없다고 하겠다. 목포에서 목회하고 있었다.

그는 서울 분들에게 말했다.

“나는 신학에 생소하고 정통이니 이단이니 하는 분간도 모르는 사람인데 왜 나를 ‘부학장’으로 미느냐? 그리고 부학장이 된다면 내가 할 일은 무어냐?”

그들은 터놓고 말한다.

“‘한신’에서 김재준을 파면시키고 한국신학대학을 서울 사람들 손에 넣는 일입니다.”

박용희는 즉석에서 거부했다.

“김재준에게 파면당할 죄과도 없고 내게 파면시킬 능력도 없소. 그리고 한국신학대학은 이미 장로교 총회의 교직자 양성기관으로 인준된 공기인데 서울 사람만의 독무대가 될 수는 없소.”

“나는 가오” 하며 퇴장했다는 것이다.

그는, 아직도 동란 중에 있는 목포를 향해 혼자서 훨훨 떠나는 것이었다.

떠나기 전에 나를 만났다. 나는 만류했다. 기어코 떠난다. 나는 여비로 금일봉을 드렸다. 멀리까지 전송했다. 길을 가면서 하신 얘기가 위에 적은 내용의 것이다.

서울 분들은 함태영을 물고 늘어졌다. 함태영 학장이 실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교권에 민감한 서울 토백이 중견 목사들로서는 그럴만도 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원래 내가 용정에서 서울에 오기 전에 그들은 ‘서울신학원’이라는 무허가 강습소를 시작했었다. 최거덕이 원장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에게도 강의를 청하기에 몇 과목 가르쳤다. 김대현 장로에게 신학교 설립과 재단 조성을 처음으로 권한 것도 그들이었다. 내가 김대현 장로의 공식 초빙서를 받고 서울에 도착했을 때, 나를 자기 동지들에게 소개하고 자택에서 환영 디너를 채려준[5] 것도 그이였다. 그러나 나는 ‘서울’보다도 전 조선 교회를 상대했기 때문에 그들의 내게 대한 기대는 여의치 않았다. 교수진 짤 때에도 그들은 제외되었다. 신호신학교 졸업만으로는 세계 교회적인 신학을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마치 잔치상을 차려놓고 밀려난 주인같이 됐다고 느꼈다. 그러나 학문적으로 당당하게 도전할 지식과 용기는 없었다. 그래서 교회 ‘정치’의 무대에서 대결하기로 한 것이다. 함태영은 전라도 전주 출신이지만 함북 무산에서 자랐고 13세 때에 서울에 옮겨, 서울 사람으로 ‘인테그레잇’ 했다. 그가 부통령까지 됐다.

이용가치가 있다. 그이를 실권 학장으로 추대하고, 무슨 이유를 붙여, 김재준을 몰아내고 신학교를 자기들 교권 안에 회수하자는 것은 그럴사한[6] 얘기다.

신학교는 고장이 서울이고, 기금도 서울서 나왔고, 첫 개강도 서울신학원이라는 자기들 기관이었으니 의례 서울 교권 안에 있어야 한다는 그들의 집념이 노상 경우 없는 발악이랄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큰 테두리에 작은 것이 들어갈 수는 있어도 작은 테두리에 큰 것이 들어갈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언제나 전필순을 소외하지 않았다. 그를 교수직에 모시지 못한 것은 학력(學力) 때문이오 나의 사감[7]은 아니었다.



[각주]
1. 유재한(劉載漢, 1901~1963) - 경기도 용인 출신으로 곽안련 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용인교회에 출석했다. 그후 무어(S.F. Moor, 모사열) 목사가 설립한 동막교회에 출석하고 장로로 선임되었다. 연동교회에서도 시무장로로 선출된 그는 평양신학교에 진학하여 (신사참배로 신학교가 폐교되자) 통신으로 1939년에 졸업했다. 경성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으며 양평동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1960년 제45회 총회에서 총회장이 되었다.
2. 최거덕(崔巨德, 1907~1990) - 서울 용산 출신으로 이태원에 있는 보광동교회에서 기독교를 접했다.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대학 종교학과에 진학했다. 귀국하여 평양장로회신학교에 편입하여 졸업하였다. 그후, 마포교회에서 설교만 담당하다가 묘동교회(1934~1938년)와 안동교회(1938~1946년)에서 목회하다가, 1946년 광화문교회의 김종대 목사와 목회지를 바꾸었으며, 광화문교회를 덕수교회로 바꾸어 예배를 드렸다. 피어선고등공민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취임하기도 하였다. 1968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53회 총회에서 총회장이 되었다.
3. 김종대(金鍾大, 1909~1989) - 전북 무주 출생. 전주신흥학교, 전주성경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후 진안군에 있는 갈현교회를 개척 설립하고 전도사로 시무하였다. 1939년 남원읍교회 청빙으로 전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위임목사가 되었다. 1942년 제31회 총회에서 젊은 나이로 서기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1943년에는 총회 총무로 발탁이 되어 활동하기도 하였다. 일제 말기에 창씨개명이나 신사참배 등의 황민화 정책에 부응하여 활동하였으며, 한국전쟁 때 서울을 점령한 조선인민군을 환영하는 행사에 참가해 설교를 하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 경성일본기독교회를 인수하여 광화문교회로 간판을 걸고 목회를 하였다. 후에 안동교회에 시무하고 있던 최거덕 목사와 서로 교환하여 안동교회에서 시무를 하였다. 그후 김종대 목사는 조선신학교 이사장직을 맡으면서 기장 측에서 얼마동안 활동을 하다가 1962년 서울노회 소속인 은광교회로 부임하면서 예장으로 복귀하였다. 1972년 제57회 총회장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유신체재를 만나 총회 연합사업 및 사회대책위원장직을 맡으면서 유신반대를 외치던 장청 회원들이 감옥에 갔을 때 석방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강신명 목사와 친분이 두터워 강신명 목사가 서울장로회신학교 교장으로 재직 시 김종대 목사는 이사장으로 함께 일을 하면서 오늘의 서울장신대학교를 만드는 데 초석이 되기도 하였다.
4. 박용희(朴容羲, 1884~1959) - 광복이후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 한국신학대학 이사장 등을 역임한 목사. 1908년 이명헌(李明憲) 등과 함께 동양선교회에 가담, 1911년 경기도 용인의 장평리교회에서 원세성(元世性) 등과 함께 농촌선교에 힘썼다. 3ㆍ1운동 때 이승훈, 함태영 등과 만세운동을 모의하기도 하였고, 이후 이상재 등과 제2의 만세운동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상해로 망명하였다. 만주 용정을 거쳐 1921년에 귀국하여 이상재, 윤치호, 박승봉 등이 일으킨 기독교창문사 창립운동에 가담하였다. 1925년 신학교를 졸업하지 않았음에도 특별가결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32년 신흥우의 적극신앙단에도 참여하였으며, 신사참배반대로 옥고를 치렀다(1939-1942년). 광복 후에 과도입법정부 입법위원, 기독신민회 초대회장으로 활약하였다.
5. 채리다 - ‘차리다’의 방언
6. 그럴사하다 - ‘그럴싸하다’의 북한어
7. 사감(私感) - 개인의 사사로운 느낌

[범용기 제2권] (49) 교권에 민감한 서울의 중견 목사들과 한국신학대학 - 휴전에의 기류

2월 28, 2026
[범용기 제2권] (49) 교권에 민감한 서울의 중견 목사들과 한국신학대학 - 휴전에의 기류

휴전에의 기류

미국과 소련의 열전(熱戰)[1] 대결은 ‘피장파장’이어서 어느 한 켠의 시원한 승리는 기대할 수 없게 됐다. 그래서 38선에서 ‘교착’[2]되고 말았다.

‘평화조약’은 가망이 없더라도 ‘휴전’은 해야 할 판이었다.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간 맥아더 장군은 ‘소뿔[3]은 단김에 뽑아야 한다’는 식으로 이 ‘까리’에 아예 만주와 중공까지도 쓸어버리고 싶어 했다. 그러나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그것을 원치 않았고 따라서, 전방 사령관으로 릿지웨이를 보낸 것이다.

이제부터 서둘러야 할 일은 휴전 조약과 포로 교환에 대한 협의와 협정이었다.

서울은 이미 탈환되었으나 작전지구라서 환도[4]는 허락되지 않았다.

미ㆍ소는 서로 버티다가 1951년 7월 8일에 판문점에서 두 켠 연락 장교단이 예비 교섭을 열고, 본회의 개최에 합의했다 한다. 그러고 보면 휴전은 시간 문제였다.

우리와 협력하던 캐나다 선교사들도 한신과의 협력에 더 따끔하게[5]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한신’의 본격적인 건설은 소망적이었다.



[각주]
1. 열전(熱戰) - 무력으로써 하는 맹렬한 전쟁
2. 교착 – 어떤 상태가 그대로 고정되어 조금도 변동이나 진전이 없는 상태로 머물러 있음
3. 소뿔 – 소의 뿔
4. 환도(還都) - 전쟁 등 나라에 어려움이 있어 정부가 한때 수도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옮겼다가 다시 돌아옴
5. 따끔하다 – 정신적으로 어떤 자극이나 가책이 느껴질만큼 날카롭고 매섭다

[범용기 제2권] (48) 忙中閑(망중한) - 상철ㆍ신자 결혼

2월 28, 2026
[범용기 제2권] (48) 忙中閑(망중한) - 상철ㆍ신자 결혼

상철ㆍ신자 결혼

신영희와 정자는 진영읍에서 보건진료소를 경영하고 있었기에 한얼학교 피난부대 교사들과는 한 식구처럼 지내는 것이었다. 그때 상철은 한얼학교 교사로 있었다.

하루는 정자가 일부러 부산에 와서 상철과 신자의 결혼을 허락하라고 나에게 간곡히 권한다.

“그거야 자기들 의사에 달린 것이지, 다 큰 사람들에게 부모가 무슨 간섭이냐!” 하고 나는 말했다. 그것은 ‘허락’의 은어(隱語)[1]다.

상철과 신자는 같은 신학생으로 오랫동안 경동교회에서 주일학교 일을 함께 한 잘 아는 사이였다.

후에 들은 얘기지만 정자가 상철과 신자의 결혼 허락을 내게 권했을 때는 이미 상철과 신자는 어느 조용한 곳에 가서 둘이서 손잡고 기도하고 결혼을 약속했단다.

상철은 부산에 올라와 한신 ‘학부’와 ‘대학원’을 마치고 학사, 석사의 칭호를 받았다. 학우회장으로도 있었다.

결혼식으로는 부산 남부민동 ‘한신’ 강당에서 최윤관[2] 목사 주례로 거행했다.

청첩인으로는 강원용과 김하용이었다. 피로연은 즐거웠다. 졸업생과 재학생, 피난 중의 명사들, 시내 교직자들… 강당이 터질 지경이었다. 메마른 피난 생활이었지만 냉면은 넉넉했다.

신접살림을 위해서는 남부민동 골짜기 건너편 가파른 언덕 중턱에 맨드름이[3] 매달린 외호집을 세내 두었다.

신랑ㆍ신부는 피로연이 끝나자 우리 집에 들었다. 음식은 성의껏 차렸단다.

신랑은 식사 시간 전에 걷잡을 수 없이 운다. 뭔가 폭발되는 감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이유를 나는 모른다. 추측건대, 그는 시베리아에서 나서 어려서 부모를 따라 북간도에 와서 고생 고생하면서 자라왔다. 해방 후 부모형제들은 북간도에 남겨두고 단신으로 공부한다고 월남했다. 평생 혼자서 고학해온 의지파다. 그러나 결혼의 즐거운 날, 아버님도 어머님도, 할머니도 외갓집도 곁에 있지 않다. 혈연으로 본다면 철저한 ‘외토리’[4]다.

