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8:16] 살아계신 주님에게로 가자 – 1981년 4월 26일, 김상근 목사

6월 30, 2026

살아계신 주님에게로 가자

1981년 4월 26일 / 마태복음 28장 16절

김상근 목사


[회상 노트] 갈릴리로 가신 주님

민중을 신뢰할 수 있는가?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뽑는 정치연극이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우선 사이비 야당을 만들고 있었다. 민한당 등등이 그것이었다. 중앙정보부가 창당위원 명단을 작성하고 그들에게 일일이 통보도 했다는 소문이 넓게 퍼졌다. 정치활동을 중단당했던 정치인들이 정치의 장으로 타율적 호의(?)에 힘입어 등장하기 시작했다.

저 사람들, 무엇 때문에 저 흉악한 부름에 응하는 것인가? 정치가 직업이니, 그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인가? 제법 주장하는 바도 있었다. 오늘의 폭압적이고 독재적인 현실을 극복해내기 위해서는 현실을 부정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동의할 수 없었다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민정당, 민한당, 국민당이 당선자를 냈다. 당이 서로 달라도 모두가 끼리끼리다. 출마자들이 미웠다. 이제 대통령 선거다. 체육관 선거인데 전두환이 당선된다는 것은 너무나 확실한 각본이었다. 그런데도 들러리 후보들이 나선다. 텔레비전 유세를 한답시고 얼굴에 분칠을 하고 화면에 등장했다. 자기에게 투표해달라고 호소(?)한다. 분노가 치밀었다. 저 놈의 놀음을 전두환 혼자 하도록 내버려둘 용기가 없다는 것인가? 저 추한 들러리 노룻을 물리칠 수 없었단 말인가? 경쟁 가운데서 선택된 전두환 대통령을 만들기 위해 저 더러운 짓거리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전두환, 유치송 등에 있지 않다. 국회의원에 출마했던 저들에게 문제의 근본이 있는 것이 아니다. 유권자다. 민중이다. 민중이 선거 놀음 동원에 응하지 않는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역사를 바로 잡을 수 있다. 그렇지 않은가? 아, 민중이여! 우리의 싸움은 당신들과 함께, 당신들의 자유와 정의를 세워내자는 것 아니요? 이렇게도 맥없이 불의한 세력에 끌려다니고 동원에 순순히 따라 준단 말이요!

마침 부활주일이 왔다. 예수의 죽임당하심은 민중의 동원된 요구 때문이었다. 예수께서 그렇게도 사랑하셨던 민중이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쳐대지 않았던가9 예수의 절망과 배신감이 우리의 그것에 비교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는 다시 민중에게 갔다. 아, 이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이여! 부활신앙이란 무엇일까? 그렇다. 그것은 또다시 유권자에게, 민중에게 감이리라. 예수께서, 부활의 주님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가셨으니….


[말씀을 향한 물음]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자칫 공허한 외침이 되기 쉽다. 부활하셨다면, 죽어계시지 않고 지금 살아계시다면 우리는 그를 만날 수 있어야 한다.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채, 부활하셨다고만 외치고 있다면 그것은 공허한 외침이다. 주님을 지금 만나고 있는가? 어디서 어떻게 만날 것인가?


[슬라이드]

살아계신 주님에게로 가자

1981년, 치밀하게 짜여진 '정치연극'

불의의 하수인이 되어버린 민중

배반의 평행이론 : 1세기 예루살렘과 1981년 대한민국

두 가지 신앙의 대비 : 부활은 과거형인가, 현재형인가?

갈릴리의 역설 : 배반자에게로 향하는 발걸음

갈릴리로 간다는 것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혐오와 미움을 극복하는 뼈아픈 신앙적 결단이다.

역사의 구원은 민중이 회개하고 바로 서는 데서만 완성된다.

갈릴리에서 부여받은 2중의 소임 : 회개와 훈련

회개 : 주체성 회복 모델

회개의 이중적 책임 : 나 자신을 위한 자각, 세계를 향한 책임

훈련 : 십자가의 커리큘럼

선봉대의 부름: '여러분은 교관이다.'

싸구려 위로가 아닌, 조건부의 약속

부활의 주님은 지금 '갈릴리'에서 일하신다

[설교 전문]

우리는 지난 주일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예배를 드렸다. “부활하신 주님은 갈릴리로 가셨다”는 것이 마가복음의 경우 마지막 증언이었다. 물론 갈릴리로 가셨다는 것은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의 입장이다. 같은 공관복음서이지만 누가복음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갈릴리가 아닌 예루살렘으로 가신 것으로 되어 있다. 예루살렘으로 가셨다는 것과 갈릴리로 가셨다는 것은 예수의 부활의 의미를 전함에 있어서 커다란 차이가 있다. 여기서는 우선 갈릴리로 가셨다는 전통을 따른다.

갈릴리로 가셨다는 것은 갈릴리 사람들에게로 가셨다는 것이며 갈릴리 사람들이란 바로 예수를 배척했던 장본인을 가리킨다. 그들은 엊그제까지 호산나를 부르며 옷을 벗어 길에 깔고 예수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지나가시는 것을 환영했던 사람들이었다.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그 뒤를 좇아 따르던 사람들이었다. 마침 지난 부활주일 밤에 텔레비전에서 “수난의 금요일”이라는 영화를 방영했는데 거기 보니까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일단의 갈릴리 사람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경비병들의 눈을 피하여 잠입하고 있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를 따라 예루살렘에 들어갔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의 대세가 기울어지자 자기들의 입장을 쉽게 바꾸어 버렸다. 아무래도 빌라도, 대제사장 패가 권세를 그대로 유지할 것이 분명했었다. 가야바 일당에게 저항한다는 것은 무모한 짓이라고 판단되었다. 급기야 그들은 빌라도가 예수를 죽이려 했을 때 거기 맞장구를 쳐서 여론을 형성해 주는 빌라도 패가 되고 만다. 예수를 죽여야 한다, 십자가 처형을 내려야 한다고 빌라도의 정치놀음에 발을 맞추고 있었다. 배반자들이요 배척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예수는 자기를 배신한 그 갈릴리 사람들에게 가셨다는 것이다.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거기, 갈릴리로 가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역시 “너희도 갈릴리로 가라”는 것이다. 그러면 거기서 나를 만날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부활주일을 막 보낸 우리, 주님을 과연 만나고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묻자. 부활절을 기념한다는 것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사건으로 발전해야 한다. 우리는 주님을 만나야 한다. 주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부활이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공허한 일이 되고 만다. 여러분은 부활의 주님을 어디서 만날 것인가? 역시 갈릴리로 가야 한다. 주님은 거기 계시기 때문이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지난 주일 나는 “갈릴리로 감”이 부활이라고 했다. 예수의 제자들이 갈릴리로 간다는 것은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갈릴리로 가라”는 말을 전해 들었을 때 제자들에게 감정이 일어나지 않았을 리가 없다. 배반자에 대한 감정이 없을 수 없다. “그래, 가자.” 이렇게 간단하게 가게 되었을 리가 없다.

오늘 성서 본문에 “열 한 제자가 갈릴리로 갔다”라고 단지 열 한 자로 표현되고 있지만 그러나 여기에는 엄청난 깊이의 갈등이 있었을 것이다. 단어와 단어 사이에는 참으로 진한 갈등이 있었을 것이다. ‘아니, 갈릴리는 무슨 놈의 갈릴리야?’ ‘십자가에 못박으라던 그 아우성이 아직도 귀에 생생한데 그놈들이 있는 갈릴리로 가라는 것이 웬말이야?’ ‘그깐 놈의 갈릴리 놈들 죽든 살든 상관할 것이 무엇이란 말이야?’ ‘억눌리든 빼앗기든 개, 돼지처럼 살든 우리가 상관할 것이 아니다.’ ‘지긋지긋하지도 않는가? 또 갈릴리로 가자는 것일까?’ ‘빌라도는 로마의 총독이니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금방 대세에 편승하는 갈릴리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예수의 배반자가 된다는 말인가?’ ‘그런 사람들을 위하여 갈릴리로 갈 수는 없다. 도대체 갈릴리로 왜 가라는 것인가?’ ‘예수도 그렇지 갈릴리는 왜 가신다는 것인가?’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감” -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다는 것 - 부활의 신앙으로 산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너희가 주님을 만나려 하느냐? 그러면 갈릴리로 가라. 주님은 벌써 갈릴리로 가셨다’는 것이 부활의 메시지다. 세속적인 표현을 쓰자면 “민중에게로 감”이 부활 신앙이라는 것이다.

