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공 깊이 읽기] 실재의 탐구 - 전도서를 읽음

8월 06, 2026

實在[실재]의 探求[탐구] - 傳道書[전도서]를 읽음 -

[출처]

  • 「신학지남」 16권 5호(1934.11), 30-39
  • 『낙수』, 1940년, 13-28.
  • 『장공김재준저작전집(전5권)』 한국신학대학출판부, 1971년, 제1권, 21~27.
  • 『김재준전집(전18권)』 한신대학출판부, 1992년, 제1권, 34~44.


숙독을 위한 안내

이 글은 장공 김재준 목사의 초기 신학 사세와 성서 해석학적 깊이를 보여주는 글인  「실재의 탐구 - 전도서를 읽음」을 문장별·단락별로 분석한 자료이다. 장공은 전도서를 단순한 비관적 허무주의의 산물이 아니라, 인간 실존의 모순과 부조리를 가장 정직하게 응시한 구도의 기록으로 재해석한다. 본 자료를 읽는 독자는 현대인이 직면한 영적 공허와 기계적 소외가 수천 년 전 전도자의 고민과 맞닿아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본문이 전개하는 논리의 흐름을 따라가며, 허무의 장벽을 통과해 창조주를 향해 나아가는 실존적 순례의 여정을 깊이 있게 성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도입] 현대인의 삶의 허무와 전도서의 발견

도입부는 맹목적인 경쟁과 기계적 소외 속에서 영적 황폐함을 겪는 현대인의 실존적 공허를 진단하고, 시공간을 초월하여 그 아픔을 대변하는 전도자 코헬레트의 진리 탐구를 조명한다.


[1] 현대인의 맹목적 삶과 공허함

현대인이 물질적 풍요와 분주한 경쟁 속에서도 내면의 평화를 잃어버린 채 기계적 존재로 전락하여 깊은 허무와 번민에 빠져 있음을 고발한다.


1. 경쟁과 공허: 생명의 샘을 잃어버린 현대인의 실존

現代人[현대인]처럼 生命[생명]의 充實[충실]을 渴望[갈망]하면서도 生命[생명]의 空虛[공허]를 느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저들은 奔走[분주]하다. 피비린내 나는 「경쟁」을 계속한다. 그러나 저들이 만들어 놓은 커다란 空殼[공각]을 채워 놓을 生命[생명]의 샘을 찾지 못하였으며 거기에는 平和[평화]도 없고 喜悅[희열]도 없고, 創造[창조]의 기쁨도 없다.

  • ‘공각(空殼)’은 껍데기뿐인 허탈한 상태를 의미한다.
  • 1930년대 급격한 자본주의적 현대화와 경쟁 체제 속에서 물질적 풍요를 추구하면서도 내면의 영적 황폐함을 겪는 인간의 모순적 실존을 예리하게 지적한다.
  • 장공은 표면적인 발전 뒤에 숨겨진 현대인의 실존적 허무를 포착하여, 참된 생명의 샘을 상실한 세대의 비극을 고발한다.


2. 기계 문명의 부속품으로 전락한 현대인의 소외와 영적 타락

現代人[현대인]의 內面生活[내면생활]을 가장 銳利[예리]하게 批判[비판]한 名著[명저]라는 「道德序論[도덕서론]」(Walter Lippmann : A Preface to Morals) 쓴 월터 리프만은 이렇게 말하였다. 「저들이 暫間[잠간] 걸음을 멈추고, 왜 自己[자기]가 그렇게 奔走[분주]해야 할 것이며 또 그렇게 奔走[분주]하면 結局[결국] 얻는 것이 무엇인가를 靜思反問[정사반문]한다면 「自己[자기]도 알지 못하노라」고 自白[자백]안할 수 없을 것이다. 저들의 大多數[대다수]는 享樂[향락]의 蜘蛛網[지주망]에 걸려서 自己[자기]에게 닥쳐오는 事件[사건]의 意味[의미]와 價値[가치]를 判斷[판단]하기도 前[전]에 벌써 그 事件[사건]을 受理[수리]해 버릴 수밖에 없이 되었다. 저들의 生活[생활]에는 嚴格[엄격]한 道德的[도덕적] 標準[표준]이 그 權威[권위]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니오, 오직 절충된 與論[여론]과 流行[유행]이 있을 뿐이며 저들의 世界[세계]에는 嚴然不可侵[엄연불가침]의 目的[목적]을 가진 主宰者[주재자]가 있어 統治[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肉體的[육체적], 政治的[정치적], 經濟的[경제적] 事變[사변]의 機械的[기계적] 必然[필연]이 있을 뿐이며 저들은 저들 自身[자신]이 萬古[만고]의 大經綸[대경륜] 안에서 그 偉大[위대]한 劇的[극적] 大團圓[대단원]을 爲[위]하여 活動[활동]하는 한 目的意志[목적의지]를 가진 俳優[배우]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現代文明[현대문명]이란 한 宏壯[굉장]한 機械[기계]의 틈바구니에 끼어 도는 한 機械的[기계적] 存在[존재]라고 밖에 생각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 ‘정사반문(靜思反問)’은 조용히 생각하여 자신에게 묻는 것을, ‘지주망(蜘蛛網)’은 거미줄처럼 헤어나기 힘든 쾌락의 덫을 의미한다.
  • 월터 리프만(Walter Lippmann, 1889~1974)은 20세기 미국의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이자 정치 평론가, 사상가 중 한 명이다. 퓰리처상을 두 번이나 수상했으며, 당대 미국의 여론과 외교 정책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지식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 「道德序論[도덕서론]」(Walter Lippmann : A Preface to Morals)은 1929년에 출간된 월터 리프만의 책으로 과학과 현대 문명의 발달로 인해 전통적인 종교와 도덕이 무너진 시대에, 현대인이 겪는 정신적 공허함과 도덕적 혼란을 깊이 있게 다룬 명저이다.
  • 월터 리프만의 사상을 빌려, 목적 상실과 기계적 필연 속에 매몰되어 맹목적으로 살아가며 쾌락에 사로잡힌 당시 현대인의 타락한 도덕적·정신적 단면을 입체적으로 묘사한다.
  • 기계 문명의 부속품으로 전락한 인간의 소외 현상을 진단함으로써, 기독교 신앙의 회복이 요청되는 역사적·문화적 필연성을 역설한다.


3. 걸음을 멈춘 성찰의 순간에 직면하는 실존적 회의와 허무

그러므로 저들이 萬一[만일] 뜻없이 大路[대로]로 달음박질하던 그 걸음을 멈추고 좀더 깊게 생각한다면 이 일하는 것이 저 일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이며 무슨 일하는 것이 아무 일도 안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에 對[대]하여 深刻[심각]한 疑惑[의혹]을 품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리하여 或[혹]은 虛無[허무]를 云謂[운위]하고 그 生活[생활]은 頹壤[퇴양], 煩悶[번민] 그렇지 않으면 斷片的[단편적], 機械的[기계적]의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 ‘퇴양(頹壤)’은 무너져 내리는 황무지나 쇠락한 상태를 의미한다.
  • 바쁘게 달리던 삶을 멈추고 근본적인 삶의 의미를 성찰하는 순간 찾아오는 극심한 회의감과 번민을 다루고 있다.
  • 장공은 이러한 현대인의 내면적 붕괴가 단순한 개인의 우울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직면할 수밖에 없는 보편적 실존의 한계임을 폭로한다.


[2] 진리 탐구자로서의 전도자(코헬레트)

현대인의 맹목적인 실존적 위기 속에서 수천 년 전 구약의 전도자가 읊조렸던 탄식과 고뇌의 심정이 오늘날에도 유효한 첨예한 진리 탐구의 기록임을 밝힌다.


1. 시공간을 초월하여 현대인의 가슴을 치는 전도자의 실존적 고뇌

나는 여기에서 옛날 “코헬레트” - 傳道者[전도자] -의 心情[심정] 그대로를 發見[발견]한다.

  • ‘코헬레트(Koheleth)’는 히브리어 전도서의 원어로, 회중 앞에서 가르치는 자 혹은 진리를 탐구하는 실존적 순례자를 뜻한다.
  • 현대인이 겪는 무의미와 허무의식 속에서 수천 년 전 구약의 전도자가 읊조렸던 탄식과 고뇌의 심정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그대로 살아있음을 발견한다.
  • 성경의 전도서를 고대의 고문서가 아닌, 당대 현대인과 오늘날의 독자의 가슴을 치는 가장 첨예한 실존적 진리 탐구의 기록으로 재해석한다.


[제1단계] 자연과 인생의 순환, 그리고 ‘지혜’와 ‘향락’의 한계

제1단계는 자연과 역사의 무의미한 순환 속에서, 인간이 지혜와 육적 향락을 극극으로 추구했음에도 결국 허무와 좌절만을 마주하게 되는 한계를 분석한다.


[1] 무의미한 순환과 헛됨

창조적 희열이 결여된 채 끝없이 반복되는 자연의 윤회와 역사 속에서, 인간의 모든 수고가 헛되고 헛된 허무중의 허무임을 선언한다.


1. 전도서의 본질과 순례자의 속임 없는 기록

傳道書[전도서]! 이것은 體系[체계]선 哲理[철리]를 말한 것도 아니며 深奧[심오]한 信仰[신앙]을 말한 것도 아니라 다만 「生[생]의 意義[의의]」를 찾아 實在[실재]의 世界[세계]를 더듬어 빈들에 헤메던 巡禮者[순례자]의 피엉킨 속임없는 紀錄[기록]이라고 봄이 可[가]한 것이다.