나는 ‘왕유’[5]의 시를 연상한다. 이 시는 ‘왕유’가 17세 때 지은 시다.


獨在異鄕爲異客, 每逢住節倍思親.
遙知兄第登高, 遍挿萸 小一人.

“혼자 딴 고을 나그네 되니,
명절 때마다 부모 생각 더 난다네,
오늘 내 형님, 내 동생
산에라도 올라갔다면,
가슴에 다는 꽃
한 송이 남는달거야!” (사역)


집에서 예배드리고 둘이서 산비탈 오솔길을 오른다. 딸 시집보내는 부모는 언제나 시원ㆍ섭섭하다는데, 하나 더 붙여 애처롭기도 하다.

사흘 후에 신부가 부모님을 식사에 초대한다. 신접살림은 행복한 것 같았다.



[각주]
1. 은어(隱語) - 특수한 집단이나 사회, 계층에서 남이 모르게 자기들끼리만 알도록 쓰는 말
2. 최윤관(1899~1988) - 평북 철산 출생. 1917년 평북 선천 신성중학교를 졸업하고(신성중학교를 다니던 중 천남동교회 김창석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이어서 평양 숭실전문학교에 입학하여 1921년에 졸업하였다. 졸업 후에 황해도 재령의 명신중학교의 영어교사로 시무하다가 1925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휴론(Huron) 대학에서 학사학위(BA)를 받았다. 1928년에 프린스턴대학 신학부에서 신학석사(B.D)를 획득하고, 1931년에 하트포트 대학원에서 신학석사학위(S.T.M.)를 받았다. 1933년 콜럼비아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하던 중 미국 교포 2세인 안노라 씨를 만나 결혼을 하고 박사과정을 마치지 못했다. 이후 고국의 윤산온 목사가 학장으로 있는 숭실대학교에서 교수가 필요하다는 편지를 받고 귀국하게 되었다. 귀국 후에 오산교회, 곽산교회, 세브란스 교목, 도화동교회를 섬기다가 공덕교회를 맡아서 이후 22년간 공덕교회를 섬기게 된다. 공덕교회를 섬기면서 1943년 조선신학교 강사로 시작해서 1945년 정식 교수로 취임하여 신학생을 가르쳤다(공덕교회에서는 설교만 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장관 자리를 제안했을 때 “나는 목사로서 교회 강단을 지키고, 목사양성을 위해서 가르치는 일을 천직으로 안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1973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나성(Los Angeles)에서 지내다가 1988년 하나님 앞으로 갔다.
3. 맨드름하다 - ‘반드레하다’의 방언
4. 외토리 - ‘외톨이’(의지할 데가 없고 매인 데가 없는 홀몸)의 비표준어
5. 왕유(왕웨이, 王維, 699~759)는 중국 성당(盛唐)의 시인ㆍ화가로서 자는 마힐(摩詰)이다.

[범용기 제2권] (47) 忙中閑(망중한) - 정대위 자리에 김정준 들어오고

2월 28, 2026
[범용기 제2권] (47) 忙中閑(망중한) - 정대위 자리에 김정준 들어오고

정대위 자리에 김정준 들어오고

정대위는 적어도 대여섯 나라 언어에 능숙하다. 하루는 유네스코 책임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처음에는 영어로 말했겠지만, 대화가 진행됨에 따라 중국어, 스페인어, 독일어, 일본어, 불란서어 등등으로 질문한다. 정대위는 거침없이 그 사람이 쓰는 말로 대답한다. 그래서 ‘유네스코 사무국장’으로 취임했다.

신학교에서는 대신으로 거제도에서 목회하는 김정준을 데려왔다. 정대위 자리를 메꾼 셈이다. 김정준은 ‘천리마’같이 재빠르다. 두루 얽히고설킨 ‘교무’를 한주일도 못되어 말끔하게 정리했다. 건강도 걱정없었다.

[범용기 제2권] (46) 忙中閑(망중한) - 통영 앞바다 섬에서 하루

2월 28, 2026
[범용기 제2권] (46) 忙中閑(망중한) - 통영 앞바다 섬에서 하루

통영 앞바다 섬에서 하루

여름이었다. 한얼학교도 하기방학 동안이었다. 조향록, 주태익은 통영 앞바다 다도해를 누벼 거제도, 지신도[1]의 명승을 탐방할 계획으로 나를 동반했다.

속셈으로는 주태익의 실연(?) 고민을 발산시키기 위한 행각이었던 것 같다.

그 당시 이승만 박사는 3선 음모를 진행시키고 있었으며 부통령 선정에 갈팡질팡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교회적으로는 고려신학교 측과 그보다도 더 보수파라는 송상석[2] 목사 등이 W.C.C.를 용공단체로 몰고 W.C.C.에 동조하는 나와 한국신학과를 ‘용공’으로 규정하는 팜플렛을 써 냈었고 그것을 증빙서류로 하여 교회 교란, 국가반역 등 죄목으로 처단해 달라는 청원서를 어떤 국회의원을 통하여 국회에 제출한 일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를 위로하려는 호의도 겸한 것이었다고 짐작된다.

우리는 지신도[3]인가 하는 아름다운 섬 백사장에서 여름빛을 몸으로 먹으며 즐겼다. 파출소가 있었다. 그 문 앞에는 간판이 서 있다.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범석”이라 쓰여 있었다. 돌아올 때에는 이름이 바뀌었다.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함태영”으로 됐다.

도민들은 이범석[4]이 누군지, 함태영이 누군지,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누군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투표하는 거요?”

“투표가 무슨 투표예요! 파출소에서 다해 주는데!”

“누가 무어되든, 우리게 무슨 상관입니꺼!”

우리가 거제도를 거쳐 부산에 돌아왔을 때 함태영은 ‘부통령’이었다.

이조말, 독립협회 사건으로 이승만 이상재[5] 등등이 감옥에서 사형을 기다리고 있을 때, 함태영은 평리원[6] 판사였다.

그는 민 씨 가문의 거의 절대적인 압력을 무시하고 아주 가벼운 형벌을 선고한 후 곧 석방했다.

이 박사는 그 은공을 갚는다는 의도에서 ‘함’ 옹을 등용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함태영 부통령은 정치적 실권자가 아니었다.

이 박사 ‘독재’의 ‘장식품’이랄까.

그래도 그에게는 품위가 있었다.

강성갑의 한얼학교에도 자주 찾아와서 격려했다. 아무 통고없이 나타난다.

지방경찰에서는 허둥지둥 달려와 경호의 책임을 진다. 지방순경과 부통령! 그것은 하늘과 땅의 사이었달까 그들은 아찔하게 쳐다보는 것이었다. 부통령의 소탈한 방문 때문에 ‘피난부대 교사진’의 위치도 드높아진다. 그래서 지방경찰이나 관청이나 시민들이 감히 ‘토백이’ 텃세를 부리지 못하게도 했다.



[각주]
1. 지심도 – 경상남도 일운명 지세포리에서 동쪽으로 1.5킬로미터 해상에 위치한 지심도는 면적이 0.338㎢, 해안선 길이는 3.5㎞의 작은 섬으로 장승포항에서 도선으로 약 15분 거리에 있다.
2. 송상석(1896~1980) - 1931년 평양신학교에 입학, 1934년 졸업하였다(제29회). 고신측 형성과정에서 중요한 기여와 역할을 했던 인물로 한상동 목사와 쌍벽을 이루었다. 이후 한상동 목사와의 교권대립이 극에 달하였고, 1974년에 교단에서 면직되었다(34년만인 2008년에 사면되었다).
3. ‘지심도’를 가리킴
4. 이범석(李範奭, 1900~1972) - 일제강점기 북로군정서 교관, 고려혁명군 기병대장, 광복군 참모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1910년 사립 장훈학교에 들어갔으며, 1913년 이천공립보통학교를 거쳐서 경기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1915년 여운형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가 1916년 항저우체육학교에서 6개월간 수학하였으며, 원난강무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1919년 신흥무관학교 교관, 북로군정서 교관, 1920년 사관연성소 교수부장이 되었다. 같은 해 10월에는 청산리대첩에서 제2제대 지휘관으로 활약하였고, 1923년에는 김규식 등과 고려혁명군을 창설하여 기병대장을 맡았다. 1925년 소련혁명전에 참가하였으며 중국군에서도 활약하였다. 1940년 광복군 제2지대장으로 미국군과 함동작전에 참가하였고, 1945년에는 광복군의 참모장(중장)이 되었다. 1945년 8월 18일에는 광복군 정진대의 일원으로 장준하, 노능서 등과 함께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 도착했으나 일본군의 입국 거부로 다음날 중국으로 돌아간 일도 있었으며, 1946년 6월 정식으로 환국하였다. 1946년 10월 조선민족청년단을 결성하였으나 주위로부터 국수주의적 극우단체라는 비난을 받아 대한청년단으로 통합되었다. 1948년 초대 국무총리와 국방부장관을 겸임하였고, 1950년에는 주중국대사, 내무부장관을 역임하였다. 1951년 12월 이승만의 지시로 자유당을 창당했으며 1952년 부통령에 입후보하였으나 낙선하였고, 1953년 이승만의 족청계 숙청으로 자유당에서 제명되었다. 1956년에는 무소속으로 부통령에 출마했으나 낙선하였고, 1960년 자유연맹을 바탕으로 참의원 의원에 당선되었다. 1963년에는 ‘국민의 당’ 결성에 참여하여 최고의원이 되었고, 1967년 1월에는 윤보선, 유진오, 백낙준과 함께 4자회담을 성사시켜 통합야당 신민당 출범에 이바지하였다. 1972년 5월 11일 심근경색으로 사망하였다.
5. 이상재(李商在, 1851~1927) - 일제강점기 YMCA 전국연합회 회장, 신간회 창립회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정치가, 민권운동가, 청년운동가. 1867년 과거에 낙방한 후 세상을 등지고 살고자 하였으나 박정양의 집에서 개인 비서일을 보았다. 1881년 박정양의 추천으로 신사유람단 수행원으로 일본의 신흥문물을 접하고 돌아와 개화운동에 눈을 떴다. 1884년 갑신정변의 실패로 낙향하였다가, 다시 박정양의 추천으로 관직에 등용되었고, 독립협회의 활동에 동참하였다. 1910년 국권이 강탈된 이후 유신회의 공격으로 사멸직전인 청년회를 사수하였으며 조선기독교청년회전국연합회를 조직하여 한국YMCA운동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927년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단일전선을 결성하고 신간회를 조직할 때. 창립회장으로 추대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였다.
6. 평리원(平理院) - 1899년 5월부터 1907년 12월까지 존치되었던 최고법원.

[범용기 제2권] (45) 忙中閑(망중한) - 진영의 강성갑 목사와 피란 교사들

2월 28, 2026
[범용기 제2권] (45) 忙中閑(망중한) - 진영의 강성갑 목사와 피란 교사들

진영의 강성갑 목사와 피란 교사들

신영희와 정자는 진영읍으로 갔다.

거기서 보건진료소를 차리고 시민들의 건강을 보살피고 상담한다. 전쟁 중에도 ‘후방요원’으로 인정된다. 한얼학교[1]에 몰려간 조향록, 이상철 등이 주선했다.

진영읍에는 강성갑[2]이란 이름의 비범한 인물이 있었다. 그는 연세대 졸업생으로서 교육의 혁명적인 갱신을 필생의 사업으로 삼고 헌신했다.

“교육기관은 자주, 자립, 자치의 공동체라야 한다. 교사와 학생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어떤 부자의 기업체나 독재자의 ‘사동’(使童)[3]이 아니다.”

“교육은 바르고 깨끗하고 용감한 ‘혼’의 형성과 보육을 그 사명으로 한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 정신을 학교의 정신으로 선양했다. ‘하나님을 사랑하자, 이웃을 사랑하자, 흙을 사랑하자’라는 삼애정신을 교훈으로 삼았다.

