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독(熟讀)을 위한 안내
傳記的[전기적]으로 본 예레미아의 內面生活[내면생활]
「落穗[낙수] 1933년 6월 10일
이 글이 처음 실린 『신학지남』은 1933년 9월호이지만, 김재준은 이 글의 마지막에 글을 기록한 날자를 1933년 6월 10일로 명시하고 있다. 아래와 같이 여러 곳에서 소개되고 있다.
- [신학지남] 1933년 9월, 43-51쪽
- [낙수] 1940년, 51-69쪽
- [장공 김재준 저작전집] 제1권, 1971년, 39-48쪽
- [김재준전집] 제1권, 1992년, 13-26쪽
이 자료는 장공 김재준 목사가 집필한 『전기적으로 본 예레미야의 내면생활』을 세부 문장별로 깊이 있게 분석하여 정리한 안내서이다.
이 글은 1933년 『신학지남』에 처음 실린 이래 신학적·사상적 깊이를 담아 전해 내려온 중요한 문헌이다.
독자들이 이 분석을 숙독할 때 예레미야가 조국의 몰락과 제도 종교의 타락 속에서 겪었던 처절한 실존적 고뇌와 영적 정화 과정을 생생하게 마주하게 된다.
나아가 외형적이고 국가적인 율법주의 종교가 어떻게 개인적이고 영적인 내면적 신앙으로 도약하는지 그 구속사적 흐름을 파악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 읽어야 한다.
제1부. 소명과 초기 사역
예레미야는 조국의 멸망이 다가오는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거부할 수 없는 부르심을 받는다. 그는 요시야 왕의 종교 개혁이 결국 기득권의 탐욕과 맹목적인 성전 우상화로 타락하는 것을 보며 깊은 의분과 절망을 느낀다.
[1] 전기적 접근의 어려움과 예언자의 다단한 생애
1. 몰락하는 왕조와 예언자의 파란만장한 생애
다윗王業[왕업]이 바야흐로 기울어져 가는 저녁, 눈물과 피와 힘으로 짜내인 예레미아의 一生[일생]은 너무나 深刻[심각]하고 多端[다단]하였다.
- ‘다단(多端)’은 일이나 사건이 매우 많아 평탄치 않고 파란만장했음을 의미한다.
- 다윗 왕조가 몰락해 가는 비극적인 시대 상황 속에서, 예레미야가 겪어야 했던 치열하고 우여곡절 많은 생애를 묘사한다.
- 장공은 성서의 인물을 단순히 평면적인 계시의 전달자로 보지 않고, ‘눈물과 피와 힘으로 짜내인’이라는 표현을 통해 예언자의 처절한 고뇌와 입체적인 실존을 포착하고자 한다.
2. 예언시 속에 담긴 짙은 비애
그리하여 탄식없이 읽을 수 없는 것이 그의 豫言詩[예언시]이다.
- ‘예언시(豫言詩)’는 예레미야서에 기록된 선포의 말씀들을 가리키며, 그 문학적이고 감정적인 깊이를 강조하는 표현이다.
- 예레미야의 비극적 생애와 고통이 그가 남긴 예언시 곳곳에 짙게 배어 있어, 독자로서 깊은 슬픔과 탄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음을 고백한다.
- 예언서를 단순한 종교 문헌이 아니라 한 인간의 피맺힌 호소로 읽어내는 장공의 공감적이고 인격주의적인 성서 읽기 태도를 보여준다.
- 『신학지남』에는 문장의 처음에 “그리하여” 대신에 “그리하야 處地[처지]가 處地[처지]이니만치”라는 표현이 추가되어 있다.
- 장공의 글에서 초기 자료인 『신학지남(1933)』과 『낙수(1940)』는 “預言者[예언자]”를 선호하고, 후기 자료인 『김재준 저작전집(1971)』과 『김재준전집(1992)』은 “豫言者[예언자]”를 선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문헌적 파편성을 딛고 전기를 구성하는 작업의 난해함
그러나 그의 豫言詩[예언시]를材料[재료]로 하고 系統[계통]선 傳記[전기]를 쓰려는 것은 決[결]코 容易[용이]한 일이 아님을 나는 새삼스럽게 느꼈다.
- ‘계통(系統)선 전기’는 순서 없이 흩어져 있는 자료들을 논리적, 시간적 맥락에 맞게 재배열하여 일관된 흐름을 갖춘 기록을 뜻한다.
- 시간순으로 정렬되지 않고 파편화되어 있는 예언시들을 재구성하여, 예레미야의 생애와 사상적 발전을 체계적으로 서술하는 작업이 학문적으로 매우 난해함을 밝힌다.
- 문헌비평적 한계를 정직하게 인정하면서도, 그 파편들 속에서 예언자의 일관된 내면적 흐름을 찾아내려는 학자로서의 치열한 방법론적 고민이 담겨 있다.
4. 대예언자의 진면목을 전하려는 학문적 사명감과 겸손
이제 未備[미비]하나마 뜻 두었던 것이니 써 이 大豫言者[대예언자]의 片影[편영]이나마 나타낼 수 있으면 幸甚[행심]일까 하고 붓을 든 것이다.
- ‘편영(片影)’은 ‘한 조각의 그림자’라는 뜻으로 저자의 겸허한 태도를 나타내며, ‘행심(幸甚)’은 매우 다행으로 여긴다는 뜻으로 붓을 든 진정성을 표현한다.
- 자신의 연구가 완전하지 않을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오랫동안 마음에 품었던 뜻을 좇아 위대한 예언자의 진면목을 조금이나마 세상에 드러내고자 하는 집필 동기를 서술한다.
- 대예언자의 거대한 영적 세계를 감히 다루는 데 대한 겸손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대에 그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는 신학적 사명감이 교차하는 대목이다.
[2] 시대의 위기와 청년 예레미야의 내면적 준비
1. 다가오는 전운과 청년 시인의 예민한 직감
앗시리아의 平原[평원]에 감도는 低氣壓[저기압]이 刻一刻[각일각]으로 가나안福地[복지]를 向[향]하여 나아오는 것을 유다의 一寒村[일한촌] 아나돗의 靑年詩人[청년시인] 예레미아는 거의 直感的[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 ‘저기압(低氣壓)’은 다가오는 전쟁과 환난의 먹구름을 은유하며, ‘일한촌(一寒村)’은 가난하고 쓸쓸한 촌락인 아나돗의 배경을, ‘청년시인’은 그의 섬세하고 깊은 내면세계를 강조하는 표현이다.
- 북방 제국의 군사적 위협이 가나안 땅을 향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는 국가적 위기 상황을, 아나돗이라는 작은 마을에 살던 청년 예레미야가 일찍부터 감지하고 있었음을 묘사한다.
- 장공은 예레미야를 처음부터 기계적으로 계시만 기다리는 수동적 인물이 아니라, 시대의 징조를 예리하게 읽어내는 탁월한 역사의식과 시인으로서의 감수성을 지닌 청년으로 묘사한다.
2. 고귀한 혈통이 부여한 책임 의식
貴人[귀인]의 피를 이은 그의 마음은 모르는 체하고 지낼 수 없었다.
- ‘귀인(貴人)의 피’는 아나돗에 정착했던 제사장 아비아달의 후손으로서 예레미야가 지녔을 영적 자부심과 도덕적 책임 의식을 뜻한다.
- 제사장 가문이라는 명문가의 혈통을 이어받은 예레미야가 국가적 위기와 타락 앞에서도 결코 외면하거나 방관할 수 없었던 내면적 책임감을 나타낸다.
- 예레미야가 지닌 역사의식의 뿌리가 신앙적 명문가의 전통에서 비롯되었음을 시사하며, 진정한 신앙인은 시대의 아픔을 남의 일처럼 넘기지 못하는 존재임을 암시한다.
3. 현실에 대한 절망과 선배 예언자를 통한 영적 각성
다윗왕때로부터 내려온 貴[귀]한 家族的[가족적] 傳統[전통]과 썩을 대로 썩은 現下[현하]의 國情[국정]과를 서로 比較[비교]해 보고서는 그 差[차]의 너무나 현격한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며 따라서 先輩[선배] 豫言者[예언자] 特[특]히 호세아의 불같이 뜨거운 豫言詩[예언시]가 그의 가슴에 깊은 感懷[감회]를 일으켰을 것은 勿論[물론]이었을 것이다.
- ‘현하(現下)’는 ‘지금 당장’을 뜻하며, ‘감회(感懷)’는 마음속에 깊이 맺히는 생각이나 느낌을 말한다. 특히 호세아는 하나님의 아픈 사랑을 선포한 예언자로, 훗날 눈물의 선지자가 될 예레미야에게 가장 큰 사상적 영향을 주었음이 부각된다.
- 거룩한 신앙 전통과 현재의 극심한 타락상 사이의 괴리를 뼈저리게 느끼며, 특히 선배 예언자 호세아의 애절한 메시지에 깊은 영적 공명과 자극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 장공은 예레미야의 내면이 ‘역사적 현실에 대한 절망(현격한 차이)’과 ‘선배 예언자의 영성(호세아의 예언시)’이라는 두 축을 통해 점진적으로 무르익어 갔음을 보여준다.
4. 예언적 충동과 인간적 주저함 사이의 번민
때때로 거친 유다광야를 거니는 그는 最後[최후]로 한번 우렁차게 외치고도 싶었을 것이나 그에게는 아직도 그렇게 自信[자신]이 생기지 않았었다.
- ‘유다광야’는 예레미야의 깊은 영적 갈등과 성찰이 이루어지는 고독하고 거친 내면의 공간으로 작용한다.
- 민족을 향해 심판과 회개를 선포하고 싶은 내면의 충동은 강렬하게 끓어올랐지만, 아직 예언자로 나설 만한 내적 확신이 부족하여 광야를 서성이며 고뇌하는 인간적인 모습이다.
- 예언자적 사명감(충동)과 인간적인 나약함(주저함) 사이에서 갈등하는 예레미야의 실존적 번민을 포착한다. 위대한 사명도 결국 한 인간의 고뇌를 통과하며 빚어진다는 장공의 인격주의적 관점이 드러난다.
5. 주관적 열망을 넘어선 객관적 소명의 대기
그는 아직도 客觀的[객관적] 權威者[권위자]인 여호와의 召命[소명]을 듣지 못했던 것이다.
- ‘객관적(客觀的) 권위자’는 인간의 주관적 감정이나 애국심을 초월하여, 밖으로부터 주어지는 거부할 수 없는 절대적인 신적 기원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 예레미야가 아직 대중 앞에 나서지 못했던 근본적인 이유가 단순히 용기 부족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명확하고 거항할 수 없는 부르심(소명)이 임하지 않았기 때문임을 밝힌다.
- 내면의 뜨거운 충동(주관적 열망)만으로는 참된 예언자가 될 수 없으며, 반드시 하나님이라는 ‘객관적 권위자’의 직접적인 부르심과 인가(소명)가 있어야만 예언적 사역이 시작될 수 있음을 신학적으로 규명한다.
[3] 아몬나무의 환상과 불가항력적 소명
1. 깨어 있는 아몬나무와 창세 전의 거룩한 부르심
때는 主前[주전] 626년 늦은 겨울 萬相[만상]이 다 자는데 혼자 깨인듯이 꽃피인 아몬나무 바라보며 거친 유다 광야를 거니는 그에게는 갑자기 「너를 배안에 形成[형성]하기 前[전]에 내가 너를 알았고 네가 그의 胎[태]에서 나오기 前[전]에 내가 너를 聖別[성별]했으며 萬國[만국]의 豫言者[예언자]로 내가 너를 任命[임명]하였다」(1:4,5)
하는 엄숙한 소리가 들렸다.
