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우리에게 누구신가?
마가복음 8장 27-30절 / 1989년 8월 27일 / 송암교회
[회상 노트]
세계개혁교회연맹(WARC) 총회가 서울에서 열렸다. 주제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였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부터인가 ‘승리하십시오.’라는 인사를 즐겨 쓰고 있다. 예수는 ‘승리’의 보증수표가 되었다. 설교의 강단에서 승리, 승리, 승리가 쏟아진다. 아멘, 아멘, 아멘이 힘차게 응답된다.
예수는 승리의 보장인가? 기독교는 승리를 보장해 주는 종교인가? 아니다. 예수님의 브랜드는 오히려 ‘내려감’이다. 끝없이 내려간다. 그러나 우리는 끝없이 올라가려고만 한다. 참 신앙은 무엇인가? 우리가 내려갈 수 있는가?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교회란 도대체 이런 우리에게 어떤 존재며 어떤 기능을 해야 하는 것인가?
마침 총회가 끝난 다음 날 설교를 하게 되었다.
[슬라이드]
[설교 전문]
세계개혁교회연맹 총회가 어젯밤 긴 회의를 마쳤다. 지난 두 주일 동안 우리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질문을 수없이 반복하였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렀을 때 예수는 제자들에게 돌연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신다. “대개는 세례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예언자 중 한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이 제자들의 대답이었다. 예수는 이어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고 물으셨고 “당신은 그리스도십니다”라고 베드로가 대답한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이 질문은 예수께서 자신에 대한 인상을 물으시기 위하여 던진 질문이 아니다. 자신에 대한 인기를 알아보시기 위하여 던진 질문도 아니다. 예수 자신을 제자들에 의하여 규정받고자 하여 던진 질문도 아니다. 제자들의 신앙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 그들의 신앙의 내용이 무엇이냐를 묻는 것이다.
하여간 지난 두 주 동안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는 이 물으심에 바른 대답을 하고자 노력했다.
“당신은 그리스도십니다.”
이것은 그냥 하나의 교리가 아니다. 무슨 말인가? “당신은 그리스도십니다.”라는 고백은 말을 하는 ‘자리’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리스도라는 용어는 나사렛에서 나신 예수라는 분에게만 붙여진 고유명사가 아니다. 그리스도는 ‘사람’, ‘목사’, ‘노동자’ 등과 같은 보통명사다. 어떤 사람이 ‘나를 구해 주는 것은 바로 이 이념’이라고 믿는다면 그에게 그 ‘이념’이 그리스도다. 삶의 길이 그에게 있다고 믿어지는 어떤 사람이 있다면 그가 그리스도다. 이것만이 살 길이라고 믿는 그 무엇이 있다면 그 무엇이 또한 그리스도인 것이다.
예수 시대에 ‘그리스도’는 무엇이며 누구였나? 사람들은 누가 그 시대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준다고 믿고 있었나? 그것은 당시의 로마 황제였다. 그가 자신의 이상과 정책에 의하여 세계를 통일하고 그래서 세계에 평화를 준다고 믿었다. ‘로마의 평화’(PaxRomana), 이것이 당시의 이념이었고 그 이념의 상징은 황제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로마의 황제에게 예배를 드렸던 것이다. 로마 황제를 그리스도로 인식하는 그런 시대에 베드로는 그러나 로마의 황제가 그리스도라고 하지 않고 주님이신 당신이 그리스도라고 고백한다. 그는 어떤 그리스도를 생각했던가?
오늘 본문 다음을 읽어보면 해괴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31-33절의 말씀이다. 예수께서 “그래 내가 그리스도다. 그러나 나는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한다. 베드로는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따로 모시고 간했다. 마태복음에 보면 “주님, 안 됩니다.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한다. 이런 베드로의 믿음은 그 다음 사건에서도 잘 반영되고 있다. 변화산의 사건에서도 극명하게 나타난다. “선생님,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참 좋습니다.” 저 산 아래 내려가면 선생님은 또 위험한 일을 하시고 또 높은 사람들은 으르렁대고, 그런 것 저런 것 다 잊어버리고 여기서 삽시다. 이런 취지다.
