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신화를 잠재운 절대 주권의 말씀, 궁창으로 갈라진 은혜의 바다
[본문] 창세기 1장 6절-8절
- 6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 7절: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 8절: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성서 명상]
창세기의 둘째 날 기사는 끝없이 일렁이는 태초의 수면 위에 질서를 부여하시는 하나님의 장엄한 통치를 묘사합니다. 이 본문의 중심에는 ‘궁창’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라키아(רקיע)’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어원적으로 이 단어는 ‘발을 구르다’, ‘망치로 쳐서 넓게 펴다’라는 뜻의 동사 ‘라카(רקע)’에서 파생되었습니다. 구약성경의 다른 시적인 본문들(욥 37:18, 겔 1:22)은 이를 부어 만든 거울이나 빛나는 반구체처럼 생생하게 묘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창세기 1장의 궁극적인 관심사는 이 궁창의 물리적이고 과학적인 본질을 규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단어는 지면과 구름 사이의 공간을 점유하며, 창공의 물(궁창 위의 물)과 바다 및 강(궁창 아래의 물)을 분리함으로써 물에 대한 하나님의 통제력과 권능을 온 우주에 선포하는 신학적 도구로 사용됩니다.
본문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문학적 특징은 “그대로 되니라”라는 성취적 관용구의 배치와, 유일하게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평가적 관용구가 생략되었다는 점입니다. 독일의 구약학자 스텍(Steck)이 지적하듯, 실행의 묘사에 앞서 등장하는 “그대로 되니라”는 창조주의 말씀과 뒤따르는 사건 사이의 필연적이고도 내적인 결합을 독자들에게 강력히 각인시킵니다. 반면, 모든 날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선언이 둘째 날에만 빠져 있는 이유는, 물을 다루고 분리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이 셋째 날에 이르러 뭍(땅)이 드러나고 나서야 비로소 온전히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고대 알렉산드리아의 번역가들은 칠십인역(LXX)을 번역하며 이 형식적 비대칭을 참지 못하고 8절 끝에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를 인위적으로 삽입하여 표준화하려 했으나, 이는 넷째 날이 되어서야 하늘이 완성된다는 신학적 뉘앙스와 맛소라 본문(MT)의 정교한 7중 구조를 훼손하는 무리한 시도였습니다.
이러한 언어적, 문학적 분석을 당대 고대 근동의 역사적·종교적 맥락 위에 올려놓으면, 창세기 1장이 지닌 혁명적인 반(反)신화적 메시지가 폭발적으로 드러납니다. 고대 바벨론의 창조 서사시인 에누마 엘리쉬(Enuma Elish)를 비롯한 근동의 우주론에서, 세상의 기원은 끔찍한 폭력과 투쟁의 결과물입니다. 에누마 엘리쉬에서 주신 마르둑(Marduk)은 원시 바다의 괴물 여신 티아맛(Tiamat)과 목숨을 건 혈투를 벌이고, 그녀를 죽여 그 시체를 반으로 쪼개어 하늘과 땅을 만듭니다. 하젤(Hasel)이 예리하게 지적하듯, 이방의 우주 창조론들은 상층의 물과 하층의 물을 분리하기 위해 신들이 벌이는 처절한 투쟁을 묘사합니다. 그러나 창세기의 하나님은 어떠하십니까? 창세기 1장 6-10절은 물을 분리하는 이 거대한 우주적 사역이 오직 “간단한 신의 명령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장엄하게 서술합니다.
하나님은 혼돈의 세력과 다투지 않으십니다. 폭력도, 피 흘림도, 치열한 투쟁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고대인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그 압도적인 태초의 바다(트홈)는 하나님의 적수가 아니라, 그분의 말씀 한마디에 순한 양처럼 물러나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피조 물질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단 한 번의 위엄 있는 말씀(”나뉘게 하리라”)으로 우주의 무질서를 잠재우시고 절대적 평화(Shalom)의 질서를 세우십니다. 나아가 하늘(궁창) 그 자체도 신격화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임을 분명히 선언함으로써, 하늘을 숭배하던 고대인들의 우상숭배를 근원적으로 타파합니다.
