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3:1-2] 예수의 성전 파괴 선언 – 1986년 7월 20일, 김상근 목사

예수의 성전 파괴 선언

마가복음 13장 1-2절 / 1986년 7월 20일 / 성남교회


[회상 노트]


1987년 ‘6월 민주항쟁’이 일어나기 1년 전 쯤 나는 막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이만큼에서 이 정권은 스스로 물러났어야 했다.” 87년의 저 엄청난 저항을 예견이라도 하고 있었던가!

예견은 무슨 예견이었겠는가? 저항과 심판의 걸음도 정권의 부도덕성에 비례하여 거세었을 뿐이었던 것 같다. 정권의 부도덕함이 매일같이 터져 나왔었다. 이를 항의하고 저항하는 세력을 국가보안법을 휘둘러 감옥으로 보냈다. 나도 여기에 끝점에 섰던 것이다. 수단은 오직 한가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것이었다.

기장 교회라고 모두 이런 저항에 동의하고 걸음을 함께 했던 것은 아니었다. 성남교회는 기장의 대표성을 가진 교회이지만 퍽 보수적이었다. “예수의 성전 파괴 선언”은 바로 그러한 성남교회에서 한 설교였다.


[슬라이드]













[설교 전문]


예수의 시대는 유대교 시대였다. 어디를 가나 회당이 있었다. 유대교의 예배 의식이 정기적으로 집례되었다. 유대교야말로 신앙의 중심이었다. 민족의 구심점이었다. 이스라엘인은 유대교를 떠나 존재할 수 없었다. 유대교라는 절대적인 환경 가운데 있었다. 그런데 예수는 그 유대교가 망할 것을 예언했다. 유대교의 성전이 파멸되어 버릴 것을 서슴없이 선언했다. 마가복음 11장의 기록대로 예루살렘 성에 들어간 예수의 행동은 완전히 반예루살렘적이다.

예루살렘 성에서 하신 첫 일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일이었다.(11:12-14) 무화과 열매가 열릴 때가 아닌데도 열매를 구하셨고 열매가 없다는 이유로 그 나무가 말라 버릴 것을 저주한 것은 무엇인가? 때 아닌 열매를 찾으신 것이 합리적이냐를 따질 것 없다. 그것은 유대교에 대한 심판 선언이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유대교는 이 무화과나무처럼 말라 버리고 생명력을 잃게 된다는 과격한 선언이다.

다음에 하신 일로 기록된 것은 소위 ‘성전 정화’다.(11:15-19) 이 행동 역시 대단히 반예루살렘 성전적이다. 성전에서 팔고 사는 일체의 행동을 척결하셨다. 이것은 단순히 상행위를 중지시킨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당시 유대교에 대한 거부였다. 유대교가 만들어 놓은 반역사적 구조에 대한 청년 예수의 도전적 행위였다.

그리고 12장 1-12절은 ‘포도원 농부의 비유’라는 한 가르침을 쓰고 있는데, 이것은 유대교가 하나님의 역사가 무엇인지조차 인식할 능력을 잃었다는 것을 폭로하고 있다. 그래서 끝내는 하나님의 아들이 오시더라도 그를 잡아 죽이기까지 할 것이라고 예고함으로 타락한 유대교의 감각과 판단 능력을 사정 없이 비판하였다.

그리고 12장 38-40절에는 유대교의 지도자들에게 가차 없는 독설을 내뱉는다.

“율법학자들을 삼가라. 그들은 예복을 입고 다니는 것과 장터에서 인사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한다. 그리고 과부의 집을 삼키며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한다. 이 사람들이야말로 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예수의 반유대교, 반예루살렘 성전 태도는 갈수록 태산이다.

그리고서 ‘성전 파괴 선언’이 나온다. 여기서 예수의 의중은 극명하게 드러난다. 한 제자가 “선생님, 보십시오. 참으로 굉장한 돌이지요! 참으로 훌륭한 건물입니다.” 라고 예수께 말한다. 이것은 예루살렘 성전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예수는 그렇다고 맞장구를 치지 않는다.

“너는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포개 놓이지 않고 다 무너지고 말 것이다.”

‘무너진다’는 뜻은 건물로부터 돌들이 쏟아져 나온다는 뜻이다.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하게 파괴되고 말 것이라는 강한 선언이다. 이것은 유대교의 심장이 깨져 버린다는 것, 유대교에 대한 파괴 선언이다.