- ‘만상(萬相)’은 세상의 모든 사물과 현상을, ‘성별(聖別)’은 거룩하게 구별함을 뜻한다. ‘아몬나무(살구나무)’는 히브리어 유희(샤케드: 살구나무, 쇼케드: 깨어 있다)를 반영한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기 위해 깨어 있음을 상징한다.
- 이 나무는 예레미야 1장 11절에 등장하는 ‘살구나무’로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 히브리 원어에는 ‘샤케드(Shaqed)’, 즉 아몬드나무(편도나무)이다. 아몬드나무는 중동 지역에서 겨울이 채 끝나기 전(1~2월)에 모든 식물 중 가장 먼저 흰색ㆍ분홍색 꽃을 피우는 나무이다. 겨울잠 자던 자연을 가장 먼저 흔들어 깨우기 때문에, 히브리어로 ‘샤케드(아몬드나무)’의 문자적 의미는 ‘깨어 있는 자’, ‘파수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 주전 626년, 모든 만물이 잠든 늦겨울에 홀로 꽃을 피운 아몬나무를 바라보던 예레미야에게, 그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만국의 예언자로 구별하여 세웠다는 하나님의 엄숙한 음성이 마침내 임하는 결정적 순간이다.
- 겨울의 한가운데서 홀로 깨어 꽃을 피우는 아몬나무의 시각적 심상을 통해, 영적으로 깊이 잠든 유다 백성들 속에서 홀로 깨어 하나님의 심판을 외쳐야 할 예언자의 고독한 운명을 문학적으로 탁월하게 그려낸다. 또한 예언자의 직분이 인간의 결단이 아닌, 모태에 잉태되기 전부터 예정된 신적 기원에 있음을 강조한다.
2. 장엄한 사명 앞에서의 인간적 압도와 사양
아직도 젊은이인 그에게는 너무나 莊嚴[장엄]하고 기대에 넘치는 召命[소명]이었음에 그는 억색(臆塞)한 마음으로 辭退[사퇴]하였다.
- ‘억색(臆塞)하다’는 기운이 막히거나 가슴이 답답하다는 뜻으로, 막중한 소명 앞에 선 예레미야의 당혹스럽고 짓눌린 심리 상태를 아주 적확하게 표현한 단어이다. ‘사퇴(辭退)’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물러서려 했음을 의미한다.
- 아직 경험이 부족한 젊은 예레미야에게 만국의 예언자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은 너무도 무겁고 벅찬 것이었기에, 가슴이 턱 막히는 듯한 중압감 속에서 그 사명을 거절하는 모습이다.
- 참된 예언자는 자신의 의지나 야망으로 스스로 나서는 자가 아님을 보여준다. 모세나 이사야처럼, 압도적인 신의 현현과 엄청난 사명 앞에서 자신의 무능력함을 절감하며 뒷걸음질 치는 뼈저린 인간적 실존을 여과 없이 포착한다.
3. 예언자를 옭아매는 하나님의 거부할 수 없는 손길
그러나 여호와의 손은 벌써 그를 붙잡고 놓지 않음을 어찌하랴.
- “~어찌하랴”라는 영탄적 어미를 사용하여, 피하고 싶어도 결코 피할 수 없는 십자가를 짊어지게 된 젊은 예언자의 기구한 숙명에 대한 장공 자신의 깊은 연민과 신학적 공감을 드러낸다.
- 예레미야의 인간적인 주저함과 사양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권능이 이미 그를 강권적으로 사로잡아 예언자의 길로 이끌어 가고 있음을 탄식하듯 서술한 대목이다.
- 예언자의 생애를 관통하는 ‘불가항력적 은혜’와 ‘신적 강권성’을 극적으로 묘사한다. 이는 훗날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렘 20:7)라고 절규하게 될 예레미야의 다단한 운명이 이 순간 이미 결정되었음을 암시하는 통찰이다.
[4] 예언 사역의 시작과 타락한 예루살렘의 영적 실상
1. 영적 타락 속에서 시작된 사역과 예언자의 고통
「쇠기둥」, 「구리담」의 約束[약속]과 함께 그는 豫言者[예언자]의 生活[생활]을 始作[시작]하였다. 當時[당시] 「庶民[서민]의 宗敎[종교]」인 바알, 아쉬타데 崇拜[숭배]는 論理的[논리적] 宗敎[종교]인 여호와의 예배까지도 極度[극도]로 타락시켜서 山[산]위나 나무밑 가는곳마다 邪神淫祠[사신음사], 거기서 떠드는 淫湯[음탕]한 誦歌[송가]소리는 밤낮으로 이 豫言者[예언자]의 귀를 괴롭게 하였었다. (2:2~3:23 參照[참조])
- ‘쇠기둥, 구리담’은 예레미야 1장 18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견고한 보호 약속을 뜻한다. ‘사신음사(邪神淫祠)’는 부정한 귀신을 모시는 불건전한 사당을, ‘송가(誦歌)’는 우상을 기리는 노래를 뜻한다.
- 하나님의 강력한 보호하심을 약속받고 사역에 나섰으나, 당대 사회는 가나안 토착 종교에 물들어 여호와 신앙마저 심각하게 훼손된 상태였으며, 예레미야는 도처에서 들려오는 타락한 우상 숭배의 소리로 인해 깊은 내면적 고통을 겪었음을 서술한다.
- 장공은 여호와 신앙을 ‘논리적 종교’로, 바알 숭배를 감각적이고 본능적인 ‘서민의 종교’로 대비한다. 시대의 혼합주의적 타락 속에서 예언자가 겪어야 하는 ‘거룩한 괴로움’을 부각시킨다.
2. 청년 예레미야의 열정과 심판의 선포
靑年[청년]들에서 흔히 보는 節制[절제]없는 信念[신념]과 興奔[흥분]을 가지고 그는 이 더러워진 백성에게 내릴 懲罰[징벌]을 宣言[선언]하였다. 끓어 넘치는 가마같이 北方[북방]으로 부터 밀려오는 兵亂[병란]!
「들으라! 단에서 달려오는 斥候[척후]!
에부라임 언덕에서 오는 凶報[흉보]의 前哨[전초]!
百姓[백성]들에게 警告[경고]하라 보아라 저들이 온다.
알게하라 예루살렘에!」
「내 창자여 내 창자여 오 내 괴로움이여!
오 내 가슴이여!
내 心臓[심장]이 너무나 뛰놀매
걷잡을 길 없구나
저 북소리 내 귀에 들리네
저 戰爭[전쟁]의 경종소리.」
- 3:19
〈註〉 스킨너(Skinner)는 이 詩[시]와 그의 다른 유사한 시를 比較硏究[비교연구]한 結果[결과] 이 詩[시]는 特[특]히 過度[과도]의 興奔[흥분]과 想像的[상상적] 氣分[기분]을 나타냄을 指摘[지적]하고 따라서 極初期[극초기]의 作[작]임을 말하였다. 그리고 이 兵亂[병란]은 스구디아 侵略[침략](626 B.C.)이었다고 한다. (Prophecy and Religion p. 44ff)
- ‘끓어 넘치는 가마’는 심판을 상징하는 예레미야 1장의 환상이다. 장공은 존 스키너(John Skinner)의 주석을 인용하여 이 시기가 예레미야의 ‘극초기(極初期)’ 사역이며, 역사적으로는 주전 626년경의 스구디아(Scythian) 침략과 맞물려 있음을 학문적으로 고증한다.
- 아직 젊은 예레미야가 청년 특유의 뜨거운 열정과 억누를 수 없는 흥분 상태에서, 다가오는 북방 민족의 침략을 극적으로 경고하며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선포하는 장면이다.
- 장공은 예언자의 메시지가 기계적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청년’이라는 그의 심리적·생물학적 연령과 열정적 기질을 통과하여 표출된다고 분석한다. 이는 성서 인물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려는 인격주의적 성서 해석의 특징이다.
3. 민족의 멸망을 선고하는 예언자의 찢어지는 비애
그는 이 風前[풍전]의 燈火[등화]같은 自國[자국]의 運命[운명]을 보고 懲罰[징벌]의 宣告[선고]를 내리면서도 속마음은 限[한]없이 아팠을 것이다.
-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멸망의 심판을 외치고 있지만, 멸망해 가는 조국의 운명을 바라보는 인간 예레미야의 내면은 측량할 수 없는 깊은 슬픔과 고통으로 찢어지고 있었음을 묘사한다.
- 징벌의 메시지 이면에 담긴 예언자의 ‘애국적 비애’와 ‘무한한 긍휼’을 포착한다. 공의로운 심판관의 대변자이면서 동시에 민족을 향한 사랑 때문에 고뇌하는 예레미야의 이중적 실존을 예리하게 짚어낸다.
4. 절대 무(無)로 회귀하는 ‘혼돈’의 비전과 일루의 희망
그리하여 상상컨대 다시 들밖에 나가 北[북]으로 에부라임의 連山[연산], 東[동]으로 요단의 溪谷[계곡], 그 건너便[편] 길르앗의 高原[고원]을 바라보며 깊은 감상에 잠긴 때 그에게는 「混沌[혼돈]」의 비젼(Vision)이 보였었을까 한다.
「내가 땅을 보았다. 그러나 아 混沌[혼돈]!
하늘을- 그러나 아 빛이 없더라.
내가 언덕을 보았다- 그러나 아 저들은 떨었다.
그리고 모든 山[산]들은 몸부림치더라.
내가 보았다- 그러나 아 사람이라곤 없었다.
그리고 空中[공중]의 온갖 새들도 다 날아가 버렸더라.
내가 곡식밭을 보았다- 그러나 「사막」!
그리고 그의 모든 都市[도시]는 허물어져 버렸더라.」
- 4:23~26
「混沌[혼돈]과 荒廢[황폐]」 이것을 눈앞에 보면서도 그는 一縷[일루]의 希望[희망]을 가지고 國家的[국가적] 悔改[회개]를 부르짖지 않을 수 없었다.
- ‘혼돈(混沌)’은 창세기 1장의 ‘혼돈과 공허’를 연상시키는 단어로, 생명이 소멸하고 질서가 완전히 붕괴된 절망적 심판의 상태를 뜻한다.
- 심판으로 인해 창조 이전의 텅 빈 상태로 돌아가 버린 듯한 끔찍한 환상(예레미야 4장 23~26절)을 보면서도, 단 하나의 희망을 놓지 않고 민족의 국가적 회개를 촉구하는 예언자의 사명감을 서술한다.
- 파괴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궁극적인 멸망의 환상 앞에서도 회개를 통해 백성을 살려내고자 하는 예언적 절규의 본질을 보여준다.
5. 예루살렘 각층의 실정 탐사
예루살렘에 다니러 온 그는 于先[우선] 그 社會[사회] 각층의 實情[실정]을 探査[탐사]하였다.
- ‘우선(于先)’은 다른 일에 앞서서 먼저를 뜻하며, ‘탐사(探査)’는 실정을 자세히 알아보기 위하여 살핌을 뜻한다.
- 시골 아나돗을 떠나 수도 예루살렘에 올라온 예레미야가 본격적인 심판 경고에 앞서 사회 각 계층의 구체적인 부패와 실상을 먼저 면밀히 살폈음을 서술한다.
- 이는 예언자의 비판이 막연한 추측이나 감정에 기댄 것이 아니라, 철저한 현실 조사와 객관적 관찰에 기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6. 예루살렘의 총체적 타락에 대한 뼈저린 확인
그는 어디서 하나 義[의]를 行[행]하며 眞理[진리]를 찾는 者[자]를 만나 볼런가 해서 거리를 두루 다녀 보았으나 찾은 것은 오직 歷史的[역사적] 事變[사변]을 通[통]하여 나타나는 하나님의 攝理[섭리]에 全然没覺[전연몰각]한, 「그 낯을 바윗돌 같이 굳세게 하며 돌아오기를 拒絶[거절]」하는 者[자]들이었다. 그는 다시 발을 돌이켜 敎養[교양]있는 所謂[소위] 指導者層[지도자층]을 찾아 보았으나 그 亦是[역시] 조금도 다를것 없는 沒覺無道[몰각무도]한 者[자]들이었다. (5:14 參照[참조])고 嘆息[탄식]하였다.