여기에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에 현격한 차이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스도가 무엇인가? 베드로는 어떤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있으며, 예수는 어떤 그리스도인가? 베드로는 로마의 황제가 갖고 있는 권위와 능력과 위상을 갖는, 아니 그보다 더 높은 권위, 능력, 위상을 갖는 그리스도를 생각했다. 높고 크고 강한 그리스도, 언제나 승리하고 정복하는 그리스도를 생각했다.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드린 부탁, ‘그날에 내 두 자식을 하나는 왼편에 하나는 오른편에 앉게 해 달라’고 한 그 부탁은 역시 베드로가 가졌던 그리스도관에 근거해 있다. 사람들은 예수가 만약 훌륭한 선생이라면 당연히 강자가 되고 높은 사람이 되고 또 그런 사람들과 친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수는 자신을 어떻게 내비치고 있는가? 그는 결코 강자도 높은 사람도 아니고 그런 사람의 친구가 아니었다. ‘약자’의 친구였다. 왜 예수는 세리와 죄인들과 같이 식사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예수가 만약 그리스도라면 여 러 사람으로부터 섬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제자들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는 일을 자진한다. 섬김을 받는 주인의 위상이 아니다. 섬기는 종의 위상이다. 이사야 53장 1-6절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모습은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멸시를 받고 사람들이 싫어한다. 간고와 질고를 겪는다. 찔리고 상하고 채찍에 맞는다. 이런 그리스도를 이사야는 말하고 있다.
제자들은 이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래서는 안 된다고 예수의 길을 막아선다. “당신은 그리스도십니다.”라고 고백하지만 그 그리스도는 어떤 그리스도냐가 중요하다.
오늘날 사람들은 무엇을 ‘그리스도’라 하는가? 오늘의 경쟁 사회 속에서 성공하는 것, 승리하는 것, 그것만이 우리에게 참 구원이며, 그것만이 모든 것을 보장해 준다고 믿는다. 그들의 그리스도는 승리주의다. 성공주의다.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를 누구라 하는가? 그렇다. 두말할 나위 없이 “예수는 그리스도십니다.”라고 우리도 자신 있게 대답한다. 그러나 문제는 ‘어떤 그리스도냐?’다.
벌써 오래 된 일이지만 한미 양국 군인들이 벌이는 팀 스피리트 훈련이 있을 때 미국 지휘관들을 환영하는 예배가 어떤 호텔에서 드려졌다. 그 예배의 장면이 TV 화면에 비쳐졌는데 전면에 큰 글씨로 “예수는 강자의 편이다.”라고 씌어 있었고 그 구호 아래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 것이었다. 정말 그런가?
오늘날 우리는 예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그로 말미암아 몸이 건강하게 되는 그런 그리스도, 그로 말미암아 어쨌든 성공하게 되는 그런 그리스도, 그로 말미암아 세상의 온갖 힘을 가져 강자가 되게 하는 그런 그리스도, 그로 말미암아 오늘의 경쟁에서 승리하는 그런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렇기에 교회에서 인권 이야기를 하면 싫어한다. 축복 이야기를 해야지. 민중과 함께 살자고 하면 ‘빨갱이인가, 저런 말 하게? 라고 금새 반발한다. 기독교의 가치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한 건강하지 못한 것, 성공하지 못하는 것, 약한 것, 승리하지 못하는 것은 차라리 그리스도의 돌보심 가운데 있지 못한 증거가 되고 만다. 이것이 오늘의 가치관이다.
