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2:3-7] 참 평화를 누릴 시대가 오리라 – 1987년 3월 22일, 김상근 목사

8월 04, 2026

참 평화를 누릴 시대가 오리라

1987년 3월 22일 / 예레미야 22장 3-7절 / 전북노회


[회상 노트]

전북지역 교역자들이 9일 째 금식기도를 하고 있었다. 고문과 폭력에 저항하는 금식기도였다. 연합기도회가 열렸고 나는 강사로 초청되어 갔다. 금식기도의 뜻을 밝혀야 했고, 오랜 금식을 끝낼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했다.

그 즈음 나도 구류를 살고 나왔다. 2월 21일에 경찰에 연행되어 23일 밤에 즉결재판을 받았다. 혼자 받은 즉결재판이었지만 기관원들일 것 같은 몇 방청인들(?)의 감시를 받으며 정식재판처럼 진행되었다. 7일 구류를 선고받고 동대문경찰서 유치장에 갇혔다.

카투사 김용권 상병이 군부대 내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친구인 운동권 학생의 소재지를 대라는 조사를 몇 차례 받은 일이 있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그는 내무반에서 목을 매 자살한 것으로 발표되었다. 대책위는 고문에 의한 타살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했고, 성명을 발표했다. 이를 빌미로 위원장인 나와 인권위원회 김동완 사무국장, 유태선 간사를 가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당시 정권은 폭력이 아니면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을 만큼 위기에 몰려 있었던 것이다. 폭력을 공격하는 것은 저들의 아킬레스 건을 치는 것이었다. 1월 14일, 박종철 서울대 학생을 고문하여 죽인 사건은 거대한 항쟁의 단초가 되고 있었다. 그 저항의 중심에 있는 기독교 세를 초기에 꺾어 놓겠다는 계책이었을 것이다. 또 이미 ‘6월 민주항쟁’이 꿈틀거리고 있었고, 기독교가 역시 그 중심에 있었다. 저들은 우리 기독교를 억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열흘 동안 수 백 명이 면회를 왔었다. 그것은 일종의 ‘면회 투쟁’이었다. 그리고 종로 5가 큰 길 가에 있는 기독교회관에 대형 현수막이 걸렸다. 7층 벽 가득히 대문짝만한 항의 구호가 붙었다. 두 번이나 큰 집회가 열렸고 김대중, 김영삼 두 야당 지도자도 격려 방문을 했다. 그들의 치졸한 계획은 우리를 오히려 더욱 크게 만들었다. 더욱 강하게 단결하게 만들었다.

고문과 폭력은 그들 정권을 급격하게 붕괴시키는 역기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를 누가 따라 잡을 수 있을 것인가!


[슬라이드]















[설교 전문]


최근 소위 시국 사범 재판정은 이미 권위를 잃어버렸다. 당국은 역시 힘으로 권위를 되찾겠다고 결심한 모양이다. 재판정에서 함부로 야유를 하거나 박수를 치는 경우 구속하겠다고 엄포를 놓고 또 실제로 몇 사람을 구속하였다. 부천경찰서에서 성적 모욕을 당했던 권 양 재판에서 재판부와 검사를 나무라고 교도관의 모자를 벗겨 검사에게 집어던진 구속자 가족을 구속한 것이다. 구속한다고 떨어진 권위가 제자리로 올라온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사실 재판에 나올 때 검사는 물론 판시들까지도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으리라 추측된다. 재판정에서 떳떳한 태도가 아니라고 보이기 때문이다. 또 고분고분하여 저 검사는 제법 양심껏 할 것 같다는 기대를 가지는 경우도 있지만 구형을 할 때 보면 딱딱거리는 검사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을 보아도 앞서는 본심이요 뒤의 구형 때는 본심이 아닌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낳기 때문이다.