- ‘몰각(没覺)하다’는 전혀 깨닫지 못함을, ‘무도(無道)’는 도리에 어긋남을 뜻한다. 이는 예레미야 5장 1절(“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의 모티프를 차용한 것이다.
- 예루살렘 거리를 헤매며 단 한 명의 의인이라도 찾으려 했으나, 일반 백성부터 교양을 갖춘 지도자층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체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철저히 무지하고 완고하게 타락해 있음을 확인하고 절망하는 장면이다.
- 죄악이 특정 계층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구조적이고 총체적인 타락임을 폭로한다. 역사의 격변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읽어내지 못하는 대중과 지도자들의 ‘영적 맹목성’을 강하게 비판한다.
7. 절대 고독에 처한 예언자와 세속의 견고한 벽
이렇게도 각 階級[계급]을 通[통]하여 極度[극도]의 腐敗[부패]와 無能[무능]을 보였음에 그는 오직 홀로 街頭[가두]에 외치는 반향없는 소리노릇을 하였을 것이다. 「悔改[회개]하고 여호와께 돌아오라」는 말은 예나 지금이나 俗塵[속진]에 메인 인생의 귀를 울리기에는 너무나 유다른 말인가 한다.
- ‘반향(反響)없는 소리’는 아무도 응답하지 않는 철저한 고립과 외면을, ‘속진(俗塵)’은 번뇌와 욕심으로 가득 찬 세속의 티끌과 때를 뜻한다.
- 총체적 부패 속에서 예레미야의 외침은 그 누구에게도 가닿지 못하는 메아리 없는 고독한 절규로 끝났음을 묘사하며, 회개를 촉구하는 진리의 말씀이 세속에 찌든 인간들에게는 수용되기 어렵다는 비극적 현실을 관조한다.
- 철저하게 단절된 ‘예언자의 절대 고독’을 형상화한다. ‘예나 지금이나’라는 표현을 통해 장공은 과거 예레미야 시대의 영적 완악함을 자신이 몸담고 있는 당대(현대) 사람들의 영적 둔감함과 연결하여 보편적인 신학적 탄식으로 승화시킨다.
[5] 요시야의 종교 개혁과 예레미야의 참여 문제
1. 요시야 왕의 대대적인 신명기적 종교 개혁
이렇게 하기를 5년! 때는 主前[주전] 621년 봄 聖殿[성전]구석에서 모세의 옛 율법책을 發見[발견]했다는 所聞[소문]이 地方[지방]의 구석구석까지 퍼지게 되며 그때 유월절을 利用[이용]하여 一世[일세] 明君[명군] 요시아王[왕]의 主裁下[주재하]에 全國的[전국적] 會議[회의]가 열리었다. 그리하여 전고미증유(前古未會有)의 壯嚴[장엄], 崇高[숭고]한 유월절을 지키었다는 代表者[대표자]들의 傳言[전언]은 곧 사람들의 한결같은 話題[화제]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政府[정부]로부터의 疾風怒濤的[질풍노도적] 종교숙청운동이 일어나 聖殿[성전]의 淨化[정화], 邪神淫祠[사신음사]의 破壞[파괴], 地方[지방]에 널려있는 여호와 祭壇[제단]의 破棄[파기]와 禮拜[예배]의 集中[집중] 그리고 高貴[고귀]한 倫理的[윤리적] 生活[생활]의 提唱[제창]! 이런 偉大[위대]한 改革運動[개혁운동]이 놀랄만치 迅速[급속]히 進行[진행]되고 있었다.
- ‘사신음사(邪神淫祠)’의 파괴와 예배의 ‘집중’은 지방 산당을 폐지하고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예배로 통합한 신명기 개혁의 핵심 내용이다.
- 『신학지남』, 『낙수』, 『김재준 저작전집』에는 “종교숙청운동”을 “宗敎廓淸運動[종교확청운동]”으로 표기하였다.. 宗敎廓淸運動[종교확청운동]은 ‘종교계의 내부적인 부정부패, 타락, 그리고 미신적 요소들을 깨끗하게 쓸어내고 바로잡으려는 개혁 운동’을 의미한다.
- 요시야 왕 통치기인 주전 621년, 성전에서 율법책(신명기)이 발견된 것을 계기로 대대적인 종교 정화 및 제의 중앙집권화 개혁이 국가적 차원에서 급속도로 전개되었던 역사적 상황을 묘사한다.
- 이방 종교의 척결과 윤리적 삶을 강조한 요시야의 신명기적 개혁이, 타락한 유다 사회에 몰고 온 거대한 충격파와 역사적 전환점을 서술한다.
2. 거대한 역사적 변혁 앞에서의 예언자의 주체적 태도
이 世紀的[세기적] 改革運動[개혁운동]을 본 예레미아는 果然[과연] 어떠한 態度[태도]를 가졌을까? 學者[학자]들 사이에 많은 興味[흥미]를 일으키는, 아직도 歸結[귀결]을 짓지 못한 問題[문제]의 하나이다.
그가 果然[과연] 이 運動[운동]에 直接參加[직접참가]한 與否[여부]는 未知[미지]의 일이라 할지라도 全然[전연] 傍觀的[방관적] 態度[태도]를 取[취]했으리라고는 到低[도저]히 말할 수 없는 것이다.
- 『신학지남』, 『낙수』, 『김재준 저작전집』에는 “세기적”이라는 표현을 “劃世紀的[획세기적]”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劃世紀的[획세기적]의 의미는 ‘새로운 시대를 열 만큼 역사적으로 매우 놀랍고 대단한’ 또는 ‘한 시대를 완전히 구분 지을 만큼 중대하고 결정적인’이라는 뜻이다.
- 이 거대한 국가적 종교 개혁에 대해 예레미야가 어떤 입장이었는지는 학계의 오랜 쟁점이나, 그의 뜨거운 예언자적 기질상 결코 수수방관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확언한다.
- 예언자를 현실 도피적이거나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시대적 격변의 한가운데서 분명한 영적 판단을 내리고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주체로 이해하는 장공의 시각이 반영되어 있다.
3. 예언자의 성격과 사명으로 본 개혁 불방관의 당위성
생각컨대 그와같이 熱烈[열렬]한 預言者[예언자]로서 그렇게 큰 宗敎運動[종교운동]을 그저 冷情[냉정]하게 袖手傍觀[수수방관]했으리라는 것은 그의 性格上[성격상]으로 보아서나 그의 預言者的[예언자적] 使命[사명]으로 보아서나 도무지 不合理[불합리]한 推斷[추단]이라 안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그는 이 運動[운동]에 贊意[찬의]를 表[표]했거나 或[혹]은 反對[반대]를 表明[표명]했을 것이다.
- 예레미야의 열렬한 성격과 예언자적 사명에 비추어 볼 때, 거대한 종교 운동을 냉정하게 수수방관했을 리 없으며, 이는 명백히 불합리한 추단임을 지적한다.
- 결국 그는 이 개혁 운동에 대해 찬동의 뜻을 표명했거나 혹은 반대를 나타냈을 것이라는 논리적 전제를 이끌어낸다.
4. 예레미야가 개혁에 찬동했음을 지지하는 네 가지 논거
그가 運動[운동]에 贊意[찬의]를 表[표]했으리리는 것이 大多數學者[대다수학자]의 말하는 바인데 이제 그 理由[이유]를 列擧[열거]한다면 (一) 于先[우선] 이 運動[운동]의 根本的情神[근본적정신] 적어도 바알 宗敎[종교]의 撲滅[박멸]이라는 消極的[소극적] 方面[방면]에 있어서는 예레미아의 情神[정신]과 符合[부합]되는 것이며 또 이 律法[율법]의 倫理的[윤리적] 宗敎的[종교적] 敎訓[교훈]도 範圍[범위]는 좁다 할지라도 決[결]코 預言者[예언자]의 敎訓[교훈]보다 低劣[저열]한 것이 아니며, (二) 더군다나 그의 요시아王[왕]에 對[대]한 높은 讚詞[찬사](22:15, 16), (三) 621~608年[년]까지에 그가 比較的[비교적] 沈默[침묵]을 지킨 것, (四) 改革運動[개혁운동]의 中心人物[중심인물]인 샤반一家[일가]가 그에게 바친 꾸준한 忠誠[충성](36:10~20) 이런 것들이다. 그가 決[결]코 改革運動[개혁운동]을 公公然[공공연]하게 反對[반대]하지 않고 오히려 贊意[찬의]를 表[표]했다는 것을 暗示[암시]한다고 볼 수 밖에 없다.
- 주전 621~608년의 ‘침묵’은 요시야의 개혁이 진행되는 동안 예레미야가 이를 묵인 혹은 긍정적으로 지지했음을 방증하는 역사적 공백기로 해석된다.
- 예레미야가 개혁에 찬동했을 것이라는 학계 다수의 견해를 지지하며, 바알 종교 타파라는 공통된 목적, 요시야 왕에 대한 긍정적 평가, 개혁 기간 동안의 예언적 침묵, 사반 가문과의 연대 등 네 가지 구체적인 논거를 제시한다.
-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예레미야가 개혁 운동을 반대하지 않고 찬동의 뜻을 표명했음을 이끌어내며, 단편적인 성서 기록들을 종합해 예언자의 정치·종교적 동선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하는 뛰어난 성서학자적 역량을 보여준다.
5. 고향 아나돗 사람들의 암살 음모와 ‘이 언약’의 정체
뿐만아니라 그의 故鄕[고향] 아니돗 사람들이 그를 죽이려고까지 한 理由[이유]도 亦是[역시] 그가 그 地方祭司[지방제사]의 直系[직계]이면서 그 地方[지방]의 여호와 祭壇[제단]을 破壞[파괴]하는 데 直接贊同[직접찬동]했다는 것을 憤激[분격]해 한 所行[소행]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리고 그가 유다 모든 城邑[성읍]과 예루살렘에서 傳播[전파]했다는 所謂[소위] 「이 언약」(This Covenant)(11:8)이 그때 宣布[선포]한 申命記原本[신명기원본]이었다는 것은 그다지 不當[부당]한 推斷[추단]이 아닌 줄 안다.
- 아나돗(고향)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암살하려 했던 동기가 지방 산당을 폐지하는 요시야의 개혁에 그가 찬동하여 고향 제사장들의 기득권을 침해했기 때문이며, 그가 외친 ‘이 언약’이 곧 신명기 개혁의 율법책일 것이라고 추론한다.
- 예언자가 당하는 고난과 핍박이 단순히 추상적인 말씀의 선포 때문이 아니라, 현실의 기득권(지방 제사장 계급)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구체적인 역사적 실천에서 비롯되었음을 신학적으로 규명한다.
6. 성서 텍스트의 저작권 문제에 대한 통전적 해석
勿論[물론] 이 部分[부분]은 예레미아의 自作[자작]이 아니오, 申命記的[신명기적] 加筆[가필]이라는 것은 文體[문체]와 內容[내용]을 보아 是認[시인]안 할 수 없는 事實[사실]이나 本是[본시] 예레미아書[서]가 그의 書記[서기]로 있는 그리고 申命記運動[신명기운동]과 密接[밀접]한 關係[관계]를 가진 바룩의 手記[수기]한 것이며 예레미야의 自作[자작]이 아니라 할지라도 예레미아의 宣布[선포]한 事實[사실]에 照[조]하여 그의 容許[용허]를 얻어 바룩이 스스로 써넣을 수도 있는 것이니 自作與否[자작여부]는 그다지 큰 問題[문제]될 것이 아닌가 한다.