교육은 민주, 민권, 민족의 3각형적인 상호관계 안에서, 훈련과 실천과 성숙을 통하여, 그 주어진 사회에 봉사해야 한다.

따라서 교육기관은 성격 도야(陶冶)[4], 인간 건축(사람만들기)의 ‘대장간’이고 교사들은 ‘대장장이’다 등.

학교 이름을 ‘한얼’이라 불렀다.

‘얼’은 ‘혼’을 의미한 것이고 ‘한’은 ‘크다’는 뜻도 있고, ‘한국’이란 뜻도 있고, ‘하나’란 의미도 있다.

그는 진영읍 복판을 가로지은 철길 옆에 학교 터를 마련하고 거기에 천막을 쳤다. 혼자 천막을 지내며 ‘니하까’로 진흙을 실어다가 흙벽돌을 만든다.

짚을 썰어 섞었기 때문에 마르면 꽤 단단하다. 그것으로 교실을 짓는다. 한 교실에 한반씩 수용할 작은 교실들이다. 6ㆍ25 때까지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인가된 의젓한 ‘학원’이 됐다.

강성갑은 미국 프린스톤 신학교에 장학생으로 유학할 길이 열려 여권까지 받았으나 불우한 농촌 청소년들은 내버리고 갈 수 없다고 느껴 미국 유학을 포기하고 학교 건설에 전념했다. 그는 6ㆍ25 동란 중 지방 관리들과 경찰서 직원들의 모함에 의해 빨갱이로 몰려 모병왔던 현역 장교에 의해 낙동강가에서 재판도 없이 총살당했다. 그때 상철이가 피난하여 거기 있었단다. 강성갑의 동지 최 씨가 함께 총살당했는데 그는 수영의 명수여서 총을 맞고 물속을 거슬러 탈출 생존했다.[5] 그가 후에 법원에 사건을 고발해서 모함자들이 재판받고 사형, 무기 등 언도 받았다. 그후 한얼학교 이사회가 상철에게 학교 재건을 호소해왔다.

그런 인연으로 서울서 온 ‘피난부대’가 한얼에 집결됐다.

주태익[6], 김영규, 이상철[7], 김두식 등등이 진영읍 한얼학교에 모였다.



[각주]
1. 강성갑 목사가 1946년 복음중등공민학교를 설립ㆍ운영하면서자신의 교육이념을 정립하고 이를 실천하고자 ‘한얼중학교’라는 정식학교를 설립했다(1948년). 학교 명칭은 ‘한얼’로 정하고, 교육이념은 덴마크 그룬트비의 교육이념을 따라 ‘하나님을 사랑하자, 이웃을 사랑하자, 흙을 사랑하자’는 삼애정신으로 삼았다.
2. 강성갑(姜成甲, 1912~1950) - 1930년 마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1937년부터 1941년까지 서울연희전문학교를 수학하였다. 1943년 일본 동지사대할 신학과를 졸업하여 귀국 후 목사가 되었다. 부산대학교를 설립, 교수로 지내다가 농촌사회 개혁을 위해서 진영읍으로 옮겨서 1948년 한얼중학교(김해 최초의 중학교)를 설립하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진영 지서장이 한얼중학교 학생들을 학도병으로 소집하려고 하였을 때 학도병 대상이 고등학생이라며 거부하였다. 이에 진영 지서장이 낙동강 수산교 아래에서 그를 사살하였다.
3. 사동(使童) - 관청이나 회사, 학교, 영업처 등의 사무실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아이
4. 도야(陶冶) -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몸과 마음을 다스려서 바르게 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도기를 만드는 일과 쇠를 주조하는 일
5. 당시 한얼중학교 이사장이었던 최갑시는 이때 간신히 목숨을 구해 당시 강성갑의 마지막 기도를 다음과 같이 전했다. “주여, 이 죄인을 용서해 주시고 이 겨레를 가난과 재앙에서 건져주소서 한얼을 축복해 주소서. 이 죄인 주의 뜻을 받들어 당신의 품에 육신과 혼을 맡깁니다.”
6. 주태익(朱泰益, 1918~1976) - 평남 대동 출신. 1940년 평양신학교 예과를 수료한 뒤, 1942년 백합보육원을 경영하였다. 1947년 『흥국시보』를 비롯하여 기독교잡지의 편집을 맡아보다가 1948년부터 희곡과 방송극 집필을 시작하였다. 1964년 방송작가협회 부회장, 1968년 크리스천문학가협회 회장, 1971년에는 방송윤리위원을 지냈다.
7. 이상철(1924~2017) - 목사. 동양계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캐나다연합교회(The United Church of Canada) 회장을 역임. 1924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태어나 7살 때 부모를 따라 만주 용정으로 이주했다. 이후 캐나다 연합교회가 세운 은진중학교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시인 윤동주, 크리스찬아카데미 강원룡 목사, 통일운동가 문익환 목사, 오리 전택부 선생 등이 이 학교 출신이다. 이때 장인이 된 김재준 목사와 사제의 연을 맺은 것으로 알려졌다. 1947년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교)에서 공부한 뒤 1953년 한국기독교장로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61년 캐나다 밴쿠버 유니언신학교에서 공부하기 위해 캐나다로 이주했다. 1969년부터 1988년까지 캐나다 토론토한인연합교회 담임목사로 섬겼다. 캐나다연합교회 토론토연회에서 인권과 정의 구현을 위해 활발히 활동하던 이상철 목사는 1985년 연회장에 당선됐다. 1988년에는 임기가 2년인 캐나다연합교회 회장에 당선됐다. 캐나다연합교회는 이상철 목사가 재임하던 기간에 다양한 사회 이슈와 맞닥뜨렸다고 전했다. 캐나다연합교회는 이상철 목사가 재임하던 1988년 동성애자 목사 안수를 허용했다. 당시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이 목사는 교단 소속 교인들에게 "함께 살고, 함께 투쟁하고, 함께 성장하자"며 설득했다. 캐나다 이민 1세대였던 이상철 목사는 한국 민주화 운동을 위해서도 싸웠다. 한국 인권 상황과 북한 공산주의 인권 탄압을 비판했다. 남한 군부독재 시대에는 캐나다에서 조국을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독재자들의 탄압을 피해 캐나다로 망명한 이들의 그늘이 됐다. 한국 정부는 그의 업적을 인정해 2007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다.

[범용기 제2권] (44) 부산 피란 3년 - “한국신학대학”으로

2월 28, 2026
[범용기 제2권] (44) 부산 피란 3년 - “한국신학대학”으로

“한국신학대학”으로

미군정 때에 이미 대학령에 의한 인가를 받았고 학사, 석사 칭호도 수여할 수 있었지만 이름만은 ‘조선신학교’로 불렀다.

다른 신학교들과의 균형을 유지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승만 박사의 피난정부도 부산에 있다.

백낙준 박사가 문교부장관이고 박창해[1] 씨가 비서실장이었기에 접촉하기가 자연스러웠다. 우리는 학교 명칭 변경서를 냈다. 며칠도 안 가서 허락됐다. 이제부터는 ‘한국신학대학’이라 부른다.

학칙에 따라서 학장을 선출해야 한다. 선출된 학장도 문교부 인허를 맡아야 한다. 문교부에서는 나에게 ‘학장서리’를 부탁한다. 지금까지의 직위가 ‘교장’이었으니 당연한 처사라 하겠다.

그 당시 함태영 목사님은 심계원[2]장 재직 중이었다. ‘심계원장’은 일체 다른 공직을 맡지 못하는 것이 ‘법’으로 규정돼 있었다. 그것이 민주주의 나라들의 통용 원칙이다.

그러나 함태영 옹은 자기가 이미 ‘한국신학대학 학장’으로 취임한 것 같이 생각되었는지 백낙준 박사에게 취임 인사까지 했다고 들었다. 백낙준 문교장관은 난처해졌다. 그래서 ‘궁여지책’[3]으로 지혜를 짜낸 것이 ‘명예학장’ 체제였다. 그것은 내게만 알린 비밀이었고 함태영 옹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함태영 옹은 내게 말했다. “속히 날짜를 정해서 학장 취임식을 성대하게 거행하도록 하시오.”

“그리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명사’란 이들이 모두 부산에 몰려와 있기 때문에 초청장을 수백 장 발송했다.

문교부에만은 알리지 않았다.

정대위 목사가 8군에서 얻어온 나무궤짝들은 못을 뽑아 널조각으로 변형시켰다. 베여버린 통나무 토막들도 ‘미군’에서 얻어왔다. 그것으로 마루바닥 ‘푸레임’[4]을 짰다. 그 위에 널빤지 붙일 못은 원래 궤짝에 박혔던 것으로 넉넉했다. 학생, 직원, 교수 총동원으로 하루 사이에 미끈한 마루가 깔렸다. 강단도 넓직하게[5] 짰다.

학장 취임식은 미상불[6] ‘성대’했다.

이사회로서는 ‘함’ 옹이 심계원장을 사퇴하기 전에는 ‘학장’ 실무를 맡을 수 없을 테니 노인의 ‘명예’를 구태여 긁어내리는 것보다는 노인의 소원대로 해 드리고 하회[7]를 기다려보자는데 합의했단다.

‘북진통일’을 염원하는 이승만 박사는 ‘휴전’에 반대였다. 그러나 미국이 하는 일이니 이 박사의 권한 밖의 일이었다.

1951년 6월부터 포로교환 협정이 토의되고 있었다. 포로수용소가 거제도에 있다. 담당 군목은 한신졸업생 강신정[8] 목사였다. 그때 나는 거제도에 자주 드나들었다. 강신정 군목의 증언을 들었다.

“미군은 인민군 포로의 사상적 성분을 묻지 않았다. 통틀어 적군 포로로 인정하고 수용소에 넣는다. 민주 포로와 공산 포로를 한 반에 같이 수용한다.

공산 포로는 악착같이 원수 노릇을 계속한다. 민주 포로가 변소에 앉았을 때 돌멩이로 머리를 까서 죽인다. 시체는 변소통에 밀어 넣는다. 자는 동안에 목을 눌러 죽인다. ‘민주인민군’은 그렇게 잔인하지 못한다. 몇 천 명의 공산 포로가 공동작전으로 그 짓을 하니 민주 포로는 다 죽고 말 것 같았다. 미군 책임자는 ‘너희 동족끼리 그러는 걸 우리가 상관할 것 무어냐?’ 한다. ‘다 같은 인민군이 아니었더냐?’ 한다.

‘살려면 집단탈출’을 해야 한다. 그래서 돌격대를 편성했다. 새벽녘에 문을 박차고 ‘와아’ 고함치며 밀고 나간다. 미군 감시원의 총에 몇 사람 희생됐으나 대체로는 성공적이었다….”

이것이 이 박사의 반공 포로 석방을 단행할 계기가 됐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 박사는 포로교환협정을 무시하고 ‘반공 포로’ 2만 7천명을 자의로 석방해 버렸다.

나는 USIS 도서실에서 그 후의 각국 여론들을 주워 읽었다. 영국에서는 “그 Old Devil이 누구를 믿고 그런 방자한 짓을 했느냐” 하고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나 미국 여론은 일정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역사상 드물게 보는 big guts[9]다”, “장개석은 그에게 어린애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8군 장성들도 이 박사 앞에서는 쩔쩔맨다.” 등등으로 추켜올리는 기사도 실려 있었다.

미군 군목이 자주 우리 신학교에 찾아온다. 하루는 누구던가가 그에게 “원자탄 한두 개면 알아볼텐데 그건 뒀다 뭘하려는 거요!” 하고 대들었다.

미 군목은 대답했다.

“참으로 용감하십니다. 지금 성능의 원자탄 한 개면 한반도는 없어집니다. 남이고 북이고, 인민군이고 국군이고 없습니다. 온전한 무인광야(無人曠野)가 됩니다. 그래도 원자탄을 써 달라니 참으로 ‘용감’합니다….”