  • ‘체계선(體系선)’은 체계적인 것을, ‘순례자(巡禮者)’는 참된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매는 구도의 여행자를 의미한다.
  • 전도서를 딱딱하고 추상적인 교리나 철학 체계로 보지 않고, 생명의 의미를 찾아 실존의 거친 들판을 방황하며 고뇌했던 한 인간의 진솔한 내면 기록으로 규정한다.
  • 장공은 성경 문서를 인간의 생생한 실존적 부딪힘과 몸부림의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독창적이고 입체적인 성서 해석학적 시각을 보여준다.


2. 자연과 인생의 만반사위에서 발견한 무의미한 윤회

그는 于先[우선] 自然[자연]과 人生[인생]의 萬般事爲[만반사위]에서 그 無意味[무의미]하고 끝없는 輪廻[윤회]를 發見[발견]하였다.

  • - ‘만반사위(萬般事爲)’는 세상의 온갖 일과 현상을 의미한다.
  • - 전도자가 세상의 모든 자연현상과 인간사를 관찰할 때, 생산적인 발전이나 목적지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제자리걸음을 하는 허무한 반복만을 목격했음을 지적한다.
  • - 창조의 목적성과 역사의 진보를 쉽게 신뢰하기보다, 현상계가 지닌 근원적 반복성과 무상함을 직시하는 실존적 태도를 조명한다.


3. 자연 현상의 끝없는 반복과 탄식

「땅은 永遠[영원]히 머물러 있고
해는 뜨고 해는 지되
제 뜨던 곳으로 달음질 치도다.」
하는 歎息[탄식]으로 始作[시작]하여 “바람은 南[남]으로 가고 또 北[북]으로 돌아와 쉬임없이 불어도 結局[결국]에는 제 길을 따라 돌아들 뿐이요 江[강]물은 쉬임없이 바다로 흘러들되 바다는 그 때문에 차본 적이 없으니”(1:5-7) 모든 것은 오직 같은 곳을 헤메일 뿐이요 아무러한 創造的[창조적] 喜悅[희열]도 느낄 수 없는 것이었다.

  • ‘창조적 희열(創造的 喜悅)’은 새로운 변화와 생명력에서 오는 내면의 기쁨을 의미한다.
  • 해의 운행, 바람의 이동, 강의 흐름 등 영원히 멈추지 않는 거대한 자연의 순환 속에서 인간이 실질적으로 누릴 수 있는 새로움이나 해방감은 존재하지 않음을 폭로한다.
  • 멈춤 없는 자연의 거대한 순환 역설적으로 인간에게 생명의 역동성이 결여된 채 갇혀 있다는 깊은 영적 권태감을 안겨준다는 점을 통찰한다.


4. 말로 다 할 수 없는 피곤과 권태의 실존

그리하여
“萬事[만사]는 오직 疲困[피곤]과 倦怠[권태]
말로 못할 疲困[피곤]과 倦怠[권태]!
눈은 보기에 滿足[만족]이 없고
귀는 듣기에 참(充滿[충만])이 없도다”
하였다.

  • ‘권태(倦怠)’는 지루함과 싫증을, ‘참(充滿)’은 가득 채워짐을 뜻한다.
  • 세상의 온갖 경험과 자극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더라도 인간의 영혼은 결코 만족하거나 채워지지 않으며, 오직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극심한 피로감만 남게 됨을 고백한다.
  • 감각적 경험의 한계와 세상의 모든 성취가 인간의 궁극적 갈증을 해소해 주지 못하는 허무 구조를 날카롭게 드러낸다.


5. 목적도 진보도 없는 해 아래의 순환 구조

人間[인간]에는 目的[목적]도 없고 進步[진보]도 없고 오직 끝없는 循環[순환]이 있을 뿐이매
“이미 있은 일이 將次[장차] 이룰 일이며
이미 이룬 일이 將次[장차] 이룰 일이라
해 아래 새 것이란 하나 없도다.”

  • ‘해 아래 새 것이란 하나 없도다’라는 구절은 역사와 인간의 수고가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지 못하고 동일한 궤도를 쳇바퀴 돌듯 반복함을 뜻한다.
  • 역사와 인생 전반에 걸쳐 유의미한 발전이나 궁극적 구원의 목적지가 결여되어 있음을 발견하고, 모든 시대의 삶이 본질적으로 동일한 틀 안에 매여 있음을 진단한다.
  • 인간 중심의 역사 발전이나 문명의 진보가 지닌 환상을 철저히 깨뜨리고 역사적 허무주의의 지평을 마주하게 한다.


6. 기록의 멸멸과 역사 만사의 헛됨

그리고 萬一[만일] 어느 누가 무슨 새것을 發見[발견]했노라고 떠든대야 結局[결국] 알고보면 歷史以前[역사이전]부터 있던 일이오 오직 그 記錄[기록]이 泯滅[민멸]된 것뿐이다(1:10, 11). 世上萬事[세상만사]가 새 것이 없고 또 새 것이 없을 것이니 오직 같은 것의 循環[순환], 循環[순환], 循環[순환]일 뿐이다.

  • ‘민멸(泯滅)’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없어짐을 의미한다.
  • 인간이 시대마다 새롭다고 자부하며 이뤄낸 업적이나 발견들도 알고 보면 이미 과거에 존재했던 것들의 반복일 뿐이며, 단지 기억과 기록의 망각 때문에 새롭게 느껴지는 착시에 불과함을 지적한다.
  • 인간의 모든 자만과 혁신의 시도가 거대한 망각의 바다 속에서 결국 무화되는 순환적 구조 안에 갇혀 있음을 고발한다.


7. 인생관의 결론으로서의 허무와 허공

그러면 이 循環[순환]의 意義[의의]는 果如何[과여하]?오직, 虛無[허무], 虛空[허무]!
“헛되고 헛되어 虛無中[허무중]의 虛無[허무]로다
모든 것이 오직 헛된 것 뿐이로다.”
하는 것이 그의 人生觀[인생관]이다.

  • ‘허무중의 허무(虛無中의 虛無)’는 가장 극대화된 절대적 헛됨을 뜻한다.
  • 끝없는 반복과 순환 속에서 아무런 의미도 건져 올리지 못한 전도자가 도달한 최종적인 인생의 결론이 바로 전면적인 허무주의적 깨달음임을 보여준다.
  • 장공은 이 비관적이고 뼈아픈 고백이야말로 거짓 위로나 값싼 낙관주의에 기댈 수 없는 인간 실존의 가장 정직하고 날것 그대로의 출발점임을 역설한다.


[2] 지혜와 지식의 탐구

전도자가 무지의 산을 넘기 위해 당시 최고의 실천철학을 추구했으나, 알면 알수록 번뇌와 고통만 가중될 뿐 인간 지성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음을 폭로한다.


1. 비겁한 허무주의를 넘어선 용감한 진리의 탐구자

그러면 그는 이 人生觀[인생관]이 當然[당연]한 結論[결론]이라 하여 이에 그대로 주저앉은 卑怯[비겁]한 一種[일종]의 虛無主義者[허무주의자]였던가 하면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는 探究[탐구]를 더하고 觀察[관찰]을 더하여 오직 實在[실재]를 찾아 巡禮[순례]의 걸음을 이어나간 勇敢[용감]한 眞理[진리]의 探究者[탐구자]였다.

  • 『낙수』와 『김재준 저작전집』에는 “探求[탐구]”로, 『김재준전집』에서는 “探究[탐구]”로 표현되어 있다. 탐구(探究)가 연구(硏究)의 색채가 강하여 ‘깊이 파고들어 분석하고 밝혀내는 과정(Process of Investigation)’에 가깝다면, 탐구(探求)는 추구(追求)의 색채가 강하여 ‘필요한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찾아 얻어내려는 목적 지향적 행동(Seeking & Pursuing)’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 ‘허무주의자(虛無主義者)’는 삶의 의미나 가치를 부정하고 절망 속에 주저앉는 자를, ‘진리의 탐구자(眞理의 探究者)’는 끝까지 참된 실재를 찾아 나서는 구도자를 의미한다.
  • 전도자가 인생의 헛됨을 깨달았다고 해서 안주하거나 비겁하게 주저앉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끈질긴 관찰과 탐구를 통해 참된 실재를 찾아 나선 용기 있는 순례자였음을 강조한다.
  • 장공은 인생의 허무를 직시하되 그에 굴복하지 않고 진리를 향해 전진하는 인간의 끈질긴 실존적 태도를 높이 평가한다.


2. 예언자적 열정과 구별되는 현실 직시적 태도

그는 豫言者[예언자]들과 같이 地平線[지평선] 저쪽을 넘겨다보는 宗敎的[종교적] 熱情[열정]을 願[원]하지도 않았으며 이스라엘 民族[민족]의 特別[특별]한 蒙召[몽소]를 자랑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는 經驗[경험]과 觀察[관찰]을 通[통]하여 오직 現實[현실] 그대로의 人生[인생]을 凝視[응시]하려 한 것이었다.