- ‘신명기적 가필’은 후대 신명기 학파나 편집자(바룩 등)가 신명기의 신학적 관점으로 본문의 문체를 윤색하거나 보충했음을 의미한다.
- 예레미야 11장의 ‘이 언약’ 관련 구절이 서기관 바룩 등에 의한 ‘신명기적 가필(편집)’일 수 있다는 학계의 문서비평적 지적을 수용하면서도, 그것이 예레미야의 본래 정신과 사실에 기반한 것이기에 신학적으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본다.
- 비평학적 연구 성과를 정직하게 수용하면서도, 문자주의적 집착에 빠지지 않고 ‘예언자의 본래적 선포 사실’이라는 본질적 진실성에 무게를 두는 장공의 열려있는 성서관이 잘 나타난다.
7. 세속 권력에 종속되지 않는 예언자의 영적 독립성
이런 모든 證左[증좌]로 보아 예레미아가 改革運動[개혁운동]에 參與[참여]했다는 것을 認定[인정]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가 그저 政府[정부]나 祭司長[제사장]의 指揮[지휘]를 받아 一個[일개]의 使喚[사환]처럼 움직였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니 이는 그의 性格上[성격상]으로 보든지 그의 豫言者的[예언자적] 權威[권위]로 보든지 決[결]코 妥當[타당]치 못한 推斷[추단]인 까닭이다. 생각컨대 이때에 그는 預言者[예언자]의 權威[권위]로 이 運動[운동]에 對[대]한 여호와의 是認[시인]을 宣言[선언]하고 그윽히 그 하회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 ‘사환(使喚)’은 잔심부름을 하는 종을, ‘하회(下回)’는 어떤 일의 결과나 앞날의 추이를 뜻한다.
- 예레미야가 개혁에 참여하고 지지했다 하더라도, 결코 국가 권력이나 제사장 체제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것이 아니라, 예언자 본연의 독립적 권위로서 그 개혁에 대한 하나님의 승인을 선언하고 향후 추이를 지켜보는 주체적 위치에 있었음을 역설한다.
- 종교가 국가 권력의 시녀로 전락하는 것을 경계하며, 예언자는 세속 권력의 선한 개혁에 협력할 때조차 철저히 하나님 앞에 선 단독자로서의 비판적 거리와 영적 독립성을 유지해야 함을 강조한다.
[6] 개혁의 한계와 종교적 타락의 재발
1. 암살 위협을 넘긴 예언자의 침묵과 예리한 관망
그 本鄕[본향] 사람들의 可憎[가증]한 陰謀[음모]를 겨우 벗어난 예레미아는 沈默[침묵]과 瞑想[명상]과 祈禱[기도]로 近十年[근십년]동안의 고요한 生活[생활]을 이어 갔었다. 요시아王[왕]의 賢政[현정]과 宗敎改革[종교개혁]의 運動[운동]에 그윽한 期待[기대]를 가지고 고요히 그러나 날카롭게 모든 경구을 살피면서 그는 마음조리는 沈默[침묵]을 지켜온 것이다.
- ‘경구(경과나 추이)’를 살핀다는 것은 국가적 개혁 운동이 일시적 유행에 그치지 않고 백성들의 삶 속에 어떻게 뿌리내리는지 철저히 감시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 『신학지남』, 『낙수』, 『김재준 저작전집』에는 “경구을 살피면서”라는 표현 대신에 “傾向[경향]을 살피면서”로 표기되었다.
- 고향 아나돗 사람들의 암살 음모라는 치명적 위기를 넘긴 후, 약 10년 동안 예레미야가 요시야 왕의 개혁이 진정한 열매를 맺기를 기도하며 예의주시했던 내면적 침묵의 시기를 묘사한다.
- 예언자의 ‘침묵’은 단순한 도피나 방관이 아니라, 역사적 변혁의 추이를 날카롭게 통찰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명상과 기도의 시간’이었음을 강조한다. 겉으로는 고요해 보이나 속으로는 애타게 조국을 염려하는 예언자의 긴장된 내면(‘마음조리는 침묵’)을 포착한다.
2. 서민 종교의 깊은 뿌리와 외형적 개혁의 실패
「庶民[서민]의 宗敎[종교]」 이것은 그렇게 容易[용이]하게 없어질 것이 아니었다. 도끼를 들어 그 나무를 베어 넘어뜨릴 수 있었으나 그 뿌리는 너무나 깊히 庶民[서민]의 마음속에 뻗히어 있었던 것이다. 改革運動[개혁운동]은 期待[기대]하던 效果[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 산당 철폐와 우상 파괴라는 외형적(제도적) 개혁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의 마음속 깊이 뿌리내린 기복적이고 감각적인 ‘서민의 종교(바알 신앙)’는 쉽게 근절되지 않았으며, 결국 요시야의 개혁이 본질적인 한계에 부딪혔음을 진단한다.
- 참된 종교 개혁은 제도나 의식의 타파(‘나무를 베어 넘어뜨림’)만으로는 불가능하며, 인간 내면의 근본적인 영적 갱신(‘뿌리를 뽑음’)이 수반되어야 함을 역설하는 장공의 깊은 통찰이 담겨 있다.
3. 제의 중앙집권화의 부작용과 성직자들의 타락 논리
數[수]없는 地方[지방]의 失業祭司[실업제사]들은 首都[수도]예루살렘으로 모여 들었다. 이 祭司群[제사군]의 生活[생활]을 保障[보장]하려면 不得不[부득불] 祭物[제물]을 많이 받아 들여야 할 것이며 祭物[제물]이 불어나려면 儀式[의식]의 必要[필요]를 高潮[고조]하고 律法[율법]과 聖殿[성전]에 對[대]한 狂信的[광신적] 態度[태도]를 助長[조장]하여야 할 것은 當然[당연]한 추세이다.
- ‘실업제사(失業祭司)’는 개혁으로 인해 제사 지낼 곳을 잃은 지방 제사장들을 가리키며, 이들이 율법과 성전을 절대화(‘광신적 태도’)하는 배후에는 결국 ‘생존과 경제적 이익’이 도사리고 있었음을 폭로한다.
- 지방 산당 폐지로 인해 직업을 잃은 제사장들이 예루살렘으로 몰려들었고, 이들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성전 제물이 더 많이 필요해지면서, 필연적으로 성전 의식과 율법에 대한 광신주의가 조장되는 구조적 타락의 과정을 고발한다.
- 종교 제도의 중앙집권화가 도리어 성직자 집단의 경제적 이익 수호와 결탁될 때, 신앙이 어떻게 기득권 유지의 도구로 전락하는지를 날카롭게 해부한다. 제도 종교의 맹점과 성직주의의 부패를 비판하는 장공 특유의 예언자적 시각이 잘 드러난다.
4. 도덕적 생명의 질식과 맹목적 의식주의로의 회귀
그리하여 여호와의 宗敎[종교]는 또 다시 儀式[의식]과 미신에 빠져서 그 道德的[도덕적] 生命[생명]은 窒息狀態[질식상태]에 들고 말았던 것이다.
- 결과적으로 요시야의 위대한 개혁은 본래의 취지를 상실한 채, 여호와 신앙을 다시금 맹목적인 제의주의와 미신으로 전락시켰고, 신앙의 본질인 윤리적·도덕적 생명력을 완전히 마비(질식)시키고 말았다는 비극적 결론이다.
- 장공은 신앙의 본질을 ‘의식(Ritual)’이 아닌 ‘도덕적 생명(Moral Life)’에서 찾으며, 윤리가 결여된 종교적 열광은 결국 미신에 불과하다는 뼈아픈 진리를 예레미야 시대의 실패를 통해 현재적으로 재해석한다.
[7] 종교 개혁의 타락과 율법의 우상화에 대한 예언자의 의분
1. 개혁의 타락을 목도한 예언자의 침울과 서기관들의 위선
예레미야의 瞑想[명상]이 이 宗敎改革[종교개혁]의 隨落[수락]에 미쳤을 때 그의 가슴은 極度[극도]로 침울하였다. 申命記法典[신명기법전]이 아무리 훌륭하고 여호와의 聖意[성의]에 符合[부합]된다 할지라도 因緣[인연]없는 百姓[백성]들은 마치 戰場[전장]에서 날뛰는 말처럼 걷잡을 수 없이 제 마음대로 달아나고(8:6) 간교한 書記官[서기관]들은 그들의 거짓 붓을 들어 祭物[제물]의 種類[종류]만 添記[첨기]하고 있다.
- ‘수락(隨落)’은 타락하여 떨어짐을 의미한다. ‘인연(因緣)없는’은 하나님의 말씀과 내면적이고 생명적인 관계를 맺지 못한 영적 단절 상태를 뜻하며, ‘첨기(添記)’는 본래의 율법에 자신들의 탐욕을 채울 규례를 거짓으로 덧붙여 기록했음을 말한다.
- 종교 개혁이 본질을 잃고 타락해 가는 현실을 깊이 묵상하던 예레미야가 극심한 우울과 절망에 빠졌음을 묘사한다. 율법 체계가 훌륭해도 백성들은 통제 불능 상태로 죄를 향해 치닫고, 율법을 다루는 서기관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제물 규정만 교묘하게 덧붙이는 기득권 세력으로 전락했음을 고발한다.
- 제도적 개혁(신명기 법전)이 인간의 내면적·영적 변화를 수반하지 않을 때 얼마나 무기력해지는지를 보여준다. 종교 지도자들(서기관)이 율법의 근본정신을 왜곡하고 제의주의적 탐욕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악용하는 종교적 타락의 전형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2. 도덕적 부패 속에서 율법을 부적으로 삼는 군중의 기만
民衆[민중]은 날로 聖殿[성전]과 律法[율법]에 對[대]한 미신으로 빠져 들어가고 欺瞞[기만]과 犯罪[범죄]가 兄弟[형제]사이에 公公然[공공연]하게 늘어가되 저들은 「토라(律法冊)가 우리에게 있으니 平安[평안]은 우리의 것이라」고 壯談[장담]한다.
- 사회적 차원에서는 형제간의 기만과 범죄가 만연하는 등 도덕적 타락이 극에 달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은 율법책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평안을 보장하는 부적처럼 여기며 거짓된 위안과 착각에 빠져 있음을 지적한다.
- 윤리적 실천이 결여된 신앙이 어떻게 미신적 기복주의로 변질되는지를 보여준다. 장공은 ‘토라(율법책)’의 물리적 소유나 지식이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음을 강조하며, 종교적 외형에 기대어 도덕적 책임을 회피하는 거짓 평안의 실체를 폭로한다.
3. 바알을 대체해버린 성전과 율법의 우상화
聖殿[성전]은 바알의 祭壇[제단]을 代身[대신]하여 「物神[물신]」이 되고 律法[율법]은 바알을 代身[대신]하여 偶像[우상]이 되어간대도 過言[과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 요시야의 개혁으로 바알 신앙의 외형은 제거되었으나, 그 자리를 예루살렘 성전과 신명기 율법이 차지하여 새로운 형태의 ‘물신(物神)’과 ‘우상(偶像)’으로 전락해 버렸다는 충격적인 선언이다.
- 신앙의 대상이어야 할 참된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방편이자 수단인 ‘성전’과 ‘율법’ 그 자체가 숭배의 대상으로 절대화되는 종교의 자기모순을 정조준한다. 여호와 신앙이라는 이름 아래 자행되는 더 교묘하고 합법적인 우상 숭배의 본질을 간파한 장공의 탁월한 통찰이 빛나는 대목이다.