오늘날도 민중은 배반자만 같다. 어제까지 정의의 편에 서던 민중이 갑자기 불의의 세력을 용납해 버린다. 아니, 용납하는 것은 고사하고 어제까지 박수를 치던 민중이 오늘은 갑자기 돌맹이를 집어 던진다. 나찌의 히틀러도 국민 투표를 했다. 집권 초기에는 60% 정도 지지이던 것이 악정을 더해가던 말기에는 지지율이 더 높아져 거의 100%의 지지를 획득했었다. 민중의 짓이다.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 자기들 민중의 죄를 뉘우쳐 “침묵한 죄”를 뉘우쳤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침묵하지도 않는다. 어제는 청색 깃발, 오늘은 노란 깃발, 차라리 침묵이라도 한다면 좋으련만 깃발을 흔들고 법석을 떤다. 역시 민중의 짓이다. 강제로 시키는데 어떻게 하란 말이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강제건 자진해서이건 침묵조차 팽개치고 적극적인 박수 부대가 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가만히나 있지, 소리를 높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던 저들과 너무나 흡사하게 닮았다.

쉽게쉽게 등을 돌려대는 민중을 경험할 때 제자들이 가졌던 갈등이 우리에게도 일어난다. 무엇 때문에 민중에게 가라는 것인가? 주님은 왜 가라 하시는가? 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세례를 주고”, 이것을 위하여 가라는 것이다. 회개다. 역사의 구원이란 민중이 회개하는 데서만 완성되기 때문이다. 회개하지 않은 곳에 아무리 훌륭한 지도자가 있어 보았자 효용이 없다. 결국은 민중이 깨어야 한다. 민중이 바로 보고, 바로 서고, 바로 가게 되어야 한다. 민중이 바른 주체자가 되어야 한다. 언젠가는 힘에 굴복하여 선악을 바꾸지 않는 민중이 되어야 한다. 대세가 기울었을지라도 편승하지 않고 옳은 것을 지켜 나가게 되어야 한다. 언젠가는 민중 스스로가 절대로 폭력을 용납하지 않게 되어야 한다. 또 언젠가는 죽어도 끝까지 정의는 정의고 불의는 불의라는 입장을 고수할 수 있게 되어야 한다. 그래서 십자가라도 불사하고, 고난과 죽음이라도 피하지 않고 바로 서는 민중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회개다. 이것이 민중이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세례를 받는 것이다.

예수는 왜 제자들을 갈릴리로 가라 하셨는가? 민중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람으로 살려내 보자는 것이다. 그들 모두가 인간으로 바로 설 때 역사가 구원받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예수에겐들 야속함이 없었겠으며 예수에겐들 미움의 감정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부활의 신앙이란 바로 그 야속함이나 미움에 사로잡히지 않게 되는 것이다. “민중이 바로 서야만……”이라는 것을 깨달은 예수의 깨달음의 깊이에 합해지는 것이 부활 신앙이다. 우리는 민중이 아닌가? 우리는 회개할 사람이 아닌가? 우리 역시 민중이다. 우리가 바로 서야 한다. 빌라도에게 편승했던 것을 회개해야 한다. 힘에 굴복하여 선악을 흐트러 놓았던 것을 회개해야 한다. 폭력을 용납했던 것을 회개해야 한다. 우리가 바로 서야 한다. 바로 서는 것 - 이것이 세례를 받는 것이다. 우리가 바로 설 때 비로소 이 역사가 구원받을 수 있다.

부활하신 예수는 왜 갈릴리로 가셨는가? 아니, 부활하신 예수는 왜 지금 우리에게 오시는 것일까? 우리를 회개시키기 위해서다. 우리가 세례를 받고 바로 서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지금 이 세상을 탄식하지 말아라. 지금 이 세상을 냉소하지 말아라. 지금 이 세상을 개탄하지 말아라. 이 세계는 바로 우리가 회개하고 세례를 받음으로 우리가 신앙으로 굳게 섬으로 비로소 모든 것이 바로 잡히게 된다. 민중을 일으켜 바로 세우고 또 우리 스스로 바로 서는 이 이중의 소임을 우리는 맡고 있는 것이다. 한 민중으로서 나를 바로 세우고, 교회로서 민중을 또 바로 세워놓을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그리고 예수가 계속하여, 갈릴리로 우리를 찾아오신 목적은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기 위해서”였다. 훈련이다. 예수는 왜 갈릴리로 가셨나? 민중을 훈련하기 위해서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모든 것은 선이요 사랑이다. 정의요 자유다. 인권이요 진실이다. 인간의 눈치를 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 가르침을 받고 훈련을 받아야 할 민중이다. 선할 수 있는 훈련, 사랑하는 훈련, 정의에 서는 훈련, 자유하는 훈련, 인권과 진실을 위해 싸우는 훈련, 무엇보다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는 훈련, 십자가를 지는 훈련, 고난을 극복하는 훈련 - 이런 훈련을 받아야 할 민중이다. 그렇다.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 여러분 가운데 오셨다. 왜? 무엇하러? 훈련시키시려고 오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훈련시키면서 또 나아가 민중들을 훈련시켜야 하는 이중의 소임을 맡고 있다. 이 백성을 훈련시켜야 한다. 여러분은 교관이다. 여러분은 선생이다. 가서 가르쳐라. 주님의 말씀, 주님의 명령을 가르치고 그것을 지키게 하라. 이 민족에게 수없이 오고 있는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도록 훈련시켜야 한다.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는 약속은 누구에게 준 것인가? 회개하고 훈련하는 사람들에게다. 악에 도전하는 제자들에게다. 십자가의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다. 아무에게나 값없이 싸구려로 주는 말씀이 아니다.

여러분, 머뭇거릴 필요가 없다.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이 말씀을 믿으라. 무서워하거나 위축될 필요가 없다.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이 말씀을 믿으라.

주님은 부활하셨다. 갈릴리에서 일하신다. 우리 사이에서, 저 배척의 상징인 민중 사이에서 일하시고 계신다. 거기 가서 주님을 만나자. 죽으신 예수가 아니라 살아계신 주님, 부활의 주님을 만나자.

[마가복음 16:1-8] 부활의 주님은 갈릴리로 가셨다 – 1981년 4월 19일, 김상근 목사

6월 30, 2026

부활의 주님은 갈릴리로 가셨다.

1981년 4월 19일 / 마가복음 16장 1-8절

김상근 목사


[회상 노트] 갈릴리로 가신 주님

민중을 신뢰할 수 있는가?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뽑는 정치연극이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우선 사이비 야당을 만들고 있었다. 민한당 등등이 그것이었다. 중앙정보부가 창당위원 명단을 작성하고 그들에게 일일이 통보도 했다는 소문이 넓게 퍼졌다. 정치활동을 중단당했던 정치인들이 정치의 장으로 타율적 호의(?)에 힘입어 등장하기 시작했다.

저 사람들, 무엇 때문에 저 흉악한 부름에 응하는 것인가? 정치가 직업이니, 그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인가? 제법 주장하는 바도 있었다. 오늘의 폭압적이고 독재적인 현실을 극복해내기 위해서는 현실을 부정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동의할 수 없었다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민정당, 민한당, 국민당이 당선자를 냈다. 당이 서로 달라도 모두가 끼리끼리다. 출마자들이 미웠다. 이제 대통령 선거다. 체육관 선거인데 전두환이 당선된다는 것은 너무나 확실한 각본이었다. 그런데도 들러리 후보들이 나선다. 텔레비전 유세를 한답시고 얼굴에 분칠을 하고 화면에 등장했다. 자기에게 투표해달라고 호소(?)한다. 분노가 치밀었다. 저 놈의 놀음을 전두환 혼자 하도록 내버려둘 용기가 없다는 것인가? 저 추한 들러리 노룻을 물리칠 수 없었단 말인가? 경쟁 가운데서 선택된 전두환 대통령을 만들기 위해 저 더러운 짓거리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전두환, 유치송 등에 있지 않다. 국회의원에 출마했던 저들에게 문제의 근본이 있는 것이 아니다. 유권자다. 민중이다. 민중이 선거 놀음 동원에 응하지 않는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역사를 바로 잡을 수 있다. 그렇지 않은가? 아, 민중이여! 우리의 싸움은 당신들과 함께, 당신들의 자유와 정의를 세워내자는 것 아니요? 이렇게도 맥없이 불의한 세력에 끌려다니고 동원에 순순히 따라 준단 말이요!