[각주]
1. 박창해(1916~2010) - ‘철수와 바둑이’가 등장하는 초창기 국어교과서를 집필한 원로 국어학자. 1916년 만주 지린성 룽징(龍井)에서 태어난 고인은 연희전문학교(연세대의 전신) 문과에 입학해 외솔 최현배 선생에게서 국어학을 배웠다. 45년 광복 후 미군정청 문교부 편수사로 근무하며 서구의 언어학 이론을 도입, '철수와 영희, 바둑이'가 나오는 대한민국의 첫 국민학교 국어 교과서를 집필했다. 1952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부임하였으며, 1976년 미국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1988년 귀국하였다. 정대위 한신대 학장과 소학교 동기이다.
2. 심계원(審計院) - 국가의 결산을 검토하던 헌법기관. 감사원(監査院)의 전신이다. 1962년 제5차 개헌 때 폐지되었다.
3. 궁여지책(窮餘之策) - 매우 궁한 나머지 내는 꾀
4. 프레임(frame) - 자동차나 자전거, 건조물 등의 뼈대
5. 넓찍하다 - ‘널찍하다’(꽤 넓다)의 비표준어
6. 미상불(未嘗不) -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게
7. 하회(下回) - 다음 차례, 어떤 일이 있고 난 후에 벌어지는 일의 형태나 결과
8. 강신정 – 1945년 조선신학교 제5회 졸업. 1980년 제65회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을 역임하였다. 1953년 아버지(강병주 목사)와 형(강신명 목사)을 두고 한국기독교장로회 편에 섰다.
9. guts : 용기 기력, 배짱, 인내력

[범용기 제2권] (43) 부산 피란 3년 - 교수와 직원의 숙소도

2월 28, 2026
[범용기 제2권] (43) 부산 피란 3년 - 교수와 직원의 숙소도

교수와 직원의 숙소도

정대위 목사는 8군에서 작은 천막들을 대여섯 채 얻어왔다. 물론 쓰다 버린 폐품이다. 쇠그물에 세루로이드[1]를 입힌 반투명한 대용유리도 얻어왔다. 그것은 천막 들창용이다. 한 천막에 마룻방 하나와 작은 부엌이 달렸다. 소꼽작난 같지만 우리에게는 대궐보다 더 요긴했다. 바로 가까운 동네에 구회영 장로가 살고 있어서 학생들에게 때때로 별식도 제공하고 교수와 직원을 자택에 초대하기도 하고 아주 어려운 학생에게 장학금도 주고 했다. 큰 위로가 됐다.

정대위 목사 어머니는 심한 당뇨병으로 누워 계셨다. 인슈링[2] 주사로 연명한다.

결국 세상 떠나셨다. 장례식은 신학교에서, 그리고 뒷산 봉우리에 안장했다. 비석을 세웠는데 ‘어머니’라고만 쓰여 있었다. 정대위는 시인이기도 했다. 후일에 ‘수성암’이란 부부합작 시집도 나왔다.[3]

국련군의 38선 돌파, 전면 반격의 성공 등 “뉴스”는 피난민의 사기도 고무했다.

일본에 피신했다가 부산에 돌아온 캐나다 선교사 스캍과 프레이저는, 원산, 함흥, 간도 등지에서 피난 온 옛 친구들을 모아놓고 “이제부터 우리에게 우선적으로 요청할 사항이 무언지 말해 달라”고 했다.

내게 꼬집어 묻길래 나는 “교회와 사회의 지도자 양성”이라고 말하고 캐나다 유학의 길을 넓게 열라고 요청했다. 그때 ‘장학회’라는 위원회가 있었다. 유학생 추천과 신청자의 심사를 선교사들과 함께 협의 결정하는 직책이었고 신애균[4], 정대위도 위원이었다. ‘이우정’이 선정되었고 다음으로 강원룡도 허락되었다. 강원룡은 캐나다 위니펙에 있는 신학교로 가게 됐다. 이우정에게는 신약원어인 ‘그릭’ 전공이라는 조건이 붙었다. 이우정은 토론토 대학에 적을 두게 됐다. Full Scholarship 이어서 왕복여비, 식비, 학비, 잡비, 서적비 등이 스칼라쉽에 포함되고 방학 동안에도 같은 액수의 장학금이 주어지기 때문에 ‘짭’[5] 얻는 일은 허락되지 않았다. 공부만 하라는 것이었다. 2년동안이지만 4년의 실력이 붙을만한 ‘우대’였다.

강원룡은 2년 후에 N.Y. 유니온에 옮겼다. 원래 수재인데다가 타고난 말솜씨와 지도력이 그를 돋보이게 했다.



[각주]
1. celluloid : 셀룰로이드
2. ‘인슐린’(insulin) - 동물의 이자에서 분비되어 포도당을 글리코겐으로 바꾸어 주는 호르면. 당뇨병이나 정신병 등의 치료에 쓰인다.
3. 이주선ㆍ정대위, 『수성암』, 삼화출판사, 1973년
4. 기독교 사회운동가로서 한평생을 살다 간 신애균은 함흥 고등여학교 1회 졸업생으로서 모교재건위원회를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신애균은 재학시절부터 동급생들과 함께 “나라를 위해서 몸을 바치자”고 맹세, 매일 밤 12시 기도회를 갖는 등 민족주의적 성향을 드러냈다. 함흥 영생여고보를 졸업한 후, 1915년부터 여전도 운동에 헌신하였으며 함경북도를 중심으로 비밀결사대를 조직, 대한애국부인회의 지하운동을 주도해 3년 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후 여전도회 회장을 지내고 YWCA에서 활동했으며 자서전 <할머니 이야기>를 남겼다. 민중신학자 현영학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5. Job : 직업

[범용기 제2권] (42) 부산 피란 3년 - 피란 한신의 고장(Locus)

2월 27, 2026
[범용기 제2권] (42) 부산 피란 3년 - 피란 한신의 고장(Locus)

피란 한신의 고장(Locus)

전쟁은 언제 끝날지 요량[1]이 안 간다. 나는 피난지서 ‘한신’을 계속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김길창 목사 교회당에서 개강했다. 그러나 그 교회에는 교실로 쓸 작은 방들이 없다.

권남선 목사 말에 의하면 남부민동 권 목사 사택 길가 낭떠러지에 까마득한 높이의 석축을 위아래로 쌓아올리고 그 밑에는 공지 약 200평을 평평하게 고른 고장이 있다고 한다. 일인들이 설계한 것인데 지금은 적산이요 임대차 계약도 돼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근처 아낙네들이 인분을 더덕더덕 붓고 채소를 심어먹는 고장이란다. 시청과는 상관도 없는 무허가 경작이다.

우리는 그 고장을 신학교 기지로 쓰기 위해 임대차 계약을 체결하고 임대료도 선납했다. 허가서가 나왔다. 우리 선생과 학생은 동네에서 삽, 곡괭이, 호미, 가래[2]들을 빌려 인분을 흙으로 덮기 시작했다. 아낙네들은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방해한다. 우리는 아무 대꾸도 안하고 말없이 작업을 계속한다. 아낙네들의 욕지거리가 하두[3] 심하기에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법대로 시청에 땅세 내고 이 땅을 빌렸으니 당신들이 불평이 있거든 시청에 말하시오.”

암만해도 잇발이 들 것 같지 않으니까, 아낙네들은 하나 둘 흩어진다. 그 후에는 아무 말도 없었다.

신학교 기지 아래켠 해변 가까이에 부산지구 계엄사령관이라나하는 김종원[4] 대령이 자기 집을 지었다. 그럴싸한 주택이다. 그에게는 ‘호랑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다.

그는 명령쪼로 말한다.

“신학교 사람들이 남의 주택 안뜨락[5]까지 볼 수 있게 됐으니, 학교를 딴 데로 옮기시오.”

“신학교 기지는 법 절차대로 허락된 것이니 이제 옮긴 수는 없소마는, 댁의 안 뜨락은 보이지 않게 널빤지로 북쪽 ‘가생이’[6]를 둘러 막을테니 염려 마시오.”

그럭저럭 막지도 않고 그대로 지냈지만 별소리 없었다. 그의 권세도 ‘추상낙일’(秋霜落日)이라 오래가지 못했다. 거창사건[7] 따위가 이엄이엄[8] 터져나왔기 때문이다.

신학교에서는 정대위 목사가 학감[9]이고 박한진 목사가 경리과장으로 일했다.

정대위 목사는 외국어에 천재적 소질을 갖고 있었다. 우리말 이외에 일어, 중국어, 영어, 스페인어, 독일어, 불란서어 등등 아홉 나라 말에 능숙하다고 했다.

그는 미8군 군수품 책임자를 찾아가서 내버린 탄환 Box를 신학교에 무료로 넘겨달라고 했다. 허락됐다. 츄럭으로 남부민동 언덕밑까지 실어온다. 신학교까지는 오솔길 밖에 없기 때문에 학생, 선생이 총동원하여 개미떼가 ‘메뚜기’ 끌어가듯 한다. 정대위는 낡은 군용천막(Tent)도 십여 개 얻어왔다. 크기는 일정하지 않다.

남부민동 신학교 기지는 제일 큰 천막 하나로 메꿨다. 천막에는 칸막이 천이 붙어 있었다. 여학생 숙소, 남학생 숙소, 교무실, 사감실 등등이 칸막이로 구분된다. 출입구 옆이 교무실이다. 사감은 차보은 선생이었다. 이우정[10], 김영희 등 학부 여학생은 차보은 사감과 기거를 같이 했다.



[각주]
1. 요량(料量) - 되질하여 용량을 헤아린다는 뜻으로, 잘 헤아려 생각함을 이르는 말
2. 가래 – 흙을 파서 갈아엎거나 퍼내는 데 쓰는 기구
3. 하두 – ‘하도’의 방언
4. 김종원(金宗元, 1922~1964) - 일제강점기 군인이자 해방후 대한민국 군인. 1948년 여순사건 발생 당시 진압에 나섰다. 1951년 ‘거창민간인학살사건’에 대한 조사를 방해한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으나 대통령 특사로 석방된 후, 경찰로 이직했다. 치안국장 재직 시절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1956년 9월 28일)의 배후로 밝혀져 파면 뒤 구속되었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당뇨병으로 병보석(1961년) 된 후 병이 악화되어 사망하였다.
5. 뜨락 - 뜰
6. 가생이 - ‘가장자리’의 방언
7. 1951년 2월 9일부터 11일까지 국군이 경남 거창군 신원면 일대에서 비무장 민간인 719명을 학살한 ‘거창민간인학살사건’을 말함. 3월 29일 국회에서 거창 출신 국회의원 신중목에 의해 사건의 진상이 폭로되었고, 3월 30일 합동조사단이 구성되었다. 4월 7일 합동조사단이 신원면으로 오던 중, 김종원 대령이 부하들을 공비로 위장 매복시켜 합동조사단의 접근을 방해하였다. 이로 인해서 김종원은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으나 대통령 특사로 석방된 뒤 경찰로 이직했다.
8. 이엄이엄 – 끊이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가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
9. 학감(學監) - 이전에, 학교에서 교육에 관한 사무와 학생들에 대한 감독을 맡아 하는 직책이나 그 직책의 사람을 이르던 말
10. 이우정(李愚貞, 1923~2002) - 조선 16대 인조의 셋째아들 인평대군의 후손. 1940년 경기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46년 조선신학원에 입학하였다. 1951년 한신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 캐나다로 유학하여 토론토 대학교 내 임마누엘 칼리지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1953년 귀국고 동시에 한신대 교수로 부임하였다. 이후 여성운동가, 기독교 페미니스트, 인권운동가로 활약하였다. 1970년 한신대 학원민주화운동에 가담했다가 해직되었고, 1980년대 후반부터는 통일운동에도 참여하였다. 박정희 정권 시절에 ‘3ㆍ1 민주구국선언문’을 직접 낭독하기도 하였다. 1992년 대한민국 제14대 민주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장공김재준목사기념사업회 초대 이사장(2002년)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범용기 제2권] (41) 부산 피란 3년 - 남부민동에

2월 27, 2026
[범용기 제2권] (41) 부산 피란 3년 - 남부민동에

남부민동에

동대신동 집주인이 방을 비워달란다.