며칠 전 나도 즉결 재판을 받고 구류를 살았다. 한 사건에 세 사람이 조사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었다. 7일 구류가 나왔다. 인권위 사무국장은 내가 쓴 성명, 내 명의로 된 성명을 기자들에게 나누어준 행위밖에 없다. 나를 재판한 판사가 아닌 다른 판사가 판결했는데 역시 7일 구류가 나왔다. 인권위 간사는 조사를 하고 보니 그 사건과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 그러면 당연히 내주어야 한다. 그런데 그도 역시 7일 구류고 재판한 판사도 역시 다른 사람이었다. 이러한 경험을 하고 보면 판사는 꼭두각시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하여 조종되고 있다는 의구심을 아니 가질 수 없다.

사법부의 폭력 집단화, 이런 의구심을 갖게 되는 때 그 법정에 대하여 신성하다는 의식을 갖게 될 리가 만무한 것 아닌가? 법정 모독, 공무집행방해죄 운운하면서 얼러대기 전에 당국은 왜 법정이 이 모양이 되어 버렸는가를 깊이 생각하고 스스로 결단을 해야 한다. 방청인들이 검사의 고뇌를 보게 되고 판사 - 재판관의 의연한 자세, 의연한 판결을 보게 된다면 누가 모자를 벗겨 던지겠으며 누가 법정에서 찬송가를 부르겠는가? 근원적인 문제는 덮어둔 채 눈만 크게 뜨고 목소리만 높이는 것은 가장 천박한 처사요 폭력을 신으로 섬기는 자들의 행위일 뿐이다.

“재판관들은 뇌물을 주어야 재판을 하고 집권자는 멋대로 억울한 선고를 내리는구나”(미가 7:3).

법조인들이 자기의 법리대로, 법조인의 양식대로 재판을 할 수 없다면 이것은 이 나라의 큰 불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누가 저들을 이렇게 만들어 버렸는가? 그 책임을 누가 질 것인가? 나는 하루 속히 검사나 판사가 그야말로 법조인으로서의 양심에 입각하여 재판에 임하는 세상이 오기를 바라고 기도한다.

법조인들이 그 지경이 되어 버리는 형편이라면 보이지 않는 손과 더 가까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경찰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오늘날 경찰은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명령이니 할 수 없다.’는 무책임한 태도는 이 나라를 망하게 할 것이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과연 이 나라를 어떻게 만드는 일인가?’ - 이것을 생각할 수 없다면 소위 고위 경찰을 담당할 자질이 없는 것 아닌가?

작년 10여 개월 동안에 경찰은 소위 최루탄이라는 화학탄 31만 발을 쏘았다. 돈으로 환산하면 60억 원 이상 어치나 되는 것을 그대들 경찰이 국민을 향하여 쏘아댄 것이다. 1984년부터 1986년 11월까지 약 61만 발의 화학탄을 쏘았고, 그것을 사들인 값이 약 117억 원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1984, 85년 2년 동안에 30만 발, 작년 10개월 동안에 31만 발을 쏘았다. 얼마나 함부로 쏘고 있는 것인가?

왜 이렇게 엄청난 경비를 쓰고 있으며, 수십만 발의 화학탄을 쏘아댄 것이 정당하고 바른 일이라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쏘아댔다’는 표현에 이의를 제기할지 모르겠다. 치안을 위한 것인데 쏘아댄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 할지 모르겠다. 적어도 우리의 경험으로는 쏘아대는 것이다. 여러분이 지난 강희남 목사 재판에 방청하려다 맞은 화학탄은 불가피한 것인가? 아니면 쏘아댄 것이라고 느끼고 있는가? 정당한 행위였다면 누가 7일씩이나 금식하며 폭력 퇴치를 기도하겠는가?

‘2ㆍ7 박종철 군 추도회’에 가기 위하여 오후 1시 30분 3ㆍ1 빌딩 앞까지 갔다. 경찰이 철통처럼 막아서 있어 더 가지 못하고 엉거주춤 서 있었다. 순간 경찰은 최루탄을 내 주변에 마구 던졌다. 내가 어떤 행위를 한 것도 아니다. 치안에 위협을 가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내가 있는 곳에 사람들이 30여 명 모였을 뿐이다. 모이면 무엇이 어떻게 된다고 그렇게 여러 발을 던져대느냐?