  • ‘몽소(蒙召)’는 신의 부름이나 소명 의식을 뜻한다.
  • 전도자는 미래의 구원이나 저 너머의 세계를 예언자처럼 환히 내다보거나 선민의식을 내세운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인간의 경험과 관찰을 바탕으로 현실 속의 삶을 있는 그대로 응시하고자 했다.
  • 종교적 환상이나 민족적 특권에 기대지 않고, 오직 날것 그대로의 냉혹한 현실을 직시하는 전도자 특유의 실증적이고 정직한 면모를 부각한다.


3. 전통적 독단과 사색의 자유를 억압하는 태도 비판

世上[세상]의 卑怯惰弱[비겁타약]한 學徒[학도]들은 眞理[진리]를 探究[탐구]하는 마당에 있어서 좀더 明瞭[명료]한 思索[사색]을 願[원]한다는 것보다도 아예 思索[사색]의 重任[중임]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까닭에 或[혹]은 在來[재래]의 傳統的[전통적] 獨斷[독단]에 依據[의거]하여 스스로 安逸[안일]을 貪[탐]하여 或[혹]은 獨斷[독단]만을 가지고 思索[사색]의 自由[자유]를 彈壓[탄압]하여 조금이라도 傳統[전통]에서 벗어난 생각이면 모조리 不道德[부도덕] 或[혹] 危險視[위험시]하는 實例[실례]가 不遑枚擧[불황매거]인 것이다.

  • ‘불황매거(不遑枚擧)’는 손으로 꼽을 수 없을 만큼 사례가 매우 많음을 의미한다.
  • 진지하게 사색하는 책임을 회피한 채 전통적인 독단에 안주하거나, 사색의 자유를 억압하며 틀에서 벗어난 생각을 부도덕하고 위험한 것으로 매도하는 기득권적 학도들의 비겁함을 비판한다.
  • 진리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기존 체제의 편협성과 사상적 억압을 날카롭게 고발하며, 진정한 사색의 자유가 지닌 가치를 역설한다.


4. 전도서의 정전 편입과 기독교적 사상적 아량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 敎人[교인]은 이렇듯 正軌[정궤]에서 벗어난 傳道者[전도자]의 「虛無哲學[허무철학]」을 그의 가장  眞摯[진지]한 眞理探究[진리탐구]의 記錄[기록]으로 認[인]하여 正典中[정전중]에 編入[편입]할만한 思想的[사상적] 雅量[아량]을 가진 者[자]들임을 기뻐 안할 수 없는 것이다.

  • ‘정궤(正軌)’는 바른 길이나 정통적인 규범을, ‘사상적 아량(思想的 雅量)’은 다양한 사상을 수용할 수 있는 넓은 정신적 포용력을 뜻한다.
  • 전통적 교리의 틀을 벗어나 허무주의적 고백까지 담고 있는 전도서를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의 진지한 진리 탐구 기록으로 수용하여 성경 정전(正典)에 포함시킨 기독교 신앙의 위대한 포용성과 사상적 깊이를 찬미한다.
  • 신앙은 맹목적인 독단이 아니라 인간의 실존적 고뇌와 회의를 품어 안을 때 비로소 참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장공의 개방적인 신학관을 드러낸다.


5. 형극의 길을 걸으며 찾아 나선 실재의 사모

그는 이 虛無[허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 世界[세계]에서 實在[실재]를 사모하여 荊棘[형극]의 길을 더듬고 있다.

  • ‘형극(荊棘)’은 가시나무가 우거진 험하고 고통스러운 길을 의미한다.
  • 모든 것이 허무하게만 보이는 절망적인 세계 속에서도 참된 실재를 향한 갈망을 놓지 않고, 가시밭길처럼 고난스러운 구도의 길을 더듬어 나가는 전도자의 치열한 탐구 정신을 묘사한다.
  • 장공은 진리를 향한 인간의 발걸음이 안일한 길목이 아니라, 실존적 고뇌와 아픔을 통과하는 십자가와 같은 험준한 여정임을 드러낸다.


6. 무지의 산과 실천철학의 문을 두드린 지혜의 탐구

우선 그는 「智慧[지혜]」의 길을 찾아 보았다. 無智[무지]의 山[산]이 眼前[안전]에 가로 막혀서 實在[실재]가 虛無[허무]로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實踐哲學[실천철학]의 門[문]을 더듬어 그때 世代[세대]에서 가장 높은 智識[지식]과 智慧[지혜]의 所有者[소유자]가 되었다.

  • ‘실천철학(實踐哲學)’은 인간의 삶과 도덕적 행위를 다루는 학문을 뜻한다.
  • 세상이 허무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어쩌면 인간의 무지 때문일 것이라 판단하여, 당시 세대에서 가장 탁월한 지식과 지혜의 자리에 오를 만큼 실천철학의 문을 치열하게 두드렸음을 보여준다.
  •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지적 역량과 학문적 성취를 총동원하여 실재를 규명하려 했던 전도자의 적극적인 노력을 부각한다.


7. 지혜와 지식이 가져다준 정당한 보수의 상실과 번뇌의 증가

그러나 그의 얻은 바 智慧[지혜]와 智識[지식]은 正當[정당]한 報酬[보수]를 받지 못하였다. 알면 알수록, 無智[무지]는 그 영역을 넓히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煩惱[번뇌]만 불어갈 뿐이다.

  • ‘번뇌(煩惱)’는 마음을 괴롭히고 얽어매는 온갖 망상과 고통을 의미한다.
  • 온갖 노력을 기울여 얻어낸 지혜와 지식임 정작 실존의 갈증을 채워주는 정당한 보답을 주지 못했으며, 오히려 알면 알수록 미지의 영역은 넓어지고 깊이 사색할수록 마음에 고통과 번뇌만 가중되었음을 고백한다.
  • 인간의 이성과 지적 탐구가 궁극적인 구원이나 내면의 평화를 가져다주지 못하는 엄정한 한계 상황을 직시한다.


8. 고칠 수 없는 현실과 무의미한 수고로서의 지식

“꾸부러진 것을 펼 道理[도리] 없고
不足[부족]한 것을 補充[보충]할 길 없으니”
사람의 智慧[지혜]와 智識[지식]이란 無意味[무의미]한 手苦[수고]일 것 뿐이다. 

  • ‘무의미한 수고(無意味한 手苦)’는 헛되고 보람 없는 땀방울을 뜻한다.
  • 인간 사회의 일그러진 구조나 굽어진 현실을 사람의 지혜로는 바로잡을 수 없고, 본질적인 결핍을 채울 길도 없기에 인간의 모든 지혜와 지식의 추구는 결국 허망한 수고에 불과하다는 점을 한탄한다.
  • 세상의 모순과 부족함을 온전히 해결할 수 없는 인간 지성의 무력함을 뼈저리게 폭로한다.


9. 뇌리에 박히는 고백과 바람을 잡는 듯한 허무

“智慧[지혜]가 많으매 煩惱[번뇌]가 많고
智識[지식]이 더하매 苦痛[고통]이 더하니
알게라 이 또한 바람잡이었도다.”

  • 『낙수』에는 “1:18”이 첨가되어 해당 구절이 ‘전도서 1:18’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 ‘바람잡이’는 손에 쥘 수 없는 바람을 잡으려는 것처럼 헛된 짓을 비유하는 표현이다.
  • 지혜가 많아질수록 번뇌가 늘어나고 지식이 더해질수록 고통만 심해질 뿐이어서, 이 모든 지적 성취가 결국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이 잡을 수 없는 헛것임을 최종적으로 선언한다.
  • 지식 만능주의와 이성 중심의 오만을 깨뜨리고, 인간의 머리로 진리를 소유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깊은 통찰로 증언한다.


[3] 육적 향락의 추구와 좌절

대궐과 금은보화 등 세상의 모든 세속적 영화를 최대한도로 누려보았으나, 남은 것은 정욕의 불길이 지나간 재와 일장춘몽뿐임을 고백한다.


1. 거세의 물결 속에서 더듬어 본 육적 향락의 길

그는 다시 擧世[거세]가 如水之趨下[여수지추하]로 汲汲[급급]히 追求[추구]하고 있는 所謂[소위] “幸福[행복]” - 享樂[향락], 特[특]히 肉的[육적] 享樂[향락]의 길을 더듬어 보았다.

  • ‘여수지추하(如水之趨下)’는 물이 아래로 흐르듯 세상이 휩쓸려 내려가는 모습을, ‘급급히(汲급히)’는 목적을 향해 허겁지겁 바쁘게 좇는 태도를 의미한다.
  • 온 세상 사람들이 물이 아래로 쏟아지듯 당연하게 좇아가고 있는 속세의 행복, 즉 육적인 쾌락의 본질이 무엇인지 전도자가 직접 온몸으로 찾아 나서며 탐색해 보았음을 밝힌다.
  • 지혜의 탐구에 이어 세상 사람들이 가장 가치 있게 여기는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행복의 실체를 직접 실험하려는 실존적 구도의 단면을 보여준다.


2. 세속 영화의 극치와 일장춘몽으로 끝난 사업의 점검

그는 이미 얻은 智慧[지혜]와 批判力[비판력]을 잃지 않는 限[한]에서 最大限度[최대한도]의 享樂[향락]을 所有[소유]하였다. 그에게는 大闕[대궐]이 있고 葡萄園[포도원], 公園[공원]이 아름다웠으며 婢僕[비복]과 牛羊[우양]이 구름같이 모이고 金銀[금은]이 山積[산적]한데 그 속에는 音樂[음악]이 있고 美女[미녀]가 있어 世俗[세속]의 榮華[영화]가 其極[기극]에 達[달]하였다(2:4-10). 그러나 한번 걸음을 돌이켜 그 걸어온 자취, 그 建設[건설]한 事業[사업]을 點檢[점검]하는 때 모든 것은 一場春夢[일장춘몽]! 거기에 남은 것은 오직 情慾[정욕]의 불길에 타다가 남은 한 무더기 死灰[사회]뿐이었다.