4. 서기관들의 조작을 향한 예언자의 끓어오르는 의분
그의 고요한 생각이 이에 미치자 그는 預言者的[예언자적] 義憤[의분]에 못이겨 이렇게 부르짖었는가 한다.
「어떻게 너희가 말할 수 있겠느냐!
우리는 智慧[지혜]있노라
여호와의 법전(Torah)이 우리에게 있노라고
보아라 書記官[서기관]들의 거짓 붓이
이것을 거짓되게 하고 말았다.」
- 개혁의 처참한 변질을 고요히 관조하던 예레미야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율법을 소유했다는 이유만으로 스스로 지혜롭다 자부하는 자들과 그 율법을 조작하는 서기관들의 위선을 향해 거룩한 분노를 터뜨리는 예레미야 8장 8절의 절규이다.
- 예언자의 명상이 무기력한 체념이나 방관에 머물지 않고 불의를 향한 ‘거룩한 의분’으로 폭발하는 역동적인 영성을 보여준다. 진리가 기득권의 유지 도구로 조작되는 현실에 대한 타협 없는 고발이다.
5. 신명기 운동의 한계와 예레미야의 치열한 객관성
當時[당시]에 記錄[기록]된 여호와의 法典[법전]이라면 申命記[신명기]밖에 없었을 것이며 이것이 예레미야가 申命記[신명기] 運動[운동]에 對[대]한 一種[일종]의 失望[실망]을 말한 것이라 함은 그리 不當[부당]한 論斷[논단]이 아닐 것이다.
- 예레미야가 분노하며 언급한 ‘여호와의 법전’은 역사적 정황상 요시야 개혁의 근간이 된 ‘신명기’를 가리키며, 이 외침은 결국 예레미야가 기대했던 신명기적 개혁 운동의 타락에 대한 뼈아픈 실망과 비판을 담고 있다는 역사비평적 결론을 내린다.
- 한때 자신이 찬동하거나 기대했을지도 모를 개혁 운동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본질을 벗어나 부패할 때는 과거의 입장에 얽매이지 않고 지체 없이 비판의 날을 세우는 예레미야의 치열한 예언자적 객관성과 독립성을 다시 한번 입증한다.
제2부. 국가적 위기와 예언자의 내면적 갈등
요시야 왕의 전사 이후 유다 왕조는 몰락의 길을 걷지만, 대중과 거짓 예언자들은 거짓 평안에 취해 있었다. 홀로 멸망을 경고하던 예레미야는 극심한 조롱을 받으며 자신의 출생마저 저주하는 뼈아픈 내적 고뇌를 겪게 된다.
[8] 요시야의 죽음과 눈물의 예언자, 그리고 새로운 진리의 잉태
1. 성군 요시야의 비극적 죽음과 짙어지는 국가적 암운
이러한 危機[위기]에 므긷도로부터 悲報[비보]가 날라왔다. 다윗후에 처음보는 明君[명군] 요시야王[왕]은 棺[관]속 옛사람으로 궁중에 돌아오게 되었다. 공포와 混亂[혼란], 음산과 미신, 首都[수도]의 분위기는 어둡고 무거웠다.
- 주전 609년, 요시야 왕이 애굽(이집트)의 느고 2세를 막으려다 므깃도에서 전사한 사건(열왕기하 23장 29절)을 가리킨다.
- 종교 개혁이 부패해 가는 내적 위기 속에서, 유다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요시야 왕마저 므깃도 전투에서 전사하여 주검으로 돌아오자, 예루살렘 전체가 걷잡을 수 없는 공포와 혼란, 미신적 절망에 휩싸이게 된 역사적 비극을 묘사한다.
- 정치적·종교적 구심점의 상실이 어떻게 한 국가의 영적 타락과 혼란을 가속화하는지를 보여준다. ‘관 속 옛사람’이라는 문학적 표현을 통해 헛되이 무너져버린 세속적 희망의 덧없음을 부각한다.
2. 맹목적 낙관주의에 빠진 거짓 예언자들과 비극을 직감한 참된 예언자
나훔의 니느웨에 對[대]한 預言[예언]이 成就[성취]된 것을 본 거짓 預言者[예언자]들은 이사야의 「시온 불가침」의 預言[예언]을 狂信[광신]하고 오히려 樂觀的[낙관적] 預言[예언]만 말하고 있었으나 참된 預言者[예언자]에게는 오직 慘劇[참극]만 豫感[예감]되었었다.
- ‘나훔의 니느웨에 대한 예언’은 구약 성경 나훔(Nahum)서의 핵심 주제로, 당시 남유다를 잔인하게 압제하던 대제국 앗수르(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Nineveh)’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받아 철저하게 파멸하고 멸망할 것이라는 예언이다.
-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가 멸망(주전 612년)하는 것을 본 거짓 예언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은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는 과거 이사야의 예언을 기계적으로 맹신하며 평안을 외쳤으나, 참된 예언자인 예레미야는 도덕적 타락에 따른 피할 수 없는 멸망의 참극을 내다보고 있었음을 대비한다.
- 시대의 맥락이 거세된 교조주의적 신학(시온 불가침 사상)이 어떻게 대중의 눈을 가리는 거짓 종교로 전락하는지를 비판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고정된 부적이 아니라 시대의 도덕적 현실에 따라 역동적으로 해석되어야 함을 시사한다.
3. 몰락하는 왕조의 명멸과 예레미야의 가중되는 짐
悲劇[비극]의 王子[왕자] 여호와 아하쓰, 새 임금 여오야김, 시온의 기울어지는 王業[왕업]은 走馬燈[주마등]같이 展開[전개]되었다. 그러나 事態[사태]는 오직 이 悲嘆[비탄]의 預言者[예언자]에게 무거운 짐을 하나씩 둘씩 더하는 것밖에 다른 것이 없었다.
- 요시야 사후, 애굽에 포로로 끌려간 여호아하스, 애굽의 꼭두각시로 세워진 여호야김 등 유다 왕조가 급격히 몰락해 가는 역사적 격변 속에서, 그 멸망을 선포하고 지켜보아야만 하는 예레미야의 정신적 고통과 사명적 무게가 갈수록 무거워졌음을 서술한다.
4. 다가올 도륙을 슬퍼하는 ‘눈물의 예언자’의 절규와 고독
「오- 내 머리가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샘(泉[천])되었던들!
내 百姓[백성]의 殺戮[살육]을 爲[위]해
밤과 낮을 울고나 지낼 것을」
悲嘆[비탄]이 그 極[극]에 達[달]한 때 그는
「오- 내가 저 사막에
길손의 居處[거처]나 가졌던들
차라리 내 百姓[백성]을 떠나
아주 가 버리고나 말 것을」
- 동족의 처참한 살육을 앞두고 밤낮으로 통곡하고자 하는 한없는 애조와, 동시에 철저히 타락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백성들을 떠나 사막으로 도피하고 싶은 극단의 절망감이 교차하는 예레미야 9장 1~2절의 독백이다.
- 장공은 이 대목에서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예언자적 의무’와 철저히 부패한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은 ‘인간적 나약함/염증’ 사이에서 찢어지는 예레미야의 실존적 고뇌를 문학적이고 극적으로 포착해 낸다.
5. 절망과 환멸을 뚫고 잉태된 ‘새 언약’의 영적 진리
이 悲痛[비통]은 萬代[만대]를 通[통]하여 뜻있는 이로 하여금 눈물없이는 읽을 수 없게 하는 深刻[심각]한 場面[장면]의 하나이거니와 그렇다고 그가 아주 주저앉은 것은 勿論[물론] 아니었다. 그에게는 새로운 서광이 비치며 새로운 힘이 생기기 始作[시작]하였다. 이 말할 수 없는 苦痛[고통]은 새 眞理[진리]의 탄생을 爲[위]한 괴로움이었던가 한다.
- 극단적인 슬픔과 비통함 속에서도 예레미야는 결코 파멸로 끝나지 않았으며, 그 철저한 고통의 심연 속에서 비로소 이전에 없던 완전히 새로운 영적 진리(새 언약)가 탄생하는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었음을 통찰한다.
6. 외면적 종교의 한계 극복과 신앙의 내면화(정신화)
그는 이 申命記運動[신명기운동]에 對[대]한 「幻滅[환멸]의 悲哀[비애]」랄까를 通[통]하여 儀式主義[의식주의]의 아주 無意味[무의미]한 것과 여호와 宗敎[종교]와 道德生活[도덕생활]의 絶對不可分的[절대불가분적] 關係[관계]와 여호와와 그 禮拜者[예배자]와의 사이에 있는 「言約[언약]」의 精神化[정신화]에 한 躍進的[약진적] 理解[이해]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 예레미야가 신명기 개혁 운동의 실패와 환멸을 뼈저리게 경험함으로써, 껍데기뿐인 의식주의(제사)를 완전히 폐기하고, 여호와 신앙은 곧 도덕적 실천이라는 굳건한 인식에 도달했음을 밝힌다. 나아가 돌판(율법책)에 새겨진 외적 언약이 아닌, 마음속에 새겨지는 언약의 ‘정신화(내면화)’라는 혁명적이고 도약적인 신학적 이해로 나아갔음을 핵심적으로 요약한다.
- 장공 신학의 절정을 보여주는 문장이다. 예레미야 31장의 ‘새 언약’ 사상이 단순히 계시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국가적 파멸과 제도 종교의 타락에 대한 철저한 환멸, 그리고 예언자 자신의 뼈를 깎는 실존적 고통과 사색의 용광로를 거쳐 도출된 ‘위대한 영적 도약(약진)’임을 증명하고 있다.
[9] 성전 설교를 통한 예언자의 투쟁과 핍박
1. 침묵을 깬 예언자의 재기(再起)와 성전 앞의 투쟁
그에게는 다시 한번 일어나 싸움할 때가 왔다. 그는 聖殿門[성전문] 어구에 서서 儀式主義[의식주의]와 聖殿狂信者[성전광신자]들을 向[향]하여 가장 날카로운 宣言[선언]을 내렸다.
- 개혁의 실패와 국가적 위기 속에서 깊은 침묵과 환멸을 겪었던 예레미야가, 내면에서 잉태된 ‘새 진리’를 무기 삼아 다시 떨치고 일어나 부패한 종교의 심장부인 성전 문 앞에서 의식주의자들을 향해 투쟁을 선포하는 역사적 장면을 묘사한다.
- 참된 예언자는 시대의 절망 앞에 주저앉아 도피하는 자가 아니라, 철저한 고독과 고뇌의 끝에서 얻은 영적 깨달음을 가지고 가장 타락한 현실의 한복판(성전)으로 돌진하여 실천적으로 싸우는 투사(鬪士)임을 강조한다.
2. 율법주의적 구원관의 허구성과 도덕적 타락에 대한 뼈아픈 고발
「여호와가 말씀하시기를
이런 잘못 引導[인도]하는 말을 믿지말라 「여호와의 聖殿[성전], 여호와의 聖殿[성전], 여호와의 聖殿[성전]이 이것이라」고… 무엇이란 말이냐. 도적질하고 殺人[살인]하며 姦淫[간음]하며 盟誓[맹서]하며 바알에게 祭祀[제사]하고 그리고서는 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는 救援[구원]을 얻었다고 - 이런 가증한 일을 犯[범]하려고! 너희는 내 집을 强盜[강도]의 소굴로 여기느냐」
- 유명한 예레미야 7장의 ‘성전 설교’ 대목으로, 일상에서는 살인, 간음, 우상 숭배 등 온갖 비윤리적 범죄를 자행하면서도 성전 뜰만 밟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착각하는 백성들의 기만적 신앙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 도덕적 실천(윤리)이 결여된 제의(성전 예배)는 무가치함을 넘어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강도의 소굴’)로 규정지음으로써, 맹목적 성전 신앙을 철저히 분쇄하고 윤리와 신앙의 일치를 촉구하는 장공의 통전적 신학이 대변된다.
