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7:35] 따로 세움 받은 교회 - 1987년 6월 14일, 김상근 목사

따로 세움 받은 교회 

1987년 6월 14일 / 사도행전 7장 35절 / 향린교회


[회상 노트]

정말 굉장한 시위였다. 지금은 잔디밭이 된 서울 시청 앞 광장에 10만 명이 넘는 시위 군중이 운집했다. 6월 10일이 절정이었다. 정권의 폭력이 극에 달했을 때 우리의 민주화운동도 절정에 이르렀다. 6월의 그 엄청난 항쟁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나의 심정은 착잡했다. 시위는 성공하고 있었지만 쏟아진 최루탄이며,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한 민정당 전당대회며, 특히 연세대 학생 이한열 군이 최루탄에 맞아 숨을 거둔 사건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교회의 사회적 존재 의미’를 짚어 보고 싶었다. 그리고 기장의 역사적 사명감을 공유하고 싶었다.

6월 10일은 한국기독교장로회가 ‘새 역사’를 시작한 날이다. 공교롭다. 이 날을 기장은 총회 선교주일로 정하고 그 기간 주일에 모든 기장 교회는 같은 취지의 설교를 하도록 했었다. 나는 홍근수 목사가 담임하고 있는 향린교회 예배에서 설교했다.

나는, 1987년의 6ㆍ10대회와 기장의 ‘새 역사’를 선언한 날인 1953년의 6월 10일을 억지로 연결할 의사는 없다. 우연일 뿐이다. 그러나 그 우연 속에 담긴 ‘기장’의 존재 의미를 확인하고자 했다. 부질없는 짓은 아니었던 듯하다.


[슬라이드]
















[설교 전문]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창립일을 1953년 6월 10일로 삼고 있다. 그래서 6월 둘째 주일을 ‘총회 선교주일’로 전국 교회가 지키며, 우리의 고백의 연대와 일치성을 새롭게 하는 계기로 삼고 있다. 오늘 각 교회가 헌금하여 총회로 모아서 선교 사업에 쓰도록 예산을 세워 놓고 있다.

이 날을 기념한다 하여 우리가 자칫 교파주의나 독선과 아집을 강화하는 유혹에 빠져서는 아니 될 것이다. 사실상 교파라는 차원만을 말한다면 나도 향린교회 여러분과 함께 탈교파 입장에 설 것이다. 교파를 위한 교파, 족벌이나 씨족주의적 생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오늘 한국 교회 지도자들의 의식을 어떻게 개혁하느냐를 오히려 우리의 화급한 과제로 삼고자 한다.

나는 총회 선교주일, 교단 창립 기념주일에 우리가 또 다른 집단으로 존립해야 하는 이유를 묻고자 한다. 우리는 오늘 그 어느 때보다 착잡한 심정으로 이 예배에 나아왔으리라고 나는 짐작한다. 지난 6ㆍ10 대회의 상황, 그리고 그 수많은 최루탄의 남발, 경적과 애국가, 소등, 잠실체육관의 잔치가 대조를 이루었던 한 주일을 보내고 여기 왔기 때문이다. 또한 오늘이 국민운동본부가 연세대 이한열 군의 회생을 기원하는 날로 삼자는 날이기 때문이다.

이 민족에게 기독교가 전래되었을 때 이 나라는 봉건주의의 두꺼운 장벽에 포위되어 있었으며, 정치는 부패될 대로 부패되어 민중을 도탄에 빠트리고 있었다. 나라의 운세는 주변 강대국의 침략 정책에 휘말려 풍전등화와 같았던 바로 그때였다.

