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장 1절] 영원의 침묵을 깨뜨린 주권적 은총의 서곡, “태초에”

11월 02, 2026

영원의 침묵을 깨뜨린 주권적 은총의 서곡, “태초에”

[본문]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성서 명상]

창세기 1장 1절은 단순한 연대기적 시작을 알리는 건조한 문장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웅장한 서언이자 으뜸가는 신학적 선언입니다. 제공된 주석에 따르면, 이 구절의 구문론적 해석을 두고 학계에서는 오랜 논쟁이 있어 왔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이 구절을 2절이나 3절에 종속되는 시간절(예: “하나님이 창조하셨던 태초에...”)로 해석하려 하지만, 텍스트의 구조와 문맥을 고려할 때 1절을 우주의 첫 창조 행위를 서술하는 ‘독립된 주절’로 보는 전통적 해석이 가장 타당합니다. 첫 단어인 히브리어 ‘브레쉬트(בראשית)’에 정관사가 생략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는 연계형이 아닌 ‘절대적 시초’를 가리킵니다. 즉, 세계 역사가 시작되는 첫 지점에 맹목적인 우연이나 영원한 혼돈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 의지와 기원이 자리하고 있음을 명징하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쓰인 히브리어 동사 ‘바라(ברא, 창조하다)’는 오직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주어가 되시는 독특하고 영광스러운 단어입니다. 슈미트(W. H. Schmidt)의 지적처럼, 이 단어는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를 직접적으로 명시하지는 않더라도, 고된 노력으로 재료를 다듬는 인간 예술가의 작업과 달리 “하나님의 힘들이지 않는, 전적으로 자유로우며 구속받지 않는 창조와 그의 주권”을 생생히 보존하고 있습니다. 또한 주어인 ‘엘로힘(אלהים, 하나님)’은 형태상 복수임에도 단수 동사와 결합되어, 그분이 일개 민족에 국한된 부족신이 아니라 우주적 통치자이심을 강조합니다. 더불어 목적어 ‘천지(하샤마임 웨에트 하아레츠, השמים ואת הארץ)’는 하늘과 땅이라는 양 극단의 단어를 결합하여 우주의 완전한 전체성을 묘사하는 히브리어의 수사 기법인 ‘메리즘(Merism)’으로, 질서 정연한 전 우주가 하나님의 손끝에서 빚어졌음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신학적 분석을 당대의 역사적·문화적 배경에 비추어 보면, 이 텍스트가 지녔던 혁명적이고 전복적인 성격이 뚜렷이 드러납니다. 고대 바벨론의 우주 창조론인 에누마 엘리쉬(Enuma Elish)나 이방 신화들은 신들이 원시 바다의 괴물(티아맛)과 피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을 벌인 끝에 세상을 세웠다고 묘사합니다. 그러나 하젤(Hasel)을 비롯한 학자들의 분석처럼, 창세기 1장은 이러한 주변국들의 다신론적 신화를 철저히 논박하고 거부하는 ‘반(反)신화론적 논증’입니다. “창세기 1:1의 하나님은 행동하고 말하시는 하나님”이시며(베스터만), 추상적인 철학적 개념이 아니라 당신의 주권을 홀로 관철하시는 인격적 주권자이십니다. 창조는 신들의 불안한 투쟁의 산물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자유로운 의지가 발현된 압도적 은혜의 결과입니다.