마침 부활주일이 왔다. 예수의 죽임당하심은 민중의 동원된 요구 때문이었다. 예수께서 그렇게도 사랑하셨던 민중이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쳐대지 않았던가9 예수의 절망과 배신감이 우리의 그것에 비교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는 다시 민중에게 갔다. 아, 이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이여! 부활신앙이란 무엇일까? 그렇다. 그것은 또다시 유권자에게, 민중에게 감이리라. 예수께서, 부활의 주님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가셨으니….


[말씀을 향한 물음]

우리 기독교는 십자가에 죽으셨던 예수가 바로 부활하신 예수임을 고백한다. 이 신앙이 없는 교회는 이미 교회라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신앙고백을 하는 교회는 어떻게 변해야 할까이 부활을 재확인 하는 이 날에 우리는 무엇을 다짐할 것인가? 부활하신 주님은 왜 갈릴리로 가셨는가? 그리고 이 나라의 역사에서 갈릴리는 어디인가?


[슬라이드]

부활의 주님은 갈릴리로 가셨다 - 1981년, 시대의 절망 앞에서 다시 쓰는민중과 부활의 서사

1981년, 체육관 선거라는 기만적 정치 연극

뼈아픈 질문 : 우리는 민중을 신뢰할 수 있는가?

부활신앙의 근본적 결단 : 마가복음의 넓은 행간 - 예수께서는 갈릴리로 가실 것이니, 거기서 그를 뵐 것이다

갈릴리인은 누구인가? 두 가지 얼굴

한국 역사 속 갈릴리 사람들의 발자취

민중의 파라독스 : 환호와 배반의 데칼코마니

부활이란 무엇인가? 압도적인 사랑의 귀환

주님이 부활하셨음을 분명히 믿는 제자들만이, 다시 민중에게로 발걸음을 옮길 수 있다.

1981년 그리고 오늘의 결단 : 갈릴리로 다시 가는 것

역사의 부활을 향하여

[설교 전문]

“주님께서는 사셨다. 죽임을 당했으나 죽음이 그를 삼킬 수가 없었다. 악한 자들이 그를 정복할 수가 없었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완전히 상식을 무시한 이 신앙이 오늘날 온세계에 울려퍼지고 있다. 완전히 무식한, 말도 안 되는 소식이 지금 온세계에 퍼져 있다. “십자가에 처형되었던 사형수 예수가 무덤을 깨뜨리고 살아났다.” 나는 “완전히 상식을 무시한”이라는 말을 썼고 “완전히 무식한”, “말도 안 되는 소식”이라는 표현을 썼다. 사실 많은 사람은 그렇게 여기고 있다. 심지어 신학자 중에도, 아니 부활의 주님을 예배하는 이 자리에서조차 그렇게 여기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신화라거나 제자들의 신앙이 만들어낸 신앙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18, 19세기의 복음서 연구의 흐름은 그랬다. 20세기에 와서도, 기독교 신앙에 들어오고자 해도 예수의 부활이라는 것이 걸림돌이 되어 막아서 있다는 주장들이다. 따라서 예수의 부활을 납득할 수 있게 재해석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21세기를 시작하는 오늘의 신학은 부활신앙을 확고하게 붙드는 경향으로 확연하게 흐르고 있다. 죽으셨던 그 예수가 바로 부활하신 예수라는 이 신앙이야말로 기독교의 모태요, 기독교의 출발이요, 이 신앙 없이 기독교는 결코 설 수 없다는 것을 너는 지금 신앙하고 있느냐는 근본적인 결단을 현대신학은 묻고 있다. 이 신앙을 논란하는 것은 그러므로 무의미하다. 이 신앙을 하지 못하는 신앙인은 패배에서 헤어나올 수 없을 뿐이다. 이 신앙을 고백하지 않는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니요 한 사귐의 집단일 뿐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부활의 사실성을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믿느냐고 물을 필요도 없다. 단 부활을 신앙하기에 우리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며 주님의 부활을 다시 확인하는 이 날에 우리는 무엇을 다짐할 것이냐를 물어야 할 뿐이다.

새번역 성서에는 마가복음 16장 8절과 9절 사이의 행간이 다른 곳보다 넓다. 이것은 원래 마가복음은 16장 8절까지였는데 9절 이하가 오랜 후에 첨가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실제로 2세기 이전의 성서 사본에는 9절 이하는 없다고 한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죽으신 선생님의 몸에 향유라도 발라 드리고 싶어서 무덤을 찾았던 여인들이 있었다. 그들이 무덤에 도착해 보니 벌써 무덤 입구를 막았던 돌이 옮겨져 있었다. 시체는 온데간데없다. 그런데 거기 무덤에 있던 흰 옷 입은 청년 한 사람이 너희가 예수를 찾지만 예수께서는 갈릴리로 가실 것이니 거기서 그를 뵐 것이라는 말을 전해 주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원래 마가가 예수의 부활에 대하여 기록한 것 전부였다. 부활하신 예수는 갈릴리로 가실 것이고 거기에 가서야 그 예수를 만나게 될 것이라는 것을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요컨대 부활의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라는 말이다.

주님의 부활을 믿는다면 누구나 갈릴리로 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거기에 가야 사랑하는 주님, 죽으셨을 때 그렇게도 원통했던 그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생전에 내내 갈릴리에서 생활하셨다. 갈릴리에서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그는 갈릴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예수는 부활하셔서 다시 갈릴리로 가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갈릴리로 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갈릴리의 사람들에게 간다는 것을 말한다. 갈릴리의 사람은 누군가? 억압받는 민중이다. 복음서에서 갈릴리는 버림받은 땅, 민중의 애환이 있는 곳으로 이해되어 있다. 경쟁에 밀리고 밀린 사람들이다. 병자요 무식쟁이다. 먹고 살겠다고 아우성을 치면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서민들이있다. 창녀요 날품팔이다. 권력자의 억압에 눌려 기를 펴지 못하는 못난이들이 있다. 배운 사람에게 속아 이것저것 다 빼앗긴 졸장부들이 있다. 이들이 갈릴리의 사람들이다. 이 나라 역사에도 갈릴리 사람들은 있다. 봉건사회에 눌려 있던 이 나라의 민중들, 주인 따라 묘혈에까지 묻혔던 종들, 상놈들, 그들이 있었다. 일제의 침략에 수탈당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독재에 억눌려 신음하고 근대화에 정조도 땅도 빼앗겨버린 민중들이 있다. 우리에게도 갈릴리의 사람들이 있다.

갈릴리의 사람들은 또 누군가? 모든 비인간화의 힘에 도전했던 민중이다. 예수의 관심의 표적이었던 사람들이다. 예루살렘에 가실 때 그들은 겉옷을 벗어 만세를 불렀다.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스크럼을 짜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시위를 벌였다. 예수에게 끝없는 환성을 질렀다. 이제 자신들도 역사의 대열에 선 것을 선언하는 양 환성을 올렸다. 로마의 관헌에게, 율법학자, 장로들에게 맡겨놓았던 역사를 이제 스스로 형성해 가겠다는 주체자들이었다. 그들이 갈릴리 사람들이다. 예수에게서 빛나는 희망의 불빛, 정의의 냄새, 사람의 훈기를 느끼고 그에 반하여 둑터진 물처럼 쏟아져 몰렸던 이들 - 그들이 갈릴리 사람들이다.

우리의 역사에서 본다면 1894년 전라도 고부 땅에서 일어난 봉기의 주인공, 동학의 주인공인 농민들이 그들이다. 1919년 3ㆍ1 독립만세를 외치고 이 땅을 그 함성으로 덮어 씌웠던 민중들이다. 1960년 4ㆍ19일 학생들의 의거에 물을 날라 마른 목을 축여주고 피를 뽑아 수혈을 자청하던 민중, 함께 시위대열에 섰던 민중 - 그들이 이 땅의 갈릴리 사람이다. 1979년 10월, 그렇게도 기다렸던 정의의 시대, 양심의 시대, 폭력이 아닌 평화의 시대를 소망하여 기대와 조용한 열망으로 반년이나 참아오던 그들이다. 그들이 이 역사의 갈릴리 사람들이다.