바로 그러한 때 하나님께서는 이 민족에게 기독교의 씨를 뿌리기 시작하셨다. 처음 복음을 들고 이 나라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두 계열이었다. 치유 사업이나 교육 사업을 펼쳐 나갔던 계열이 있었고, 직접 전도에 나서 개종 사업을 담당했던 계열이 있었다. 전자의 경우 광혜원, 시병원, 보구여관 등 서양식 병원을 개설하거나 예수교 학당, 이화학당, 배재학당 등 교육 기관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직접 전도에 나선 선교사들은 대개 청교도적이었고 경건주의적이며 근본주의적 신학을 추종하는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거의 비정치적, 비사회적, 영적 신앙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에 의하여 전도를 받고 개종한 그리스도인들은 반상(班常)과 남녀유별 등의 봉건 문화를 개혁해 나갔으며, 부패한 세도정치에 압살되어 가는 민중을 관리들의 탐학으로부터 스스로 보호하고 구하는 새로운 세력이 되었다. 또한 1905년에 을사조약을, 1907년에 정미조약을, 1910년에 한일합방을 당하는 일련의 비극적 나라 운명을 부둥켜 않고 기도하는 구국 신앙자들이 되었다. 그들은 나라 잃은 슬픔을 하나님께 호소하고 도움을 구하는 애끊는 기도의 제단을 쌓았다.

비정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선교사들에 의하여 전도를 받았으나 형성된 기독교는 반봉건, 반부패 정치, 반외세라는 당시의 민중ㆍ민족사적 과제에 직면해 섰었다는 것은 기적이 아닐 수 없으며, 민중ㆍ민족사적 교회를 일구어 냈던 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였다. 한국에 전래된 기독교는 소외된 민중에게는 평등과 자유의 종교로, 약하고 고난받는 백성에게는 의지와 구원의 종교로, 그리고 약소 민족으로서의 한국 백성에게는 희망의 종교가 되었던 것이다.

특히 일제의 침략 후에는 기독교가 독립운동의 본부가 되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독립협회, 신민회 등의 주동 인물이 모두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감리교의 상동교회 같은 교회는 독립운동의 요람지였다. 기어코 1919년 3ㆍ1 독립 만세 운동에서 한국 기독교는 주동적 역할을 담당해 냈다. 33인 중 16명이 목사였다는 사실보다 만세 현장에 나선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인들이었고 교회에서 만나서 운동에의 참여를 다짐했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와 같은 사실을 파악한 일제는 한국을 식민통치하는 데 가장 큰 장애 세력이 기독교라고 판단하고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시작했던 것이다. 3ㆍ1 운동 당시 제암리교회에 교인을 모으고 불살라 집단 살해를 감행한 일을 위시해서 안악 사건, 105인 사건 등은 기독교를 어떻게든 역사의 일선에서 밀어내고자 하는 기도였다.

그러나 그 뒤 곧 한국 교회의 암흑기가 오게 된다. 격심해져 오는 박해를 피해 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결국 소위 민족사, 민중의 현실에서 발을 빼는 경향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향이 일반화되면서 교회는 민족사적 과제가 무엇인가를 스스로 잊게 되었고, 민중의 고난에 동참하여 극복하기보다 그것으로부터 도피하는 타계적 신앙에 빠지게 되고 말았다. 나라가 어느 지경에 있거나 그것은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며, 민중의 고통이 심하면 심할수록 영적 신앙으로 빠져 들어가 내세의 축복이나 그리워하는 나약한 그리스도인들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때마침 1920년대 한국 사회에는 소위 신지식이 밀려들어 왔고 사상적으로는 사회주의 내지는 공산주의가 크게 대두하게 되었다. 급기야 고려공산당이 창당되었고 그들은 민중의 고통을 극복하고자 몸부림 쳤던 데 비해 교회는 점점 그 현실로부터 멀어졌다. 또한 독립운동의 주동 세력이 학생으로 옮겨져 교회는 그들과 아무런 연결조차 갖지 못하게 되었다. 교회는 민중으로부터, 민족으로부터 점차 멀어져 갔고, 따라서 민중ㆍ민족사적 교회라는 고귀한 전통은 퇴색되고 말았던 것이다.