그러나 예수가 귀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물론 예수도 먹을 것이 없는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셨다. 일용할 양식을 기도하라 하셨다. 그러나 부자에게는 가난해질 것을 요구하셨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고 하셨다. 물론 병자를 고치셨다. 그러나 병약한 자를 아낄 줄 모르는 건강한 자들을 오히 려 꾸짖으셨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원이 필요없고 병든 사람들에게 내가 필요하다.’ 고 하셨다.
예수의 주변에는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 승리하지 못한 사람들이 모였다. 그들이 예수에게 감으로써 반드시 성공하게 된 것은 아니다. 반드시 승리한 것이 아니다.
그러면 그들에게 예수는 어떤 그리스도인가? 예수에게 가서 차라리 전혀 다른 가치를 발견한다. 세상의 가치와 기준에 따라 성공하고 승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오히려 옳은 것과 평화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는 것, 섬기는 것, 이것이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면서 갖게 되는 평화가 그리스도가 주시는 평화요, 우리를 그렇게 다시 나게 하시기에 그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이심을 경험한다.
부와 가난, 건강과 병약, 강함과 약함, 지체 높음과 낮음, 이런 것은 사실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다. 부하거나 가난하거나, 건강하거나 병약하거나, 강하거나 약하거나 그 조건 속에서도 예수가 사신 삶을 얼마만큼 따라 사느냐가 중요하다. 오늘날 교회 공동체는 건강하고 성공하고 강하고 승리한 사람들의 친교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 여기 와서 ‘내가 건강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당신은 그리스도십니다’, 성공하지 못한 사람이 여기 와서 ‘내가 세상 기준에서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그리스도십니다’, 강하지 못한 자가 여기 와서 ‘내가 약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그리스도십니다’, 승리하지 못한 자가 여기 와서 ‘내가 세상 기준대로 승리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그리스도십니다’라고 고백하게 되어야 한다.
여러분에게 예수는 지금 물으신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당신은 그리스도십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기를 바란다. 강한 것이 최고의 가치가 되어 있는 오늘에도 거기에 최고의 가치를 두지 않는 공동체가 교회다. 성공하고 승리하는 것, 그것을 우리의 최고의 목표로 삼지 않는 공동체가 교회다. 그것이 “당신은 그리스도십니다.”의 내용이다.
예수는 약한 자 앞에도 서신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약한 자 앞에 서며 그를 돕는가? 예수는 병든 자 앞에도 서신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병든 자 앞에 서며 그를 돕는가? 예수는 성공하지 못한 자 앞에도 서신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성공하지 못한 자 앞에 서며 그에게 참 가치를 보이고 있는가? 예수는 승리하지 못한 자 앞에도 서신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그에게 무엇이 참 승리인가를 보이고 있는가?
이날 아침 우리는 내 가치, 세속의 가치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여기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강한 자, 성공하는 자, 승리하는 자가 되기 위하여 여기 나온 것이 아니다. 그럼으로써 당신은 그리스도시라고 고백하기 위하여 여기 나온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지금 차라리저 경쟁의 현장으로 나가 성공을 위하여, 승리를 위하여 1분 1초라도 더 뛰는 것이 더 낫다.
그렇다. 당신은 강, 약에 관계없이 참다운 삶을 사는 길을 보이셨기에 우리의 그리스도십니다. 아니, 섬기시기에 오히려 우리에게 그리스도시다. 아니, 남을 위하여 채찍을 맞고 찔리고 상하시기에 오히려 그리스도시다. 거룩한 체하시기보다 손에 피를 묻히시며 우리를 위하여 사시기에 오히려 그리스도시다. 이런 고백을 다른 데서는 할 수도 없고 얻을 수도 없어 여기 나온 것이다. 나 혼자는 안 되기에 우리가 함께 그렇게 살자 하여 여기 나온 것이다. 우리가 함께 성령의 도우심을 얻기 위하여 여기 나온 것이다.
예수는 우리에게 누군가? 그는 우리의 그리스도시다. 이 고백 위에서 한 주간을 살아가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