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법
예레미야 22장 3-7절 / 1985년 12월 10일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 인권위원회 / 인권주간 연합예배
[회상 노트]
12월 10일은 UN이 정한 세계인권의 날이다. NCC 인권위원회는 매년마다 12월 10일까지 1주일을 인권주간으로 정하여 같은 주제를 가지고 전국 여러 지역에서 집회를 가지곤 했다. 1985년의 주제는 ‘악법 철폐’였다. 나는 당시 인권위원회 부위원장이었고, 서울 지역 연합예배 강연을 맡았다.
고문과 폭력으로 집권한 불의한 정권이 온갖 법을 만들어 국민을 옥죄고 있었다. 법치를 내세워 국민을 억압하고 반대 세력을 탄압했다. 하나님의 통치도 법치다. 하나님의 법정신을 밝혀 보고 싶었다. 하나님의 법은 민중을 살리는 법이요, 모두가 더불어 살아가게 하는 법이라는 사실을 밝히고자 했다.
[슬라이드]
[설교 전문]
여러분께서 아시는 대로 12월 10일은 국제연합이 선포한 ‘세계인권선언일’이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인권위원회는 지난 8일부터 15일까지를 올해의 인권 주간으로 설정하고 전국 교회가 국민의 인권을 위하여 기도해 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 이 기간 동안 8일 목포 지역을 시발로 하여 전국 26개 지역에서 이와 같은 인권 연합예배를 드리게 된다
인권위원회는 매년 1회 전국의 교회 지도자들이 모여 인권문제전국협의회를 개최한다. 지난 6월에 모였던 올해의 협의회에서 크게 두 가지 문제에 대하여 인권 차원에서 우리의 힘을 쏟아 붓기로 했다. 그 하나는 고문과 폭력에 대한 저항이요, 다른 하나는 여러 악법을 철폐시키고 하나님의 법을 실현하자는 것이었다. 물론 이 시대에 민생의 문제가 심각한 것을 간과하여 버리는 것은 아니다. 노동자, 농민, 도시 빈민의 울부짖음을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계실 것이다. 왜 이러한 결정을 한 것인가?
돌이켜 보건대 고문과 폭력, 나아가서 그에 의한 용공 조작 사건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독재’라는 접두사가 붙었던 정권은 어느 정권을 불문하고 정권 안보를 위하여 고문, 폭력, 심지어 용공 조작까지 자행하여 왔다. 중정 부장을 지낸 김형욱의 자서전에 의한다면 그간 간첩으로 발표되었던 자 중에 진짜 간첩은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의 말을 다 믿을 수는 없다. 그러나 무고한 간첩도 있었다는 시사를 우리는 충분히 얻는다.
현 제5공화국은 그 시작 처음부터 폭력에 힘입은 바 컸으며 지금까지 줄곧 폭력에 의한 힘의 정치를 하고 있기 때문에 새롭게 큰 걱정거리가 되게 된 것이다. 10ㆍ26도 폭력적 거사였다. 폭력 저지를 위한 최후의 수단이었다고 하지만 우리의 역사가 꼭 그런 방법으로 전환되어 갈 수밖에 없었느냐 하는 점에서 안타까움 또한 금할 수 없다.
그 이후 소위 12ㆍ12 사건, 명동 YWCA 사건 때의 수사 기관의 무차별적인 폭력 수사 사건, 그리고 우리 역사상 결코 잊혀지지 않을 5ㆍ17 광주 사태 등 폭력 사건이 이어지고 그 연속선상에서 제5공화국이 들어서게 된다. 우리 국민은 해방 당시 혹은 일제나 북한 공산 정권이 아닌 우리 정부에 의해서는 결코 경험해 보지 않았던 몸서리 쳐지는 폭력의 시대를 경험하게 되었다. 700명이 넘는 구속자를 내게 되었다. 박 정권 말의 2배가 넘는다.
나 역시 명동 사건 때 계엄사에 끌려가 내 인격이 땅에 내동댕이침을 당했다. 짓이겨 대는 것과 같은 모욕적인 폭언을 들었다. 옛날 이야기에서나 듣던 사형수 앞의 망나니를 연상케 하는 폭행조에 의하여 난타를 당하였다. 물론 나의 경우는 다른 사람의 경우와 비교한다면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가벼운 것이었다. 어떤 교수는 너무 두들겨 맞아 걸을 수가 없었고, 조사실로 옮겨갈 때는 기어서 가야 했다. 그는 지금도 당시 자신은 인간이 아니라 개였다고 되뇌인다. 이런 식으로 제5공화국은 출발하였다.