그러나 지금 방금 예수께서 경험한 갈릴리인은 누군가? 배척과 배반의 민중이다. 바로 엊그제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쳐대던 사람들이다.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아우성치는 사람은 누군가? 그들은 곧 겉옷을 벗어 길에 깔고 종려가지를 꺾어 환호를 쳤던, 그러나 엊그제는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아우성을 쳤던 바로 그들 자신이다. 배척의 장본인, 예수에게 등을 돌린 장본인, 어느새 장로, 서기관들과 한통속이 되어버린 그들이 갈릴리인이다. 어느새 로마의 총독과 하나가 되어 자기들의 지도자를 저버린 배반자들이 갈릴리인이다. 시세, 형세를 판단하여 자기 스승조차 부인하고 안일로 들어 앉아 양심을 속이는 저들, 저들이 갈릴리인이다.

우리의 역사는 갈릴리인, 배척과 배반의 사람들에 의하여 수백번 곤두박질을 해오고 있다. 동학 이후, 3ㆍ1 독립운동 이후가 그랬었다. 몸을 던져 독재에 항거했던 자유와 정의의 혼, 그들과 함께 이 나라를 정의 위에 세우겠다던 민중들은 5ㆍ16 군사 쿠데타 후 독재를 용납함으로 예수시대의 갈릴리인들처럼 저 4ㆍ19의 희생자들을 배반하고 말았다. 이들이 오늘 이 역사의 갈릴리인이다. 10ㆍ26 이후 너나 할 것 없이 이제는 명실공히 폭력의 시대를 보내고 평화의 시대를 열어보자, 억압의 시대를 보내고 양심이 편안한 시대를 열어보자, 이제는 우리 손으로 우리 역사를 만드는 민중의 시대를 열어보자고 서로 다짐하던 민중들은 지금 어찌하고 있는가? 폭력을 용납하고 양심을 배척하면서 또다시 꼭두각시로 전락해 가고 만 것이다. 또다시 배척의 민중, 배반의 사람 – 갈릴리인이 되고 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는 어디에 계신가? 죽음을 이기신 그는 어디에 계신가? 하늘? 옥좌? 아직은 아니다. 그 배척의 민중에게 다시 가시고 있다. 그 배반의 사람들에게 다시 가셨다. 갈릴리 사람, 뒤집어졌다 엎어졌다 하는 그들에게 가셨다. 부활은 무엇이냐? 그 갈릴리인에게 갈 수 있음이다. 배척한 그들에게, 배반한 그들에게, 어느새 등을 돌리고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쳐대는 저들에게 갈 수 있음이다. 부활을 확신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갈릴리로 갈 수 없다. 그들이 밉고 그들이 무섭기 때문이다. 배신과 모멸감 때문에 그들에게 갈 수 없다. 패배와 냉소 때문이다. 누가 또 다시 가는가? 주님이다. 부활하신 주님이다. 누가 또 다시 갈 수 있는가? 주님이 부활하셨음을 분명히 믿는 제자들이다.

오늘 우리의 형편에서 부활절은 무엇인가? 갈릴리로 다시 가는 것이다. 부활의 주님은 거기서 일하시기 때문이다. 배척하는 민중일지라도, 배신의 민중일지라도 주님은 거기 다시 가셨다. 우리도 민중에게 다시 가야 한다. 실패하고 또 실패했더라도, 모든 것이 다 좌절되어 버린 것 같더라도, 부활의 대열에 서자면 갈릴리로, 민중에게로 가야 한다. 그들이 살아나지 않고는 역사의 부활이 없기 때문에 주님을 좇아 갈릴리로 다시 가야 한다. 5ㆍ16에 죽은 민중, 5ㆍ17에 죽은 민중이 살아나지 않고는 이 역사에 부활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늘 갈릴리로 갈 것을 다짐해야 한다. 오늘 한국교회는 스스로의 담을 헐고 배반의 민중에게로 나갈 것을 결단해야 한다. 갈릴리로 가신 주님을 무겁게 만나지 말자. 기쁨으로 만나자. 승리의 주님이시다. 이제 갈릴리로 가신 주님을 만나고자 이 성찬의 자리에 모이자.

[말라기 3:10-12] 부러워할 낙원 – 1980년 12월 21일, 김상근 목사

6월 29, 2026

부러워할 낙원

1980년 12월 21일 / 말라기 3장 10-12절

김상근 목사


[회상 노트] - 얼음을 녹이는 불씨

강압정치는 계속되었다. 더욱 폭군화되어 가는 정권은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괴물과도 같았다.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었다. 물론 체육관에 통대(統代)라는 꼭두각시들을 모아 놓고 선거극을 연출하여 스스루 최고권력에 오른 것이다. 교회의 전천후 지도자들이 나서서 제11대 대통령 취임축하 조찬기도회라는 망측스런 일을 저지른다.

최고 권좌에 오른 전두환은 이른바 언론기관을 통폐합한답시고 이리 붙이고 저리 떼는 일을 식은 죽 먹듯 했다. 보안사 지하실이 공장이었다. 거기로 불려간 언론사 사장들은 지체없이 손을 들고야 말았다. 기독교방송은 일반 보도기능을 박탈당한다. 설교하고 찬송가 부르고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 외의 것은 선교방송의 영역을 넘는 것이니 허용치 못하겠다는 것이다.

대학 중에 한국신학대학만이 유난스럽게 반정부활동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교수와 학생 그리고 학교의 설립자인 한국기독교장로회(基長) - 이렇게 삼위가 하나로 뭉쳐 정의투쟁을 하는 학교는 한국신학대학이었을게다. 정부는 한신대 신학과 신입생 모집을 2년간 중지시킨다.

불교에도 손을 댔다. 승려 백수십 명을 연행하였다. 재판에 회부하기도 했고 승적을 박탈하기도 했다. 불교도 대책없이 수모를 감수했다.

정치인에게도 강제의 손을 댔다. 정치규제자를 발표하여 정치를 하지 못하게 했다. 사이비 야당, 관제 야당도 만들었다. 민주한국당이라는 것이 그것이었다.

김대중은 사형이 확정되고 연루당한 민주인사들은 20년에서 2년까지의 징역형을 받았다. 물론 세계가 일어나 김대중의 사형집행을 막았다. 그러나 전두환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나는 국내의 원로들을 찾아다니며 김대중 구출활동을 촉구했다. 그러나 문전박대였다.

참으로 숨이 막히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와중에서 수도교회는 새 교회당을 건축하였다. 당시 1억 1천만 원이라면 결코 작은 액수가 아니었다. 지금 이만한 돈으로 교회당을 짓는 것이 우리의 제1순위 과업일까? 시작한 일이고 중단할 수 없어 끝내고 말았다. 그러니 교인들에게 이것은 시대의 빚이라는 것을 말해 주어야 했다. 이것은 다음의 목표를 위한 수단임을 설교해야 했다.

모두가 지치지 않을 수 없는 터에 어떻게 또 무거운 설교를 한단 말인가? 하나님께서 결코 정의를 무너뜨리지 않으시고 지치고 피곤한 백성에게 무관심하지 않으신다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다. 더구나 지금은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대강절이다. 위로가 있으나 정의세움에서 물러서지 않는 교인들을 나는 열망했던 것이리라.


[말씀을 향한 물음]

퍽 막연한 말이지만 ‘낙원’이라는 말을 알고 있다. 그것은 춥고 배고픈 자들의 가냘픈 소망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아집과 불신에 시달린 영혼의 한숨일지도 모르겠다. 또 그것은 미움과 싸움에 지친 사람들의 기도일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많으나 서로서로 홀로 버려져 있는 현대인들의 영혼 속에는 낙원을 그리워하는 간절함이 있는 것 같다. 낙원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천국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인가?


[슬라이드]

얼음을 녹이는 불씨

1980년, 모든 것을 삼켜버린 차가운 시대

자랑이 아닌, 시대의 빚 : 지치고 피곤한 백성들 앞에서, 교회는 이 무거운 빚을 어떻게 갚을 것인가?

성탄절이 던지는 네 가지 질문 :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본질의 상실과 회복 : 타락한 성전 vs 성서적 십일조

십일조의 4대 원리 : 고인 물이 아닌 생태계의 순환

십일조는 성전 유지비나 경상비가 아니다. 이 세상에 하나가 되는 일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쓰여야 한다.

