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뻐하는 사람과 두려워하는 사람
마태복음 2장 1-12절 / 1990년 12월 16일 / 서면교회
[회상 노트]
예수의 탄생은 민중의 희망이었다. 그러나 예수를 십자가에 죽이지 않을 수밖에 없을 만큼 악의 세력에게 무서운 존재였다. 현실 교회는 어떤가? 민중이 교회에서 희망을 보는가? 악의 세력이 교회를 두려워 하는가? 매년처럼 성탄절이 오고 있다. 그러나 오늘 교회가 전하는 성탄은 민중이 기대하는 성탄이 아니다. 두려워 안절부절 못하는 사람도 없다.
서면교회라는 교회에 분란이 생겨 몇 주일 설교를 하고 있었다. 작은 일로 다툴 것이 아니다. 진짜 교회 한 번 만들어 보자고 호소했다.
지금, 내 설교를 다시 읽으면서 깜짝 놀랐다. 서면교회는 서울 근교에 위치한 작은 교회다. 이런 설교를 소화할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러나 눈 높이에 맞추어야 하지만 핵심을 왜곡하는 것은 역시 옳지 않다.
[슬라이드]
[설교 전문]
앞으로 9일이 지나면 성탄주일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성탄절은 부활절과 함께 가장 큰 명절이다. 수천 년을 두고 기다려 오던 주님께서 인간에게 오신 복된 날, 그 날이 12월 25일 성탄일이다. 2천년 전 주님께서 아기로 오셨을 때를 돌이켜보자. 모든 사람이 구별없이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나기를 고대했던가?
마태복음에는 메시아가 오신 것을 발견하고 그에게 경배를 하러 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씌어 있다. 그들은 동방 어느 나라에 살고 있던 점성가들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을 인도하던 별이 어느 곳에 멈추는 것을 보고 “크게 기뻐”한다. 왜 기뻐했나? 어떤 아기를 만날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인가? 그들의 말 가운데 그들의 기대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습니다.”라고 유대의 헤롯 왕에게 말하였는데 “경배”라는 것은 당시에 왕이나 하나님에게만 사용하는 용어였고 행동이었다. 또 세 가지 예물을 아기에게 드렸는데 그것도 전통적으로 왕에게 드리는 예물이다(시 72:10ff., 15, 45:9 ; 사 60:6).
여기서 그들은 분명히 왕이 될 아기를 기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어떤 신비한 별을 보는 순간, 이 혼란한 시기에 세상을 구할 왕이 태어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았다. 그래서 기저귀 같은 일상 용품을 가져가지 않고 왕에게 드리는 예물을 가지고 길을 나섰던 것이다. 그들은 지금 태어난 아기를 장차 세상을 구할 왕으로 여겼다. 헤롯 왕도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겠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태어나는 아기를 왕으로 생각했다는 증거다. 또 그를 죽이려 했다는 것으로 보아 그 아기를 왕으로 인식했던 것이 틀림없다.
아기 예수는 왕으로 태어나신 것이다. 이것이 마태복음이 지적하는 바다. 어떤 왕인가? 나라를 지배하는 왕인가? 정신적인 왕인가? 도덕과 영적 세계의 왕인가?
이 아기가 훗날 공생애를 시작한다.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한 삶을 시작하는 것을 성서를 쓴 사람은 이렇게 감격하여 설명하였다.
“스불론과 납달리 땅, 호수로 가는 길,
요단강 건너편, 이방 사람들의 갈릴리,
어두움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겠고,
죽음의 그늘진 땅에 앉은 사람들에게 빛이 비취리라”(4:15-16).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왕은 왕이지만 유대인만의 왕이 아니다. 그가 유대인이거나 이방인이거나 말하자면 세상 어디에 사는 누구든지 어두움 속에 있는 사람들, 죽음의 그늘이 진 땅에서 사는 사람을 위한 왕이라는 뜻이다. 이 같은 왕으로 오신 이가 우리가 기다리는 예수다.
아기 예수가 태어나신 것을 기뻐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왕이 태어나기를 고대하는 사람들이다. 억울함이 있고 일한 만큼 받을 수 없으며 사람으로 취급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한이 쌓여 있는 이 세계에 억울함과 한을 풀어 줄 왕을 고대하는 사람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왕으로 태어나신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한다. 이제 어두움에 앉아 있는 자기들이 큰 빛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진 땅에 사는 자기들에게 이제 빛이 비취게 될 것을 믿기 때문이었다.
마태복음 기자는 그런 사람들이 살판나는 세상이 오게 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왕은 왕이지만 정신적 왕이요 영적 왕이라 한다면 그들이 기뻐할 것이 없다. 그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왕이 될 아기가 태어났다는 말을 듣고 불안해 하는 사람도 있었다. “헤롯 왕은 이 말을 듣고 매우 불안해 했으며 온 예루살렘 사람들도 이 소문을 듣고 불안해 했습니다”(2:3). 여러분, 이상하지 않은가! 예수가 나셨는데 왜 불안해 하는 것인가? 헤롯이 만약 어두움에 앉아 있는 사람들, 죽음의 그늘이 내리워진 땅에 사는 사람을 구하는 왕이었다면 불안해 할 이유가 없다. 더구나 저는 이제 갓 태어난 아기다. 왕의 나이가 못되었어도 4-50은 되었을 터인데 그렇다면 소위 경쟁자도 될 리가 없었다.