폭력에 의하지 않고서는 정권 장악이 불가능했다면 그 정권은 국민에 의한 정부가 아니다. 국민을 위한 정부일 수 없다. 더군다나 국민의 정부는 아닌 것이다. 처음부터 이 정부는 불행의 씨앗을 배태했던 것이고 지금은 그 악의 씨에서 수많은 악의 열매가 열려 이렇게 곤혹스런 시대를 살게 된 것이다.
우리 인권위원회에 보고된 올해에 일어난 심각한 폭력, 고문 사태만도 23건에 이르고 있다. 학생, 노동자, 농민, 성직자, 언론인 할 것 없이 모조리 주먹으로 다스리겠다는 정부의 의지가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다. 당국은 절대로 폭력, 고문은 없다고 거듭 말한다. 그러다가 급기야 유언비어를 날조하는 자를 색출하여 엄벌하겠다는 당국의 발표가 있게 되었다. 그것도 폭력이다. 고문을 당하고 잔혹 행위를 당한 사람한테 너 그 따위 말을 하면 유언비어 날조죄로 잡아넣겠다고 을러댄다면 그것이 말인가? 그것은 흔히 있는 공갈이요 협박이다. 오히려 공갈협박죄로 다스림을 받아야 할 것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 지난 9월 1일에 ‘동아일보 편집국 기자 일동’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은 성명이 발표되었다.
“동아일보 편집부 기자 일동은 최근 언론인들이 당국에 잇따라 연행, 폭행당한 데 이어, 특히 지난 8월 30일부터 9월 1일 사이에 동아일보 이채주(李採柱) 편집국장과 이상하(李相河) 부국장 대우 정치부장 및 김충식(金忠植) 정치부 기자가 연행돼 가혹 행위를 당한 사실에 대해 분노한다. 우리는 당국의 언론인 인권 침해가 곧 언론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라고 규정하며, 이에 대해 언론이 이제까지 침묵하고 있었음을 반성한다. 이에 따라 우리는 당국이 이 같은 불법적 처사를 즉각 중단하고 최근 일련의 사태에 관해 해명하는 한편 납득할 만한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한다. 아울러 우리는 이 같은 사태가 그때 그때 보도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확인한다. 우리는 유사한 사태가 재발할 경우, 언론과 언론인을 위한 자위 노력을 기울일 것임을 다짐한다.”
이 성명이 날조일 리 없다. 오히려 고문, 잔혹 행위, 폭력이 없다는 당국의 호령이 날조인 것이다. 우리를 더욱 괴롭게 하는 것은 고문과 잔혹 행위를 통하여 반대자를 용공 분자로 조작해 가고 있다는 항의의 소리가 높다는 사실이다. 설령 용공 분자라 할지라도 잘 설득하고 유화하여야 할 것이로되 절대로 공산주의자일 수 없는 사람을 공산주의자로 만든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용공 조작이라는 용어 자체가 이 땅에서 깨끗이 없어져야 한다.
더구나 민중의 지팡이를 자처하고 정의 사회 구현을 목표로 내건 경찰을 그 주역으로 악용하고 있다는 데 더 큰 안타까움을 갖는다. 고문과 폭력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고 막아 주어야 할 경찰을 고문과 폭력의 하수인으로 만들어 버렸다면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학생들은 자구책으로 화염병 같은 것을 만들어 던지게 되는 것 아닌가?