청산학원 일 년 선배인 권남선 목사가, 나와 우리 식구를 남부민동 자기 교회당 목사 사택에 옮겨준다. ‘마루’지만, 이부자리 덕분에 떨지는 않는다. 우리 식구뿐이니까 조용하고 안정된 분위기다.

음료수가 문제다. 원래가 높은 산 중턱에 억지로 매달린 동네라서 ‘수도’관은 한두 군데 밖에 박혀 있지 않다. 피난민으로서 수돗물 먹기란 하늘에 별따기다. 공동우물이 하나 있다. 수질은 맑고 차서 좋다. 그러나 물동이 행렬이 장사진을 쳤으니 우물물이 물동이에 담길 때까지는 한나절 걸린다.

뒷산 꼭대기에 약수터가 있다. 신자와 아내는 가파른 오솔길을 기어올라 물통이나 동이에 약수를 퍼 넣는다. 그 작업은 쉽기도 하고 시간도 덜 걸린다. 그러나 넘치는 물동이를 정수리에 이고 가파른 오솔길을 더듬어 내려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공동우물에 나가 ‘토백이’[1] 부인들로부터 욕먹는 것보다는 맘 편하다고 한다.



[각주]
1. 토백이 - ‘토박이’(대대로 그 땅에서 오래도록 살아온 사람)의 방언

[범용기 제2권] (40) 부산 피란 3년 - 프린스톤 학생들의 모금

2월 27, 2026
[범용기 제2권] (40) 부산 피란 3년 - 프린스톤 학생들의 모금

프린스톤 학생들의 모금

1ㆍ4 후퇴 때 미국 선교사들이 부산과 대구에 모여 왔다. 선교사회가 조직되었다. ‘아담스’가 총무, ‘킹슬러’[1]가 회계였던 것 같다. 본부는 대구에 있다.

킹슬러가 부산에 와서 나를 보자고 했다. 만났다. 킹슬러는, 프린스톤 신학교 학생회에서, 한국의 신학생들에게 보내는 구호금이라면서 금일봉을 내게 수교한다. 아무 꼬리표도 붙지 않았다고 했다. 그것이 ‘한신’ 개강을 희망적으로 추진시킨 동력의 하나가 됐다. 학생들의 숙식을 마련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킹슬러는 엉큼하게 자기 나름대로의 조건을 붙여보려고 한다.

“김 목사도 이제부터는 한국 교회의 화평을 위해서 우리와 의좋게 합해봅시다….”

“당신은 프린스톤 신학생들의 뜻을 따라 ‘무조건’으로 그 금액을 우리 신학생에게 전달하는 것으로 사명을 완수한 것이 아니겠소! 다음 얘기는 한국 교회 전체에 얼키고 설킨 복잡한 문제니 두고두고 풀어봅시다….”

킹슬러는 내가 프린스톤 있을 때 졸업반 학생이었고 한국 선교사 후보였기 때문에 내게는 무던히 친절했던 사람이다.

그의 신학은 Ulter-Fundamentalism이었다.



[각주]
1. 킨슬러(Francis Kinsler, 1904~1992 권세열) - 1928년 프린스턴 신학교 졸업하고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하여 평양선교부 소속으로 숭실전문학교에서 강의. 1940년 일제에 의해 추방되었다가 1948년 재내한하여 장로회 신학교 교수로 신약 신학을 강의하고 1952년 장로회신학교 교장 대리직 수행. 한국전쟁 당시 군목제도 창설과 운영에 공헌함.

[범용기 제2권] (39) 부산 피란 3년 - 갈 뻔 했던 제주도

2월 27, 2026
[범용기 제2권] (39) 부산 피란 3년 - 갈 뻔 했던 제주도

갈 뻔 했던 제주도

인민군의 총반격 때문에 피난민은 초조했다. ‘동’으로 단양까지, ‘중부’로 밀양까지, ‘서부’로 통영까지 인민군에게 점령됐다. 이제 부산 입성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피난교회의 ‘시국대책위원회’에서는 목사와 그 식구들은 제주도에 옮기기로 하고 당장 부두에 나오라고 급보한다. 그때 ‘안병부’도 부산피난 중이었다. 그의 주선으로 우리 식구는 너절한[1] 보따리를 꾸려들고 부두에 나갔다. 인간이 어찌나 많은지 그지없이 천해보였다. 장로들이 반발한다. “양떼를 버리고 저만 살겠다고 앞서 도망하는 목자가 어디 있느냐!”

안병부[2]와 나는 목사들 축에 끼어 서지도 못하고 변두리 높은데서 보기만 하고 있었는데, 안병부는 껄껄대며 말했다.

“선생님, 우리 도루 들어갑시다. 우리는 부산에서 새 길을 찾아봅시다. 제주도에 가면 귀양살이 같아서, 기회가 와도 놓치고 말겁니다….”

그래서 나는 부산서 신학교를 계속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각주]
1. 너절하다 – 하찮고 시시하다. 깔끔하지 않고 허름하며 지저분하다.
2. 안병부 목사는 조선신학교 제4회 졸업(1944년)하였고, 1954년 신암교회에서 이양학 장로를 모시고 성암교회를 창립하여 초대 목사(1954~1956년)로 사역하였다. 1956년에 소천하였다.

[범용기 제2권] (38) 부산 피란 3년 - 인민군이 부산가까이 까지

2월 27, 2026
[범용기 제2권] (38) 부산 피란 3년 - 인민군이 부산가까이 까지

인민군이 부산가까이 까지

공산군의 총반격에 밀린, 미군 일선 사령관 ‘워커’[1] 중장은 소위 ‘성공적인 철군 스케쥴’을 짜고 있었다.

자기부터 솔선수범한다는 뜻이었는지는 몰라도 그는 황급하게 찦차로 도주한다.

미국 군인의 희생을 덜기 위한 ‘철군’이었을 것이다. 그리고서 함포와 군용기로 무차별 폭격을 시도할 작정이었을 수도 있겠다. 어쨌든, 그는 도망 중에 차 사고로 길바닥 시체가 됐다.

그때 나는 별로 하는 일도 없고해서 공연히 부산 거리를 헤매기도 하고 용두산[2]에 올라가 ‘항도’의 전경을 눈 아래 펴보기도 했다. 바로 눈앞에 대마도가 둥실 떠 있다. “대마도가 왜 일본 판도에 들어야 하나” 하고 혼자 분개하기도 했다.

나는 ‘뉴스’ 탐문에 열중했다. 신문은 모조리 사 들고 다닌다.

‘워커’의 자리에는 ‘릿지웨이’[3]가 임명 됐단다. 나는 모르는 이름이었다. USIS[4]도서실에 가서 잡지들을 들춰봤다.

‘릿지웨이’는 벌써 취임해 있었다.

그는 부하 장교들을 불러놓고 자기의 작전 계획을 피력했다.

“나는 후퇴하러 온 것이 아니라 싸우러 왔다. 후퇴는 죽기보다 싫다. 여러분도 군인이니만큼 후퇴는 싫을 것이다. 자, 이제부터 우리 다같이 군인답게 싸워서 이기자!”

그리고 그는 그의 작전 방향을 제시했다.

김빠진 맥주 같이 시그러졌던[5] 장교들은 용기를 되찾았다. 사기가 드높았다.

릿지웨이는 한 동네, 한 고을씩 점령하는대로 적성 인물이나 부역자를 처리하고 질서를 세워 후환이 없게 한 다음에 다음 동네에 진군한다. 말하자면 깨끗한 청소작업이라 하겠다.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후방교란’은 없다. 전라도에서 제일 많은 희생자가 났단다. 인민군이 낙동강 하류에서 도강하여 전라도 일대를 휩쓸어 통영까지 가는 동안에 살해된 민주 시민, 국군이 북상하여 전면 반격할 때 부역 또는 좌익 시민에 대한 보복 살해 등등으로 인명희생이 극심했다 한다. 그건 국련군의 직접 행위라기보다도 민간인의 격정과 ‘악을 악으로 갚는’ 보복 행위 때문이 아니었던가 싶다.



[각주]
1. 월턴 해리스 워커(Walton Harris Walker, 1889~1950) -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미국 제8군 사령관으로 재임 도중에 교통사고로 순직하였다.
2. 용두산(龍頭山) - 조선시대에 초량소산((草梁小山), 송현산(松峴山)으로 일컬어졌고, 1876년 부산항 개항 후에는 소산(小山 ), 중산(中山) 등으로 불렸다. 용두산이란 이름이 처음 등장한 것은 1878년 일본 자료인 조선귀호여록(朝鮮歸好餘錄)에서다. 용두산 정상에 있는 용두산 신사는 신사참배를 강요한 1935년 이후 부산에서 일본인들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으며, 광복한 지 3개월이 지났으나 멀쩡하게 남아 만주에서 귀환선을 타기 위해 부산으로 모여든 일본인들의 집결소로 쓰이고 있었다. 1945년 11월 17일 토요일 오후 6시 민영석(당시 36세)에 의해 불태워졌다.
3. 매튜 벙커 리지웨이(Matthew Bunker Ridgway, 1895~1993) - 워커 중장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후에 후임 사령관으로 부임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전쟁상황을 유리하게 돌리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듣는다.
4. 주한 미공보원(United States Information Service)
5. 시그러지다 – 사라지거나 없어지다

[범용기 제2권] (37) 부산 피란 3년 - 조봉암 만나보고

2월 27, 2026
[범용기 제2권] (37) 부산 피란 3년 - 조봉암 만나보고

조봉암 만나보고

그후부터 ‘의정’ 군을 자주 만나게 됐다. 그는 조봉암[1]과 가까운 사이었다.

하루는 조봉암과 나를 자기 집에 초청하여 ‘디너’를 같이하게 한다.

나는 조봉암을 처음 만났다.

‘거물’이라는 인상은 없었다.

졸랑졸랑[2] 말이 많고, 까부는 축이라고 느꼈다.

‘의정’은 나를 쳐다보면서 “나라 일은 우리 형님이나 조 선생 같은 이가 맡아 하실 것이고 우리 장사꾼은 시키는 대로 심부름이나 하지요.”

‘의정’은 나와 조봉암을 합작시키는 역할을 시도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됐다.

말하자면 여기서도 ‘좌우합작’이 맥박치는 것이었을까!

조봉암은, 공산주의자로 몰려 교수형을 받았다.

그후 측근자들은 그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최대 인물로 추앙하는 것이었다. 역시 뭔가 비범한 데가 있었을 것이다.



[각주]
1. 조봉암(曺奉岩, 1899~1959) - 호는 죽산. 일제시기 사회주의 항일운동을 하였으나, 광복 후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였고, 초대 농림부장관과 국회부의장을 역임하였다. 1954년 2대 대통령 선거에서 11.4%로 낙선하였고, 1958년 3대 대통령선거에서 신익희 후보가 사망한 상황에서 30%의 득표로 2위를 기록하여 이승만의 눈엣가시가 되었으며, 1958년 1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1959년 7월 사형이 집행된다(이후 2011년 1월 대법원의 무죄판결로 복권되었다).
2. 졸랑졸랑 – 몸집이 작은 사람이나 동물이 가볍고 방정맞게 자꾸 까부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 액체 따위가 이리저리 가볍게 자꾸 흔들리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

[범용기 제2권] (36) 부산 피란 3년 - 동대신동에서

2월 27, 2026
[범용기 제2권] (36) 부산 피란 3년 - 동대신동에서

동대신동에서

부산 피난 초기였다. ‘부산’이라는 ‘가마솥’(釜) 같이 옴폭한 밑굽에 이북, 서울, 일본 등지에서 수십만 인간이 몰려들었으니 거처할 집, 먹을 음식, 입을 옷, 모두모두 ‘금싸래기’였다.