그러나 헤롯은 그 아기 하나를 죽이기 위해 베들레헴과 그 온 부근에 있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이기까지 했다니 이해할 수가 없다. 아니, 정의와 평등을 실현하지 않는 왕은 바른 왕이 나타나는 것을 싫어하고 증오하고 살해하려 하는 법이다. 정신적인 왕, 세상과는 관계없는 자기들끼리 왕이니 뭐니 하는 그런 왕이라면 죽이려 할 필요가 없다. 그를 죽이기 위해 수많은 아이를 무차별하게 죽이는 이런 엄청난 살육 사건을 저지를 필요가 없다.
그건 그렇다 하더라도 또 온 예루살렘 사람들은 정의의 왕, 평등을 이루어 낼 왕이 태어났다는 데 불안해 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도 모조리 부당한 왕의 편을 들어 정의를 세우기보다 거기 영합해 잘 먹고 잘 사는 것만을 소중히 여겨 왔다는 증거다. 어두움 속에 앉아 있는 사람이 있는데도, 죽음의 그늘진 땅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헤롯을 추켜 세우고 그를 따르고 그에게 지지를 주어 조금 편하게 사는 것을 제일로 삼아왔다는 증거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나는 것을 싫어한다. 자기들의 이해 때문에 자기들 이익을 잃어버리게 될까봐서 불안해 하는 것이다. 그들도 헤롯과 마찬가지로 할 수만 있으면 아기를 죽여 없애 버리려 할 것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정신적 왕이라면 예루살렘 사람들도 두려워할 리가 없다. 자기들의 이익을 흔들 왕이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이야기를 해보자.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가 생긴다고 하여 누가 기뻐하는가? 지금 가난한 사람들이 기뻐하는가? 지금 감옥에 갇힌 사람들이 기뻐하는가? 사회의 밑바닥에서 비참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기뻐하는가? 어두움에 앉아있는 사람이 누구며 그들이 과연 기뻐하는가?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진 땅에 앉은 사람들이 누구며 그들이 과연 기뻐하는가?
아무도 기뻐하는 사람들이 없다. 물건 많이 팔려서 장사꾼이 기뻐할 뿐이다. 뇌물 많이 받는 높은 사람들이 기뻐할 뿐이다. 그들을 제외하면 과연 누가 성탄의 날, 감격하며 예수 때문에 살게 되었다고 환성을 지를 것인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 왕으로 오신 그를 왕이 아닌 정신적 왕으로, 신비한 영적 인물로, 도덕군자 정도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병이나 고치고 환상이나 보게 해주는 예수, 방언이나 하게 해주고, 입신이나 하게 해주는 예수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 가난한 사람에게 환상을 보게 해주는 예수가 태어났던들 무엇이 기쁠 것인가!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교회 안에서 방언, 입신이나 하게 해주는 그 하나님의 아들이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인가? 이제는 아무도 기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지금 불의를 행하는 왕이 성탄절을 두려워하는가? 지금 남을 억압하며 빼앗으며 압제하는 사람이 제발 이놈의 성탄절이라는 것 없었으면 좋겠다고 하는가? 아무도 싫어하는 사람이 없다. 이 땅에 헤롯 왕이 없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오실 필요가 없다. 아니, 헤롯은 있다. 그런데 예수를 헤롯이 미워할 만한 예수가 아니라 오히려 헤롯을 축복하고 서로 형님, 아우님 하는 예수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나쁜 일을 하는 권력자는 성탄절이 제일 괴로운 날이 되게 되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 교회가 내 보인 예수는 오히려 헤롯의 앞잡이가 아닌가? 그러니 헤롯은 있으되 그는 예수를 죽이려 하지 않는다. 얼마나 불안했으면 두 살 이하의 어린이를 모조리 죽였겠는가! 지금 누가 제 잘못 때문에 불안하여 교회를 죽이려 하는가! 교회가 이미 헤롯의 친구거나 헤롯의 부하가 되어 버렸기 때문에 헤롯은 있으되 예수를 미워하는 헤롯은 없다.
우리는 지금 주님을 다시 모시기 위하여 주님의 오심을 대망하는 대강절을 보내고 있다. 주님이 오시기를 대망한다는 것은 기다린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우리가 받아들여, 내가, 우리가, 우리 교회가 주님과 같은 존재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교회가 이때에 바른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무슨 일이라도 하겠다는 결단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예수가 있다는 것, 태어났다는 것 때문에 기뻐했듯이 교회가 있다는 것 때문에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게 되어야 한다. 만약 우리 주변에 약한 사람들이 있다면 교회 때문에 용기를 얻고 기뻐할 수 있게 되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교회가 이 사회의 잘못에 항거하고 바른 행동을 할 것을 결단해야 한다. 나쁜 일 하는 사람들이 저놈의 교회 때문에 내 계획이 다 틀어졌다고 노발대발하게 되어야 한다. 그들이 감히 교회를 탄압하게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주님을 영접한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교회가 성장 못하게 될 것이라고 걱정되는가? 성장이 안 될 수 있다. 그러나 성장하기 위하여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죽음의 그늘진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기 위하여 있는 것이다. 아니, 그들이 교회에 올 것이다. 성장된다고 믿는다.
이 성탄의 계절에 주님을 영접하라. 회개하라. 기뻐하라.
주님의 몸이 되어라. 여러분은 이런 꿈을 결코 버리지 말라. 제대로 예수를 내 보일 교회를 이루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몸으로 여기에 현존하겠다는 꿈, 이런 꿈을 꾸는 교회가 되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