예수는 왜 그랬나? 대답은 자명한 것 아닌가? 유대교가 하나님이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반동적 종교로 전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병자, 가난한 자, 사회적 약자 등에 대하여 언제나 억압적이고 반민중적이었다. 그 민족이 부닥친 현실에 대하여서는 몽롱한 감각으로 대하여 역사를 꿰뚫고 나가는 힘이 없었다. 오히려 민족을 당시의 체제, 현 반동적 체제에 안주시켜 노예적 삶에 충실하게 만들었다. 하나님 역사의 반동이며 역기능적 존재였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역사 현실 가운데 오실 만큼 결정적 시기였으나 그것을 감지할 오관(五官)이 썩어 뭉그러져 버렸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마치 특공대원처럼 몸을 던지고 계신데, 아니 하나님이 민중의 그 처절한 고난을 함께 받고 계신데, 유대교는 태평 무사다. 일상성 속에 매몰되고 화려함의 극치만을 좇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역사에서 제 소임을 다하지 못하는 유대교에 대하여 예수는 거침없이 파멸될 것을 선언하셨던 것이다. 그것은 유대교를 일구신 야훼의 뜻을 거역하고 있기 때문이다. 웅장한 성전만 있을 뿐 거룩한 소임은 감당치 못하였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지금 세 개의 동력이 있다고 본다. 해방 이후 정부를 수립하면서 이승만 정부는 그야말로 기적 같은 일을 단행한 것이 있다. 그것이 초등학교 교육의 의무화다. 그때 우리 국민의 일인당 소득이래야 100불, 200불 할 때였다. 그런데도 그 같은 결정을 하였다는 것은 기적이요, 그 결과 이 나라에서는 학생이 역사의 동력이 되게 되었다. 이것이 제1의 동력이다. 불행히도 6ㆍ25 사변이 터지고 그 결과로 군대가 비대해진다. 60만 대군이니 하지만, 하여간 6ㆍ25 이후 현대 군사적 교육을 받은 엄청난 수와 힘, 군이 제2의 동력으로 등장하였다. 제1의 동력은 그 결정적 힘이 4ㆍ19에서 역사의 기능적 동력으로 표출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1961년 5ㆍ16, 그날을 기하여 제2의 동력은 역사의 반동으로 표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물론 소수의 정치군인 때문이다. 하지만 불행스럽게도 그렇게 간주되고 있다.

6ㆍ25 이후 한국의 기독교는 그 숫자와 부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오늘에 와서는 800만 신도를 말하기에 이르렀다. 어느새 제3의 동력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역사에 창조적 기능을 할 것이냐, 반동적 역기능을 할 것이냐’ 하는 자리에 설 수밖에 없게 되었다. 민중의 처절한 생존 현실의 극복, 사회 경제적 양극화의 갈등과 극복, 헌법과 현 정권의 정당성 불인정과 정당한 권력 창출의 몸부림, 개헌에 대한 국민적 합의와 4ㆍ13 선언의 냉혹한 대립, 고문 – 성고문 - 고문 살인 - 살인 사건의 은폐와 조작이라는 도덕적 타락의 표출, 민족분단 - 이데올로기의 노예적 예속 - 민족 공동체 회복, 강대국의 경제적, 문화적 내선 일체 기도와 민족 정체성의 보존 등 수없는 민족 역사적 과제 앞에 서 있다. 참으로 지금은 ‘위기의 때’다.

예수의 성전 파괴 선언은 끝끝내 유대교의 재판 앞에 예수를 서게 하는 말꼬투리가 되었다. 물론 왜곡되었으나 기소의 내용인즉 성전을 헐어내고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은 다른 성전을 짓겠다고 성전을 모독했다는 것이었다. 결국 공관복음서는 예수께서 유대교에 기소된 것은 ‘성전 모독죄’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의 자리를 유대교 지도자의 자리에 놓아 보자. 예수를 용납할 수 있겠는가? 무화과나무가 곧 오늘 우리, 우리 기독교를 지칭한 것이라면, 우리 교회가 말라 버려서 영원히 열매를 맺을 수 없을 것이라고 저주하는 소리가 있다면 용납할 수 있을 것인가? 오늘 우리 교회의 구조와 문화를 둘러엎고 여지없이 내리쳐 버리는 자가 있다면 그를 용인할 수 있겠는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역사가 무엇인지도 분별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아니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을 잡아 죽이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얼마나 흥분할 것인가? 더더구나 우리의 교회당이 무너져 폐허가 될 것이라고 선언하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를 정죄하지 않을 것이며 그를 처벌하지 않을 것인가?

예수는 왜 그랬나? 두말할 나위 없이 당시의 유대교가 민족을 안주시키기만 했고, 하나님의 때’에 대응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역사적 시기에 감당해야 할 사명 따위는 생각조차 아니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건이 몰아쳐 오고 있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어 사람들 가운데 있게 된 만큼 그 시대는 혁명적이었다.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결정적으로 이루시는 때였다. 그러나 유대교는 태평 무사다. 그저 일상성 속에 살아간다. 그것은 결국 그들의 신앙을 사적 신앙으로 전락시 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신앙이란 사적 동기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이 끝끝내 사적 신앙으로만 머무는 경우, 그것은 그야말로 하나의 아편 이상 아무 것도 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아니, 유대교를 각성시키는 말을 오히려 성전 모독이라 하여 죄악시할 뿐 그 심판 선언이 왜 나오고 있는 것이며, 그 진실은 무엇인가를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어둠과 죽음의 그늘이 내리워져 있는데도 그것을 아랑곳하지 않는 종교가 되어 버렸다. 로마가 만든 사회 체제와 구조에 그대로 적응하여 살았고, 로마가 만들어 놓은 가치관을 그대로 떠받들고 있었다. 그때가 얼마나 절박한 때인가를 인식하지 못했다. 인식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유대교는 이미 그 시대를 구원할 수 있는 종교가 아니 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말할 수 없는 위기의 소용돌이 한복판에 있다. 7월 19일 명동 성당에서 이미 했고, 그리고 오는 7월 27일에는 성공회에서 거행하려 하는 성고문 폭로 대회의 내용을 아시는가? 반정부 학생들을 찾아내기 위하여 처녀에게 성적 고문을 가했다면, 그리고 변호사들의 주장대로 증인들의 증언조차 완전히 뒤집어 발표하고 있다면, 이 시대 의 도덕성은 완전히 깨어지고 만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올 ‘위기의 시기’다.

