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9:2-3] 교회는 변화산과 그 아래에 있어라 – 1987년 8월 23일, 김상근 목사

8월 07, 2026

교회는 변화산과 그 아래에 있어라

마가복음 9장 2-3절 / 1987년 8월 23일 / 효동교회


[회상 노트]

효동교회에서 한 설교다. 효동교회는 대단히 평범한 교회다. 기장 교회에는 많지 않은 사회적 명망가도 있지만 소시민들이 모인 교회다. 기장의 거의 모든 교회가 그렇다 해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소시민들이 가지는 종교적 욕구를 나무랄 이유는 없다. 그러나 그 욕구도 승화되어야 한다. 그것이 무엇이고 어떤 것일까? 교회가, 교회의 종교적 행위들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영적 힘의 원천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신앙이 자라고 성숙하여 오늘 우리 현실이 요구하는 사회 각 부문의 민주화에 헌신해야 한다.

교회에 둥우리를 틀고 안주하지 않고 산 아래 삶의 여러 영역에서 일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꿈이요 기도였다.


[슬라이드]















[설교 전문]


효동교회가 창립주일을 맞이하게 된 것을 여러분과 더불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이날을 기하여 우리 교회가 서야 할 자리를 분명히 하게 되기를 바란다. 교회는 교회이기에, 또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기에 갖는 독특한 영적 힘을 가져야 하며, 동시에 그것은 언제나 사람의 삶의 현실과 연결되어야 한다.

영적 힘이란 신비스럽고 신통한 힘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기심, 안일, 탐욕의 죄에 얽매인 사람으로서는 자신을 던질 수 없는, ‘옳은 것, 선한 것, 자신에게는 아무런 이득 같은 것이 돌아오지 않는 것, 그런 가치와 일에 자신을 던질 수 있는 힘’, 그것이 곧 영적 힘이다. 사람이 부딪쳐 있는 악한 현실을 극복하는 힘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래 모습이다.

우선 우리는 오늘날 교회나 교인에게 종교적 힘이 없다는 것을 실감할 수밖에 없다. 예수께서 사랑하신 사람을 사랑하는 힘, 예수께서 관심하신 일에 관심하는 힘, 예수께서 긍휼히 여긴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힘, 그것이 종교적ㆍ영적 힘일진대 오늘 우리에게는 이 힘이 없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자신을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예수와는 결정적으로 관계가 되지 않는 사안을 교회의 일로 설정하고 그 일에 급급해 한다.

교회는 스스로 교회의 영역을 좁혀서 설정하고 거기에 안주해 버리는 타성에 빠진다. 신앙은 여기 이것에만 관계되는 것이고 그것을 넘어가면 신앙이 관여할 것이 아니라고 하여 신앙의 영역을 좁힌다. 좁힌다는 표현보다 그렇게 함으로써 부딪치고 극복해야 할 과제를 피해 나간다. 말하자면 예수에게 있어서 본질적 문제가 아니었던 것을 가장 본질적인 것으로 둔갑시킴으로써 본질적인 것을 피해 가는 것이다.

예수는 제자 셋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신다. 산에 오르시기 전에 예수는 자신이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게 될 것임을 처음으로 털어놓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것은 초복 다음에 중복이 오고, 그리고 말복이 오는 것 같은 시간표가 아니다. 예수의 예상이 여기에 이르게 되었을 때 그는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강박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죽지 않을 수도 있으나 죽음의 자리에 스스로 들어 가야 한다고 결단했을 때 그가 감당해야할 고뇌는 극에 달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제 그는 자기가 그 죽음의 길에 꼭 가야 하는 것인가를 정직하게 정리해야 했다. 그리고 가야 한다면, 죽음의 길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바른 길이라면, 그 국면과 대결해 서야 했다. 그러기 위하여는 그에게 종교적 힘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높은 산에 오른다. 거기서 그는 깊은 종교적 경험을 갖게 된다. 교회나 신앙인들도 자신이 직면해 서야할 과제를 감당하자면 종교적 힘이 있어야 한다. 아예 문제나 과제가 없는 교회, 교인이라면 산에 오를 이유도, 필요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문제를 가지고 있다면 (누구나 그것이 없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것을 감당하기 위하여 종교적 깊이를 체득해야 한다.