3. 거짓 평안을 깨뜨린 예언적 선포와 기득권층의 격노
이 勇敢[용감]한 挑戰[도전]은 勿論[물론] 貧心[빈심]이 가득한 王[왕]과 祭司[제사]들이며 迷路[미로]에 든 狂信輩[광신배]들의 激怒[격노]를 샀을 것이다.
- 문맥상 ‘빈심(貧心)’은 기득권층의 탐욕을 뜻하는 ‘탐심(貪心)’의 원문 오기로 보이며, ‘미로(迷路)에 든 광신배’는 신앙의 참된 본질(윤리적 실천)을 잃고 성전이라는 껍데기만 맹신하는 타락한 군중을 날카롭게 지칭한 표현이다.
- 타협 없는 예레미야의 정면 도전이 부패한 왕실과 성전 제사로 이익을 얻는 제사장들, 그리고 맹목적인 기복주의에 빠진 어리석은 군중들의 거센 분노와 반발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음을 통찰한다.
4. 조롱과 비난 속에 홀로 선 예언자의 고독과 시련
特[특]히 그는 아직도 預言者[예언자]로서의 權威[권위]가 確立[확립]되지 못한 初期[초기]이었음으로 조소 능욕 비난의 소리가 公[공]으로 私[사]로 그에게 퍼부어졌을 것이며 어떤 者[자]는 그의 첫 宣言[선언]인 北方[북방]으로의 兵亂[병란]이 成就[성취] 안된 것을 들어 증거삼아 非難[비난]도 했을 것이다.
- 당시는 예레미야가 아직 확고한 종교적 권위를 인정받지 못한 사역 초기였기에, 성전 설교 이후 혹독한 사회적 조롱과 인신공격에 직면했음을 서술한다. 특히 과거 그가 경고했던 ‘북방에서 오는 재앙’이 즉각적으로 실현되지 않은 점이 반대자들에게 훌륭한 공격 빌미가 되었음을 짚어낸다.
- 예언자의 삶은 세상의 인정과 환호가 아니라, 절대 고독 속에서 조롱과 비난을 견디며 하나님의 진리를 사수해야 하는 험난한 가시밭길임을 현실적으로 조명한다. 외적인 예언의 지연(북방 병란의 미성취)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외쳐야만 하는 예언자의 실존적 고뇌가 담겨 있다.
[10] 핍박 속의 실존적 회의와 내면적 정화
1. 기득권과의 충돌과 선악 구도에 대한 예언자의 절망
이렇게하여 當時[당시]의 指導階級[지도계급]과 正面衝突[정면충돌]한 그는 받은 것이 오직 凌辱[능욕]과 冒瀆[모독]이었다. 東洋人[동양인]의 軟[연]한 感情[감정]을 가진 그는 또 다시 疑惑[의혹]과 苦憫[고민]에 잠기게 되었다. 그가 믿는 여호와는 惡[악]을 罰[벌]하고 善[선]을 賞[상]하는 全能[전능]하고 義[의]로우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惡人[악인]의 勢力[권세]은 善[선]을 누르고 뻗쳐 나가는 데, 오직 하나 여호와의 使者[사자]인 그는 홀로 웃음거리 밖에 되는 것이 없으니 이것이 무슨 일이냐.
- 타협 없는 성전 설교로 인해 지도층과 충돌한 후 혹독한 능욕을 겪으며, 예레미야가 선악에 대한 전통적 인과응보 신앙과 모순된 현실 사이에서 깊은 딜레마에 빠졌음을 서술한다.
- 전능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사자가 오히려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고 악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 속에서, 예언자가 겪는 뼈아픈 신정론(神正論)적 갈등을 포착한다. 장공은 이를 ‘동양인의 연한 감정’이라는 표현으로 예레미야의 여리고 섬세한 인간적 본성에 대비시켜 고뇌의 깊이를 부각한다.
2. 소명과 출생에 대한 근원적 저주와 비애
그의 마음의 振子[진자]는 멀리 그의 出生[출생]에까지 돌아갔다. 왜 내가 태어났느냐.
「너를 배안에 形成[형성]하기 前[전]에 내가 너를 알았고 네가 그의 胎[태]에서 나오기 前[전]에 내가 너를 聖別[성별]하였다.」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이었다. 아-얼마나 큰 祝福[축복]이냐. 그러나 지금까지의 生活[생활]은 어떠한가 悲哀[비애], 嘲笑[조소], 凌辱[능욕]의 연쇄가 아닌가. (20:7, 8 參照[참조])
「「咀呪[저주]」받아라 내 난날-
내 어머니가 나를 낳은 날은
祝福[축복]에서 떠나라.」
- 모태에서부터 성별되었다는 찬란한 초기 소명의 축복과, 현실에서 겪는 치욕의 연쇄가 극명하게 대비되면서 자신의 출생 자체를 저주하는 예레미야 20장의 탄식을 다룬다.
- 사명을 감당하는 과정에서 겪는 인간적 한계와 극도의 비애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거룩한 소명이 곧 현세적 평안을 담보하지 않으며, 오히려 십자가의 고난으로 이어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3. 소명의 약속과 현실적 치욕의 괴리
「내가 오늘 너를 세워 - 鐵[철]기둥 구리담이 되게 하리니
- 저희가 싸우나 이기지 못하리라. 이는 내가 너와
함께 있음이니라.」
이것이 預言者[예언자]로서 召命[소명]받을 때 여호와의 말씀이었다. 그러나 實狀[실상]은 어떠한가. 여호와의 말씀은 끊임없는 恥辱[치욕]을 招致[초치]한 것밖에 다른 것이 없었다.
- 소명 당시 약속받았던 강력한 보호(철기둥과 구리담)와 달리, 현실에서 마주한 예언자의 삶은 끊임없는 치욕과 모욕의 연속이었다는 엄혹한 괴리를 서술한다.
-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과 약속이 세상의 영광이나 안위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 속에서 뼈아픈 고난과 핍박을 낳는 예언자의 모순된 실존적 현실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4. 하나님을 향한 항변과 불가항력적 예언적 충동
여호와는 自己[자기]가 모독을 받고 自己[자기]의 使者[사자]가 恥辱[치욕]을 當[당]하게 하시기 鳥[위]하여 預言者[예언자]를 세우셨는가? 萬無[만무]한 일이다. 그러면 차라리 預言[예언]을 그만두자. 그리하여 여호와에게 辱[욕]을 돌리지않고 그의 使者[사자]에게 부끄러움을 더하지 않고 百姓[백성]들에게 죄를 더하지 않게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당신이 나를 속이셨소이다. 여호와여! 그리고 나는 속았오이다.」
그러나 여호와의 神[신]으로 불타는 그의 內的[내적] 衝動[충동]은 마치 피어 오르는 숯불을 가슴에 담고 뼈속에 넣은 것같아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 개역개정 예레미야 20장 7절에서는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라고 완곡하게 번역되어 있지만, 히브리어 원어(파타, פָּתָה)의 ‘꾀다, 속이다’라는 뉘앙스를 살려 옛 문헌이나 외국어 성경(NIV 등)에서는 “당신이 나를 속이셨소이다”라는 표현이 있다.
- 차라리 예언을 포기하려 하고 심지어 하나님께 속았다고 거칠게 항변하지만, 골수에 사무친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억지로라도 선포할 수밖에 없는 불가항력적 사명감을 묘사한다.
- 신을 향한 극도의 원망(인간적 감정)과 신의 강권적인 역사(예언자의 사명) 사이에서 격렬하게 충돌하는 실존적 분열을 그린다. 예언자의 삶이 개인의 의지를 뛰어넘는 신적 강권에 붙잡혀 있음을 탁월하게 증명한다.
5. 비판의 화살을 내면으로 돌린 자기 객관화와 겸손
이렇게 자기 衝突[충돌]과 矛盾[모순]에 苦憫[고민]하는 그는 여호와를 부르며 모든 惡法[악법]에 對[대]한 복수를 懇願[간원]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正義感[정의감]을 만족시키고 따라서 苦憫[고민]에서 벗어나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自然人[자연인]의 本能的[본능적] 衝動[충동]을 苦執[고집]함으로 因[인]하여 義[의]의 문제를 解決[해결]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안될 일이다.
때가 지남을 따라 그에게는 다시 고요한 理性[이성]과 거룩한 양심이 恢復[회복]되었다. 그의 批評[비평]의 눈은 다른 사람에게서 떠나 自己[자기]에게로 옮기게 되었다. 果然[과연] 나는 絶對[절대]로 義[의]롭고 다른 사람만이 不義[불의]한 것이었는가. 나의 理性[이성]은 여호와의 秘義[비의]와 窮極[궁극]의 目的[목적]까지도 解得[해득]할 수 있을만치 맑아지고 깨끗한가. 그리고 내 마음의 척도는 여호와의 마음을 잴만치 正確[정확]하고 또 거룩한가. 그가 自己[자기] 마음의 깊은 속을 고요히 들여다 보았을 때 그는 謙遜[겸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무엇보다도 믿지 못할것은 마음이다.
그리고 또 病[병]들었나니
누가 能[능]히 알리오.」
-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개역개정, 예레미야 17:9). “病[병]들었나니”라는 표현은 히브리어 원어 ‘아나쉬(אָנַשׁ)’의 본래 뜻인 ‘치유하기 어려울 정도로 병들고 나약하다’는 의미를 아주 정확하게 살려낸 옛 번역이다.
- 초기에는 반대자들에 대한 본능적 복수심(자연인의 충동)에 불탔으나, 점차 이성을 회복하고 비판의 화살을 외부에서 자신의 내면으로 돌려 인간 본성의 철저한 부패와 교만을 깨닫는 내적 전환을 이룬다.
- 정의감이라는 이름 뒤에 숨은 자아의 교만을 직시하는 대목이다. 세상의 불의를 꾸짖던 예언자가 자기 내면의 심연을 들여다보고, 오직 하나님만이 그 마음을 감찰하실 수 있다는 절대 주권 앞에서 철저히 엎드리는 겸손의 영성을 보여준다.
5. 적나라한 자아의 탁전(託傳)과 내면적 종교의 승화
마음을 살피고 생각을 시험하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라(17:10 參照[참조])고 그는 謙遜[겸손]하게 여호와앞에 꿇어 업디어 그의 祭壇[제단]위에 赤裸裸[적나라]한 自己[자기]의 生活[생활]을 펼쳐놓고 祈願[기원]을 드리었다.
「당신은 나의 찬송이오매.
고쳐주옵소서 여호와여!
그리하면 내가 낫겠나이다.
구원해주옵소서.
그리하면 내가 救援[구원]받겠나이다.」
그는 이제 그의 性格[성격]과 私生活[사생활]에 貴[귀]한 것과 賤[천]한 것이 섞여 있음을 自認[자인]하였으나 豫言者的[예언자적] 公生涯[공생애]에 있어서는 決[결]코 私意[사의]로 한것이 없음을 여호와 앞에 呼訴[호소]하며 그의 憐憫[연민]을 求[구]하게 되었다.
「내 입에서 나온말이
당신앞에 그대로 놓여 있소이다.
나에게 두려움이 되지 말아 주소서.
患難[환난]때에 당신은 나의 避亂處[피난처]로소이다.」
- 자신의 성격과 사생활에 뒤섞인 천박함(인간적 모순)을 인정하며, 오직 하나님의 치유와 구원만을 전적으로 의지하여 자신의 벌거벗은 삶 전체를 제단 위에 바치는 철저한 복종의 기도를 올린다.
- 율법이나 제도가 아닌, 통회하는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과 단독자로 대면하는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신앙(새 언약)’의 본질이 예레미야의 이 실존적 기도를 통해 성취되고 있음을 입증한다.
