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기독교장로회는 한국의 장로교이며, 칼빈의 개혁주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한국의 교회는 무수히 많은 장로교 교파가 존재한다. 한국기독교장로회도 그 교파 중의 하나에 속한다. 이것은 한국의 장로교의 분열의 역사를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에 가슴 아픈 현실일 수도 있다. 저마다 각 교단은 나름대로 명분과 정당성을 갖고 있을 것이다. 장로교에 속한 교단 중에서 어떤 교단이 장로교인가 아닌가에 대한 논쟁은 분열 당시에는 교리 문제와 함께 교권과 정치적인 역학관계가 작용하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당시의 분열의 상황에 대한 잘잘못을 따지는 것보다 한 걸음 나아가서 분열된 각 교단이 장로교의 조직 체계를 얼마나 갖추고 있는가와 함께, 장로교의 뿌리인 칼빈의 개혁주의 전통을 얼마나 계승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한국기독교장로회는 한국 장로교라는 조직체계를 온전하게 갖추고 있으며, 나아가 칼빈의 개혁주의 전통을 훌륭하게 계승하고 있는 교단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한국 장로교는 어떤 조직으로 출발했는지를 간략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한국의 기독교(개신교)는 선교사들의 입국 이전에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수용의 흔적을 쉽게 살펴볼 수 있다. 선교사들의 입국보다 먼저 성서를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이 있었고, 소래교회 등의 신앙공동체가 자생적으로 출현하기도 했다. 이후 외국 선교사들을 통해서 자생적으로 출발한 한국의 교회는 보다 풍성한 신앙체계와 조직을 갖추기 시작한다. 그런데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선교를 보다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선교지 분할 정책을 사용하면서 지역적으로 교파에 속한 선교사들의 특수성에 맞추어 한국의 교회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한국에는 4개의 장로교파가 선교활동을 활발하게 진행하게 되었다. (호주 장로교, 미국북장로교, 미국남장로교, 캐나다장로교)
장로교회는 신앙적으로는 약간 다른 입장을 갖고 있었지만, 한국에서 의외의 에큐메니칼 협력을 시도하여 하나의 장로교를 탄생시킨다. 한국의 장로교회는 1905년에 4개의 본국 선교부에게 하나의 독립노회를 조직할 것을 요청한다. 왜냐하면 향후 한국인 목사를 장립할 경우 본국 노회 소속으로 장립하게 되기 때문에 한국에는 4개의 장로교파가 성립될 것이라는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본국의 4개 선교부의 허락하에 한국에서는 1907년 독노회가 조직되고, 조선인 목사 7명(서경조, 한석진, 송린서, 양전백, 방기창, 길선주, 이기풍)을 안수하면서 본격적으로 조선인에 의한 조선인의 선교라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하나의 장로교회로 출발한 한국의 장로교회는 칼빈의 신학에 기초한 웨스트민스터 표준서를 바탕으로 ‘한국 장로교회 신경’을 결정하는 등 본격적인 장로교의 틀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결국 한국 장로교회는 1912년 9월 1일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를 창립하게 되었다. 이후 모든 한국의 장로교회는 1912년을 그 출발로 삼고 있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역시 1953년 ‘새 역사’로 출발하였지만, 그 이전의 1912년부터 1953년까지의 역사를 끌어안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마치 출애굽의 이스라엘 민족이 그 이전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신앙의 전통을 포함하고 있듯이, 1953년 새 역사로 출발했지만 그 이전의 한국 장로교의 역사, 나아가 종교개혁 이후 칼빈의 개혁주의 전통을 포함 계승하고 있는 것과 같다.
물론 한국 장로교의 역사 속에서 나타난 분열과 교권의 싸움은 장로교에 속한 모든 교단들이 함께 반성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된다. 처음에 한국에 하나의 장로교회를 탄생시키기 위해서 신앙적 입장이 다른 4개의 선교부가 협의를 시도했던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렇기 때문에 나와는 다른 신앙적인 모습이라고 쉽게 정죄하며 배척하는 행위는 결코 옳은 일은 아니라고 판단된다.
2. 지역적 뿌리는 함경도와 북간도?
한국기독교장로회가 한국의 장로교회와 칼빈의 개혁주의 전통을 계승한 것을 살펴보면 1912년 제1회 총회로부터 시작된 한국장로교의 유산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기독교장로회가 한국의 다른 장로교단과 다른 점은 무엇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위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선교사들의 선교지 분할 정책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흔히 한국기독교장로회는 지역적으로 함경도와 북간도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 주장이다. 오히려 이것은 한국기독교장로회를 한 지역에 국한해 버리는 의외의 결과를 낳을 수 있다.