내 삶의 예산, 그 단호한 재편성

부러워할 낙원

얼음을 녹이는 불씨


[설교 전문]

어느 해나 성탄절이 되었음을 알려주는 것들이 있다. 그 하나는 거리나 상가에서 울려 퍼지는 크리스마스 캐롤이고 다른 하나는 구세군의 자선냄비의 등장이다. 꼭 그것이 성탄 때에만 나오는 것이 좀 어색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어딘지 흐뭇하고 인간다움을 느끼게 해주는 것도 사실이다. 올해에는 유난히 자선냄비에 대하여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오늘 나의 증언은 쉽게 우리 눈에 들어오는 네 가지 것들에서 시작된다. 첫째는, 크리스마스 장식들이다. 우리는 이제 주일로서는 마지막 대강절 예배를 드리고 있다.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시기를 고대하고 기도하는 데 우리의 정성과 온 마음을 모아야 할 것이다. 둘째는, 우리의 적선을 구하는 자선냄비다. 우리의 개인생활에서도 1년을 정리하고 새해의 삶의 골격과 성격을 다듬어야 하는 그런 시간에 놓여 있다. 셋째는, 교회의 건물이다. 교회적으로 보아도 그렇다. 이제까지 우리는 성전 건축을 위하여 모든 일을 뒤로 미루어 온 편인데 이제 성전도 완공되었다. 과연 이 교회가 어떤 도약을 해야 할 것인가? 넷째는, ‘주정헌금 작정서’라는 한 장의 종이다.

지난 주일 81년도의 목회지침을 제직회에서 검토했다. 거기에 교인들이 “선교를 위해서도 헌금할 수 있도록 선교적 헌금정신을 높인다”라는 대목이 있었다. 그것을 검토한 직후 한 집사님이 지금 81년도 주정헌금을 정하고 있는데 처음 정할 때부터 무언가 지도를 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제출했다. 나의 오늘 증언은 바로 이 문제에서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우리는 1977년 10월부터 시작하여 1980년 9월까지 만 3년 동안 성전 건축헌금을 해서 1억 1천만 원이라는 막대한 돈을 모았다. 실로 이 액수는 막대하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도 놀라지 않을 수 없는 돈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것이 자랑이면서 동시에 ‘이것은 빚’이라는 생각을 지우지 못하고 있다. 성전을 짓는 일도 우리가 꼭 해야만 했던 일이었지만 1억 1천만 원을 모아놓고 꼭 해야만 했던 일이 성전 건축만이었겠느냐 하는 생각 때문이다. 아마 이 시대, 우리의 여건 속에서 1억 1천만 원으로 해야 할 일은 성전 건축을 비롯하여 수없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 많은 돈을 모으고서도 성전 건축 외에 다른 일은 전혀 해낼 수 없었다는 점에서 그 다른 일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것은 빚이라는 것이다. 이 성전 건물을 드나들 때마다 이것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빚입니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겨울이 되어 난방을 가동시켜 보니 더욱 그렇다. 참 좋긴 하지만 …… 이제 우리 교회는 무언가 우리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세계를 위해서 일을 하고 돈을 써야 할 때가 되었다.

우리가 한 해를 보내면서 가계부를 정리해보면 아마 많은 집들이 적자였을 것이다. 적자가 아니었다면 아등바등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그런 생활이 1980년에 갑자기 그렇게 된 것이 아님을 발견하게 된다. 많이 번 해는 많이 쓰고 적게 번 해는 적게 쓰고 살게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는 부자건 가난한 사람이건 모두가 같다. 요컨대 나서 죽을 때까지 꼭 그렇게만 살 것이냐는 질문을 저 구세군의 자선냄비 종소리가 우리에게 물어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이 주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리며 또 주님의 오심을 고대하는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는 절기이기 때문에 그 같은 물음은 절실해진다

우리에게는 ‘헌금’이라는 훌륭한 의식이 있다. 다른 종교에 비해 우리 기독교가 이 헌금의식이 가장 잘 개발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먹을 것, 입을 것을 주시고 계시다는 매우 초보적 신앙에서부터 하나님을 위하여 재물뿐 아니라 내 몸도 드리겠다는 헌신적인 의미까지 담고 있을 만큼 발전되어 있다. 우리 교회에서 ‘헌금’ 순서를 ‘봉헌’이라 한 것은 ‘헌금’은 돈을 바친다는 기분이 있고 ‘봉헌’이라 하면 돈뿐 아니라 나 자신, 우리의 재능, 시간 등 돈 아닌것도 드린다는 신학이 있기 때문이다.

주정헌금을 작정한다는 것은 이 같은 신학과 신앙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인상이니 예산에 맞추느니 하는 계산보다는 신앙적인 태도가 더 필요하다. 올해에는 예산을 세우지 않은 채 헌금 작정을 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정말 교인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친다는 심정으로 주정헌금을 작정하고 매주일 챙겨 가지고 나오느냐 하는 것과 교회는 그것을 제대로 쓰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다.

여기서 나는 십일조 제도에 대하여 말씀드림으로써 위의 세 가지 아름다운 성전, 자선냄비, 주정헌금 작정서가 던져주는 문제의 해결을 찾i자 한다. 우리 교회에도 십일조를 바치는 분이 간혹 있는 것을 본다. 대단히 고맙고 훌륭한 일이다. 어느 교회나 십일조를 강조하지 않는 교회가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수입의 십분의 일은 교회에 내야 한다는 뜻이다.

십일조에 대한 4가지 대목이 성서에 있다. 첫째로, 십일조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약속이었다.

“땅에서 나는 곡식이든 나무에 열리는 열매이든 땅에서 난 것의 십분의 일은 야훼의 것이니, 야훼께 바칠 거룩한 것이다”(레 27:30).

여기에는 무슨 조건이나 논리가 없다. 이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약속일 뿐이다.

둘째로, 십일조는 하나님과 이웃과 함께 먹고 즐기는 것이었다.

“너희는 해마다 씨를 뿌려 밭에서 거둔 소출 가운데 그 십분의 일을 떼어 두었다가 그 곡식과 술과 기름의 십일조를 소와 양의 맏배와 함께 가져다가 너희 하나님 야훼께서 당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고르신 곳에서 그를 모시고 먹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너는 너희 하나님 야훼를 길이 공경해야 할 줄을 깨닫게 될 것이다 …… 그 돈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사서 먹으며 즐겨라 …… 너희 하나님 야훼를 모시고 너희와 너희 온 집안이 먹으며 즐겨라”(신 14:22-26).

함께 먹고 즐기는 그것으로 하나님 공경을 배우고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참으로 이상한 논리다. 이 때나 저 때나 다 각각 제 일에 몰두하다보면 각박해지고 메말라져 버린다. 사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게 된다. 더불어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게 된다. 그 맛을 잊어버리게 된다. 하나님을 모시고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십일조라는 제도를 만드셨다. 십분의 일을 따로 떼어 놓았다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여서 먹고 즐기라는 것이다. 각박한 너희 사이에 훈풍을 일으켜라, 메말라진 너희 삶에 윤기가 돋게 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공경하며 사는 것이라는 신학이다. 함께 먹고 즐길 줄 모르는 것은 곧 하나님을 공경치 않는 것이라는 말이다. 십일조는 왜 하느냐9 함께 먹고 즐기기 위해서 한다.

셋째로, 십일조는 레위인들을 위하여 바치는 것이었다.

“야훼께서 아론에게 말씀하셨다. [이 아론은 레위족이다.] ‘너는 이 백성이 차지할 땅에서 그들과 함께 나누어 받을 유산이 없다. 그들 가운데서 너에게 돌아 갈 몫은 없다. 다만 내[하나님]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네가 차지할 몫이요 유산이다. 내가 이제 레위 후손에게 줄 것은 이스라엘 가운데서 거둔 십일조 전부이다 …… 레위 후손들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아무 유산도 상속받지 못한다. 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야훼께 떼어 바치는 십일조을 레위인들에게 유산으로 준다’”(민 18:20-24).

말하자면 성전에서 전적으로 일하기 때문에 다른 기업을 가질 수 없고 또 그 대를 잇는 후손에게도 유산을 물려줄 수도 없기 때문에, 즉 성전에서 일하고 가난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바쳐진 십일조를 하나님은 레위인들에게 준다는 것이다.