개헌 문제도 어느새 태풍을 예고하고 있다. 과연 올해가 이대로 넘어가지 못할 것만 같다. ‘위기의 시기’다. 

젊은 학생들이나 노동자들이 주장하는 것이 북쪽을 닮았다고 매도한다. 그들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하고만 있다. 그러나 숫자는 급증한다. 참으로 ‘위기의 시기’다.

우리의 문화라는 것도 없어졌다. 완전히 외래 문화에 동화되어 버렸다.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내선 일체를 강요당했다면 지금 우리는 스스로 의식하지도 못했는데 어느새 강대국의 문화적 종속에로 전락해 버렸다. 우리는 한국 사람이나 미국적 한국인이 되어 버린 것이다. 먹고 입고 자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한국 고유의 것이 아니다. ‘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

경제적 양극화는 극심해져 있다. 거기에는 이제 미움과 살의가 팽배하고 있다. 지금은 ‘위기의 시대’다.

그런데 우리의 기독교는 이 시대가 위기의 때라고 과연 인식하고 있는가? 이 위기를 극복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 것인가? 고려의 위기를 극복하지 못했던 불교는 조선의 창건과 함께 산 속으로 밀려났다. 조선 시대의 위기를 극복하지 못했던 유교는 이 민족의 근대화와 동시에 그 흔적조차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시대의 위기를 극복하지 못했던 유대교는 예수로부터 파멸의 선언을 듣고야 말았다.

최근 나는 무서운 소리를 듣고 있다. 한국의 반역사적인 대표적 교회 몇 개를 불 지르겠다는 젊은이들의 소리가 그것이다. 물론 이것이 낭설이기를 바란다. 아니 그럴 수가 있는가? ‘이것이 여느 집도 아니고 하나님께 봉헌된 거룩한 집인데 어느 놈이 감히…’ 라는 역정이 나에게도 금방 일어난다. 그러나 동시에 돌 위에 돌 하나도 포개 놓이지 않고 다 무너지고 말 것이라고 하신 예수의 말씀이 떠오른다.

구약성서에 보면 아무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지 않았을 때 발람이라는 사람의 당나귀가 갑자기 사람의 언어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 불태워 버리겠다는 저 말이 발람의 당나귀 입을 통하여 말씀하셨던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가? 우리 기독교가 이 시대에 길이요 생명인가를반성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안일에 빠져 있다. 급히 해야 할 일과 나중에 해야 할 일을 구별하지 못한다. 일상성 속에 깊이 잠들어 있어서 하나님의 음성과 지시를 듣지 못한다. 안주의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이기적 신앙에서 한 치도 옆을 보지 못한다. 역사가 어디로 가거나 민족이 파괴되거나 그런 것은 오불관언(吾不關焉)이다. 만약 그렇다면 예수의 심판의 소리가 과연 없을 것인가? 이 같은 종교를 예수만이 심판했던 것이 아니다. 예언자 미가는 유대 종교가 제 할 일을 다 하지 못하는 것을 이렇게 심판ㆍ대언한다.

“시온은 갈아엎은 밭 모양이 되고, 예루살렘은 돌무더기가 되고, 성전이 서 있는 이 산은 잡초만이 무성한 언덕이 되리라”(미 3:12).

이때가 어느 때인가를 분별하지 못한다면 우리라고 예루살렘 성전 꼴이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 수 없다. 예수를 편안하게만 믿지 말자. 이 시대에 나를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시고 여기 신앙 공동체로 모으신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가 빈 마음이 되자. 안일을 털고 일어나자. 급히 해야 할 일과 나중에 해야 할 일을 뒤집지 말자. 일상성을 뚫고 하나님의 역사를 보아내자 이기적 신앙을 버리자. 눈을 뜨고 시대를 읽자.

이 시대를 구원할 하나님의 비전과 의지를 여기 성남교회는 감히 수용해야 한다. 성남교회의 존재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돌 하나도 돌 위에 포개 놓이지 않고 다무너지고 말 것”이라는 예수의 심판의 소리에 우리의 온 신경을 모아 내자. 그래야 성남교회는 영원한 하나님의 교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