  • ‘비복(婢僕)’은 종들을, ‘기극(其極)’은 극치에 달함을, ‘사회(死灰)’는 불이 타다 남은 차가운 잿더미를 뜻한다.
  • 이성을 유지한 상태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대궐, 재물, 음악, 미녀 등 세상의 모든 영화를 극극에 이르도록 누려보았으나, 그 성취의 자취를 되돌아볼 때 모든 것이 덧없는 낱장 꿈이요 정욕의 불길이 지나간 재에 불과함을 고백한다.
  • 인간이 추구하는 세속적 쾌락과 외형적 성취가 내면의 궁극적 갈증을 채우지 못한 채 허망하게 소멸하는 비극적 한계를 폭로한다.


3. 해 아래 유익한 것이 없다는 무서운 고백

“보아라 모든 것은 헛되어 바람잡는 것 같으니
해 아래 有益[유익]한 것 하나 없도다.”

  • 『낙수』에는 “2:11”이 첨가되어 있어서 해당 구절이 ‘전도서 2:11’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 ‘유익한 것 하나 없도다’는 세상의 온갖 수고와 쾌락 속에서 영혼에 참된 유익을 주는 가치를 건질 수 없음을 선언하는 표현이다.
  • 세상의 모든 쾌락을 끝까지 파헤쳐 본 전도자가 내린 결론은 결국 모든 것이 바람을 잡으려는 것처럼 헛되며, 해 아래 인간에게 진정으로 남는 영적 이익은 없다는 뼈아픈 진실이다.
  • 외적인 풍요와 향락에 매몰된 삶이 마주하게 되는 근원적 공허와 실존적 파탄의 전형을 보여준다.


4. 현대의 맹종과 전도자의 경험에 귀 기울여야 할 필연성

얼마나 무섭고 떨리는 告白[고백]인가? 智識萬能[지식만능], 科學萬能[과학만능]의 妄想[망상] 아래에서 오직 現象[현상]만을 보고 實在[실재]를 볼줄 모르며 오직 斷片[단편], 刹那[찰나]만을 알고 永遠[영원]을 사모할 줄 모르는 사람, 오직 利慾[이욕]과 肉的[육적] 幸福[행복], 享樂[향락]을 追求[추구]하여 피비린내 나는 殺伐[살벌]을 敢行[감행]하는 사람은 이제 이 「傳道者[전도자]」의 고백에 귀를 기우리고 이 傳道書[전도자]의 經驗[경험]을 나누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 ‘망상(妄想)’은 그릇된 집착과 미혹을, ‘단편, 찰나(斷片, 刹那)’는 영원성을 상실한 쪼개진 시간과 현상을 의미한다.
  • 지식과 과학 만능주의에 빠져 현상만을 좇고 영원을 잃어버린 채, 이익과 육적 쾌락을 위해 살벌한 경쟁을 감행하는 현대인들이 반드시 전도자의 이 진솔한 고백 앞에 멈춰 서서 그 경험을 공유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 장공은 전도서의 기록을 먼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물질주의와 쾌락주의에 눈이 먼 현대인의 영혼을 치유하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할 실존적 거울로 재해석한다.


[제2단계] 숙명론적 우주관과 도덕적ㆍ실존적 한계 직면

제2단계는 만물이 기정의 철칙과 우연에 지배되는 숙명론적 우주관을 마주하고, 도덕적 보응의 부재와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비도덕적 폭군 앞에서 인간이 직면하는 실존적 한계를 다룬다.


[1] 숙명론적 우주관

삼라만상이 기정의 철칙과 소정의 코스에 따라 맹목적으로 운행됨을 깨닫고, 배후의 하나님의 예정을 시인하면서도 차디찬 집권자로서의 초연한 통치 구조를 직시한다.


1. 허무 속에서 발견한 존재 자체와 숙명론적 우주관·인생관

智慧[지혜]의 世界[세계], 享樂[향락]의 世界[세계]에서 오직 空虛感[공허감]만을 깊게 한 「傳道者[전도자]」는 다시 한번 世上[세상]을 보았다. 世上[세상]은 그래도 如前[여전]히 움직이고 있다. 世上[세상]은 그래도 循環[순환]하고 있다. 意味[의미]야 있던 없던 움직이는 그 自體[자체], 循環[순환]하는 그 自體[자체] 存在[존재]하는 그 自體[자체]는 實在[실재]로 볼 수 밖에 없었다. 거기에서 그는 宿命論的[숙명론적] 宇宙觀[우주관], 人生觀[인생관]으로 기울어졌다.

  • ‘숙명론적 우주관·인생관(宿命論的 宇宙觀·人生觀)’은 만물이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거대한 필연의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고 보는 관점을 의미한다.
  • 지혜와 쾌락의 세계를 거치며 오직 공허함만을 절감한 전도자가 의미를 상실한 채 여전 히 돌아가는 세상을 응시하면서, 그 움직임과 존재 자체를 부인할 수 없는 실재로 인정하고 숙명론적 시각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 장공은 인간이 허무의 벽에 부딪혔을 때 비로소 세상이 지닌 거대한 순환성과 실존적 한계를 냉정하게 직시하게 된다는 점을 포착한다.


2. 기정의 철칙과 소정의 코스로 운행되는 삼라만상

參羅萬像[삼라만상]은 오직 旣定[기정]의 鐵則[철칙]에 얽메어 그 안에서 그 所定[소정]의 코-스를 運行[운행]하고 있는 것 뿐이다. “나는 때”, “죽는 때”를 어쩔 수 없으며 “심는 때”, “거두는 때”가 또한 變[변]할 바 못된다.

  • ‘기정의 철칙(旣定의 鐵則)’은 미리 정해져 있어 결코 바꿀 수 없는 엄정한 자연과 역사의 법칙을 뜻한다.
  • 우주의 온갖 존재가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정해진 철칙에 얽매여 태어남과 죽음, 심음과 거둠의 정해진 코스를 묵묵히 밟아나갈 뿐임을 지적한다.
  • 인간의 주체적 의지나 노력으로 변경할 수 없는 절대적인 시간과 운명의 구속력을 강조한다.


3. 자연계와 개인의 심리, 사회적 사실을 지배하는 필연적 철칙

自然界[자연계]가 이 鐵則下[철칙하]에서 運行[운행]됨은 勿論[물론]이어니와 우리 各個人[각개인]의 心理作用[심리작용]까지도 그러하여 “웃는 때”, “우는 때”, “즐기는 때”, “怒[노]하는 때”가 모두 心理的[심리적] 鐵則下[철칙하]에서 되는 한 必然的[필연적] 結果[결과]이며 社會的[사회적] 事實[사실]이 또한 그러하여 “戰爭[전쟁]하는 때”, “平和[평화]하는 때”가 다 定[정]한대로 오는 것뿐이다(3:1-8)라고 그는 말하였다. 

  • ‘심리적 철칙하(心理的 鐵則下)’는 인간의 감정 작용조차 일정한 필연적 법칙에 지배받음을 의미한다.
  • 자연의 운행뿐만 아니라 인간 개개인의 웃음과 눈물 같은 심리적 작용과 전쟁 및 평화라는 사회적 역사적 사실까지도 모두 정해진 때와 법칙에 따른 필연적 결과에 불과하다고 전도서(3:1-8)를 인용하여 설명한다.
  • 인간의 내면세계와 거대한 사회 역사적 현상 모두가 냉혹한 결정론적 구조 안에 놓여 있음을 통찰한다.


4. 현대 사상가들과 전도서 심정의 접점 및 차디찬 집권자로서의 신관

그러고보니 現代[현대] 大多數[대다수]의 科學者[과학자], 實驗心理學者[실험심리학자], 唯物論的[유물론적] 歷史觀[역사관]의 主唱者[주창자]들은 結局[결국] 이 “傳道書[전도자]”의 心情[심정]을 附演[부연]한 것 以外[이외]의 다른 아무 것도 아님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勿論[물론] 無神論者[무신론자]는 아니었다. 이 모든 鐵則[철칙]의 背後[배후]에는 神[신]의 豫定[예정]이 계심을 是認[시인]하였다. 그러나 그 主宰者[주재자]이신 神[신]은 오직 차디찬 執權者[집권자]이어서 人情[인정]에 끌리며 人類[인류]에게 特別[특별]한 關心[관심]을 가지시는 이는 아니었다.

  • ‘차디찬 집권자(– 執權者)’는 인간의 고통이나 정에 얽매이지 않고 냉혹하게 우주를 통치하는 절대자를 뜻한다.
  • 현대의 과학자, 실험심리학자, 유물론적 역사관 주창자들의 사상이 결국 수천 년 전 전도서가 품었던 숙명론적 심정을 되풀이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간파하면서도, 전도자가 무신론자가 아니라 그 배후의 하나님의 예정은 시인했음을 밝힌다.
  • 다만 전도자가 마주한 하나님은 인정에 끌려 인간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따뜻한 분이 아니라, 모든 철칙을 차갑게 다스리는 초연한 통치자에 가까웠음을 지적하며 신학적 긴장을 드러낸다.