1945년 해방 이후에 지리적으로 함경도와 북간도는 우리의 영역에서 멀어져버렸고, 단지 함경도와 북간도에서 활동한 교회 지도자들이 한국기독교장로회 출발에 커다란 역할을 감당했기 때문에 절반은 맞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기독교장로회 초창기 출발에는 당시 기호지방의 거두인 함태영을 비롯해서 김세열, 이남규 등의 호남 지역과 박용희 등의 영남 지역의 목회자들이 힘을 보태주었기에 가능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물론 이 가운데 장공 김재준이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3. 근본주의 신앙에 저항하다
한국교회의 상황 속에서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출발은 한국교회사에서 정체냐 진보냐를 가름하는 순간이었다. 당시 세계적 신학의 흐름에서는 점차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었지만 한국의 상황 속에서 ‘근본주의’는 장로교의 주류 신학을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1953년의 상황은 계속 근본주의 신학을 바탕으로 한 권위적이고 배타적인 교회로 남아있을 것인가 아니면 보다 한 차원 높은 단계로 진보할 것이냐를 놓고 장로교는 선택을 강요받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남아있던 대한예수교장로회 속에서도 신학교육에 있어서는 김재준 등의 신학적 작업을 많은 부분 수용하는 결과가 나타난다.
장로교 분열에 있어서 ‘신학의 문제’를 교회 정치에 끌고 들어간 것은 상당히 비판받아 마땅하다. 신학교는 다양한 신학을 접할수록 좋다. 그러나 현장 교회에 갈 때에는 학교에서 배운 신학을 버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현장 교회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를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는 과제를 떠안고 가는 것이다. 그것이 전반적으로 한국교회의 질적인 수준을 향상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역사적으로 신학교에서 배운 것을 현장에 적용하려는 노력이 거의 없다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현장에서 처하는 다양한 목회적 상황 속에서 미처 신학적으로 배운 것을 적용시키려는 노력 자체가 불가능한 경우가 변수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런점에서 나는 김재준과 송창근을 비롯한 유학파 지식인들이 어쩌면 교육과 목회에 대해서 지극히 낭만적인 생각을 했다고 생각한다. 목회자들이 다 장공과 만우 같지 않다. 보다 편한 것을 추구하는 심리는 애써 진리를 끊임없이 추구하며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을 쓸데없는 헛수고라고 생각하기 쉽다.
진보적인 신학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세련되게 다듬을 여유도 없이 교단의 분열은 가속화되었다. 출발 자체가 한국기독교장로회에게는 불리한 상황이었다. 오늘날 별다른 설명 없이 누군가를 ‘빨갱이’라고 몰아가는 것처럼, 장공 김재준 목사는 ‘성경 파괴자’라고 주장하면서 그것이 틀렸다는 해명을 일반 교인들이 듣지 못하게 한다면 자연스럽게 김재준과 한국기독교장로회는 ‘이단’이라고 인식되기 때문이다.
4. 캐나다 연합교회의 협력
한국기독교장로회는 함경도 지역의 선교를 담당한 캐나다 선교부와 깊은 연관이 있다. 또한 함경도와 인접해 있는 북간도는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의 근거지인 동시에 학교를 바탕으로 한 기독교 운동이 활발한 지역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한국기독교장로회가 출발할 즈음에 활동한 주역들은 함경도와 북간도와 연관이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함경도는 역사적으로 조선시대에 가장 소외받고 버림받은 척박한 땅이었다. 흔히 역사적으로 서북지역(평안도)이 차별을 받았다고 하지만, 함경도는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는 무관심의 지역이었다. 바로 이 지역에 캐나다 장로교회의 선교사들이 들어온 것이다. 함경도 지역의 교회는 평양 대부흥운동(1907년) 이전 1903년 원산기도회를 통해서 함경도 지방에서의 성령 운동을 일으켰으며, 이후 일제의 박해와 고난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고 불의에 저항할 수 있는 힘과 소망의 원천을 제공하였다. 캐나다 장로교회는 한국 민족의 독립과 민중의 해방과 관심이 컸던만큼 초기의 한국인 교회 지도자들과 동등한 선교협력자적 관계를 설정하였다.