하루는 거리에서 ‘김의정’을 만났다.

그는, 내가 20대 청년으로, 공부한답시고 서울에 있을 때, 서울에 왔었다. 경성(境城)고보 2학년에서 무슨 이유로였는지 퇴학했다. 그래서 서울에 왔다. 귀여운 소년이었다.

중앙고보에서 2학년 보결생을 뽑는다길래, 거기에 ‘원서’를 냈다.

편입시험 날짜가 다가온다. 암만해도 자신이 없단다. 내가 ‘대리시험’을 치기로 했다.

그 무렵에는 원서에 사진 붙이는 일도 없었다. 나도 물론 편입원서를 냈다. ‘의정’ 군의 원서와는 번호가 다른 것뿐이다.

나는 시험장에 들어갔다. 시험문제는 어렵지 않았다. 대뜸 썼다. 번호는 내가 ‘의정’ 번호를, ‘의정’은 내 번호를 적었다.

발표 날, ‘의정’의 번호가 ‘방’(榜)에 붙었다. 그래서 그는 중앙고보 4학년까지 남 못잖은 성적으로 올라갔다. 또 무슨 이유였던지 4학년에서 중퇴했다.

그후 그는 청진의 신흥재벌인 김기덕[1] 상사의 무역부 전무로 등용되었고 지금도 그 직위에 있다가 부산에 내려온 것이었다. 얼굴도 잘났고 체구도 거대하다.

그는 나를 ‘형님’이라 부른다.

“어떻게 지내느냐”고 묻기에 근황을 얘기했다.

“그럴 수 있느냐”면서 거간꾼[2]을 불러 동대신동에 4조방 하나를 얻어준다. 집세는 ‘전세’로 여섯 달치를 그가 선불한다.

어느 소학교 선생 집인데 한 방을 세놓는 것이다. 우리는 꼬마 식구들과 함께 한 방에서 자고 신자는 벽장 다락에서 잔다. 아이들은 동대신동 공립소학교에 전입학했다. 부엌이 있으니 천생 숱불 풍로[3]로 세끼를 끓여 먹는다. 찐빵 따위로도 식사를 때운다.



[각주]
1. 김기덕(金基德, 1892~1953) - 해방 이후 고려흥업주식회사를 창립한 실업가. 호향인 청진에 청덕학교와 청덕전기학교를, 서울에 한성실업학교를 설립하였다. 동생 김기도를 와세다대학에 입학시켰고, 후일 그를 통해 많은 독립운동자금도 헌상하였다. 광복 후 월남하여 고려흥업주식회사를 창립, 중석(重石)의 해외무역을 착수해 성공하였다.
2. 거간꾼 – 물건을 팔고 사는 사람 사이에서 흥정을 붙이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
3. 풍로(風爐) - 화로의 한 가지. 석유나 전기 등으로 불이나 열을 내어 음식을 만드는 도구

[범용기 제2권] (35) 부산 피란 3년 - 항서교회당에 짐 풀고

2월 27, 2026
[범용기 제2권] (35) 부산 피란 3년 - 항서교회당에 짐 풀고

항서교회당에 짐 풀고

이북 민주 시민의 남하, 서울 시민의 부산 피난은 일종의 ‘민족 이동’이었다. 기독교 신앙으로 본다면 ‘Exile’이라 하겠다.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생활과 비슷한 유형이다.

이번에는 미국 선교사들이 앞장서서 교직자와 그 가족과 신도들의 피난을 주선한다. 출발 날자와 운반할 기차도 미리 교섭하여 우리에게 통고한다.

어찌나 갑작스러웠던지 우리는 그야말로 ‘허둥지둥’ 하찮은 보따리 몇 개와 이부자리를 꾸려 들고 정거장에 달려갔다.

기차가 떠나기는 했지만, 가지는 못한다. 황소걸음[1]이다. 차 안에는 의자고 마룻바닥이고 짐 얹는 실겅[2]이고 없다. 모두 사람의 밀림이다. 기차 지붕 위도 사람으로 덮였다. ‘기차’가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덩어리’가 움직이는 것이었다.

너무 갑작스레 출발 명령이 내렸기에 금호동 식구들에게 알릴 틈도 없었다. 그러나 정거장에 나와 보니 그들도 나와 있었다. 맏딸 ‘정자’가 재빨리 손쓴 것이 아니었던가 싶다.

기차는 여전히 굼틀[3]거린다. 그러나 종착역까지의 ‘스케쥴’은 없다. 식사가 문제다. 길가 농가에 들어가면 보리밥일망정 아낌없이 준다. 쌀도 있기만 하면 ‘선물’로 주기도 한다. 빈집이 있으면 누워서 잔다.

대구에서 많이 내렸다. 그러나 부산행이 거의 전부다. 초량에서도 내린다. 우리는 부산까지 간다.

부산에서는 교회당을 ‘피난민 수용처’로 내놓았다. 우리는 김길창[4] 목사 교회 마루에서 숱한 선착(先着) 피난민틈에 끼어 하룻밤을 샜다. 며칠 있었다.



[각주]
1. 황소걸음 – 황소처럼 느리게 걷는 걸음
2. 실겅 - ‘시렁’(물건을 얹어 놓기 위해, 방이나 마루의 벽에 두 개의 나무를 가로질러 선반처럼 만들어 놓은 것)의 방언
3. 굼틀 – 몸이나 그 일부를 구부리거나 비틀며 움직이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
4. 김길창(金吉昌, 1892~1977) - 일제강점기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 경남교구장, 조선기독교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한 목사, 교육사업가, 친일반민족행위자. 1932년부터 1969년까지 37년 동안 부산 항서교회를 섬겼다. 동아대학 설립이사장(1945년), 부산연합신학교 설립(1962년)하였다.

[범용기 제2권] (34) 부산 피란 3년 - 1ㆍ4 후퇴

2월 27, 2026
[범용기 제2권] (34) 부산 피란 3년 - 1ㆍ4 후퇴

1ㆍ4 후퇴

1950년 6월 27일에 미국 대통령 트루먼[1]이 ‘국련’ 결의를 거치지 않고 대만 해협에 미국 제7함대를 파견한데 대하여 많은 ‘국련’ 가맹국과 국제여론이 악화됐다.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사이에 어떤 예측 못한 중대 사태가 일어나지 않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1950년 9월 30일에 ‘주은래’[2]는 “미 제국주의 침략군이 북위 38도선을 넘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침범하는 경우에는 중국의 안전이 위협되는 사태가 되기 때문에 중국은 방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고 경고했다.

1950년 9월 30일에 인도 정부는 북경주재 인도 대사의 보고를 받고, 국련군이 38도선을 돌파 북상하는 경우에는 중국과의 전쟁을 유발할 위험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그런데 1950년 10월 1일에 국련 산하의 한국군이 38선을 돌파하고 북진했다.

1950년 10월 30일에 ‘주은래’는 북경주재 인도 대사에게 “한국군 이외의 외국 군대가 38선을 넘어오는 경우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지키기 위하여 군대를 파견한다”고 통고했다.

1950년 10월 8일에 국련군은 38선을 돌파하고 북상하여 같은 달 하순에 ‘초산’, ‘혜산’[3] 등 국경지대에 진출했다.

1950년 11월 11일 중화인민공화국은 성명을 발표했다.

“미국은 중국 침략의 죄를 범했다. 조선에서의 미국의 조치는 중국의 안전보장을 위협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은 침략자인 미국과 그 추종자가 그들의 침략 행위를 중지하고 그들의 침략군대를 철수하기를 단호히 요구한다. 침략이 중지되지 않는 한, 침략에 대한 반대 투쟁은 결코 중지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1950년 10월 25일에 중국 인민의용군은 조선전선에 출동했다.

1950년 11월 25일 공산군 총반격이 개시됐다.

1951년 1월 5일에 공산군은 서울을 점령하고 남하했다.

1951년 1월 4일 서울 시민은 거의 전부가 ‘남’으로 후퇴했다.

이것이 이른바 1ㆍ4 후퇴다. 나는 그보다 앞질러 부산에 내려가 있었다. 왜냐하면 이번에는 서울 시민을 몽땅 대구, 부산 등지에 옮기고 서울을 맘대로 폭격하는 것이 미군의 전략이었기 때문이다.



[각주]
1. 해리 S. 트루먼(Harry S. Truman, 1884~1972) - 전임자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4선으로 취임한 지 한 달 만에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 제34대 부통령(1945년)이 된지 82일 만에 제33대 대통령(1945~1953년)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항복을 받았고,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항복을 받았으며,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핵무기를 전쟁에서 사용하라고 명령한 국가원수이다.
2. 주은래(周恩來, 저우언라이, 1898~1976) - 마오쩌뚱의 뒤를 이어 중화인민공화국 제2대 주석(1954~1976)이 됨.
3. 혜산(惠山) - 함경남도 북쪽 끝에 있는 군

[범용기 제2권] (33) 통일에의 갈망 – 6ㆍ25와 9ㆍ28 - 도농에서 서울에, 다시 부산에로

2월 27, 2026
[범용기 제2권] (33) 통일에의 갈망 – 6ㆍ25와 9ㆍ28 - 도농에서 서울에, 다시 부산에로

도농에서 서울에, 다시 부산에로

강원룡[1]과 그 식구도 도농에 피난해 있었는데 처음에 정거장 건너편 마을에 방을 얻고 살았다. 그러다가 마감판에 우리 동리에 왔다. 방공호 속에서 찬송하고 예배하며 몹시 초조해 했다.

도농이 해방되던 이튿날 나는 서울로 간다. 강원룡은 아직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면서 만류한다.

나는 떠났다. 길가에는 국군 헌병의 검문소가 5리에 하나쯤은 있는 것 같았다.

‘목사’라니까 신임하고 보낸다. 신양섭도 같이 간다. 머리를 박박 깎았기 때문에 인민군으로 의심받아 까다롭게 묻는다. 나는 우리와 고난을 같이하던 우리 집안 식구니 내가 책임진다고 다짐한다. 그는 해방을 위한 숨은 일꾼이었다고 했다. 무사하게 동대문 밖까지 왔다. “서울이 다 탄줄 알았더니 그렇지도 않구먼!” 하고 혼자 중얼거리며 걸었다.

동대문에 들어서자 서울은 없다. 오장동에 갔다. 재와 흙과 기와조각 벽돌부스러기로 된 벌판이었다. 맏딸애 집이 어느 쯤이었던지 짐작이 안 간다. 나와 아내는 여기쯤일 것이라고 멍하니 서 있었다. 어디서 왔는지 맏딸 ‘정자’가 나타나 “우리 다 살아 있어요!” 한다.

얘기는 이러했다.

“병원은 이층집이었는데 동리 사람들과 함께 병원 지하실에 모여 있었다. 불 혀가 지하실 천정을 훑는다. 정자는 만삭이 지난 몸으로 지하실 들창을 부수고 기어올라, 꼬마 딸 혜림을 끄집어냈단다. 그리고 동쪽 신작로로 뛰다가 길가 패인데 빠진 대로 한참 있었다. 남편 신영희 의사는 부상하고 쓰러진 동민들의 응급치료에 정신없이 돌아다니다가 갑자기 자기 집이 타는 것을 보고 뛰어와서 불 속으로 마구 들어가려는 참이었다. 식구들을 건지려는 것이었다. 정자가 소리쳤다. ‘우리 다 나왔으니 이리오라’고.”