경찰서 전기 스위치 위에 ‘절전’이라 쓰여 있다. 잘하는 일이다. 수도 꼭지 위에는 ‘절수’라 써 놓았다. 그것도 잘하는 일이다. 그렇게 전기도 수돗물도 절약하면서 국민에게 쏘는 화학탄만은 마구 쓰고 있다. 전기를 한 달 아껴 보았자 그 총액이 화학탄 몇 발 값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국민에게 쏘는 것만은 아낄 필요가 없다고 한다면 온전한 정신이라 할 수가 없는 것 아닌가? 우리 경찰이 왜 이렇게 되어 버렸는가?

‘전투경찰’이라는 이름도 잘못되었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고 범죄를 예방하는 것이 경찰의 본분이라면 ‘경찰’ 앞에 ‘전투’라는 말이 왜 붙었나? 누구를 상대하여 전투를 한다는 것인가? 도시게릴라를 북한에서 보내게 될 때 등을 대비하여 만들었다고 말한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대 국민용으로 부리고 있지 않는가? 또 우리가 어디에 모이면 영락없이 전투경찰이 둘러싼다. 그러고는 지휘자가 예외 없이 ‘작전 개시!’라고 한다. 이것은 국민을 향하여 전쟁을 한다는 의식을 갖고 있는 것이다. 또 경찰을 부를 때 ‘병력’이라 한다. 병력 철수니 병력 배치니 한다. 국민에 대하여 웬 ‘전투’며 ‘작전’이며 ‘병력’인가? 경찰의 적은 과연 국민이란 말인가?

경찰도 ‘우리’를 위하여 존재해야 한다. 경찰이 있으므로 해서 이 나라 이 사회가 밝고 명랑해지며 건강해져야 한다. 그러나 경찰이 있는 곳에 아우성이 있고 경찰이 가는 곳에 불안과 공포가 생긴다면 이 어찌된 일인가? 참으로 슬프고 불행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너희는 내 백성을 원수같이 다루었다. 평화롭게 사는 백성을 덮치고 마음 놓고 지나가는 백성을 전쟁 포로인 양 옷을 벗겼다”(미가 2:8).

경찰도 이 사회의 한 구성원인 이상 내가, 우리가 하는 일이 이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인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요구를 하기에 우리 경찰은 이미 넘을 수 없는 선을 넘어 버린 것 같다. 벌써 1년 4개월쯤 전에 일어난 일이지만 아마 여러분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사건이 있었다.

“‘형님, 이건 내가 잡은 겁니다.’ ‘야 임마, 내가 잡은 거야. 이 손 놓지 못해.’ 29일 낮 1시 55분 연세대 정문 앞에서는 미문화원 농성사건 배후 조종 혐의로 6개월간이나 수배를 받아 온 전학련 삼민투위원장 겸 연세대 총학생회장 정태근 군(22ㆍ경제과 4년 제적)의 검거를 놓고 형사들 사이에 일대 수라장이 벌어졌다.

정 군을 검거하는 사람에게 돌아갈 혜택은 1계급 특진에 현상금 1백만 원. 이 매력적인(?) 포상 내용 때문에 형사들은 서로 한 치의 양보도 하려 들지 않았다. 정 군의 옷깃이라도 붙잡으려고 달려들었던 경찰 10여 명의 승강 속에서 양팔을 반대쪽으로 꺾이고 고개는 뒤로 젖혀진 채 정 군은 ‘벗겨진 신발을 신게 해달라.’고 호소했으나 막무가내였다. 시위 학생들은 이미 교문 안 깊숙이 밀려나 달아날 수 없는 상황이 었다. … 