정부 당국은 이 학생들의 장난감 같은 무력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1984년에서 1986년 11월까지 최루탄 구입비 116억 7천여 만 원, 1987년 전투경찰 유지비 2,111억 원을 소비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와 6개 교단의 교단장들은 지난 5월 이후 성명을 냈거나 혹은 질의, 서한을 관계 당국에 여섯 차례나 보냈다. 급기야 6개 교단 교단장들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전국 교회에 목회 서신을 내고 우리 민중을 사랑하자고 호소하고 있다. 그 한두 부분을 읽으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세속 정치의 여와 야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거나 야거나, 어떤 세력일지라도 인간의 존엄을 박탈하는 일체의 시도를 우리는 불응하여야 합니다. 최근 이 땅에서 고문과 잔혹 행위가 자행되고 있다는 항의가 있는가 하면 당국은 이를 극구 부인합니다. 그러나 논란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이 시대의 윤리가 무너지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을 고문하고 살해하는 것을 반대합니다. 고문과 잔혹 행위는 인간의 인격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며 살인 행위로 귀결되는 비인도적 처사입니다. 결국 고문이나 잔혹 행위는 하나님께서 창조해 주신 이 나라와 민족을 금수의 사회로 전락시키는 커다란 범죄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오늘날 한국 교회 교인의 수는 거의 전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합니다. 이렇게 많은 교인들이 있음에도 고문과 잔혹 행위가 자행되고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 추궁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여기 “이 시대의 윤리가 무너지고 있다.”는 표현이 나온다. 지난 11월 30일자 어느 신문 기사한 대목을 읽겠다.
“여기에 윤리가 있는가? 여기에 양식, 양심, 이성이 있는가? 누가 우리 경찰들을 이 모양으로 만들었는가? 경찰을 폭력과 고문의 하수인으로 주저없이 써먹더니 급기야 이 모양으로 만들고 말았다. 이 책임을 누가 질 것인가? 정부 당국자는 크게 뉘우쳐야 할 것이다.”
고숙종 여인의 고문 사태, 김근조 씨의 고문 치사 사건 등이 사회에 충격을 주게 되자 당국은 서둘러 고문을 근절하는 법적 장치를 강화했다. 우리는 이것이 국민에 대한 속임수가 아니기를 바랐다.
“형법 125조(폭행, 가혹 행위) 재판, 검찰, 경찰, 기타 인신 구속에 관한 직무를 행하는 자, 또는 이를 보조하는 자가 그 직무를 행함에 당하여 당사 피의자 또는 기타 사람에 대하여 폭행 또는 가혹한 행위를 가한 때는 5년 이하의 징역과 10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한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당사자의 가족들이 고문, 폭행, 용공 조작을 즉각 중지하라고 외쳐도, 그렇게도 기민한 이 나라의 경찰이나 검찰 누구도 이 사실을 수사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형법 125조는 귀걸이요 목걸이 정도의 사치품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아니 국회 도둑을 막는 과정에서 밀고 제치고 한 것을 그 스스로 인지하여 폭행죄로 다스리겠다고 나오는 당국, 추호의 폭행도 이 사회에 용납하지 않으려는 당국이, 왜 서울제일교회의 폭력 사건을 구경만 하는 것이며, 왜 수사 기관의 고문, 폭행, 용공 조작에 대하여는 인지의 촉각을 속이는 것인가?
이제는 경찰이나 검찰을 쳐다볼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우리의 권리를 찾아야 한다. 세계인권선언 제5조에 있는 대로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잔학하고 비인도적인 혹은 불명예스러운 처우나 형벌을 받지 않는다.”라고 우리도 당당하게 선언하자. 우리의 이 선언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고문을 가하거나 잔학하고 비 인도적인 혹은 불명예스러운 처우나 형벌을 가한다면 그는 우리 인간의 사회를 금수의 사회로 전락시킨 죄를 하나님으로부터 심판받게 될 것이다.
여기 하나님의 말씀 세 곳을 봉독하겠다.
예레미야 22장3절 이하의 말씀이다.
“법과 정의를 실천하고, 억울하게 착취당하는 사람들을 건져 주며, 더부살이와 고아와 과부를 괴롭히거나 학대하지 말라. 그런데 너희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 이제 너를 사막으로 만들고 그림자도 비치지 않는 성으로 만들리라. 너를 짓부술 사명을 주어 사람들을 보내리니, 저들은 저마다 도끼를 들고 보기 좋은 너의 송백 기둥을 찍어 불에 넣을 것이다.”
마태복음 5장 10-11절의 말씀이다. 구속자 가족 여러분은 특별한 위로를 받으시기를 바란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들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나를 위하여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받으면 너희가 복이 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너희보다 먼저 온 예언자들도 이와 같이 박해를 받았다.”
고린도전서 4장 8절 이하의 말씀이다.