그래서 모두 살았다는 것이었다.

원래 ‘오장동’이란 데는 일제시대의 ‘하나마찌’(花町)[2]이어서 가난한 농촌 조선 아가씨들을 ‘인육장사’하는 일인들이 사다가 ‘우리’ 속에 가둬놓고 밖에는 휘황찬란한 전등으로 오색구름 같이 꾸민다. 젊은이들의 ‘울적’[3]을 발산시킬 고장이 거의 없었던 때라, 청년들은 공창가, 사창가를 산보삼아 거닌다. ‘화정’ 변두리에는 ‘색주가’[4]도 많다. ‘북청집’이니 ‘함흥집’이니 하는, ‘광목’[5] 조각에 쓴 가호(家號)가 너풀거린다. 거기서는 주로 막걸리, 소주, 돼지순대 따위를 판다.

그 옆에 있는 호화판 공창가를 지나가노라면 아가씨들이 달려나와 억지로 ‘납치’한다. 술상이 들어온다. 안주도 있다. 얼근[6]해지면 자리에 눕는다. ‘화대’(花代)는 꽤 비싸다. 못 내면 그 아가씨의 빚이 된다. 아가씨들은 오래 있을수록 빚이 는다. 그래서 계약기간이 연장된다. 어떤 넉넉한 젊은이가 정이 들어 ‘속량’해 내기 전에는 평생 풀릴 길이 없다.

‘오장동’이란 그런 고장이었다.

‘유엔군’의 주력부대 중 하나는 오장동 뒷산 넘어서 한강을 건너 곧장 오장동에 진입한다. 미군의 응원폭격이 거기에 집중됐다. 주로 소이탄[7]이었다. 삽시간에 하늘에서 내리는 유황불에 잿더미가 됐다. 한 채의 집도 없었다. 나는 다시 소돔ㆍ고모라 얘기를 연상했다.

어쨌든, 신 의사와 정자는 불타는 아궁이에서 끄집어낸 ‘타다 남은 부지깽이’같이 구원되었다. 만삭된 날짜보다 한달이나 늦게사 정자는 첫 아들을 낳았다. 지금 한양공대 연구실에서 일하고 있는 ‘민섭’[8]이다.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도중에 낫대서 내가 ‘민섭’이라 이름했다.

아내와 나는 동자동 우리 집에 찾아왔다.

다 부서지다가 부엌과 작은 안방과 6조짜리 거실과 옆에 붙은 길쭉하고 좁은 곳간방이 남았다. 8조 다다미방도 몰골은 남아 있었다. 변소 모새기 아름드리 살구나무는 허리가 부리진대로 죽지는 않았다. 정원의 덤부사리[9] 나무는 제멋대로 자라서 담장을 넘었다.

나는 그 살구나무 부러진 가지를 베여 도끼로 장작을 팬다. 장작가리[10]가 뒤뜰 담장 밑에서 날마다 자란다. 그것도 취미였다. 신자가 6조 다다미 방에서, 혜원은 옆 곳간방에서 잔다. 나머지 식구들은 작은 안방에 몰아 넣었다.

도농에 피난 갈 때 마루 밑에 감췄던 책들은 한 절반씩 썩다 남았다. 쓸모가 없었다.



[각주]
1. 강원용(姜元龍, 1917~2006) - 1917년 7월 함경남도 이원군에서 태어났다. 1931년 개신교에 입교했고, 같은 해 차호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만주 북간도 용정의 용정중학에 진학, 윤동주 문익환 등과 친분을 가졌으며, 브나로드 운동에 참가했다. 그후 북간도 은진중학교에 수학하면서 은사 김재준을 만났다. 1935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메이지 학원 영문과에서 수학하고 1940년 일본 메이지 대학 영문학부를 졸업한 뒤 만주에서 전도사로 활동하였다. 1943년 일본 경찰을 피해 북간도에서 은거하다 1944년 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어 수감되었고, 옥중에서 단식 끝에 결핵으로 석방되었다. 1945년 해방 후 김재준 목사가 경동교회를 설립할 때 참여하였으며 한신대학교에 입학했다. 1946년 김규식과 인연으로 좌우합작위원회에서 활동하였다. 1947년 12월에는 민족자주연맹 기획담당 책임자로 참여하였다. 단선 실시 후에는 정치에서 물러나 1948년 한신대학교를 졸업, 1949년 11월 김재준의 후임으로 경동교회 목사로 부임한다. 기독청년연합회 정치부장을 지내다 1953년 도미하여 캐나다로 유학, 1954년 캐나다 매니토바대학에서 신학박사학위를 받고 1956년 미국 유니언신학대학을 거쳐 1957년 미국 뉴스쿨대학교대학원을 졸업한 뒤 귀국하였다. 귀국 후 1959년 ‘크리스천 아카데미’를 설립하여 강의, 세미나, 학술대회 등을 주관하였다. 1961년 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 실행위원 및 중앙위원이 되었다. 1972년 박정희의 유신에 반대하여 1974년 김수환, 함석헌 등과 함께 민주회복국민회의에 참가, 대표위원에 피선되었다. 1980년 8월 국정자문위원에 임명되었고, 1981년 WCC 중앙위원회에 참석하였다. 1986년 한국기독교 100주년기념사업협의외 대표회장에 피선되었다. 1986년 경동교회 목사직을 은퇴하고, 1986년 아시아종교인평화회의 의장, 한국종교인평화회의 회장 등을 역임했다.
2. 화류계, 유흥가, 유곽
3. 울적(鬱積) - 불평불만이 발산되지 않고 겹쳐 쌓임
4. 색주가(色酒家) - 젊은 여자를 두고 술과 몸을 파는 영업을 하는 집
5. 광목(廣木) - 무명 올로 당목처럼 폭이 넓게 짠 베
6. 얼근하다 – 술에 어지간히 취하여 어렴풋하다
7. 소이탄(燒夷彈) - 사람이나 건조물 등을 화염이나 고열로 불살라서 살상하거나 파괴하는 폭탄이나 포탄
8. 신민섭 - 신영희 장로의 아들, 2001년 성호교회 장로로 임직하였다.
9. 덤부사리 – 여러 개의 덤불이 어수선하게 엉켜있는 수풀. 충북지방의 방언이다.
10. 장작가리 – 장작을 한데 모아 수북하게 쌓아올린 큰 덩어리

[범용기 제2권] (32) 통일에의 갈망 – 6ㆍ25와 9ㆍ28 - 국련군의 서울 탈환

2월 27, 2026
[범용기 제2권] (32) 통일에의 갈망 – 6ㆍ25와 9ㆍ28 - 국련군의 서울 탈환

국련군의 서울 탈환

1950년 9월 25일.

맥아더 장군의 인천 기습상륙으로 인민군 대열은 허리가 끊어졌다. 패잔병이 되어 이북에로 도망친다. 그 도망부대에서 탈락된 인민군은 농군의 삼베옷을 얻어 입고 빌어먹으며 북향 길을 걷는다.

무기 없는 군인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9월 28일에 국련군은 서울을 탈환했다.

그날 밤, 보름달이 유난스레 밝았다.

나는 도농 언덕 능선에 업데서[1] 서울 쪽을 바라본다. 작은 산, 큰 산이 가로 세로 엉켜서 서울은 안 보인다. 그러나 서울 하늘은 보인다. 불빛에 하늘이 탄다(火光衝天)[2]는 표현 그대로였다. 온통 불바다였다. 그 타오르는 불바다에 내리꽂히는 불화살이 벼락을 친다. “우르쿵, 쿵쿵” 먼 우뢰 같이 둔하고 뭉쳐진 음향이다.

‘저 불 속에서 살아남을 인간이 하나라도 있을까’ 싶었다.

나는 소돔ㆍ고모라의 멸망의 날을 연상하며 아브라함의 하소연을 되새겼다.

거의 무감정 상태가 된다. 멍하게, 남의 일 보듯 한다. ‘물 건너 화재’ 구경이랄까, 큰딸 정자는 남편인 신영희 의사와 함께 오장동에서 산다. 정자는 만삭된 무거운 몸으로서 어떻게 지내나 싶었다.

도농역과 그 건너편 마을에도 미군폭격이 치열했다. 내가 사는 지금리는 역에서 걸어서 15분쯤 거리다. 지금리 주민들은 조금 치벽한[3] 도농 골짜기 빈 집에 옮겼다. 그 집 주인은 교회 집사였는데 피난가고 집이 비어 있었다. 농가에는 소먹이 마른풀이 집더미처럼 싸여 있다. 거기 몸을 파묻으면 추운 줄 모른다. 나는 마른풀데미[4] 위에 누워 미군폭격기 급강하 광경을 쳐다보고 있었다.

동민들은 꽤 높은 도농 막츠기 언덕을 넘어 저쪽 골짜기에 일시 피신한다면서 나도 같이 가자고 한다. 춘우 아버님이 인솔자였다. 고개 마루에까지 올랐다. 목적지인 동리가 눈 아래 보인다. 춘우 아버님이 혼자 가서 정탐하고 온다.

그의 보고는 실망적이었다. ‘거기에는 진짜 빨갱이 집이 네 호나 있어서 위험천만’이란 것이었다. 우리는 도루[5] 오다가 어느 농가에서 밤을 샜다. 늦은 가을밤, 냉돌[6]이라 밤새도록 소금만 구웠다.

들리는 것은 기관총소리 뿐이다.

“저게 인민군 기관총일까, 국군 기관총일까?”

아침 일찍 나는 어린 식구들을 올망졸망[7] 데리고 춘우네 집으로 간다. 총탄이 하늘 공중을 제비처럼 날아간다.

춘우 삼촌과 춘우 두 분이서 깊숙하게 파놓은 방공호에 들어가서 밖에 나가지 않기로 했다. 방공호는 출입구에도 덮개가 있고 안에는 기둥새우고 판자로 벽을 두르고 멍석도 깔고 두세 집 식구가 앉아도 그리 비좁지 않게 돼있었다. 밥은 숱불로 익힌다. 연기 나면 당장 표가 나기 때문이다.

춘우 삼촌은 딴 동네인 자기 집에 나갔다가 파편에 맞아 엉덩뼈가 부서졌다.

그 다음날에던가 도농도 해방됐다. 그동안 신양섭은 우리 집에 와 있었다.

정거장 옆 언덕 능선을 왔다갔다하는 병정이 보인다. 저게 국군일까 인민군일까. 신양섭은 “제가 가 보고 오겠습니다” 하고 논두렁을 타고 그리고 간다. 곧 돌아왔다.

“미군이었습니다. 어제 밤에 도농 인민군은 다 도망하고 국군이 점령했답니다. 밤새도록 나던 기관총 소리는 국군의 기관총이었답니다.”

도농에 진주한 국군은 곧장 도농 막치기 고개 너머에 있는 마을을 포격하여 그 동네는 전멸됐다고 한다. 우리가 피난 가려던 바로 그 고장이다.

결국 도농도 완전 해방됐다. ‘부역자[8] 처단’이란 새 문제가 등장한다.

나와 내 식구들에게 자기 집 문깐방을 제공하고 신변을 보호해 준 이학우 군은 ‘동책’으로, 이북시찰까지 갔다 온 청년이니, ‘부역자’란 딱지가 붙을만도 했다.

그는 안절부절 몸 둘 데를 몰라 했다.

이제부터는 내가 그를 보호해야 할 처지였다. 나는 우선 집에 숨어 있으라 했다. 마루 밑에 숨겼다. 며칠 지나 그는 몸부림친다.

“여기서 부역자로 죽을 바에는 차라리 이북 가서 ‘빨갱이’로 살겠다. 나는 간다” 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선다.

나는 그를 부여잡고 늘어진다.