급기야 일제의 기독교 탄압 정책이 성공 단계에 이르렀고, 결국 1930년대에 와서는 신사참배를 강요하기에 이른다. 민중을 떠나고 민족사를 망각한 교회,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 중생의 복음만을 중시하고 초자연적인 실제와의 교통, 지극한 동경과 경건과 신비의 열정에만 얽매인 교회는 일제의 강요를 이겨낼 힘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이 점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1938년 장로교 총회는 물론 강압적 분위기라 하지만 “신사는 종교가 아니고 신사참배는 애국적 국가 의식이며, 따라서 기독교의 교리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결의하게 되었다. 이에 항거하여 투옥된 교인도 많았고 50명에 이르는 교인들이 순교를 당했으나 그것은 대부분 근본주의적인 교리, 즉 우상 숭배에 대한 근본주의적 저항이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기어코 한국 교회는 1942년에 일본 기독교 조선 혁신 교단으로, 그리고 1945년에는 일본 기독교 조선 교단으로 예속되고 만다.

우리에게는 1945년 8ㆍ15 광복이라는 뜻밖의 은총이 주어졌으나 우리 교회는 건국을 위한 이념적이고 실제적인 아무런 공헌을 하지 못한채 오히려 교회 분열의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민족이 분단되는 그 순간에도 그것을 막을 힘도 역사적 눈도 갖고 있지 못하였다.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를 인식할 감각을 잃은 교회는 그저 교파 싸움에 소일하다가 6ㆍ25 동란을 만난다. 이것은 두말할 것 없이 민족 최대의 비극이었다. 또한 동방의 예루살렘이라던 평양, 그 많은 교회와 십자가를 버려두고 남한으로 피난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무엇인가? 북한 공산 정권의 잔인성, 교회 말살 정책에만 그 이유를 돌려 버려도 좋은 것인가? 이스라엘이 제구실을 하지 못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방 블레셋, 이방 바빌론 등을 들어 이스라엘을 치셨다. 민중ㆍ민족사를 떠난 한국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채찍으로 6ㆍ25를 해석한다면 지나친 주관적 해석일까? 그러나 불행하게도 6ㆍ25의 와중에서 한국 교회는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지 않았다. 민중ㆍ민족사적 교회로의 회귀가 거의 불가능할 것 같았다.

이러한 어둠의 역사가 진행되는 때 장로교로부터 추방당한 집단이 있었고, 그것이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이다. 우리가 추방되었던 기억은 결코 명랑할 수 없다. 그러나 결과론적 주장이 되겠으나 기장이라는 작은 공동체를 하나님께서 따로 불러 세우셔서 그것을 들어 한국 교회로 하여금 다시금 민중ㆍ민족사적 교회로 돌아갈 수 있게 하셨다고 믿는다.

모세 역시 오늘 본문에 보면 어느 누구도 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역사적 소임을 감당해 낼 수 있을 만큼 백성의 지지를 받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모세를 하나님께서는 … 지도자와 해방자로 세워서 보내셨다.”고 한 것처럼 나는 ‘기장을 하나님께서 이 시대의 지도자와 이 민족의 해방자로 따로 불러 세워 보냄 받은 교단’이라고 고백한다.

한국 교회는 1960년대 후반부터, 특히 1970년대에 들어와서 민중의 생존권, 독재 체제를 극복하고 민주화를 이룩해 나가는 일에, 그리고 쓰라린 민족 분단을 극복하는 일에 작은 참여를 하고 있다. 물론 교회 안에는 아직도, 교회는 그러한 문제에 관여하여서는 안 된다는 주장으로 악을 방조하고 돕는 세력이 엄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대세는 오늘 이 나라의 대세와 다름없이 민중ㆍ민족사적 교회로 제자리를 굳히고 있지 않은가?

