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픔의 세계에 나눔을
창세기 42장 1-5, 24-25절 / 수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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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이드]
[말씀을 향한 물음]
우리는 오늘 아침 식사를 잘 하고 나왔다. 우리 옆에 끼니를 거르는 식구가 있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온 피조세계가 우주적 유기체로 회복되는 구원의 완성도 첫걸음으로 도달된다. 첫걸음은 배고픈 사람에게 음식을 나누는 것이다. 단순하고 명확하다. 오늘 우리는 이 단순하고 명확한 행동을 요청받고 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성서 말씀이 과연 그런가?
[설교 전문]
오늘은 저 이스라엘의 선조였던 야곱 가문의 이야기를 드리려고 한다. 성서의 이 대목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던 뜻을 풀어 설명하는 대목이다. 세상 모든 민족에게 덕과 복을 베푸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 뜻에 충실해야 할 책무를 이스라엘 민족은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야곱에게 열두 아들이 있었고, 그 중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요셉을 형제들이 질투하여 이집트로 가는 대상들에게 팔아 넘겼다. 요셉은 형제들에 대한 원한을 가슴에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집트에서 크게 성공하여 총리대신이 되었다. 정치를 잘하여 이집트에 태평성세를 가져왔다.
때마침 온 세계에 극심한 흉년이 몰아쳐 왔다. 온 세계가 기근에 허덕이고 있었지만 이집트만큼은 요셉의 선정의 덕으로 먹거리가 풍부했다. 야곱 가문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들이 살고 있던 지역에서는 더 이상 식량을 구할 수가 없었다. 물론 이집트에는 식량이 풍부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야곱의 아들들, 즉 요셉의 형제들은 이집트로 식량을 구하러 갔다.
급기야 형제들은 요셉 앞에 서게 되었고 요셉은 그들을 쉽게 알아보았으나 형제들은 그가 자기들이 죽이려다가 팔아넘긴 요셉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요셉은 그들 중에 자기와 어머니가 같은 형제인 베냐민이 없는 것을 보고 혹 자기 동생에게도 형제들이 자기에게 했던 것처럼 못된 짓을 하지나 않았나 와락 의심이 들었다. 요셉은 그들을 간첩으로 몰았다. 투옥하고 심문했다. 동생 베냐민은 가나안의 집에 아버지와 함께 있다는 진술을 받았으나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가 없었다. 요셉은 자기와 어머니가 같은 동생 베냐민에게도 못할 짓을 했을지 모른다는 의혹이 짙어지게 되었다. 만약 그렇다면 더더구나 형제들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온 식구가 굶고 있다는 현실을 어떻게 할 것인가? 형들이 잘못했다 하여 그 식구들 모두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이 옳은가? 결국, 우선 식량을 주고 베냐민이 살아 있는지는 후에 확인하기로 한다. 요셉은 식량을 충분하게 주고, 대금으로 받았던 돈도 식량 자루에 몰래 나누어 넣어 주었다. 그리고 가는 동안에 먹을거리도 주었다.
이야기는 더 계속되고 사건은 반복된다. 하여간 여기서 우리는 귀중한 하늘의 계시를 받게 된다. 요셉과 형들과의 관계는 원수라 할 만큼 나쁜 관계다. 요셉은 형들을 업수이 여겼고, 형들은 요셉을 질투했다. 급기야 죽여 없애려다가 멀리 이집트로 팔아 넘겨 버렸다. 요셉이 이집트에서 겪은 고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고, 그때마다 형들에 대한 증오가 새로웠다. 그러나 그 형들과 온 가족들이 굶는다는 사실을 안 이상 요셉은 식량을 이유 없이 주어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이것으로 수십 년 쌓여 온 야곱 가문의 내홍은 급기야 평정이 되었다.
원수 관계지만 그러나 형제인 형들에게 곡식을 선뜻 내주는 것, 그것이 선민이라는 성서의 가르침이다. 이것이 계시다. 식량은 나누어 먹는 공유 자원이다. 공유란 함께 가진다는 뜻 아닌가? 땅, 공기, 물, 햇빛, 식량은 공유 자원이다. 이것들은 사유할 수 없고, 사유해서도 안 된다. 개인의 관계에서도 이 원리는 유효하다. 갈등과 인간으로서의 윤리를 분리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이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그렇다. 하나님께 대하여 우리는 마땅히 모든 것을 받을 만한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햇빛, 물, 공기, 식량을 주신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을 나누려 하지 않는다면 신앙인이라 할 수 없다. 결코 받을만하지 못함에도 우리는 받고 있고, 하나님은 주시고 계시다.
남과 북은 지난 50년 동안 원수로 지내 왔다. 남은 북을 용납할 수가 없다. 북은 남을 용납하지 않는다. 전쟁을 했고 서로 죽였다. 하지만 북의 사정이 너무나 어렵다. 신문이나 방송을 자세히 보면 북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는 보도를 발견할 것이다.
음식은 나누어야 한다. 천하의 살인마에게도 밥을 주지 않는 법은 없다. 방금 전까지 서로 총을 쏘던 적을 포로로 잡았더라도 그에게 밥을 주지 않는 전쟁은 없는 것이다.