일본의 식민통치는 우리나라의 많은 미래의 가능성을 빼앗아 갔다. 3ㆍ1운동을 통해서 민족의 저력을 보여주었고 3ㆍ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 있는 근거지가 교회였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었다. 이후 일본의 통치는 교회를 통한 역사 참여를 근본적으로 차단하는 데 주력하였다. 3ㆍ1운동 이후 한국교회 내의 민중의 해방 열망과 역사 변혁의 의지를 타계적이고 피안적인 세계로 돌려 비정치화 하는 선교사들의 선교 노선과 정책들을 더욱 고무시키고 후원하면서, 교회를 탈역사화의 공간으로 만들어 버렸다. 캐나다 선교부는 한국에서의 올바른 선교가 완전히 차단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캐나다 국적을 포기하면서 한국에 남으려고 했고, 오늘날 주홍글씨와도 같은 ‘신사참배’를 받아들이면서까지 한국교회를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단순히 정치적인 입장 속에서 가스라-테프트 밀약에 근거해서 한국에서 철수하면서 신사참배 반대라는 그럴듯한 이유를 댄 미국의 선교사들과는 다른 모습으로 평가받아야 한다)
5. 조선신학교
그리고 당시에 자주적인 신학교육을 위해서 설립한 조선신학교 출신들이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출발의 주역으로 함께 하였다. 이들은 당시 교권을 장악한 서북지역의 기독교와는 다른 입장을 갖고 있었다. 서북지역의 기독교는 ‘평양신학교’와 외국인 선교사들이 중심이 되어 있었고 아직은 선교사들의 영향에서 벗어나는 것이 시기 상조라는 입장과 외국인 선교사들이 전해준 ‘근본주의’를 유일무이한 신학이라고 주장하는 분위기였다.
애초에 한국에서 신학교육을 시작하면서 선교사들은 교육의 상한선을 정해버렸다. 선교사들이 가르쳐준 것 이상을 배우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유학을 통해 새로운 신학을 접한 사람들의 생각은 달랐다. 신학 교육에 한국 교회의 미래가 달려있다고 본 것이다. 교회는 교역자들의 수준만큼 발전한다. 훌륭한 한국교회의 목회 지도자들을 배출하려면 훌륭한 교육기관이 필요하였다. 한국교회의 진보적 지도자들과 신학자들의 이와 같은 시대 인식은 주체적이며 세계 신학과 맥을 함께 하는 신학교육기관을 만들고자하는 노력으로 이어졌으며 그 결과 조선신학교를 세운 것이다.
조선신학교는 일제 시대 일본의 감시와 억압의 대상이었으며, 그러한 중에서도 조선신학교는 민족의식 함양을 위해 민족지도자 양성에 힘을 써왔다. 조선신학교는 자유주의 신학을 지향한 것이 아니라 신학의 자유를 지향한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조선 교회를 위한 조선인 교역자 양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조선 교회를 위한 세계적인 교역자 양성’을 목표로 했기 때문이다.
6. 장로교 내부의 헤게모니 싸움과 분열
표면적으로는 성서 해석의 문제였지만, 내면적으로는 교권을 장악하기 위한 헤게모니 싸움이었을 것이다. 결국 서북지역 출신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분단 이후 남한으로 내려와서 남한의 장로교회를 장악하기 위해서 이제 막 태동한 자주적인 신학교육의 산실인 조선신학교에 재갈을 물리려고 하였다.
이미 유학을 통해서 새로운 신학을 접한 김재준 목사와 유학파들은 근본주의가 유일한 신학이 아니고 세계적인 신학을 배워서 한국교회의 질적인 향상을 이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것은 나아가서 올바른 신학은 올바른 신앙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타협할 수 없는 문제라고 보았다.
결국 장로교 교단의 총회에서 김재준 목사를 제명하라는 결의가 통과되었고, 목사의 제명은 총회가 아닌 노회의 권한이기 때문에 법적 절차에 문제를 삼고 바로잡으려는 입장이 팽팽하게 맞서게 되었다. 결국 조선신학교와 김재준 목사를 지지하는 그룹은 1953년 호헌 총회를 열고 ‘새 역사’로 출발한 것이다. 이것은 분열을 조장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호헌’ 즉 장로교 헌법을 수호하기 위한 정당한 주장이었다. 당시 선언서는 언제라도 마음을 터놓고 대화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천명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7. 새 역사 출발 이후 한국기독교장로회
새 역사로 출발한 한국기독교장로회는 장로교의 기본 정신인 칼빈의 개혁주의 전통을 올바르게 계승하면서 세계 장로교회와 협력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선언서에서 천명하였듯이 초창기부터 에큐메니칼 운동을 적극 추진한 것이다. 1959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 가입하며 한국 내의 교회 일치 운동에 참여하였고, 세계장로교연맹(세계개혁교회연맹, WARC)에 가입하였다.