정 군은 이날 정오부터 연세대 도서관 앞에서 있었던 ‘전학련 12차 대회’에서 ‘그동안 경찰을 피해 다니느라 노숙을 하며 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나의 고통보다 나로 인해 가족과 학우들이 겪는 고통 때문에 몹시 괴로웠다.’고 토로했다. 정 군은 대회에 앞서 관할 서대문경찰서에 전화로 행사가 끝난 뒤 자수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평소 정 군의 사진을 수첩에 끼워 다니던 서대문서 형사들은 교문 앞까지 나온 정 군이 달아나지 않고 그대로 서 있자 ‘1계급 특진과 1백만 원’이라는 꿈을 안고 일제히 정 군에게 달려들었던 것. 하지만 정 군의 팔 다리 머리카락까지 당기며 승강을 벌였던 ‘형사들의 꿈’은 서대문경찰서 정보과에서 정 군이 자수했다고 시경에 보고함으로써 그야말로 ‘꿈’으로 끝나고 말았다.”(동아일보, 1985.11. 30일치)

어떻게 이리 될 수 있을까? 그게 무슨 짓인데. 여기 참으로 비참한 몇 가지가 적시되어 있다. 정 군을 잡는 사람에게 돌아갈 혜택이 1계급 특진에 1백만 원 상금이라는 사실이다. 자기 아들 같고 동생 같을 텐데. 또 흉악범이나 국가 대역 죄인도 아니요 적국인도 아닌데 이게 다 무슨 짓인가? 그래, 그렇게 해서라도 1계급이 특진되고 1백만 원을 받아서 좀 생활이 나아지고 출세를 했다 하자. 그러면 그것이 무언가? 인간이 인간다움을 잃으면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왜 잊는 것인가?

도대체 신고, 검거라는 것이 인륜성을 상실하면 부도덕하게 되는 것이다. 이돈명 변호사가 평소에 잘 알고 지내는 이부영 씨를 숨겨 주었다 하여 징역을 살고 있고, 천주교의 신부가 교인을 숨겨 주었다고 징역을 살았다. 그러면 신고해야 했다는 것인가? 이 무슨 소리냐? 여기는 인간의 사회다. 신고해야 할 일이 따로 있는 법이다. 신고만이 최고의 가치가 되어 버린 이 삭막한 사회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삼촌이 집을 나갔다가 7년쯤 지나서 집에 돌아오게 되었다. 그는 형님과 비슷하게 생긴 아이가 옛집 앞에서 놀고 있어 돈 천 원을 주며 이것저것 물어보았는데 수상한 사람이라 여겨져 신고되었다고 한다. 삼촌을 신고하도록 삭막하게 만든 것을 과연 잘했다 할 것인가?

한두 가지 폭력 경찰의 실태를 밝혀 보자. 이러한 실정 가운데서 김근태 씨가 자신이 받은 폭행과 고문을 폭로했고, 이에 격분한 교회 지도자들과 NCC가 1985년 11월에 고문 및 폭력대책위원회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경찰 당국은 고문과 폭력이 전혀 없다고 잡아떼었다. 급기야 고문이 자행되고 있다고 유언비어를 날조하는 자를 색출하여 엄벌에 처하겠다고 얼러대기까지 했다. 고문과 잔학 행위를 당한 사람에게 ‘너 유언비어를 함부로 말하면 잡아넣겠다.’고 한다면 거기에 일말의 양심이 과연 있는 것인가? 그것은 공갈 협박 사범이나 하는 짓일 뿐이다.

NCC가 고문 및 폭력대책위원회를 조직한 후 재야에서는 고문 및 용공조작공동대책위원회가 조직되었다. 고문ㆍ폭력뿐 아니라 용공 조작까지 한다고 국민이 인식하게 되었다면 이 사회는 갈 데까지 가 버린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공산주의자, 혹은 용공 분자로 규정당하면 그것은 곧 사회적 사형 선고다. 그런데 이것을 함부로 휘두르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고 우리는 염려하는 것이다. 갑자기 국가 보안 사범이 늘어날 리가 없다. 그럼에도 1985년 229명, 1986년 461명, 건대 사건에 기소된 학생 중 34%가 국보 사범이었다면 결국 이것은 국가보안법을 적용하여야 하겠다는 정책에서 비롯된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사회적 사형 선고를 남발할 만큼 급해졌다는 것인가?