“우리는 아무리 짓눌려도 찌부러지지 않고 절망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으며 궁지에 몰려도 빠져 나갈 길이 있으며 맞아 넘어져도 죽지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음을 몸으로 경험하고 있지만 결국 드러나는 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내가 오늘 드리는 말씀의 두 번째 토막으로 넘어가겠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을 거슬러 사람의 존엄을 해치고 있는 폭력과 잔혹 행위를 우리의 삶에서 철폐시키고 하나님의 법의 실현을 기하자는 말씀이다.
현 당국은 1980년 10ㆍ12 비상계엄 하에서 신헌법에 대한 국민투표를 강행하고 10ㆍ27 제5공화국 헌법을 공포하였다. 그 헌법 부칙 조항을 발동하여 국회를 폐쇄하고 모든 정당을 해산시키고 일체의 정치 활동을 금지시킨 후 초헌법적 기구인 소위 국가보위입법회의라는 것을 만들었다. 여기서 약 5개월 만에 215건의 법안을 통과시켜 버렸다. 그들은 이것을 개혁 입법이라 부르고 있으며 이 법안들은 고칠 수 없다고 버티고 있다. 신국가보안법, 언론기본법,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노동관계법, 대통령 선거법, 국회의원 선거법, 사회보호법 등 최근 악법이라고 규탄받고 있는 것은 모조리 이때에 통과시킨 것들이다. 이제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은 집회자들이나 시위자들을 보호하는 법이 아니라 도대체 아예 집회나 시위를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어떤 집회나 시위라도 경찰서장의 자의적 판단에 의하여 불허토록 되어 있다. 서장이 “못 한다” 하면 그것으로 고만이지 재고를 요청하거나 불복할 수 있는 절차도 없다. 경찰서장 절대다. 일반적으로 판사는 검사의 기소 내용을 그대로 판결문에 삽입하고 검사는 경찰서장의 기소 내용을 그래도 인정한다고 한다. 1982년 부산 미문화원 사건의 판결문, 즉 경찰서장의 판단일 수 있는 판결문을 보면 이런 대목이 있다고 한다. “수련인이여, 언제까지 사치 퇴폐를 계속하시겠습니까? 역사를 바로 봅시다.”라는 등의 낙서를 화장실 벽에 했다는 것이다. 수련은 부산여대의 상징 꽃이란다. 이것은 정치투쟁 구호도 아니고 정부가 그렇게도 듣기 싫어하는 민주주의 하자는 말도 아니다. 그런데 이것이 현저히 사회 불안을 야기시킨다고 해서 집회 및 시위의 선동이라고 판단하여 유죄 판결을 내렸다고 한다. 이것이 경찰서장의 판단에서 시작된 판결이다. 그래도 집시법은 경찰서장의 전횡이다.
집회 시위의 자유는 민주 사회의 불가결의 행위다. 그냥 놓아두면 매일 데모가 일어나서 사회 혼란을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할지 모르겠다. 데모를 해야만 될 사안을 만들지 않으면 안 할 것이고, 또 사안이 있다면 집회도 하고 시위도 해야 민주국가라 할 수 있을 것 아닌가? 그래서 국민의 의사도 수렴이 되게 될 것이다. 민주국가라하면 그래도 머리띠를 하고 허리에 띠를 두르고 걸어가는 정도의 시위가 있어야 멋이 있지 않겠는가? 집시법은 반대파의 일체의 집회 시위를 근원적으로 봉쇄하자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제목을 바꾼 긴급 조치 9호다.
최근 중공에서 데모 때문에 정부 당국이 무엇 무엇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보도가 있어 의아하게 생각된다. 공산 전제주의라고 지탄받는 나라에서도 집회와 시위의 자유가 있다는 말인가?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라고 자부하는 나라인데 집회와 시위의 자유가 없다는 말인가? 이런 상황에서 억울하고 약한 사람들은 어떻게 자기 주장을 하고 자기 권리를 옹호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노동관계법’의 특징은 무엇인가? 사회경제적 약자인 노동자들을 위한 제3자의 어떤 노력도 불가능하게 만들어 놓았다. 노사 당사자들 외에는 노동쟁의에 개입할 수 없다 해 놓았으나 관권은 개입하도록 했으니 이것을 어찌 공평한 법이라 할 수 있겠는가? 조합 설립 요건도 대폭 강화시켜 어지간해서는 노조 결성을 생각해 볼 수도 없게 만들었다. 사용자가 부당 행위를 했을 경우에 그를 처벌하는 규정도 없다. 단지 원상 회복만 할 수 있게 해 놓았다. 어느 회사에서 사용자가 노동자를 조합 활동을 했다 해서 해고시켰을 때에도 근로기준법 상에는 처벌 규정을 두고 있지 않다. 노동관계법이라면 철저히 노동자의 권익을 옹호해야 하겠는데 정반대로 사용자의 권익만을 옹호하는 방향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러면서도 복지국가니 정의 사회를 말하니 한심한 노릇이다.