한국 교회의 이 거룩한 선회에 우리 교단이 ‘화살의 촉’ 역할을 했다는 것을 나는 굳이 장황하게 말하고자 하지 않는다. 장공 김재준 목사님은 ‘기장’이 ‘화살의 촉’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한국 교회가 거룩한 선회를 한 이것이 지금 우리에게 긍지를 갖게 하고 있지만 동시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역사와 민중 앞에서 짊어져야 할 책임임을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왜냐하면 ‘기장’이라는 화살의 촉은 화살의 몸통인 한국 교회와 함께 내일을 향하여, 역사의 한복판을 꿰뚫고 가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향린교회당이 서 있는 이 자리가 이 사실을 자명하게 말해 주고 있지 않은가?

여러분은 지금 소위 전투경찰의 저지선 사이를 헤집고 여기까지 왔으며, 이 건너편 성당에서는 우리의 자녀들이 불안과 공포 속에서도 민주화를 외치며 벌써 5일째 농성을 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부딪쳐 오는 온갖 과제 앞에서 한국 교회는 어떻게 할 것이며, 기장은 제 소임을 어떻게 감당해 나갈 것인가?

우리는 민주화를 달성하고 나라의 정당성을 회복시켜야 한다는 민족사적 과제, 그것의 기로에 서 있다. 제1야당 당수가 집권당 대표를 향하여 ‘결재를 받아야 하는 사람과 난국 타개를 논의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했다. 집권당의 대표는 그 말을 받아 자신은 당 대표이기 때문에 당 총재에게 결재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면서 참으로 모처럼 명언을 했다. 당 총재도 국민에게 결재를 받는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4ㆍ13 조치, 체육관 대회, 거기서 자기들끼리 왕위를 선위하는 따위의 자신들의 결정에 대한 국민의 결재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사태를 야기시킨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국민의 주권 의식과 집권자들의 전근대적이고 군대식 대결 의식 사이에서 이 나라의 자유민주주의, 국민 주권의 확립은 사산과 순산의 갈림길에 놓여 있다. 박형규 목사님을 비롯한 국민운동본부의 주요 인사들이 대량 구속되고, 비상조치니 계엄령 선포니 하는 말이 집권당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국민에게 결재를 받겠다고 작정만 하면 이 모든 일이 풀리게 될 것인데도 그것을 거부한 채 온 국민을 불안하게 하고 역사를 다시 후퇴시키려 하고 있다. 국민을 결재권자가 아닌 적으로 간주하거나 군부대의 사병 정도로 취급하고 나오는 오늘의 현실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국민의 결재를 받는 구조를 창출할 것인가? 이것이 곧 민주화요 평화적 정권 교체다. 이러한 만족스런 분위기 가운데서 세계의 평화 제전인 올림픽을 열어야 한다.

나는 최근 이 세상이 어떻게 되겠느냐, 당신은 내용을 좀 잘 알고 있지 않느냐는 질문을 수없이 받는다. 어떻게 되겠느냐는 식의 질문은 주권자의 질문이 아니다. 주권자는, 어떻게 만들어 가겠는가를 결단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국민 하나하나에게 앞장을 서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일 것이다.

‘기장’이 또다시 화살의 촉’이 되어 오늘을 타개하고 내일을 창조해 내야 한다. 화살의 몸뚱이인 한국 교회로 하여금 주권재민 원리의 실현에 공헌할 수 있도록 우리가 바람을 맞고 비를 맞고 작고 큰 방해물에 부딪치면서라도 내일을 향하여 오늘을 찢으며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하여 우리를 따로 불러 세우셨다고 나는 믿는다. “사람들이 거절했던 바로 그 모세를 하나님께서는 지도자요 해방자로 세워서 보내셨습니다.” 하는 저 성서 기자의 증언을 오늘 우리의 것으로 받자. 이것은 고난이요, 이것은 민중ㆍ민족사적 교회로의 회귀이며,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다.

오늘 우리는 교파 의식을 강조하기 위하여 총회 선교주일을 지키자는 것이 아니다. 이 일을 함께 다짐하자는 것이다. 우리 모두 역사의 부름, 하나님의 소명에 충실하는 기장이 되기 위하여,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이 민족에게 기어코 이루어질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기도하기 바란다. 그리고 최소한의 행동, 최소한의 몸짓이라도 하기를 바란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일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