예수를 재판하여 사형으로 몰고 갈 때도 그랬다.

“이 사람이 이렇게 하나님을 모독했으니 이 이상 무슨 증거가 필요하겠소? 여러분은 방금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듣지 않았소?”(마 26:65)

이것은 2천년 전 국가보안법이다. 하도 국보 사범이 많다 보니 이제 모두가 면역이 되어 버렸다. 처음에는 정말 큰일을 당한 것이라 여겨 펄펄 뛰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국보가 붙었다고 웃고 만다. 또 교도소나 구치소에서도 국보라면 고개를 못 들어야 하는데 제법 거물 노릇을 한다니 이 나라를 어떻게 이렇게 만들었는가?

사실 NCC에 고문 및 폭력대책위, 재야에 공대위가 생겼을 즈음에 당국은 스스로를 냉철하게 돌아보고 회개를 했어야 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아니하였다. 급기야 부천경찰서의 성고문이 권 양에 의해 폭로되고, 부천경찰서 성고문 공동대책위가 조직되기에 이르렀다. 하늘 아래

이 이상 더 부끄러운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아니 경찰이 피의자를 끌어내다가 성적 희롱을 함으로써 진술을 받아내고자 했다면 경찰로서의 최소한의 양식도 없어진 것이고 그것을 지시한 지휘관은 이미 국민의 적일 망정 경찰이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때도 당국은 감출 수 있는 한 감춰 보려고 갖은 짓을 다했다.

나는 이 두 경우 하나님께서 터트리신 일이라고 믿는다. 금수의 나라로 빨려 들어가는 이 나라를 더 이상 방치하지 않으시려는 하나님의 간섭이었다. 아니, 고문, 폭력, 성고문을 막지 못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폭로요 심판이었다. 우리의 부끄러움이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당국은 물론, 우리도 회개했어야 했다. 당국은 이쯤에서 중대한 결단을 했어야 했다. 도덕적 결단을 했어야 했다. 그러나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니 지금도 거부하고 있다. 기어코 2심에서는 1심과 같이 3년을 구형했다. 뉘우침이 없다. 회개를 거부했다. 하나님 앞에서 범죄를 거듭 더해 가기만 하고 있다.

결국 하나님은 변사체로 처리되었을 법한 박종철 군의 고문치사를 세상에 터트리시고야 말았던 것이다. 이것을 폭로시켜도 너희가 가던 길을 돌이키지 않을 것인가 하신 것이었다. 사실 그동안 운동권 학생, 노동자들이 변사체로 발견된 것이 한두 건이 아니었지 않은가? 그런데 박종철 군 사건은 터지고야 말았다. 이때 당국은 결정적인 결단을 했어야 했다. 정권을 맡을 만한 도덕성이 자신에게 있는지 여부를 성실하게 묻고, 없다고 판단되었을 때 스스로 퇴진했어야 한다.

그러나 여러분, 그때도 어떻게 하든지 국민을 속여 보려고만 했지 않았는가? ‘책상을 탁 치니까 억 하고 죽었다.’는 둥 거짓을 늘어 놓았다. 나를 유언비어 죄로 구류를 먹였는데 당시의 치안본부장은 허위 사실 유포다. 그래도 구류도 안 먹는다.

나는 과연 오늘날 도덕성을 철저하게 잃어버린 현 정권, 그리고 우리 사회를 이렇게 만든 현 정권을 과연 인정해야 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생각할 단계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정치는 잘할 수도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도덕성을 잃은 정권은 나라를 망치고 인간을 파괴하고야 만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물리적 폭력 외에 갖가지 폭력에 둘러싸여 있다. 민주화도 개헌도 쉽지 않다. 상상할 수 없는 폭력이 우리에게 가해지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그 말씀을 믿자. 예레미야 22장 3절 이하의 말씀이다.