그러나 종교적 경험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은 그에 몰입하는 것이었다. 신앙에서 얻게 되는 어떤 신비한 경험, 거기에 몰입하여 그것에 안주해 버리려는 유혹이다. 자기들만의 세계를 만들고 거기에 만족하고자 하는 유혹이다. 오히려 종교적 깊이 자체를 탐닉함으로 종교적 힘을 필요로 했던 동기를 내팽개친다.

베드로가 그랬다. ‘초막 셋을 짓고 여기에 머물자.’는 제의가 그것이다. 예수가 왜 여기 왔는지를 잊고자 한 것이다. ‘죽임을 당하리라고 하는 그 끔찍스럽고 고통스런 현실을 무엇 때문에 구태여 자초하려는 것인가? 이렇게 좋은데 우리끼리 이 재미나 누리고 있으면 좋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교회나 신앙인들도 마찬가지다. 교회가 왜 있어야 하며, 나는 왜 신앙인인가를 잊는다. 교회가 만들어 놓은 안일한 문화에 푹 빠져서 그것을 즐긴다. 타성적 신앙에 빠져 버린다. 혹은 교리를 따지고, 교리를 지키는 데 열심하고, 그것으로 훌륭한 교인이 되었다고 자부한다. 비본질적인 일에 열을 냄으로써 자기 만족의 수렁에 빠져 버린다. 그것이 종교적 힘이라고 믿어 버린다.

우리에게 왜 변화산이 필요한가? 왜 예배가 필요하고, 왜 기도가 필요하고, 왜 성서 공부가 필요한가? 왜 세례를 받아야 하고, 왜 성만찬의 신비한 경험이 있어야 하는가? 왜 심방이고, 왜 구역예배인가? 왜 헌금이며, 왜 교회 봉사인가? 교회는 왜 있는 것이며, 그 일원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교회 생활에 몰입하여 모든 것을 잊자는 것인가? 속상하고 골치 아프니 교회나 가자는 것인가? 성서 한 절 외우는 것 자체가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하는가?

예수의 반응은 베드로와 달랐다. 그는 베드로의 제의에 대꾸도 하지 않고 신비의 산 아래로 내려온다. 그는 변화산의 신비한 경험을 반드시 산 아래에 있는 인간의 고통과 연결한다. 그것이 자신의 과제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변화산의 경험은 그것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부딪치고 극복해야 할 과제에 부딪쳐 극복할수 있는 힘이 될 때 의미가 있다고 보고 있다.

변화산 아래가 사람의 현실, 바로 그것이다. 벙어리 귀신들린 아이의 비참한 현실이 산 아래 있다. 이것은 대단히 상징적이다. 산 위에서는 황홀한 정경이 전개되고 있으나 산 아래에는 고통과 고뇌에 억눌려 있는 사람이 있다. 악령은 인간들을 땅에 뒹굴게 하고 거품을 내뿜게 하며 이를 갈게 하고 몸을 빳빳하게 한다. 불 속에 몰아넣고 물 속에 집어 던진다. 속수무책이다. 그저 악령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다. 사람의 비극적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장면이다.

예수는 변화산에만 있지 않고 이 아이의 고통의 현실에 오신다. 이 아이를 사랑하기 위해서다. 그는 이 아이를 사랑할 수 있는 종교적, 영적 힘을 가졌다. 귀신을 명하여 내쫓는다. 그러한 자신의 행위가 결국 고난을 끌어오게 될 것이라는, 급기야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불이익을 확연히 보면서도 이 아이를 사랑한다. 이것이 ‘영적 힘’이다.