[2] 도덕적 보응의 부재와 부조리

인간 사회의 압박과 불공평 속에서 도덕적 보응이 실현되지 않는 부조리를 목격하고,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 의인과 악인 모두에게 예외 없이 찾아오는 죽음의 무차별적 비극성을 폭로한다.


1. 도덕적 필연을 향한 탐색과 헛된 노력

이렇게 宿命的[숙명적]이오 必然的[필연적]인 宇宙[우주]와 人生[인생]이라 할지라도 萬一[만일] 그것이 道德的[도덕적] 必然[필연]이라면 거기에는 새로운 意味[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는 우선 人間社會[인간사회]에서 道德[도덕]의 施行[시행]을 찾고져 勞力[노력]하였다. 그러나 그의 勞力[노력]은 헛된 것이었다.

  • ‘도덕적 필연(道德的 必然)’은 우주와 인간의 삶이 단순한 기계적 법칙을 넘어 도덕적인 정의와 가치에 의해 지배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 차가운 숙명론적 우주 속에서도 만약 그 필연성이 도덕적 질서에 근거한다면 삶의 새로운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며 인간 사회 속에서 도덕의 실현 여부를 치열하게 추구했으나, 결국 그 모든 노력 역시 헛수고로 돌아갔음을 고백한다.
  • 장공은 정의와 도덕이 실현되는 공정한 세계를 갈망하는 인간의 윤리적 실존이 냉혹한 현실의 벽 앞에 부딪히는 비극적 모순을 포착한다.


2. 압박과 눈물만 가득하고 안위자가 없는 부조리한 현실

“나는 해 아래서 되는 온갖 壓迫[압박]을 다시 한번 돌이켜 
살폈노라.
나는 눌리운 者[자]의 눈물을 보았노라.
그러나 安慰者[안위자]는 있지 않더라.
저들을 壓迫[압박]하는 者[자]는 더욱 强暴[강포]하더라.
그러나 安慰者[안위자]는 있지 않더라.”

  • 『낙수』에는 “4:1”이 첨가되어 있어서 해당 구절이 ‘전도서 4:1’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 ‘강포(強暴)’는 힘으로 남을 억누르고 사납게 구는 것을, ‘안위자(安慰者)’는 고통받는 자를 위로하고 건져주는 구원자를 뜻한다.
  • 해 아래의 현실을 다시 살펴보았을 때, 힘없는 이들이 당하는 온갖 압박과 눈물겨운 탄식은 가득한 반면 억눌린 자를 위로하거나 보호해 줄 안위자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압박자의 폭력성만 더욱 기승을 부리는 비참한 실상을 고발한다.
  • 사회적 약자가 보호받지 못하는 부조리하고 냉혹한 인간 사회의 민낯을 가슴 아프게 증언한다.


3. 질투와 격리, 헛된 권력으로 얼룩진 당시의 사회상

이렇게 壓迫[압박]만 있고 伸冤者[신원자]는 볼 수 없는 데다가 隣人間[린인간]에 嫉妬[질투]가 있고(4:4-6) 君民間[군민간]에 隔離[격리]가 있어(4:13-16) 萬民[만민]의 歡呼裡[환호리]에 王位[왕위]에 오른 賢君[현군]도 孤獨[고독]과 怨望中[원망중]에 餘生[여생]을 마치게 되는 것이 當時[당시]의 社會狀[사회상]이었다.

  • ‘신원자(伸冤者)’는 원통함을 풀어주는 자를, ‘군민간(君民間)’은 통치자와 백성 사이의 단절을 의미한다.
  • 억울함을 풀어줄 이가 없는 억압 속에서 이웃 간의 시기와 질투가 만연하고, 군주와 백성 사이에는 깊은 단절이 존재하여 만민의 환호 속에 등극한 현군조차 결국 고독과 원망 속에 쓸쓸히 여생을 마치게 되는 당시 사회의 모순된 구조를 묘사한다.
  • 개인의 심리적 갈등부터 국가 권력의 최고 정점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 관계와 정치적 성취가 허망함과 비극으로 귀결되는 역사적 현실을 진단한다.


4. 도덕적 보응의 부재와 헛된 세상의 선언

그러나 萬一[만일] 現在[현재]의 이런 不公平[불공평]이 있다 할지라도 어느 其間後[기간후]에 各其[각기] 그 所行[소행]에 對[대]한 道德的[도덕적] 報應[보응]을 받는다면 問題[문제]는 또한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世上[세상]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惡人[악인]의 報應[보응]받는 義人[의인]도 있고
義人[의인]의 報應[보응]받는 惡人[악인]도 있으니
이 또한 헛되다고 나는 말하노라.” 
- 8:14

  • ‘도덕적 보응(道德적 報應)’은 선행과 악행에 따라 마땅히 주어지는 정의로운 상벌을 뜻한다.
  • 비록 당장의 현실이 불공평하더라도 사후나 미래에 각자의 행위에 대한 정당한 도덕적 보응이 이루어진다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겠지만, 실제 세상은 의인이 오히려 악인의 보응을 받고 악인이 의인의 보응을 받는 터무니없는 일들이 일어나기에 이 모든 것이 헛되다고 탄식한다.
  • 인과응보의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불합리한 세상 속에서, 인간 윤리의 근간이 흔들리는 실존적 허무의 정점을 날카롭게 드러낸다.


5. 하나님의 비도덕적 통치와 보응의 양면성, 그리고 겸손한 침묵

그리하여 하나님은 義[의]로 統治[통치]하신다고 볼 수 없게 되었다. 世上[세상]에는 道德的[도덕적] 統治[통치]는 있지 않다. 그러나 어느 反面[반면]에는 또한 道德的[도덕적] 報應[보응]이 아주 없다고 볼 수 없는 것이었다(2:26). 그러므로 그는 非道德的[비도덕적]이라고 보이는 하나님의 統治[통치]에 對[대]하여 不平[불평]하거나 反逆[반역]하는 態度[태도]는 取[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神意[신의]의 神祕[신비] 不可測[불가측]임에 머리를 숙이고(7:24) “밤낮으로 자지 않고” 探求[탐구]할지라도 그 全貌[전모]는 永遠[영원]히 감추인 神祕[신비]임을 嘆息[탄식]할 뿐이었다[8:16, 17].

  • ‘불가측(不可측)’은 헤아릴 수 없음을, ‘신의(神意)’는 하나님의 뜻을 의미한다.
  • 현실의 부조리 앞에서 세상이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나 도덕적 질서 아래 있다고 단정할 수 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삶의 구석에 도덕적 보응의 흔적이 아예 없다고 부정할 수도 없는 모순적 현실을 직시한다.
  • 전도자는 이처럼 인간의 이성으로 볼 때 비도덕적으로 보이는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 불평하거나 반역하기보다, 인간이 결코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와 주권 앞에 머리를 숙이며 밤낮으로 탐구해도 그 전모를 알 수 없음에 깊은 탄식을 내뱉는다.
  • 장공은 인간의 얕은 지혜로 하나님의 섭리를 재단하려 하지 않고, 불가해한 신비 앞에서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는 겸손한 태도를 신학적으로 높이 평가한다.


6. 하나님의 편에서 본 필연과 인간의 편에서 본 주책없는 우연

이렇게 사람은 智慧[지혜]가 미치지 않는 世界[세계]를 必然[필연]이라고 보는 것은 하나님 便[편]에 서서 보는 한 推斷[추단]이다. 萬一[만일] 이것을 사람편에서 본다면 이 必然[필연]은 오직 주책없는 한 偶然[우연]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었다.

  • ‘추단(推斷)’은 미루어 헤아려 단정함을, ‘주책없는 우연(– 偶然)’은 종잡을 수 없고 헛된 요행이나 뜻밖의 일을 뜻한다.
  • 인간의 지혜가 미치지 않는 거대한 세계의 질서를 ‘필연’이라고 부르는 것은 철저히 하나님의 입장에 서서 미루어 짐작하는 추단에 불과하며, 만약 이를 철저히 인간의 눈높이와 경험에서 바라본다면 그 필연이란 결국 종잡을 수 없는 허망한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고 통찰한다.
  • 절대자의 섭리와 인간이 마주하는 현실 사이에 놓인 인식론적 간극을 날카롭게 파헤치며, 세상의 일들이 인간의 이성으로는 결코 완벽하게 해명될 수 없는 우연성과 부조리성으로 가득 차 있음을 폭로한다.


7. 때와 우연에 지배되는 해 아래의 무상한 현실

“내가 다시금 해 아래를 살펴보니
競走[경주]가 반드시 빠른 者[자]의 것이 아니며
戰爭[전쟁]이 반드시 힘센 者[자]의 것이 아니더라.
智者[지자]가 반드시 먹을 것 얻는 것도 아니며
哲人[철인]이 반드시 富者[부자]됨도 아니더라.
고기가 벗어못날 그물에 걸림같이
새가 올무에 걸려듬 같이
때와 偶然[우연]이 저들 위에 덮치는 것 뿐이더라.”
- 9:11, 12

  • ‘올무’는 짐승을 잡기 위해 얽어놓은 죔줄을 의미한다.
  • 달리기 선수가 빠르다고 반드시 승리하지 않고, 힘이 센 자가 전쟁에서 이기며, 지혜로운 자가 양식을 얻고 철인이 부자가 되는 것이 보장되지 않는 현실을 고발한다.
  • 인간의 능력이나 노력과 상관없이 고기가 그물에 걸리듯 때와 우연이 불쑥 덮치는 무상한 인과의 단절을 예리하게 통찰한다.