넷째로, 십일조는 불우한 이웃을 위해 바치는 것이었다.

“너희는 삼 년마다 한 번씩 그 해에 난 소출의 십일조를 다 내놓아 성안에 저장해 두었다가 너희가 사는 성 안에 있는 레위인, 떠돌이, 고아, 과부들이 와서 배불리 먹게 하여라. 그래야 너회가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너희 하나님 야훼께서 복을 내리실 것이다”(신 14:28-29).

이것은 십일조 중 3년째마다 드리는 십일조는 레위인, 떠돌이, 고아, 과부들을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 레위인, 떠돌이, 고아, 과부라는 표상은 가난하다거나 소외되어 있다거나 불우한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근거도 없고 의지도 없고 장래에 대한 아무런 기약도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십일조를 써야 한다. 그래야 너희 하는 일에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 주실 것이라는 것이다.

이상에서 본 대로 우리가 수입한 것의 십일조는 우리의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것, 거룩한 것이라는 말이다. 각박해진 인간 세상에서 더불어 함께 사는 기쁨을 위해서 쓰여져야 하고 또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하여 쓰여져야 하는 것이 십일조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스라엘은 십일조를 내지도 않게 되었고 또 거두어진 십일조는 그렇게 쓰여지지도 않았다.

오늘 구약성서 본문으로 읽은 말라기서는 십일조를 도대체 제대로 내지 않으려 하는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말씀이다. 그런데 이 말씀은 오늘에 와서는 헌금을 많이 하라고 독촉할 때 전거구처럼 쓰여지고 있다. 말라기서는 이스라엘이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복구기에 활동했던 예언자 말라기의 말을 적은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을 재건하는 마당에 반드시 회복시켜 놓아야 할 것들을 강력히 주장했고 그 중의 한 가지가 십일조제의 부활이었다.

“너희는 나를 속이면서도, ‘사람이 하나님을 속이다니요? 어떻게 하나님을 속이겠습니까?’ 하는구나. 소출에서 열의 하나를 바친다고 하면서도, 그대로 바치지 않으니 나를 속이는 것이 아니냐?”(말 3:8).

십일조를 내지 않는 것이다. 낸다, 낸다 하면서 적당히 줄이고 속이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십일조를 걷는 사람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 천벌받을 것들아, 너희 백성은 모두 나를 속이고 있다. 너희는 열의 하나를 바칠 때, 조금도 덜지 말고 성전 곳간에 가져다 넣어 내 집 양식으로 쓰게 하여라”(말 3:9-10).

이것이 원칙이다. 수입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은 원칙이다.

그런데 또 하나의 문제는 그것이 제대로 쓰여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십일조는 성전에 모아진다. 그런데 그것을 본래 의도대로 쓰고 있지 않았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 것이라고 폭탄 선언을 한 것이나 성전에서 제물을 팔거나 돈을 바꾸어 주는 자들을 내쫓고 그 상을 둘러 엎으신 일, 그러면서 성전을 “강도의 소굴”이라고 하신 것은 성전에서 모으는 그 많은 돈을 부당하게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십일조를 받아 그것을 대제사장, 대사제의 가족만이 떵떵거리고 먹게 했다. 그리고 로마의 속국 주제에 성전을 화려하게 꾸몄고 건물 유지에 모든 돈을 소비하고 있었다. 성전을 얼마나 잘 꾸몄던지 기원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군에 의해 파괴된 후 성전 장식에 사용되었던 금이 시리아 시장에 유출되었는데 그 양이 엄청나서 시리아 시장의 금값이 반값이나 내려갔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도대체 헌금, 십일조 관리를 잘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이나 다음 주일까지 1981년도 주정헌금을 작정하여 작정서를 제출키로 되어 있다. 그 액수가 크고 작고간에 성의를 다하여 반드시 작정하고 이행해야 한다. 이에 대하여는 더 이상 설명하거나 장황한 말을 하고 싶지 않다. 이 정도의 일은 특별히 예배 시간에 말씀드리지 않아도 될 만큼 성장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생각해야 할 일은 이제 십일조다. 이 땅에 우리의 도움을 청하는 사람이 많다. 또 주님이 오셔서 도와 주시기를 고대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내년부터 그들을 위해 십일조 헌금을 하기로 작정해 보자. 교회에 내면 교회에서는 십일조만큼은 성전 유지비나 경상비에 쓰지 말고 이 세상이 하나가 되는 일, 우리가 하나가 되는 일에, 가난하고 소외되어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쓰도록 해보자. 꼭 교회에 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자기 형제나 부모는 발가벗겨 놓은 채 교회에 십일조를 내는 것은 십일조 정신에 어긋나는 일이다. 요컨대 교회에 내든 오늘 내 삶의 주변에 있는 레위인, 떠돌이, 고아, 과부들을 직접 돕든 십일조는 반드시 바치도록 하자는 것이다. 내년부터 우리의 가계 예산을 아예 그렇게 해보자.

그러나 너무 큰 무리가 된다면 이제까지 한 푼도 안 하고 지내기도 했는데 이십분의 일, 혹은 삼십분의 일도 좋다. 어쨌든 십일조 제도를 두신 하나님의 의도를 좇아서 꼭 그렇게 해주길 바란다. 또 아직 십일조 따로 주정헌금 따로 내실 수 없는 분은 형편대로 해야 하겠지만 그 헌금의 정신만큼은 십일조 정신을 따라가야 한다. 올해 여러분이 적어 내는 주정헌금 작정서는 여러분의 그 같은 결단이 담겨 있기를 바란다. 사실 주정헌금만 작정하라는 것은 타당한 일이 못된다. 십일조도 적어냄으로 하나님께 약속을 하도록 해야 한다. 교회에 내겠다, 혹은 어떠한 일에 쓰겠다는 등 이렇게 써내야 하는 법이다.

그렇게 살면, 말라기의 말을 계속 인용해 보자.

“그렇게 바치고 나서 내가 하늘 창고의 문을 열고 갚아 주는지 갚아 주지 않는지 두고 보아라”(말 3:10).

글쎄, 물질적인 면에서 꼭 이렇게 될 것인지, 오히려 오죽했으면 이런 말씀을 다 하셨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글쎄, 갚아 주실지 갚아 주시지 않을지 거기에 기대를 두기보다는 그 다음 말씀에 더 역점을 두고 싶다.

“너희가 사는 이 땅은 낙원이 되어 뭇 민족이 너희를 부러워하게 되리라”(말 3:12).

십일조는 내 것이라 하지 않고 서로를 위하여 바쳐서 돕고 도와줄 때 부자거나 가난하거나 거기에 낙원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런 정신, 이런 신앙, 이런 행위가 꽁꽁 얼어붙은 얼음을 녹이는 불씨가 아닐까? 수많은 사람이, 우리 자신이 이 불씨를 고대하고 있다. 스쳐가는 사람은 많은데 홀로 버려져 있는 현대인들, 서로 등을 돌리고 있는 현대인들, 우리의 영혼 속에는 실로 이 낙원에 대한 희구가 있는 것 아닌가? 낙원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천국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인가?

[이사야 40:27-31] 얼음을 녹이는 불씨 – 1980년 12월 14일, 김상근 목사

6월 29, 2026

얼음을 녹이는 불씨

1980년 12월 14일 / 이사야 40장 27-31절

김상근 목사


[회상 노트] - 얼음을 녹이는 불씨

강압정치는 계속되었다. 더욱 폭군화되어 가는 정권은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괴물과도 같았다.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었다. 물론 체육관에 통대(統代)라는 꼭두각시들을 모아 놓고 선거극을 연출하여 스스루 최고권력에 오른 것이다. 교회의 전천후 지도자들이 나서서 제11대 대통령 취임축하 조찬기도회라는 망측스런 일을 저지른다.

최고 권좌에 오른 전두환은 이른바 언론기관을 통폐합한답시고 이리 붙이고 저리 떼는 일을 식은 죽 먹듯 했다. 보안사 지하실이 공장이었다. 거기로 불려간 언론사 사장들은 지체없이 손을 들고야 말았다. 기독교방송은 일반 보도기능을 박탈당한다. 설교하고 찬송가 부르고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 외의 것은 선교방송의 영역을 넘는 것이니 허용치 못하겠다는 것이다.