이 말씀의 최초 수신자였을 이스라엘 백성들을 상상해 보십시오. 광야의 지독한 메마름 속에 던져졌거나 바벨론 제국의 거대한 폭력 아래 포로로 끌려가 자신들의 존재가 한낱 먼지처럼 여겨지던 순간, 그들은 이 웅장한 서곡을 들었습니다. 그들이 언약을 맺은 하나님은 역사의 패배자가 아니라, 온 우주를 절대적 주권으로 빚어내신 ‘엘로힘’이십니다. 세상의 기원이 폭력과 약육강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의 선하시고 은혜로운 뜻에 있다는 사실은,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강력한 위로이자 존재의 토대를 다시 세우는 신앙의 닻이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철저히 ‘원인과 결과’, ‘자본과 효용’이라는 물신주의적 인과율 속에 갇혀 숨죽이고 있습니다. 자연과 타인을 단지 착취와 지배의 대상으로 전락시킨 생태계 위기와 인간 소외의 한복판에서, 나에게 주어진 선재적 조건(부, 배경, 스펙)만이 내 인생의 결과를 결정짓는다는 거짓 복음에 속아 날마다 절망합니다. 그러나 ‘바라(ברא)’의 하나님은 우리를 옭아매는 유물론적 운명론을 단호히 깨뜨리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혼을 구원하시고 무너진 삶을 다시 세우시는 데, 세상이 요구하는 어떠한 기득권이나 자격, 재료도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혹시 우리는 입술로만 창조주를 고백할 뿐, 내면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스스로의 빈약한 지혜와 자원으로 내 인생이라는 작은 우주를 통제해 보려는 실천적 무신론자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이 텍스트는 피상적인 종교적 위안을 넘어 우리의 중심을 날카롭게 찌르며 근원적인 회개를 촉구합니다. 내 삶이 무의미한 우연의 산물이나 고단한 생존 투쟁으로 전락한 진짜 이유는, 내 삶의 권좌에서 ‘엘로힘’을 몰아내고 스스로 창조주가 되려 한 깊은 교만 때문입니다. 우주의 시작점에 오직 하나님 한 분이 계신다는 이 묵직한 선포는, 곧 내 인생의 모든 통제권을 당장 그분께 반납하라는 거룩한 명령입니다. 스스로 무언가를 빚어내려는 발버둥을 멈추고 텅 빈 무(無)의 자리로 내려가십시오. 생태계가 신음하고 일상이 무너지는 이 혼돈의 시대 속에서 유일한 소망은, 빛을 부르신 주권적 말씀이 내 영혼을 새롭게 ‘바라(창조)’하시도록 철저히 엎드리는 것뿐입니다. 당신이 마주한 그 지독한 결핍과 절망의 자리, 바로 거기가 하나님의 ‘태초’가 새롭게 시작될 거룩한 진원지입니다.

[마무리 기도]

영원 전부터 홀로 완전하시며, 지고하신 말씀으로 천지를 빚어내신 창조주 하나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이 장엄한 절대 선언 앞에서,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피조물인 저의 티끌 됨과 무력함을 가슴 깊이 인정합니다. 주님,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노라 고백하면서도 실제의 삶에서는 철저히 세상의 인과율과 돈의 힘에 기대어 제 스스로 인생을 창조하려 했던 어리석고 교만한 실천적 무신론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아무런 조건도 자랑할 자격도 없는 제 영혼의 혼돈과 공허 한가운데로 찾아오시어, 십자가의 은혜로 새 생명을 창조해 주신 그 크신 주권적 사랑에 눈물로 감사합니다. 이제 제 삶의 왕좌에서 스스로 내려와 오직 ‘엘로힘’ 하나님의 통치와 질서에 온전히 굴복하기를 원합니다. 무너진 제 일상과 어두운 내면 한가운데 주님의 창조의 말씀으로 임하여 주셔서, 주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제 삶을 통해 질서 정연하게 피어나는 기적을 매일 경험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석적 설명]

  • 구문론적 독립 주절 해석: 창세기 1장 1절은 종속적인 시간절이 아니라 우주의 첫 창조 행위를 명확히 나타내는 ‘독립된 주절’로 보는 것이 문맥과 전통에 부합하는 가장 타당한 해석입니다.
  • ‘태초에’의 원어적 의미: 히브리어 ‘브레쉬트(בראשית)’는 형태상 정관사가 생략되어 있으나 연계형이 아닌 절대적 의미로 쓰여, 시간과 역사의 완전한 출발점(absolute beginning)을 가리킵니다.
  • 동사 ‘바라(ברא)’의 주권성: 오직 하나님만이 주어가 되시는 이 단어는, 고된 과정이나 제약 없이 자유롭게 발현되는 하나님의 독점적이고 주권적인 창조 권능을 입증합니다(W. H. Schmidt).
  • ‘엘로힘(אלהים)’과 수사적 기법 메리즘(Merism): 만물의 통치자를 뜻하는 ‘엘로힘’과, 하늘과 땅이라는 양극단의 단어로 피조 세계의 완전한 전체성을 뜻하는 ‘하샤마임 웨에트 하아레츠’를 통해 하나님의 우주적 지배권을 강조합니다.
  • 반(反)신화론적 논증: 본문은 당대 고대 근동의 에누마 엘리쉬(Enuma Elish) 등 신들의 권력 투쟁과 혼돈의 정복을 다룬 신화적 우주론을 의도적으로 배격하고 반박하며(Hasel), 하나님의 유일한 주권을 선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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