6. 겟세마네의 극복과 새롭게 갱신된 소명
이렇게 하여 겟세마네의 쓴잔은 지나갔다. 여호와의 慰勞[위로]와 憐憫[연민]은 그에게 다시금 이슬같이 내리었다.
「네가 萬一[만일] 돌아오면 내가 너를 돌이키리라.
그리하여 내 앞에 서게하리라.
네가 萬一[만일] 값싼 것이 섞이지 않은
貴[귀]한 것을 말한다면
내 입같이 네가 되리라」
「내가 너를 이 百姓[백성]들 앞에
銅城[동성]같이 굳세게 하리니
저희가 너를 向[향]해 싸울지라도
이기지 못하리라.」
- 십자가를 앞둔 예수의 겟세마네 기도와 같은 치열한 내면의 투쟁을 통과한 예레미야에게 마침내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고, 어떠한 핍박에도 무너지지 않는 ‘놋 성벽(銅城)’과 같은 불굴의 예언자로 소명이 갱신되는 승리의 결론이다.
- 예레미야가 겪은 참혹한 내면적 위기가 단순한 절망이나 파국이 아니라, 내면에 섞인 ‘값싼 것’을 태워 없애고 순전한 하나님의 입(도구)으로 거듭나기 위한 위대한 영적 연단의 과정이었음을 선언한다.
제3부. 내면의 갈등과 영적 정화
하지만 예레미야는 이 참혹한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대신 자기 자신을 철저히 돌아보게 된다. 성령으로 내면이 정화된 그는 마침내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한 치의 흔들림 없는 굳건한 예언자로 다시 서게 된다.
[11] 성령으로 정화된 인격과 죽음을 초월한 담대함
1. 내적 투쟁을 통과한 예언자의 흔들림 없는 재선포
自然[자연]의 衝動[충동]이 聖靈[성령]으로 淨化[정화]된 거룩한 人格[인격]은 참으로 銅城[동성]같이 움직임이 없었다. 그는 또다시 聖殿[성전]에 서서 罪惡[죄악]으로 가득한 聖殿[성전]과 首都[수도]에 내릴 審判[심판]을 宣告[선고]하였다. (26:46)
- 괄호 안의 ‘(26:46)’은 문맥상 타락한 성전과 성읍에 대한 심판을 경고하는 예레미야 26장 4절~6절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며, 원문 조판이나 전사 과정에서 발생한 오기로 추정된다(예레미야 26장은 총 24절로 구성됨).
- 뼈를 깎는 내면의 겟세마네 투쟁을 거치며 인간적인 복수심이나 비애(자연의 충동)가 성령으로 완전히 정화된 예레미야가, 어떤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는 ‘놋 성벽(동성)’과 같은 단단한 인격으로 거듭나 다시 한번 타락한 성전과 예루살렘의 멸망을 선포하는 장면이다.
- 철저한 고난과 회의를 통과한 신앙이 얼마나 견고하고 담대해질 수 있는지를 증명한다. 장공은 진정한 예언자적 용기가 단순히 타고난 기질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불순물이 성령으로 타 없어지는 ‘정화’의 과정을 통해서만 완성됨을 강조한다.
2. 감상을 극복한 영적 권위와 세상의 무기력함에 대한 통찰
祭司[제사]와 民衆[민중]은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하고 외치며 「一濟[일제]히 몰려들었다」(九절) 그러나 이제 그는 感傷的[감상적] 詩人[시인] 노릇하기에는 너무나 굳세고 높았었으며 世人[세인]은 그의 敵[적]노릇하기에는 너무나 弱[약]했었다.
- 사형을 요구하며 몰려드는 제사장과 군중들의 폭력적인 위협 앞에서도 예레미야는 더 이상 과거처럼 슬픔과 회의에 빠지는 연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세상을 압도하는 숭고한 영적 권위를 지니게 되었음을 묘사한다.
- ‘감상적 시인’에서 ‘죽음을 초월한 투사’로의 질적 도약을 선언하는 명문장이다. 물리적 폭력을 휘두르는 다수의 세상(세인)이, 도리어 하나님과 온전히 연합한 고독한 단독자(예언자) 앞에서는 적수조차 될 수 없을 만큼 영적으로 무기력하고 초라한 존재임을 문학적 대비를 통해 통쾌하게 갈파한다.
3. 죽음의 공포를 넘어선 절대 신앙과 순교자적 선포
그는 고요한 그러나 確信[확신]에서 나오는 힘있는 목소리로
「보아라 나는 여기 너의 손에 있으니 너의 願[원]하는대로 무엇이든지 하여라. 그러나 너희가 나를 죽이면 한 무고한 피를 너희 머리위에, 또 이 都市[도시]에 더한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두어야 하리라. 이는 眞實[진실]로 여호와가 내려보내셔서 이 모든 말을 너희 귀에 말해 들린 까닭이다.」(26:14,15)고 對答[대답]하였다.
- “여호와가 내려보내셔서”라는 표현을 『신학지남』에는 “여호와가 나를 보내서서”라고 표현하고 있다. 예레미야 26장 14-15절을 보면 『신학지남』의 표현이 맞다.
-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쥔 무리들 앞에서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도리어 자신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큰 범죄임을 고요하고 당당하게 경고하며, 끝까지 하나님의 메신저로서의 정체성을 굽히지 않는 예레미야 26장 14~15절의 숭고한 답변이다.
- 생존에 대한 본능적 집착을 완전히 탈각한 예언자의 궁극적 자유를 보여준다. 자신의 목숨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위탁함으로써 육신을 핍박하는 자들 앞에서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진리를 수호하는, 예언자적 사명과 순교자적 영성이 일치된 최고조의 상태를 웅장하게 그려내고 있다.
제4부. 역사적 성취와 예언적 확신
마침내 바벨론에 의해 유다가 멸망하며 그의 예언은 참된 진리로 입증된다. 눈에 보이던 국가와 성전이 모두 무너진 그 완벽한 폐허 위에서, 예레미야는 돌판이 아닌 마음속에 새겨지는 위대한 ‘새 언약’을 발견한다.
[12] 북방 병화의 역사적 성취와 예언적 통찰의 완성
1. 20년의 지연과 거짓 예언자로 낙인찍힌 고독
北方[북방]으로부터의 兵禍[병화]를 豫言[예언]한지 二十年[이십년], 아직도 그 成就[성취]를 보지못한 그는 거짓말쟁이, 믿지못할 豫言者[예언자]라고 嘲笑[조소]와 凌辱[능욕]을 밥먹듯 하고 있었다.
- 북방에서 재앙이 올 것이라는 무서운 심판을 처음 선포한 지 무려 20년이 지나도록 현실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예레미야가 대중들로부터 거짓말쟁이로 낙인찍혀 극심한 조롱과 모욕을 일상처럼 견뎌야 했음을 서술한다.
- 하나님의 시간(카이로스)과 인간의 시간(크로노스) 사이의 아득한 괴리 속에서, 진리를 외치는 자가 감내해야 하는 뼈아픈 현실적 고독과 핍박의 인내를 조명한다.
2. 대중의 우롱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신앙
들리는 말은 「어디 여호와의 말씀이 있느냐 곧 臨[임]하게 해 보아라」(17:14) 하는 愚弄[우롱]의 소리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었던 것을 疑心[의심]하지 않았다.
- 인용된 구절은 예레미야 17장 15절(“보라 그들이 내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어디 있느냐 이제 임하게 할지어다 하나이다”)로, 원문에는 17장 14절로 오기되어 있으나 내용상 15절의 노골적인 불신앙을 인용한 것이다.
- 백성들이 하나님의 심판이 지연되는 것을 노골적으로 비웃으며 예언자를 우롱했음에도 불구하고, 내면의 정화를 거친 예레미야는 자신이 받은 계시가 변함없는 하나님의 진리임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확고하게 믿었음을 강조한다.
3. 갈게미스 전투와 세계사의 대격변
때는 二十年[이십년]을 지난 주전 605~604년 갈디아와 애급의 두 獅子[사자]는 앗시리아란 죽은 고기덩이를 가운데 놓고 갈게미쉬에서 最後[최후]의 決鬪[결투]를 試[시]하였다.
- 마침내 주전 605년경, 신흥 강국인 바벨론(갈대아)과 전통적 강호 애굽(이집트)이 몰락한 앗수르의 패권을 온전히 차지하기 위해 유프라테스 강변 갈게미스에서 세계사적인 패권 전쟁을 벌이게 된 역사적 사실을 극적으로 묘사한다.
- 강대국들의 거대한 패권 다툼을 ‘죽은 고깃덩이를 둔 두 사자의 짐승 같은 결투’로 비유하며, 제국주의적 권력 쟁탈전의 허무함과 그 배후에서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꿰뚫어 보는 장공의 날카로운 역사의식을 보여준다.
4. 끓는 가마의 환상, 마침내 쏟아지는 심판의 현실로
그리하여 後者[후자]의 패주와 함께 北方[북방]의 끓는 가마는 마침내 地中海[지중해]가로 넘쳐 쏟아지게 되었다.
- 갈게미스 전투에서 후자(애굽)가 대패하고 바벨론이 승리함으로써, 예레미야가 소명 초기에 보았던 ‘북방에서 기울어진 끓는 가마’의 끔찍한 환상이 바벨론 군대의 유다(지중해 연안) 침공이라는 참혹한 현실로 마침내 폭발하듯 실현되었음을 선포한다.
5. 예언의 성취와 반대자들을 향한 통쾌한 반문
北方兵禍[북방병화]의 豫言[예언]이 여호와의 말씀되기에 不足[부족]한 것이 무엇이냐? 그리고 聖殿[성전]과 首都[수도]가 滅亡[멸망] 하리란 豫言[예언]이 妄發[망발]이라던 者[자]들이 지금 어디 있느냐.
- 마침내 들이닥친 북방의 환난을 통해 예레미야의 선포가 한 치의 오차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음이 역사 앞에 입증되었음을 강조하며, 예언자를 핍박하고 거짓 평안(시온 불가침)을 앵무새처럼 외치던 자들의 허구성을 통렬하게 묻고 있다.
- 참된 진리는 당장의 현실적 성취 여부나 다수의 여론(광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궁극적 심판대 위에서 반드시 그 참과 거짓이 엄정하게 가려진다는 역동적인 진리관을 역설한다.
6. 예언적 통찰의 만개(滿開)와 우뚝 선 신앙적 확신
이때부터 예레미아는 得意[득의]의 豫言者[예언자]이었으며 따라서 여호와에 對[대]한 確信[확신]이 날로 더하고 國家將來[국가장래]에 對[대]한 통찰이 더욱 明哲[명철]하게 되었다.
- 역사의 전개를 통해 자신의 소명과 계시가 명백히 입증된 이후, 예레미야는 조롱받던 위축된 상태에서 벗어나 영적 주도권을 쥔 당당한(’득의의’) 예언자로 우뚝 섰으며, 이에 따라 하나님에 대한 앎이 깊어지고 민족의 멸망과 구원을 꿰뚫어 보는 혜안(통찰)이 비상하게 맑아졌음을 서술한다.
- 20년의 극심한 고난과 회의를 이겨내고 마침내 입증된 신앙이, 개인의 영적 시야를 얼마나 넓고 명철하게 확장시키는지를 입증한다. 짙은 허무주의(이생망)의 시대 속에서도 끝까지 진리를 붙드는 자가 결국 역사를 해석하고 미래를 여는 진정한 승리자가 됨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13] 유다의 멸망과 예언자적 사역의 비극적 종막
1. 폭풍우 속의 철기둥과 놋 성벽
몰려치는 暴風雨[폭풍우]가운데 있어서 그는 참으로 鐵住[철주], 銅城[동성]같은 存在[존재]이었다.