나는 35년 전에 겪은 충격적인 사건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그 당시 내가 나가던 교회에 신학을 전공하던 청년들이 꽤 있었다. 4학년이나 졸업한 신학도에게 주일 밤 설교를 하게 해 달라고 청하여 가까스로 허락을 얻어냈다. 어느 주일 밤 예배였다. 신학대학을 졸업한 신학도가 설교를 맡았다. 그는 성서를 읽고 설교를 시작했다. “야, 이 개새끼들아, 너희들이 장로야? 너희들이 교인이야? 야, 이 개새끼들아!” 고래고래 욕설을 퍼붓고는 강단에서 내려와 그냥 교회 밖으로 나가고 말았다. 눈 깜작할 순간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다음날 그를 찾아 도대체 무슨 짓이냐고 추궁했다. 사연이 있었다. 6ㆍ25 때 그 교회 교인들 상당수가 함께 부산으로 피난을 했고, 장로들 몇 가정은 거기서 같은 집에 각방을 쓰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때 자기 집이 제일 가난했고, 너무 자주 굶었는데 같은 장로들은 먹을 것을 가지고도 나누지 않더라는 것이다. 끝내 자기 누이동생은 굶어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먹을 것을 나누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느 날엔가 자기에게 설교할 날이 올 것이고 그러면 가슴에 품었던 욕을 쏟아 뱉으리라는 생각으로 그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제 내가 하려 했던 말을 했으니 나는 교회에 나가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갔다.
남과 북이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민간 단체들이 나서고 있다. 오늘 주보에 작은 전단 한 장씩을 넣었다. 내가 상임 의장을 맡고 있는 자주평화통일 민족회의와 민주노총, 민주변호사회, 민족예술인 총연합, 민주교수협의회 등 종교, 재야 단체가 ‘겨레 사랑-북한동포돕기 범국민운동’을 결성했다. 한 달 기한으로 20억 원을 모아서 식량을 사 보낼 계획이다. 이 운동에 여러분께서 동참해 주시기를 바란다.
나도 그러고 있지만 특히 종교인들은 금요일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금식하고 아낀 돈을 2,500원으로 쳐서 한 달 치 10,000원을 내고 있다. 물론 그 이상을 내면 더 좋다. 10,000원이면 북한 동포는 15일을 먹을 수 있다. 6-10월까지 150일이 문제라 하지만 쌀 보리, 옥수수를 50:25:25로 섞으면 12,010원, 30:40:30으로 섞으면 9,738원이면 해결된다. 우리가 한 사람씩 책임질 수 있다. 북한 동포를 살리는 일은 우리 힘을 벗어난 엄청난 일이 아니다. 우리가 힘을 모으면 그들을 살릴 수 있고 화해도 이루어낼 수 있다.
‘화평’, 평화의 ‘화’(和)자는 벼 ‘화’(禾)변에 입 ‘구’(口)를 쓴다. 그리고 평평할 ‘평’(平) 자와 합해 평화, 화평이라는 개념을 만든다. 모두에게 골고루 음식을 나눌 때 화평도 평화도 이루어 진다. 요셉과 형들은 곡식을 나눔으로 화해를 이루었다. 이것 또한 성령께서 주시는 계시다. 음식을 나누어야 평화가 이루어진다는 계시가 오늘 야곱의 이야기에서 빛나고 있다.
북의 식량문제를 일거에 해결하려면 4천억 원이 든다고 한다. ‘겨우’ 4천억 원이다. 우리 정부와 국회가 나서면 거뜬히 해결할 수 있다. 민족의 문제는 부수적으로 해결된다. 우리가 먹고 남아서 버리는 음식 쓰레기를 값으로 치면 1년에 8조 원이다. 8조 원어치를 그냥 버리고 있다. 8조 원에 비하면 4천억 원은 ‘겨우’다. 경기도 파주, 문산 지역에 북과 같은 수해를 작년에 입었다. 정부의 복구 지원비가 8천억 원이었다. 그에 비하면 4천억 원은 ‘겨우’ 아닌가?
남북협력기금 340억 원, 평화의 댐 200억 원, 6ㆍ27 지자체 선거 때 이 기금으로 쌀을 보냈다. 그렇다고 정부에게만 미루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도 작은 것이라도 더해야 한다. 이것이 신앙이다. 그로서 화해를 이루어 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좇는 것이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다.’ 이 말을 듣고 의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렸습니까? 그러면 임금은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수도교회의 비전을 다시 그려보아야 할 때에 이르렀다. 우리 교회의 비전은 무엇인가? 더불어 살자는 것이어야 한다. 갈라지고 찢긴 우리가 요셉처럼 음식을 나눔으로 ‘화’(和)를 이루어내기 위해 우리는 한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었다. 이 세계를 나눔의 세계로 바꾸기 위해 교회로 여기 있는 것이다. 수도교회를 행동하는 교회로 만들어 나가자.
신앙은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철학이요 의식이요 그리고 행동이다. 생활이다. 실천이다. 관계의 정상화다. 증오를 넘어 화해로 가는 철학을 가지자. 의식을 새롭게 하자. 우리의 철학과 의식은 국가의 시책이 증오를 넘어 화해로 가도록 이끌 것이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행동으로, 생활로, 실천으로 나아가게 할 것이다.
남과 북의 겨레가 음식을 나눔으로 화해를 이루어 가게 하는 것이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책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