이 위대한 창조의 서사 앞에서,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의 척박한 실존을 뼈아프게 직면하게 됩니다. 고도로 발달한 현대 문명 속에 살고 있지만, 우리의 내면과 사회를 지배하는 작동 원리는 여전히 에누마 엘리쉬의 폭력적 신화와 맞닿아 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짓밟고 경쟁에서 승리하여 남의 파편 위에 나의 성채(하늘과 땅)를 세우는 것을 ‘질서’와 ‘성공’이라 부릅니다. 자본주의의 무한 경쟁 속에서 우리는 내 삶에 닥쳐오는 혼돈의 물결(경제적 위기, 질병, 인간관계의 단절)을 통제하기 위해 스스로 마르둑이 되어 피 튀기는 전쟁을 벌입니다. 불안이라는 괴물과 매일 혈투를 벌이며, 내 힘으로 인생의 궁창을 만들고 물을 갈라보려 발버둥 치지만, 남는 것은 소진된 영혼과 상처받은 이웃뿐입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은 인생의 거친 물결 한가운데 서서 스스로 칼을 빼 들고 싸우려는 우리를 향해 준엄하게 말씀하십니다. 참된 질서와 평화는 우리의 투쟁이나 세상의 폭력적 방식으로 세워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의 한복판(물 가운데)에 임하여 주권적으로 개입하실 때 비로소 완성됩니다. 당신의 영혼을 집어삼킬 듯 덮쳐오는 두려움과 혼돈의 바다가 있습니까? 그것들과 맞서 싸우려는 헛된 수고를 멈추십시오. 대신,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인생의 폭풍 한가운데 좌정하시어 “잠잠하라, 고요하라” 명하시도록 삶의 주권을 온전히 내어드리십시오. 내 안의 욕망의 물과 은혜의 물을 가르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분리(궁창)가 영혼 깊은 곳에 세워질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이 줄 수 없는 압도적인 평화의 안식처, 곧 참된 ‘하늘’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마무리 기도]
영원하고도 광대하신 평화의 왕이시며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 폭력과 쟁투 없이 오직 그 입술의 명령만으로 혼돈의 바다를 가르시고 우주의 질서를 세우신 그 압도적인 주권을 찬양합니다. 주님, 입술로는 주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실제 제 삶에 위기와 혼돈의 물결이 밀려올 때면 제 스스로 칼을 쥐고 세상의 방식대로 피 흘리며 싸우려 했던 교만과 불신앙을 깊이 회개합니다. 남을 밟고 일어서야만 내 삶의 질서가 세워진다는 세상의 거짓된 신화에 속아, 불안과 강박 속에서 영혼을 소진하며 살아온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이제 제 인생의 요동치는 물결 한가운데 주님의 창조적 말씀이 임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제 안의 혼돈을 잠재우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시고, 세상의 헛된 정욕과 거룩한 은혜를 나누는 영적 궁창이 제 심령 안에 견고히 세워지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제 삶이 나의 투쟁으로 얻어낸 삭막한 전리품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복함으로 누리는 하늘의 평안(Shalom)이 되게 하옵소서. 폭랑을 잠잠케 하시는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석적 해설]
- ‘궁창(라키아)’의 어원과 목적: 궁창(רקיע)은 ‘망치로 쳐서 펴다’를 뜻하는 동사 ‘라카(רקע)’에서 파생되었으며, 그 물리적 성질보다는 창공의 물과 바다를 분리하여 물에 대한 하나님의 통제력을 나타내는 데 본질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 “그대로 되니라”의 문학적 기능: 학자 스텍(Steck)의 분석처럼, 실행에 앞서 등장하는 이 성취적 관용구는 하나님의 말씀과 뒤따르는 사건 사이의 피할 수 없는 내적 결합을 강조합니다.
- 평가적 관용구(“좋았더라”)의 생략과 LXX의 오독: 둘째 날에 평가적 관용구가 생략된 것은 물의 분리가 뭍이 드러나는 셋째 날에야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이며, 칠십인역(LXX)이 이를 8절에 억지로 추가한 것은 본래의 신학적 의미와 7중 형태를 훼손한 것입니다.
- 에누마 엘리쉬 등 고대 신화에 대한 비신화화: 하젤(Hasel)이 지적하듯, 고대 근동의 신화들이 물을 분리하기 위해 신들의 혈투와 폭력을 묘사하는 반면, 창세기는 괴물과의 싸움 없이 오직 “간단한 신의 명령으로” 분리가 이루어짐을 진술하며 이교적 세계관을 철저히 논박합니다.
- 하늘 그 자체의 피조성 강조: 둘째 날의 기사는 고대인들이 신성시하던 ‘하늘’ 역시 하나님과 동일시될 수 없는, 단지 하나님에 의해 강조되고 창조된 물리적 피조물에 불과함을 내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