“이북에까지 갈 수도 없을 것이고 설사 간다셈 치더라도 남에 내려갔던 네 큰형 춘우와 지리산에 출전한 네 둘째 형 창우가 돌아온 다음에 의논해 할 것이다. 그때까지 참아라. 그리고 그때까지의 네 신변은 내가 책임진다….”

그래서 겨우 붙잡아 놓았다.

나는 동민들의 진술서랄까 증언이랄까를 초했다. 요지는 다음과 같다.

“학우는 결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가난한 집 자식도 아니다. 맏형은 『리더스다이제스트』 한국판 책임자고 둘째 형은 지리산 토벌대장인 국군헌병 소령이다.

그런 가운데서 부모와 식구들과 가산을 지키려면 물샐틈없는 위장전술이 필요했다.

그는 동네에 위험한 일이 생길성 싶으면 미리 알려 대처하게 했다.

보라, 이백여 호 되는 큰 동네에 소나 돼지, 닭 한 마리, 쌀 한말인들 수탈된 일이 있었는가? 모두가 ‘학우’의 지혜로운 작전에서 거둔 열매다. 그는 애국자였고 부역자가 아니었다….

심사당국의 신중한 고려를 바란다.”

그 밑에 동민 전체가 서명날인하고 내가 증인으로 서명해서 파출소장에게 직접 제출했다.

파출소장은 “그러면 형들이 올 때까지 사건 처리를 연기한다”고 대답했다.

한 열흘 됐을까, 둘째 형인 헌병소령(?) 창우가 와서 찦차로 ‘학우’를 자기 병영 안에 옮겼다.



[각주]
1. ‘엎드려서’
2. 화광충천(火光衝天) - 불빛이 하늘이라도 찌를 듯이 그 형세가 맹렬함
3. 치벽하다 – 외진 곳에 치우쳐서 구석지다
4. 데미 - ‘더미’의 방언
5. 도루 - ‘도로’의 방언
6. 냉돌(冷堗) - 불기 없이 찬 온돌방
7. 올망졸망 – 작고 도드라진 것들이 고르지 않게 벌여 있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 몸집이 작고 귀여운 아이들이 많이 있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
8. 부역자(附逆者) - 국가에 반역하는 일에 가담하거나 편드는 사람

[범용기 제2권] (31) 통일에의 갈망 – 6ㆍ25와 9ㆍ28 - 도농에서

2월 27, 2026
[범용기 제2권] (31) 통일에의 갈망 – 6ㆍ25와 9ㆍ28 - 도농에서

도농에서

‘학우’는 큰 형과 둘째 형이 모두 인민군의 숙청대상자에 해당되느니만큼, 집을 보존하고 부모와 동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철저한 변장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는 충성을 보였다. 그래서 ‘동책’인가 됐다. 밤낮 지시가 온다. 동민을 자기 집 뜰 앞에 모여 놓고 ‘지시’사항을 결의시킨다. 미군 폭격 때문에 다리는 연방 부서진다. 그러면 동민은 새벽까지 수선해야 한다. 이북 군수품 수송로기 때문이다. ‘눈감고 아웅’ 하는 식의 ‘지시대로의 결의’, 당장 보내야 할 부역반(賦役班) 편성 등으로 새벽 세시쯤에야 헤어진다. 말하자면 들볶아서 딴 생각 못하게 하는 시책인 것 같았다.

동네에 소 몇 마린가 조사하러 나온다는 날에는 온 동네에 소를 숨기라고 미리 알린다.

나는 문간방[1]에 있길래 들창[2]너머로 그 광경을 목격한다. 그러나 어느 모임에는 나를 참여시키는 일은 없었다. 철저하게 숨겨주는 것이었다.

호구조사 나온다는 날이면, 나와 우리 식구에게 미리 통고한다. “멀찌감치 가서 어느 옥수수 밭에 숨어 계십시오…”

도농에 피란해 있는 우리 식구는 절량[3]상태에 들어간다.

아내는 서울 동자동 집에 차근차근 쌓아 놓는 장작을 시장에서 쌀로 바꿀 수 없을까 싶어 들어갔다. 신자가 같이 갔다.

장작으로 쌀을 바꾼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망상이었다. 아내는 혼자서 도농에 돌아왔다. “신자는 어디 있느냐”고 나는 물었다. 경기도 시골에 옷가지를 가지고 쌀 바꾸러 갔다는 것이었다. 나는 새파랗게 질렸다.

“폭탄이 장마철에 비 오듯 하는 데 어쩌자고 아이를 혼자 보낸단 말이냐?”

“박봉랑 박사랑 ‘니하까’[4]를 끌고 그리로 간다길래 부탁해 보냈다”는 것이다.

며칠 후에 신자는 쌀 두 말을 이고 지고하면서 도농에 왔다. 그 얘기가 희안하다.[5]

쌀 실은 구루마[6]가 수백 대 줄지어 어느 언덕 신작로를 가는데 갑자기 미군기가 저공 기총소사[7]를 퍼붓더란다. 급히 언덕을 굴러 몸을 숨긴 곳을 콩밭이었단다. 요란하던 기총소사 소리도 멈칫한[8] 것 같아 정신을 차리고 언덕을 기어 올라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입고 길가는 수라장[9]이었다 한다. 나무바퀴가 달린 장난감 같은 ‘니하까’는 이미 바퀴가 물러앉아 쓸 수가 없게 되어 거기서부터 도농까지 이고 지고 안고 하면서 쌀 두말을 가져왔노라는 것이다.

나는 다윗의 망명 때 얘기를 연상했다.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 블레셋 지방 동굴 속에 피신했을 때, 광야라 마실 물이 없었다.

“아 내 고향 맑은 샘물을 한 모금 마셔보고 싶구나!” 하고 탄식한다.

부하 한 사람이 몰래 듣고 블레셋 군대의 포위망을 뚫고 나가 샘물 한 통 떠갖고 왔다.

다윗은 감격했다. 그러나 그는 말했다.

“이것은 물이 아니라 네 피다. 내가 어찌 네 피를 마시겠느냐?” 하고 여호와의 제단에 관제물로 부었다….

쌀 두말을 앞에 놓고 나는 생각했다.

“이것은 ‘쌀’이 아니라 신자의 ‘살’이다. 내가 어찌 네 살을 먹겠느냐?”하고도 싶었다. 그러나 나는 다윗 같은 영웅도 아니고 그런 ‘드라마’를 연출할 여유도 없었다. 그리고 목숨 걸고 가져온 신자의 성의에도 찬바람을 불어넣는 것이 될 것이었다. 이럭저럭[10] 우리 식구는 그것으로 한 달 가까이 연명했다.

하루는 내 큰 조카 ‘이용’이 이북에서 서울에 출장 와서 우리 식구를 만나자고 기별해 왔다. 맏딸 정자네 위층에 오겠다고 했다. 아내와 나는 40리를 걸어 그리고 갔다. 그는 노동당의 노동부장 직책을 갖고 있노라 했다. 그는 중학 2년 때부터 좌경이었고 동경법정 대학 정경과 재학 중에는 사회주의 교수들의 강의를 치우 듣고 친교를 갖고 있었다.

일제 말기에는 철저한 변장으로 시종하여 하얼빈 금융 합작사 간부로 있었다. 그러나 이북이 공산화되자, 그는 내 세상이 왔다고 ‘데뷰’해서 노동당 노동국장까지 치솟았다. 그는 ‘연안파’[11]였다.

그를 만났을 때, 신 의사는 수원에 피신 중이었고 정자가 맏딸 혜림과 같이 집을 지키고 있었다.

가족끼리 모이니 ‘창꼴집’에서 자랄 때의 그와 다른 티가 하나도 없었다. 나는 ‘역시 피가 물보다 진하단 말이 옳구나!’ 하고 혼자 생각했다.

그때 다섯 살 된 혜림에게 노래를 시킨다. 혜림은 어린이 찬송가를 불렀다.

조카는 손뼉을 치면서도 “무슨 그런 노래를 하니!” 하고 혼잣말 같이 뇌였다.[12] 신 의사가 인민군의 의사 징발을 피하여 수원에 숨었을 때다. 조카는 “이런 난리 속에 아내와 어린 자식을 두고 저만 피신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나무람[13]도 한다. “사내자식이 비겁하다”는 뜻일 것이다.

나더러는 “아재씨[14]도 이북 오시면 극진한 우대를 받게 됩니다….” 하고 은근히 월북을 권하기도 한다.

그는 내 조카들 중에서도 머리 좋고 센스가 빠르고 재치 있는 좌익 지성인이었다. 그러나 후에사 알았지만, 그는 연안파 숙청 때 희생된 것으로 듣고 있다.

아내와 나는 서울 갔다가 도농으로 돌아오는 길에 대왕천 다리 바로 못미처 길가 버드나무 밑에 앉아 쉬고 있었다.

대왕천은 꽤 큰 시내다. 다리 둘이 나란히 서 있다. 기차 다리와 인도교다. 철교도 터널 바로 입구에 있다.

미군기가 날아와서 터널 속에 폭탄을 쏴 넣는다. 그리고 철교 위에 까만 폭탄 알을 낳아 팽개친다. 폭격기 배때기[15]가 철교에 닿을락 말락 낮게 내려와 알은 낳는데도 하나도 바로 맞지 않는다. 인도교와 철교 사이 물속에 떨어져서 모래를 태산 같이 인도교 위에 퍼 올린다. 우리는 아름드리 버드나무에 등을 대고 구경한다. 파편이 여기저기 날아온다. 바로 우리 밭 앞 논두렁에도 날아온다. 그래도 우리는 무사했다.

그런 판국에 파편이 우리 살에는 박히지 말하는 법이 없다. 폭격기가 멀리 달아나자 우리는 인도교 젖은 모래 위를 걸어 도농 길에 나갔다.

나는 역시 “하느님이 보우하사…”를 되새기며 집에 왔다.



[각주]
1. 문간방(門間房) - 대문간의 바로 옆에 있는 방
2. 들창 – 벽의 위쪽에, 위로 들어올려 열도록 만든 작은 창문
3. 절량(絶糧) - 양식이 다 떨어지는 것
4. ‘리어카’
5. 희안하다 - ‘희한하다’(보기에 매우 드물거나 신기하다)의 비표준어
6. 구루마 - ‘수레’(사람이 타거나 짐을 실어나르는 용도로 바퀴를 달아 굴러가게 만든 운송수단)의 비표준어
7. 기총소사(機銃掃射) - 항공기에서 땅 위로 표적을 비로 쓸어 내듯이 기관총으로 쏨
8. 멈칫하다 – 하던 일이나 동작을 갑자기 멈추다
9. 수라장(修羅場) - 아수라왕(阿修羅王)이 제석천(帝釋天)과 싸운 마당, 싸움이나 기타의 이유로 혼란에 빠져 모든 것이 뒤범벅이 된 곳. 또는 그러한 상태
10. 이럭저럭 – 정한 바 없이 되어 가는 대로 이러저러하게, 알지 못하는 동안에 어느덧
11. 연안파 – 중국 연안을 중심으로 항일투쟁을 하다가 해방 후 입북한 조선의용군 출신의 정치집단으로 김두봉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김일성의 빨치산파와 대립하다가 한국전쟁과 ‘8월 종파사건’으로 축출되었다.
12. 뇌다 – 조그만 소리로 거듭해서 말하다
13. 나무람 – 어떤 말이나 행동에 대해서 야단처 꾸중함
14. 아재씨 - ‘아저씨’의 방언
15. 배때기 - ‘배’를 속되게 이르는 말

한국기독교연합회 제12회 총회 총대제위께 고함

한국기독교연합회 제12회 총회 총대제위께 고함 이 문서는 한국기독교연합회(N.C.C) 제12회 총회 당시 기독교장로회(기장) 대표들이 총대들에게 전하는 공식적인 입장을 담고 있다. 기장 측은 예수교장로회(예장)와의 분열 이후 회원권 행사 과정에서 겪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