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의 부활
빌립보서 3장 10-11절 / 1988년 3월 27일 / 농어촌선교주일 / 성능교회
[회상 노트]
“죽은 자의 부활”은 농어촌선교주일에 성능교회에서 한 설교다.
참 그리스도인이 누군가? 참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제 살만 찌우려는 교인과 교회가 훨씬 더 많아지는 현실이 그리도 안타까웠던 것이다.
[슬라이드]
[설교 전문]
오늘은 우리 기장 교회들이 농어촌ㆍ노동 선교주일로 지키는 주일이다. 농어촌과 노동 현장에서 일하는 농민, 어민, 노동자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우리가 어떻게 그들과 함께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하도록 하자는 의도다. 우리는 오늘 이 시간에 농어민과 노동자들을 특별히 기억하면서 이 예배를 드리기 바란다.
또 한편 교회력에 따르면 오늘은 종려주일이다. 내일부터는 고난주간이 된다. 다 아는 대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호산나를 외치며 환영한 사건을 기념하는 주일이다.
물론 ‘예수께서 왜 예루살렘에 가셨었는가? 하는 의미를 생각해 보고 그 의미를 우리의 삶 가운데서 재현할 때 기념이 되는 것이다. 농민, 어민, 노동자 그리고 예루살렘에 가신 예수를 생각하면서 오늘 본문 말씀을 상고하고자 한다.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에 이르게 되기를 갈망하고 있다. 부활은 누구에게 일어나는가?
어떤 교수로부터 우스개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어떻게 해야 부활하느냐, 부활의 제일 조건이 무엇이냐는 문제였다. 글쎄, 답이 무엇일까? 틀림없이 희한한 대답일 것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모르겠다 했더니 “아니 고명하신 목사님이 그것도 몰라서야 …” 하면서 ‘죽어야 부활하는 것’이라고 정답을 말한다. 나는 무언가 싱겁고 우스운 답이 무엇일까를 생각했었다. 그런데 죽어야 한다는 것이 답이란다. 싱겁기 짝이 없다. 그런 답이라면 물을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 질문과 답은 그저 우스개지만 그러나 단지 우스개만은 아니다. 우스개 말 속에 대단히 깊은 뜻이 있기 때문이다. 우스개로 말하면 우스운 것이지만 씹어 보면 굉장한 말이다. ‘죽어야 부활한다.’
죽어야 부활한다고 할 때 그 죽음이란 어떤 것인가? 본문의 “죽은 자의 부활”이란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인가?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죽으면 누구나 부활한다는 것인가?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만약 죽은 자가 자동적으로 부활한다면 본문과 같은 표현을 쓸 필요가 없다. 말하자면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의 부활에까지 이르려는 것입니다.”라고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지”라는 표현은 죽은 자의 부활에 이르는 것이 대단히 어렵다는 것, 그러나 그렇게 되어야 하겠다는 자신의 의지와 뜻이 충분히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죽기만 하면 그저 자연적으로 부활되는 것이 아니다. 마치 밤이 지나면 새벽이 오는 것처럼,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는 것처럼 죽음 후에는 자연히 부활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고난에 참여하여 그의 죽으신 모양대로 죽어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의 부활에까지 이르려는 것입니다.”
예수의 고난에 참여하여 예수가 죽으신 모양대로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예수의 고난은 무엇인가? 예수는 죄가 있어서 고난을 당하신 것이 아니다. 그에게 고난을 당할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병자를 고치고 죄인으로 따돌림 받은 사람들의 친구가 되고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준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가서는 그들, 약한 사람들을 착취하고 억누르는 사람들을 비판하고 그들의 회개를 촉구한다. 이런 것은 우리 속된 사람의 생각으로는 꼭 해야 할 일이 아니다. 내 일이나 하면 고만이지 남의 일에, 남들 일에 관심하고 이러고저러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우리 속된 사람들의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가 당하신 고난이다. 그들의 고통을 나누고 그들의 한숨에 참여하셨다. 그들이 좌절할 때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다. 세상의 온갖 고통을 예수는 곧 자신의 고통으로 삼으셨다. 십자가에 달리는 그 순간만 고난을 당하신 것이 아니다. 너의 고통에 참여하는 것부터 예수의 고난은 시작되고 있다. 이것이 예수의 고난이다. 바울은 바로 이런 유의 “고난에 참여하여”라고 하고 있다.
예수는 예루살렘에 들어갈 때 나귀를 타셨다. 군중들이 환호하는 모습 속에서 마치 왕이 입성하는 것과 같은 모양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여느 왕들처럼 화려하고 힘 좋은 군마를 타신 것이 아니다. 나귀를 타셨다. 이것은 고난을 뜻했고 가난한 자, 정의로운 세상을 위하여 사는 자신의 삶에 고난이 올 것이고 그것을 감수하겠다는 의지가 거기 담겨 있는 것이다. 예수의 고난은 그러므로 곧 이 땅의 고난 받는 모든 사람들의 고난과 함께 있다.