8. 불가해 중의 불가해이자 비도덕적인 절대 사실인 죽음

그런데 不可解中[불가해중]의 不可解[불가해], 非道德的[비도덕적]인 것 중의 非道德的[비도덕적]인 것은 “죽음”이라는 事實[사실]이었다. 이 “죽음”이란 것은 智慧[지혜]와 無智[무지]를 가리지 않으며 義人[의인]과 惡人[악인]을 分柬[분간]하지 않는다.

  • ‘불가해(不可解)’는 이성으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음을 뜻한다.
  • 세상의 온갖 부조리 가운데 가장 이해할 수 없고 비도덕적인 극치는 바로 지혜와 무지, 의인과 악인을 전혀 구별하지 않고 찾아오는 ‘죽음’이라는 엄정한 사실에 있다고 규정한다.
  • 도덕적 가치나 인간의 우열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죽음의 무차별성이 지닌 냉혹한 실존적 충격을 드러낸다.


9.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에게 똑같이 임하는 죽음의 형평성

智慧[지혜]로운 者[자]는 눈이 밝고 無智[무지]한 者[자]는 어둡다 하자. 그러나

“저들 雙方[쌍방]에 똑같은 事變[사변]이 臨[임]함을 내가 깨달았노라. 그리하여 내 혼자 말이 미련한 者[자]에게 臨[임]하는 그것이 내게도 그대로 臨[임]할 것이니 그러면 내가 왜 더 智慧[지혜]로왔던고> 아아 智慧[지혜]로운 者[자]가 미련한 者[자]와 똑같이 죽으리로다.” - 2:14, 15

  • 해당 내용은 전도서 2장 14-16절의 내용에 골고루 들어 있다.
  • ‘사변(事變)’은 예기치 못한 중대한 일이나 운명적 사건을 의미한다.
  • 지혜로운 자의 밝은 눈과 미련한 자의 어두움을 구별하려 해도 결국 양방에게 똑같은 죽음의 운명이 임하는 것을 깨닫고, 지혜롭게 살기 위해 애쓴 수고가 무엇이 유익한가 탄식하며 미련한 자와 똑같이 쓰러지는 한계를 고백한다.
  • 지적 탁월함이나 도덕적 성취가 죽음 앞에서는 아무런 특권을 주지 못하는 허무한 평등성을 폭로한다.


10. 모든 자에게 예외 없이 임하는 죽음의 무차별적 비극성

“한가지 事變[사변]이 모든 者[자]에게 똑같이 臨[임]하나니 義人[의인]에게와 不義[불의]한 者[자]에게, 善人[선인]과 惡人[악인]에게, 깨끗한 者[자]에게와 더러운 者[자]에게 犧牲[희생]안드리는 者[자]에게, 어진 이에게 臨[임]하는 그것이 罪人[죄인]에게, 盟誓[맹서]하는 者[자]에게 오는 그것이 盟誓[맹서]않는 者에게 똑같이 臨[임]함이로다.”

  • 『낙수』, 『김재준 저작전집』에는 “9:2-3”이 첨가되어 있음. 개역개정으로는 전도서 9장 2절의 내용과 일치한다.
  • ‘맹서하는 자(盟誓하는 者)’는 신 앞에서 종교적 서약을 지키며 경건하게 사는 이를 뜻한다.
  • 의인과 불의한 자, 선인과 악인, 정결한 자와 부정한 자, 제사를 드리는 자와 드리지 않는 자, 맹세를 지키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 모두에게 구별 없이 동일한 죽음의 사변이 덮친다는 사실을 나열한다.
  • 현세의 도덕적 차이나 종교적 행위의 공로가 죽음이라는 거대한 절대 장벽 앞에서 완전히 무력화되는 비합리적이고 냉혹한 현실을 거듭 강조한다.


11. 현세만을 바라볼 때 마주하는 비도덕적 폭군으로서의 죽음과 피안의 문제

이렇게 現世[현세]만을 보는 때 죽음이란 不可解[불가해], 非道德的[비도덕적] 暴君[폭군]이었다. 그러나 萬一[만일] 現世[현세]의 彼岸[피안], 죽음의 저쪽 나라에서 公平[공평]한 報應[보응]을 받는다면 어떨까? 하지마는 이것은 現今[현금]의 “傳道者[전도자]”, 차디찬 現實[현실]만을 보려는 그에게는 손조차 댈 수 없는 題目[제목]이었다.

  • ‘피안(彼岸)’은 번뇌와 고통이 가득한 이 세상(차안)의 저쪽에 있는 초월적인 세계를, ‘폭군(暴君)’은 아무런 자비나 도덕적 규칙 없이 무자비하게 군림하는 절대적 권력을 뜻한다.
  • 오직 눈에 보이는 현세만 바라보는 관점에서 죽음은 도덕도 정의도 통하지 않는 채 모든 것을 앗아가는 불가해하고 비도덕적인 폭군과 같다.
  • 죽음 너머의 피안에서 공평한 보응을 받는다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겠지만, 차디찬 현실만을 엄격하게 직시하려는 전도자에게 내세의 문제는 당장 손을 댈 수도 없고 논할 수도 없는 영역이었음을 밝힌다.


12. 짐승과 인간의 동일한 운명과 흙으로의 귀환

“짐승에게 臨[임]하는 일이 人生[인생]에게도 臨[임]하다니
臨[임]하는 事變[사변]은 둘다 一般[일반]이로다.
이도 죽고 저도 죽어
한 呼吸[호흡]을 가졌으니
人生[인생]이 짐승보다 나은 것 없으매
둘이 다 똑같이 헛된 것 뿐이로다.
둘이 똑같이 한 곳을 가나니
다 같이 흙에서 나서
다 같이 흙으로 돌아가도다.

  • ‘일반(一般)’은 서로 같아서 차이가 없음을 의미한다.
  • 짐승에게 닥치는 죽음의 일이 인간에게도 똑같이 임하며, 동일한 호흡을 가진 채 똑같이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적 운명 앞에서는 인간이 짐승보다 나을 것이 전혀 없고 둘 다 똑같이 허무할 뿐이라고 탄식한다.
  • 생명의 호흡을 공유하는 피조물로서 인간이 지닌 생물학적 한계와 허무주의적 실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13. 영혼의 행방에 대한 의문과 영혼불멸을 논할 수 없는 현실주의적 한계

누가 알리오 -
人生[인생]의 魂[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魂[혼]은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 3:9-21
現實主義者[현실주의자]인 그로서는 個人[개인]의 靈魂不滅[영혼불멸]을 云謂[운위]할 수도 없었으며 論[논]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 『낙수』에는 “3:19-21”이다. 『낙수』의 표기가 비교적 정확하다.
  • ‘영혼불멸(靈魂不滅)’은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영혼은 소멸하지 않고 영원히 존재한다는 사상을 뜻한다.
  • 인간의 혼이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이 땅으로 내려간다는 사후 세계의 차이를 누가 과연 확실히 알 수 있겠냐며 반문한다.
  •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던 전도자로서는 사후의 세계나 개인의 영혼불멸을 증명하거나 말할 수도 없었으며, 오직 눈앞의 경험적 세계에 머물러 있었음을 보여준다.
  • 이 내용은 김재준의 또 다른 글 “욥기에 나타난 영혼불멸관”과 비교할 수 있다.


[3] 현실주의적 처세와 교훈

사후 세계나 영혼불멸을 논할 수 없는 현세의 한계 속에서, 허무를 견디기 위해 현재를 즐기며 소박한 쾌락과 실용적 처세술에 의존하는 인간적 연약함을 정리한다.


1. 현실 관찰을 통한 인생의 의미 탐색과 공허감의 심화

그는 現實[현실]의 觀察[관찰]을 通[통]하여 “人生[인생]의 意義[의의]”를 發見[발견]하려고 이리 더듬고 저리 더듬었으나 結局[결국] “공허감” 더한 것 뿐이었다. 그는 인생의 미래에 대하여 개인적으로나 國民的[국민적]으로나 何等[하등] 所望[소망]을 가지지 못하였으며 現在[현재]의 生[생] 自體[자체]에 對[대]해서도 아무 樂觀的[낙관적], 熱情的[열정적] 態度[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 ‘국민적 소망(國民的 所望)’은 공동체나 민족 단위의 미래에 대한 밝은 기대를 의미한다.
  • 전도자가 치열한 현실 관찰을 통해 인생의 의미를 건져 올리려 사방으로 애썼으나 결국 허무와 공허감만 깊어졌으며, 개인적 미래나 민족적 미래에 대해서도 아무런 소망을 품지 못한 채 현재의 삶 자체에 대해 비관적이거나 냉담한 태도를 취했음을 보여준다.
  • 헛된 희망을 거부하고 현실의 냉혹한 실상을 직시한 자가 마주하는 깊은 영적 무기력의 상태를 짚어낸다.