“법과 정의를 실천하고 억울하게 착취당하는 사람들을 건져 주며, 더부살이와 고아와 과부를 괴롭히 거나 학대하지 말고…”

이것이 정권자의 책임이요 의무다. 오늘 나는 이 정권에 묻고자 한다. 법과 정의를 실천하고 있는가? 억울하게 착취당하는 사람들을 건져 주고 있는가? 아니면 고문과 폭력으로 짓밟고 있는가? 성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너희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 말씀이 바로 이 정권에 대한 하나님의 규정이 아닌가? 하나님의 심판은 이렇다.

“나 이제 너를 사막으로 만들고 그림자도 비치지 않는 성으로 만들리라”(렘 22:6).

이 말씀을 경청해야 한다.

“너를 짓부술 사명을 주어 사람들을 보내리니, 저들은 저마다 도끼를 들고 보기 좋은 너의 송백 기둥을 찍어 불에 넣을 것이다”(렘 22:7).

우리는 누구인가? 사악자를 짓부술 사명을 갖고 여기 이 폭력의 땅에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이다. 우리는 법과 정의를 실천하지 못하는 정권, 약한 자를 착취하고 억압하는 세력을 심판하고 법과 정의를 세울 사명을 갖는다. 우리의 기도는 무엇인가? 우리 손에 든 도끼다. 우리의 금식은 무엇인가? 저들의 보기 좋은 송백 기둥을 찍어 불에 넣을 도끼다. 여러분의 지난 몇 달 동안의 고된 기도는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저 사악한 무리의 송백 기둥을 찍어 불에 던지고야 말 것이다.

국민을 향하여 함부로 힘을 휘두르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 국민을 향하여 화학탄을 쏘아대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 용공 조작으로 국민을 함정에 몰아넣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 하나님의 심판, 우리 손에 들려진 도끼로 기어코 법과 정의가 실현되는 평화의 나라를 이루어 낼 것이다. 억울하게 착취당하는 자를 건져 주는 평화의 나라, 약한 자들이 보호받는 평화의 사회를 이룩해 낼 것이다.

이것은 오늘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직선 대통령제를 쟁취하는 것이다. 국민을 우습게 보기 때문이다. 국민을 얕잡아 보기 때문이다. 국민이 빼앗긴 주권을 되찾아야 한다. 국민을 두려워하게 되어야 한다. 그 길은 결국 국민이 대통령을 뽑고 그 대통령이 국민의 생각을 살피게 되어야 한다. 그때 민주화가 비로소 이루어진다. 만약 이 정권이 민주화를 추진한다면 그것도 자기 정권을 연장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러기에 그것은 민주화가 아니라 속임수다. 이제 우리가 민주화의 주춧돌을 놓자. 대통령 직선제!

오늘 나는 9일씩이나 하나님 앞에 금식으로 기도하신 선배 그리고 동료 동역자, 또한 여러 어려운 여건 속에서 일을 하면서 이 금식 기도에 뜻으로 동참하신 선배, 동료 동역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우리의 기도에 눈에 보이는 증거는 아직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 있다.

예레미야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 하나님의 종들의 투쟁에 이어 하나님은 이렇게 약속하신다.

“이제 이 성에서 전쟁의 상처를 말끔히 씻고 내가 다시 싱싱한 도읍지로 회복시켜 주리니, 시민들이 해방되어 참 평화를 누릴 시대가 오리라. … 그러나 여기에서 또다시 기쁜 소리, 흥겨운 노래, 신랑 신부의 즐거운 소리가 나리라. 사람들은 감사 제물을 들고 내 집에 들어가, ‘야훼는 어지신분, 그 사랑 영원하여라. 만군의 야훼께 감사하여라.’ 하게 될 것이다. … 또다시 목자들이 양떼를 뉘어 쉬게 할 목장이 생기리라. … 그때가 온다. 그는 세상에 올바른 정치를 펼 것이다. 그날 모두들 마음 놓고 살게 되리라”(렘 33:6, 10-12, 16).

여러분의 기도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런 환상을 현실로 가져올 것이다. 이것을 믿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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