‘신국가보안법’을 보자. 이 법으로 공산당을 규제하고 처벌하자는데 이의가 없다. 그러나 이 법은 최근 우리의 학생들을 잡아 넣는 주무기가 되어 버렸다. 간첩죄, 범죄단체 조직죄 등을 다스리는 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의적이고 확대하여 해석함으로써 정치적 반대자를 국가보안법 위반자라는 사회적 극형을 가하는 데 사용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언론기본법’을 보자. 정보청구권이라는 것이 있어서 정부가 정보를 은폐하려 할 때 언론기관이 정보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훌륭한 법률이 우리나라의 언론기본법에 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 권한을 행사하여 국민의 알 권리에 충실했다는 사례는 단 한 건도 없다. 반면에 수없이 많은 표현물들이 압수되고 유수한 계간지가 폐간이 되는 등 부정적인 기능의 대부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 언론기본법이다. 정보청구권이니 취재원 보호 조항이니 하는 화려한 조항은 사실상 사문자에 불과한 것이고, 신문, 라디오, TV 등을 옥죄어 정부의 시녀 역할에 충실하게 하는 결과를 빚고 있는 것이 언론기본법이다. 또 바로 어제 ‘창작과 비평사’ 자체의 허가를 취소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것들이 소위 개혁 입법이라는 것들이다.
이제 정치와 관련된 헌법 부분을 잠시 보자. 대통령 직선제와 장기 집권의 방지 그리고 군부의 정치 개입 반대라는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국민적 합의를 무시한 현행 헌법 등도 그 성격에 있어서 개혁 입법의 범주에 속한다.
80년 1월 16일 동아일보에 실린 국회 개헌 특위 첫 공청회 기사의 머리글을 보자. “대통령 중심제, 직선 압도적”, “임기 4년 1차 중임 주장” 이런 내용들이 있다. 그러나 국민적 합의에 반한 조항들을 담은 채 현행 헌법은 우리의 헌법이 되어 버렸다. 금번 국회에서 개헌 특위에 대한 찬반 토론이 있었다. 제일 중요한 쟁점은 권력 발생을 대통령 직선제에 의할 것이냐, 간선제에 의할 것이냐다. 어떻게 해야 국민의 의사가 살아나는 민주화를 정착하게 될 것이냐는 것이다. 현행 간선 방법으로라도 얼마든지 정권 교체가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분도 있었다. 그런 분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1988년에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평화적 정권 교체가 될 것이라고 호언한다.
사실 민주주의가 되어 있느냐 하는 것을 단적으로 시금할 수 있는 것은 그 제도가 간선이든 직선이든 ‘선거의 자유’가 있느냐, 정권 교체가 가능하냐 하는 것을 분간해 보는 것이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관건이다. 우리나라도 관권, 경찰권, 행정력이 선거에 전혀 개입되지 않고 야당 후보에 대한 아무런 압력도 없는 자유로운 상태에서 선거를 할 수 있다면 아마도 지금 제도로서도 정권 교체가 가능할 것이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도 전두환 후보 외에 여러 명이 입후보하였다. TV 화면에 나와 정견을 발표하기 위해 얼굴에 화장도 하고 새 옷을 맞추어 입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중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내가 미친 놈이지’라고 자조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겠는가? 또 그 중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경쟁자로 여겼겠는가? 고급 들러리 이상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겼을 것임이 틀림없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분들의 인격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분들에게도 하나님께서 남겨 놓으신 양심이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하여간 지금의 정치 풍토와 정권자의 양식에 변화가 없는 한 간선제는 논의할 여지도 없다. 직선제로 개헌하고도 관권, 경찰권, 행정력의 개입을 국민 스스로가 피나게 감시하여야 비로소 국민의 뜻을 세워 나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사람이 모여 사는 곳에는 반드시 합리와 질서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강자에 의하여 무시되거나 깨어져 버리곤 한다. 그래서 생긴 장치가 법이라고 생각한다. 법과 상식이 무시되는 현실을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고 개탄한다. 주먹은 강자를 뜻하고 법은 그러므로 약자를 보호해야 된다. 말하자면 법의 근본 정신은 약자를 보호하고 강자를 제어함으로써 합리와 질서를 세워 가는 것이다.