2. 죽음보다 못한 생과 죽음의 예찬 사이에서 멈춰 선 현실적 태도

그리하여 어떤 때에는 “오래 前[전]에 죽은 이가 아직껏 살아있는 이보다 더 幸福[행복]스럽고 아직 誕生[탄생]하지 않은 이가 죽은 이나 산 이보다 훨씬 더 幸福[행복]스럽다고”(4:2, 3) 한 적도 없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아주 生[생]을 否定[부정]하고 死[사]를 讚美[찬미]하기에는 그는 너무나 현실적이었다. 생의 意義[의의]가 없다면 死[사]에는 더구나 意義[의의]없을 것이었다.

  • - ‘사(死)를 찬미(讚美)’는 죽음을 이상화하거나 구원으로 여기는 극단적 염세주의를 뜻한다.
  • - 고통스러운 현세보다 차라리 죽은 이나 태어나지 않은 이가 낫다는 극단적인 탄식을 뱉기도 했지만, 생명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거나 죽음을 미화하기에는 너무나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다.
  • - 삶에 뚜렷한 의미가 없다면 죽음 역시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논리적 통찰을 통해, 허무주의에 매몰되거나 값싼 자살적 염세주의로 도피하지 않는 전도자의 건전하고 단단한 현실 감각을 강조한다.


3. 빛의 감미로움과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는 단언

그러므로 그는 “빛은 참으로 甘美[감미]한 것이어서 눈으로 太陽[태양]을 보는 것은 愉快[유쾌]한 일이로다”(11:4) 하는 生[생]의 快樂[쾌락]을 말하였으며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9:4)고도 斷言[단언]한 것이다.

  • “빛은 참으로 甘美[감미]한 것이어서 눈으로 太陽[태양]을 보는 것은 愉快[유쾌]한 일이로다”(11:4)는 전도서 11장 7절의 내용과 같다.
  •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는 비천할지라도 살아있는 생명 그 자체가 지닌 절대적 가치를 비유하는 표현이다.
  • 거창한 인생의 의미나 사후의 환상은 없어도 눈으로 태양을 보는 감미로움과 유쾌함 같은 생의 쾌락을 인정하고, 아무리 초라해도 숨 쉬며 살아있는 생명(산 개)이 이미 영광을 잃고 쓰러진 위대한 존재(죽은 사자)보다 훨씬 낫다고 단언한다.
  • 장공은 모든 이상주의적 허영이 무너진 자리에서 비로소 발견되는, 살아 숨 쉬는 현재라는 생명 자체의 소박하고도 엄정한 가치를 역설한다.


4. 살고자 하는 현실적 선택과 실제적 교훈들의 천박성 및 기회주의적 성격

意味[의미]야 있던 없던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이 나으니 아마도 살자 하고서야 미련하게 어렵게 살 것은 무어냐? 될 수 있는대로 智慧[지혜]롭게 愉快[유쾌]하게, 죽음 오는 때까지 걱정놓고 살아볼 것이 아닌가? 이런 견지에서 그는 이에 유익한 실제적 교훈과 지혜를 많이 기술하였다(5~7, 11장). 그의 記述[기술]한 智惠[지혜]와 敎訓[교훈]은 現實生活[현실생활]을 좀더 滋味[자미]스럽게 하기 爲[위]한 한 方便[방편]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오, 永遠[영원]한 眞理[진리]와 不變[불변]의 道德的[도덕적] 權威[권위]에 根據[근거]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極[극]히 淺薄[천박]한 것이 많으며 또 機會主義的[기회주의적]인 것도 많다.

  • ‘자미스럽게(滋미스럽게)’는 흥미롭고 재미있게를, ‘기회주의적(機會主義的)’은 원칙보다 그때그때의 이익이나 편의를 따르는 태도를 의미한다.
  • 삶의 거창한 의미가 없더라도 죽기보다 사는 것이 나으니 미련하게 고생하며 살지 말고 죽음이 올 때까지 지혜롭고 유쾌하게 걱정 없이 살아보자는 견지에서 실제적 처세술을 많이 기술했으나, 이는 영원한 진리나 도덕적 권위에 근거한 것이 아니기에 극히 천박하고 기회주의적인 내용이 많다고 평가한다.
  • 고매한 도덕이나 신앙적 이상이 무너진 현실 속에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세속적이고 실리적인 처세의 한계를 가감 없이 드러낸다.


5. 지나친 의와 지혜, 악을 경계하는 현실적 처세의 예시

例[예]한다면
“그러므로 너무 義[의]롭지 말고
너무 智慧[지혜]롭지도 말라.
(그 때문에) 因苦[인고] 當[당]할건 무어냐?
너무 惡[악]하지도 말고
너무 미련하지도 말라.
네 때가 이르기 前[전]에 죽을 건 무어냐?”
한 것 같은 것이다.

  • 『낙수』에는 “7:16, 17”이 추가되어 있어서 해당 구절이 전도서 7:16-17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 ‘인고(因苦)’는 이로 인해 고통을 당함을 뜻한다.
  • 너무 의롭거나 지혜로워서 화를 자초하거나 고통당하지 말고, 너무 악하거나 미련해서 제 명에 못 가고 일찍 죽는 일도 없도록 중용을 지키라는 식의 처세 교훈을 예로 든다.
  • 숭고한 가치를 추구하기보다 어떻게든 해 아래서 안전하게 목숨을 부지하고 요행히 살아남으려는 현실주의적 타협의 면모를 보여준다.


6. 현재의 향락 고조와 궁극적 진리가 아닌 현실적 지혜의 추구 당부

아무리 생각해 보아야 별것 없으니 “現在[현재]를 享樂[향락]하라”, “네 몫에 태인 이 짧은 一生中[일생중] 먹고 마시고 하나님의 作定[작정]해 주신 快樂[쾌락]을 누릴 수 있는 데까지 누리라”고 再三[재삼] 高潮[고조]하였다(2:24~26, 3:13, 22, 5:18, 8:15, 11:8~10). 그리고 이를 成就[성취]키 爲[위]하여 될 수 있는 대로 智慧[지혜]를 求[구]하라. 宇宙[우주]와 人生[인생]의 窮極的[궁극적] 實在[실재]나 絶對[절대]의 眞理[진리]를 探求[탐구]하기 爲[위]한 智慧[지혜]가 아니라 現實生活[현실생활]을 좀더 滋味[자미]롭게 할 實際的[실제적] 智慧[지혜]를 求[구]하라고 付托[부탁]한 것이다.

  • ‘고조(高潮)’는 어떤 기운이나 주장을 힘주어 드높임을 의미한다.
  • 깊이 생각해보아도 별다른 답이 없으니 짧은 인생 동안 현재를 즐기며 하나님이 허락하신 쾌락을 누릴 수 있는 데까지 누리라고 거듭 강조하며, 우주의 궁극적 진리를 찾는 지혜가 아니라 현실 삶을 좀 더 재미있고 윤택하게 만들 껍데기뿐인 실제적 지혜를 구하라고 당부한다.
  • 장공은 전도자가 도달한 최종적인 처세의 길이 절대적 진리의 발견이 아니라, 허무를 견디기 위해 현세의 소박한 쾌락과 실용적 지혜에 의존하는 인간적 연약함의 발로임을 정리해 준다.


[결론] 창조주를 향한 회귀와 신앙적 안식

결론부는 늙음과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 모든 인간적 이론과 처세의 허황됨을 내려놓고, 창조주를 기억하며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는 탕자의 감격스러운 귀환과 십자가 은총의 안식을 촉구한다.


[1] 창조주의 기억과 노화(죽음)의 직면

현실적 처세의 한계를 넘어선 전도자가 늙음과 노쇠의 절정 앞에서 모든 지혜를 내려놓고, 창조주를 기억하는 종교적 희열이 모든 것보다 뛰어남을 고백한다.


1. 현실적 처세 속에서 발로한 신앙적 일면과 창조주 기억의 필연성

그러나 이렇게 現實的[현실적]인 그에게도 信仰的[신앙적] 一面[일면]이 發露[발로]됨을 볼 수 있으니 아마도 現實生活[현실생활]만을 充實[충실]케하며 즐겁게 함에도 創造主[창조주]인 하나님을 除外[제외]하고서는 成就[성취]할 길 없음을 깨달은 까닭인가 한다.

  • ‘발로(發露)’는 숨겨져 있던 마음이나 성품 등이 겉으로 드러남을 의미한다.
  • 철저히 현실주의적인 처세에 치우친 것처럼 보이는 전도자에게도 문득 신앙적인 일면이 배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비록 현실 삶을 충실하게 채우고 즐겁게 하려 할지라도 창조주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그것을 참되게 성취할 길이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 세속적 쾌락과 처세의 한계를 넘어선 지점에서 영혼이 결국 하나님을 향한 신앙적 귀환을 갈구하게 된다는 점을 포착한다.


2. 창조주 기억 구절의 후인 삽입설에 대한 비판과 작자 자신의 사상적 추이 간주

 — “네 나이 젊었을 때에 네 創造主[창조주]를 記憶[기억]하라” 한 一句[일구]는 思想的[사상적] 連結[연결]으로 보든지 文脈上[문맥상]으로 보든지 심히 不自然[부자연]하여 後人[후인]의 삽입한 것으로 認[인]하는 學者[학자]가 많으나 思想的[사상적] 連結[연결]의 不足[부족]한 것은 全體[전체]를 通[통]하여 한 두 곳 뿐이 아니니 이 句節[구절]만을 꼬집어 말하는 것은 불온당하다. 차라리 作者[작자] 自身[자신]의 思想的[사상적] 추이로 看做[간주]함이 可[가]할 것이다.