사회의 현실도 귀신들린 아이와 같다. 좀더 선하게, 자유하게 발전되어 가지 못한다. 더욱 악해져 간다. 최근의 선거 양상만 보아도 그렇다. 옛날 선거는 조금은 낭만도 있고 재미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오늘날 선거는 완전히 타락된 선거다. 돈을 쏟아 부어야만 된다. 유권자들은 달라고 아우성이다. 여기 이런 모임이 있으니 좀 다녀가야 하겠다고 연락을 한다는 것이다. 존경하여 찍고, 우리의 대표로서 우리가 하고자 하는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찍는 것이 아니다. 입법 기관이나 행정부를 감독하는 기관의 일원이 될 만하여 찍는 것이 아니다. 나한테 고분고분 했으니, 혹은 그래도 갈비탕이라도 얻어먹었으니, 라이터라도 하나 얻었으니, 뭐 이런 경향이 있는 것 아닌가? 제도나 문화, 풍토가 좋아져야 하겠는데 어디서부터 풀어야할지 도무지 난감하기만 하다.

우리 개인이 부딪히는 문제도 그렇다. 선하게 바르게 살아야 할 텐데 그렇게 되지 않는다. 얽히고 설켜서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될 일인데 잘못된 쪽으로 참여하는 자신을 본다. 혹은 문제가 풀리지 않는 가정이 있다면 그도 마찬가지다. 뭐가 될 듯하다가는 안 된다. 해결이 될 것 같더니만 또 꼬인다. 이런 모든 것은 귀신이 와서 우리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우리를 땅에 뒹굴게 만들고 거품을 내뿜게 하는 것과 같다. 나는 그렇게 하고자 하지 않지만 이를 갈게 되고 몸이 빳빳해진다. 귀신은 우리를 불 속에 몰아넣기도 하고 물 속에 집어 던지기도 한다. 이것은 우리의 비극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것은, 예수는 변화산에 계시지 않고 고통당하고 있는 우리 가운데 오신다는 것이다. 오셔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낫게 해 달라고 요청하는 이 요청에 응하시어 우리를 구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가 가진 영적 힘이다.

문제가 없는 곳에 종교는 존재할 이유가 없다. 문제를 느끼지 못한다는 거기에 살아 있는 신앙이 숨쉴 수 없다. 내 자신이 부딪쳐 극복해야 할 문제로부터 시작하여 우리 사회가 극복해야 할 수많은 문제를 우리는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제자들이 열정과 의욕만 가지고 벙어리 귀신을 내쫓을 수 없었던 것처럼 사람의 능력과 의욕만으로 감당하고 극복할 수 없다. 변화산의 영적 힘이 있어야 한다. 교회는 인간사의 수많은 과제를 감당하고 극복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변화산의 경험, 종교적 힘을 가져야 한다. 동시에 산 아래의 과제에 직면해 서야 한다. 교회는 변화산에도 있어야 하고, 산 아래에도 가야 하고 이중성을 가져야 한다.

효동교회는 왜 있으며, 어떻게 존재하려 하는가? 여러분은 어떤 모양의 신앙인이 되고자 하는가? 우리는 이 교회에서 ‘변화산의 경험’을 갖게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산 아래’ 과제와 연결된 경험이어야 한다. 우리 교단은 그동안 민주화라는 민족적인 과제에 직면해 서는 경건을 가지고 있다. 여러분의 기도와 참여에 감사한다. 이제 우리는 정치적 민주화와 동시에 사회의 각 분야에 민주화를 이룩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그 일을 찾고 거기 직면해 서야 한다.

효동교회가 오늘 사람들의 삶의 자리, 민족의 삶의 자리를 피하여서는 안 된다. 동시에 이 모든 과제를 감당할 수 있는 영적 힘을 변화산, 여기 이 교회에서 얻게 되어야 한다. 변화산에 있으며, 또한 산 아래에 있는 효동교회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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