- 바벨론의 침공이라는 국가적 멸망의 거대한 폭풍우가 몰아치는 역사적 격동기 한가운데서, 예레미야가 마침내 어떠한 시련과 핍박에도 요동치 않는 굳건한 존재로 우뚝 섰음을 묘사한다.
- 소명 초기 하나님이 약속하셨던 ‘철기둥과 놋 성벽’(렘 1:18)의 계시가, 치열한 내면적 연단과 모진 역사적 시련을 거쳐 마침내 예언자의 인격 속에 온전히 성취되었음을 보여준다.
2. 피와 눈물로 얼룩진 예언자의 평생과 유다의 파국
不義[불의] 橫暴[횡폭]한 王[왕]을 책망하며 썩어지고 俗化[속화]한 祭司[제사]들을 꾸짖으며 自意[자의]로 豫言[예언]하는 거짓 豫言者[예언자]들과 싸우며 귀머거리 같은 庶民[서민]들을 爲[위]해 嘆息[탄식]하며 淺見短慮[천견단려]의 政客[정객]을 敎導[교도]하는 피와 눈물로 짜내인 多端[다단]한 平生[평생]도 이제 허사였던가 주전 587년 反逆[반역]의 族屬[족속] 유다는 北方[북방]으로 잡혀가고 여호와의 新婦[신부]같은 聖都[성도]는 荒廢[황폐]한 옛터만 남기게 되었다.
- ‘천견단려(淺見短慮)’는 식견이 얕고 생각이 짧은 어리석은 정치인들의 근시안적 외교 정책을 꾸짖는 표현이다. 국가를 살리려던 예언자의 삶이 외면적으로는 ‘허사’로 돌아간 것처럼 보이는 극적인 역설을 담고 있다.
- 부패한 권력자, 타락한 종교인, 무지한 백성들을 상대로 피와 눈물을 흘리며 투쟁했던 예레미야의 다단한 평생이 무색하게도, 주전 587년 유다가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고 예루살렘 성도가 폐허로 전락하는 비극적 역사를 압축적으로 요약한다.
- 국가의 멸망은 예언자의 실패가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의 성취임을 시사한다. 거짓 평화를 외치던 자들의 기만은 철저히 무너지고, 고독한 예언자의 피눈물 나는 경고만이 진리였음이 폐허가 된 역사 위에 명백히 증명된다.
3. 역사적 심판의 종료와 구시대의 막(幕)
暴風雨[폭풍우]는 지나갔다. 막은 닫히었다.
-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 함락이라는 참혹한 심판(폭풍우)이 마침내 종료되었으며, 유다 왕국이라는 역사적 무대가 비극적으로 막을 내렸음을 선언하는 문학적이고 장엄한 결론이다.
- 눈에 보이는 국가(제도)와 건물 성전 중심의 낡은 구약적 종교 시대가 완전히 끝났음을 선언하는 마침표다. 장공은 이 비극적 장막이 닫힘으로써, 역설적으로 모든 외형적 껍데기가 무너진 폐허 위에서 예레미야가 그토록 고뇌하며 잉태했던 ‘내면적 종교(새 언약)’의 새로운 시대가 비로소 열리게 됨을 깊은 여운으로 암시하고 있다.
[14] 극단의 절망 속에서 피어난 새 언약의 절정
1. 마지막 정치적 희망의 붕괴와 영적 체험의 최고조
그윽히 屬望[속망]하던 異國[이국]의 治者[치자] 그달리아가 미즈바에서 凶劒[흉검]에 넘어진後[후] 이 老豫言者[노예언자]의 靈的[영적] 經驗[경험]은 그 절정에 達[달]했으니 곧 「새 言約[언약]의 豫言[예언]」이 그것이다.
- 그달리아(Gedaliah)는 바벨론 제국이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유다 왕국을 멸망시킨 후, 유다 땅에 남아 있던 백성들을 다스리도록 임명한 최초의 유대인 총독(통치자)이다. 예레미야 40-41장과 열왕기하 25장에 그에 대한 기록이 등장한다.
- 국가가 멸망한 뒤 한 줄기 희망으로 기대했던 총독 그달리야(유다 유민들을 다스리도록 바벨론이 세운 총독)마저 미스바에서 암살당하는 극단적인 절망적 상황 속에서, 노년의 예언자 예레미야의 영적 체험이 마침내 구약 계시의 최고봉인 ‘새 언약’에 도달했음을 서술한다.
- 국가, 성전, 그리고 마지막 남은 정치적 구심점(그달리야)마저 모두 무너진 철저한 폐허 위에서 비로소 가장 위대한 영적 도약이 일어남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인간이 의지하던 모든 외형적 대상이 파괴된 진공의 상태에서, 비로소 인간의 내면을 향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구원 역사가 시작됨을 선언한다.
2. 돌판의 종교에서 마음의 종교로의 전환 (새 언약 인용)
「내가 내 法律[율법]을 저희속에 두고 저들의 마음속에 새기리라, 그리고 나는 저희의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 百姓[백성]이 되리라, 그때는 각사람이 서로 또 각기 그 이웃을 向[향]하여 여호와를 알라고 가르치지 않을 것이니 이는 적은 者[자]로부터 큰 者[자]까지 다 나를 앎이라. 내가 저희 不義[불의]를 容恕[용서]하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않으리라」
- 돌판에 새겨진 외형적 율법이나 제도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속에 직접 새겨지는 율법, 즉 제도적 중재자 없이 누구나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여 알고 완전한 죄 용서함을 받는다는 예레미야 31장 33~34절의 ‘새 언약’의 정수를 직접 인용한다.
- 예레미야가 평생토록 홀로 겪어내야 했던 치열한 내면의 고뇌와 뼈를 깎는 정화의 경험이, 마침내 이스라엘 전체 인류를 향한 ‘내면적이고 인격적인 신앙’으로 승화되는 결론부이다. 껍데기뿐인 율법주의와 성전 체제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개인이 영(靈)으로 단독 대면하는 기독교적 복음의 핵심(신약의 서곡)이 예레미야의 찢겨진 삶과 계시를 통해 비로소 완성되었음을 웅장하게 보여준다.
제5부. 결론 : 종교의 내면화와 예언자의 위대함
결과적으로 예레미야의 치열한 삶은 껍데기뿐인 종교를 무너뜨리고, 하나님과 개인이 직접 대면하는 내면적 신앙을 잉태하여 신약 시대를 여는 위대한 징검다리가 되었다.
[15] 기독교적 영성의 예비와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찬탄
1. 구약 종교의 한계 극복과 신약(그리스도) 시대로의 예비
이리하여 不純[불순]한 儀式的[의식적] 國家的[국가적] 宗敎[종교]는 道德的[도덕적] 靈的[영적] 個人的[개인적] 宗敎[종교]로 淨化[정화]되어서 그리스도의 길을 豫備[예비]하였다.
- 예레미야의 고난과 내면적 투쟁, 그리고 ‘새 언약’의 선포를 통해, 과거 이스라엘의 외형적이고 집단주의적인 종교(불순한 의식적, 국가적 종교)가 비로소 내면적 진실성과 인격적 교제를 중시하는 참된 신앙(도덕적, 영적, 개인적 종교)으로 승화되었으며, 이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시대를 여는 결정적인 징검다리가 되었음을 요약한다.
- 장공 신학의 정수가 집약된 핵심 문장이다. 종교의 본질이 화려한 성전 건물이나 국가적 제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단독자로 대면하는 ‘개인적이고 영적인 인격 관계(인격주의 신학)’에 있음을 명확히 선언한다. 나아가 구약의 고독한 예언 전통이 단절된 것이 아니라, 질적 도약을 거쳐 신약의 기독론으로 완벽하게 이어짐(구속사적 연속성)을 밝히고 있다.
2. 하나님의 구속사에 대한 찬양과 예언자를 향한 흠모
우리는 이제 神[신]의 遠大[위대]한 經輪[경륜]을 讚嘆[찬탄]함과 同時[동시]에 不世出[불세출]의 大豫言者[대예언자] 예레미야의 一生[일생]을 앙모하여 마지 않는다.
- ‘원대(遠大)한 경륜’은 역사를 주관하시고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깊고 오묘한 구원 계획을 뜻한다(원문 한자 遠大는 ‘위대’보다는 ‘원대’로 읽는 것이 타당함). ‘불세출(不世出)’은 세상에 좀처럼 나타나기 힘들 만큼 매우 뛰어남을 의미한다.
- 국가적 멸망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파국 속에서도 한 인간의 처절한 내면 연단을 통해 인류 구원의 새로운 차원(새 언약)을 열어가신 하나님의 크고 깊은 섭리에 감격하는 동시에, 그 고난의 통로로 기꺼이 자신을 내던진 위대한 예언자 예레미야의 숭고한 삶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표하며 글을 맺는다.
- 단순한 인물 평전을 넘어선 신앙 고백적 결론이다. 장공 스스로가 일제강점기와 해방 전후의 암울하고 혼란스러운 민족 현실 속에서, 당대의 거짓 평화와 타협하지 않고 예레미야처럼 고독하지만 참된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하고자 했던 자신의 내면적 다짐과 투영을 이 마지막 문장에 깊이 담아내고 있다.
결론 : 종교의 내면화와 예언자의 위대함
결론적으로 예레미야의 치열하고 파란만장한 생애는 껍데기만 남은 의식적이고 국가적인 제도 종교의 한계를 철저히 무너뜨리는 거룩한 과정이었다. 그는 훌륭한 법전을 앞세운 요시야의 신명기적 개혁조차 결국 기득권의 탐욕과 성전의 우상화로 변질되는 것을 목도했다. 이를 통해 도덕적 실천과 윤리적 생명이 결여된 외형적 신앙이 얼마나 무기력하고 기만적인 미신에 불과한지를 자신의 온 삶을 던져 고발했다.
특히 불의한 세상 속에서 예언자가 겪어야 했던 뼈를 깎는 내면적 투쟁과 겟세마네와 같은 고뇌는 단순한 절망이나 파국으로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조롱과 핍박이라는 시련은 예언자 내면의 값싼 것들을 태워 없애고 거룩한 인격으로 정화하는 위대한 연단의 용광로가 되었다. 이 극한의 고통 속에서 잉태되어 선포된 ‘새 언약’은, 돌판에 새긴 율법이나 제사장의 중재를 뛰어넘어 마음속에 율법을 새기고 하나님과 개인이 직접 대면하는 도덕적·영적·개인적 종교로의 참된 갱신을 이루어냈다. 이는 곧 구약의 불순한 제의주의를 극복하고, 내면화된 신앙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시대를 예비하는 구속사적이고 결정적인 징검다리가 된 것이다.
바벨론 침공과 유다의 멸망이라는 거대한 국가적 파국 역시 예언자의 실패가 아니었다. 성전과 왕조, 마지막 정치적 구심점마저 모두 붕괴된 절대 무(無)의 폐허 위에서 비로소 이 내면적 신앙의 절정이 활짝 피어났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비극적 역사 속에서도 한 인간의 처절한 고독과 연단을 통로로 삼아, 인류 구원의 새로운 차원을 열어가시는 하나님의 원대하고 오묘한 섭리를 깊이 찬탄하게 된다.
시대의 징조에 눈먼 대중과 거짓 평화를 외치던 지도자들 사이에서, 세속과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철기둥과 놋 성벽’처럼 고독한 예언자의 길을 걸어간 예레미야의 숭고한 일생은 결코 과거의 죽은 역사로 머물지 않는다. 시대적 절망의 한가운데서도 영적 독립성을 잃지 않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진리를 사수했던 불세출의 대예언자가 남긴 궤적은, 오늘날 세속화된 현실을 살아가는 독자들에게도 참된 신앙의 본질과 예언자적 실존이 무엇인지 묵직하고 깊은 울림을 남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