  • ‘사상적 추이(思想的 推移)’는 사상이나 생각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해 가는 과정을 뜻한다.
  • ‘젊었을 때에 네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구절이 문맥상 부자연스럽다는 이유로 후대의 삽입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으나, 전체 글 속에서 사상적 연결이 매끄럽지 않은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므로 이 구절만 문제 삼는 것은 부당하며, 차라리 작자 자신의 사유가 발전해 나간 궤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변호한다.
  • 성서 본문을 기계적으로 분해하기보다 저자의 실존적이고 유기적인 사상 전개 과정 속에서 입체적으로 이해하려는 신학적 안목을 보여준다.


3. 종교적 희열의 우월성 인정과 순례기를 닫는 창조주 기억의 당부

그리고 現實生活[현실생활]의 喜樂[희락] 中[중]에서 結局[결국] 宗敎的[종교적] 喜悅[희열], 創造主[창조주]를 記憶[기억]하는 喜悅[희열]이 모든 喜悅[희열]보다도 더욱 뛰어남을 認定[인정]안할 수 없었던 것이리라. 그리하여 그는 그의 巡禮記[순례기]를 끝막으려 할 때

  • ‘종교적 희열(宗敎的 喜悅)’은 세상의 감각적 쾌락을 뛰어넘어 창조주와의 관계 안에서 느끼는 영혼의 깊은 기쁨을 의미한다.
  • 현실 생활의 온갖 희락을 맛본 전도자 역시 결국 창조주를 기억하는 종교적 희열이 세상의 그 어떤 기쁨보다도 훨씬 뛰어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에, 자신의 길고 긴 진리 탐구의 순례기를 마감할 때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외침으로 결론을 맺게 된다.
  • 인간이 도달하는 허무의 끝자락에는 언제나 하나님을 향한 경배와 기억이라는 궁극적 신앙의 회복이 기다리고 있음을 강조한다.


4. 노쇠와 죽음의 그림자를 묘사하며 창조주 기억을 촉구하는 전도서의 절정

“젊었을 때에 네 創造主[창조주]를 記憶[기억]하라.
不運[불운]의 날이 臨[임]하기 前[전]에
그리고 “내게는 藥[약]이 없노라”고
말할 歲月[세월]이 이르기 前[전]에
해가 어두어지고
달과 별에서 빛이 떠나며
비온 後[후] 구름이 거두기 前[전]에.
집 지키는 者[자] 떨고
힘쓰는 者[자] 굽혀지는 때
맷돌가는 비자가 적고 한가하며
유리窓[창]으로 내다보는 婦人[부인]이 빛을 잃을 때
통한 거리에 門[문]이 닫히고
맷돌 소리가 낮아지는 때
지꺼리는 새소리 弱[약]하여지고
노래의 딸들이 鈍[둔]해 지는때
높은 곳을 두려워하고
한길 걷기도 무서워하는 때
銀[은]줄이 끈어지고
金[금]잔이 깨어지기 前[전]에
샘물가에서 물甁[병]이 부서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상하기 前[전]에』
-7:1~7

  • ‘은줄이 끊어지고 금잔이 깨어지며 물병이 부서지는 것’은 인간 육체의 생명력이 완전히 소멸하여 죽음에 이르는 처절한 노쇠 현상을 비유하는 상징적 표현이다.
  • 불운의 날이 닥치고 인생의 황혼에서 낙이 없다고 탄식하며 늙어가는 육체의 각 부위를 은유적으로 묘사한 전도서 12장의 시적 구절을 인용하여, 각일각 조여오는 죽음의 검은 그림자 앞에서 인간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창조주를 기억하는 것뿐임을 강력하게 촉구한다.
  • 세상의 모든 헛된 지혜와 쾌락의 이론을 내려놓고, 죽음의 문턱 앞에서 전적으로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인간 실존의 가장 경건하고 진실한 종착점을 증언한다.


[2] 결론 : 하나님 경외와 심판

모든 은밀한 행위를 선악 간에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이 인간의 마땅한 본분임을 깨달으며 전도서의 최종적인 결론에 도달한다.


1. 죽음 앞에서의 이론과 지혜의 포기와 창조주를 향한 의탁

이렇게 刻一刻[각일각] 닥쳐오는 죽음의 검은 그림자를 凝視[응시]한 傳道者[전도자]는 모든 理論[이론], 모든 智慧[지혜]를 다 내어놓고 오직 네 創造主[창조주]를 記憶[기억]하라는 한마디 말밖에 付托[부탁]할 것이 없었던 것이다. 

  • ‘각일각(刻一刻)’은 시간이 흘러갈수록 더욱 급박해지는 모양을, ‘응시(凝視)’는 눈을 떼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 각 순간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정면으로 마주한 전도자는 자신이 쌓아온 모든 이론과 지혜를 남김없이 내려놓고, 오직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당부 외에는 달리 부탁할 말이 없었음을 보여준다.
  • 인간의 모든 지적 성취와 세속적 탐구가 죽음의 장벽 앞에서 완전히 무력해지며, 오직 하나님을 향한 기억만이 유일한 진실로 남게 됨을 강조한다.


2.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부재와 전도서의 최종 결론 및 탕자의 귀환

그리고 보니 하나님을 떠나 人生[인생]은 있지 못한다. “結論[결론]으로 통틀어 말하노니 하나님을 敬畏[경외]하고 그 命令[명령]을 지키라 이것은 모든 사람의 本分[본분]이니라. 대개 하나님께서 모든 行爲[행위]와 그 모든 隱密[은밀]한 일에 對[대]하여 善惡[선악] 間[간]에 審判[심판]하시리라”[12:13, 14] 하고 그는 結局[결국] 하나님께로 더듬어 들었다. 길 잃었던 羊[양], 집 떠난 蕩子[탕자] 돌아오는 발걸음을 우리는 여기서 찾아보고 눈물로 맞아 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 ‘본분(本分)’은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탕자(蕩子)’는 집을 나가 방황하다 돌아온 아들을 뜻한다.
  •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참된 삶을 영위할 수 없기에, 모든 행위와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명령을 지키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라는 전도서의 최종 결론(12:13, 14)으로 결국 하나님 품에 안기게 된다.
  • 오랜 허무의 길을 방황하던 전도자의 탐구가 마치 길 잃은 양이나 집 떠난 탕자가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는 감격스러운 귀환과 같음을 눈물로 확인하게 된다.


[3] 현대인을 향한 제언

생사의 위기에 처한 현대인들이 헛된 경쟁과 쾌락의 대로나 거미줄을 떠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에서 속죄의 은총을 입고 새로운 자아와 참된 안식을 회복해야 함을 엄숙히 역설한다.


1. 하나님 안에서의 안식과 생사 위기에 처한 현대인을 향한 십자가의 은총 촉구

그렇다. 하나님 안에 쉴때 까지는 우리에게 安心[안심]이 없을 것이다. 때는 지금 生[생]이냐? 死[사]냐? 하는 危機[위기]에 處[처]해 있다. 現代人[현대인]은 모름지기 그리스도의 十字架[십자가] 아래 모여 贖罪[속죄]의 恩寵[은총]을 通[통]하여 새로운 自我[자아]를 받아야 할 것이다.

  • ‘속죄의 은총(贖罪의 恩寵)’은 죄를 용서받는 구원의 은혜를, ‘생사(生死)의 위기’는 영적으로 살고 죽는 절체절명의 순간을 의미한다.
  • 인간은 오직 하나님 안에 거할 때만 참된 안식을 얻을 수 있으며, 영생과 영사의 기로라는 위기에 처한 현대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 나아가 속죄의 은총을 통해 새로운 자아를 덧입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 장공은 전도서의 허무철학에 대한 깊은 고찰을 기독교 복음의 핵심인 십자가 은총과 연결지어, 방황하는 현대 영혼들이 도달해야 할 궁극적인 신앙적 종착지를 제시하며 글을 매듭짓는다.
  • 『김재준 저작전집』에는 ‘1934년 10월 15일’, 『낙수』에는 글 마지막에 ‘소화 9년 10월 10일(1934년 10월 10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최종 결론 : 장공의 「실재의 탐구」가 오늘날 던지는 메시지


오늘날의 현대 상황은 1930년대 장공이 진단했던 기계 문명과 경쟁의 체제보다 훨씬 가속화된 디지털 자본주의와 무한 경쟁의 소용돌이속에 처해 있다. 현대인들은 눈부신 과학 기술의 발전 속에서도 내면의 영적 공허와 껍데기뿐인 실존적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맹목적인 질주를 계속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장공의 「실재의 탐구」는 인간이 세속적 쾌락이나 실용적 처세술, 혹은 지식 만능주의의 망상 속에서는 결코 참된 평화를 얻을 수 없음을 명백히 폭로한다. 죽음과 부조리라는 냉혹한 현실 앞 모든 인간적 이론이 무너질 때, 비로소 창조주를 기억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총 아래 무릎 꿇는 것만이 허무에 잠긴 영혼이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이다. 고통받는 현대 영혼들에게 이 글은 헛된 경쟁의 대로나 쾌락의 거미줄을 벗어나,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자아를 회복해야 하는 실존적 결단의 시급함을 엄숙하게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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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의 첫 글, “이혼하려는 형님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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