대학 중에 한국신학대학만이 유난스럽게 반정부활동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교수와 학생 그리고 학교의 설립자인 한국기독교장로회(基長) - 이렇게 삼위가 하나로 뭉쳐 정의투쟁을 하는 학교는 한국신학대학이었을게다. 정부는 한신대 신학과 신입생 모집을 2년간 중지시킨다.

불교에도 손을 댔다. 승려 백수십 명을 연행하였다. 재판에 회부하기도 했고 승적을 박탈하기도 했다. 불교도 대책없이 수모를 감수했다.

정치인에게도 강제의 손을 댔다. 정치규제자를 발표하여 정치를 하지 못하게 했다. 사이비 야당, 관제 야당도 만들었다. 민주한국당이라는 것이 그것이었다.

김대중은 사형이 확정되고 연루당한 민주인사들은 20년에서 2년까지의 징역형을 받았다. 물론 세계가 일어나 김대중의 사형집행을 막았다. 그러나 전두환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나는 국내의 원로들을 찾아다니며 김대중 구출활동을 촉구했다. 그러나 문전박대였다.

참으로 숨이 막히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와중에서 수도교회는 새 교회당을 건축하였다. 당시 1억 1천만 원이라면 결코 작은 액수가 아니었다. 지금 이만한 돈으로 교회당을 짓는 것이 우리의 제1순위 과업일까? 시작한 일이고 중단할 수 없어 끝내고 말았다. 그러니 교인들에게 이것은 시대의 빚이라는 것을 말해 주어야 했다. 이것은 다음의 목표를 위한 수단임을 설교해야 했다.

모두가 지치지 않을 수 없는 터에 어떻게 또 무거운 설교를 한단 말인가? 하나님께서 결코 정의를 무너뜨리지 않으시고 지치고 피곤한 백성에게 무관심하지 않으신다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다. 더구나 지금은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대강절이다. 위로가 있으나 정의세움에서 물러서지 않는 교인들을 나는 열망했던 것이리라.


[말씀을 향한 물음]

우리는 지난 한 주간 동안 주님의 분부하심과 세상의 현실 사이에서 힘들게 살아왔다. 밝지만은 않은 세상의 여러 조건 속에서 살아왔다. 이렇게 힘들어도 어디 한 곳 우리에게 힘을 일으켜 주는 곳이 없는 것 같다. 우리의 하나님조차 우리를 돌아보시지 않는 것 아닌가 하는 회의가 생기게 된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이 대강절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봐주시고 계시다는 신앙이 우리에게 뜨겁게 생동하고 있는가?


[슬라이드]

1980년의 짙은 어둠, 그리고 대강절의 빛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이 시기, 과연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신다는 신앙이 생동하고 있는가?

숨이 막히는 전방위적 억압 : 우리는 모두가 포로처럼 살고 있다.

위로가 필요하지만, 결코 정의 세움에서 물러서지 않는 신앙을 열망하다. 하나님께서 결코 정의를 무너뜨리지 않으신다는 묵직한 메시지

오랜 억압은 단순히 육체를 구속하는 것을 넘어, 민족의 희망과 주체적 정체성을 소멸시킨다.

막다른 골목에서 터져 나오는 인간 내면의 근원적 탄식 : 우리의 하나님조차 우리를 외면하시는가?

야곱아, 네가 어찌 이런 말을 하느냐?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 이런 주장을 펴느냐?

인간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이다. 지친 인간의 현실은 피곤을 모르시는 하나님의 속성과 만날 때 회복의 실마리를 찾는다.

은총의 역학

1980년의 중력 : 억압, 혼미, 좌절

의심을 멈추고 앙망(仰望)을 시작하라

은총에서 사명으로 : 위로받은 자가 세상을 녹이는 불씨가 된다.

얼음을 녹이는 불씨가 되자

시대를 초월하는 불씨, 오늘 우리의 막다른 골목에서

[설교 전문]

우리는 지금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시기를 고대하는 대강절을 보내고 있다. 먼저 우리는 주님을 과연 기다리고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매년처럼 맞는 성탄절이고 매년처럼 맞는 대강절이기 때문에 특별한 감회나 기대없이 이 기간을 보내기 쉽다. 하지만 우리 자신을 깬 정신으로 들여다 본다면 여기에 주님께서 와 주셔야 하겠다. 아니, 주님을 모셔야만 하겠다는 절실함이 우러나오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우리는 결코 연중 행사, 교회력에 의하여 대강절을 보낸다는 정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오늘은 또 전국 교회가 인권주일로 지키고 있다. 예년 같으면 지방별로 인권연합예배를 드릴 텐데 올해에는 설교 원고를 미리 제출하라는 등 당국과 협의가 안 되어 연합예배는 한 곳에서도 이루어지지 못하고 각 교회에서 드리게 되었다. 인권 예배가 필요한 상황이 우리의 상황이다. 문제가 쉽게 풀리지 않고 계속 꼬여만 갈 때 그 말만 들어도 지겨운 것처럼 여러분도 이제는 인권이라는 말만 들어도 지겹게 느껴질지 모르겠다.

오늘 말씀은 지난 주일에 연결되는 말씀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이라 하면서도 갖은 수모와 고난을 다 겪어 왔다. 급기야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매를 맞고 이방 민족의 포로가 되어 제 나라에서 끌려나오게까지 되었다. 하나님의 선민의 꼴이 아니다. 부끄럽고 창피스러운 것을 따질 만큼 여유가 없다. 도대체 생존에 위협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47년간이나 포로로서 바빌론에서 살아오고 있다. 47년이라는 이 길고 긴 세월이 그들에게서 모든 희망을 빼앗아 가버렸을지 모르겠다.

우리는 36년 동안 제국주의 일본에 식민지가 되어 지내 봤었다. 그 후기에 이르러서는 한 민족으로서 살아 남으려는 의지조차 잃고 말았었다. 제 성(姓)을 갈고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었다는 것은 우리 쪽에서 말한다면 이제 우리는 지쳐서 우리의 성(姓)조차 지킬 힘이 없어졌다는 말이 된다. 우리말조차 점점 없어지고 유식하고 잘난 사람들은 벌써 일본말을 제 나라 말로 사용했다. 이것은 물론 일본의 정책이었지만 처음부터 일본이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다. 김이 다 빠지고 절망해 버리게 되었을 때 들이댄 일본의 정책이었다. 우리는 솔직히 말하여 우리가 독립할 수 있으리라는 그런 기대를 전혀 가지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었다. 36년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은 47년이나, 우리는 이 땅에서 당했는데, 그들은 남의 나라로 끌려가서 당했다. 그렇다면 그들의 좌절과 실망이 어떠했겠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그 좌절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어 보기도 했고 그야말로 매달리기도 했다. 이 민족을 살려 주십사고, 우리의 이 고생을 이겨낼 수 있게 해주십사고, 우리도 어엿한 민족으로 살 수 있게 해주십사고 기도도 했을 것이고 지하운동도 했을 것이다. 저항도 해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앞에 가로놓인 것은 ‘절망의 산맥’뿐이었다. 하나님은 이제 이스라엘 민족 따윈 전혀 돌아보시지 않는 것 같다. 자기들이 믿어 왔던 하나님, 자기들의 신조차 자기들을 돌아 보지 않는다고 판단될 때 그들의 절망은 극에 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야훼께서는 나의 고생길 같은 것은 관심도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내 권리 따위, 알은 체도 않으신다”(사 40:27).

하나님조차 외면하시고 하나님조차 관심을 두시지 않으신다는 이 절망은 그야말로 산맥처럼 이스라엘 민족의 가슴을 막아 놓고 있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 지경에까지 떨어져 버렸었다. 오죽했으면 이런 탄식을 했겠는가? 이렇게 좌절하고 있던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과연 관심도 않으시고 알은 체도 않으시는 것인가? 하나님은 한 예언자를 보내셔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야곱아, 네가 어찌 이런 말을 하느냐?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 이런 주장을 펴느냐?”(사 40:27).

말하자면 네가 어찌해서 야훼께서 관심도 하지 않으신다, 알은 체도 않으신다는 말을 하느냐는 것이다. 이것이 이스라엘 민족, 포로로 잡혀 있던 이스라엘 민족, 좌절과 절망 속에 있던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이었다. 이 말씀으로 절망의 산맥에 희망의 터널이 뚫리게 된 것이다.