우리가 이 고난에 동참하고 있는가? 예수가 약한 사람, 고난 받고 있는 사람들, 좌절하고 절망하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을 나누어 짊어졌듯이 나도 오늘날 그런 사람들, 노동자, 농민, 어민 등 민중의 고통에 동참하고 있는가? 나의 도움을 갈망하고 있는 사람, 그 누구에게 마음의 작은 나눔, 내 것의 할애를 하고 있는가? 과연 나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을 나누고 있는가? 빼앗아 올 수도 있는 것을 빼앗아 오지 않고 있는가? 그래서 나도 어떤 고통을 나누고 있는가? 이런 것을 진지하게 반성하는 계절이 되어야 한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아마 “그의 고난에 참여하여” 라는 바울의 기대가 비로소 우리에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될 것이다.
“그의 고난에 참여하여 그의 죽으신 모양대로 죽어 …”
그의 죽으신 모양은 무엇인가? 예수가 죽으신 모양대로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외형적인 모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에 죽었느냐, 그냥 병들어 죽었느냐 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다른 성경에서 “나는 날마다 죽으면서 삽니다”(고전 15:31)라고 고백한다. 날마다 죽으면서 산다는 것은 오늘 예수가 사신 것처럼, 그 뜻을 좇아서, 그를 닮아서 사는 것이 곧 죽는 것이다.
예수의 죽으심은 곧 ‘너를 위하여 나를 버리는 것’이다. 죽임을 당하시는 그날만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신 것이 아니다. 날마다 죽음을 사셨던 것이다. 그 결과가 십자가였을 뿐이다. 나를 중심하지 않는 것, 너의 아픔을 위하여 나를 내어 놓는 것, 그것이 크거나 작거나 간에 그것은 예수가 죽으신 모양대로 죽는 것이다. 너를 위하여 나를 내놓으면서 조건을 달지 않는 것, 어 떤 보상을 요구하지 않는 것, 그것은 곧 죽음이다. 예수의 죽음은 그냥 죽는 죽음이 아니다. 이웃을 위하여 살고 이웃을 위하여 자기를 버리고 그러나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는, 그래서 죽음으로 끝을 맺는 것이 예수의 죽음이다.
이것은 쉽지 않다. 사람은 도대체 자기 중심적이다. 나를 위하여 너를 죽일 수는 있어도, 나 때문에 너에게 고난을 줄 수는 있어도, 너를 위하여 내가 어려움을 겪을 수는 없고, 너를 위하여 내가 죽을 수는 없는 것이 사람이다. 더구나 너를 위하여 무엇인가를 내어 주고도 아무런 주장이나 대가를 기대하지 않는 것, 죽음이란 바로 그런 것인데 이것은 죄된 사람에게 절대로 쉽지 않다.
우리는 주님의 고난주간에 나는 과연 죽고 있는가를 반성해야 한다. 어떤 큰 희생이나 봉사도 그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있는가? 노동자, 농민, 어민 등 소외되고 버림 받은 사람들을 위하여 우리가 무엇인가를 내어 주고, 그러니 너희는 이렇게 해야 할 것이 아니냐고 대가를 요구하려 하지는 않는가를 반성해야 한다. 예수의 죽으심은 예사 죽음이 아니다. 버림받고 억압받고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사시고, 그들의 고난에 동참하시고, 그러나 끝내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으신 죽음이다. 이것이 예수의 죽으신 모양이다.
예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은 이웃의 고통에 참여하는 것이요, 예수가 죽으신 모양이란 바로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죽음이다. 아무렇게나 살다가 죽기만 하면 죽은 자의 부활에 이르게 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의 고난, 즉 이웃의 고난에 참여하고, 그러면 결국 예수가 그랬듯이 죽음에까지 이르게 되는데, 그렇게 될 때 죽은 자의 부활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 특히 우리가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예수를 생각하고 또한 그의 고난을 생각하는 고난절에 접어들면서 우리도 부활하게 되기를 기도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나 아닌 너를 위하여 어떤 고난에 참여하고 있는가를 반성해야 한다. 누구를 위하여 고난을 감수하고 있는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기적이 되기 쉽고 자기 중심적이 되기 쉽다. 기도한다 하면 습관적으로 나를 위하여 이것 주시오, 저것 주시오 한다. 우리 전체를 보고 ‘우리 전체를 위하여 내가 공헌하고 봉사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지 않는다. 아니, 높은 자리에 앉으면서 봉사한다고 한다.
예수의 죽음은 나 중심의 삶이 아니다. 나를 위한 죽음이 아니다. 너를 위한 삶이요 우리 전체를 위한 삶이요 죽음이다. 우리가 이런 깊은 믿음에 이르게 되기를 바란다. 예수의 고난에 참여하기를 바란다. 예수가 죽으신 모양대로 죽게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도 죽은 자의 부활에 이르게 되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