앞에서 거론한 것같이, 그러나 소위 개혁 입법들은 하나같이 약자를 규제하고 강자 편에 서는 원칙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제5공화국 이후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생존권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었고 지금도 그렇다. 저들의 울부짖음은 즉각 갖가지 법의 통제와 제어에 휘말리게 된다. 그래서 지금 신음과 울부짖음, 아우성이 약자들의 가슴 속에, 이 사회 구석구석에 한으로 쌓여 가고 있다. 법이 약자를 보호하지 않기 때문이다. 법이 강자의 이익의 시녀로 전락해 버렸기 때문이다. 법을 고쳐야 한다. 입법과 법의 개정은 당연히 국회의 일이기 때문에 이 모든 모순을 시정해 나가게 되기를 기대하여 국민들은 지난 2ㆍ12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당의 배에 가까운 65%의 표를 야당에 모아 주었다. 그러나 선거법이라는 요술 상자에 들어갔다 나오더니 오히려 표를 적게 얻은 여당이 54%의 의석을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민심이 천심이라는 말이 있는데 만약 그렇다면 오늘 우리나라의 법 중 많은 부분은 민심을 거스르고 있으며 그것은 천심을 거역하는 것이고 곧 하나님을 반역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이 악법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법이란 무엇인가? 우리 기독교 신앙의 뿌리를 찾는다면 아마도 출애굽 사건이 될 것이다. 이 사건의 사회경제적 의미는 무엇인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탈출하였다는 이집트는 당시에 강대한 나라였다. 그 부와 힘을 쌓는 데 희생당했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하비루’라고 불리는 계층을 이루게 되었다. 그들은 노예 계층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을 감독하는 감독관들, 귀족들이 하비루의 희생 위에 풍요를 구가하며 살고 있었다. 여기에 심한 사회적 갈등과 충돌이 일어났다. ‘히브리’라는 말은 바로 이 ‘하비루’에서 연유하였다고 한다. 부와 강함이 있는가 하면 하비루들의 신음과 아우성과 울부짖음이 있었던 것이 이집트의 사회현상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고역을 견디다 못하여 신음하며 아우성을 쳤다. 이렇게 고역에 짓눌려 하나님께 울부짖으니 하나님께서 그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 이스라엘 백성을 굽어 살펴 주셨다”(출 2:23-25).
“나는 내 백성이 이집트에서 고생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억압을 받으며 괴로워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이제 내려가서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아귀에서 빼내어 … 젖과 꿀이 흐르는 … 땅으로 데려가고자 한다”(출 3:7-8).
바로 이와 같은 신음, 아우성, 울부짖음이 차 있는 사회를 버리고 새로운 가치의 세계를 이룩하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사건이 출애굽 사건이다. 야훼는 노예로 살고 있던 저들을 이끌어 내시어 새 세계를 이루어 가고자 하셨던 것이다.
가나안 땅에서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그저 한 민족, 혹은 한 계층이 독립하여 산다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아우성과 울부짖음, 신음이 없는 사회를 이루어 나가자면 이렇게 살아라 하고 주신 법률들이 있다. 성서의 구도대로 한다면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에 정착하기 전 시내산에서 이 법률들을 주시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이다. 그 법률들은 그러므로 가나안 공동체의 비전이요 이상이었다. 물론 기원전 13세기, 12세기, 8-7세기, 6세기에 이어오면서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성서 기록의 구도는 적어도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면 가나안 공동체의 비전-법률들의 내용은 어떤 것이었는가? 가나안에 정착하게 되면 역시 계층이 생겨나게 될 것을 전제한다. 그러나 가난한 자가 빚 때문에 부득이 노예가 된 경우, 노예 기간을 6년으로 제한하고 있다. 7년째에는 자유인이 되도록 하라는 것이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를 학대하지 말라”(출 22:21).