1961년에 접어들면서 아직은 시기 상조라는 의견도 있었지만 ‘경제적 독립’을 시도하였다. 당초 호헌 선언서에서 “우리는 의존사상을 배격하고 자립자조 정신을 함양한다”라고 제시했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어도 불가피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따라서 이후 캐나다연합교회와는 진정한 동반자의 관계를 설정하게 되었다.
1960년대까지 행정적인 개혁을 시도하던 한국기독교장로회는 1970년대에 화육 정신에 따라 사회를 위한 교회가 되고자 하였다. 1971년에 교단적으로 ‘사회선언지침’을 채택하여 교회의 현실 참여에 대한 신학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물론 이로 인해서 교단의 양적 성장에는 커다란 타격을 입게 된다. 그런데 신학적인 기반 없이 양적인 성장에만 몰두했을 때 나타나는 부작용은 오늘날 개신교가 보여주는 저질적인 정치행동 등을 예로 들 수 있겠다. 한국기독교장로회는 1960년대에 대두된 '하나님의 선교' 신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교단과 교회의 사회 참여에 대한 신학적 틀을 제공하였으며, 평신도의 교회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서 여신도회가 중심이 되어 평신도 훈련과 지도자 양성을 진행하였다.
1970년대와 80년대는 그야말로 한국기독교장로회가 본격적으로 한국의 현실 속에서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하던 시기라고 할 수 있겠다. 오늘날 한국기독교장로회의 기성세대는 이때 젊음의 열정을 쏟아부었던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 대해서 나름 자랑스러워 하고 있다. 이 시기에 김재준 목사의 ‘역사 참여 신학’과 ‘하나님의 선교 신학’은 교회의 사회 참여에 커다란 사상적 토대가 되었다. 김재준 목사는 당시 한국 기독교인의 사명인 인간 존엄성의 회복인 ‘인간화’와 사랑의 인간관계, 즉 참된 민주화인 ‘사회화’ 이 두 가지로 정리하였다.
8. 오늘의 시점에 한국기독교장로회
1990년대 이후 한국기독교장로회는 무엇에 집중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직면했을 때, 아직도 사회 참여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했던 그 시기에 매몰되어 있다는 비판도 있다. 아직 ‘하나님의 선교’에 기반을 둔 사회 참여 신학은 끝나지 않았고 여전히 사회 속에서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제는 보다 현실적인 검토를 거쳐야 한다. 과거에 매몰되지 않아야 하지만, 그렇다고 과거를 완전히 잊어서도 안된다. 계승할 것은 계승하고 버릴 것은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 버려서는 안되는 것을 옛 것이라고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된다. 무작정 오늘의 현실에 편승해서 우리의 것을 경원시하고 물량적이고 성공지향주의에 휩싸이면 안된다.
과거 역사의 화살촉을 담당했던 한국기독교장로회는 주어진 역사의 현실 속에서 단순히 비판만 한 것이 아니라 미래의 대안을 제시하려고 노력하였다. 자신들이 주장하는 것이 진정 신앙적인 근거가 있는지를 끊임없이 교단적으로 검증하고 신학적 근거를 제시해왔다.
한국기독교장로회가 어느 순간 각성해서 갑자기 대한민국의 최고 교인수를 자랑하는 교단이 될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 한국의 역사 속에서 한국기독교장로회를 세운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교인수를 자랑하는 교단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동안 역사를 살펴보더라도 교인수를 증가시키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주어진 상황 속에서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는 진정한 예언자적인 모습이 한국기독교장로회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한다.
무엇이 중요한지를 판별하는 지혜가 있어왔다. 그 판별의 기준은 일차적으로 성서이고, 개혁교회 신앙 전통이다. 한국기독교장로회는 교단의 헌법에 신조를 포함시켰다. 교단의 정치와 권징을 이야기 하기 전에 우선하는 것은 교단의 신조와 신앙고백이다. 그 신조와 신앙고백에 비추어 옳지 않은 것이라면 단호하게 거부 의사를 밝히는 것, 그것이 진정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신앙고백 전통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