나는 이스라엘 민족의 이 절망 속에서 여러분을 발견하게 된다. 생기있게, 정의롭게 살아날 수 있는 희망을 거의 갖기가 어렵게 되었다는 이 절망이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조선 시대는 그만두고라도 일본 제국주의의 저 뼈아픈 압제에서 36년을 보내고 해방이 되었으나 해방 후 36년간도 독재와 인권 탄압에 시달릴 대로 시달렸다. 무언가 반짝 빛이 비치는 것 같더니 끝내 어둠이 1980년을 온통 덮어버리고 만 것 같다. 기어코 우리의 입에서도 저 이스라엘 민족의 탄식이 새어나오게 되었다. 야훼께서는 우리의 고생길 같은 것은 관심도 하지 않으시는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권리 따위, 알은 체도 않으시는구나 …… 우리는 끝내 불쌍한 민족이구나.

우리의 마음은 무거워 있다. 온 천지가 꽁꽁 얼어붙은 이 겨울에는 더욱 무겁다. 과연 이 민족을 하나님은 외면하시는 것일까? 그러지 않고서야 이처럼 고생에 고생을 거듭할 수 있겠으며 혼미에 혼미를 거듭할 수 있겠는가? 사회적 혼란의 악순환, 경색된 사회 속에서 우리는 모두가 포로처럼 살고 있다.

나는 여러분이 오늘 저 예언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들려 주셨던 말씀을 듣기 바란다. 절망의 산맥을 뚫고 터널을 지나가기를 바란다. 그래서 절망 속에서 다시 희망을 갖게 되기를 바란다. 야곱아, 네가 어찌 이런 말을 하느냐? 너희 절망 속에 있는 내 사랑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아, 너희들이 어찌 그런 주장을 펴느냐? 라는 이 말씀을 듣게 되기를 바란다. 이 신앙은 얼어붙은 이 민족을 녹이는 불씨가 될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는 이 불씨가 필요하다. 누가 걱정하면, 누가 좌절하면 어찌 그런 말을 하느냐고, 어찌 그런 주장을 펴느냐고, 신앙을 갖자고 격려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이 같은 절망의 경험은 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시편에 그러한 절망의 기도가 많다.

“나의 영혼이 괴로움에 휩싸였고 이 목숨은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습니다. 땅 속에 묻힌 것과 다름없이 되었사오니 다 끝난 이 몸이옵니다. 살해되어 무덤에 묻힌 자와 같이 당신 기억에서 영영 사라진 자와 같이 당신 손길이 끊어진 자와도 같이 이 몸은 죽은 자들 가운데 던져졌사옵니다”(시 88:3-5).

이 시인이 겪은 절망도 그 질에 있어서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가 있었던 이스라엘 민족의 절망과 같다. 그의 영혼은 괴로움으로 온통 싸여 있고 목숨은 이제 마치 죽음의 문턱에 와버린 것 같은 절망을 저는 느끼고 있다. 더 나아가 땅 속에 묻혀버린 것 같아 모든 것이 끝나버린 허탈 속에 빠진 상태다.

우리는 우리의 개인 생활에서도 이러한 절망의 경험을 하게 된다. 경제적으로 도저히 솟아날 가망이 없는 막다른 골목에 떨어졌을 때 그 같은 절망 속에 빠진다. 병고와 싸우고 싸워도 전혀 가능성을 찾지 못할 때 우리는 저 시인과 같이 되어버린다. 도덕적으로 새로워지고 싶지만, 생활을 다시 시작하고 싶지만 도무지 그렇게 되지 않는 경험 속에 있을 때 우리는 저 시인과 같은 심정에 있게 된다. 한 고비가 넘어가는가 하면 또 더 큰 고비가 길목을 지키고 나를 삼키려 한다. 더 힘이 없다.

“나의 영혼이 괴로움에 휩싸였고 이 목숨은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습니다 …… 살해되어 무덤에 묻힌 자와 같이, 당신 기억에서 영영 사라진 자와 같이, 당신 손길이 끊어진 자와도 같이, 이 몸은 죽은 자들 가운데 던져졌사옵니다.”

우리가 이렇게 읊조리고 있다면 우리는 탄식을 하고 있던 저 이스라엘 민족과 같은 형편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때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야곱아, 네가 어찌 그런 말을 하느냐?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 이런 주장을 펴고 있느냐? 내가 어째서 너를 관심하지 않겠으며 내가 어째서 너를 알은 체도 않겠느냐’ 라고 말씀하신다. 이 하나님은 우리 앞에 가로놓인 저 엄청난 절망의 산맥에 한 터널을 뚫으시고 계신 것이다. 이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으로 응답하고 격려와 용기를 얻으시기 바란다.

여러분이 지금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가? 좌절 속에 있는가? 가로지른 절망 앞에 있는가? 포로처럼 붙잡혀 있는가? 어느 한 구석 솟아날 수 있는 구멍조차 보이지 않는가? 여러분의 인권이 근원적으로 억압되어 있는가? 이 말을 듣고 있던 이스라엘 민족도 그 당장은 바빌론 땅에 있었다. 그 당장은 포로로 있었다. 그들은 아직도 절망의 한가운데 여전히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언자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을 이어 나가신다.

“너희는 모르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야훼께서는 영원하신 하나님, 땅의 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사 40:28).

우리의 하나님이 어떤 신이시라는 것을 모르고 있느냐는 말이다. 그 분에 대하여 들은 바가 없느냐는 것이다. 우리의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이 하나님이 우리를 관심하시고 계시다. 이 하나님이 여러분을 기억하시고 계시다.

그 하나님은 또 어떤 신이시냐? “힘이 솟구쳐 피곤을 모르시고 슬기가 무궁하신 분”이시라고 말한다. 세상에 그 어떤 힘이라도 이 하나님을 대항할 수 없다. 세상의 어떤 간교한 꾀도 우리 하나님을 이길 수가 없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힘이 있으시고 슬기가 무궁하신 그 하나님은 절망 속에 있는 사람들을 외면하시고 관심도 않으시는 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하나님은 “힘이 빠진 사람에게 힘을 주시고 기진한 사람에게 기력을 주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힘이 빠졌는가? 기진하게 되었는가? 하나님을 우러러 보라. 하나님을 믿으라. 힘을 주실 것이다. 기력을 주실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 현실은 30절처럼 청년들도 힘이 빠져 허덕이고 장정들도 비틀거릴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야훼를 믿고 바라는 사람은 새 힘이 솟아 나리라. 날개쳐 솟아 오르는 독수리처럼”(31절) 새 힘이 솟아 나리라. 저를 믿고 바라면 “아무리 뛰어도 고단하지 아니하고 아무리 걸어도 지치지 아니하리라.”

이제 우리는 “야훼께서는 나의 고생길 같은 것은 관심도 하지 않으신다”는 말을 더 이상 하지 말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권리 따위 알은 체도 않으신다는 말을 더 이상 하지 말자. 하나님은 무엇하시느냐는 푸념을 더 이상 하지 말자.

지금 우리가 할 한 가지 신앙적 결단이 있다면 이 절망의 산맥 앞에서 야훼를 믿고 바라는 것이다. 저를 쳐다보는 것이다. 힘이 빠진 사람에게 힘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바라자. 기진한 사람에게 기력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바라자. 절망의 산맥을 뚫어 희망으로 이어지는 터널을 놓으시는 하나님을 믿고 바라자. 그리고 나가서 우리가 얼어붙은 이 땅을, 얼어붙은 가슴들을, 얼어붙은 이 세상을 녹이는 불씨가 되자.

우리의 주님은 이 1980년의 세모에 특히 여기 앉은 여러분에게 오시고자 하신다. 여러분을 절망에서 구하고 얼음을 녹이는 불씨로 세상에 내보내시고자 여러분에게 오시고자 하신다. 이 대강절에 저를 맞아들이자. 기쁨으로, 희망으로 저를 맞아들이자.

한국기독교연합회 제12회 총회 총대제위께 고함

한국기독교연합회 제12회 총회 총대제위께 고함 이 문서는 한국기독교연합회(N.C.C) 제12회 총회 당시 기독교장로회(기장) 대표들이 총대들에게 전하는 공식적인 입장을 담고 있다. 기장 측은 예수교장로회(예장)와의 분열 이후 회원권 행사 과정에서 겪은...