“과부와 고아를 괴롭히지 말라. 너희가 그들을 괴롭혀 그들이 나에게 울부짖어 호소하면 나는 반드시 그 호소를 들어주리라”(출 22:23).
“너희 가운데 누가 어렵게 사는 나의 백성에게 돈을 꾸어 주게 되거든 그에게 채권자 행세를 하거나 이자를 받지 말라. 만일 너희가 이웃에게서 겉옷을 담보로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반드시 돌려주어야 한다”(출 22:25-26).
“너희 땅의 수확을 거두어들일 때, … 모조리 거두어들이지 말라. 거두고 남은 이삭을 줍지 말라. 너희 포도를 속속들이 뒤져 따지 말고 따고 남은 과일을 거두지 말며 가난한 자와 몸 붙여 사는 외국인이 따 먹도록 남겨놓아라”(레 19:9-10).
“너희는 이웃을 억눌러 빼앗아 먹지 말라. 품값을 다음날 아침까지 미루지 말라”(레 19:13).
대개 이런 내용들이다. 이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경제적, 사회적 약자들을 보호하는 법령들이다. 약자가 강자와 함께, 강자가 약자와 함께 사는 평등 사회를 지향하고 있다. 재판 소송에 대한 경우도 약자를 보호하고 있다.
“너희는 가난한 자가 낸 소송 사건에서 그의 권리를 꺾지 말아라. … 죄가 없고 올바른 사람을 죽이지 말고 악한 사람에게 무죄를 선고하지 말아라”(출 23:6-8).
십계명도 그 기본 이념은 고역과 신음, 아우성과 울부짖음이 없는 관계를 이룩함으로써 함께 사는 사회를 지향하는 것이다. 살인, 간음, 도적질, 허위 진술, 탐욕 등을 금지한 것은 개인의 윤리 생활에 그 표적이 있는 것이라기보다 서로 죽이지 않고 빼앗지 않고 거짓으로 몰아 세우지 않는 정의로운 사회를 의도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해방시켰다 함은 이집트 땅에서 해방되어 가나안 땅에 이주하여 살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민중이 살 수 없고 민족이 말살당하는 사회에서의 구원이요 해방이었다. 억눌러 빼앗고 억눌려 빼앗겨 울부짖던 사회에 종지부를 찍고 민중과 민족이 사는 사회를 지향했던 것이 출애굽의 사건이었다. 품값을 떼어 먹는 자의 횡포와 품값을 받지 못하여 울부짖는 노동자가 갈등하는 사회에서의 구원이 출애굽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이다. 하나님의 법은 민중을 위하여 그들을 주안점으로 하여 제정한 법이다. 하나님의 법은 민심을 바탕으로 한다. 요샛말로 하면 민주를 모든 것의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은 민족을 구하는 법이다. 하나님의 법은 그러므로 ‘민중, 민주, 민족’이라는 세 큰 축을 갖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법 정신에 위배되는 일체의 법을 ‘악법’이라 규정한다.
이 주제를 채택할 때 ‘악법 철폐’라는 구절을 넣을 것이냐 하는 문제로 긴 시간 토의를 했다. 그 말이 교인들에게 과격하게 들리고 따라서 경원의 원인이 될 것이라는 것이 빼자는 이유였다. 오늘 이곳에도 주제를 아예 쓰지 않은 것은 교인들을 의식해서가 아닌가 짐작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과 경륜에 반하는 법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악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을 반역하는 악법은 반드시 철폐되어야 한다. 민심을 거역하는 법은 반드시 철폐되어야 한다.
대통령은 국민이 직접 선출해야 한다. 나는 오늘날 수없이 많은 악법들이 있다는 것을 결코 개탄하지 않는다. 아무리 악법이 난무한다 하더라도 국민적 결단만 있다면 그것은 하루 아침에 휴지 쪽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국민을 억압하여 이긴 정권이 이 땅에 있어 본적이 없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아니 우리가, 아니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의 법 실현을 위하여 지금도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고문으로 그 길을 막고 폭행, 폭력으로 우리의 숨통을 옥죄어 온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기어코 당신의 법을 실현하시어 가나안 공동체를 여기, 한반도 한민족에게 이룩하시고야 말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저하지 말자! 머뭇거리지 말자!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될 때까지, 서로 위하는 마음 개울 같이 넘쳐 흐르게 될 때까지 우리의 성스러운 신앙의 투쟁을 이어 나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